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초상화. 1567년 화가 알론소 산체스 코에요가 그린 작품이다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1547–1578) — 레판토 해전 총사령관이 된 황제의 서자

1547년 2월 24일, 독일 레겐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제국의회에 참석 중이었다. 그해 봄, 레겐스부르크 출신의 평민 여성 바르바라 블롬베르크가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인 카를 5세는 8년 전 아내 이사벨 황후를 잃고 홀로 지내던 참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헤로니모라고 지었다.

카를 5세는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아이는 황제의 궁정 음악가 프란시스코 마시의 집에 맡겨졌다가, 1554년경 황제의 시종장 루이스 데 키하다와 그의 아내 막달레나 데 우요아의 손으로 넘어갔다. 키하다 부부는 카스티야 내륙의 빌라가르시아 데 캄포스 성에서 아이를 길렀다. 헤로니모는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했다.

1. 황제의 비밀 유언

1554년 6월 6일, 카를 5세는 유언 부속문서에 한 문장을 남겼다. “황후와 사별하고 혼자가 된 후 독일에 머물던 시절, 결혼하지 않은 여성과의 사이에 태어난 나의 아이가 있으니 그 이름은 헤로니모다.”

황제는 1558년 유스테 수도원에서 사망하기 전, 이 아이를 직접 만났다. 그러나 생전에 본인의 입으로 직접 이 아이를 자식으로 공식 인정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복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지시를 남겼다. 헤로니모를 형제로 받아들여 부양하라는 것이었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가 1565년에 그린 펠리페 2세의 초상. 검은 옷에 흰 러프 칼라를 두른 모습이다
돈 후안의 이복형이자 후원자이면서 경계자였던 펠리페 2세.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1565년. 출처: Wikimedia Commons (PD)

155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펠리페 2세는 지시를 이행했다. 열두 살의 헤로니모는 이때 처음으로 마드리드 궁정에 오게 되었고, 스페인 왕의 이복동생으로 공식 인정되었다. 이름도 바뀌었다.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데 아우스트리아(de Austria)*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스페인어로 부르는 명칭으로, 황실 혈통임을 공식적으로 표시하는 이름이었다. 연간 1만 5천 두카트의 생활비가 지급되었다. 두카트는 금화 단위로, 당시 도시의 숙련공이 한 해 100두카트 안팎을 벌었으니 1만 5천 두카트는 대귀족의 수입에 맞먹는 거액이었다. 다만 호칭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졌다. 왕과 왕족에게 붙는 ‘전하(Highness)‘가 아니라, 스페인 대귀족인 그란데(grande)에게 붙는 ‘각하(Excellency)‘였다. 왕족보다는 낮고 귀족보다는 높은, 어딘가 어정쩡한 위치였다.

그는 알칼라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함께 공부한 동급생 중에는 펠리페 2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 그리고 펠리페 2세의 이복 누나인 마르가레타 디 파르마의 아들이자 훗날 플랑드르에서 자신의 후임자가 될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있었다.

왕실은 그를 교회로 보내 성직에 종사하게 하려 했다. 이것은 당대에 황제의 사생아를 관리하는 왕실 입장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돈 후안은 이를 거부했다. 1565년, 오스만 제국이 몰타를 포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펠리페 2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구원함대에 합류하려 했다. 결국은 펠리페 2세의 친서로 함대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떤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지는 분명해졌다.

2. 알푸하라스에서 지중해까지

1567년, 펠리페 2세는 그를 지중해 함대 사령관(Capitán General del Mar)에 임명했다. 이렇다 할 전공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당시 왕족의 군 지휘권은 실전 경력이 아니라 혈통으로 주어졌고, 실무는 경험 많은 부관들이 맡았다. 성직으로 보내려던 계획을 접은 펠리페가 야심 많은 이복동생에게 군인의 길을 공식적으로 열어준 셈이기도 했다. 이듬해 그는 갤리선 33척을 이끌고 북아프리카 연안의 스페인 요새 거점인 오란과 멜리야 앞바다를 순찰하며 바르바리 해적과 부딪쳤다. 다만 결정적인 교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이렇다 할 전과 없는 첫 출동이었다.

1568년,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에서 모리스코 반란(알푸하라스 전쟁)이 일어났다. 모리스코는 15세기 말 강제 개종된 이슬람 교도들로, 수십 년간의 차별과 압박 끝에 알푸하라스 산악 지대에서 봉기했다. 펠리페 2세는 돈 후안에게 진압을 맡겼다.

