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스페인 갤리선 함대가 북아프리카 연안의 바위섬 페뇽 데 벨레스를 향해 접근하는 르네상스풍 일러스트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지중해의 숨은 실무자

2012년 8월 29일 새벽, 모로코 상원의원 야히야 야히야를 비롯한 일곱 명이 작은 바위섬 위에 모로코 깃발 네 개를 꽂았다. 스페인 멜리야 정규병단 제52연대 병사들이 곧 그들을 체포했고 깃발은 내려졌다. 사건은 두 시간 만에 끝났다.

그 바위는 페뇽 데 벨레스 데 라 고메라(Peñón de Vélez de la Gomera)다. 면적 1.9헥타르, 길이 400미터의 작은 섬으로, 모로코 본토와 단 85미터짜리 모래톱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국제 육상국경이다.

이 바위가 462년째 스페인령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1564년 9월 6일에 한 스페인 함대가 그곳에 깃발을 꽂았기 때문이다. 함대를 이끈 사람은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García Álvarez de Toledo y Osorio, 1514~1577)다. 같은 사람이 그 다음 해 1565년 9월에 말타에 도착해 오스만 제국의 4개월 포위를 풀었고, 1571년 레판토 해전 직전에는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에게 함대 편성 자문을 보낸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인물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에 대한 한국어 위키백과도, 출판된 서적도 없다.

1. 비야프랑카의 후계자

가르시아는 1514년 8월 29일 스페인 북서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에서 태어났다. 가문은 알바레스 데 톨레도(Álvarez de Toledo), 16세기 카스티야 최상위 귀족 계보 중 하나였다.

아버지 페드로 알바레스 데 톨레도(Pedro Álvarez de Toledo)는 1532년부터 1553년 사망 때까지 21년간 나폴리 부왕(virrey de Nápoles)을 지냈다. 21년이라는 재임 기간은 16세기 스페인 부왕직 가운데 가장 긴 축에 속한다. 부왕은 보통 몇 년 단위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페드로는 사실상 나폴리 왕국의 두 번째 군주에 가까웠다.

티치아노가 그린 페드로 알바레스 데 톨레도 초상, 1540년대
아버지 페드로 알바레스 데 톨레도(1484–1553). 21년간 나폴리 부왕을 지냈다. 티치아노 공방, c.1540–45.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가르시아의 인생은 태어났을 때부터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카스티야 후작 가문의 후계자이자 나폴리 부왕의 아들. 1528년, 만 열네 살에 그는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가 지휘하던 나폴리 갤리 함대에 들어가 갤리 두 척을 지휘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리고 7년 뒤에 첫 번째 큰 전장에 선다.

2. 1535년 튀니스, 20대의 첫 출전

1535년 6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직접 함대를 이끌고 튀니스 원정에 나섰다. 목표는 북아프리카 해안의 오스만 부속국 하프스 왕조와 그곳에 들어가 있던 바르바리 해적 거점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측 함대는 노 젓는 배 100여 척과 범선 300여 척으로 구성된 총 400여 척 규모, 인원은 3만에서 5만 사이로 추산된다.

당시 21세의 가르시아는 이미 나폴리 갤리 여섯 척의 사령관이었다. 시칠리아 갤리를 이끌던 알바로 데 바산(Álvaro de Bazán)의 갤리와 함께 튀니스 외항 라 고레타(La Goleta) 요새 공격의 선봉 분대를 구성했다. 7월 14일 라 고레타가 함락되었고, 곧이어 튀니스 시도 점령되었다.

원정 직후 카를 5세는 그를 나폴리 갤리 총사령관(Capitán General de las Galeras de Nápoles)으로 정식 임명했다. 21세의 정식 함대 사령관. 그 자체로도 빠른 승진이었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1544년에는 바르바로사를 격퇴한 공로를 인정 받아 카피탄 헤네랄 델 마르(Capitán General del Mar) 칭호를 추가로 받는다.

