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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1542–1600) — 노부나가의 수군 대장, 아들과 적이 된 마지막 가을 시마의 작은 해상 세력에서 오다·도요토미 정권의 바다를 맡은 장수가 됐고, 세키가하라 때 아들과 싸운 뒤 도시지마에서 자결했다. 철갑선, 임진왜란 수군 총대장, 부자 양분 전략 같은 이야기가 어느 기록에서 나왔는지 신초코키·히데요시 슈인조·이순신 장계로 확인했다.
-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 1525?–1586) — 노부나가의 숙장, 혼노지 뒤 2년의 몰락 출신이 불분명한 오다 가신이 이세를 맡고 다케다를 끝낸 뒤 간토로 갔다가, 혼노지의 변 이후 간나가와·나가시마·가니에에서 차례로 무너졌다. 신초코키와 동시대 일기·서장으로 그의 실제 역할을 따라가고, '간토칸레이'·명물 다기·'진격도 다키가와' 같은 일화가 언제 생겼는지 확인했다.
-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8–1618) — 번주가 되지 않은 사가번의 시조 류조지 가문의 2인자가 주군이 죽은 뒤 23년 동안 실권만 쥔 채 가독은 받지 않은 과정을 기청문·슈인조·서장으로 따라가고, 이마야마 야습과 행엽 카몬, 조선 함흥 주둔과 끌려간 사람들, 고양이 소동 괴담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정리했다.
- 가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 — 시즈가타케 칠본창⑦ 칠본창 가운데 서군에 가담했다가 혼자 영지를 잃은 사람. 시즈가타케 3,000석 칸조, 오미 검지 부교와 조선 점령지 행정, 문서로는 1만 석인 1595년 가증, 후시미성 공격과 개역, 빗추에 남은 영지 기록, 네 집안으로 흩어져 전해진 히데요시 문서까지 사본과 지리지로 정리했다.
-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1559–1628) — 시즈가타케 칠본창⑥ 칠본창 가운데 혼자 다이묘가 되지 못한 사람. 3,000석 칸조와 열 달 뒤 다른 가신에게 넘어간 480석, 5,000석에서 멈춘 1595년, 오사카에 있던 아들을 데려오려 했던 1614년 편지, 그가 허가한 타와라모토의 사원 마을과 280년 뒤 다이묘가 된 가문까지 문서와 일기로 정리했다.
-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且元, 1556–1615) — 시즈가타케 칠본창⑤ 칠본창의 한 사람이자 도요토미 가문의 살림을 맡은 가로. 히데요리 후견인 이야기, 호코지 종명 사건 때 슨푸에서 이에야스를 끝내 만나지 못한 경위, 스스로 내놓은 세 가지 안, 오사카성 퇴거와 히데요리 사후 20일 만의 죽음까지 동시대 일기·문서로 확인되는 것과 후대 일화를 나눠 정리했다.
-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1563–1631) — 시즈가타케 칠본창④ 칠본창의 한 사람이자 도요토미 수군을 이끈 장수, 마츠야마성을 세운 영주. 시즈가타케 칸조, 칠천량해전의 공 다툼, 울산·순천 철수 연판 거부, 아이즈 40만 석과 아들 대의 몰락까지 슈인조와 조선 측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과 후대 일화를 나눠 정리했다.
- 혼간지 켄뇨(本願寺顕如, 1543–1592) — 노부나가와 싸우고도 교단을 남긴 종주 오다 노부나가와 11년을 대립한 혼간지 11대 종주 켄뇨. 1570년 격문과 거병의 실제 경위, 세 번의 강화로 끊겼던 이시야마 합전, 장남 쿄뇨와의 결별을 동시대 사료로 확인하고, 패전 뒤 히데요시 아래서 교단을 교토로 옮겨 다시 세운 만년과 동서 분립까지 정리했다.
- 시즈가타케 전투(1583) — 열 달의 대립, 이틀의 결전, 그리고 일곱 명이 된 아홉 명 1583년 4월 오미 북부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맞붙은 시즈가타케 전투를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사쿠마 모리마사의 철수 명령 위반, 52킬로미터 귀환, 칠본창이 실제로는 아홉 명이었다는 점까지 동시대 사료 『시바타 다이지키』와 대조했다.
