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라바르 해안의 항구 도시 캘리컷 전경 판화

두아르테 바르보사(1480?–1521) — 인도양을 유럽에 알린 마젤란의 처남

1521년 5월 1일, 세부의 한 연회장. 라자 후마본이 스페인 국왕에게 보낼 선물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마젤란 함대의 간부들을 불러 모았다. 며칠 전 막탄에서 사령관 마젤란을 잃은 원정대는 새 지휘부를 막 꾸린 참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두아르테 바르보사, 마젤란의 처남이자 함대의 공동 사령관이었던 남자도 앉아 있었다.

연회는 암살을 위한 함정이었다. 방심한 사이 라자 후마본의 부하들이 연회장을 습격해 마젤란 함대의 지휘부를 도륙했다. 이날 스물여섯 안팎이 목숨을 잃었는데, 두아르테 바르보사도 그중 하나였다. 거친 항해와 반란을 견뎌낸 그였지만, 동맹이라 믿었던 사람의 계략에 빠져 허무하게 식탁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최초의 세계일주를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마젤란의 이름을, 또 어떤 이들은 마젤란 사후에 마지막까지 함대를 이끌고 세계일주를 완성한 엘카노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인도양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보다 자세하게 기록한 남자, 두아르테 바르보사도 있었다.

1. 리스본에서 인도로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15세기 후반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위키백과를 비롯한 여러 자료가 1480년경으로 적지만, 정작 이 연도를 뒷받침하는 1차 사료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1500년 무렵부터 인도에서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연 1498년 직후, 포르투갈이 동방으로 막 밀고 들어가던 세대였다.

1500년 무렵, 그는 인도로 건너간다. 헤이클루트 협회 비평본을 펴낸 댐스(M. L. Dames)는 그가 카브랄이 이끈 두 번째 인도 함대를 타고 삼촌 곤살루 길 바르보사와 함께 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삼촌은 그 함대가 코친에 남긴 페이토르, 곧 상관의 책임자였고 뒤에 카난노르 상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카난노르는 코친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같은 말라바르 해안의 항구로, 포르투갈이 일찌감치 요새와 상관을 둔 거점이었다. 아버지 디오구 바르보사는 이듬해 다른 함대로 잠깐 인도를 다녀와 곧 본국으로 돌아갔다. 바르보사 가문은 그렇게 포르투갈령 인도라는 새 사업에 줄줄이 발을 걸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두아르테와 마젤란의 관계가 정확히 무엇인지 논란이 있었다. 어떤 글은 디오구 바르보사를 두아르테의 삼촌이라 하고, 또 어떤 글은 아버지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표준 사료는 디오구를 두아르테의 아버지로 본다. 삼촌은 앞서 본 곤살루 길로 따로 있었는데, 같은 바르보사 성을 쓰는 친족인 데다 둘 다 인도 사업에 발을 걸친 탓에 후대 사람들이 둘을 뒤섞어 본 것으로 보인다.

2. 서기이자 통역

인도에 자리 잡은 두아르테가 맡은 일은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삼촌 곤살루 길 바르보사가 책임자로 있던 카난노르 상관에서, 그 아래 에스크리방, 곧 서기 겸 회계 담당이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향신료의 양을 적고, 장부를 맞추고, 보고서를 쓰는 사무직이었다.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언어였다. 코친은 인도 남서부 말라바르 해안에 자리한 후추 교역의 중심 항구로, 오늘날 케랄라 지방에 해당한다. 두아르테는 이곳에서 그 해안 일대의 토착어인 말라얄람어를 익혔다. 동시대 기록자 가스파르 코헤이아는 두아르테 바르보사가 현지인보다도 말라얄람어를 잘한다고 기록을 남겼다. 인도 현지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포르투갈인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독보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외국어 능력 덕분에 두아르테는 단순히 회계 장부를 맞추는 것 이상의 역할까지 맡게 됐다. 1503년에는 카난노르 왕을 만나는 자리에서, 1514년에는 코친 왕을 개종시키려던 시도에서 통역으로 나섰다. 개종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두아르테가 행정과 외교 양쪽에 걸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시절 그가 어떤 일을 하며 무엇을 느꼈는지는 본인이 직접 남긴 글에서 엿볼 수 있다. 1513년 두아르테가 국왕 마누엘 1세에게 보낸 편지가 그것이다. 향신료 매입 협상과 현지 왕실과의 교섭을 보고하면서, 약속받은 수석 서기 자리를 받지 못한 처지와 봉급에 대한 불만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국의 말단 관료가 이런 얘기를 왕한테 해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직접 전해 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페르디난드 마젤란 초상
페르디난드 마젤란.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그의 처남이었다.

3. 인도양을 적은 책

서기로 일하며 두아르테는 인도양을 둘러싼 세계에 대하여 방대한 기록을 남긴다. 그 결과물이 1516년에서 1518년 사이에 완성된 『두아르테 바르보사의 책』이다.

