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가루 다메노부 — 주군을 배신하고 다이묘가 된 남자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마에다 도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쓰가루 다메노부(津軽為信)를 이렇게 평했다.
“표리지인(表裏之人).”
겉과 속이 다른 믿을 수 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난이었는지 칭찬이었는지는 모호하다. 전국시대를 살아남아 4만 7천 석의 독립 다이묘가 된 사람에게 그 말은 어쩌면 가장 정확한 찬사였을지 모른다.
1. 주군의 숙부를 죽이다
다메노부는 1550년, 무쓰국(陸奥国) 쓰가루 지방에서 태어났다. 출신은 지금도 논란이 있다. 일설에는 난부(南部)씨 지족인 구지(久慈)가 출신이라 하고, 쓰가루 측 정사는 오우라 모리노부(大浦守信)의 아들이라 한다. 어느 쪽이든 그는 난부씨의 지족, 오우라(大浦)가의 당주로서 1567년경 가독을 이어받았다. 오우라가는 쓰가루 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지배자는 아니었다. 그들 위에 난부씨가 있었고, 난부씨의 대리인으로 이시카와성(石川城)을 지키는 이시카와 다카노부(石川高信)가 쓰가루를 감독하고 있었다.
1571년, 다메노부는 움직였다.
겐키(元亀) 2년. 그는 이시카와성에 공사를 위장한 부대를 잠입시켜 성을 기습했다. 이시카와 다카노부는 난부씨 당주 하루마사(晴政)의 숙부였다. 기습을 받은 다카노부는 저항도 못 해보고 자결했다. 공개적인 선전포고도, 대의명분도 없었다. 순수한 기습이었다.
이것이 쓰가루 다메노부라는 인물의 출발점이다. 주군 집안의 어른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된 독립 선언.
2. 17년의 통일 전쟁
이후 다메노부는 약 17년에 걸쳐 쓰가루 지방을 차례로 평정해 나갔다. 그의 전쟁 방식은 정면 결전보다 기책(奇策)과 정략이 중심이었다.
1578년, 나미오카(浪岡)성을 무너뜨렸다. 불량배 집단을 성 안으로 잠입시켜 방화와 교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오슈(奥州)의 명문 나미오카 기타바타케(浪岡北畠)씨를 멸했다. 정규전이 아니었다. 공작이었다.
이듬해 1579년 로쿠바가와(六羽川) 합전에서는 고전했다. 안토·난부·나미오카 연합군이 몰려왔고 전황이 기울었다. 이때 다나카 다로고로(田中太郎五郎)라는 가신이 자신이 다메노부인 척 행세하며 적진에 홀로 돌격해 전사했다. 그 사이 다메노부는 반격에 성공하고 적장을 토벌했다. 자신을 위해 죽어준 가신이 있었고, 다메노부는 그 죽음을 허비하지 않았다.
1585년 아부라카와(油川)성 함락으로 쓰가루 북부 소토가하마(外ヶ浜) 일대를 제압했다.
1588년경 쓰가루 전역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첫 기습으로부터 불과 17년 만의 일이었다.
3. 이중 외교 — 히데요시도, 이에야스도
군사 통일과 병행하여 다메노부가 공들인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대한 접근이었다. 쓰가루 지방을 다 평정해도 중앙의 공인 없이는 독립 다이묘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1589년, 다메노부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매와 명마를 헌상했다. 그리고 이듬해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 정벌에 자진 참진했다. 히데요시 진영에 나타나 직접 알현함으로써 그는 쓰가루 3군(平賀·鼻和·田舎) 4만 5천 석을 정식으로 안도(安堵)받았다.
난부 노부나오(南部信直)는 즉각 항의했다. 마에다 도시이에를 통해 “다메노부가 소부지령(惣無事令)을 어겼다”고 고발한 것이다. 소부지령이란 히데요시가 전국의 다이묘에게 내린 무력 분쟁 금지령으로, 히데요시의 허가 없이 영지를 빼앗는 행위를 금지했다. 쓰가루 평정이 바로 그 위반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다메노부에게는 이시다 미쓰나리·하시바 히데쓰구·오다 노부카쓰라는 후원자가 있었다. 항의는 묵살되었다.
같은 해 다메노부는 공가(公家)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의 양자가 되어 후지와라(藤原) 성을 받고 성씨를 ‘오우라(大浦)‘에서 ‘쓰가루(津軽)‘로 바꿨다. 모호한 출신을 공가와의 연줄로 덮어버리는 정통성 구축 작업이었다.
그리고 세키가하라(1600년). 다메노부는 본인과 3남 노부히라(信枚)를 동군(이에야스)에 붙이면서 장남 노부타케(信建)는 서군(히데요리) 측근에 두었다. 어느 쪽이 이겨도 가문이 살아남도록 설계한 배치였다. 사나다(真田) 가문이 일본 최고의 “양다리”로 알려져 있지만, 쓰가루도 같은 전략을 택했다. 사나다는 세키가하라 때 아버지 마사유키와 차남 유키무라는 서군에, 장남 노부유키는 동군에 붙여 어느 쪽이 이겨도 가문이 살아남도록 했다. 다메노부의 선택은 그와 판박이였다.
전후 처리도 빈틈없었다. 패전한 이시다 미쓰나리의 차남 시게나리(重成)와 3녀 다쓰히메(辰姫)를 영지에서 보호했다. 다쓰히메는 훗날 2대 번주 노부히라의 측실이 되어 3대 번주 노부요시(信義)를 낳는다. 승자인 도쿠가와와의 관계를 굳히면서, 동시에 패자 이시다 미쓰나리의 혈통까지 가문 안에 품어두는 것. 이것이 다메노부의 생존 방식이었다.
다메노부는 1607년, 병상의 장남을 문병하러 상경했다가 장남의 사후 두 달 만에 교토에서 객사했다. 향년 58세. 시신은 히로사키(弘前)로 옮겨져 가쿠슈지(革秀寺)에 모셔졌다. 그가 착공한 히로사키성의 완성은 끝내 보지 못했다.
그가 죽고 400년이 지나 그의 후손은 황족비가 되었다. 14대 당주 쓰가루 요시타카(津軽義孝)의 넷째 딸 하나코(華子)가 1964년 히타치노미야(常陸宮) 마사히토 친왕비가 된 것이다. 오우라라는 작은 지방 세력에서 출발해 주군의 숙부를 죽이고 독립을 선언하고,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사이를 오가며 살아남은 가문이 결국 황실과 혈통으로 이어졌다.
표리지인. 그 평가가 맞다면, 표리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