-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1530–1587) — 시마즈에 밀려 규슈 패권을 놓친 크리스천 다이묘 오토모 소린은 기독교에 빠진 규슈의 영주로 기억되지만, 사료에 남은 그는 막부 보임으로 북규슈 여러 지역의 슈고와 규슈탄다이가 되어 모리와 20년을 다투고, 명·동남아·포르투갈과 무역을 이어 간 다이묘였다. 니카이쿠즈레, 세례, 기독교 왕국 구상, 미미카와 패전을 사료별로 대조하고,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청한 마지막 해까지 따라간다.
-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1538–1616) — 잇키의 이탈자에서 에도 정권의 실무자로 이에야스의 모신이자 간신이라는 평가가 갈리는 혼다 마사노부. 벗이라는 말과 악역이라는 이미지가 어떤 문헌에서 나왔는지 확인하고, 남은 서장과 연서장으로 다이묘와 막부 사이를 이은 실무자로서의 행적, 두 아들의 엇갈린 운명을 함께 정리했다.
- 만미 센치요(万見仙千代, ?–1578) — 모리 란마루의 라이벌이었다는 미모의 사나이 오다 노부나가의 측근 만미 센치요. 란마루의 전신이자 총애받은 미소년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사료에 남은 그는 1578년 한 해 동안 다회 장소 제공, 전선 감찰, 스모 대회 운영, 아라키 무라시게 힐문까지 맡은 실무자였다. 아리오카성에서 전사하기까지 3년 남짓한 기록을 따라간다.
- 코마키·나가쿠테 전투(1584) —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맞붙은 단 한 번의 전쟁 1584년 3월부터 11월까지 하시바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카츠·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이 벌인 전쟁을 정리했다. 나가쿠테 하루의 승리부터 강화와 오기마루의 양자행까지 다루고, 통설과 사료가 어디서 갈리는지도 함께 짚었다.
- 스에 하루카타(陶晴賢, 1521–1555) — 오우치를 뒤엎고 4년 뒤 이쓰쿠시마에서 진 실권자 오우치 요시타카를 자결로 몰아넣고 오우치 가문을 4년 가까이 실질적으로 이끈 스에 하루카타. 남색 원한설, 서국무쌍의 사무라이다이쇼, 2만 대 4천, 모토나리의 미끼 성은 각각 언제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 따져 보고, 그가 실제로 남긴 문서와 정책을 따라간다.
- 아마고 요시히사(尼子義久, 1540–1610) — 성을 내주고 44년을 더 산 이즈모의 마지막 당주 갓산토다성을 모리 모토나리에게 내준 아마고 가문 마지막 당주. 참언에 속아 충신을 죽인 암군이라는 이미지는 에도 시대 전쟁 이야기책에서 나왔고, 사건 50일 뒤에 쓰인 편지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항복 뒤 23년 유폐와 모리 캬쿠분 생활을 거쳐 가문을 남기기까지 44년을 사료로 따라간다.
-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 1543–1611) — 마츠에성을 세운 히데요시의 초기 가신 나가하마 100석에서 출발해 하마마츠 12만 석, 이즈모 마츠에까지 간 히데요시 초기 가신. '부처 모스케'라는 별칭과 '산추로'의 원형인 '고도시요리'라는 호칭이 호리오 가문의 옛 가신이 쓴 책에서 처음 확인된다는 점을 짚고, 그가 실제로 쌓은 성과 도시, 남긴 가족사를 사료로 정리했다.
- 코즈키성 공방전(上月城の戦い, 1577~1578) — '칠난팔고' 전설에 가려진 재흥군의 최후 오다 노부나가가 아마고 재흥군을 매정하게 버렸다는 통설과, 야마나카 유키모리가 초승달에 '칠난팔고'를 빌었다는 일화의 실체를 사료로 검증한다. '효고 회의'라는 이름의 회의는 사료 어디에도 없고, 칠난팔고 문구는 쇼와 시대 교과서를 통해 정착됐다.
-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 1548–1610) — 도쿠가와 사천왕 ④ 쉰일곱 번 싸워 한 번도 다치지 않았다는 도쿠가와 사천왕. 그 전설과 칭찬 일화가 처음 기록된 시기를 따져보고, 이에야스의 선봉 지휘관이자 교섭 창구, 구와나 번주로서 그가 실제로 남긴 흔적을 함께 정리했다.
