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지도에 있던 섬 마데이라를 '발견'한 남자, 자르쿠
포르투갈 왕실이 “우리가 마데이라를 처음 발견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1419년이다. Madeira라는 이름은 포르투갈어로 “나무”라는 의미인데 왜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좀 더 기록을 찾다 보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351년, 피렌체에서 한 권의 해도집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메디치-로렌치아노 해도라 불리는 이 지도책의 대서양 면을 보면, 이베리아반도 남서쪽 먼바다에 섬 몇 개가 그려져 있다. 그중 가장 큰 섬에는 리구리아 방언으로 “나무”를 뜻하는 글자가 적혀 있다. I. de lo Legname. 그 옆에는 Porto Santo, 또 그 곁에 I. dexerta.
이미 68년 전에 “나무”라는 이름이 붙어 있던 곳을. 갑자기 포르투갈 왕실이 똑같이 “나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처음 발견했다고 주장한 건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그 이야기를 자세하게 풀어보려 한다.
폭풍에 떠밀린 두 기사
15세기 대서양과 아프리카 해안 탐험을 주도한 포르투갈의 왕자 엔히크(Henrique) 휘하에 두 명의 기사, 주앙 곤살베스 자르쿠(João Gonçalves Zarco)와 트리스탕 바스 테이셰이라(Tristão Vaz Teixeira)가 있었다. 이 둘은 1418년 아프리카 서해안을 정찰하다 폭풍에 휘말려 항로를 잃고 말았는데 한참을 표류하다가 작은 섬 하나에 가까스로 닿게 됐다.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신께 감사 드리며 그 섬을 포르투 산투(Porto Santo), 성스러운 항구라 부르기로 했다. 이듬해에는 더 서쪽으로 나아가 큰 섬에 상륙하고, 울창한 숲을 보고 마데이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서사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주로 고메스 에아네스 드 주라라(Gomes Eanes de Zurara)의 연대기다. 문제는 이 주라라가 포르투갈 왕실이 임명한 공식 연대기 작가로, 왕실 문서고를 관리하며 엔히크의 업적을 글로 남긴 인물이라는 것이다. 15세기 중반에 쓰인 이 연대기는 동시대에 가깝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높지만, 그런 자리에 있었던 만큼 포르투갈 왕실과 엔히크를 정당화하는 궁정 편찬물이라는 한계도 분명하다. 정확한 사실을 적기보다 왕실의 입맛에 맞게 엔히크와 그의 수하들을 편파적으로 찬양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그 무인도는 정말 아무도 모르던 땅이었을까. 앞서 본 1351년 해도가 답의 일부다. 비슷한 시기에 카스티야의 익명 수도사가 쓴 『인지의 서』에도 마데이라 군도가 Leiname, Diserta, Puerto Santo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제노바와 카스티야 선원들은 14세기에 이미 이 섬들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다. 인터넷에는 1339년 안젤리노 둘세르트(Angelino Dulcert)의 해도가 마데이라를 표시했다는 이야기가 흔히 돌아다니는데, 정작 그 해도에서 “나무 섬” 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마데이라가 분명한 이름으로 지도에 오른 것은 1351년 메디치 해도부터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물론 이 해도도 “1351년”이라는 표기와 달리 실제 제작과 가필 연대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19년보다 한참 앞선 시점에 마데이라가 지중해 항해자들의 지도에 올라 있었다는 것은 확정적인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데이라는 어떻게 1419년보다 먼저 지도에 올랐을까. 14세기 들어 제노바와 마요르카, 피렌체의 항해자들이 대서양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 배경이다. 제노바 선장 란첼로토 말로첼로(Lancelotto Malocello)는 1312년 무렵 카나리아 제도에 닿았고, 1341년에는 포르투갈 왕 아폰수 4세(Afonso IV)가 리스본에서 배 세 척을 띄워 카나리아를 측량하게 했다. 피렌체와 제노바 선장이 지휘한 이 항해는 보카치오(Boccaccio)가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대서양 진출이 카나리아와 그 북쪽의 마데이라, 포르투 산투까지 해도에 담기게 한 흐름이었다. 다만 마데이라에 처음 닿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끝내 분명치 않다.
그렇다면 1419년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아무도 차지하지 않은 무인도에 포르투갈이 처음으로 깃발을 꽂고, 사람을 들여보내고, 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발견이라기보다 선점에 가깝다. 이미 알려진 자산을 법적으로 등기하고 자기 이름표를 붙인 것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카피탕에게 섬을 맡기다
엔히크 항해왕자는 자신이 단장으로 있던 그리스도 기사단을 통해 마데이라의 개발권과 관할권을 손에 넣은 뒤, 군도를 세 개의 구역으로 쪼갰다. 푼샬은 자르쿠, 마시쿠는 트리스탕 바스 테이셰이라, 포르투 산투는 바르톨로메우 페레스트렐루(Bartolomeu Perestrelo)에게 맡겼다.