3. 두 사촌의 갈래길

가르시아의 부친 페드로와 알바 공작의 부친 가르시아(2대 알바 공작의 장남)는 친형제였다. 그러니까 우리 주인공 가르시아와 3대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1507~1582)는 사촌이다.

안토니스 모르가 1549년에 그린 3대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의 초상, 황금양털 훈장과 지휘봉을 들고 있다
사촌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3대 알바 공작(1507~1582). 안토니스 모르, 1549. 뉴욕 히스패닉 소사이어티 소장.

두 사촌은 같은 가문에서 자랐고, 1535년 튀니스와 1555년 이탈리아 시에나 전선에서 함께 싸웠다. 그러나 펠리페 2세 시기에 들어서면서 두 사람의 길은 완전히 갈라진다. 알바 공작은 1567년에 네덜란드 총독으로 파견되어 이른바 “피의 평의회(Consejo de los Tumultos)“를 운영하며 1573년까지 잔혹한 진압 정치를 폈고, 그 결과로 유럽 전역에 악명을 남겼다. 1580년에는 포르투갈 합병 원정을 지휘했다.

가르시아는 그 시기에 지중해에 있었다. 펠리페 2세는 두 사촌에게 명백히 의도된 역할 분담을 시켰다. 한 명에게는 북유럽의 육군을, 다른 한 명에게는 지중해의 해군을. 한 사람은 정치 진압의 카리스마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고, 다른 한 사람은 갤리선 함대의 행정으로 제국을 굴렸다.

4. 1564년 페뇽, 지도 위의 점 하나

1563년 여름, 스페인은 페뇽 데 벨레스 데 라 고메라를 탈환하려고 첫 번째 원정을 보냈다. 산초 데 레이바(Sancho de Leiva)가 갤리 50척과 7천 명을 끌고 갔지만, 야간 등반 시 발각된 뒤 본토 우회 상륙까지 무산되면서 약탈을 당하고 후위 엄호로 가까스로 퇴각했다. 7월 23일 출항해서 8월 2일에 돌아왔다. 열흘 동안의 원정은 완전한 실패였다.

1564년에 펠리페 2세는 2차 원정을 가르시아에게 직접 맡겼다. 그해 2월 10일 그는 카피탄 헤네랄 델 마르 디테라네오 이 아드리아티코(Capitán General del Mar Mediterráneo y Adriático)에 임명된 상태였다. 안드레아 도리아의 후임으로, 지중해와 아드리아해 전체의 최고 함대 사령관 자리였다.

함대는 갤리 93척과 보조선 60척, 병력 약 1만 5천 5백 명이었다. 학술 자료에 따라 구성을 더 세분하면 왕실 갤리 68척, 사략 갤리 26척, 챠로파 15척, 포르투갈 분견대(갈레온 1척·갤리 8척·카라벨 4척)다. 보병은 테르시오 베테랑 3,200명에 신병 4천 명, 키아피노 비텔리의 이탈리아군 3천 명, 알템프스의 독일군 2,600명, 포르투갈군 1,200명, 말타 기사단 500명, 그라나다 기병 100명, 자원 모험가 300명이 더해졌다.

함대는 8월 29일 말라가를 떠났다. 8월 31일에 페뇽 인근 본토에 상륙해 거점을 정리했고, 9월 5일부터 본격 포격을 시작해 250발을 발사했다. 9월 6일, 일주일 만에 점령이 끝났다. 오스만 수비대 약 200명은 야간에 해상으로 도주했고, 27명만 잔류 상태로 항복했다.

양측의 전사자는 거의 없었다. 함대는 청동포 25문과 탄약·식량을 노획한 후 9월 14일까지 악천후를 피해 대기하다가 출항했고, 페뇽에는 1,600명의 수비대를 남겼다.

이 작전은 1560년 제르바 섬에서 약 1만 1천 명의 병력을 잃은 참패 이후 처음 거둔 큰 성공이었다. 펠리페 2세에게는 정치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후속 효과도 낳았다. 스페인 학자 부스타만테 가르시아(A. Bustamante García)는 2010년 논문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페뇽 함락 소식은 술레이만 1세가 말타를 같은 규모로 공격하도록 만든 직접적 계기였다.”

