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 H. 레터가 그린 레판토 해전 회화. 신성동맹과 오스만 함대의 갤리선이 좁은 바다에서 뒤엉켜 싸우는 조감 구도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1540?–1606) — 제노바 영웅의 후계자인가, 레판토의 겁쟁이인가

1571년 10월 7일 오전, 그리스 서해안 레판토 앞바다. 신성동맹 함대의 오른쪽 날개를 맡은 갤리선들이 천천히 남쪽으로 미끄러졌다. 지휘관은 제노바의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였다. 맞은편 오스만 좌익을 이끈 울루치 알리의 전열이 자기 쪽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다. 포위당할 위험을 본 그는 바깥쪽으로 함대를 벌렸다.

그 순간, 도리아의 우익과 함대 중앙 사이에 넓은 틈이 벌어졌다.

울루치 알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방향을 틀어 중앙의 측면으로 파고들었고 몰타 기사단의 기함을 에워싸 나포한 뒤 기사단 깃발을 빼앗았다. 벌어진 전열의 틈을 메운 것은 도리아가 아니라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산타 크루스 후작의 예비대였다. 전투는 신성동맹의 대승으로 끝났지만, 우익에서 벌어진 일은 그날 이후 400년간 도리아를 따라다닌다.

그는 명장이었나, 겁쟁이였나. 이 질문의 답은 시대마다 달라졌다.

1. 두 명의 도리아

안드레아 도리아라는 제독이 있다. 이탈리아 해군에 안드레아 도리아급 전함이 있을 정도로 이탈리아 해군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16세기 전반 지중해에서 오스만 함대를 여러 차례 상대한 제노바의 명장이다. 오스만을 상대로 한 가장 유명한 해전이 레판토이다 보니, 그를 레판토와 묶어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는 레판토를 보지 못했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1560년에 죽었고, 레판토 해전은 그로부터 11년 뒤인 1571년에 벌어졌다. 그날 신성동맹 함대의 우익을 지휘한 도리아는 다른 사람이다. 같은 가문에, 이름까지 절반이 겹치는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잔안드레아 도리아라고도 불린다. 전설적인 명장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그 대를 이어 가문과 함대를 물려받은 사람이다.

한국에선 그리 유명한 인물은 아니다. 단독으로 그를 다룬 한국어 단행본이나 논문, 방송은 거의 없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짧은 항목이 하나 있고, 레판토 해전을 다룬 국내 논문 몇 편이 그의 “이상한 기동”을 한 줄씩 언급할 뿐이다.

산티아고 기사단 십자가와 검을 갖춘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의 전신 초상
알레산드로 바이아니,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1594년경, 제노바 빌라 델 프린치페

2. 제노바를 다시 세운 가문

조반니 안드레아는 1539년에서 1540년 사이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잔네티노 도리아, 어머니는 제노바 거대 금융가 첸투리오네 가문의 딸 지네타였다. 도리아 가문은 당시 제노바 최고의 귀족이었고, 그 정점에는 종조부 안드레아 도리아가 있었다. 1528년 제노바를 프랑스의 지배에서 빼내 황제 카를 5세 편에 세우고, 도시의 공화 헌정을 새로 설계한 사람이 그였다. 제노바는 그를 “조국의 아버지”라 불렀고, 그는 황제의 함대를 이끄는 제독이자 도시 제일의 실권자로 평생을 군림했다.

제노바 해안에 자리한 빌라 델 프린치페의 르네상스 외관
제노바 빌라 델 프린치페(팔라초 도리아 팜필리). 안드레아 도리아가 세운 도리아 가문의 본저다. (사진 Marta1977, CC BY-SA 4.0)

하지만 안드레아 도리아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예순이 넘어 부유한 미망인 페레타 우소디마레와 결혼했으나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고, 데려온 의붓아들마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조카인 잔네티노를 후계자로 삼아 전 재산과 함대 지휘권을 물려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1547년 1월, 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

도리아와 더불어 제노바를 양분하던 명문 피에스키 가문이 도리아 일가를 제거하려 거병했다. 한밤중 소란에 놀라 항구로 달려나가던 잔네티노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병사가 쏜 화승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렇게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음모의 주동자인 잔 루이지 피에스키도 갤리선으로 건너가던 판자에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익사해 버린다. 리더가 사라지면서 피에스키의 거사는 그대로 실패로 끝났다. 아버지를 잃은 조반니 안드레아의 나이는 겨우 일고여덟 살이었다.

3. 후계자 만들기

조카인 잔네티노가 죽자 노년의 안드레아 도리아는 그 아들인 조반니 안드레아를 직접 거두어 키우기로 했다. 흔히 “손자”나 “양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공식 명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둘은 종조부와 종손 사이였고, 입양 절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안드레아는 그저 자기 자리를 이을 사람으로 이 아이를 골라 교육했을 뿐이다.