각 구역을 맡은 사람들을 카피탕 도나타리우(capitão donatário)라 불렀다. 토지의 궁극적 소유권은 엔히크와 기사단에 남겨두고, 실제 개발과 통치는 세 사람의 가문에게 세습으로 위임하는 방식이었다. 카피탕은 사형과 신체 절단형을 제외한 형벌을 내릴 수 있는 재판권을 가졌고, 제분소와 제빵소의 운영, 소금 판매의 독점권을 가졌으며, 본래 국왕에게 갈 지대와 수수료를 거두었다. 이 독점은 중세 영주의 바날(banal) 권리로, 영주가 제분소와 화덕 같은 시설을 소유하고 주민은 반드시 그것을 이용하며 이용료를 내야 하는 구조였다. 미개간지를 정착민에게 나눠주는 토지 분배권도 그의 몫이었다. 각 카피탕이 자기가 맡은 빈 땅을 일굴 사람을 스스로 끌어모으도록, 엔히크가 쥐어준 유인책이었다.
흔히 자르쿠가 1425년에 푼샬의 카피탕이 되었다고 적는다. 하지만 1425년은 정착이 막 시작된 때이고, 1426년 문서에 그는 이미 “국왕의 카피탕”으로 나온다. 정작 푼샬을 정식으로 맡긴다는 도나타리아(donataria) 증서는 한참 뒤인 1450년 11월에야 발급됐다. 현장에서 25년 가까이 실권을 쥐고 다스린 뒤에야 공식 문서가 따라온 셈이다.
구조만 놓고 보면, 국가가 땅의 소유권은 쥔 채 민간에 개발과 운영을 통째로 맡기는 오늘날의 양허(concession) 사업과 닮았다. 소유권은 영주에게 있고, 개발의 이익도 위험도 카피탕이 떠안는다. 마데이라는 포르투갈이 대서양에서 처음 시도한 이 운영 모델의 시험장이었다.
설탕이라는 발명
그리고 그 시험장에서 만들어진 것이 설탕이었다.
사탕수수는 1425년경 엔히크가 시칠리아에서 들여와 푼샬 인근에 처음 심었다고 전한다. 본격적으로 불붙은 것은 1450년대다. 시칠리아에서 온 재배 기술에 제노바와 피렌체의 자본이 붙으면서, 1455년 무렵 사탕수수가 밀 농사를 밀어내고 섬의 주력 작물이 되었다. 1452년에는 엔히크가 디오구 드 테이브(Diogo de Teive)와 수력 제당소를 짓는 계약을 맺었다. 1500년경에는 마데이라 섬 내에 제당소가 여든 기 가까이 돌아갔다.
수출량은 가파르게 늘었다. 역사가마다 환산이 달라 정확한 숫자를 못 박기는 어렵지만, 1500년에서 1510년 사이 정점에서 연간 약 23만 아로바, 무게로 따지면 2천 톤이 넘는 설탕이 섬을 떠났다. 당시 유럽에서 설탕은 약에 가까운 사치품이었다. 마데이라 설탕과 마데이라 와인은 유럽 상인들에게 큰 이윤을 안겨주는 고가품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흥미롭다. 시드니 민츠(Sidney Mintz), 필립 커틴(Philip Curtin), 스튜어트 슈워츠(Stuart Schwartz) 같은 역사가들은 마데이라를 단순한 설탕 산지가 아니라 하나의 모델이 만들어진 장소로 본다. 지중해에서 발전한 설탕 재배 기술에 제노바 자본과 강제 노동을 결합한 이 방식이, 마데이라를 거쳐 카나리아, 상투메, 그리고 결국 브라질과 카리브의 거대한 플랜테이션 체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만 마데이라가 그 완성형의 직접적인 원형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조심스럽다. 마데이라의 노예 노동은 신대륙의 대규모 집단 강제 노동과 질적으로 달랐고, 노예가 자유민 노동과 뒤섞인 혼합형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알베르투 비에이라(Alberto Vieira) 같은 역사가가 이 차이를 강조한다. 그러니 마데이라는 완성된 원형이라기보다, 지중해의 설탕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가는 길목의 중간 단계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많다.
불탄 숲과 들여온 노예
설탕은 거저 만들어지지 않았다. 두 가지 대가가 따랐다.
하나는 숲이다. 마데이라라는 이름 자체가 “나무”인 만큼, 섬은 발견 당시 울창한 월계수림으로 덮여 있었다. 농지를 만들려면 그 숲을 베고 태워야 했다. “불이 7년 동안 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기간은 후대의 과장으로 봐야겠지만 대규모로 숲을 불태운 것은 사실이다. 동시대에 섬을 직접 방문한 항해자 카다모스토(Cadamosto)는 불길이 통제를 벗어나는 바람에 초기 정착민들이 배로 피신해 이틀 동안 앞바다에서 대기했다고 기록했다.
