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레순드 통행세: 상인들이 왕국을 무너뜨린 발트해 관세 전쟁
1497년 봄, 네덜란드 호른 항구를 출발한 선박 한 척이 포르투갈에서 소금 126라스트를 싣고 외레순드 해협에 들어섰다. 선장은 빌렘 블로커르였다. 해협의 가장 좁은 길목에 이르자 돛을 내려야 했다. 덴마크의 헬싱외르 항에 닻을 내리고 선장은 직접 세관소에 출두해 화물 목록을 제출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외레순드 통행 기록부에서 가장 오래된 항목 중 하나다. 1574년부터 1857년까지 연속 기록되는 이 기록부에는 이 해협을 지나간 약 180만 건의 항해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 가장 오래된 기록(1497년)이 남기 68년 전, 덴마크는 이 바다에 요금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요금소 하나가 북유럽 역사를 통째로 바꾸는 시발점이 됐다.
좁은 바다의 요금소
외레순드 해협은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수로다. 가장 좁은 곳의 폭이 4킬로미터도 안 되는데 발트해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덴마크는 양안에 요새를 세웠다. 헬싱외르 쪽의 크로겐(뒤에 크론보르그로 재건), 건너편 스코네 땅의 헬싱보리. 대포 사정거리 안에 해협 전체가 들어왔다.
게오르크 브라운·프란스 호겐베르크, Civitates Orbis Terrarum의 헬싱외르(1582). 해협을 지키는 크론보르그 성과 통행세를 내려 멈춘 배들이 보인다.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포메라니아 출신 덴마크 왕 에리크 7세가 1429년 이 해협에 통행세를 도입했다. 외레순드 톨(Øresund Toll, 영어로는 Sound Dues)이다. 모든 외국 선박은 헬싱외르에 기항해 돛을 내리고 선장이 직접 세관소에 출두해 화물 목록을 신고하고 세금을 냈다. 포도주는 화물의 30분의 1을 현물로, 소금도 일부를 현물로 냈다. 일반 화물은 현금이었다.
덴마크는 한 가지 장치를 더 마련했다. 선취권이다. 신고 가격이 지나치게 낮다 싶으면 덴마크 왕실이 그 가격 그대로 화물 전체를 매입할 수 있었다. 값을 낮게 신고하면 화물을 빼앗길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성실 신고가 유도되는 구조였다.
수입은 꾸준히 늘었다. 1497년 약 4,700달레르였던 세수는 1560년 2만 4,000달레르로 올랐다. 1567년 종가세 개혁, 즉 화물 신고가의 1~2%를 내는 방식으로 전환한 첫 해에는 13만 3,000달레르로 뛰었다. 전성기인 1639년에는 62만 릭스달레르. 한때 이 수입이 덴마크 왕실 세수의 거의 절반에서 3분의 2에 달했다고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한자 여왕 뤼베크
이 요금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쪽은 한자동맹이었다.
한자동맹은 13세기부터 북독일 해상 도시들이 결성한 상인 연합으로 뤼베크(Lübeck)가 그 중심이었다. 1502년 기준 인구 2만 5,444명의 이 도시는 트라베강과 바케니츠강이 둘러싼 1킬로미터 남짓한 타원형 섬 위에 세워졌다. 강변에는 소금 창고(Salzspeicher)가 늘어섰고 1398년에 완공된 슈테크니츠 운하는 내륙의 소금을 항구로 실어 날랐다. 유럽 최초의 분수령 운하였다.
뉘른베르크 연대기(Schedelsche Weltchronik, 1493)에 실린 뤼베크. 성벽과 첨탑이 늘어선 한자동맹의 중심 도시였다.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뤼베크가 ‘한자 여왕’으로 불린 이유는 세 가지였다. 지리적으로 북해와 발트해를 잇는 환적 허브였고 1226년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자유제국도시 지위를 얻어 어떤 제후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뤼베크 시법이 발트 지역 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채택됐다. 함부르크, 로스토크, 단치히, 탈린이 모두 뤼베크 법을 썼다.