조반니 안드레아는 1555년 무렵부터 제노바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안드레아 도리아가 1559년에 남긴 라틴어 문서에는 후계 지명의 순간이 적혀 있다. 조반니 안드레아가 “이미 덕성과 장년의 분별을 갖추어 더는 후견이 필요 없고, 오히려 남을 다스리기에 알맞다”는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그리고 1560년 종조부가 아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는 가문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물려받은 것은 작위만이 아니었다. 멜피 공작위, 투르시 후작위, 그리고 무엇보다 스페인 왕실과 맺은 함대 계약이 함께 넘어왔다. 문제는, 그 유산을 감당할 첫 시험이 이미 닥쳐 있었다는 점이다.

바다의 신 넵투누스로 분한 노년의 안드레아 도리아 알레고리 초상
브론치노, 〈넵투누스로 분한 안드레아 도리아〉, 1545–46년경,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4. 제르바, 첫 단독 지휘가 참사로

1560년, 스무 살을 갓 넘긴 조반니 안드레아는 스페인과 교황령, 제노바가 함께 꾸린 기독교 연합함대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목표는 북아프리카 트리폴리 탈환이었다. 약 쉰네 척의 갤리선이 시칠리아 메시나에 모였다.

2월 10일 출항한 원정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식수가 떨어지고 병이 돌고 폭풍에 시달린 것이다. 함대는 트리폴리를 포기하고 제르바 섬으로 물러나 그곳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5월 11일, 피얄레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가 허를 찔러 들이닥쳤다.

전투는 몇 시간 만에 끝났다. 기독교 갤리선의 절반가량이 나포되거나 가라앉았다. 조반니 안드레아는 작은 배로 옮겨타 겨우 빠져나갔고, 섬에 남은 병력의 지휘는 스페인 장군 알바로 데 산데에게 넘어갔다. 첫 단독 지휘가 참사로 끝나자 비난은 젊은 사령관에게 쏠렸다. 그의 군 경력은 승리가 아니라 패주로 시작된 셈이다.

5. 레판토, 우익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11년 뒤 레판토에서, 그는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이번에는 신성동맹 함대의 우익을 맡았다. 글 첫머리에서 본 그 장면이다.

그가 우익을 외해로 벌리면서 중앙과의 사이에 틈이 생겼고, 울루치 알리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몰타 기사단 기함이 나포되고 깃발이 넘어갔다. 도리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손쓸 수 없었다. 위기를 막은 것은 산타 크루스의 예비대였다.

갤리선들이 뒤엉켜 백병전을 벌이는 레판토 해전 유화
코르넬리스 더 발, 〈레판토 해전〉, 17세기 전반, 개인 소장

전투가 끝나자 그의 부하 함장들부터 격분했다. 사령관이 보낸 신호를 배신의 징후로 받아들였다. 교황 비오 5세는 그를 불충하다며 가혹하게 몰아붙였고, 로마에 나타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 베네치아와 교황령 쪽에서는 그가 가문 소유의 제노바 갤리선을 아끼려고 일부러 결전을 피했다는 의혹이 돌았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변호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투 직전 도리아와 이야기를 나눈 스페인 사령관 루이스 데 레케센스는, 도리아가 “나머지 함대가 전개할 공간을 더 주려고” 외해로 벌리려 한다고 미리 말했다고 펠리페 2세에게 보고했다. 루이스 데 레케센스가 보기에는 이것은 배신이 아니었다. 도리아는 원래 작전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갤리선들 사이의 협조가 실패하며 그 작전이 제대로 풀리지 못한 것이었다.

6. 400년 동안 바뀐 평가

도리아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다.

동시대 베네치아 역사가 파올로 파루타는 일찌감치 이렇게 적었다. “그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는 헤아리기가 너무 어렵다.” 비난도 변호도 끝내 그의 머릿속을 확정하지 못했다. 정작 도리아 본인의 좌우명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였다.

19세기 해군사가 알베르토 굴리엘모티는 레판토를 영웅들의 무대로 그리면서 도리아 한 사람에게만 악역을 맡겼다. 그를 “비열한 겁쟁이”로 못박은 이 서술은 이후 백 년 넘게 통념으로 굳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평가가 바뀌기 시작했다. 페르낭 브로델은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가 악천후 속에서 자기 갤리선을 한 척도 잃지 않고 메시나로 데려온 점을 신중한 판단과 뛰어난 항해술로 평가했다. 알레산드로 바르베로와 니콜로 카포니는 그가 용감히 싸웠다고 보았다. 2024년 에밀리아노 베리는 “비겁자 도리아”라는 이미지 자체가 후대에 덮어씌워진 것임을 사료 비교로 보여주었다.

