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er Kilbourne Kellogg, Adalia Asia Minor, 19세기 중반 수채화 (스미스소니언 미국미술관)

안탈리아 역사: 2,200년의 항구도시

천국을 찾아오라

기원전 2세기,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2세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지상의 천국을 찾아오라.” 부하들이 데려온 곳이 지금의 안탈리아 만이었다.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다, 뒤로는 토로스 산맥. 왕은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항구도시 아탈레이아(Attaleia)를 세웠다.

항구 자체는 처음부터 철저히 실용적이었다. 내륙 파묄리아·리키아 지방의 목재, 올리브유, 농산물이 이 항구를 통해 지중해로 나갔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이 로마에 편입되면서 안탈리아는 로마 제국의 남부 아나톨리아 관문이 됐다.


황제가 방문한 항구

1843년 막스 슈미트가 그린 안탈리아 성채 수채화
막스 슈미트(Max Schmidt), 「안탈리아 성채」, 1843년 수채화 / 퍼블릭 도메인. 절벽 위 오스만 시대 성벽과 그 아래 목선이 정박한 구항의 모습이다.

로마 시대 이 항구의 전성기는 2세기였다.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소아시아 속주 순방 중 안탈리아를 방문했다. 도시는 황제 방문을 기념해 백색 대리석으로 삼중 아치 개선문을 세웠다. 아치 높이 6.18미터, 전체 높이 8미터 이상. 오늘날 칼레이치 구시가지 입구에 서 있는 하드리아누스 문이 그것이다. 1950년대 발굴 당시 고대 포장도로에 남은 수레바퀴 마모 흔적이 지금도 투명 바닥재 너머로 확인된다.

안탈리아 하드리아누스 문 삼중 아치 정면
하드리아누스 문(Hadrian's Gate). 130년 황제 방문을 기념해 세운 삼중 아치 개선문. 아치 높이 6.18미터. CC BY 2.0.

비잔틴 시기에도 안탈리아의 상업적 위상은 이어졌다. 1082년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발부한 황금 칙서는 베네치아 상단에 제국 전역 무관세 교역권을 부여했고, 명시된 항구 목록에 아탈레이아가 포함됐다. 이 특권은 1148년, 1187년, 1199년 세 차례 갱신됐다. 10세기 아랍 지리학자 이븐 하우깔은 안탈리아가 무슬림 영토 물자에 대한 세금 징수 중심지로 연간 세수가 금 300파운드에 달했다고 기록했다.


십자군이 버리고 간 사람들

귀스타브 도레 판화 — 루이 7세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에게 십자가를 받는 장면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루이 7세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 19세기 판화 / 퍼블릭 도메인. 2차 십자군 원정을 독려하는 장면이다.

1148년 1월 20일, 성벽 밖에 프랑스 군대가 도착했다. 카드무스 산 전투에서 셀주크군에 참패한 루이 7세 십자군의 잔존 병력이었다. 2주간 130킬로미터를 후퇴한 끝에 이 비잔틴 항구에 다다랐지만, 현지 주민들은 프랑스군을 성벽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보급품은 높은 값에만 팔렸고, 야영지에서는 전염병이 돌았다.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는 선박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도착한 배는 전군을 수송하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루이 7세는 왕비와 기사들만 데리고 승선했다. 나머지 보병들은 육로로 안티오키아까지 행군하도록 남겨졌다. 종군기록 De Profectione Ludovici VII에는 이 장면이 담담하게 적혀 있다. 육로에 남겨진 병사들 중 절반도 안티오키아에 닿지 못했다.


셀주크의 첫 번째 지중해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쪽 끝, 토로스 산맥이 바다로 떨어지는 지점에 안탈리아가 있다. 산을 넘어야 내륙과 연결되고, 배가 없으면 해안을 따라 이동할 수도 없는 곳. 이 지리적 조건이 이 항구에 가치를 부여했다. 아나톨리아의 남부를 지배하려는 세력에게 안탈리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런 탓인지 이 항구는 자주 주인이 바뀌었다.

1206년, 루름 셀주크 술탄 카이쿠스라우 1세가 안탈리아를 공략했다. 실패였다. 당시 안탈리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이는 알도브란디니라는 토스카나 출신 모험가로, 비잔티움 제국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다 이 항구의 실권을 쥔 인물이었다. 그는 곧바로 키프로스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고, 십자군 국가인 키프로스에서 건너온 200명의 군대가 방어를 도왔다. 셀주크군은 16일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듬해 1207년 3월, 카이쿠스라우 1세는 다시 왔다. 이번엔 규모가 달랐다. 대규모 병력에 공성 장비까지 갖춰 두 달 이상 포위를 이어갔다. 알도브란디니는 또다시 키프로스에 손을 뻗었지만, 이번엔 지원군이 와도 소용이 없었다. 방어 측 내부에서 분열이 생겼고, 키프로스 원군과 알도브란디니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면서 협력 방어가 무너졌다. 1207년 3월 5일, 안탈리아는 셀주크의 손에 들어갔다.

