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브라운과 프란스 호겐베르크가 1572년 펴낸 도시 지도책 『세계의 도시들』에 실린 콘스탄티노폴리스 조감도. 코로베이니코프 사절단의 첫 목적지이자, 동방 정교 세계의 중심이었다.

가본 적 없는 성지를 묘사한 순례기: 트리폰 코로베이니코프

Q: 트리폰 코로베이니코프는 누구인가?

A: 16세기 후반 모스크바의 상인이자 궁정 서기관(дьяк)이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남아 있지 않고, 1594년 이후로는 기록이 끊겨 그 무렵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본다. 그는 두 차례 동방 정교의 성지로 공식 사절단을 따라갔다. 한 번은 이반 4세(뇌제)가 자기 손으로 죽인 아들을 추모하는 자선금을 들고, 또 한 번은 표도르 1세에게 딸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자선금을 들고서. 그런데 정작 그를 후대에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공식 사절단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달고 200년 넘게 필사·인쇄된 예루살렘 순례기였다. 문제는 그 순례기의 주요 내용이 그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눈에 보는 코로베이니코프

항목내용
이름Трифон Коробейников (Trifon Korobeynikov)
생몰출생 미상 – 1594년 이후 사망 추정
신분모스크바 상인 출신, 1588년 무렵부터 궁정 서기관(дьяк)
1차 사행1582~1584년, 콘스탄티노폴리스·아토스 산
1차 목적이반 4세가 1581년 죽인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 추모 자선금
1차 단장상인 이반 미셰닌 (코로베이니코프는 수행원)
2차 사행1593~1594년, 콘스탄티노폴리스·예루살렘·안티오키아·야시
2차 목적표도르 1세의 딸 공주 페오도시아 출생 기념 자선금
2차 단장서기관 미하일 오가르코프
진본 기록1592년 여정기, 1594년 자선금 배분 보고서
유명 순례기『코로베이니코프의 동방 성지 순례기』, 필사본 약 200~400종
저자성 논쟁본문 상당부가 1558년 바실리 포즈냐코프 여행기 차용 (자벨린 1884 입증)

아들을 죽인 황제가 보낸 사절

이야기는 코로베이니코프가 아니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에서 시작된다.

1581년 11월, 이반 4세는 장성한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차레비치(황태자) 이반 이바노비치와 다투었고 끝이 뾰족한 지팡이로 아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렇게 지팡이로 맞은 아들이 후유증으로 며칠 뒤 숨졌다는 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흔히들 이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장면을 자세히 기록한 동시대 자료는 모스크바에 와 있던 교황 특사 안토니오 포세비노의 보고가 거의 유일하고, 포세비노 자신도 사적인 편지에서는 이를 떠도는 소문 정도로 여겼다는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연대기들은 황태자의 사망 시기에 대해서만 적었을 뿐 사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서술한 기록이 없고, 당연히 황제에게 맞아서 죽었다는 얘기는 없다. 독살 당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황제에게 맞은 것 때문에 사망한 것은 맞지만 이 사건이 우발적 사고에 가까웠다는 견해도 있다. 일리야 레핀이 1885년 그린 유명한 그림은 이 전승을 시각화한 것이지 사료가 아니다. 오히려 그 그림은 발표되자마자 황실의 반발로 전시가 금지되어, 러시아 제국에서 검열당한 첫 회화가 됐다.

일리야 레핀,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1581년 11월 16일」(1885)
일리야 레핀,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1581년 11월 16일」(1885),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아들을 죽였다는 전승을 극적으로 시각화한 그림으로, 발표 직후 전시가 금지됐다. Public Domain.

