디에고 데 알마그로: 가난한 땅을 떠난 게 아니었다
“알마그로는 칠레가 가난해서 돌아왔다.” 16세기 콘키스타도르 디에고 데 알마그로(Diego de Almagro, 1475~1538)의 1537년 회군은 보통 이 한 줄로 정리된다. 영문 위키든 한글 위키든, 대중 역사 채널이든 학교 교과서든 거의 같다.
문제는 이 한 줄이 너무 깔끔하다는 점이다. 1535년 7월 쿠스코를 떠나 안데스 산맥과 아타카마 사막을 가로지른 약 20개월, 동행한 스페인 병사 500명, 흑인 노예 100여 명, 동원된 페루 원주민 1만 명 이상. 그 거대한 사업이 “여기는 가난한 땅이다” 한 마디로 끝났다고 보기에는 회군 직후의 행보가 어색하다. 코피아포 이야기는 따로 정리했고(코피아포: 항구 없는 광산 도시의 3,000년), 거기서는 알마그로가 그 도시에 도달한 1536년 한 장면만 다뤘다. 이번에는 그가 왜 떠났는지를 따라가본다.
그날 밤의 쿠데타
1537년 4월 8일, 알마그로 부대가 쿠스코에 진입한다. 그리고 그날 밤, 쿠스코에 머물던 에르난도 피사로(Hernando Pizarro,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이자 도시 책임자)와 곤살로 피사로를 동시에 체포해 투옥한다. 페드로 피사로의 《Relación del descubrimiento y conquista de los reinos del Perú》(1571년 완성, 1844년 첫 인쇄)와 시에사 데 레온의 《Guerra de las Salinas》(1553년경 집필)가 같은 시점으로 기록한다.
행보가 너무 빠르다. 추위·사막·마푸체(Mapuche, 칠레 중남부 원주민)의 저항을 견디며 20개월을 보낸 부대가 도착 당일 밤에 권력 쿠데타로 직행했다는 건 패잔병의 행동이 아니다. 휴식과 재정비를 할 타이밍에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회군 결정 단계에서 이미 쿠스코 권력 장악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시기 쿠스코는 권력의 공백기였다. 1536년 4월부터 망코 잉카(Manco Inca)의 봉기로 약 10개월간 잉카 군대에 포위되어 있다가 1537년 봄 풀린 시점이 알마그로 도착과 거의 겹친다. 영국 역사가 존 헤밍(John Hemming)의 《The Conquest of the Incas》(1970)는 이 시간적 일치를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적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통설이 흔들린다. “알마그로는 가난한 칠레가 싫어서 돌아왔다”보다 “알마그로는 페루 권력 게임으로 돌아왔다”가 그의 행보에 더 잘 맞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왜 16세기 역사가들은 그 통설을 적었나.
다섯 명의 역사가, 다섯 개의 동기
알마그로 칠레 원정을 다룬 16-17세기 1차 사료 다섯을 비교해보면, “가난한 땅” 서사는 역사가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강도가 크게 다르다.
가장 통설에 가까운 인물은 알론소 데 곤고라 마르몰레호(Alonso de Góngora Marmolejo)다. 그의 《Historia de todas las cosas que han acaecido en el Reino de Chile y de los que lo han gobernado》(1575년 원고 완성, 1850년 첫 인쇄)는 알마그로의 회군을 짧고 단정적으로 적었다.
“표층에 페루처럼 금이나 은이 나타나지 않았다.” (“encima de la tierra no había oro ni plata como en el Pirú.”)
이 역사가의 입장은 명확하다. 그는 1549년경 칠레에 도착해 페드로 데 발디비아의 칠레 정복 초기 부대에 직접 참여한 군인이었다. 작품 자체가 발디비아 정복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변호의 성격이고, 변호 논리의 한 축이 “알마그로가 잘못 본 땅을 발디비아가 옳게 보았다”는 서사다. 알마그로를 깎으면 그만큼 발디비아가 올라간다.
잉카 혼혈 역사가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Inca Garcilaso de la Vega)는 정반대다. 《Historia general del Perú》(1617)의 제2권 21장 제목 자체가 단서다. “Nuevas pretensiones prohíben la conquista de Chili”(새로운 청구권이 칠레 정복을 가로막다). 본문은 회군의 동기를 환경적 곤란(추위와 눈)과 표층 광물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 쿠스코 카피툴라시온(왕실 관할권 결정) 도착과 망코 잉카 봉기 소식이라는 외부 정치 변수와 함께 풀어서 적었다. “가난한 땅” 한 줄로 회군 이유를 정리하지 않는다.