사탕수수를 심을 땅을 마련하려고 열심히 숲을 태웠는데, 이게 나중에 도리어 발목을 잡는다. 설탕 정제는 1파운드를 만드는 데 장작이 50파운드쯤 드는, 끝없이 나무를 먹어치우는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땅을 만드느라 한 번, 가마에 불을 때느라 또 한 번, 섬의 숲은 빠르게 깎여나갔다. 결국 1530년대에 이르러 목재가 바닥나면서 마데이라 설탕업은 무너진다. 숲을 밀어내며 시작한 산업이, 정작 그 숲이 사라지자 함께 주저앉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다. 초기에는 카나리아 제도의 원주민 관체족과 본토에서 보낸 유배수가 동원되었다. 곧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로 노동력이 옮겨갔다. 1490년대에는 약 2천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사탕수수를 벴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마데이라 풍경의 상징인 레바다, 산비탈을 따라 누적 2천 킬로미터가 넘게 뻗은 관개 수로망도 상당 부분 이 노예들의 손으로 깎였다.
마데이라 개척과 설탕 산업은 포르투갈에도, 자르쿠 개인에게도 영광과 부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성공은 결국 아프리카 노예노동에 기댄 대서양 삼각무역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인류 역사에 수 세기에 걸친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름을 하사받은 사람
자르쿠 본인의 결말은 성공 그 자체였다.
1437년, 포르투갈은 모로코의 탕헤르를 공략했다가 참담하게 실패한다. 엔히크의 동생 페르난두(Fernando) 왕자가 인질로 붙잡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옥사할 만큼 큰 패배였다. 그런데 자르쿠는 바로 이 실패한 원정에서 엔히크에게 직접 기사로 서임된다. 중세에 기사 작위는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개인이 보인 용맹과 충성에 대한 보상이었고, 그것도 자기 주군의 손으로 내려졌다. 탕헤르 원정을 이끈 사람이 바로 엔히크였으니, 이미 그의 신임을 받던 마데이라의 카피탕 자르쿠가 현장에서 세운 공은 원정의 실패와 별개로 인정받은 것이다.
출세는 이름까지 바꿔놓았다. 1460년 7월, 아폰수 5세(Afonso V)는 산타렝에서 자르쿠에게 문장을 내리고 새 성씨를 하사한다. 자르쿠가 바다사자 떼를 발견하고 이름 붙인 지명 카마라 드 로부스에서 따온 “다 카마라”였다. 이때부터 그의 후손들은 자르쿠가 아니라 곤살베스 다 카마라 가문으로 불린다. 이 집안은 마데이라와 아소르스, 멀리 브라질까지 뻗어나가는 귀족 가문이 되었다.
자르쿠는 1471년 11월 21일 푼샬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든을 넘긴 나이였다. 그가 1430년경 세운 콘세이상 예배당에 묻혔으나, 이 예배당은 18세기에 헐렸다. 지금 그의 묘는 손자가 세운 산타 클라라 수녀원 교회 제단 아래에 놓여 있다.
첫 번째 보급항
마데이라가 포르투갈에 지리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리스본에서 남쪽이나 서쪽으로 배를 몰면 처음 만나는 안정적인 항구이자 보급지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내려가든 대서양을 가로지르든, 배가 처음 멈춰 서는 곳이 마데이라였다. 장거리 항로의 환승 허브이자 연료 보급소였던 셈이다.
동시에 마데이라에서 만들어진 것은 설탕만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이 섬에서 토지 분배 제도와 플랜테이션, 노예 노동을 먼저 시험한 뒤, 검증된 방식을 더 큰 무대로 옮겼다. 카나리아로, 상투메로, 브라질로.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에 앞서, 작은 섬에서 제도를 미리 시뮬레이션해 본 셈이다.
우리는 이런 자르쿠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포르투갈인들에게 그는 폭풍을 뚫고 새 땅을 연 개척 영웅이다. 마데이라에 설탕 산업을 일으켰고,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신대륙까지 뻗어나간 귀족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서양 식민 경제의 폭력적인 운영 체제를 설계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처음 발견했다고 선언한 섬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지도에 그려져 있었다.
참고 자료
- Gomes Eanes de Zurara, 『기니 발견·정복 연대기』(약 1453)
- Medici-Laurentian Atlas (1351), Biblioteca Medicea Laurenziana
- Sidney W. Mintz, Sweetness and Power (1985)
- Philip D. Curtin, The Rise and Fall of the Plantation Complex (1990)
- Stuart B. Schwartz (ed.), Tropical Babylons (2004)
- Aprender a Madeira / CEHA, “Zarco, João Gonçalves” 항목
- Jason W. Moore, “Madeira, Sugar, and the Conquest of Nature”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