한자의 항구들은 저마다 특화된 상품이 있었다. 단치히는 폴란드의 호밀과 목재, 탈린은 러시아로 가는 길목에서 통과세를 받았고 리가는 모피와 밀랍의 집산지였다. 뤼베크는 소금과 청어를 다루는 한편, 이 모든 흐름이 모이고 흩어지는 중심이었다. 외레순드 해협은 이 네트워크의 핵심 동맥이었다.
상인들의 전쟁
에리크 7세의 통행세는 한자 도시들이 1370년 슈트랄준트 조약으로 얻어낸 면세 특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조치였다. 1426년, 뤼베크를 비롯한 6개 벤트 도시가 덴마크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 전쟁은 군대와 군대가 맞붙는 전쟁이 아니었다. 상인 도시 연합이 왕국과 싸우는 전쟁이었다. 한자 측은 260척의 함선과 1만 2,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1428년 봄, 이 함대가 코펜하겐을 포격했다. 에리크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왕비 필리파가 직접 지상군을 지휘해 격퇴했다.
덴마크는 이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은 그 뒤로도 몇 해를 더 끌었다. 한자의 해상 봉쇄로 발트해 교역로가 묶였고, 덴마크의 반격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길어진 소모전 끝에 에리크 왕은 결국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1435년, 포르딩보르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한자 도시들은 외레순드 통행세를 면제받았다. 덴마크는 요금소를 유지했지만 가장 큰 고객에게는 무료 통행을 허락해야 했다. 겉으로는 절충이었지만 한자의 승리였다.
피의 학살, 그리고 장부
그로부터 85년 뒤, 발트해 패권 구도를 완전히 뒤흔드는 사건이 스톡홀름에서 벌어졌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는 당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을 하나로 묶은 칼마르 연합의 왕이었다. 명목상 스웨덴도 그의 땅이었지만 스웨덴 귀족들의 저항이 거셌다. 그는 스웨덴을 실제로 장악하려고 군대를 보냈고, 독립파를 이끌던 섭정 스텐 스투레가 1520년 초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숨졌다. 저항의 마지막 거점은 스톡홀름 하나만 남았다. 성을 넉 달 동안 지켜낸 이는 스텐 스투레의 미망인, 크리스티나 예렌스티에르나였다. 남편을 대신해 도시를 이끈 그녀를 시민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로 따랐다.
1520년 9월, 크리스티나는 사면 약속을 받고 항복했다. 마침내 스톡홀름이 떨어졌다. 크리스티안도 처음에는 사면 약속을 지키는 듯했다. 11월 4일, 그는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스웨덴 국왕으로 대관했고, 사흘 동안 트레 크로나 성에서 축하 연회가 이어졌다. 한때 자신에게 맞섰던 스웨덴 귀족들에게도 관대하게 굴어, 지난 일은 덮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11월 7일, 연회에 모인 손님들을 가둔 채 성문이 잠겼다.
여기서 대주교 구스타프 트롤레가 나섰다. 트롤레는 스웨덴 교회의 수장인 웁살라 대주교였지만, 친덴마크 성향 탓에 독립파 섭정 스텐 스투레와 부딪혔다. 1517년 스웨덴 의회는 그를 대주교직에서 끌어내렸고, 멜라렌 호숫가에 있던 그의 요새 알마레스테켓(Almarestäket)을 허물어 버렸다. 3년 동안 앙심을 키워온 그는 크리스티안 2세의 손에 복권되자, 자신을 몰아내고 교회 재산을 부순 자들의 명단을 만들어 이단으로 고발했다. 교회법에 따르면 이단자는 사면 약속과 무관하게 처형할 수 있었다. 사면을 무효로 되돌릴 법적 명분이었다. 11월 8일, 대광장에서 처형이 시작됐다. 주교 두 명을 시작으로, 귀족 14명, 시장 3인, 시의원 14명, 평민 약 20명이 참수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집행관의 기록에는 총 82명.