셀주크 입장에서 안탈리아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내륙 고원을 기반으로 한 이 왕조가 처음으로 손에 넣은 지중해 항구였다. 이전까지 셀주크의 세계는 육지였다. 안탈리아를 차지하면서 바다가 열렸다. 카이쿠스라우 1세는 항구를 손에 넣자마자 모스크를 세웠다. 후대 술탄 알라에딘 케이쿠바드 1세는 1230년경 비잔티움 교회 자리에 이브리 미나렛을 올렸다. 38미터 높이의 붉은 벽돌 탑은 지금도 항구 위에 서 있다.

셀주크는 이탈리아 상인들을 몰아내지 않았다. 1220년 베네치아-셀주크 조약이 체결됐고, 14세기에 이 도시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항구 구역 안에 기독교 상인들이 성벽으로 구획된 별도 구역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지배자가 바뀌어도 이탈리아 상인 커뮤니티는 이 항구를 떠나지 않았다.

이브리 미나렛과 뒤로 펼쳐진 지중해와 토로스 산맥
이브리 미나렛(Yivli Minare). 셀주크 술탄 알라에딘 케이쿠바드 1세가 1230년경 세운 38미터 높이의 홈 벽돌 탑. 뒤로 지중해와 토로스 산맥이 보인다. CC BY-SA 3.0.

14세기의 혼란

셀주크 이후 안탈리아는 한 세기 동안 네 번 주인이 바뀌었다.

1321년, 셀주크가 무너지면서 테케(Tekke)라는 소규모 베이릭(군소 왕국)이 이 항구를 차지했다. 이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1361년 키프로스 왕국이 안탈리아를 점령했고, 12년 뒤인 1373년 제노바의 압박으로 키프로스가 물러났다. 항구는 다시 테케로 돌아갔다.

그리고 1391년,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가 테케 베이릭을 병합했다.

다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402년 티무르가 아나톨리아를 휩쓸면서 오스만이 일시 후퇴했고, 테케가 잠깐 복위했다. 오스만이 안탈리아를 완전히 손에 넣은 건 1423년이었다.


노예가 드나들던 항구

오스만 치하의 안탈리아는 규모가 커졌다. 동지중해 교역의 중간 거점이자, 특히 노예 무역의 주요 경유지로 기능했다.

1560년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약 3주 사이에 2,020명의 노예가 안탈리아 항을 통과했다. 이 기간 안탈리아를 지나간 30척의 선박 가운데 18척이 노예를 실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올라와 흑해 방면으로 향하는 항로의 중간 기착지였다.

노예만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인도와 아라비아의 향신료, 이집트 아마포가 들어왔고, 목재와 앙카라 양모가 빠져나갔다. 오스만의 상업 도시 부르사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잇는 교역로가 이 항구를 관통하고 있었다.


쇠퇴는 예상보다 늦게, 예상과는 다른 이유로 찾아왔다

흔히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항로 개척이 지중해 무역을 무너뜨렸다고 이야기한다. 안탈리아의 쇠퇴도 거기서 시작됐다고 보기 쉽다.

그런데 실제로 오스만의 지중해 교역은 16세기 전반까지 즉각적인 타격을 받지 않았다. 포르투갈이 홍해와 페르시아만을 막으려 했지만, 완전한 봉쇄는 끝내 불가능했다.

안탈리아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은 따로 있었다. 1516~17년 오스만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무역 흐름 자체가 재편됐다. 카이로를 중심으로 하던 상품 이동 경로가 바뀌었고, 안탈리아는 이 재편 과정에서 서서히 비중을 잃었다. 17세기에 이르면 이 항구는 이미 보통 연안 도시로 격하돼 있었다.


전략적 가치 하나로 버틴 항구는, 그 가치가 사라지면 조용히 뒤편으로 밀려난다. 셀주크가 산맥을 넘어 손에 넣은 항구를, 오스만은 무역 흐름을 다시 짜면서 내려놓았다.


참고 문헌

  • Zübeyde Güneş Yağcı & Mustafa Akkaya, “Güney-Kuzey Köle Ticaretinde Antalya Limanı,” Turkish Studies, Vol. 12, No. 26 (2017)
  • M.E. Martin, “The Venetian-Seljuk Treaty of 1220,” English Historical Review, Vol. XCV (1980)
  • Odo of Deuil, De Profectione Ludovici VII in Orientem (Fordham Medieval Sourcebook)
  • Wikipedia: Hadrian’s Gate, Second Crusade, Beylik of Teke, Byzantine–Venetian treaty of 1082, Sultanate of 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