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트 테니르스 2세가 그린 연금술사의 실험실, 화로와 증류기로 가득한 어두운 작업실에서 일하는 연금술사

독성학의 아버지 파라켈수스, 책을 불태운 떠돌이 의사

1527년 6월 24일, 스위스 바젤. 성 요한 축일 전야를 기념하는 모닥불이 광장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한 사람이 그 불 속으로 두꺼운 책 한 권을 던졌다. 아비센나의 《의학정전》, 당시 유럽 의학교육의 표준 교과서였다. 책을 불태운 사람은 얼마 전 바젤 대학에 신임 강사로 부임한 의사였다.

3주 뒤, 그는 또다시 일을 저지른다. 대학 당국이 보는 앞에서 갈렌과 아비센나의 저작을 불태운 것이다. 천 년 넘게 의학계의 권위자로 군림해온 이름들이었다. 책을 태우면서 그가 한 말의 취지는 분명했다. 진짜 스승은 죽은 책이 아니라 자연과 환자의 몸이라는 것이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다. 본명은 테오프라스투스 봄바스투스 폰 호엔하임. 오늘날 그는 “독성학의 아버지”, “의학에 화학을 들여온 선구자”로 불린다. 그러나 이런 별명들은 대부분 후대가 골라 붙인 것이고, 이런 별명을 만든 그의 가장 유명한 문장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세상에 나왔다.

1. 광산 마을의 의사 아들

파라켈수스는 1493년경 스위스 아인지델른(Einsiedeln)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받은 이름은 테오프라스투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를 이어 아테네 리케이온을 이끈 고대 그리스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고전 고대의 이름을 즐겨 붙이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유행이었고, 의사였던 아버지 빌헬름 폰 호엔하임의 학식이 엿보이는 작명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 이 그리스식 이름을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한다.

흔히 그를 부르는 파라켈수스 역시 본명이 아니라 뒷날 굳어진 필명이다. 그리스어 접두사 파라(para, 넘어선)에 1세기 로마의 의학 저술가 켈수스(Celsus)를 붙인 이름인데, “켈수스를 넘어선다”는 자기 선언으로 읽기도 하고, 가문명 호엔하임(Hohenheim, “높은 터”)을 라틴어 켈수스(celsus, 높은)로 옮긴 말로 보기도 한다. 누가 언제 처음 붙였는지조차 분명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빌헬름은 슈바벤 귀족 가문의 서자 혈통이었다. 어머니가 그가 아홉 살 무렵인 1502년경 세상을 떠나자, 부자는 케른텐(오스트리아 남부) 지방의 필라흐(Villach)로 옮겨 갔다. 이곳은 광산과 제련소가 모여 있는 광업 중심지였고, 아버지는 그곳 광산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의사는 약을 짓느라 광물과 화학을 다뤘으니, 광석을 감별하고 제련을 감독할 사람을 길러내던 이 학교와 잘 맞았다. 학교를 세운 곳은 아우크스부르크의 거상 푸거(Fugger) 가문이었다. 이 이름은 뒷날 그의 인생에 다시 한번 끼어든다. 주변 환경이 이러하다 보니 어린 파라켈수스는 광부들과 금속, 광물을 일상적으로 접하며 자랐다.

이런 성장 환경은 나중에 그의 의학 세계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됐다. 파라켈수스가 약으로 쓴 것은 전통적인 식물 위주의 약재가 아니라 수은, 황, 철, 구리 같은 금속과 광물이었다. 광부들이 앓던 폐병을 직업병으로 처음 주목한 것도 이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아우구스틴 히르슈포겔이 1538년에 제작한 파라켈수스 판화 초상
파라켈수스의 생전 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한다. 아우구스틴 히르슈포겔의 판화, 1538년.

2. 학위가 의심받는 떠돌이

파라켈수스는 빈 등지에서 공부한 뒤 1515년이나 1516년경 이탈리아 페라라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학위에 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정말 학위를 마쳤는지조차 오늘날 학계는 단정하지 못한다. 다만 자격 시비가 후대만의 일은 아니었다. 당대에도 동료 의사들은 라틴어가 서툴고 정규 대학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은 그를 못 미더운 떠돌이로 깎아내렸다.

떠도는 삶이 학위 문제 탓만은 아니었다. 당시 의학도에게 편력은 흔한 수업 과정이었고, 무엇보다 그는 대학 강의실 밖에서 실전을 통해 의학을 익히고자 하는 욕심이 컸다. 1517년 무렵부터 그는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이탈리아를 떠돌며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군의관 일은 생계 수단인 동시에, 총상과 절단과 감염이 넘쳐나는 전쟁터에서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실전 지식을 습득하는 기회였다.

파라켈수스의 전기 중에는 스페인과 영국, 이집트, 레반트에서도 일을 했다는 기록과 심지어 러시아에서 타타르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들도 있다. 다만 이런 여행담은 확인할 길이 없는 전승에 가깝다. 분명한 것은 그가 한 도시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살았다는 것이다.

