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1년 레판토 해전을 그린 16세기 회화. 갤리선들이 뒤엉켜 싸우는 장면이다

울루치 알리, 레판토에서 혼자 살아 돌아온 배교자

1571년 10월 7일, 그리스 서해안 레판토 앞바다. 오스만 함대의 중앙과 우익이 차례로 무너지고 있었다. 사령관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는 전사했고, 그의 머리는 창끝에 꽂혀 적의 갑판 위로 들렸다. 100척이 넘는 갤리선이 나포되고, 수십 척이 더 불타거나 가라앉았다. 오스만 해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이러한 참패 속에서도 오스만 함대의 좌익 쪽은 달랐다. 그곳을 맡은 지휘관은 기독교 연합군 우익을 외해로 끌어낸 뒤, 벌어진 틈으로 파고들어 적 기함 한 척을 통째로 나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머지 전열이 무너지자 그는 나포한 배를 미련 없이 버렸다. 전리품을 끌고 가려다 함께 가라앉느니, 자기 전대만이라도 온전히 빼내는 쪽을 택한 것이다. 패전의 바다에서 유일하게 작전다운 작전을 펼친 그 사람의 이름은 울루치 알리였다.

그는 오스만제국 태생이 아니었다.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의 가톨릭 어부 집안에서 태어난 조반니 디오니지 갈레니가 그의 본래 이름이다.

1. 칼라브리아의 소년: 어부의 아들에서 갤리 노예로

울루치 알리는 1519년경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의 레 카스텔라(Le Castella)에서 태어났다. 이솔라 디 카포 리추토(Isola di Capo Rizzuto) 일대의 작은 어촌으로, 집안은 바다로 먹고살던 평민이었다. 한동안 그가 사제가 되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운명이 갈린 것은 1536년이었다. 열일곱 살쯤 되던 해, 그는 바르바리 해적에게 붙잡혔다. 당대 지중해를 휩쓸던 하이레딘 바르바로스의 부장 알리 아흐메드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붙잡힌 그리스도교도가 가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갤리선 밑바닥, 노 젓는 자리였다.

여기까지는 16세기 지중해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안과 남유럽의 그리스도교 해안은 서로 상대를 약탈했고, 매년 수만 명이 양쪽에서 붙잡혀 갤리선 노예가 되었다. 특별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2. 개종: 노예에서 레이스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이 인물을 직접 다룬다. 알제에서 5년간 포로로 잡혀 있었던 작가는 그를 가까이서 보고 들었다. 세르반테스에 따르면 울루치 알리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계기는 작은 사건이었다. 노를 젓던 중 한 튀르크인이 그의 뺨을 때렸고, 그는 복수할 수 있는 자리에 서기 위해 신앙을 버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은 그의 별명에서 나온다. 두피에 피부병을 앓아 “옴쟁이”라는 뜻의 파르타쉬(Fartaş)로 불렸는데, 동료 그리스도교 노예들에게 그 병으로 멸시당한 일이 개종의 계기였다는 이야기도 떠돈다. 다만 이 이야기를 직접 전하는 동시대 사료는 없다. 그가 “옴쟁이”라 불렸다는 사실에 맞춰 후대가 끌어낸 추정에 가깝다. 사료가 분명하게 남긴 동기는 앞서 본 세르반테스의 뺨 일화뿐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개종은 그에게 다른 인생을 열어 주었다. 노 젓는 노예에서 코르세어(지중해의 사략 해적) 선원이 되었고, 곧 자기 배를 지휘하는 레이스(선장)가 되었다. 유럽 사람들은 그를 오키알리(Occhiali)라 불렀는데, 이탈리아어로 ‘안경’이라는 뜻이다. 그가 안경을 썼기 때문은 아니다. 오스만식 호칭 울루치(Uluç)를 이탈리아인이 발음이 비슷한 자국어 단어로 옮기다 그렇게 굳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근세에 제작된 울루치 알리의 초상 판화
근세에 제작된 울루치 알리의 초상 판화. 유럽에서는 그를 오키알리(Occhiali)라 불렀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D)

3. 드라구트의 그늘, 그리고 알제의 주인

1560년 제르바 해전, 1565년 몰타 대공성전. 그는 노장 드라구트(투르구트 레이스)의 휘하 함장으로 굵직한 전장을 거쳤다. 몰타에서 드라구트가 전사하자, 그는 노장의 시신을 트리폴리로 옮겨 묻고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트리폴리의 베이가 된 것이다.