진압 작전은 2년 가까이 이어졌다. 1570년 1월, 갈레라 마을을 함락한 뒤 마을을 완전히 밀어버렸다. 이때 살해된 모리스코는 기록에 따라 수백 명에서 수천 명까지 편차가 크다. 함락 직후 마을이 초토화되어 정확한 집계가 남지 않은 탓이다. 전투가 끝난 뒤 돈 후안은 모리스코 주민 전체의 강제 추방을 집행했다. 추방을 지휘한 당사자였지만, 그는 그 광경을 외면하지 않았다. 당시 편지에 그는 이 추방이 자신이 목격한 가장 처절한 인간의 비참함이었다고 적었다. 떠나는 길에 비바람과 눈이 몰아쳐 어머니가 아이를, 아내가 남편을 길가에 버려야 했다는 것이다.

알푸하라스 전쟁이 끝나자 기독교 성 동맹(Holy League)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스페인, 베네치아, 교황령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연합 함대를 꾸리기로 한 것이다. 지휘관을 정해야 했다. 스페인은 베네치아 제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베네치아는 스페인 제독을 원하지 않았다. 돈 후안은 그 교착을 푸는 카드였다. 그가 중립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펠리페 2세는 그의 임명을 스페인 참전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다만 황제의 아들이자 왕의 동생이라는 그의 혈통은 여느 제독들보다 높았다. 일개 국가의 제독이 아니라 왕족 밑에 서는 것이라면 어느 쪽도 체면을 잃지 않았다. 교황도 그를 지지했다. 그렇게 그라나다에서 막 귀환한 스물네 살의 돈 후안이 연합 함대 총사령관에 낙점되었다.

3. 레판토, 1571년 10월 7일

16세기 후반에 그려진 레판토 해전 그림. 수백 척의 갤리선이 뒤엉켜 싸우고 포연이 자욱하다
레판토 해전(1571년 10월 7일). 작자 미상, 16세기 후반, 런던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D)

함대는 메시나에서 집결했다. 갤리선 206척과 베네치아의 갤리어스 6척, 병력 약 6만–9만 명. 오스만 함대는 갤리선 222척과 갤리옷 56척, 병력 약 6만–7만 명으로 그리스 서해안 레판토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돈 후안의 전술적 선택은 두 가지였다. 우선 갤리어스 여섯 척을 본 함대보다 약 800미터 앞에 배치했다. 갤리어스는 당시 가장 강력한 포함으로, 적이 다가오는 동안 집중 포격으로 오스만 전열을 흐트러뜨렸다. 실제로 오스만 함선들이 진격을 시작하자마자 베네치아 갤리어스의 강력한 포격에 약 7척이 침몰하며 대형이 무너졌다.

다음으로 그는 기함 레알을 오스만 총사령관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의 술타나 정면으로 몰았다. 술타나는 알리 파샤가 직접 탄 오스만 함대의 기함이었다. 양측 최고 지휘관의 배가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다. 두 배는 충돌해 합쳐졌고, 갑판 위에서 스페인 보병 테르시오(방진 보병 부대)와 오스만 정예 보병인 예니체리의 근접 전투가 벌어졌다. 90분 가까이 이어진 혼전 끝에 알리 파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총사령관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의 머리가 창에 꽂혀 올라가자 오스만 함대 전체의 사기가 꺾였다.

전투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오스만 함선 177척이 나포 또는 격침되었고, 2만 5천에서 3만 3천 명이 전사했으며, 오스만에 납치되어 갤리선의 노를 젓고 있던 기독교 노예 약 1만~1만 5천 명을 해방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연합 함대가 입은 손실은 갤리선 10척 안팎에 불과했다.