7. 갤리선이라는 사업

전장의 도리아만 보면 그를 절반밖에 모르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업가적인 기질도 있었다.

조반니 안드레아가 가문을 이어받기 전인 1528년부터 도리아 가문과 스페인 왕실 사이에는 갤리선 임대 계약이 있었다. 도리아 가문의 돈으로 갤리선단을 건조하고 운영한 뒤, 스페인 국왕에게 한 척당 연 6,000스쿠도를 받고 빌려주는 방식이다. 조반니 안드레아는 종조부에게서 이 계약을 물려받아 기본 열두 척을 굴렸다. 제르바에서 일곱 척을 잃기도 했지만 사업은 이어졌다.

1582년, 그는 보유한 갤리선 열 척을 아예 스페인 왕실에 넘겼다. 제노바의 해상력이 스페인 제국의 손에 들어가는 전환점이었다. 이듬해 펠리페 2세는 그를 “바다의 총사령관”에 임명했고, 본인 보수만 연 12,000스쿠도였다. 1606년 그가 죽었을 때 남긴 재산은 약 162만 스쿠도에 달했다. 스페인이 갤리선 한 척에 매년 치른 돈이 6,000스쿠도였으니, 그런 갤리선 수백 척을 한 해 동안 부릴 수 있는 액수이자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였다. 그는 칼을 쥔 귀족이자, 함대를 짓고 빌려주고 팔아 부를 쌓은 사업가이기도 했다.

8. 제독의 말년

아버지와 전혀 다른 길을 택한 조반니 안드레아의 둘째 아들 잔네티노는 갑옷 대신 추기경의 붉은 옷을 입었다.

스페인에서 수학한 그는 펠리페 2세의 추천으로 1604년, 서른한 살에 추기경이 되었다. 1608년부터는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대주교로 죽을 때까지 재임했고, 시칠리아 부왕 자리를 임시로 네 차례 맡았다. 아버지가 갤리선과 대포로 권력을 행사했다면, 아들은 콘클라베와 총독부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한 집안에서 제독과 추기경이 나란히 나온 것이다.

추기경의 붉은 옷을 입은 잔네티노 도리아의 초상
작가 미상, 〈추기경 잔네티노 도리아〉, 17세기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는 1606년 2월 제노바에서 눈을 감았다. 멜피 공작위는 장남 안드레아에게 이어졌고, 그 후손은 훗날 도리아 팜필리 가문으로 이어졌다. 그 이름은 오늘날 로마의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Galleria Doria Pamphilj)에 남아 있다.

그는 전설의 후계자였지만 전설이 되지는 못했다. 승리한 전투에서도 영웅이 되지 못했고, 패배한 전투에서는 과도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한 평가가 계속해서 변해 왔다는 것이다. 이미 당대 사람들은 그의 속을 읽지 못했고, 후대는 그를 비겁자로 단죄했다가 신중한 명장으로 복권했다. 한 인간을 두고 사람들이 이렇게 끝없이 마음을 바꿨다. 이 잊힌 제독이 남긴 것은 결국 그 흔들림이다.

출처

  • Rodolfo Savelli, “DORIA, Giovanni Andrea,”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vol. 41 (Istituto dell’Enciclopedia Italiana, 1992) —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의 생애·후계·재정을 다룬 표준 이탈리아 인명사전 항목.
  • Emiliano Beri, “Gian Andrea Doria e Uluç Alì a Lepanto. Una riflessione sulla tattica di battaglia tra flotte di galee nel Mediterraneo del XVI secolo,” Nuova Antologia Militare 19 (2024), pp. 35–70 — “비겁자 도리아” 이미지가 후대에 만들어졌음을 사료 비교로 분석한 2024년 논문.
  • Alessandro Barbero, Lepanto. La battaglia dei tre imperi (Laterza, 2010) — 레판토 전투 전후 18개월을 외교·심성사까지 아우른 종합 서술.
  • Roger Crowley, Empires of the Sea: The Siege of Malta, the Battle of Lepanto, and the Contest for the Center of the World (Random House, 2008) — 1520~1580년대 지중해 기독교·오스만 세력 충돌을 다룬 대중 역사서.
  • Angus Konstam, Lepanto 1571: The Greatest Naval Battle of the Renaissance (Osprey, 2003) — 레판토 해전의 함대 전개와 전개도를 상세히 다룬 전사(戰史).
  • Encyclopædia Britannica, “Battle of Lepanto.”

본문 이미지는 모두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자료(회화·초상)이며, 빌라 델 프린치페 사진은 촬영자 Marta1977의 CC BY-SA 4.0 저작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