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능선을 따라 골짜기의 전장을 등지고 진군하는 무사 행렬 — 시즈가타케 이탈, 1583년 4월

마에다 도시이에는 시즈가타케에서 카츠이에를 배신했나 — 1583년 4월의 이탈 재검토

1583년(덴쇼 11년) 4월 21일 오전, 시즈가타케 전장의 한복판에서 마에다 도시이에가 자기 부대를 이끌고 돌연 전선을 떠났다. 그가 속한 시바타 카츠이에 진영은 이 이탈을 직접적인 도화선으로 와해됐고, 카츠이에는 사흘 뒤 기타노쇼성에서 자해했다. 한국어권에서 흔히 “도시이에가 카츠이에를 배신했다”고 한 줄로 정리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사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한 줄에는 누락된 것이 많다. 도시이에는 정말 사전에 히데요시와 내통했는가, 아니면 전장에서 마지막 순간에 판단을 바꿨는가. 그 차이는 단순한 인물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이에라는 무장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도요토미 정권 초기의 정치 지형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가르는 문제다.

이 글은 마에다 도시이에 완전 정리 챕터 6에서 갈라져 나온 클러스터 글이다. 전체 생애의 맥락이 필요하면 메인 글을 먼저 보기를 권한다.


1582년 6월: 우오즈 공성 중의 혼노지

이야기의 시작은 시즈가타케 1년 전, 우오즈성(魚津城) 공성전이다.

1582년(덴쇼 10년) 3월, 시바타 카츠이에를 총대장으로 한 호쿠리쿠 방면군이 엣추(越中) 우오즈성을 포위한다. 카츠이에·삿사 나리마사·도시이에·사쿠마 모리마사로 구성된 약 4만 병력 대 우에스기 측 수비군 약 3,800명의 장기 공성이었다. 6월 3일, 석 달의 공성 끝에 우오즈성이 함락된다. 성장 13명이 자해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사실상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틀 전인 6월 1일 밤, 교토 혼노지(本能寺)에서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기습으로 자해했기 때문이다. 호쿠리쿠 방면군이 이 소식을 접한 것은 6월 6일 밤. 카츠이에는 즉시 우에스기와의 대치를 풀고 기타노쇼성(北ノ庄城)으로 철수한다. 도시이에는 자기 영지인 노토(能登)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도시이에가 처한 위치는 미묘해진다. 군사적·정치적으로 그는 호쿠리쿠 방면군 내 카츠이에의 부장이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사라지자 노부나가 가신단 전체의 권력 균형이 재편되기 시작한다.

키요스회의 불참 — 첫 분기점

6월 27일, 키요스성에서 노부나가 사후 처리를 위한 키요스회의(清洲会議)가 열린다. 참석자는 시바타 카츠이에·하시바 히데요시·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 네 명. 도시이에는 회의 참석 자격이 없었고, 노토와 호쿠리쿠 전선 마무리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회의에서 노부나가의 후계는 장남 노부타다(信忠)의 적자인 세 살 산포시(三法師)로 결정된다. 히데요시가 주도한 결정이었다. 카츠이에가 미는 후보였던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信孝)는 후견 자리에 올라가지만 실권은 히데요시의 산포시 옹립이 가져갔다.

이때부터 카츠이에와 히데요시의 권력 경쟁이 본격화된다. 도시이에가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를 보면 그의 처지가 분명해진다.

카츠이에 쪽은 도시이에의 직속 상관이었다. 호쿠리쿠 방면군 안에서 카츠이에 아래 부장으로 일했고, 노토 23만 석을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받았지만 현장 운용은 카츠이에 라인에 속했다. 노부나가 가신단의 위계로 보면 카츠이에가 한 세대 위였다.

히데요시 쪽은 도시이에가 노부나가 가신단 초기부터 친구처럼 지낸 동료였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노부나가의 코쇼(小姓)·아시가루 계급에서 출발했고 나이도 한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도시이에가 출사정지 시기를 보낼 때 히데요시도 노부나가 가신단의 변방에 있었다. 두 사람의 친교는 거의 30년에 가까웠다.