이 책은 동아프리카 소팔라에서 출발해 킬와와 몸바사를 지나고, 호르무즈를 거쳐 인도의 캘리컷과 비자야나가르로, 다시 말라카와 동남아 군도를 넘어 중국까지 이어진다. 해안선을 따라가며 항구를 하나씩 짚는 구성이다.

그가 적은 것은 풍경이 아니라 정보였다. 항구마다 무엇을 사고파는지, 세금은 어떻게 매기는지, 어떤 화폐가 통하는지, 누가 다스리고 어떤 종교를 믿는지를 같은 틀로 정리했다. 그래서 항구끼리 비교가 된다. 오늘날로 치면 무역 도시별 시장 보고서에 가깝다.

이 방대한 지식을 두아르테가 모두 다 직접 보고 느낀 것은 아니었다. 물론 동아프리카 해안은 인도로 오는 길에 한 번 지나쳤고, 말라바르 일대는 그가 십수 년을 살았으니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말라카나 중국처럼 그가 직접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이런 방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하던 상관이 이런 정보가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코친과 카난노르의 포르투갈 상관은 인도양 곳곳에서 온 상인과 뱃사람이 드나드는 정보의 길목이었고, 그는 현지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현지인들로부터 들어 받아 적고 또 궁금한 것은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포르투갈어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 번역본 덕분에 살아남았다. 155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관료이자 지리학자였던 라무지오가 엮은 항해 모음집에 실리면서 유럽에 처음 퍼지게 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는 첫 영어 번역본이 나왔다. 비슷한 시기 토메 피르스가 쓴 『동방기』와 더불어,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이 아시아의 바다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료로 꼽힌다.

4. 책이 기록한 세계

이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 보면 흥미로운 얘기가 많은데, 이런 것들이다. 소팔라 시장에서는 금을 무게도 달지 않고 대충 짐작으로 거래한다. 그 북쪽 킬와는 잘 지은 석조 가옥이 늘어선 부유한 도시다. 호르무즈에서는 매년 1,000에서 2,000필의 말이 거래된다. 또 메카에서 온 무슬림 상인들이 어떻게 캘리컷에서 후추 무역을 장악하게 됐는지도 풀어 놓았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남인도의 비자야나가르 왕국 묘사다. 다이아몬드 광산에 대한 얘기까지는 납득이 가는데, 그 뒤에 그는 이 나라에서는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종교를 믿고, 그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다”고 썼다. 종교가 현세의 삶을 규정하던 유럽에서 온 그리스도교도인 그가, 저마다 종교를 고를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에 대해 이런 내용을 담담히 옮겨 적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계속해 읽다 보면 당대의 해상무역 거점이었던 말라카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말라카에 대해서는 딱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온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항구. 이런 기록을 기반으로 그 당시 말라카의 모습이 어땠을까 상상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16세기 고아의 시장 풍경 판화
고아의 시장 풍경(1605, 린스호턴 『여정기』). 바르보사가 항구마다 적어 둔 인도양 교역 도시의 일상에 가깝다.

5. 국경을 넘다

1510년대 후반, 두아르테의 인생에 전환기가 찾아온다. 그가 속한 가문이 마젤란과 엮이면서다. 마젤란은 디오구 바르보사의 딸 베아트리스와 결혼했다. 두아르테에게 마젤란은 매부였고, 마젤란에게 두아르테는 처남이었다.

마젤란은 서쪽으로 돌아 향신료 제도에 닿는 항로를 구상했지만 포르투갈 국왕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카를로스 1세의 후원을 받아 냈다. 포르투갈령 인도에서 잔뼈가 굵은 바르보사 가문의 사위가, 경쟁국 스페인의 세계일주 계획에 합류한 것이다.

두아르테가 인도양에서 쌓은 지식이 마젤란의 후원 획득 과정에 얼마나 보탬이 됐는지 적어 놓은 사료는 없다. 다만 인도양의 항구와 항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바르보사 가문의 일원, 두아르테의 존재는 후원에 나선 스페인 왕실 입장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오르텔리우스의 1589년 태평양 전도
최초의 태평양 전도(오르텔리우스, 1589). 남아메리카 서쪽 바다에 세계일주를 완성한 빅토리아호가 그려져 있다.

6. 산훌리안에서 막탄까지

그렇게 두아르테는 마젤란을 따라 세계일주 함대에 몸을 싣는다. 함대는 1519년 8월 세비야를 출발해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 내려간 뒤, 9월 그 강어귀의 외항인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대서양으로 나섰다. 배는 모두 다섯 척이었다. 트리니다드, 산안토니오, 콘셉시온, 빅토리아, 산티아고. 약 이백칠십 명이 탔고, 두아르테는 기함 트리니다드에 보조 인원으로 올랐다.

원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520년 남아메리카의 산훌리안 항구에서 선장 몇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두아르테는 반란에 가담한 빅토리아호를 힘으로 되찾는 작전을 이끌었다. 인도에서 회계 장부를 다루던 그가, 보조 인원으로 배에 올랐다가 무력 진압을 진두지휘한 것이다. 그 공으로 그는 빅토리아호의 선장 자리에 올랐다.