- 키즈가와구치 해전(木津川口の戦い, 1576·1578) — '철갑선'의 전설에 감춰진 이야기 오다 노부나가가 '철갑선'으로 모리 수군을 격파했다는 통설은 정작 1차 해전(1576)에서의 참패를 가리고, '철갑'이라는 표현 자체도 전문 기록 한 건에만 의존한다. 두 차례 키즈가와구치 해전을 사료로 재구성한다.
- 다케나카 한베에(竹中半兵衛, 1544–1579) — 요절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 이나바야마성을 16명으로 탈취했다는 미담부터 '오늘의 제갈공명'이라는 별칭까지, 다케나카 한베에를 둘러싼 유명한 이야기는 대부분 그가 죽고도 한참 뒤에 만들어졌다.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그가 이나바야마성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요리키로서 조략에 힘쓰다 서른여섯에 진중에서 죽었다는 것 정도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 — 시즈가타케 칠본창③ 이순신에게 참패하고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을 등졌지만, 승자 측으로 돌아선 네 장수 중 혼자 온전히 살아남은 무장의 실제 궤적을 사료로 되짚었다. 미역을 먹으며 도주했다는 일화, 다쓰노번을 다스렸다는 통설처럼 근거 없이 굳어진 서사들도 함께 정리했다.
-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1575) — 3단 사격 전술의 신화에 감춰진 다케다 최후의 7년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철포 3천 정으로 3단 사격을 구사해 다케다 기마군단을 전멸시켰다는 통설은 사건 후 약 49년 뒤 성립한 통속 군담에서 비롯됐다. 나가시노 전투의 실제 배경과 경과, 그리고 이 패전이 다케다 가문을 7년에 걸쳐 서서히 무너뜨린 과정을 사료로 재구성한다.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1561–1624) — 시즈가타케 칠본창② 통 만드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히데요시의 사촌이 되고, 옛 주가를 등지고 세키가하라 선봉에 서서 최고 영지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성벽 하나를 온전히 허물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잃고 사라진, 무장의 시대에서 관료의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낀 한 인간의 생애를 사료로 되짚는다.
-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1561–1602) — 도쿠가와 사천왕 ② 아버지가 처형당한 뒤 숨어 자란 소년 토라마츠가 어떻게 도쿠가와 사천왕의 붉은 갑주 대장이 됐는가. 은신기·나오토라 논쟁·세키가하라 부상까지, 통설이 어느 사료에서 왔는지 성립 시기별로 층위를 갈라 정리했다.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 1548–1606) — 도쿠가와 사천왕 ③ 격문 한 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격노시켰던 도쿠가와 사천왕. 아네가와부터 세키가하라까지 전장을 누비고 다테바야시 10만 석을 실무로 다스린 이력과, 그를 둘러싼 유명 일화가 실제로 어디까지 사실인지를 함께 담았다.
-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1562–1611) — 시즈가타케 칠본창① 임진왜란 함경도 진격과 두 왕자 포로, 정유재란 울산성 농성으로 조선인의 기억에 침략자로 남은 무장. 그러나 구마모토에서는 치수와 축성의 명군주, 사후에는 세이쇼코라는 수호신으로 추앙받았다. 한 인물을 향한 두 나라의 완전히 다른 기억을 사료로 추적한다.
-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1568–1623) — 세키가하라를 설계한 크리스천 다이묘 인질로 자란 소년이 세키가하라 전투 전야 다이묘들을 회유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천하인으로 만들었다. 크리스천 다이묘로 살다 금교령 이후 배교자로 돌아선 후쿠오카 번조 구로다 나가마사의 생애를 사료로 추적한다.
- 카네가사키 퇴각전: 히데요시 신화 뒤에 가려진 성주 1570년 노부나가의 유일한 패주. 통설은 키노시타 토키치로의 활약을 기린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그 전장에 설 수 있었던 건 10년째 혼자 성을 지켜낸 어느 무명 성주 덕분이었다.
- 후안 폰세 데 레온(1474?–1521) — 젊음의 샘이 아니라 권력을 쫓았다 젊음의 샘을 찾다 죽었다는 통설은 그의 사후 14년 만인 1535년 정적 진영의 연대기 작가가 지어낸 조롱거리였다. 실제로는 원주민을 진압해 총독이 되고, 세습권 소송에 밀려 자리를 잃고, 새 정복지에서 화살에 맞아 쿠바로 실려가 죽은 지극히 현실적인 정복자였다.