도시이에에게 카츠이에는 상관이었고 히데요시는 친구였다. 의리와 위계로는 카츠이에 쪽에 서야 했지만, 개인적 유대는 히데요시 쪽에 훨씬 두터웠다. 두 사람이 충돌하는 순간 도시이에는 어느 쪽도 진심으로 저버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시즈가타케 직전 — 모야마 포진의 정치적 의미

1583년 봄,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의 확장을 막기 위해 출진한다. 약 3만 병력이었다. 그는 오미(近江) 북부에서 히데요시와의 결전을 노린다. 4월 초순, 시바타 본대가 오미 야나가세(柳ヶ瀬)에 진을 친다. 도시이에는 약 5,000~8,000명을 이끌고 카츠이에 휘하로 합류, 모야마(茂山)에 포진한다.

모야마는 야나가세에서 동쪽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산이다. 시바타 본대와 별도로 한 진을 친 형국인데, 이 배치 자체에서 도시이에의 미묘한 입장이 읽힌다. 카츠이에 주력군에 합쳐서 정면 결전에 참여하기보다, 본대 측면에서 별도 부대로 운용되는 위치였다. 카츠이에 측이 도시이에를 핵심 전력으로 신뢰하지 않았거나, 도시이에 측이 일부러 그 자리를 받았거나, 양쪽 다였을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도시이에가 히데요시와 사전에 연락을 주고받았는가는 핵심 쟁점이다. 동시대 사료에는 그런 연락의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모야마 포진 자체가 “전투에 깊이 개입하지 않을 수 있는 위치”였다는 점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학자도 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포진도 — 余呉湖 남북 대치 1583년 4월 21일 — 전투 당일 포진 余呉湖 요고코 北国街道 호쿠코쿠 가이도 北ノ庄城 기타노쇼성 시바타 本城 府中城 후추성 이탈 후 귀환 佐久間 大岩山 기습 裏崩れ 美濃大返し 오가키→기노모토 52㎞ 柴田勝家 시바타 카츠이에 柳ヶ瀬 · 야나가세 柴田勝豊 시바타 카츠토요 不破勝光 후와 카츠미츠 拝郷家嘉 하이고 이에요시 佐久間盛政 사쿠마 모리마사 우익 돌격대 前田利家 마에다 도시이에 茂山 · 모야마 羽柴秀吉 하시바 히데요시 木之本 · 기노모토 羽柴秀長 하시바 히데나가 田上山砦 · 다노우에야마 中川清秀 나카가와 키요히데 大岩山砦 ★ · 오오이와야마 전사 高山右近 다카야마 우콘 岩崎山砦 · 이와사키야마 桑山重晴 쿠와야마 시게하루 賤ヶ岳砦 · 시즈가타케 범례 시바타군 시바타 진형선 前田 (이탈) 하시바 요새 하시바 방어선 산지 성곽 美濃大返し 이탈·붕괴

1583년 4월 21일 시즈가타케 전투. 余呉湖 북쪽에 시바타군, 남쪽 산지에 하시바 요새선이 배치됐다. 佐久間盛政의 大岩山 기습 → 前田利家 이탈(裏崩れ) → 美濃大返し(히데요시 급귀환)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이탈 그 순간 — 4월 21일 오전의 시간대별 디테일

4월 20일 밤, 카츠이에 진영의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가 독자적 판단으로 히데요시 측 오이와야마 성채(大岩山砦)를 기습한다. 수비 측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가 전사하며 초기에는 시바타 측이 우세했다.

같은 날 저녁, 히데요시가 미노(美濃) 오가키성(大垣城)에서 시즈가타케 전선까지 약 52킬로미터를 5시간 만에 강행군으로 복귀시킨다. 이른바 “미노 오오가에시(美濃大返し)“다. 본대 약 1만 5천 병력이 다음 날 오전에 전장에 도착한다.

4월 21일 새벽부터 정오까지의 시간대별 흐름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새벽: 히데요시 본대가 시즈가타케 인근에 집결.
  • 오전: 히데요시군이 모리마사 부대를 정면 총공격. 모리마사는 본진과 단절된 상태로 격전.
  • 오전 중반: 모야마에 있던 도시이에 부대가 돌연 전선에서 이탈. 일부 사료는 “철수하는 모양새”였다고 기록한다.
  • 정오 전후: 도시이에 부대의 이탈이 시바타 진영 전체에 “우라쿠즈레(裏崩れ, 후방 붕괴)” 효과를 일으킨다. 모리마사 부대가 궤멸하고, 모리마사의 동생 카츠마사(勝政)가 전사한다.
  • 오후: 시바타 본군이 기타노쇼성으로 패주.