5. 1565년, 말타에 닿은 함대

1564년 12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들어온 정보로 펠리페 2세는 술탄의 다음 목표가 말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르시아는 곧바로 시칠리아 부왕직을 인수하고 함대 보강에 들어갔다. 1565년 1월 18일 그는 펠리페 2세에게 편지를 썼다. “말타를 잃는다면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 목에 사슬을 걸어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신규 병력 5천 명, 갤리 20척 추가 건조, 20만 에스쿠도의 긴급 송금을 요청했다.

3월 9일에 펠리페 2세는 가르시아의 전략을 승인했다. 작은 함대로 정면 대결을 피하고, 표적이 공격당하면 구원에 나서는 방어 전략이었다. 오스만 함대는 3월 22일 이스탄불을 떠나 5월 18일 말타 마르사슬록 항에 도착했다. 왕실 갤리 130척에 갈리오트 30척, 마호나 9척, 대형선 10척, 카라무잘 21척으로 구성된 함대였고, 병력은 4만 5천 명, 그중 예니체리가 6천 명이었다. 공성포 69문도 함께였다.

말타 측은 그랜드 마스터 장 파리소 드 발레트(Jean Parisot de Valette) 휘하 약 4,920명. 그중 스페인 정예 400명은 가르시아가 사전에 남겨둔 수비대였다. 4개월의 포위 끝에 비르구와 생글레아 요새는 폐허가 됐다. 산 텔모 요새 수비병 600명은 모두 전사했고, 기사단 700명 중 200명, 민간인의 약 3분의 1이 죽었다.

가르시아는 두 차례에 걸쳐 구원군을 보냈다. 첫 번째는 피콜로 소코로(Piccolo Soccorso). 6월 16일에 결정된 600명 규모 선견대로, 멜초르 데 로블레스(Melchor de Robles)가 지휘했다. 6월 27일 상륙해 7월 3일 야간에 오스만 봉쇄선을 돌파하고 비르구에 진입했다. 로블레스는 8월 11일 카스티야 능보(요새 모서리의 돌출 보루) 방어 중 전사했다.

본격 구원군 그란 소코로(Gran Soccorso)는 8월 24일 시라쿠사에서 출항했다. 폭풍으로 함대가 분산되어 8월 30일 파비냐나 섬, 9월 2일 고초 섬을 거쳐, 9월 7일 말타 북부 산파블로 만(Bahía de San Pablo, 학술 사료의 표현으로는 Freo)에 상륙했다. 인원 9,600명. 다수는 스페인·이탈리아 보병 베테랑이었고, 토스카나·제노바·교황령·사보이아의 분견대도 함께였다. 상륙 직후 가르시아의 갤리들은 비르구·생글레아 수비대를 향해 축포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

오스만 사령관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처음에 구원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훨씬 크다고 오판해 전군에 승선 명령을 내렸다가, 실제 규모를 다시 확인하고 잔류 부대를 다시 상륙시켜 9월 11일 산파블로 만 일대에서 가르시아의 부대와 교전했다. 결과는 오스만의 패배였다. 그날 카라 무스타파는 최종 철수를 명령했고, 야영 장비와 보급품을 버려두고 떠났다.

펠리페 2세는 그해 11월 5일 가르시아에게 친서를 보냈다. “이번에 그대가 한 봉사는 너무도 중대하고 두드러진 것이라… 그대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4년 뒤인 1569년 12월 24일, 펠리페 2세는 그에게 페르난디나 공작(Duque de Fernandina)과 몬탈반 왕자(Príncipe de Montalbán) 작위를 친히 수여했다. 페뇽 탈환과 말타 구원에 대한 보상이라고 작위 수여 문서에 명시되어 있다.

6. 공작이 된 행정관

작위가 화려해질수록 그가 실제로 하는 일은 더 행정에 가까워졌다. 시칠리아 부왕 시기(1564~1566)에 가르시아가 손댄 사업의 면면을 보면 그가 어떤 종류의 실무자였는지가 드러난다.

