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전설의 그림자에서 평가가 세 번 뒤집힌 제독
1571년 10월 7일 오전, 그리스 서해안 레판토 앞바다. 신성동맹 함대의 오른쪽 날개를 맡은 갤리선들이 천천히 남쪽으로 미끄러졌다. 지휘관은 제노바의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였다. 맞은편 오스만 좌익을 이끈 울루치 알리의 전열이 자기 쪽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다. 포위당할 위험을 본 그는 바깥쪽으로 함대를 벌렸다.
그 순간, 도리아의 우익과 함대 중앙 사이에 넓은 틈이 벌어졌다.
울루치 알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방향을 틀어 중앙의 측면으로 파고들었고 몰타 기사단의 기함을 에워싸 나포한 뒤 기사단 깃발을 빼앗았다. 틈을 메운 것은 도리아가 아니었다. 후방에 대기하던 산타 크루스 후작의 예비대였다. 전투는 신성동맹의 대승으로 끝났지만, 우익에서 벌어진 일은 그날 이후 400년간 도리아를 따라다닌다.
그는 명장이었나, 겁쟁이였나. 이 질문의 답은 시대마다 달라졌다.
1. 검색되지 않는 이름
한국어로 “안드레아 도리아”를 검색하면 제노바의 명장, 황제와 술탄을 동시에 상대한 16세기 지중해의 제독이 나온다. 그런데 그 뒤를 이은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를 찾으면 사정이 다르다.
인물 자체를 정면으로 다룬 한국어 단행본이나 논문, 방송은 거의 없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짧은 항목이 하나 있고, 레판토 해전을 다룬 국내 논문 몇 편이 그의 “이상한 기동”을 한 줄씩 언급할 뿐이다. 사건으로는 남아 있는데, 인물로는 비어 있다.
정작 한국 독자가 이 이름을 가장 자주 마주치는 곳은 역사책이 아니다. 항해를 다룬 게임의 캐릭터 목록이다. “안드레아 도리아의 후계, 제르바와 레판토에 참전” 같은 한 줄 설명으로 그는 소비된다. 전설적인 종조부의 그늘에 가려, 정작 그가 무엇을 했고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는 좀처럼 따라붙지 않는다.
2. 도리아라는 이름
조반니 안드레아는 1539년에서 1540년 사이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잔네티노 도리아, 어머니는 제노바 거대 금융가 첸투리오네 가문의 딸 지네타였다. 도리아 가문은 당시 제노바 최고의 귀족이었고, 그 정점에는 종조부 안드레아 도리아가 있었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사촌의 아들인 잔네티노를 후계자로 삼아 전 재산과 함대 지휘권을 물려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1547년 1월, 모든 것이 한 번에 무너질 뻔했다.
피에스키 가문이 도리아 일가를 제거하려 봉기했다. 한밤중 소란에 놀라 항구로 달려나가던 잔네티노는 한 병사가 쏜 화승총에 맞아 죽었다. 정작 음모의 주모자 잔 루이지 피에스키는 갤리선으로 건너가던 판자에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익사했고, 거사는 그대로 실패했다. 아버지를 잃은 조반니 안드레아는 그때 일고여덟 살이었다.
3. 후계자 만들기
아버지가 죽자, 노년의 안드레아 도리아는 죽은 조카의 아들을 직접 거두었다. 흔히 “손자”나 “양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둘은 종조부와 종손 사이였고, 입양 절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안드레아는 그저 자기 자리를 이을 사람으로 이 아이를 골라 교육했을 뿐이다.
안드레아 도리아가 남긴 라틴어 문서에는 후계 지명의 순간이 적혀 있다. 그가 “이미 덕성과 장년의 분별을 갖추어 더는 후견이 필요 없고, 오히려 남을 다스리기에 알맞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조반니 안드레아는 1555년 무렵부터 제노바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1560년 종조부가 아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가문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물려받은 것은 작위만이 아니었다. 멜피 공작위, 투르시 후작위, 그리고 무엇보다 스페인 왕실과 맺은 함대 계약이 함께 넘어왔다. 문제는, 그 유산을 감당할 첫 시험이 이미 닥쳐 있었다는 점이다.
4. 제르바, 첫 단독 지휘가 참사로
1560년, 스무 살을 갓 넘긴 조반니 안드레아는 스페인과 교황령, 제노바가 함께 꾸린 기독교 연합함대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목표는 북아프리카 트리폴리 탈환이었다. 약 쉰네 척의 갤리선이 시칠리아 메시나에 모였다.
원정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식수가 떨어지고 병이 돌고 폭풍이 불자, 함대는 트리폴리를 포기하고 제르바 섬으로 물러나 그곳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5월 11일, 피얄레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가 허를 찔러 들이닥쳤다.
전투는 몇 시간 만에 끝났다. 기독교 갤리선의 절반가량이 나포되거나 가라앉았다. 조반니 안드레아는 작은 배로 빠져나갔고, 섬에 남은 병력의 지휘는 스페인 장군 알바로 데 산데에게 넘어갔다. 첫 단독 지휘가 참사로 끝나자 비난은 젊은 사령관에게 쏠렸다. 그의 군 경력은 승리가 아니라 패주로 시작된 셈이다.