이탈이 정확히 어떤 형태였는지는 사료에 따라 디테일이 다르다. 일부는 도시이에 부대가 그대로 전장을 빠져 나갔다고 기록하고, 일부는 짧은 교전 후 후퇴했다고 기록한다. 공통점은 “도시이에 부대가 히데요시군 측에 합류해 전투를 함께 한 흔적은 없다”는 점이다. 도시이에는 적극적으로 히데요시 편을 든 것이 아니라, 카츠이에 편을 그만 둔 것이다.

사전 내통설 vs 현실 판단설 — 양 입장의 사료 근거

이탈의 성격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두 견해가 대립해왔다.

사전 내통설

이쪽 견해의 골자는 단순하다. 도시이에가 시즈가타케 이전에 이미 히데요시와 연락이 있었고, 모야마 포진 자체가 “전투 중 빠져 나오기 좋은 위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근거는 주로 전후 처우다. 시즈가타케 직후 도시이에는 노토 본령을 안도(安堵)받았을 뿐 아니라 가가 2군(河北·石川)을 가증받았다. 같은 카츠이에 진영에서 항복한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長近) 등은 가증 없이 현상 유지에 그쳤다. “이탈한 자가 항복한 자보다 더 받았다”는 사실이 사전 약속의 정황 증거로 해석된다.

또 하나의 정황은 도시이에와 히데요시의 30년 가까운 친분이다. 정황만 놓고 보면 모종의 사전 묵계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

현실 판단설

이쪽 견해는 도시이에가 전장에서 전황을 보고 마지막 순간에 판단했다는 입장이다.

가장 강한 근거는 후추성(府中城) 철포전이다. 모야마에서 이탈한 도시이에가 자기 거성인 후추성으로 복귀했을 때, 히데요시군이 후추성 앞을 지나가자 후추성에서 철포전이 발생했다. 도시이에의 유력 가신 요코야마 나가타카(横山長隆)가 이 전투에서 전군(殿軍)으로 전사했다. 히데요시 측 호리 히데마사(堀秀政)가 설득한 끝에 도시이에가 정식으로 항복한다.

이 디테일이 중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도시이에가 사전에 히데요시와 약속이 있었다면 자기 거성에서 자기 가신을 죽이게 되는 무의미한 교전을 벌일 이유가 없다. 후추성 철포전은 도시이에 측이 “히데요시군에 합류한다”는 사전 합의를 아직 못 했다는 직접적 증거에 가깝다.

또 하나의 근거는 동시대 1차 사료의 침묵이다. 『신쵸코키(信長公記)』를 비롯해 시즈가타케 전후의 동시대 기록 어디에도 “도시이에와 히데요시 간 사전 연락”의 흔적이 없다. 사전 내통설은 주로 에도기 가가번 어용 편찬 사료가 만들어낸 서사로 보인다.

후추성의 유즈케 일화 — 어용 편찬의 흔적

도시이에 이탈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장면이 후추성의 유즈케(湯漬) 일화다.

패주하던 카츠이에가 기타노쇼성으로 가는 길에 도시이에의 후추성에 들렀다. 도시이에는 카츠이에에게 뜨거운 물에 만 밥인 유즈케와 갈아탈 말을 내주었다. 카츠이에는 “마에다 가문을 위해 히데요시에게 붙으라. 나와의 맹약은 풀어주겠다”는 취지의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인질로 잡혀 있던 도시이에의 3녀 마아히메(麻阿姫)도 이 자리에서 돌려보냈다.

이 일화의 주요 전거는 에도기 편찬 사료다. 『시즈가타케 갓센키(賤岳合戦記)』, 그리고 『카와스미 타이코키(川角太閤記)』 등이 대표적이다. 둘 다 17세기 초중반에 작성됐고, 특히 『카와스미 타이코키』는 마에다 가문 어용 계통에 속한다. 오제 호안(小瀬甫庵)의 『타이코키(太閤記)』 역시 같은 시기 편찬으로, 도시이에의 행동을 “배신”이 아니라 “주군의 양해를 얻은 합리적 전향”으로 재구성하는 서사 기능을 수행한다.