진실이 무엇이든, 이반 4세는 아들의 죽음 이후 무거운 죄책감 속에 있었다. 그가 택한 속죄의 방식은 동방 정교 세계의 성지에 막대한 자선금을 보내 아들의 명복을 비는 것이었다. 1582년, 모스크바 정부는 상인 이반 미셰닌을 단장으로 하는 소규모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토스 산(그리스 정교 수도원이 모인 반도)으로 파견했다. 사료에 이름이 남은 일행은 미셰닌까지 포함해 네 명뿐이었고, 코로베이니코프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죽은 황태자의 영혼을 위한 자선금을 들고 갔으며, 시나이 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교회를 짓는 데 사용하라며 500루블을 내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절단은 1582년 3월 모스크바를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일곱 달을 머물렀고, 1584년 2월에야 돌아왔다. 이 첫 여행에서 코로베이니코프는 아직 평범한 상인이었다. 궁정 서기관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다. 이반 4세 치세에는 서열을 차근차근 밟지 않아도 황제의 칙령 한 줄로 신분이 오르내렸으니, 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상인이 관료로 발탁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두 번째 여행, 그리고 끝나가는 왕조

10년쯤 뒤, 코로베이니코프는 다시 동방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그가 서기관 신분이었고, 사절단을 이끈 것은 또 다른 서기관 미하일 오가르코프였다.

명분은 정반대였다. 첫 여행이 죽음을 애도하는 길이었다면, 두 번째는 탄생을 축하하는 길이었다. 이반 4세의 뒤를 이은 표도르 1세는 오랜 기다림 끝에 1592년 딸 페오도시아를 얻었고, 모스크바 궁정은 그 출생을 기념하는 자선금을 챙겨 사절단에 맡겼다. 1593년 초 모스크바를 떠난 일행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뒤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까지 내려갔으며, 돌아오는 길에 작성한 보고서에는 몰다비아의 야시까지 자선금을 나눠준 곳으로 적혀 있다.

축하의 여정이었지만 그 끝은 밝지 않았다. 공주 페오도시아는 두 살이 되던 1594년에 죽었다. 표도르 1세 본인도 1598년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류리크 왕조의 모스크바 본가는 그대로 끊겼다. 그 뒤에 찾아온 것이 러시아사에서 대혼란기(스무트노예 브레먀)라 부르는 15년간의 내란과 외침이다. 동방의 성지에 그토록 많은 자선금을 보내며 빌었던 왕조의 안녕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자선금이라는 외교

아토스 산의 정교 수도원들을 그린 1835년 러시아 채색 판화 지도
아토스 산의 수도원들을 그린 1835년 러시아 채색 판화(루복). 오스만 치하에서 세금에 시달리던 아토스 수도원들은 모스크바가 보내는 자선금의 주요 수혜처였다. 셀레즈뇨프 석판인쇄, 1835년 / Public Domain.

코로베이니코프의 두 여행을 단순한 순례로만 보면 안 된다. 국가가 종교를 핑계 삼아 벌인 외교 행위였다고 봐야 한다.

16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예루살렘·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의 네 총대주교청과 아토스 산의 수도원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서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정교 세계에 하나 남은 독립 군주국이던 모스크바에 손을 내밀었고, 모스크바는 기꺼이 그 후원자를 자처했다. 차르가 보내는 자선금은 곤궁한 동방 교회를 떠받치는 돈줄인 동시에, 모스크바가 정교 세계의 새로운 중심임을 선포하는 정치적 행위였던 것이다.

러시아의 이러한 노력에 동방정교회는 커다란 선물로 화답했다. 158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가 모금을 위해 직접 모스크바를 찾아왔다. 그는 후한 대접과 자선금을 받았고, 그 답례로 1589년 모스크바 수좌대주교를 정식 총대주교로 축성한 것이다. 이로써 동방 정교의 다섯 번째 총대주교청이 모스크바에 생긴 것이니, 이반 뇌제 때 시작된 러시아의 노력이 큰 결실을 맺은 셈이다.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부르는 이념이 문서로 명시된 것도 이 무렵이다. 코로베이니코프가 들고 다닌 돈자루는 이런 거대한 외교적 협상을 위한 군자금이었다.

200년을 베껴 읽힌 책, 그러나

코로베이니코프를 후대에 알린 것은 외교 무대에서의 활약상이 아니라 그가 남긴 한 권의 책이었다. 그의 이름을 단 『동방 성지 순례기』는 16세기 말부터 러시아에서 가장 널리 읽힌 순례 문학이 됐다.