페드로 시에사 데 레온(Pedro Cieza de León), 페드로 피사로,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Francisco López de Gómara)는 친피사로 또는 그 비판자 쪽이다. 이쪽 역사가들은 오히려 “가난한 땅” 서사를 약하게 다룬다. 시에사는 회군을 “기대한 부를 못 찾은 실패담”의 틀로 정리하면서도 망코 봉기와 쿠스코 카피툴라시온을 회군 이유로 같이 적었다. 페드로 피사로는 회군의 본질을 “에르난도 피사로의 알마그로 모욕”과 “쿠스코 권력 다툼”으로 적었고, 알마그로의 부하들이 의도적으로 유포한 “피사로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도 그가 직접 기록했다. 고마라는 칠레 원정 자체를 매우 짧게 다루며 “고난·기아·추위”라는 환경 요인에 무게를 두었고, “가난한 땅”이라는 말 자체가 본문에 없다.
요컨대 “가난한 땅”이라는 단일 서사가 가장 강하게 적힌 사료는 친발디비아 역사가 한 명의 1575년 원고였다. 그 원고가 1850년에 인쇄되어 19세기 후반 칠레 정복사 학계의 표준 텍스트로 자리 잡으면서 통설이 굳어졌다.
알마그로가 본 칠레는 정말 가난했나
이 질문은 의외로 답하기 어렵다. 16세기 스페인 정도의 문명 수준을 갖춘 사람의 눈에 칠레가 “부유”하게 보일 가능성 자체를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칠레의 진짜 광물 자원은 19세기 이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차냐르시요(Chañarcillo) 은광은 1832년 5월 16일 후안 고도이라는 나무꾼이 노출 광맥을 우연히 발견한 후에야 채굴이 시작됐다. 알마그로 회군으로부터 295년 뒤다. 추키카마타(Chuquicamata) 동광은 1899년에 본격 탐사가 시작됐고, 1915년 황산 침출(heap leaching) 기술이 들어온 뒤에야 산업화에 들어갔다.
알마그로가 추키카마타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점은 짚어둘 만하다. 1536년 알마그로 부대가 그 지역을 통과할 때 원주민들에게서 동(銅)으로 만든 말 편자(copper horseshoes)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알마그로는 칠레 북부에 동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만 16세기 스페인은 동 채굴에 경제적 인센티브가 거의 없었고(은이 우선이었다), 추키카마타 같은 저품위 황화동을 처리할 기술도 1915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알마그로가 그 광맥을 알았다 해도 처리할 방법이 없었으니 경제적으로 큰 의미를 두기 어려웠다.
은 제련 기술도 마찬가지다. 1554년 멕시코 파추카(Pachuca)에서 바르톨로메 데 메디나(Bartolomé de Medina)가 발명한 수은 아말감법(파티오 공정)이 저품위 광석에서 은을 추출하는 길을 열었지만, 알마그로 회군(1537) 시점에는 이 기술 자체가 없었다. 17년 뒤에야 발명될 기술이었다.
그렇다면 알마그로가 발견했어야 할 자원은 따로 무엇이었을까. 답은 금이었다. 1545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카를 5세에게 보낸 9월 4일자 서한은 라 세레나에서 발신됐고, 그 내용은 “이 땅 전체가 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las minas riquísimas de oro, y toda la tierra está llena dello”)는 호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발디비아가 자랑한 그 금은 모두 표층 사금(placer gold)이었다. 잉카가 이미 채굴해 둔 작은 갱(mazamorras)에서 캐낸 것이었고, 알마그로 시점에도 기술적으로는 캘 수 있는 자원이었다.
그러면 왜 알마그로는 그 사금을 못 활용했고 발디비아는 활용했나. 답은 같은 1550년 10월 15일 서한에 있다. 발디비아는 자신의 광산 노동력을 정확히 명시했다.
“우리 휘하의 야나코나(yanacona) 노동자와 원주민 여성들을 광산에 투입하느라 애썼습니다. 약 500명 정도 됩니다.” (“trabajé de echar a las minas las anaconcillas e indias de nuestro servicio… serían hasta quinientas pecezuelas.”)
핵심 노동력이 칠레 마푸체가 아니라 페루에서 데려온 야나코나였다. 마푸체는 안데스 미타(mita) 강제노역 전통이 없어 스페인 부역을 격렬히 거부했다(이게 곧 아라우코 전쟁의 근원이 된다). 발디비아는 마푸체 노동력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페루에서 수입해 우회했다.
