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중반 알제를 그린 공개도메인 목판화. 살리흐 레이스가 1552년부터 1556년까지 베이레르베이로 다스린 요새 항구도시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거의 모든 걸 이룬, 그러나 마지막 한끗이 아쉬웠던 살리흐 레이스

1554년 1월 7일 밤, 모로코의 옛 수도 페즈 성벽 아래에 알제에서 온 군대가 도착했다. 머스킷으로 무장한 보병과 카빌리의 기병이 섞인 부대였다. 다음 날 도시는 함락됐고, 군대의 지휘관은 한 남자를 데리고 왔다. 페즈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다.

군대를 이끈 제독의 이름은 살리흐 레이스, 알제의 총독이었다. 그가 왕좌에 앉힌 사람은 와타스 왕조의 마지막 후예 아부 하순이었다. 그런데 이 새 왕은 아홉 달을 채우지 못하고 전장에서 죽었고, 페즈는 다시 적의 손으로 넘어갔다. 한 제독이 직접 세운 왕국이 한 해도 가기 전에 사라졌다.

이 짧고 허망한 원정에 살리흐 레이스라는 인물이 압축돼 있다. 그는 평생 무언가를 거의 완성했지만, 마지막 한 걸음에서 번번이 미끄러진 사람이었다.

해적의 부관으로 시작한 커리어

살리흐 레이스는 1488년경에 태어났다. 출생지는 사료마다 갈린다. 프랑스 학자들의 연구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꼽고, 튀르키예 쪽 자료는 차나칼레 인근 카즈다으 산지를 든다. 어느 쪽이든 젊은 나이에 바다로 나가 당대 지중해에서 가장 유명한 해적 형제, 오루츠 레이스와 하이레딘 바르바로스의 휘하로 들어갔다.

오루츠가 1518년에 죽자 동생 바르바로스 밑에서 계속 경력을 쌓았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게 있다. 알제의 해적들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무법자 무리가 아니었다. 바르바로스는 형이 죽은 직후 알제를 오스만 술탄에게 바치고, 그 대가로 베이레르베이 직함과 예니체리 병력, 대포를 받았다. 이때부터 알제 함대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서쪽 해군이었다. 당시 지중해는 오스만 제국과, 에스파냐 왕이자 신성 로마 황제였던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세력이 둘로 갈라 다투던 바다였다. 알제의 배가 에스파냐가 쥔 북아프리카 항구나 에스파냐령 섬을 치는 것은 한낱 약탈이 아니라 두 제국이 벌이던 전쟁의 일부였다.

이런 구도 속에서 살리흐도 움직였다. 1520년에는 제르바로 항해해 에스파냐가 쥐고 있던 본을 공격했고, 1532년 바르바로스가 술탄의 부름을 받아 이스탄불로 향할 때 함대의 한 축으로 따라가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연안을 휩쓸었다. 이 무렵 그는 한 무리의 갤리선을 거느린 지휘관으로 올라섰다.

1529년 포르멘테라 앞바다의 해전이 그런 무대였다. 그해 살리흐는 갤리오트 14척을 이끌고 발렌시아만을 휩쓴 뒤 아이딘 레이스의 함대와 합류했다. 에스파냐는 사령관 로드리고 데 포르투온도에게 갤리 선단을 주어 이들을 막게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오스만 측은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했다. 한 기록은 이 싸움에서 살리흐가 직접 토르토사 선장의 갤리선을 나포하고 포르투온도의 아들까지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정작 포르투온도 본인은 추격에 몰두하다 자기 기함이 본대에서 떨어져 나간 사이 포위당해 전사했다. 지휘관으로서는 뼈아픈 최후였다.

해적 부관에서 지휘관으로

1538년 프레베자 해전은 살리흐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남긴 무대였다. 오스만 함대를 총지휘한 사람은 바르바로스였고, 맞은편에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모은 신성동맹 함대가 안드레아 도리아의 지휘 아래 서 있었다.

이 전투에서 살리흐 레이스는 후방 제독의 직함으로 함대의 오른쪽 날개, 24척의 갤리선을 맡았다. 해적의 부관으로 출발했던 사람이 어느새 큰 해전에서 함대의 한쪽 날개를 지휘하는 장교가 되어 있었다. 전투 중에는 다른 두 척과 함께, 베네치아 함대의 자랑이던 거대한 갤리언 ‘갈레오네 디 베네치아’에 배를 붙여 직접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 당대 최대급으로 꼽히던 이 기함에 백병전을 거는 일은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 임무였다. 프레베자는 오스만이 지중해의 제해권을 사실상 손에 넣은 승부처였고, 살리흐는 그 승리의 한 날개에 자기 이름을 걸었다.