유럽 전역이 들끓었다. 교황은 감사 미사를 올렸고, 크리스트교를 믿는 곳곳의 도시에서 축하 퍼레이드를 벌였다. 오스만 해군이 무적이라는 신화가 처음으로 깨지게 된 사건으로, 돈 후안은 순식간에 기독교 세계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편지와 대화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왕실이 허락하지 않은 호칭, ‘전하’를 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불과 6개월 만에 함대를 재건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성 동맹은 1573년 3월 해체되었다. 베네치아가 단독으로 오스만과 강화를 맺으면서 연합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1573년 돈 후안이 탈환한 튀니스는 이듬해 오스만에게 되돌아갔다. 레판토의 승리는 눈부셨고 돈 후안의 명성도 치솟았지만, 지중해의 판도는 거의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4. 플랑드르, 영웅을 기다리는 함정

1576년 3월 5일, 네덜란드 총독 루이스 데 레케센스가 갑자기 사망하자 펠리페 2세는 레판토의 영웅을 후임으로 낙점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1568년부터 독립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는데, 카리스마와 군사 경험과 왕실 혈통을 갖춘 돈 후안이라면 이 혼란을 수습하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돈 후안이 룩셈부르크에 도착한 것은 1576년 11월이었고, 그 몇 달 사이에 상황은 이미 수습 불가능한 쪽으로 굳어 있었다.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가 1573년에 제작한 저지대 지방 고지도. 홀란트, 제일란트, 브라반트와 주요 도시가 표시되어 있다
돈 후안이 총독으로 부임한 저지대 지방. 북부의 홀란트·제일란트, 남부의 나미르가 한 지도에 담겨 있다.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 1573년. 출처: Wikimedia Commons (PD)

1576년 11월 4일, 안트베르펜. 동시에 여러 나라와 전쟁을 하느라 어려워진 왕실 재정 탓에 수개월째 급료를 받지 못한 스페인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사흘 동안 안트베르펜 시민 최소 7천 명이 죽었고, 약 1천 채의 건물이 불탔다. 한때 유럽 최대 상업 도시였던 안트베르펜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쇠락하기 시작한다.

프란스 호헨베르흐의 판화. 불타는 안트베르펜 시청사 앞 광장에서 병사들이 시민을 살육하는 장면이다
불타는 안트베르펜 시청사와 스페인 대난투(1576년 11월). 프란스 호헨베르흐의 당대 판화. 출처: Rijksmuseum / Wikimedia Commons (CC0)

4일 후인 11월 8일, 네덜란드 17개 주 대표들이 겐트에 모였다. 평소에는 가톨릭과 칼뱅파로, 왕당파와 반란파로 나뉘어 다투던 주들이 하나의 문서에 서명했다. 겐트 평화 조약이었다. 요구 사항은 단 하나였다. 스페인 군을 내보내라.

돈 후안은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에 부임한 게 아니었다. 혼자 네덜란드까지 가야 했는데, 프랑스는 스페인과 오랜 앙숙인 데다 종교 내전으로 어지러워 스페인 왕의 동생이 드러내놓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돈 후안은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얼굴을 무어인처럼 칠한 채 노예로 변장해 프랑스를 가로질러 겨우 룩셈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를 기다린 건 스페인군의 반란이었다. 그가 지휘해야 할 병사들은 급료가 밀려 안트베르펜을 약탈하고 있었다. 지휘도 통제도 불가능해 군사 작전을 벌일 수 없었다. 돈 후안에게 남은 선택지는 협상뿐이었다.

게다가 네덜란드 전체가 스페인 왕실을 향한 분노로 똘똘 뭉쳐 있었다. 레판토에서는 그가 스페인 왕실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총사령관을 맡을 수 있었지만, 그의 이런 출신 성분은 네덜란드인의 반감만 더 강하게 키웠다.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네덜란드 의회는 돈 후안이 스페인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브뤼셀에 들어올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1577년 2월 12일, 다른 방도가 없던 돈 후안은 ‘항구적 칙서(Perpetual Edict)‘에 서명했다. 스페인 군대를 네덜란드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약속이었다. 반란을 진압하러 왔다가 오히려 군대를 철수시키게 된 꼴이었다.