3. 바젤의 1년

1527년, 방랑하던 그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 당시 바젤의 이름난 인쇄업자 요한 프로벤이 다리 감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모든 의사들이 절단을 권했다. 하지만 파라켈수스는 다리를 자르지 않고 그를 치료해내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이다. 이 일로 명성을 얻은 그는 바젤의 시의(市醫) 겸 대학 강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기존 의학계의 권위를 부정하는 두 가지 도발을 저질렀다. 하나는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강의한 것이다. 당시 대학 강의는 라틴어가 당연한 규칙이었다. 독일어 강의는 라틴어를 모르는 평민도 의학을 들을 수 있다는 뜻이었고, 엘리트 의사들에게는 모욕이었다. 다른 하나가 앞서 본 책 소각이었다.

파라켈수스 《대외과서》 1536년판 속표지 목판화
파라켈수스가 생전에 가장 크게 성공한 저작 《대외과서(Die grosse Wundartzney)》의 속표지. 아우크스부르크, 1536년. (British Museum)

그러나 그의 바젤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발단은 코르넬리우스 폰 리히텐펠스(Cornelius von Lichtenfels)라는 대성당 참사회원과의 진료비 분쟁이었다. 다른 의사들이 모두 손을 든 급성 복통을 파라켈수스가 아편을 넣은 알약으로 잡아주었고, 그 대가로 약속한 돈은 당시로선 거액인 100굴덴이었다. 그런데 다 낫고 나자 리히텐펠스는 약속을 어기고 사례를 떼먹었다. 파라켈수스가 미지급을 걸어 소송을 냈지만 법정은 성직자의 손을 들어주었고, 분을 참지 못한 그는 판결을 내린 시 행정관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체포될 위기에 몰린 그는 1528년 2월 야반도주하듯 바젤을 떠났다. 그의 빛나는 공식 경력은 채 1년을 채우지 못했다.

4. 황과 수은과 염

파라켈수스가 의학계의 상식을 거부하고 권위를 파괴하면서까지 새롭게 주장한 학설이 무엇인지 보면, 그의 도발이 단순한 객기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의학의 토대는 갈렌과 아비센나가 물려준 4체액설이었다.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균형이 깨지면 병이 나고, 그래서 피를 뽑거나 관장으로 균형을 되돌린다는 이론이었다. 파라켈수스는 이 체계 전체를 거부했다.

그는 대신 세 가지 기본 원소를 제시했다. 타는 성질의 황(Sulphur), 흐르고 증발하는 수은(Mercury), 굳어 남는 염(Salt). 이 삼원소(tria prima)가 만물과 인체를 이룬다고 보았다. 더 중요한 것은 질병을 보는 시각이었다. 그는 병을 체액의 불균형이 아니라, 몸 바깥에서 들어온 특정한 무언가가 한 곳에서 일으키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이 발상은 훗날 질병마다 고유한 원인이 있다는 근대적 사고로 이어진다. 물론 그 자신은 여전히 점성술과 신비주의에 영향을 깊게 받던 16세기의 세계관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이 점은 과학이 더 발달한 현대를 사는 우리의 시각에서는 한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5. 용량이 독을 만든다

파라켈수스를 오늘날까지 유명하게 만든 문장이 하나 있다. “모든 것이 독이고, 독 아닌 것은 없다. 하지만 얼마만큼의 용량을 쓰느냐에 따라서 독도 독이 아니게 된다.”

물질 자체에 선악이 있는 게 아니라 양이 문제라는 이 생각은 현대 독성학과 약리학의 출발점으로 자주 인용된다. 약이든 독이든, 카페인이든 알코올이든, 얼마를 쓰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다. 이 한 문장 덕분에 그는 “독성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반전이 두 가지 있다. 우선 라틴어로 흔히 인용되는 “Sola dosis facit venenum”은 그가 쓴 말이 아니라 후대가 라틴어로 다듬은 것이다. 원문은 독일어였다. 앞서 말했듯 그는 강의도 독일어로 했던 사람이다. 두 번째 반전은 파라켈수스의 가장 유명한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문장이 그의 생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1538년에 집필한 《일곱 개의 방어(Septem Defensiones)》라는 책에 적혀 있는데 그의 생전에 출판이 되지 못했다. 이 책의 원고는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1563년 우연히 다시 발견이 되면서 1564년에 최초로 인쇄가 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23년 전 세상을 떠난 후였다.

