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동항로를 찾아 떠난 휴 윌로비, 1553년의 기록
Q. 휴 윌로비는 어떻게 죽었는가? 1553년 북동항로 탐험 중 콜라반도 바르지나강 어귀에서 겨울을 맞아 선원 64명 전원 사망했다. 동사가 오랫동안 통설이었으나, 1986년 역사학자 Eleanora C. Gordon은 밀폐된 선실의 일산화탄소 중독을 유력한 원인으로 제시했다.
이 이야기의 끝은 먼저 알려져 있다. 1555년 봄, 러시아 어부들이 콜라반도 북쪽 해안에서 두 척의 영국 선박을 발견했다. 배 안에는 수십 명의 시신이 있었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돌아오지 못한 것이었다.
군인에서 탐험가로
휴 윌로비(Sir Hugh Willoughby)는 탐험가로 살다 죽었지만, 탐험가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노팅엄셔 Wollaton 가문 출신의 그는 군인이었다. 1544년 헨리 8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전해 에든버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같은 해 5월 11일 Leith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1548년부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의 Lowther Castle을 지휘하며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
그 경력이 갑자기 끊긴 것은 1552년이었다. 그의 후원자였던 Somerset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가 반역죄로 처형되자, 윌로비는 후원자도, 직위도 잃었다. 동시대 기록은 이 상황을 간결하게 묘사한다. “Somerset의 몰락이 그의 입지에 불리하게 작용했고, 그는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마침 Sebastian Cabot을 중심으로 런던 상인들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항로, 북동쪽 방향을 탐색하는 원정이었다. 윌로비는 항해 경험이 전무했다. 그러나 상인들이 원한 것은 항법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휘관이었고, 기사 작위를 가진 군인 귀족이 그 자리에 적합했다. 한 기록은 선발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좋은 가문 출신이고, 키가 크며, 전쟁에서의 능력이 탁월했다.” 항해 기술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항법은 리처드 챈슬러(Richard Chancellor)가 맡기로 했다.
1553년 5월 10일
세 척의 배가 템스강을 내려갔다. 기함 Bona Esperanza(120톤, 윌로비 승선), Bona Confidentia(90톤), 그리고 항법 총책 챈슬러가 탄 Edward Bonaventure(160톤). 각 배에는 식량 18개월 치와 모직물, 주석 등 교역용 화물이 실렸다. 승선 인원은 세 선박을 합쳐 약 111명이었다.
그리니치를 지날 때의 장면은 동시대 기록자 Clement Adams가 챈슬러의 구술을 받아 남겼다.
“커다란 배들은 보트와 노로 끌려 내려갔고, 수병들은 모두 하늘색 옷을 입고 힘차게 노를 저었다. 그리니치 근처에 이르자 신하들이 달려나왔고, 평민들은 강변에 빽빽하게 서서 바라봤다. 추밀원 의원들은 궁전 창문으로 내다보았고, 나머지는 탑 꼭대기에 올라갔다. 배들은 전쟁 방식으로 예포를 올렸고, 언덕 꼭대기까지 그 소리가 울렸으며, 수병들은 하늘이 울릴 정도로 함성을 질렀다.”
구경꾼들은 알지 못했다. 왕궁 안에 있던 에드워드 6세는 건강이 너무 나빠 그 광경을 창밖으로도 보지 못했고, 출항 2주 후 세상을 떴다. 배들이 돌아올 즈음, 그를 왕위에 올렸던 시대 자체가 이미 끝나 있을 것이었다.
폭풍, 그리고 분리
항해 초반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선단은 잉글랜드 해안을 벗어나 북쪽으로,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 올라갔다. 계획은 노르웨이 북쪽 끝을 돌아 러시아 방향으로 항로를 잡는 것이었다.
7월 30일 밤, 핀마르크 해역에서 폭풍이 닥쳤다. Bona Esperanza 갑판에 묶어 둔 소형 보트가 선체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다음 날 아침, 윌로비는 주변을 살폈다. Bona Confidentia는 있었다. 그러나 챈슬러의 Edward Bonaventure는 보이지 않았다.
Clement Adams의 기록은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폭풍 속에서 Edward Bonaventure 위로 챈슬러에게 ‘기함을 따라오라’는 Sir Hugh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에스페란자는 돛을 모두 펴고 너무 빠르게 앞으로 내달려, 챈슬러가 아무리 따라가려 해도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다렸다. 며칠을 기다렸으나 챈슬러의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윌로비는 Bona Esperanza와 Bona Confidentia 두 척만 이끌고 항해를 계속했다. 챈슬러는 따로 항로를 잡아 러시아 백해(White Sea)에 닿았고, 결국 모스크바까지 갔다. 그것이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서로를 인식한 순간이었다.
북위 72도
8월 14일, 윌로비는 일지에 육지 발견을 기록했다. 북위 72도. Hakluyt은 나중에 이 지점에 “Willoughbyie’s Land”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는 노바야젬랴(Novaya Zemlya)로 추정되지만, 암초와 빙설이 너무 많아 상륙할 수 없었다.
배는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지막 일지 — 1553년 9월 18일
9월 18일, Bona Esperanza와 Bona Confidentia는 현재 러시아 콜라반도 북쪽 해안에 위치한 바르지나(Varzina) 강 어귀에 닻을 내렸다. 항구에는 십자가 등 인간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없었다.
윌로비는 수색대를 내보냈다. 세 명을 남남서 방향으로 사흘, 세 명을 서쪽으로 나흘, 세 명을 남동쪽으로 사흘. 모두 빈손으로 돌아왔다.
일지에는 그것이 기록돼 있다.