이듬해인 1539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갤리선 20척을 끌고 나와 바르바로스의 함대에 합류했다. 카스텔누오보로 가는 길에 스키아토스, 스키로스, 안드로스, 세리포스 같은 에게해의 섬들을 베네치아로부터 빼앗았고, 그해 8월에는 카스텔누오보를 포위해 되찾고 인근 리산 요새까지 손에 넣었다. 1543년 니스 원정 때는 도시가 함락된(8월 5일) 뒤 갤리선 20척과 푸스타 3척을 직접 이끌고 에스파냐의 코스타 브라바 해안을 훑었다. 로사스에 병력을 상륙시켜 도시를 약탈하고, 팔라모스를 비롯한 항구들을 차례로 들이친 뒤 알제로 돌아왔다. 두 원정에서 함대를 총지휘한 사람은 오스만 해군 총사령관(카푸단 파샤)이 된 바르바로스였고, 살리흐는 그 밑에서 한 분함대를 거느린 제독으로 움직였다. 그의 30대와 40대가 그렇게 지나갔다.

바다의 지휘관에서 지방 총독으로

전환점은 1551년이었다. 그해 오스만은 1530년부터 성 요한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던 트리폴리를 공략했다. 이 작전의 주역은 총사령관 시난 파샤와 투르구트 레이스였고, 살리흐 레이스는 기사단의 요새를 불과 150보 거리까지 다가가 근거리에서 포격하며 공격을 지원했다. 얼마 안 가 요새 지휘관 가스파레 드 빌리에가 항복했고, 트리폴리는 오스만의 손에 떨어졌다.

살리흐 레이스가 이 전투의 승리에 가장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에게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승리였다. 이 전공의 대가로 마침내 영지를 맡아 다스리는 지방 행정관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술탄 술레이만 1세는 그를 서지중해 함대 사령관이자 알제의 베이레르베이, 곧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1552년 4월 알제에 부임했다. 알제 총독은 원래 바르바로스의 친아들 하산 파샤가 맡고 있었는데, 그가 모로코와의 마찰을 빚는 문제로 해임되면서 공석이 됐던 자리에 임명된 것이었다. 함대의 한쪽 날개를 맡아 지휘하던 살리흐 레이스가 이제는 지중해 전체의 한쪽 날개를 관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알제의 총독이 된 뒤 그의 임무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해적 제독의 그림과 사뭇 달랐다. 그를 기다린 것은 대함대가 맞붙는 결전이 아니라, 사막과 산악의 육상 정치였다.

바다가 아니라 사막에서

알제에 부임한 그해, 살리흐 레이스는 곧장 남쪽 사하라로 군대를 몰았다. 오아시스 도시 투구르트를 점령했고, 더 남쪽의 우아르글라로 진격했다. 우아르글라는 그가 온다는 소식만으로 주민들이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나버려 텅 빈 도시에 그대로 입성했다. 이 일대의 베르베르 군소 세력을 조공국으로 묶어 오스만 알제리의 남쪽 경계를 사막 한가운데까지 넓히게 됐다.

서쪽 모로코 방면으로도 손을 뻗쳤다. 1553년 7월, 마요르카와 메노르카를 약탈하고 벨레스 항에서 한 사람을 배에 태우고 돌아오는데, 이 사람은 몰락한 와타스 왕조의 아부 하순이었다. 한때 모로코를 다스렸으나 신흥 사아디 왕조의 무함마드 알-셰이크에게 페즈를 빼앗기고 쫓겨난 인물이었다. 같은 시기 살리흐는 모로코 북쪽 해안의 작은 바위섬 요새 페뇬 데 벨레스도 손에 넣어, 유럽 연안을 노리는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 모든 준비가 끝난 1554년 1월, 살리흐 레이스는 페즈로 원정을 떠난다. 타자를 거쳐 세부강을 따라 진군한 그의 군대는 페즈를 함락하고, 보호하고 있던 아부 하순을 오스만의 속국 군주로 왕좌에 앉혔다. 사아디 왕조에 맞서 오스만의 영향력을 모로코 심장부까지 밀어넣은, 그의 경력에서 가장 야심 찬 한 수였다.

아홉 달의 왕국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오스만군은 페즈에 넉 달쯤 머물렀는데, 주둔하는 동안 주민과의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아부 하순은 돈을 치러 오스만 병력을 돌려보내고 마는데, 문제는 병력이 빠지니 곧바로 국방력에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다.