19세기 말에 정리된 백과사전은 이 책의 위세를 이렇게 전한다. 필사본이 200종 넘게 돌아다녔고, 19세기에만 마흔 종이 넘는 판본이 나왔으며, 때로는 세계사 연대기 모음집에 본문 전체가 그대로 실려 성서에 준하는 권위로 읽혔다는 것이다. 20세기 독일 슬라브학자 클라우스디터 제만(Klaus-Dieter Seemann)의 집계로는 현존 필사본이 400종에 가깝다. 한 상인의 여행 보고서가 거의 경전과도 같은 권위를 갖게 된 셈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반전이 있다. 1884년, 역사가 이반 자벨린이 한 세대 앞선 다른 여행자의 글을 처음 활자로 펴내면서 코로베이니코프의 순례기와 그 글을 나란히 대조했다. 두 글을 비교해 읽던 자벨린은 깜짝 놀랐다. 코로베이니코프의 순례기의 상당 부분이 1558년 모스크바 상인 바실리 포즈냐코프가 남긴 여행기를 옮겨 적고 다듬은, 말하자면 표절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덜 알려져 있던 옛 여행기를 사료로 펴내려던 작업이, 도리어 그 유명한 순례기의 원본을 들춰낸 셈이었다.

자벨린이 그렇게 판단한 결정적인 단서는 시나이 산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코로베이니코프의 순례기에는 시나이 수도원의 풍경과 성유물이 제법 자세히 그려져 있는데, 코로베이니코프 일행은 시나이에 간 적이 없다. 가본 적 없는 곳을 상세히 묘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대목이 남의 글에서 왔다는 증거가 됐다. 1889년 흐리산프 로파레프는 한발 더 나아가, 이 책을 위대한 순례자가 남긴 순례기가 아니라 어느 한가한 서기의 편집물에 가깝다고 못 박았다.

표절일까, 관행일까

그렇다면 코로베이니코프는 본인의 명예를 위해 남의 기록을 교묘하게 도용한 부도덕한 표절 작가였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보는 건 무리가 있다.

먼저 그의 두 차례 사행 자체는 실재했다. 20세기 연구자들이 모스크바 고문서 보관소에서 관련 문서를 찾아내면서, 사절단의 실체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그가 직접 남긴 진본 기록도 따로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의 노정을 적은 1592년의 여정기와, 어느 성지에 자선금을 얼마씩 나눠줬는지 회계한 1594년의 배분 보고서가 그것이다. 이름값을 떨친 순례기 본문이 차용일 뿐, 그가 실제로 길을 걷고 돈을 나눠준 일까지 가짜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중세 러시아의 순례 문학, 곧 ‘하즈데니예’라 불린 장르에서는 앞선 텍스트를 가져다 쓰는 일이 흠이 아니라 오히려 규범에 가까웠다. 서기들은 자기 글과 남의 글의 경계를 일부러 지웠다. 근대적인 저작권 관념을 들이대 ‘표절’이라 부르는 것은 19세기 학자들의 잣대였고, 20세기 이후 연구는 이를 중세 필사 문화의 정상적인 편찬 방식으로 다시 읽었다. 실제로 그 책을 짜깁기한 사람은 코로베이니코프 본인이 아니라 후대의 익명 편집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장르의 계보를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12세기 초 다닐 수도원장의 예루살렘 순례기가 있고, 한가운데에는 종교가 아닌 장사를 위해 인도까지 다녀온 트베리 상인 아파나시 니키틴의 『세 바다 너머의 여행』(1466~1472)이 있다. 코로베이니코프는 순례와 자선과 외교가 한데 섞인 16세기형 변종인 셈이다.