“해가 많이 지나가 있고 서리·눈·우박이 내리는 것이 마치 한겨울 같은 것을 보고, 여기서 겨울을 나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을 남남서 방향으로 사흘 동안 보내 사람들을 찾게 했으나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서쪽으로 나흘 길을 보냈으나 역시 사람을 찾지 못했다. 다시 세 사람을 남동쪽으로 사흘 보냈지만,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했다.”
Hakluyt은 이 항목 다음에 한 줄을 덧붙였다. “여기서 Sir Hugh Willoughby의 메모는 끝난다. 이는 그의 자필로 쓰인 것이다.”
일지는 여기서 멈췄다. 이후 겨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 아무것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침묵의 겨울
1554년 1월, 배 안에서 유언장이 하나 작성됐다. 작성자는 Sir Hugh 본인이 아니라 그의 친족이자 동승 상인이었던 Gabriel Willoughby였다. 이 유언장은 그 시점에 선원들 중 일부가 아직 살아 있었음을 역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흔적이었다.
바르지나강 하구의 겨울은 혹독하다. 바렌츠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막힘 없이 들이치는 그 해안에서, 두 척의 배와 Bona Esperanza에 탄 37명, Bona Confidentia에 탄 27명은 봄을 기다렸다. 봄은 오지 않았다 — 적어도 그들에게는.
발견 — 1555년 봄
1555년 봄, 계절 어업을 위해 그 해안을 찾은 러시아 어부들이 두 척의 이상한 배를 발견했다. 배에 다가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죽어 있었고, 얼어붙어 있었다.
런던 주재 베네치아 대사 Giovanni Michiel은 이 소식을 본국에 보고하는 편지에 어부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어부들은 그들이 얼어붙은 모습에 대해 기묘한 것들을 전했다. 한 손에 펜을 든 채 앞에 종이를 두고, 다른 이들은 테이블에서 손에 접시를 들고 입에 숟가락을 문 채로, 또 어떤 이는 사물함을 열다가, 다른 이들은 마치 그 자세로 고정시켜 놓은 듯한 조각상처럼 각기 다른 자세로 얼어붙어 있었다.”
Michiel의 보고서는 어부들에게 전해 들은 것을 외교 문서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세부 묘사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르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 핵심 — 모든 사람이 죽어 있었다는 사실 — 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던 영국 상단이 소식을 듣고 현장에 파견됐다. 화물이 회수됐다. Bona Esperanza 안에는 발견 당시에도 £6,000 상당의 화물이 남아 있었다. 시신도 수습됐다. 윌로비의 유해는 이때 본국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 않다. 그의 일지는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다.
어떻게 죽었는가
동사라는 것은 오랫동안 자명한 답으로 여겨졌다. 북극해의 겨울, 식량 고갈, 혹한 — 충분한 설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1986년 역사학자 Eleanora C. Gordon이 다른 설을 제시했다. 그는 죽음의 방식이 동사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동사는 느리고 점진적이다. 그런데 유언장이 작성됐던 1월의 기록 이후 봄까지, 한 명의 생존 흔적도 없다. 집단적이고 급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그가 제안한 원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밀폐된 선실, 석탄을 태워 난방, 환기 없는 겨울. 그 조건이면 충분했다. 비교 사례도 있었다. 1596년 북극 원정 중 Willem Barents의 선원들은 이런 경험을 기록했다.
“우리는 심한 현기증과 어지럼증에 사로잡혔다… 문이 열리자 모두 차가운 공기 덕분에 다시 회복했다.”
바렌츠의 선원들은 문을 열어 살아남았다. 윌로비의 선원들은 열지 못했다 — 혹은, 열 수 없었다.
Gordon의 이론이 정설이 된 것은 아니다. 직접적인 물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이후
이야기는 윌로비와 함께 끝나지 않는다.
챈슬러는 폭풍 속에서 혼자 러시아에 닿아, 모스크바에서 이반 4세를 만났다. 그것으로 잉글랜드와 러시아 사이에 무역 항로가 열렸다. 상인들은 Muscovy Company(러시아 회사)를 설립했다. 윌로비가 목숨을 바친 항해의 상업적 결과가 현실이 됐다.
챈슬러는 1556년 러시아 대사 Osip Nepea를 태우고 귀환하다 스코틀랜드 해안에서 난파했다. 그는 대사를 구하려다 익사했다. Nepea는 살아남아 1557년 봄 런던에 도착, 최초의 러시아 주영 대사가 됐다. 윌로비의 두 배를 회수하려던 시도는 이어졌으나, 귀환 항해 중 두 선박 모두 폭풍에 침몰했다.
Muscovy Company는 나중에 Spitsbergen 포경 독점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1553년 윌로비가 그 땅을 발견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현대 학자들은 이를 근거 없는 주장으로 평가한다.
남은 것들
바르지나강 하구는 지금도 영구 거주민이 없다. 차로 갈 수 없고, 헬리콥터를 전세 내야 닿을 수 있는 러시아 북극해 연안이다. 그곳에 윌로비를 기념하는 어떤 표지판도 없다.
런던에는 작은 기념 플라크가 하나 있다. Wollaton Hall에 그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Clement Adams는 그를 이렇게 기록했다. “좋은 가문 출신의 용맹한 인물. 전쟁에서의 탁월한 능력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외모도 뛰어났으며 키가 매우 컸다.” 항해에 대한 말은 없다.
그의 자필 일지는 1553년 9월 18일의 수색 실패 기록에서 멈춘다. 그 뒤로 겨울이 왔고, 봄이 왔고, 어부들이 왔다. 일지는 런던에 닿았다. 일지를 쓴 사람은 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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