-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 1527–1596) — 도쿠가와 사천왕 ① 사에몬노조(左衛門尉)로 불린 도쿠가와 최고참 가신. 인생 전반 32년은 동시대 기록이 없고, 나가시노 기습 발안도 노부야스를 죽게 했다는 죄도 그가 죽고 한참 뒤에 만들어졌다. 사료 층위별로 정리했다.
- 조선 초기 정승 가문은 조선 말기까지 흥했을까 건국공신급 정승 10가문의 후손을 조선 말기까지 추적했다. 완전히 끊긴 집안, 반전에 성공한 집안, 이름까지 숨겨야 했던 집안까지.
- 황진(黃進) 실록 원문 자료집 — 조선왕조실록 관련 사료 전문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에서 황진(1550–1593) 관련 기사만 추려 원문과 함께 정리한 자료집. 동명이인(黃璡 등)은 걸러냈다.
- 황진(黃進, 1550–1593) — 황희 5대손, 진주성서 전사한 맹장 명재상 황희의 5대손으로 태어나 칼을 든 사내. 이치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아, 이듬해 진주성에서 아홉 밤을 버티다 전사했다. 실록이 직접 전하는 그의 마지막 순간.
- 누르바누 술탄(1525?–1583) — 노예 소녀에서 오스만 제국의 태후로 셀림 2세의 하세키에서 무라트 3세의 발리데 술탄으로, 오스만 최초로 두 지위를 모두 거친 누르바누. 레판토 해전 이후 베네치아와의 비밀 외교 채널을 운영하고 위스퀴다르에 오스만 왕실 여성 최대의 건축단지를 남겼지만, 정작 그 자신의 출신은 지금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 타치바나 긴치요(立花誾千代, 1569–1602) — 여성 성주로 불린 도세츠의 딸 "일본사 유일의 여성 성주"로 불리는 긴치요가 1575년 아버지 도세츠에게서 실제로 물려받은 것은 무엇이었는지, 1600년 야나가와 공방의 무용담은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사료로 확인하고, 히고 하라카에서 가문 기록을 태우고 세상을 떠나 신으로 모셔지기까지를 정리했다.
-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国) — 가부키 창시자, 전설과 사료 속 실제 모습 가부키 창시자로 알려진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国). 1603년 교토에서 남장하고 춤췄다는 『토다이키』 기록, 무녀인가 유녀인가 하는 논쟁, 나고야 산자부로와의 전설, 말년에 관한 세 가지 설까지 사료로 확인되는 것과 후대에 덧붙은 이야기를 나눠 정리했다.
-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1507–1582) — 충신과 도살자 뮐베르크에서 황제를 위해 강을 건넌 장군, 브뤼셀에서 충신들의 목을 친 총독, 일흔셋에 포르투갈을 정복한 노장. 같은 사람이다. 충직한 신하와 '플랑드르의 도살자'라는 두 얼굴을 한 몸에 가진 16세기 스페인 최고의 군인.
-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1547–1578) — 레판토 해전 총사령관이 된 황제의 서자 황제 카를 5세의 숨겨진 아들로 태어나 레판토 해전의 영웅이 되었다가, 플랑드르의 정치 수렁에서 31세로 생을 마친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일생.
- 두아르테 바르보사(1480?–1521) — 인도양을 유럽에 알린 마젤란의 처남 포르투갈 인도 상관의 서기이자 말라얄람어 통역이었던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16세기 초 인도양 세계를 기록한 책을 남기고, 마젤란 세계일주에 올랐다가 세부의 연회에서 죽었다.
- 마르가레타 디 파르마(1522–1586) — 황제의 서녀, 네덜란드를 다스리다 카를 5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두 번이나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을 지낸 마르가레타 디 파르마. 명목상 총독이었지만 실제 권한은 마드리드에 있었고, 경고는 무시당했으며, 막으려 한 전쟁은 결국 아들이 수행했다.
- 안 도트리슈(1601–1666) — 루이 14세의 어머니, 『삼총사』가 지운 진짜 얼굴 펠리페 4세의 누나로 태어나 적국 프랑스의 왕비가 되고, 친정과 싸우는 프랑스의 섭정으로 산 안 도트리슈. 1637년 발드그라스 비밀편지 사건부터 1660년 남매 재회까지, 소설이 지운 실제 사료를 따라간다.
-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1540?–1606) — 제노바 영웅의 후계자인가, 레판토의 겁쟁이인가 레판토 해전의 우익을 맡았던 제노바 제독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비겁자라는 낙인과 신중한 명장이라는 재평가 사이에서 400년간 이름이 다시 쓰인 2세대 해군 귀족의 생애.