함대는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에 닿았다. 그리고 1521년 4월 27일, 막탄섬에서 마젤란이 라푸라푸가 이끄는 현지 세력과 싸우다 전사한다. 사령관을 잃은 원정대는 생존자들의 선거로 새 지휘부를 세웠다. 두아르테 바르보사와, 함대의 또 다른 노련한 포르투갈인 선장으로 콘셉시온호를 이끌던 주앙 세항. 두 사람이 공동 사령관이 되었다.

7. 세부의 연회

후마본은 본래 마젤란의 동맹이었다. 함대가 세부에 닿자 그는 우호를 약속했고, 자신과 부인을 비롯해 수백 명의 주민이 함께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마젤란이 막탄의 라푸라푸를 치러 나선 것도 후마본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웃 섬을 누르기 위해서였다. 굳건해 보였던 이 동맹도 마젤란의 죽음과 함께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마젤란이 죽은 지 며칠 뒤, 후마본이 함대 간부들을 연회에 초대했다. 스페인 국왕에게 보낼 보석을 건네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이 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전하는 사람은 안토니오 피가페타다. 원정에 직접 동행해 항해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일지로 남긴 이탈리아인으로, 마젤란 원정에 대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가 그의 기록이다. 그에 따르면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 건 노예 통역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젤란은 그 통역, 곧 말라카 출신 노예 엔히케에게 자신이 죽으면 자유를 주겠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바르보사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리어 채찍으로 위협했고, 이에 분을 품은 엔히케가 후마본 쪽에 붙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통역관과 후마본 사이에 공모가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후대의 단정적인 서술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다.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끝났는지는 명확하다. 연회에 상륙한 스물네 명 가운데 두아르테 바르보사를 포함한 대다수가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 공동 사령관이던 주앙 세항은 죽지 않고 포로로 붙잡혔다. 부상을 입은 상태로 후마본의 병사들에 의해 해변으로 끌려 나온 그는 몸값을 지불하고 구해 달라 외쳤다. 하지만 배에 남아 있던 부하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갔고,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8. 두 제국에 남은 실무자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오른 함대는 이듬해 빅토리아호 한 척만이 세계일주를 마치고 스페인에 닿았지만, 그는 이미 세부에서 숨진 뒤였다. 하지만 그가 남긴 책은 살아남았다.

16세기 초 인도양 세계의 교역과 사회를 이만큼 폭넓게 적은 기록은 드물었다. 그래서 그의 책은 저자가 죽고 한참 뒤까지 유럽인들이 동방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 서적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그 시대 인도양을 들여다보는 창으로 꼽힌다.

그의 이름이 한국에서는 낯설지만,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오늘날 포르투갈에서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자국 여행기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책은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인이 직접 보고 들은 동방을 체계적으로 적은 첫 저작으로 꼽히며, 한 연구자는 그의 책을 두고 먼 지역의 관습과 경제를 가장 정확하고 자세히 담은 최초의 근대적 저작이라 평하기도 했다. 그의 기록은 지금도 에스타두 다 인디아, 곧 포르투갈령 인도를 연구하는 이들이 펼쳐 보는 사료로 남아 있다.

거친 항해와 반란을 견뎌 내고도 연회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제국 사이를 넘나들며 한 권의 책을 남긴 사람.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영웅의 자리에는 끝내 오르지 못했고 그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 한 점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오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다.

출처

  • Duarte Barbosa, The Book of Duarte Barbosa, trans. Mansel Longworth Dames, 2 vols. (Hakluyt Society, Second Series Nos. 44 & 49, 1918–1921) — 바르보사 책의 표준 영역 비평본. 본문의 인도 근무·가문 관계·집필 시점 판단이 대부분 이 판본의 주석에 기댄다.
  • Antonio Pigafetta, Magellan’s Voyage: A Narrative Account of the First Circumnavigation, trans. R. A. Skelton (Yale University Press, 1969) — 세부 연회 학살을 목격 기록으로 전하는 마젤란 원정 최고의 1차 사료.
  • Tomé Pires, The Suma Oriental of Tomé Pires, trans. Armando Cortesão, 2 vols. (Hakluyt Society, Second Series, 1944) — 바르보사와 나란히 놓이는 동시대 포르투갈의 아시아 교역 보고서.
  • Sanjay Subrahmanyam, The Portuguese Empire in Asia, 1500–1700: A Political and Economic History (Longman, 1993) — 에스타두 다 인디아의 상관·교역망 구조를 다룬 표준 개설서.
  • “Duarte de Barbosa,” Encyclopaedia of Portuguese Expansion (CHAM/Universidade NOVA de Lisboa) — 바르보사 생애와 저작을 정리한 학술 사전 항목.
  • “Duarte Barbosa,” Wikipedia — 생몰·직책 개요 및 1차 사료 인용의 출발점.

본문 이미지 출처: 히어로(캘리컷 판화)·고아 시장(린스호턴 『여정기』, 1605)·오르텔리우스 태평양 전도(1589)·마젤란 초상은 모두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