성묘를 가져온 사람이라는 오해

코로베이니코프를 둘러싼 이야기 중에는 후대에 부풀려진 것도 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묘(예수의 무덤)의 모형을 모스크바로 가져왔다는 전승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료를 찾아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베르나르디노 아미코가 1609년 펴낸 성지 건축물 실측 도면 중 예루살렘 성묘 부분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베르나르디노 아미코가 예루살렘 성묘를 실측해 펴낸 건축 도면(1609). 코로베이니코프가 모스크바로 가져온 것도 이런 입체 모형이 아니라 성묘의 '치수'였다. Trattato delle Piante & Immagini de Sacri Edifizi di Terra Santa, 1609 / Public Domain.
1634년 무렵 예루살렘을 다녀온 또 다른 순례자 바실리 가가라는, 자신이 본 성묘를 코로베이니코프가 가져온 것과 비교하며 "치수"를 언급했다. 모형이 아니라 실측 치수다. 코로베이니코프가 가져온 것은 입체 모형이 아니라, 성묘의 크기를 천에 그대로 떠 온 일종의 실측 본이었다. 그 치수를 바탕으로 1599년에서 1600년 사이 모스크바의 한 교회에 금으로 만든 성묘 복제물이 제작됐다. '모형'이라는 표현은 19세기 백과사전이 이 기록을 의역하면서 생긴 과장으로 보는 편이 옳다.

예루살렘을 통째로 본떠 짓는 거대한 복제 프로젝트는 따로 있었다. 17세기 중반, 총대주교 니콘이 모스크바 근교에 세운 신예루살렘 수도원이 그것이다. 다만 그 일은 코로베이니코프보다 반세기 뒤의 사건으로, 동방을 직접 답사한 아르세니 수하노프의 실측 도면과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보낸 목제 모형에 근거했다.

같은 시대, 다른 방향의 항해

앤서니 젱킨슨이 1562년 제작한 모스크바국과 타타르 지역 지도
앤서니 젱킨슨이 1562년 제작한 모스크바국·타타르 지도. 영국 머스코비 회사의 사절로 러시아를 오간 젱킨슨의 이 지도는, 서유럽이 대서양으로 나아가던 시기에 러시아가 초원과 강을 따라 남쪽으로 향한 또 다른 길을 보여준다. Public Domain.

코로베이니코프가 두 번째로 동방을 다녀온 1593년은, 서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콜럼버스와 바스쿠 다 가마가 대양 항로를 연 지 한 세기가 지난 시점이다. 영국이 모스크바 무역을 위해 머스코비 회사를 세운 것도 같은 16세기의 일이었다.

서유럽이 대서양과 인도양으로 배를 밀어내던 그 시기에, 러시아의 ‘대항해’는 바다가 아니라 초원과 강과 내해를 따라 남으로, 동으로 뻗었다. 발트해와 흑해의 출구가 모두 스웨덴과 오스만, 크림 칸국에 막혀 있던 모스크바에는 부동항이 없었다. 그래서 코로베이니코프 일행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적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여정이었다. 흑해는 사실상 오스만의 내해였고, 남쪽 국경의 스텝은 크림 타타르가 노예사냥을 벌이던 위험지대였다. 자선금을 가득 실은 작은 사절단이 그 위험한 길을 오가는 리스크를 졌다는 것은, 당시 모스크바가 동방 정교 세계와의 연결에 얼마나 무게를 뒀는지 말해준다.


가본 적 없는 시나이를 묘사한 한 권의 순례기, 아들을 죽인 황제의 자선금, 두 살에 죽은 공주를 위한 축하 여행, 끊겨버린 왕조. 트리폰 코로베이니코프라는 이름 하나에 16세기 말 모스크바의 종교와 정치와 문학이 한데 얽혀 있다. 그가 실제로 쓴 글은 담백한 여정기와 회계 보고였지만, 그의 이름이 짊어진 책은 그보다 훨씬 멀리, 훨씬 오래 살아남았다.


참고 자료

  • О. А. Белоброва, 「Коробейников Трифон」, 『Словарь книжников и книжности Древней Руси』 (고대 러시아 서기 사전)
  • А. А. Опарина, 「К проблеме автора и времени создания “Хождения купца Трифона Коробейникова”」, CyberLeninka
  • И. Е. Забелин 편, 포즈냐코프 여행기 (1884), Х. М. Лопарёв 서문 (1889)
  • 『Русский биограф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Половцов) / Брокгауз-Ефрон 백과사전, “Коробейников” 항목
  • Galina Yermolenko, “In the Tsar’s Service: Early Modern Russian Travelers to the Holy Land”, Boston University
  • 1582년 사절 보고 1차 사료 (vostlit.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