팔레르모에서는 신항만 몰로 누오보(Molo Nuovo)를 추진했다. 1567년 6월 또는 7월 19일에 첫 돌을 바다에 던지는 의식과 함께 착공된 이 항만은 주 제방이 약 600미터에 폭 17미터로, 당대 이탈리아·스페인에서 손꼽히는 인공 항만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았다. 엔지니어로는 제노바 출신의 파비아노 부르소토와 바르톨리노 카르마이노가 참여했다. 메시나에서는 산라이네리 신 조선소(Arsenale di San Raineri)를 1565년 말타 구원 직후 부왕 명령으로 착공시켰다. 16개의 셰드를 갖춘 이 조선소는 시칠리아 함대뿐 아니라 말타 기사단과 스페인 함대용 갤리도 함께 건조했다.

조선소가 갤리를 진수하는 순간부터 운영 부담이 시작됐다. 갤리 한 척의 운영 비용은 연간 약 250만 마라베디였다. 1572년 메시나 조선소 보고서에 따르면 갤리 한 척의 출항 준비에만 8,444.5스쿠디가 들었다. 한 척의 갤리에 노꾼 144명과 병사 30명, 그리고 노젓기 지휘관, 조타수, 선원, 이물수, 목수, 의료인, 교목, 이발사, 포수까지 총 170명에서 200명이 탔다. 노꾼은 자유민 임금 노꾼, 형벌수, 노예 세 부류로 나뉘었고, 그중 형벌수가 절반을 넘었다. 노꾼의 일일 배급은 빵 800그램에 콩과 쌀, 일요일 고기 300그램으로 약 2,100칼로리 분량이었다. 죄수 노꾼 한 명의 연간 의식주 비용이 16.54두카토였고, 연 사망률은 약 8퍼센트로 계산됐다. 함대 사령관의 책상에는 이런 숫자가 항상 펼쳐져 있었다.

이 부담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가르시아는 1552년경 한 진술서에서 갈레라 함장의 자리를 이렇게 적었다. 임금이 지급되지 않으면 병사들이 탈영해 약탈하고 결국 사령관의 평판이 망가지며, 사령관 본인이 자기 재산으로 함대 운영비를 선지급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같은 글에서 그는 자기 자리를 “명예와 재산과 생명이 모두 위협받는 직책”이라고 묘사했다.

7. 레판토의 그림자

1566년 가르시아는 건강 악화로 시칠리아 부왕직을 자진 사임했다. 펠리페 2세는 그를 자문관(consejero)으로 두었고, 그는 나폴리만의 작은 도시 포추올리(Pozzuoli)에 자리를 잡았다. 1569년에 받은 페르난디나 공국과 몬탈반 후국이 모두 나폴리 왕국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1571년 10월 7일에 신성동맹 함대가 레판토에서 오스만 함대를 격파했을 때, 가르시아는 그 자리에 없었다. 산토스 데 라 에라가 2023년 논문에서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건강이 무너져 직접 갈 수 없는 것을 한탄했다.” 대신 그는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에게 서면 자문을 보냈다. 함대를 단일 분대로 편성하지 말고 세 분대로 나눌 것, 베네치아 함대는 후위가 아니라 전위에 배치할 것(믿을 수 없는 함대를 후위에 두면 전위가 무너질 때 같이 무너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적의 피가 튀길 만큼 가까이 가기 전에는 사격하지 말 것.

전투 후 돈 후안은 10월 9일 페탈라에서 가르시아에게 12쪽짜리 친필 보고서를 보냈다. 그 편지는 지금도 마드리드의 왕립 역사학술원에 보존되어 있다.

1573년에 가르시아는 펠리페 2세에게 또 다른 메모를 보냈다. 절대 동절기에는 항해하지 말 것, 함대는 시칠리아에서 월동할 것, 평시 함대는 80척이 아니라 150척을 유지하되 그중 50척은 항구에 대기시킬 것. 모두 비용 절감과 인력 운영에 관한 실무 권고였다.