- 파라켈수스(1493?–1541) — 책을 불태운 떠돌이 괴짜 의사, 독성학의 아버지 '독성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상스 의사 파라켈수스. 갈렌의 책을 모닥불에 던지고 독일어로 강의한 떠돌이였지만, '용량이 독을 만든다'는 그의 가장 유명한 문장은 정작 그가 죽고 23년 뒤에야 인쇄됐다.
- 살리흐 레이스(1488?–1556) — 거의 모든 걸 이뤘지만 마지막 한 끗이 아쉬웠던 사람 해적 부관에서 알제 총독까지 오른 오스만 제독 살리흐 레이스(Salah Rais). 그의 최전성기 임무는 바다가 아니라 모로코 내륙의 육상 정치였다. 1554년 그는 페즈를 점령하고 자기 손으로 한 왕을 왕좌에 앉혔지만, 그 왕은 아홉 달 만에 죽고 도시는 적의 손으로 넘어갔다. 정작 살리흐 자신은 마지막 원정이 출항하기도 전에 페스트로 세상을 떠났다.
- 울루치 알리(1519?–1587) — 레판토에서 혼자 살아 돌아온 배교자 칼라브리아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갤리 노예가 되었다가, 개종 후 오스만 해군 총사령관까지 오른 울루치 알리. 레판토의 패전 속에서 함대를 빼내 '검'이라는 이름을 얻은 한 르네가도의 일생.
- 이코마 치카마사(1526–1603) — 세 천하인을 섬기고 살아남은 무장 미노의 일개 고쿠진에서 사누키 17만 석의 다이묘가 된 이코마 치카마사. 그는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세 천하인을 차례로 섬기며 78세까지 살아남았다. 화려한 무공도, 빼어난 행정 솜씨도 아닌, 시대의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읽어내는 감각이 그를 끝까지 살렸다. 세키가하라에서 그가 아들과 갈라선 이유가 그 감각을 가장 잘 보여준다.
- 바다 위의 성을 지은 가문은 왜 사라졌나: 이코마 소동 이코마 치카마사가 바닷물을 끌어들여 쌓은 다카마쓰성. 그러나 그가 세운 가문은 사누키를 받은 지 반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통째로 사라졌다. 어린 영주, 외가의 후견, 새로 들어온 가신과 대대로 섬겨온 가신의 다툼. 에도 막부 초기에 한 다이묘 가문이 영지를 잃는 과정은 개인의 악행보다 훨씬 구조적인 데가 있었다. 이코마 소동의 전말.
- 미토 고몬의 형이 다스린 성: 다카마쓰의 마쓰다이라 이코마 가문이 떠난 다카마쓰성에 들어온 새 주인은 미토 도쿠가와 가문에서 왔다. 초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시게는 그 유명한 '미토 고몬' 미쓰쿠니의 친형이면서도, 동생에게 종가 자리를 내준 사람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질 뻔한 형과 적자가 된 동생, 그리고 두 집안이 주고받은 자식들. 다카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이 막부의 친번으로 200년을 다스린 이야기.
- 자르쿠(?–1471) — 이미 지도에 있던 섬 마데이라를 '발견'한 남자 1419년 포르투갈은 마데이라를 처음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마데이라는 발견 68년 전 이미 이탈리아 해도에 '나무 섬'이라는 이름으로 그려져 있었다. 발견이 아니라 선점이었던 이야기.
- 트리폰 코로베이니코프 — 가본 적 없는 예루살렘을 묘사한 성지순례기 16세기 후반 모스크바 상인이자 궁정 서기관 트리폰 코로베이니코프. 이반 뇌제가 죽인 아들을 추모하는 자선금을 들고 두 차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예루살렘을 다녀왔고, 그의 이름을 단 순례기는 200년 넘게 성서처럼 베껴 읽혔다. 그러나 그 순례기 상당 부분은 그가 발도 들이지 않은 시나이 산을 묘사한, 한 세대 앞선 다른 여행자의 글을 옮긴 것이었다.
- 크리스티나 닐스도테르 예렌스티에르나(1494?–1559) — 스톡홀름을 지킨 여성 지도자 1520년 남편이 전장에서 죽자, 스웨덴 섭정의 미망인은 수도 스톡홀름을 혼자 지켰다. 그녀가 버틴 시간 동안 한자동맹 함대가 준비됐고, 그 함대가 스웨덴 독립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독립 이후 새 왕조는 그녀를 정치 전면에서 지우려 했다.