출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568년, 그는 알제의 베이레르베이로 임명되었다. 북아프리카 서부 오스만 속주의 최고 권력자 자리였다. 이듬해에는 육로로 군대를 몰아 하프스 왕조의 술탄을 쫓아내고 튀니스까지 자기 관할로 끌어들였다.

알제는 약탈로 굴러가는 도시였다. 나포한 배와 사람과 물자를 시장에 팔아 국가를 지탱했고, 1580년경 이 도시에는 그리스도교 포로가 2만 5천 명에 이르렀다. 울루치 알리는 그 경제의 정점에 앉아 있었다. 노획물의 5분의 1이 국가 몫으로 들어왔고, 코르세어 선장들의 평의회가 어느 바다를 언제 털지를 규제했다. 그는 단순한 해적 두목이 아니라 약탈로 재정을 꾸려나가는 통치자였던 것이다.

4. 레판토: 처참한 패전 속에서 단 하나의 성공

1571년, 키프로스를 둘러싸고 오스만과 신성동맹(교황·스페인·베네치아 연합)이 충돌했다. 그해 10월 7일, 양쪽의 대함대가 레판토 앞바다에서 마주쳤다. 갤리선 400여 척이 한자리에 모인, 노로 젓는 함대들이 벌인 마지막 대해전이었다.

울루치 알리는 오스만 함대의 바다 쪽 좌익을 맡았다. 그의 상대는 기독교 우익을 지휘한 제노바의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였다. 한 세대 전 지중해를 호령한 명장 안드레아 도리아의 종손으로, 같은 가문이 같은 바다를 다시 지휘하고 있었다. 도리아가 측면을 잡히지 않으려고 외해로 길게 빠지는 사이, 두 함대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울루치 알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방향을 틀어 기독교 중앙의 옆구리로 파고든 것이다.

오스만 궁정 필사본에 그려진 울루치 알리
오스만 궁정 필사본 『셀림 한 서』(1581)에 실린 울루치 알리. 1569년 튀니스로 진군하던 알제 총독 시절의 모습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D)

그가 노린 것은 뒤처진 몰타 기사단의 기함 카피타나(Capitana)였다. 갤리선 일곱 척으로 에워싸 갑판을 휩쓸었고, 기함을 통째로 끌고 가려 했다. 그러나 신성동맹 예비대를 이끌던 알바로 데 바산이 제때 끼어들면서 기함은 도로 빼앗겼다. 화살 다섯 대를 맞고도 살아남은 기사단 단장 주스티니아니도 목숨을 건졌다. 울루치 알리가 챙길 수 있었던 전리품은 기사단의 큰 깃발 하나뿐이었다.

전투는 오스만의 참패로 끝났다. 함대의 거의 전부가 나포되거나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 울루치 알리는 자기 전대 서른에서 마흔 척을 빼내, 흩어진 잔여 함선을 끌어모아 87척으로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왔다. 패배의 바다에서 함대를 가지고 돌아온 것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

5. ‘검’이라는 이름: 배교자 별명에서 카푸단 파샤로

몰타 기사단의 깃발 하나만 챙겨 돌아온 패장 울루치 알리. 패전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겠지만 술탄 셀림 2세는 그를 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칼을 뜻하는 클르츠(Kılıç)라는 새 이름을 내리며 참패 속에서 함대를 살려 무사히 돌아온 그의 공을 치하했다.

원래 그의 별명 울루치(Uluç)는 개종자 또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유럽 쪽 기록은 이를 ‘배교자 알리’로 옮기곤 했다. 술탄은 그 별명을 비슷한 음의 영예로운 단어로 바꿔준 것이다. 그리고 1571년 10월 29일, 레판토에서 불과 22일 뒤, 그를 카푸단 파샤로 임명했다. 오스만 해군 전체를 지휘하는 자리였다.

칼라브리아 어부의 아들, 한때는 갤리선의 노를 젓는 이교도 노예였던 그가 오스만 제국 해군의 정점에 올랐다.

6. 한 철 만의 함대: 재건과 튀니스 재탈환

카푸단 파샤라는 자리는 단순히 전투만 잘 지휘하면 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제도(諸島)를 다스리는 행정직이자, 골든 혼의 제국 조선소를 직접 거느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톱하네라는 장소가 흔히 그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는 것은 그를 기리는 클르츠 알리 파샤 모스크가 바로 그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다만 톱하네 자체는 대포를 만드는 주조창이었고, 함대를 찍어낸 곳은 골든 혼 건너편의 거대한 조선소였다.