5. 브뤼셀 입성과 균열

1577년 5월 1일, 돈 후안은 브뤼셀에 입성했다. 네덜란드 대표단은 돈 후안을 환영하는 척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돈 후안에게는 진압할 군대도, 이를 위한 마드리드의 재정 지원도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의회가 실질 권력을 쥐고 있었고, 반란의 지도자 오라녜 공 빌럼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경했다. 그는 칼뱅파가 장악한 최대 반란 거점인 홀란트와 제일란트 두 주의 총독이었고, 이 두 주는 돈 후안을 인정하지도, 그와의 어떤 합의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돈 후안과 오라녜 공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지기는 처음부터 어려웠다. 돈 후안의 임무는 펠리페 2세의 주권과 가톨릭 통일을 지키는 것이었고, 오라녜 공의 요구는 지방 자치와 종교 자유였다. 두 사람의 목표가 정확히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7월 24일, 협상이 이뤄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돈 후안은 먼저 움직였다. 항구적 칙서에 따라 스페인 정예병은 이미 4월에 이탈리아로 물러난 뒤였다. 대군이 없던 그는, 마침 나미르를 지나던 나바라 왕비 마르그리트를 영접한다는 구실로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성채를 급습해 점령했다. 나미르는 뫼즈강을 낀 남부의 요충지로, 가톨릭 세력이 강해 상대적으로 스페인에 우호적인 지역이었다. 협상의 여지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네덜란드 의회는 이를 증거로 들어 그가 처음부터 기만작전으로 일관했다고 비난했고, 양측은 전면 대립 국면에 돌입했다.

펠리페 2세는 증원군을 보냈다. 파르마 공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이끄는 스페인 테르시오가 다시 네덜란드에 들어왔다. 1578년 1월 31일, 젬블루 근교에서 스페인 기병 약 1,200명이 네덜란드 반란군의 허를 찔렀다. 2만 명의 반란군이 패주했고, 전사자 약 6천 명에 대포와 군기 전부를 잃었다. 스페인 측 사망자는 12명이었다. 전술적으로는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됐다. 홀란트와 제일란트는 건재했다. 네덜란드의 도시들은 항복하지 않았고, 스페인 왕실의 재정은 여전히 바닥이었다. 젬블루의 승리는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다.

6. 1578년 10월 1일

1578년 여름 내내 돈 후안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발열이 반복됐고, 몸은 야위어갔다. 10월 1일, 나미르 인근의 야영지 부제에서 그는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고작 31세였다. 사인은 발진티푸스로 추정된다.

시신은 토막 내어 비밀리에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으로 운반되었다. 네덜란드의 반란 세력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이듬해 5월 24일, 에스코리알 왕립 묘역에 안장되었다. 카를 5세와 함께.

그의 네덜란드 총독 자리는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이어받았다. 파르네세는 14년에 걸쳐 남부 가톨릭 지방을 스페인 왕권 아래 재통합했다. 하지만 북부 7개 주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으며,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을 인정받아 네덜란드 공화국이 되었다.

레판토의 영웅이 플랑드르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의 한계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스페인의 재정은 바닥났고, 네덜란드 전역의 깊은 분노는 한 사람의 카리스마로 해소될 수 없었다. 전장에서 통하는 것이 정치에서도 통하리라는 기대는 레판토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초상화는 마드리드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과 에스코리알 왕궁에 소장되어 있다. 레판토 해전 도해와 관련 회화는 바티칸과 나폴리 카포디몬테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출처

  • Charles Petrie, Don John of Austria (London: Eyre & Spottiswoode, 1967) — 영어권의 표준 전기. 출생·왕실 공인·레판토·플랑드르 총독기 전반.
  • Geoffrey Parker, The Army of Flanders and the Spanish Road, 1567–1659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2) — 1575년 스페인 파산과 급료 미지급, 안트베르펜 대난투의 재정적 배경.
  • Geoffrey Parker, The Dutch Revolt (Penguin, 1977) — 겐트 평화·항구적 칙서·나미르 점령·젬블루 전투의 정치 맥락.
  • Angus Konstam, Lepanto 1571: The Greatest Naval Battle of the Renaissance (Osprey, 2003) — 레판토 함대 구성·갤리어스 배치·전술.
  • Roger Crowley, Empires of the Sea (Random House, 2008) — 레판토 해전과 지중해 대오스만 전쟁 서사.
  • Encyclopædia Britannica, “Juan de Austria,” “Battle of Lepanto,” “Pacification of Ghent.”
  • Encyclopedia.com, “Juan De Austria, Don (1547–1578).”

히어로 이미지는 알론소 산체스 코에요의 〈무장한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1567, 마드리드 데스칼사스 레알레스 수도원)를 가로형으로 재가공한 것이다. 본문 삽화는 펠리페 2세 초상(소포니스바 앙귀솔라, 1565), 레판토 해전(작자 미상, 16세기 후반, 런던 국립해양박물관), 안트베르펜 대난투(프란스 호헨베르흐 판화), 저지대 지방 지도(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 1573)로, 모두 Wikimedia Commons의 공개 도메인·CC0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