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카마 사막을 가로지르는 야마 카라반과 코피아포 제련소, 19세기 상상 복원도

코피아포: 항구 없는 광산 도시의 3,000년

코피아포는 항구 도시가 아니다.

칠레 북부 아타카마 사막 한가운데, 해안선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내륙 계곡에 있다. 지도를 보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도시에 항구가 생긴 적이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항구는 나중에 생겼다. 광산이 먼저였고 항구는 광산에 딸린 것이었다.

순서가 이렇다. 1832년 나무꾼 한 명이 바위에서 은을 발견했다. 채굴이 시작됐다. 은을 실어낼 길이 없었다. 그래서 1849년 미국인 사업가가 바다에 항구 도시를 새로 만들었고 1851년 크리스마스에 그 항구(칼데라)와 코피아포를 잇는 81킬로미터짜리 철도를 개통했다. 1853년에는 영국 자본으로 제련소까지 들어섰다.

그렇게 가동을 시작한 시스템이 세계 구리 생산의 60퍼센트를 공급하다가, 1874년 광맥이 고갈됐다. 1888년 갱도가 물에 잠겼다. 발견부터 소멸까지 56년이었다.


잉카가 이 계곡을 부른 이름은 코파야푸(Copayapu)였다. 케추아어로 ‘터키석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금도 은도 아니고 터키석이었다. 구리와 알루미늄이 섞인 청록색 광물로, 잉카는 이것을 의례용 보석으로 특별 관리하며 채굴했다.

잉카가 이 계곡에 들어온 것은 1470년경이었다. 그 전에도 이 계곡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코파야푸 문화가 1000년경부터 번성했고, 야마 카라반이 해안과 안데스 고원을 오가며 생선과 말린 고기, 구리와 터키석을 교환했다는 기록이 있다. 잉카가 들어오기 약 300년 전에 이미 교역로가 있었다.

잉카는 기존 디아기타족의 제련 시설을 접수해 확장했다. 코피아포 북동쪽 74킬로미터에 있는 비냐 델 세로(Viña del Cerro)라는 곳인데, 26개 제련로를 갖춘 이 시설은 잉카가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이미 수백 년 된 곳을 가져다 쓴 것이었다. 잉카의 도로망(케추아냔)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 도로는 폭이 1미터도 채 안 됐는데, 그것도 페루 고원처럼 반듯한 석조 포장도로가 아니라 다니기 편하도록 돌멩이만 치워놓은 흔적에 가까웠다. 이 지역에서 도로의 본질은 노면이 아니라 지식이었다.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 아는 것 자체가 길이었고, 그 지식은 야마 카라반의 관행과 바위에 새긴 암각화 속에 살아 있었다.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칠레 원정 루트 지도 (1535~1536)
알마그로의 칠레 원정 루트. 쿠스코를 출발해 볼리비아(파리아·투피사·치코아나)를 경유, 파소 데 산 프란시스코를 넘어 코피아포 계곡에 도달한 경로(실선 화살표)와 아타카마 사막을 횡단해 페루로 귀환한 경로(점선)가 표시돼 있다. Osvaldo Silva G., Atlas de Historia de Chile, 1988 / Memoria Chilena, Biblioteca Nacional de Chile.

스페인이 처음 이 계곡에 도달한 것은 1536년이었다.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페루에서 출발해 아르헨티나를 거쳐 안데스를 넘어왔다. 그가 돌아갈 때 선택한 길은 아타카마 사막 횡단이었는데, 코피아포 원주민 추장들이 사막 지하에 물이 있다고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원주민의 안내 없이는 건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막이었고, 안내를 받아 건넌다 해도 많은 병사의 희생이 필요한 길이었다.

알마그로가 칠레에서 찾던 것은 포토시 같은 은광이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은은 그가 밟고 지나간 땅 아래에 있었고, 300년 뒤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이 여정이 역사에 남긴 것은 딱 하나였다. 코피아포-아타카마 회랑이 페루와 칠레를 잇는 유일한 육로라는 사실을 스페인 제국이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알마그로가 왜 그렇게 빨리 칠레를 포기하고 페루로 돌아갔는지, 그 회군 동기 자체가 사료 비판상 통설보다 복잡하다는 점은 별도 글에서 따라가봤다.