5. 레판토, 우익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11년 뒤 레판토에서, 그는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이번에는 신성동맹 함대의 우익을 맡았다. 글 첫머리에서 본 그 장면이다.
그가 우익을 외해로 벌리면서 중앙과의 사이에 틈이 생겼고, 울루치 알리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몰타 기사단 기함이 나포되고 깃발이 넘어갔다. 도리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손쓸 수 없었다. 위기를 막은 것은 산타 크루스의 예비대였다.
전투가 끝나자 그의 부하 함장들부터 격분했다. 사령관이 보낸 신호를 배신의 징후로 받아들였다. 교황 비오 5세는 그를 불충하다며 가혹하게 몰아붙였고, 로마에 나타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 베네치아와 교황령 쪽에서는 그가 가문 소유의 제노바 갤리선을 아끼려고 일부러 결전을 피했다는 의혹이 돌았다.
변호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투 직전 도리아와 이야기를 나눈 스페인 사령관 루이스 데 레케센스는, 도리아가 “나머지 함대가 전개할 공간을 더 주려고” 외해로 벌리려 한다고 미리 말했다고 펠리페 2세에게 보고했다. 그가 본 것은 배신이 아니라 갤리선들 사이의 협조 실패였다.
6. 400년 동안 바뀐 평가
도리아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다시 쓰였다.
19세기 해군사가 알베르토 굴리엘모티는 레판토를 영웅들의 무대로 그리면서 도리아 한 사람에게만 악역을 맡겼다. 그를 “비열한 겁쟁이”로 못박은 이 서술은 이후 백 년 넘게 통념으로 굳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평가가 흔들렸다. 페르낭 브로델은 도리아가 악천후 속에서 자기 갤리선을 한 척도 잃지 않고 메시나로 데려온 점을 신중한 항해술로 평가했다. 알레산드로 바르베로와 니콜로 카포니는 그가 용감히 싸웠다고 보았다. 2024년 에밀리아노 베리는 “비겁자 도리아”라는 상 자체가 후대에 거듭 덧칠돼 만들어진 것임을 사료 비교로 보여주었다.
동시대 베네치아 역사가 파올로 파루타는 일찌감치 이렇게 적었다. “그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는 헤아리기가 너무 어렵다.” 비난도 변호도 끝내 그의 머릿속을 확정하지 못했다. 정작 도리아 본인의 좌우명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였다.
7. 갤리선을 빌려주는 귀족
전장의 도리아만 보면 그를 절반밖에 모르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업가의 얼굴이 있었다.
도리아 가문이 스페인 왕실과 맺은 것은 갤리선 임대 계약이었다. 자기 돈으로 갤리선단을 건조하고 운영한 뒤, 스페인 국왕에게 한 척당 연 6,000스쿠도를 받고 빌려주는 방식이다. 조반니 안드레아는 종조부에게서 이 계약을 물려받아 기본 열두 척을 굴렸다. 제르바에서 일곱 척을 잃기도 했지만 사업은 이어졌다.
1582년, 그는 보유한 갤리선 열 척을 아예 스페인 왕실에 넘겼다. 제노바의 해상력이 스페인 제국의 손에 들어가는 전환점이었다. 이듬해 펠리페 2세는 그를 “바다의 총사령관”에 임명했고, 본인 보수만 연 12,000스쿠도였다. 1606년 그가 죽었을 때 남긴 재산은 약 162만 금 스쿠도에 달했다. 그는 칼을 쥔 귀족이자, 함대를 빌려주고 이자를 셈하는 금융가이기도 했다.
8. 아들은 추기경이 되었다
조반니 안드레아의 둘째 아들 잔네티노는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길을 갔다. 갑옷 대신 추기경의 붉은 옷을 입었다.
스페인에서 수학한 그는 펠리페 2세의 추천으로 1604년, 서른한 살에 추기경이 되었다. 1608년부터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대주교로 죽을 때까지 재임했고, 시칠리아 부왕 자리를 임시로 네 차례 맡았다. 아버지가 갤리선과 대포로 권력을 행사했다면, 아들은 콘클라베와 총독부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한 집안에서 제독과 추기경이 나란히 나왔다.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는 1606년 2월 제노바에서 눈을 감았다. 멜피 공작위는 장남 안드레아에게 이어졌고, 그 후손은 훗날 도리아 팜필리 가문으로 이어져 오늘날 로마의 유명한 미술관에 이름을 남긴다.
그는 전설의 후계자였지만 전설이 되지는 못했다. 승리한 전투에서도 영웅이 되지 못했고, 패한 전투의 책임도 온전히 그의 것만은 아니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에 대한 평가가 한 번도 같은 자리에 머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후대는 그를 비겁자로 단죄했다가, 신중한 명장으로 복권했고, 끝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남겨두었다. 한 인간을 두고 후대가 이렇게 끝없이 마음을 바꿨다. 이 잊힌 제독이 남긴 것은 결국 그 흔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