후추성 실내, 패주한 카츠이에와 도시이에가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마지막 대면

1583년 4월 21일 밤, 후추성. 기타노쇼성으로 패주하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도시이에의 성에 들렀다. 도시이에는 유즈케(湯漬)와 갈아탈 말을 내주었고, 카츠이에는 “히데요시에게 붙어도 좋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사흘 뒤 카츠이에는 기타노쇼성에서 자해했다. (AI 재구성)

이 일화의 사실성을 둘러싼 학계의 입장은 신중하다. 도시이에가 후추성에서 카츠이에를 어떻게든 맞이했다는 정도까지는 개연성이 있지만, “유즈케를 내고, 카츠이에가 양해해주고, 마아히메를 돌려보낸다”는 디테일은 후대 가가번 측이 “배신”을 “주군이 풀어준 사면”으로 부드럽게 바꾸기 위한 서사적 장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같은 후추성 앞에서 다음 날 철포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 유즈케 서사와 묘하게 어긋난다. 카츠이에가 도시이에를 “히데요시에게 붙어도 좋다”고 풀어줬다면 그 다음 날 도시이에 측이 히데요시군을 향해 철포를 쏠 이유가 없다. 두 일화를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려면 도시이에 측이 카츠이에 양해 후에도 한 차례 더 머뭇거렸다고 봐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사전 내통설을 약화시킨다.

전후 처우의 두 얼굴 — 가가 2군 가증과 후추성 철포전

전후 도시이에의 처우는 사전 내통설의 가장 큰 근거이자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이다.

가증 분량을 보면 분명히 후한 대접이다. 노토 23만 석 본령 안도(安堵) + 가가 2군(河北·石川) 약 18만 석 가증. 거성을 코마루야마(小丸山)에서 가나자와성(金沢城)으로 옮긴다. 훗날 “가가 100만석”으로 불리는 영지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가증의 시점이 중요하다. 시즈가타케 직후 도시이에가 받은 가가 2군은 원래 사쿠마 모리마사의 영지였다. 모리마사가 시즈가타케에서 결정적 패인을 만들고 전사했기 때문에 비어버린 자리다. 히데요시 입장에서 가증을 줄 만한 객관적 자리가 거기 있었던 셈이다.

가증의 정치적 의미는 또 하나의 층위가 있다. 도시이에를 자기 진영의 핵심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히데요시의 적극적 포섭이라는 측면이다. 가가는 호쿠리쿠 방면에서 우에스기와 도쿠가와 양쪽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 요충지였다. 도시이에를 그 자리에 앉히는 일은 사전 약속의 보상이라기보다, 사후에 가치를 환산해 책정한 정치 자산 배분에 가까웠다.

후추성 철포전이라는 또 한 가지 사실을 더하면 이 그림은 더 분명해진다. 도시이에는 시즈가타케 직후 즉시 히데요시 라인이 된 것이 아니라, 후추성 항복을 거쳐 정식으로 합류했다. 사전 내통이라기보다 “이탈 → 항복 협상 → 합류”라는 단계를 거친 전향이었다.

최근 학계 평가

도시이에 이탈에 대한 학계 평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분화됐다.

다카야나기 미츠토시(高柳光寿)는 전국시대 전투사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시즈가타케 전투를 분석하면서 “도시이에 부대의 이탈이 시바타 측 최대의 패인”이라고 단정적으로 평가했다. 군사적 인과 관계로만 보면 정확한 평가다. 다만 다카야나기의 시각은 이탈을 군사적 결정 요인으로 강조했을 뿐, 그것이 사전 내통인지 현실 판단인지를 깊이 가르지는 않았다.

가사야 가즈히코(笠谷和比古)는 도요토미 정권 정치사 연구의 대표 학자다. 그는 시즈가타케 직후 도시이에가 받은 가증을 사전 내통의 직접 증거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카츠이에 진영 붕괴 후 호쿠리쿠 방면의 통치 공백을 메울 인물로 도시이에가 가장 적합했고, 히데요시의 정치 계산이 거기 작용했다는 입장이다. 가증은 “사전 보상”이 아니라 “사후 정치 자본 배분”이라는 해석이다.