- 외레순드 통행세: 상인들이 왕국을 무너뜨린 발트해 관세 전쟁 1428년, 독일 상인 도시 연합이 코펜하겐을 포격했다. 그 뒤에는 통행세 하나가 있었다. 외레순드 해협의 병목이 어떻게 북유럽 패권을 바꿨는지.
-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 — 학살의 도시에서 마카롱을 굽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30년 종교내전 한복판에서 프랑스 궁정에 깐 르네상스 럭셔리 프로젝트. 마카롱부터 폴란드 왕관까지, 그리고 검은 전설의 진실.
-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1514–1577) — 지중해의 숨은 실무자 1565년 말타를 구하고 1564년 페뇽 데 벨레스를 462년째 스페인령으로 만든 16세기 스페인 해군 사령관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사촌 알바 공작의 그늘에 가려진 행정관의 이야기.
- 소포니스바 앙귀솔라(1532?–1625) — 합스부르크 궁정의 여성 화가 1559년 펠리페 2세의 부름을 받고 마드리드 궁정에 '시녀' 신분으로 들어간 르네상스 화가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미켈란젤로의 비공식 멘토십, 왕비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와의 우정, 1624년 반 다이크의 방문, 1734년 알카사르 화재와 1970년대 재발견까지 약 90년 인생을 정리한다.
- 디에고 데 알마그로(1475–1538) — 칠레를 포기했다는 콘키스타도르의 누명 알마그로가 칠레가 가난해서 돌아왔다는 통설은 친발디비아 역사가 곤고라 마르몰레호(1575)의 단정적 평가가 1850년에 인쇄되어 굳은 사후 합리화에 가깝다. 1537년 4월 8일 쿠스코 도착 당일 밤 피사로 형제를 체포한 행보, 1915년까지 채굴 불가능했던 추키카마타 동, 롤란도 메야페(1959)가 짚은 합자 사업의 자산 소진을 함께 읽으면 회군의 진짜 동기는 칠레의 가난이 아니라 페루의 권력 공백이었다.
-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1647–1717) — 52세 여성 곤충학자의 21개월 수리남 탐방기 1699년 52세에 노예제 식민지 수리남으로 떠난 독일 자연학자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21개월 체류, 도판 45번 노예제 캡션, 자발발생설을 깬 그림, 표트르 1세 컬렉션과 사후 200년 평가 굴곡을 정리한다.
- 오크모스 — 발칸 산골 지의류가 Chanel No.5의 베이스가 된 이야기 16세기 발칸 산골에서 채취된 회색 지의류 오크모스(Evernia prunastri)가 그라스 향수 공방을 거쳐 Chanel No.5와 Guerlain Mitsouko의 베이스가 된 경로와, 1990년대 IFRA·EU 규제로 사라진 과정을 정리한다.
-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1571) 완전 정리 — 레판토 해전 오스만 총사령관의 생애와 패배 무에진의 아들에서 카푸단 파샤까지.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전사한 오스만 함대 총사령관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의 생애를, 오스만 1차 사료(셀라니키·무스타파 알리·페체비·카팁 첼레비)와 학계 수정주의 해석을 균형 있게 반영해 총정리한다.
- 안탈리아 역사: 2,200년의 항구도시 로마의 관문이었고, 셀주크의 첫 지중해 항구였으며, 오스만의 교역 거점이었다. 안탈리아 2,200년의 항구 이야기.
- 코피아포: 항구 없는 광산 도시의 3,000년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한가운데, 잉카가 '터키석의 정원'이라 부른 계곡이 있다. 스페인이 왔고, 영국이 왔고, 은이 소멸했다.
- 비앙카 카펠로(1548–1587) — 대공비가 된 사형수 베네치아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열다섯 살 소녀가 어떻게 토스카나 대공비가 됐는지, 그리고 왜 독살 의혹 속에 사라졌는지에 관한 이야기.
- 대항해시대 동남아시아에서 기독교는 왜 실패했는가 불교와 이슬람은 왕을 신성화했고, 기독교는 왕을 교황 아래 두었다. 대항해시대 동남아시아에서 기독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를 왕권 정당성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 쓰가루 타메노부 — 주군을 배신하고 다이묘가 된 남자 난부 가문 가신에서 도요토미 인정 다이묘로. 기습·이중 외교·정략으로 쓰가루를 통일한 타메노부의 생애.