알마그로는 이 페루 노동력을 데려오지 못했다. 그가 동원한 1만 명 이상의 안데스 보조병들은 회군 시점에 대부분 사망했거나 흩어진 상태였다. 종자와 가축, 번식용 암말도 충분히 가져오지 않았다. 알마그로가 본 “가난한 땅”은 칠레에 자원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원을 활용할 인프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말에 더 가깝다. 발디비아가 5년 뒤 같은 땅에서 성공한 차이도 광물 발견이 아니라 페루 노동력 수입과 영구 정착 설계에 있었다.
그리고 발디비아 본인이 알마그로를 두고 한 비판은 광물 평가 오류가 아니었다. 그는 1545년 서한에서 알마그로가 칠레를 “흑사병 피하듯” 떠나 도시 전체를 악평에 빠뜨렸다고 적었다.
“[알마그로가] 이 땅을 버렸기에 너무도 악평이 자자해져서, 사람들은 흑사병을 피하듯 이 땅을 피했습니다.” (“como la desamparó, quedado tan mal infamada, que como de la pestilencia huían della.”)
비판의 무게중심은 “알마그로의 광물 평가가 틀렸다”가 아니라 “알마그로가 도중에 포기했다”였다. 발디비아조차 알마그로의 광물 평가 자체는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돈이 떨어진 합자 사업
가장 도발적인 재해석은 칠레 사학자 롤란도 메야페(Rolando Mellafe)의 1959년 작 《La introducción de la esclavitud negra en Chile》에서 나온다. 그는 알마그로 원정을 “가난한 땅 탐험”이 아니라 Empresa del Levante(파나마 정복 합자 사업)의 논리적 연장으로 보았다.
메야페가 주목한 사실은 알마그로 원정대의 자산 구성이다. 동행 흑인 노예 약 150명, 말, 무기, 보급품. 이것들은 단순한 원정 장비가 아니라 되팔아 수익을 낼 자산이었다. 알마그로는 페루 정복으로 거부가 된 직후였고, 그 자본을 칠레에서 회수·증식할 계획이었다. 칠레가 풍요로운 땅으로 드러나면 노예와 말을 유리하게 되팔려고 가져간 자산이라는 게 메야페의 정리다.
문제는 코르디예라 횡단에서 자산이 증발했다는 점이다. 노예 150명 중 다수가 사망했고, 야나코나 보조병 3,000명도 안데스에서 죽었다. 메야페의 평가는 짧지만 분명하다.
“칠레로 흑인 노예를 데려간 자들은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 코르디예라 횡단 중 다수가 죽었고 원정은 경제적으로 실패였다.” (“Los que trajeron negros a Chile hicieron mal negocio, pues murieron en gran cantidad al cruzar la cordillera y económicamente la expedición fue un fracaso.” Mellafe 1959, p. 44)
회군 시점에 알마그로가 부하들의 15만 페소 차용증서를 직접 찢었다는 일화도 메야페가 1차 사료에서 정리했다. 채무 인수를 포기하는 카리스마적 대응이었다. 합자 사업이 망했다는 사실을 알마그로 본인이 그 행동으로 인정한 셈이다.
메야페는 통설을 다룬 칠레 사학자 세 명(Amunátegui, Villalobos, De Ramón)을 명시적으로 비판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칠레 발견의 진짜 성격을 페루·파나마 정복 사업의 흐름 안에서 평가하지 못했다.” 그의 결론은 단순하다. 알마그로는 가난한 땅에 실망해서 떠난 게 아니라, 합자 사업이 자산 소진으로 파산해서 떠났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탤 수 있다. 칠레 에스노히스토리 학자 에두아르도 테예스 루가로(Eduardo Téllez Lúgaro)의 1990년 논문은 “가난한 땅”이라는 평가가 어디서 온 정보인지를 추적했다. 알마그로는 마포초 강 너머를 직접 정찰하지 않았고, 그 지역 정보를 (1) 아콘카과 지역에 주둔하던 잉카 식민자 집단, (2) 망코의 형제 파울로 잉카, (3) 원주민과 동화된 스페인인(인디아니사도) 칼보 데 바리엔토스에게서 받았다.