스톡홀름 피의 학살을 묘사한 판화(1676년, 1524년 목판화 원본 바탕). 대광장에서 벌어진 처형 장면이다.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처형을 지켜보던 상인 라세 하스는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처형됐다. 목격자 올라우스 페트리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처형된 귀족 중에는 에리크 요한손 바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구스타프는 그 자리에 없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구스타프는 1518년 크리스티안 2세에게 인질로 붙잡혀 덴마크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탈출해 뤼베크로 달아난 몸이었다. 뤼베크는 그를 덴마크에 넘기지 않고 보호했고, 1520년 봄 그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시골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가 목숨을 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미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학살 소식이 퍼졌을 때, 코펜하겐에서는 이제 연합이 안정되겠다는 말이 나왔다. 뤼베크에서는 장부를 꺼냈다.
뤼베크의 베팅
아버지가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구스타프 바사는 스웨덴 중부의 달라르나 지방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봉기를 호소했다. 그러나 모라 주민들이 응하지 않자, 그는 스웨덴을 단념하고 노르웨이 쪽으로 향했다. 그가 떠난 뒤 크리스티안의 만행이 전해지자 주민들은 뒤늦게 마음을 바꿨고, 스키를 잘 타는 사람 둘을 보내 살렌까지 쫓아가 그를 데려왔다고 전한다. 돌아온 구스타프가 봉기를 이끌면서 스웨덴 독립 전쟁이 시작됐다.
뤼베크 의회는 이 상황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크리스티안 2세가 칼마르 연합을 완전히 장악하면 발트해 내에서 한자동맹의 입지는 더 좁아질 터였다. 1522년, 뤼베크 의회원 베렌트 봄호버와 헤르만 플뢰니스가 함대를 이끌고 스웨덴 작전에 참가했다. 뤼베크 의회는 군함과 대포, 병력과 자금을 지원했고, 그 대신 구스타프는 한자동맹에 스웨덴 내 관세 면제와 무역 특권을 약속했다.
뤼베크 함대가 가세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구스타프의 군대는 덴마크 세력을 스웨덴 본토에서 차례로 몰아냈고, 마지막까지 덴마크 수비대가 버티던 스톡홀름은 뤼베크 함대의 해상 봉쇄에 갇혀 고립됐다. 1523년 6월 6일, 구스타프 바사는 스트렝네스 의회에서 스웨덴 왕으로 선출됐다. 보름 뒤인 6월 21일, 마침내 항복한 스톡홀름의 성문 열쇠는 봉쇄를 지휘한 뤼베크 사령관 봄호버와 플뢰니스에게 먼저 넘어갔다. 도시를 무릎 꿇린 실질적 힘이 그들의 함대였기 때문이다.
칼마르 연합을 끝낸 공식 조약은 따로 없었다. 스웨덴이 사실상 독립해 버리면서 연합이 흐지부지된 것이다. 덴마크가 이를 정식으로 인정한 것은 이듬해였다. 1524년 9월 말뫼 조약에서 덴마크 왕 프레데릭 1세는 구스타프 바사를 스웨덴의 적법한 국왕으로 승인했고, 그 대가로 스웨덴은 남부의 스코네와 블레킹에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했다. 발트해의 섬 고틀란드의 귀속은 결론이 나지 않아 한자동맹의 중재에 맡겨졌다.
뤼베크가 스웨덴을 도운 이유는 단순한 의리가 아니었다. 덴마크의 외레순드 요금소를 약화시키고 스웨덴의 철과 구리 무역을 손에 쥐어 한자동맹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독점의 흥망
뤼베크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스웨덴 전역의 관세 면제와 사실상의 무역 독점. 그러나 독점은 오래 가지 않았다.