1549년, 디아기타족 반란이 코피아포 수비대를 격파하고 스페인이 1544년에 세운 라 세레나 시 전체를 불태웠다. 그들은 스페인 정착민도 전원 살해했다. 이로 인해 페루와 칠레를 잇는 유일한 육상 루트가 끊겼고, 칠레 식민지는 제국에서 고립됐다. 같은 해, 스페인 총독은 군대를 보내 즉시 이 회랑을 복구했다. 제국의 안보가 위협을 받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 내내 코피아포는 조용했다. 스페인이 칠레에서 기대한 것은 포토시 같은 은광이었지만, 포토시는 볼리비아에 있었다. 칠레에는 그에 버금가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칠레는 제국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은이 아니라 말린 소고기와 가죽이었다. 포토시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을 먹이는 식량 기지였다. 1736년 페루 부왕 아르멘다리스가 “칠레 없이는 리마도 없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광물이 아니라 고기를 수출하는 땅.

코피아포가 얼마나 변방이었는지는 항구 위치만 봐도 알 수 있다. 공식 항구는 오늘날 볼리비아 영토인 코비하(Cobija)였다. 노새로 스무 날을 걸어야 닿는 거리였다.


윌리엄 휠라이트 초상화 — 19세기 강철 판화
윌리엄 휠라이트(William Wheelwright, 1798~1873). 칼데라 항구와 코피아포 철도의 설계자. Samuel Sartain 판화, History of Essex County, Massachusetts, 1888 / Public Domain.

상황이 바뀐 것은 1832년이었다. 후안 고도이라는 나무꾼이 차냐르시요 계곡에서 바위를 건드렸고, 은이 나왔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600명의 광부가 즉각 몰려들었다. 머지 않아 코피아포는 14,000명이 거주하는 도시가 됐고, 1853년에는 세계 3위 은광이었다.

문제는 이 은을 실어낼 인프라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칠레 정부로부터 해안 운항권을 받아 태평양기선회사(PSNC)를 운영하던 미국인 사업가 윌리엄 휠라이트가 이 소식을 접했다. 그는 큰 사업 기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칠레 정부 입장에서도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정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외국 자본으로 광산 인프라를 깔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1849년 칠레 대통령령으로 코피아포 해안에 칼데라라는 도시가 창설됐고, 휠라이트는 광산 투자자들과 영국 자본에서 모은 80만 페소로 철도를 놓았다. 1851년 크리스마스 개통이었다. 이후 영국 자본의 구리 제련소가 들어섰고, 광석 수출의 92퍼센트가 영국 웨일스의 스완지(Swansea) 제련소로 향했다.

1860년대 칠레 아타카마 지역이 공급한 구리는 세계 총생산의 60~67%였다. 수익은 대부분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당시 영국 부영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도 “구리 수출은 전부 영국 자본”이라고 적혀 있었다.


1862년 차냐르시요 철도역과 증기기관차 '파베욘' — 라파엘 카스트로 이 오르도녜스 촬영
차냐르시요 광산역과 기관차 '파베욘(Pabellón)', 1862년 라파엘 카스트로 이 오르도녜스(Rafael Castro y Ordóñez) 촬영 / Public Domain. 광맥 고갈 12년 전, 도시 인구가 정점을 찍은 무렵의 모습이다.

1874년 차냐르시요의 은 광맥이 고갈됐다. 1888년 갱도가 침수됐다. 칼데라에는 제련소 건물만 남았다. 코피아포는 구리로 전환해 버텼지만 세계 광업 지도에서 중심이었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았다.

이 도시가 3,000년 동안 광물을 캤다는 것, 그러나 1849년 전까지 항구가 없었다는 것, 항구와 철도와 제련소를 한 사람이 설계했고 그 수익의 대부분이 영국으로 나갔다는 것이 코피아포의 역사다.

잉카가 이 계곡을 터키석의 정원이라 불렀을 때, 터키석은 아직 땅속에 있었다. 스페인이 왔을 때는 금이었고, 영국이 왔을 때는 은과 구리였다. 이름이 바뀔 때마다 캐는 사람이 달랐고 이익이 흘러가는 방향이 달랐다. 광물만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