- 마에다 도시이에는 시즈가타케에서 카츠이에를 배신했나 — 1583년 4월의 이탈 재검토 1583년 4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마에다 도시이에는 시바타 카츠이에 진영에서 갑자기 전선을 이탈했다. 사전 내통이었나, 현실적 판단이었나. 『신쵸코키』 동시대 사료와 가가번 어용 편찬, 그리고 가사야 가즈히코·다카야나기 미츠토시 등 최근 학계 평가까지 짚어가며 통설을 사료 수준에서 재검토한다.
- 젊은 마에다 도시이에는 왜 주아미를 베었나 — 1559년 코가이기리 사건 1559년 키요스성에서 21살의 마에다 도시이에가 노부나가의 도보슈 주아미를 베었다. 마츠가 준 코가이 한 점에서 시작된 코가이기리 사건이 어떻게 도시이에에게 2년의 출사정지를 안기고, 노부나가가 그를 어떤 조건으로 다시 받아들였는지 사료에 근거해 정리한다.
- 아체 세람비 메카 완전 정리 — 마르코 폴로부터 오스만 외교까지 13세기 묘비에서 시작해 이스탄불 외교 서한까지, 수마트라 북단 아체가 '세람비 메카(Serambi Mekkah)'라는 이름을 얻은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마르코 폴로·이븐 바투타·오스만 제국의 기록으로 동남아시아 이슬람화의 최전선을 살펴본다.
- 산살바도르와 산도밍고: 같은 해에 세워진 두 요새의 갈라진 운명 (1626–1980) 1626년 스페인이 대만 북부에 세운 두 요새. 한쪽은 1668년 네덜란드가 폭파해 조선소 주차장 아래 묻혔고, 다른 한쪽은 청·영국·호주·미국을 거쳐 1980년 대만으로 돌아왔다. 17세기 이슬라 에르모사의 비대칭 운명.
-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1538–1599) — 가가 100만석의 시조 생애 총망라 파문과 복귀, 창의 마타자로서의 무용, 노부나가·히데요시·이에야스 세 천하인을 모두 섬긴 62년. 가가 100만석의 시조 마에다 도시이에의 전 생애를 사료에 근거해 연표·관직·영지 변화와 함께 총정리한다.
- 이사벨라 데스테(1474–1539) 완전 정리 — 르네상스를 지배한 여자 외교관·수집가·패션 아이콘·통치자. 이사벨라 데스테(1474–1539)가 28,000통의 서신으로 유럽을 움직인 방법을 생애 전반에 걸쳐 정리한다.
- 이사벨라 데스테(1474–1539) — 다빈치도 거절한 그녀의 소묘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화 의뢰를 거절한 배경과 루브르 소묘의 역사적 의미를 당시 서신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 이사벨라 데스테(1474–1539) — 유행을 만든 그녀의 패션 유산 8가지 만토바에서 시작해 파리·런던까지 퍼진 이사벨라 데스테의 패션 유산 8가지. 발초부터 리틀 블랙 드레스의 기원까지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 나사우 함대: 5일 차이로 실패한 네덜란드의 태평양 야망 (1623–1626) 11척의 함선과 1,600명의 병사. 은 수송선을 5일 차이로 놓친 나사우 함대의 태평양 원정은 왜 실패했는가. 17세기 VOC 팽창 전략의 한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왜 서로를 혐오했나 1504년 피렌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공개 석상에서 충돌했다. 두 천재는 왜 서로를 혐오했나.
- 오랑카야(Orang Kaya)란 무엇인가 — 동남아시아 항구의 중개자와 에도 막부 향사 비교 오랑카야는 15~19세기 말레이·인도네시아 해양 왕국의 항구 중개자 계층이다. 에도 향사와 비교해, 위에서 받은 권위와 스스로 쌓은 네트워크의 차이가 어떻게 두 계층의 운명을 갈랐는지 살펴본다.
- 휴 윌로비(?–1554) — 북동항로를 찾아 떠난 1553년의 기록 1553년 영국 탐험가 휴 윌로비는 아시아로 가는 북동항로를 찾아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출항했다. 그의 자필 일지는 9월 18일에 멈췄고, 이듬해 봄 어부들이 배 안에서 64명의 시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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