1533년 뤼베크 시장이 된 위르겐 불렌베버는 발트해에서 한자동맹의 옛 지배력을 되찾으려고 무리한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는 덴마크 왕위 계승 분쟁에 끼어들었는데, 자신이 왕이 되려던 것이 아니라 폐위된 크리스티안 2세를 복위시키려는 편에 군대를 댄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입의 속내는 한자동맹의 무역 독점을 되살리는 데 있었고, 어렵게 독립한 스웨덴에게는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뤼베크는 덴마크와 스웨덴, 네덜란드를 한꺼번에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1535년 구스타프 바사는 한자 상인들을 스웨덴에서 내쫓았고, 1537년 코펜하겐 휴전으로 뤼베크의 스웨덴 무역 특권은 공식 폐지됐다. 그래도 1550년대 말까지 스톡홀름 수출의 60%는 여전히 뤼베크로 흘러갔다. 법적 특권은 사라졌어도 오랜 상업 관성은 쉽게 끊기지 않았다.
428년 만의 마침표
외레순드 통행세는 1429년부터 1857년까지 428년을 존속했다. 폐지의 계기는 의외의 곳에서 왔다.
1856년, 미국 정부가 덴마크에 공식 통보했다. 더 이상 외레순드 통행세를 내지 않겠다고. 이 거부 선언이 유럽 협상의 불씨가 됐다. 1857년 코펜하겐 협약으로 통행세가 영구 폐지됐다. 덴마크는 유럽 각국에서 약 3,350만 릭스달레르를 보상금으로 받았다. 미국은 별도 협약으로 39만 3,000달러를 내고 영구 통행 자유를 얻었다.
1497년 빌렘 블로커르의 소금 선박이 처음 기록에 남긴 그 해협은, 360년 뒤 마침내 누구에게나 열렸다.
통행세는 사라졌지만 해협의 무게는 그대로다. 오늘날에도 외레순드에는 해마다 4만 척가량이 드나든다. 발트해를 오가는 배라면 거의 다 이 길을 거치는 셈이다. 흘수가 깊은 대형 유조선은 수심이 얕은 외레순드 대신 옆의 대벨트 해협으로 우회하지만, 그래도 외레순드는 여전히 세계에서 손꼽히는 혼잡 수로다. 한때 청어와 소금이 오가던 자리에는 이제 러시아에서 나오는 원유와 석유제품, 컨테이너와 곡물이 지난다. 2022년 이후 대러 제재로 물동량의 구성은 다시 바뀌었고, 노후 유조선의 통항은 발트해의 새로운 안전 문제로 떠올랐다. 600년 전 덴마크 왕이 요금소를 세웠던 그 병목은, 지금도 북유럽 물류와 에너지가 지나는 길목으로 남아 있다.
외레순드 통행 기록부(Øresundstoldregnskaber)는 현재 덴마크 국립 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으며 흐로닝언 대학교와의 협동으로 디지털화된 데이터베이스 Sound Toll Registers Online(soundtoll.nl)을 통해 공개 열람할 수 있다.
참고 자료
1차 자료 데이터베이스
- Sound Toll Registers Online (STRO) — 흐로닝언 대학교·덴마크 국립 문서보관소, 1497~1857년 외레순드 통행 기록 디지털 아카이브
- Sound Toll Registers — UNESCO Memory of the World — 외레순드 통행 기록부, 2007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외레순드 통행세
- Sound Dues — Wikipedia
- “Øresundstolden” — danmarkshistorien.lex.dk (오르후스 대학교, 세수 통계 출처)
- Copenhagen Convention of 1857 — Wikipedia
한자동맹과 뤼베크
- Hanseatic League — Encyclopædia Britannica
- Lübeck — Wikipedia
- Dano-Hanseatic War (1426–1435) — Wikipedia
스톡홀름 피의 학살과 스웨덴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