이나모토 히로히로·와타나베 다이몬(稲本浩弘·渡邊大門) 같은 비교적 최근 세대 연구자들은 후추성 철포전의 의미에 무게를 둔다. 동시대 사료에 사전 연락의 증거가 없다는 점, 후추성에서 실제 교전이 발생했다는 점을 근거로 “전장에서의 현실 판단”이라는 해석이 점차 주류가 되고 있다.

종합하면 학계 평가의 무게중심은 다음 한 줄로 요약된다. 사전에 짜맞춘 각본은 아니지만, 시바타 측 패배의 직접적 인과는 도시이에 부대의 이탈이었다. 도시이에는 카츠이에를 적극적으로 배신했다기보다 마지막 순간에 자기 가문의 생존을 우선해 카츠이에 편을 그만 둔 것이다.

마치며 — “배신”이라는 단어가 누락한 것

“도시이에는 카츠이에를 배신했다”는 한 줄 평가는 결과만 놓고 보면 틀리지 않다. 도시이에의 이탈로 카츠이에 진영이 와해됐고, 카츠이에는 사흘 뒤 자해했다. 결과는 분명히 카츠이에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배신”이라는 단어는 도시이에가 사전에 약속을 어겼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사료를 따라가 보면 그 약속의 흔적이 없다. 도시이에는 카츠이에 진영에 정식으로 합류해 모야마에 진을 쳤고, 거기서 일정 기간 동안 카츠이에 측 부장으로 행동했다. 이탈은 4월 21일 오전, 시바타 진영이 모리마사의 무모한 기습 실패로 이미 한 번 흔들린 직후에 일어났다.

이 시간차가 중요하다. 도시이에는 시즈가타케 직전까지 카츠이에에게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시바타 측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자기 가문이 카츠이에 측에 남는 것이 곧 마에다 가문의 절멸을 의미한다는 계산을 했다. 그 계산이 옳았다는 사실은 사흘 뒤 카츠이에의 자해와, 도시이에가 받은 가가 2군 가증이 증명한다.

도시이에를 배신자라고 부르는 평가에는 사실 두 가지가 섞여 있다. 하나는 카츠이에 진영에서 빠져 나갔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평가다. 다른 하나는 빠져 나가는 방식과 시점에 대한 평가다. 학계의 신중한 입장은 첫 번째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두 번째에 대해 “사전 모의”라고 단정할 사료는 없다는 것이다.

코가이기리에서 시작해 시즈가타케로 이어지는 도시이에의 두 변곡점은 흥미로운 짝을 이룬다. 1559년의 도시이에는 격정에 차서 주군의 측근을 베어 인생을 거의 망쳤다. 1583년의 도시이에는 같은 격정을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채, 가장 차가운 계산으로 자기 가문의 생존을 지켰다. 24년의 시간이 이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가 이 두 사건의 거리 안에 있다.

황혼의 능선을 따라 골짜기의 전장을 등지고 진군하는 무사 행렬

시즈가타케 이탈의 순간. 황혼의 능선을 따라 무사 행렬이 골짜기의 전장을 등지고 진군한다. 우측 하단의 연기 기둥은 시바타 진영이 무너지고 있는 전장이며, 행렬의 뒷모습은 도시이에가 어느 진영에도 적극적으로 합류하지 않은 채 자기 가문의 생존을 향해 돌아선 모호한 결정을 시각화한다. (AI 재구성)


각주

참고 문헌

1차 사료

  • 『信長公記』(太田牛一) — 시즈가타케 전투 및 우오즈성 공성의 동시대 기록.
  • 시즈가타케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발급 朱印状 — 가가 2군 가증 근거.

2차 사료·후대 편찬

  • 『加賀藩史料』 — 마에다 가문 측 종합 사료. 도시이에 평가에 가가번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 『川角太閤記』 — 에도 초기 편찬. 후추성 유즈케 일화의 주요 전거.
  • 『賤岳合戦記』 — 시즈가타케 전투 전반의 후대 편찬.
  • 小瀬甫庵, 『太閤記』 — 에도 초기. 도시이에 행동의 도덕적 정당화 서사.

현대 연구

  • 高柳光寿 — 전국시대 전투사. 도시이에 이탈을 시바타 측 패인으로 강조.
  • 笠谷和比古 — 도요토미 정권 정치사. 사전 내통설 회의적.
  • 稲本浩弘·渡邊大門 등 최근 연구 — 후추성 철포전 중심으로 현실 판단설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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