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을 지킨 여자 — 크리스티나 닐스도테르 예렌스티에르나 (1494-1559)
Q: 크리스티나 닐스도테르 예렌스티에르나는 누구인가?
A: 1494년경 스웨덴 상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559년 호르닝스홀름 성에서 사망한 귀족 여성이자 정치가다. 1511년 스웨덴 섭정 스텐 스투레 2세와 결혼해 스웨덴 실권 가문의 일원이 되었고, 1520년 남편이 덴마크와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자 스톡홀름 방어를 이끌며 칼마르 연합 말기 반덴마크 저항의 상징이 됐다. 같은 해 9월 사면을 약속받고 항복했으나, 그해 11월 8일과 9일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 귀족과 성직자 80여 명을 처형하는 스톡홀름 피의 학살을 자행했다. 크리스티나는 덴마크로 끌려가 1524년까지 감금됐다. 귀국 후 1527년 요한 투레손과 재혼했지만 정치 전면에서는 물러났고, 스웨덴 독립을 이룬 구스타브 바사 왕조 아래에서도 역할은 제한됐다. 후대에는 스웨덴 독립 서사의 여영웅으로 기념되지만, 그녀의 생애는 덴마크 왕권·한자동맹·신생 바사 왕조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 정치적 생존의 역사였다.
한눈에 보는 크리스티나
| 항목 | 내용 |
|---|---|
| 본명 | Kristina Nilsdotter Gyllenstierna |
| 생몰 | c.1494 – 1559년 1월 5일, 호르닝스홀름 성 |
| 부친 | 닐스 에리크손 예렌스티에르나 (스웨덴 상위 귀족) |
| 모친 | 시그리드 에스킬스도테르 바네르 |
| 첫 번째 남편 | 스텐 스반테손 스투레 2세, 1511년 11월 16일 결혼 |
| 두 번째 남편 | 요한 투레손 트레 로소르, 1527년 재혼 |
| 남편 사망 | 1520년 2월 3일, 아순덴 호수 인근 전투 후 사망 |
| 스톡홀름 방어 | 1520년 봄–가을 |
| 항복 | 1520년 9월, 사면 조건 |
| 덴마크 감금 | 1521–1524년 |
| 귀국 후 | 공개 정치에서 후퇴, 1527년 재혼 |
| 사망지 | 호르닝스홀름 성 (덴마크령 질란드 섬) |
| 주요 기념 | 스웨덴 독립 서사의 ‘스톡홀름 수호자’ |
1520년 1월 19일, 아순덴 호수 인근 전투에서 스텐 스투레가 대포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두 주가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썰매 위에서 죽었다. 스웨덴 반덴마크 진영의 리더가 사라진 것이다. 그 순간부터 스톡홀름을 지키는 책임은 미망인 크리스티나의 어깨에 얹혔다.
1. 칼마르 연합의 균열 지점에서 태어나다
칼마르 연합은 1397년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세 왕국이 하나의 군주 아래 묶인 연합이었다. 명목상 하나로 묶여 있었지만 스웨덴 내부에서는 덴마크 중심의 체제에 저항하는 귀족 세력이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다. 15세기 후반부터는 스투레 가문이 스웨덴 섭정 자리를 독점하다시피 하며 이 저항의 중심에 섰다.
크리스티나가 태어난 1490년대는 그 충돌이 주기적으로 폭발하던 시기였다. 아버지 닐스 에리크손 예렌스티에르나는 스웨덴 상위 귀족 네트워크의 일원이었고, 크리스티나는 그 안에서 태어나 귀족 정치의 문법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1511년 11월 16일, 그녀는 스텐 스반테손 스투레와 결혼했다. 이듬해 스텐의 아버지 스반테 닐손이 사망하면서 스텐이 섭정 자리를 물려받았다. 결혼 일 년 만에 크리스티나는 스웨덴 실권자의 아내가 됐다.
2. 남편의 죽음, 그리고 방어전
칼 구스타프 헬크비스트(Carl Gustaf Hellqvist), Sten Stures den yngres död på Mälarens is(1880). 스웨덴 국립박물관(NM 1558) /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아순덴 전투 후 썰매 위에서 사망하는 스텐 스투레를 그린 19세기 역사화.
1520년 초,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는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스웨덴으로 밀고 들어왔다. 스투레 가문이 수십 년간 섭정 자리를 독점하며 덴마크 왕권의 실질 지배를 거부해 온 것을 군사력으로 끝내려는 시도였다. 1월 19일 아순덴 인근 전투에서 스텐은 대포에 맞아 두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썰매에 실려 스톡홀름으로 후송되던 그는 2월 3일 숨을 거뒀다.
스텐이 죽으면서 스웨덴 반덴마크 저항 세력은 구심점을 잃었고, 덴마크군은 계속 전진해 스톡홀름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 상황에서 크리스티나가 도시 방어의 상징적·실질적 중심으로 나섰다.
방어전은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졌다. 역사 기록은 그녀를 단순히 성에 갇혀 있던 인물이 아니라, 귀족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저항 의지를 결집시킨 정치 리더로 묘사한다. 그러나 군사적 현실은 냉혹했다. 스톡홀름은 고립됐고, 외부 지원은 없었다.
1520년 9월, 크리스티나는 크리스티안 2세로부터 사면 약속을 받고 항복을 수락했다. 더 버티면 도시 전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배신이라기보다는 귀족 정치의 문법 안에서 도출된 계산이었다.