쫓겨났던 사아디의 무함마드 알-셰이크가 반격에 나섰다. 1554년 9월, 타들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부 하순은 패배하고 목숨을 잃고 만다. 사로잡혀 처형된 것이 아니라 전투 중에 전사한 죽음이었다. 와타스 왕조는 그와 함께 끝났다. 같은 달 13일, 사아디 군대는 페즈에 다시 입성해 모로코 전체를 손에 넣었다. 살리흐 레이스가 정치적 승부수로 직접 왕좌에 앉힌 왕이 고작 아홉 달 남짓 자리를 지키다가 제거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역사의 교훈이 드러난다. 전투에서 승리해 한 지역을 점거하는 것과, 그곳을 계속해서 통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점이다. 전쟁사의 대가 임용한 박사가 여러 차례 글과 말을 통해 강조했던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 전쟁은 게임과 달라서, 전투에서 이겼다고 그 땅이 곧바로 내가 다스릴 수 있는 영토로 편입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과거의 많은 국가들이 전투에 이기고도 조공만 받고 물러나거나, 승리한 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서야 그 지역에 기반을 다졌다. 살리흐 레이스의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페즈를 점령하고 왕을 옹립할 힘은 있었지만, 그곳에 계속 머무르며 지키고 다스릴 수준까지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베자이아, 단 한 번의 깔끔한 승리

괴뢰정권을 통해 영향력 하에 두고자 했던 페즈에서의 정치적 시도가 무너진 이듬해, 살리흐 레이스는 다시 자기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일을 추진했다. 정면 공성전이다. 1555년 그는 4만 병력을 끌고 에스파냐가 차지하고 있던 항구도시 베자이아(부지)를 포위했다. 14일 동안 쉬지 않고 포격을 퍼부어 항구 입구를 지키던 베르젤레트 요새와 성벽 앞 에스파냐 성채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결국 에스파냐 총독 알론소 데 페랄타가 항복하여 성문을 열었고, 살리흐는 약속대로 살아남은 에스파냐 주민과 병사들이 무기와 짐을 챙겨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베자이아를 손에 넣으면서 오스만은 트리폴리와 함께 서지중해에 또 하나의 단단한 거점을 얻었다. 페즈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정치력을 발휘해 정권을 전복시키고 모로코 규모의 영토를 영향력 아래 놓고 다스리는 것은 실패했다. 하지만 무력으로 항구 하나를 빼앗고 장악해 거점화 하는 것은 살리흐 레이스의 주특기와도 같은 일이었다. 여담이지만, 항복한 에스파냐의 장수 페랄타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 도시를 버렸다는 죄로 재판을 받고 1556년 5월 바야돌리드에서 참수당했다.

출항하지 못한 마지막 원정

그의 마지막 계획은 에스파냐가 쥐고 있던 오랑이었다. 1556년 봄, 살리흐 레이스는 아들을 직접 이스탄불로 보내 함대 지원을 요청하고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해 알제에는 페스트가 돌고 있었다. 살리흐 레이스는 아들이 받아온 지원 함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원정이 출항하기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예순여덟 살 무렵이었다.

한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대함대가 맞붙는 극적인 최후도, 적의 칼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도 없었다. 바다를 누비던 제독은 결국 항구의 병상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준비하던 오랑 원정은 그해 8월 부하들 손에 시도됐다가 실패했다.

위키백과조차 그를 헷갈린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살리흐 레이스지만, 후대의 기록은 자꾸만 그를 다른 사람과 헷갈린다.

대표적인 것이 갤리 노예 이야기다. 1540년 코르시카에서 정비 중에 제노바에 사로잡혀 4년간 갤리선에서 노를 젓다가, 바르바로스가 제노바를 압박해 3,500두카트에 풀려났다는 극적인 일화가 종종 살리흐 레이스의 것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의 동료 투르구트 레이스다.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였고 여러 작전을 함께한 탓에 후대의 역사가가 둘을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사망 연도도 마찬가지다. 영어판 위키백과는 그가 1568년에 죽었다고 적어두었지만, 이는 위키백과에 정리돼 있는 알제 총독 명단과도 어긋난다. 그 명단을 보면 1556년 살리흐 레이스의 뒤를 그의 오랜 부관이던 하산 코르소가 잇고, 같은 해 안에 무함마드 쿠르도을루, 유수프로 총독 자리가 빠르게 넘어간다. 1556년 이후 알제의 권좌가 이렇게 여러 손을 거쳤으니, 그가 1568년까지 살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여지는 없다. 그가 1556년에 죽었다는 편이 기록과 맞아떨어진다.

해적의 부관에서 출발해 서지중해를 호령하는 총독까지 올랐지만, 정작 그가 가장 큰 정치력을 발휘했던 모로코 지배는 한 해도 못 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평생을 지중해의 최전선에서 활약했으나 마지막에는 전염병으로 육지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고, 수많은 전공을 세워 오스만 제국에 공헌했지만 정작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의 생몰년도조차 헷갈린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이룬 사나이, 하지만 어딘가 마지막 한끗이 아쉬웠던 남자. 살리흐 레이스의 일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