그 정보의 핵심이 바로 “15-20개 마을, 각 10가구의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었다(Téllez 1990, p. 70, Oviedo, Historia General XVII: 325 인용). “가난한 땅” 평가는 알마그로 본인의 관찰이 아니라 잉카 정보망의 평가가 스페인 사료에 그대로 옮겨 적힌 결과였다. 게다가 그 평가는 잉카 황제 후아이나 카팍(Huayna Capac) 사후 10년간 잉카가 칠레 남부에서 후퇴하고 프로마우카에스(promaucaes) 원주민이 자치를 회복하던 정치적 변동을 반영한 보고였다. 발디비아가 5년 뒤 같은 지역에서 격렬한 저항을 만났다는 사실이 잉카가 전한 “약체” 묘사가 부분적이었음을 사후에 보여준다.
‘가난한 땅’이라는 말의 정체
다섯 가지를 한자리에 놓고 본다. “알마그로가 칠레가 가난해서 돌아왔다”는 한 문장은 사실 다섯 가지 요인의 합작이다.
첫째, 친발디비아 역사가 한 명이 1575년에 단정적으로 적은 평가가 1850년에 인쇄되어 통설로 굳었다. 둘째, 알마그로가 본 칠레는 16세기 스페인 기술로 부유하게 보일 가능성 자체가 거의 0이었다. 셋째, 그가 활용할 수 있었던 자원(표층 사금, 농업, 인구)도 페루 노동력과 종자·가축이라는 인프라 없이는 무용지물이었다. 넷째, 원정 합자 사업 자체가 자산 소진으로 파산한 상태였다. 다섯째, “가난한 땅” 정보 자체가 알마그로의 관찰이 아니라 잉카 식민자들이 전해준 부정확한 보고였다.
이 다섯 가지 중 어느 것도 알마그로의 회군 동기가 아니다. 진짜 동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1537년 봄, 페루는 망코 잉카 봉기 1년 뒤로 권력 공백 상태였다. 쿠스코는 4월 들어 포위가 풀리면서 일시적 무주공산이 되었다. 알마그로의 칠레 원정 자체가 페루의 피사로·알마그로 권력 갈등을 외부 영토로 풀어내려는 시도였다는 게 미국 역사가 제임스 록하트(James Lockhart)의 사회사적 분석이고, 메야페가 짚었듯 합자 자산이 소진된 알마그로에게는 칠레에 더 머무를 재정 여력이 없었다. 모든 선이 한 방향으로 모인다. 페루로 돌아가서 쿠스코를 잡는 것.
그는 정확히 그렇게 했다. 도착 당일 밤 피사로 형제를 체포했고, 1538년 4월 26일 라스 살리나스 전투에서 패배해 같은 해 7월 8일 쿠스코에서 처형됐다.
“가난한 땅이라 떠났다”는 통설은 결과를 동기로 거꾸로 읽은 사후 합리화다. 알마그로가 떠난 직접 이유는 칠레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페루가 비어 있어서였고, 후세 역사가들이 그 사실을 표현하는 데 동원한 단어가 “가난한 땅”이었을 뿐이다. 알마그로의 칠레는 16세기 친발디비아 정복자의 변명, 페루 권력 게임 패배자에 대한 사후 평가, 19세기 인쇄 권력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코피아포가 항구 도시가 아니었듯이, 알마그로의 칠레도 가난한 땅이 아니었다. 두 통설은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주요 참고문헌
- John Hemming, The Conquest of the Incas (London: Macmillan, 1970)
- James Lockhart, Spanish Peru, 1532–1560: A Social History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8, 2nd ed. 1994)
- James Lockhart, The Men of Cajamarca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72)
- Rolando Mellafe, La introducción de la esclavitud negra en Chile: tráfico y rutas (Santiago: Universidad de Chile, 1959)
- Eduardo Téllez Lúgaro, “De incas, picones y promaucaes: el derrumbe de la ‘frontera salvaje’ en el confín austral del Collasuyo,” Cuadernos de Historia 10 (1990)
- Pedro de Valdivia, Cartas (Memoria Chilena, Biblioteca Nacional de Chile)
- Pedro Pizarro, Relación del descubrimiento y conquista de los reinos del Perú (1571; 1844 첫 인쇄)
- Alonso de Góngora Marmolejo, Historia de todas las cosas que han acaecido en el Reino de Chile (1575 원고; 1850 첫 인쇄)
- Inca Garcilaso de la Vega, Historia general del Perú (Córdoba, 1617)
- Pedro Cieza de León, Crónica del Perú / Guerra de las Salinas (1553)
- Francisco López de Gómara, Historia general de las Indias (Zaragoza, 1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