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우 함대 항해 고지도

나사우 함대: 5일 차이로 실패한 네덜란드의 태평양 야망 (1623–1626)

나사우 함대 편대 항해 — 1623년 출항

Q: 나사우 함대 원정은 왜 실패했는가?
A: 대서양 횡단에서 누적된 지연으로 페루산 은 수송선을 단 5일 차이로 놓쳤고, 제독이 봉쇄 중 사망하면서 전략적 구심점을 잃었다. 목표였던 식민지 건설과 은 나포 모두 달성하지 못한 채 1626년 귀환했다.


1619년, 네덜란드 의회(States-General)와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비밀 회의를 열었다. 의제는 하나였다. 스페인의 태평양 패권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

1609년에 체결된 네덜란드-스페인 12년 휴전은 1621년에 종료를 앞두고 있었다. 휴전이 끝나면 전쟁이 재개된다. 네덜란드는 선제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스페인 제국의 재정 동맥 — 페루에서 스페인 본토로 이어지는 은 수송로 — 을 끊는 것. 그것이 계획의 핵심이었다.

4년의 준비 끝에 1623년, 나사우 함대(Nassausche Vloot)가 출항했다. 그리고 3년 후, 목표는 하나도 달성되지 않았다.

스페인의 은, 그리고 네덜란드의 계산

17세기 스페인 제국의 힘은 아메리카 대륙의 은에서 나왔다. 특히 페루 포토시 은광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고, 여기서 채굴된 은은 매년 일정한 루트로 유럽으로 이동했다.

루트는 이랬다. 포토시 → 리마 → 칼라오 항구(해상) → 파나마 → 대서양 횡단 → 세비야. 이 수송선단(Flota de Indias)은 스페인 왕실 재정과 유럽 내 전쟁 수행 능력의 핵심이었다. 수송선을 나포하거나 루트를 차단하면 스페인의 군사력이 흔들린다.

네덜란드 입장에서 이 계획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었다. 태평양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스페인이 지배하는 페루와 칠레 현지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 거점을 확보한다는 장기 전략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사우 함대는 군사 원정이자 식민지 개척 시도였다.

함대 편성: VOC의 총력

암스테르담호 측면 프로필 — VOC 기함

나사우 함대는 당시 VOC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 규모였다.

  • 함선: 11척 (기함 암스테르담호 포함)
  • 병력: 1,600명 (수병 + 육전대)
  • 지휘: 자크 르 에르미트(Jacques l’Hermite) 제독
  • 부지휘: 헨 스하펜함(Gheen Huygen Schapenham) 부제독
  • 출항일: 1623년 4월 29일, 고레(Gorée) 항

르 에르미트 제독은 안트베르펜 출신의 플라망인이었다. 1585년 스페인군이 안트베르펜을 함락하자 가족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고, 그는 VOC의 동인도 상관에서 경력을 쌓은 뒤 이 원정의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41세였다.

기함 암스테르담호는 42문의 포를 탑재한 대형 갈레온이었다. 원정 일지인 요하네스 판 발베이크의 『나사우 함대 항해 일지(Journael vande Nassausche Vloot)』(1626)에는 11척 중 이름이 확인되는 함선으로 암스테르담호와 레이던(Leiden)호가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 9척의 함명은 기록이 불완전하다. 실패한 원정은 기억되지 않는다 — 이것은 역사 서술의 패턴이기도 하다.

대서양을 건너며: 누적되는 지연

계획은 정밀했다. 페루의 은 수송선은 매년 특정 시기에 칼라오를 출항했다. 그 시간표를 역산해서 함대를 보내면 칼라오 앞바다에서 수송선과 마주칠 수 있다.

하지만 대서양 횡단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함대는 모로코 해안, 카보베르데 제도, 현재 가봉 해안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함선 몇 척을 나포하는 초기 성과가 있었지만, 동시에 문제들이 쌓였다. 일부 함선의 기동성이 예상보다 낮았고, 이질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르 에르미트 제독 자신도 병에 걸렸다. 11월 4일, 함대는 아노봉(Annobon) 섬에서야 대서양 횡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미 예정보다 수주가 밀린 상태였다.

1624년 2월 1일, 함대는 티에라델푸에고를 발견했다. 다음 날 르메르 해협을 통과했으나 이후 한 달간 폭풍과 역풍에 시달리며 티에라델푸에고 남동쪽 해안에 발이 묶였다. 이 기간 동안 현지 원주민과 충돌이 발생했고 사상자도 나왔다.