울루치 알리는 레판토에서 몰살당한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놀라운 속도로 복구했다. 패전 이듬해인 1572년 7월, 오스만 함대는 다시 250척에 이르렀고 그중에는 베네치아의 중장 함선을 본뜬 대형 주력함 여덟 척도 있었다. 단순히 숫자만 채운 것이 아니라, 갤리에 더 무거운 포를 싣고 승선 병사에게 화기를 쥐여주는 쪽으로 함대를 바꾸어 나갔다.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 소콜루 메흐메드 파샤가 베네치아에서 온 외교 사절단에게 이에 대해 남긴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오스만은 키프로스를 빼앗아 베네치아의 팔을 하나 잘라낸 셈이지만, 레판토에서의 패전은 오스만 입장에서 수염을 깎인 수준이라고. 잘린 팔은 되돌릴 수 없지만, 깎인 수염은 더 무성하게 자란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리고 그 수염을 다시 길러낸 사람이 바로 울루치 알리였다.

그사이 튀니스의 주인은 또 한 번 바뀌어 있었다. 울루치 알리가 알제 총독 시절 점령했던 튀니스를, 1573년 레판토의 영웅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되찾아 스페인 보호 아래 하프스 왕조의 꼭두각시 군주를 다시 앉혀 둔 것이다. 항구의 라굴레타(La Goletta) 요새에는 스페인 수비대가 들어와 있었다. 오스만 입장에서 튀니스는 합스부르크가 북아프리카에 박아 둔 쐐기였다.

1574년, 그는 250척을 이끌고 그 튀니스로 향했다. 라굴레타 요새는 8월에, 튀니스시는 9월에 떨어졌다. 한때 알제 총독으로 한 번 차지했던 그 도시를, 이번에는 제국 함대 사령관으로서 다시 손에 넣었다. 스페인이 다시 세워 두었던 하프스 왕조도 이때 완전히 무너져, 300년 넘게 이어진 왕조가 끝났다.

7. 톱하네의 모스크: 행정가의 말년과 두 개의 이름

말년의 울루치 알리는 전장보다 집무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모로코 연안에 요새를 세우고, 알제의 반란을 누르고, 흑해와 동지중해를 오가며 16년 동안 제국 해군을 이끌었다. 외국 출신 개종자가 본래 튀르크가 독점하던 최고 해군직을 그토록 오래 지킨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스탄불 톱하네의 클르츠 알리 파샤 모스크 전경
이스탄불 톱하네의 클르츠 알리 파샤 모스크. 미마르 시난이 90대에 설계했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CC)

그는 이스탄불 톱하네의 바닷가에 자기 이름을 단 모스크를 지었다. 제독이니 영원히 바다 곁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듣고 위치를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설계를 맡은 이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 이미 아흔을 넘긴 노장이었다. 모스크와 마드라사(신학교), 하맘(목욕탕)과 영묘를 갖춘 복합 단지가 1580년대에 걸쳐 들어섰다. 1587년 6월, 울루치 알리는 이스탄불에서 숨을 거두고 자신이 세운 화려한 팔각 영묘에 묻혔다.

클르츠 알리 파샤 모스크 내부의 중앙 돔 천장
모스크 내부의 중앙 돔. 시난은 하기아 소피아를 의식해 가운데 큰 돔을 올렸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CC)

8. 한국에는 없는 이름, 그리고 르네가도라는 시대적 흐름

레판토에서 그와 같은 바다에서 싸웠고 뒷날 알제에서 포로살이를 한 적국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적장이었던 그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울루치 알리는 칼라브리아 태생으로 선량한 사람이었고, 포로들을 매우 인도적으로 대했다.” 종교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을 적이 이렇게 기억하는 일은 흔치 않다.

16세기 지중해에는 그처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 개종한 후에 코르세어로 활동한 사람들을 르네가도라고 불렀는데, 울루치 알리는 르네가도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가 굉장히 특이하게 그리스도교를 배반한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고, 그냥 그런 사람들이 많은 시대였는데 울루치 알리가 가장 눈에 띄는 높은 직책까지 승진한 것뿐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그를 다룬 항목조차 없고, 그를 중심에 둔 우리말 책이나 논문도 사실상 찾기 어렵다. 같은 전투의 돈 후안이나 세르반테스가 훨씬 익숙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해변에는 지금도 한 모스크가 그의 이름을 달고 서 있다. 칼라브리아의 어부에서 노예로, 다시 제국의 검으로 살다 간 한 사람을, 그 건물이 아직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