1576년 7월, 그의 딸 레오노르(Eleonora di Garzia di Toledo)가 남편 페드로 데 메디치에게 카파지올로 빌라에서 살해당했다. 23세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받은 가족 소식이었다. 1년 뒤 1577년 5월 31일, 가르시아는 포추올리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나폴리의 산티아고 데 로스 에스파뇰레스 성당에 안장됐다. 37년 전 아버지 페드로가 창건을 명령한 성당이었다.

8. 묻혀버린 이름, 그리고 오늘의 페뇽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에 대한 단독 학술 단행본은 2026년 현재 영어권에도 스페인어권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본격적인 단독 연구는 페르난도 산토스 데 라 에라가 2023년 스페인 해군성 학술지 《Revista de Historia Naval》 제160호에 게재한 24쪽짜리 인물 평전이다. 그 평전의 저자조차 결론에서 “사학계는 돈 가르시아 데 톨레도에 충분히 시선을 두지 않았다”고 직접 인정했다.

같은 가문 사촌인 알바 공작에 대해서는 윌리엄 몰트비의 376쪽짜리 단독 전기(1983)와 헨리 케이먼의 예일대 출판부 단행본(2004)이라는 본격적인 두 권의 단독 평전이 있다. 가르시아는 24쪽, 알바는 두 권. 같은 가문 같은 시대의 두 사촌 사이에 이 정도의 비대칭이 생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알바의 무대였던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80년 동안 이어지면서 종교개혁사·근대 인권사·합스부르크 제국사 모든 분야에서 그를 불러냈고, “검은 전설”의 자석 효과가 더해졌다. 가르시아의 무대였던 지중해는 1571년 레판토로 “잘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후대의 정치적 호명도가 낮았다.

한국어권의 상황은 더 단순하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그의 단독 항목은 없다. 국내 단행본·번역서에서 그의 이름은 사실상 검색되지 않는다. RISS와 KCI 같은 국내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도 그를 주제로 한 한국어 논문은 검색되지 않는다. 한국 방송, 신문, 유튜브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울경제의 한 칼럼이 2019년에 1565년 말타 공방전을 다루면서 스페인 측 구원 지휘관의 이름을 아예 등장시키지 않은 적도 있다. 한국어 검색창에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를 쳐도 상위 결과는 동명의 다른 인물들로 채워진다.

그래도 페뇽 데 벨레스 데 라 고메라는 여전히 스페인령이다. 2024년 12월에는 카나리아스 사령부 사령관이 그 바위섬을 시찰했다. 멜리야 정규병단 제52연대 병사 20~30명이 두세 달씩 순환 근무로 그곳을 지킨다. 해군 보조함 마르 카리베(Mar Caribe)가 45일 주기로 식수와 연료를 보급하고, 육군 CH-47 치누크 헬기가 그 사이를 메운다. 2002년 페레힐 위기, 2012년 야히야 야히야의 점거 시도, 2021년 세우타로 향한 8천 명의 월경, 2022년 산체스 총리의 서사하라 입장 선회까지, 페뇽은 21세기의 외교 압박과 법적 도전과 물리적 시도를 모두 견뎌냈다.

스페인이 페뇽의 영유권을 주장할 때 그 핵심 근거는 “1912년 모로코 보호령 성립 이전부터 스페인령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출발선이 바로 1564년 9월 6일이다. 가르시아 알바레스 데 톨레도가 그날 깃발을 꽂은 작전이 462년 동안 한 번도 뒤집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국제정치사상 흔치 않은 사례다.

가르시아의 동시대 초상화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위키미디어 커먼즈에 단 한 점이 있지만 그것도 2021년에 누군가가 새로 그린 도상이다. 16세기 최고의 갤리 전술가이자 시칠리아 인프라를 다시 깐 부왕이자 말타와 페뇽 두 곳을 동시에 책임진 사령관인데 그림 한 점이 안 남아 있다. 페뇽 위에는 지금도 그가 꽂은 깃발이 있고 그가 지은 팔레르모의 몰로 누오보 신항만은 지금도 기능하고 있지만, 그를 그린 그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