2월에 함대가 탐사한 케이프혼 인근 군도는 이후 ‘에르미트 제도(Hermite Islands)‘라는 이름이 붙었다. 실패한 제독의 이름이 남극 근처 바위에 남은 것이다.

4월 5일, 함대는 칠레 앞바다의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에 닻을 내렸다. 물과 식량, 장작을 보급받기 위해 열흘을 머물렀다. 항해 일지는 이곳의 물고기가 풍부해서 쉽게 잡을 수 있었고, 선원들이 물개와 바다사자를 ‘오락 삼아’ 대량으로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립된 원정대의 지루함과 긴장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1624년 5월 8일: 5일의 차이

칼라오 봉쇄 — 1624년 5월

1624년 5월 8일, 함대가 칼라오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 항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은 수송선단이 단 5일 전에 파나마를 향해 떠난 것이다.

4년의 계획, 수개월의 항해. 그 모든 것이 닷새 차이였다. 대서양과 케이프혼에서 누적된 지연이 원정의 핵심 목표를 처음부터 무력화했다.

함대 지휘 회의는 추격을 논의했다. 하지만 수송선단은 이미 5일 앞서 있었고, 함대의 물자와 선원 상태를 고려하면 추격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결론이 났다. 대신 칼라오를 직접 공격하기로 했다.

공격은 실패했다. 스페인은 이미 칼라오의 방어를 강화해두었다. 네덜란드 함대는 직접 공격을 포기하고 봉쇄로 전략을 전환했다.

봉쇄 98일

칼라오 봉쇄는 5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98일간 이어졌다. 함대는 주력을 칼라오 앞바다에 유지하면서 소규모 부대를 내보내 해안 도시들을 공략했다. 피스코(Pisco)와 과야킬을 한 차례 습격했으나 결정적 성과는 없었다.

그리고 봉쇄가 진행되는 동안, 르 에르미트 제독이 6월 2일 이질로 사망했다.

원정 내내 병세가 심각했던 제독의 죽음은 지휘 체계에 충격을 주었다. 지휘권을 이어받은 부제독 스하펜함은 유능했지만, 원정의 전략적 방향 자체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은 수송선은 없고, 식민지 건설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다. 봉쇄를 얼마나 더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8월 14일, 봉쇄를 해제했다.

과야킬, 아카풀코, 그리고 귀환

봉쇄 해제 후 함대는 북쪽으로 이동했다. 8월 28일 에콰도르 과야킬을 공격했으나 스페인 수비대에 막혀 25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전에 소규모 부대가 성공적으로 습격한 곳이었지만, 전 함대 규모의 공격은 오히려 실패했다.

10월 20일, 함대는 멕시코 아카풀코 해안에 도착했다. 마닐라에서 오는 갈레온선을 나포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보급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선원들의 상태도 나빴다. 11월 중순, 마닐라 선박 나포 계획을 포기하고 태평양 횡단을 시작했다.

11월 29일 출발, 1625년 1월 26일 괌 도착. 이후 몰루카스 제도에서 현지 VOC 군사 작전을 지원하고(서세람 원주민 65,000그루의 정향나무를 포함한 대규모 파괴 작전), 바타비아에 도착하면서 원정이 사실상 종료됐다.

스하펜함 부제독은 바타비아 출항 직후 사망했다. 르 에르미트에 이어 두 번째 지휘관 사망이었다.

실패의 의미

군사적으로는 완전한 실패였다. 은 나포도, 식민지 건설도, 스페인 태평양 패권 약화도 이루지 못했다. 스페인의 태평양 지배는 이후 수십 년간 계속됐다.

에르미트 제도 — 케이프혼 인근

나사우 함대의 실패는 VOC 팽창 전략의 한계를 드러낸 사례로 역사에 기록된다. 동인도와 태평양을 동시에 장악하려는 과잉 팽창의 문제였다. 이후 VOC는 태평양 원정보다 동남아시아 거점 강화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원정이 남긴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에르미트 제도라는 지명. 다른 하나는 판 발베이크의 항해 일지(1626)와 이후 출판된 복수의 원정 기록들이다. 실패한 원정도 충분히 기록될 만하다 — 그 실패의 방식이 충분히 교훈적이라면.

“은 수송선은 단 닷새 전에 떠났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칼라오 항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요하네스 판 발베이크, 『나사우 함대 항해 일지』, 1626


나사우 함대의 전체 항로와 함대 편성, 주요 전투 장면을 픽셀아트로 구현한 마이크로사이트를 별도로 제작했다.

나사우 함대: 실패의 유산 — 인터랙티브 마이크로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