6. 잘츠부르크의 의문사

바젤에서 도망친 뒤로도 떠도는 삶은 계속됐다. 그의 저작 상당수는 끝내 활자가 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1529년 뉘른베르크에 머물 때 쓴 매독(당시 표현으로 “프랑스병”) 논고가 그랬다. 그는 당시 매독 특효약으로 통하던 유창목(과이아쿰) 요법을 효과 없는 사기라고 몰아붙였는데, 이 비싼 약재를 독점 수입하던 곳이 바로 푸거 가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어린 시절 그를 길러낸 광산학교를 세운 바로 그 가문이, 이번에는 그의 글을 가로막는 적으로 돌아온 셈이다. 결국 라이프치히 대학 의학부가 나서 이 논고의 출판을 막았고, 뉘른베르크 시 당국과도 충돌하면서 매독 연구는 인쇄될 길을 잃었다. 그래도 예외가 하나 있었다. 1536년에 펴낸 《대외과서》는 그의 생전 가장 큰 성공작이었다. 짐승에게 물린 상처와 골절, 화상, 총상, 매독까지 외과의가 마주하는 거의 모든 상처의 처치법을 담은 실용서였는데,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써서 라틴어를 모르는 현장 외과의도 직접 읽을 수 있었다. 고전 권위 대신 실제로 효과가 입증된 처치를 앞세운 점도 분명했다. 이 책으로 그는 바젤에서 얻었던 명성을 되살렸다. 효과적인 기술에 목마르던 외과의들은 환영했지만, 갈렌을 떠받들던 전통 의사들은 경계했다. 다만 책의 성공도 생계의 안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는 끝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했다.

말년에 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에른스트의 초청으로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그가 이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학 강단에 선 흔적은 없고, 예전처럼 온천을 드나드는 도시 사람들과 어울리며 의사로 지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541년 9월 21일, 그는 백마 여관의 한 방에서 유언을 구술했다. 아인지델른의 친지와 잘츠부르크의 친구들에게 재산을 나누고, 남은 것은 도시의 빈민에게 넘기라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인 9월 24일 그는 숨을 거뒀다. 향년 마흔여덟 안팎이었다. 유언대로 그의 시신은 성 제바스티안의 빈민 묘지에 묻혔다.

사망 원인은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연금술 실험으로 쌓인 수은 중독이라는 설, 그를 미워한 의사들에게 떠밀려 머리를 다쳤다는 타살설,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었다는 자연사설이 뒤섞여 있다. 1880년 그의 유해를 발굴했을 때 두개골에서 골절이 발견됐지만, 후대 연구는 이를 타살의 증거라기보다 구루병 같은 병변으로 본다. 파라켈수스는 광부의 직업병을 누구보다 먼저 꿰뚫어 본 탁월한 의사였지만, 정작 무엇이 자신을 죽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아그리콜라 《데 레 메탈리카》에 실린 16세기 광산 작업 목판화
16세기 광산의 작업 광경.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 《데 레 메탈리카》, 1556년. 파라켈수스는 광부의 폐병을 직업병으로 처음 주목했다.

7. 사후에 더 커진 이름

생전의 파라켈수스는 변방의 떠돌이였다. 그러나 사후의 그는 거인이 됐다. 1589년부터 1591년까지 바젤의 의사 요한 후저가 흩어진 원고를 모아 전집을 펴냈고, 17세기에는 그의 이름을 딴 파라켈수스주의와 의화학(화학으로 질병을 설명하는 의학)이 융성했다. 런던 왕립의사회의 1618년 약전에도 그의 방식이 수록됐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파라켈수스는 끊임없이 소환됐다. 19세기 낭만주의는 그를 지식을 좇는 고독한 천재로 그렸고, 20세기 심리학자 융은 그에게서 연금술적 사고의 원형을 읽어내 두 편의 글을 바쳤다. 과학사가 브루스 모런은 이런 시각을 비판한다. “고독한 천재”, “낭만적 영웅”, “독성학의 아버지” 같은 이름은 모두 후대가 시대마다 자기 필요에 따라 그에게 덧씌운 라벨이라는 것이다. 정작 파라켈수스 본인은 화학과 마법, 의학과 신비주의가 하나로 얽힌 르네상스적 세계 안에 살았다.

8. 한국에서의 파라켈수스

앞서 “사후에 거인이 됐다”고 적었지만 한국에서 그를 거인이라 부르기는 애매하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파라켈수스 항목은 250단어 남짓한 토막글이다. 영어판이 1만 단어에 가까운 것과 대조된다. 제대로 된 단독 평전은 1997년에 번역된 소형 전기 한 권이 사실상 전부이고, 그마저 지금은 절판됐다. 본격적인 학술 논문도 1995년과 2021년에 나온 두 편 정도로, 그 사이가 26년이다.

한국에서 그는 주로 세 가지 이미지로만 소비된다. “용량이 독을 만든다”는 격언의 출처, 전설적인 연금술사, 권위에 반항한 의사. 세 이미지 모두 후대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이 받아들인 것은 주로 첫 번째, “독성학 격언을 남긴 사람”이라는 이미지다.

정작 그 문장을 남긴 사람이 평생 학위를 의심받고, 도시에서 쫓겨나고, 의문 속에 죽은 떠돌이였다는 사실은 그 격언 뒤에 가려져 있다. 책을 불태우며 권위에 항거한 그 행위가 단순한 객기였는지, 선구자의 혁명 시도였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지만, 적어도 그가 책에 쓴 문장 하나를 아는 것만으로는 그를 다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