3. 스톡홀름 피의 학살
스톡홀름 피의 학살을 묘사한 판화(1676년, Hans Kruse & Cort Steinkamp 원작 1524년 목판화 바탕).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1520년 11월 8일, 크리스티안 2세는 스웨덴 독립을 주도했던 귀족, 성직자, 시민 다수를 스톡홀름 광장에 집결시켰다. 이튿날까지 이어진 처형에서 8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이 스톡홀름 피의 학살이다.
학살의 명분은 이단 혐의였다. 덴마크 왕권은 법적 형식과 종교적 언어를 동원해 스웨덴 반대파를 ‘교회의 적’으로 규정했고, 이를 통해 연합 질서를 강제로 복원하려 했다. 실제 효과는 정반대였다. 학살 소식이 스웨덴 전역에 퍼지면서 반덴마크 감정이 폭발했고, 분열돼 있던 저항 세력이 하나로 묶였다.
크리스티나에게는 개인적 파멸이기도 했다. 항복의 조건이었던 사면 약속은 휴지 조각이 됐고, 그녀는 가까운 친족과 동지들이 처형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남편 스텐 스투레의 유해가 파헤쳐져 소각됐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적대 진영의 기억과 명예를 말살하려는 정치적 행위였다.
4. 덴마크·한자동맹·외레순드 해협
크리스티나의 이야기를 스웨덴 국내 정치만으로 설명하면 반쪽짜리가 된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발트해를 둘러싼 항구 패권 다툼이 있었다.
덴마크는 코펜하겐과 헬싱외르를 발판으로 외레순드 해협을 장악하고 있었다. 외레순드 톨은 발트해를 드나드는 모든 외국 선박이 헬싱외르에서 멈춰 관세를 내게 하는 제도로, 16세기와 17세기 덴마크 국고 수입의 최대 3분의 2를 차지했다. 발트해를 바다가 아닌 과세 가능한 병목지대로 본 것이다.
이 톨에 가장 불만이 많았던 쪽은 한자동맹이었다. 뤼베크를 중심으로 발트해 도시들을 연결한 한자동맹의 상인들은 덴마크의 해협 장악이 강화될수록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든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한자동맹은 스웨덴 내의 반덴마크 저항 세력과 이해관계를 공유하게 됐다.
외레순드 톨이 어떻게 도입돼 1428년 코펜하겐 포격과 덴마크·한자 전쟁으로 이어졌고, 1857년 폐지까지 북유럽 패권을 좌우했는지는 외레순드 통행세를 다룬 글에서 따로 정리했다.
5. 뤼베크가 시간을 함대로 바꿨다
크리스티나가 스톡홀름에서 버티는 동안, 뤼베크에서는 다른 일이 진행됐다. 스투레파 귀족 출신으로 덴마크 침공 당시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구스타브 바사가 뤼베크와 접촉해 군함과 물자, 자금까지 지원해줄 것을 약속 받았다. 결국 1522년 무렵 그는 달라르나 농민과 한자동맹의 지원을 바탕으로 덴마크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다.
분노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었다. 뤼베크라는 해상·금융 거점의 도움이 반란군의 열망을 실제 전쟁 수행 능력으로 바꿔 준 것이다. 크리스티나가 스톡홀름에서 시간을 번 사이, 뤼베크는 그 시간을 함대로 바꿔 줬다.
1523년 구스타브 바사가 왕위에 올랐다. 세 나라가 뭉친 칼마르 연합의 역사는 사실상 끝이 났고, 발트해 질서는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6. 스웨덴의 독립, 조용한 후퇴
구스타브 바사의 즉위가 크리스티나의 복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1524년 덴마크에서 돌아왔고 생존했지만, 정치 전면에서는 물러났다. 1527년 요한 투레손과 재혼했고, 이후의 삶은 조용했다.
구스타브 바사는 스웨덴 독립의 유일한 상징으로 자리 잡기 위해, 스투레파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완전히 포용하지 않으려 했다. 크리스티나는 반덴마크 저항의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새 왕조의 권위에 잠재적 경쟁이 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개인 권력의 차원에서 보면 그녀는 남편, 친족, 정치 기반을 잃고 끝내 권력의 핵심에 다시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역사적인 차원에서 보면 스톡홀름에서의 저항을 이끈 그녀의 리더십이 결과적으로 스웨덴의 독립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완전한 실패라고 보기도 어렵다. 개인적으로 해피엔딩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정치적인 목적은 결국 달성했기 때문이다.
7. 기억의 재구성
크리스티나는 1559년 1월 5일 호르닝스홀름 성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죽은 뒤, 후대는 그녀를 영웅으로 재구성했다. “스톡홀름의 수호자”라는 호칭이 붙었고, 스웨덴 국민의 기억 한 켠에 자리하게 됐다.
그녀는 단순한 상징적 존재가 아니었다. 항복을 선택한 것도, 덴마크의 폭정에 인내한 것도, 재혼 후 새 정권 하에서 조용히 은거한 것도 모두 냉정한 정치 리더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비운의 미망인도, 가녀린 여인도 아니다. 칼마르 연합 말기 발트해 질서의 균열 속에서 덴마크 왕권·한자동맹·바사 왕조가 교차하는 순간을 버텨 낸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