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레타 디 파르마(1522–1586) — 황제의 서녀, 네덜란드를 다스리다
1521년 가을,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는 플랑드르 귀족 랄랭(Lalaing) 가문의 성에 잠시 머물렀다. 그곳에서 태피스트리 직조인의 딸로 태어나 하녀로 일하던 요한나 판 데르 헤인스트를 만났다. 짧은 관계였다. 이듬해 1522년 7월, 플랑드르의 소도시 오데나르데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요한나는 1525년 법학자와 재혼했고, 카를 5세로부터 소액의 연금을 받아 생활하다가 1541년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가 마르가레타다.
카를 5세는 사생아 딸을 숨기지 않았다. 1529년 7월, 황제는 마르가레타를 공식적으로 자신의 딸로 인정했다. “마르가레타 폰 외스터라이히(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이 따라왔다. 사생아였지만, 황제의 딸이었다.
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이탈리아
1533년, 열한 살의 마르가레타는 150명의 기마 호위대와 함께 이탈리아로 보내졌다. 이탈리아 궁정 교육과 메디치 가문과의 정략결혼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보호자는 마담 드 라누아 — 파비아 전투를 지휘한 샤를 드 라누아의 미망인이자, 수르모나 공주라는 작위를 가진 합스부르크 측근이었다. 나폴리에서 시작해 피렌체, 로마를 거치며 마르가레타는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를 배웠다. 이 언어들은 나중에 요긴하게 써먹게 된다.
첫 번째 결혼은 1536년 6월, 피렌체에서였다. 상대는 피렌체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마르가레타는 열네 살이었고, 알레산드로는 스물일곱이었다. 혼인 계약에는 마르가레타가 열여섯이 될 때까지 잠자리를 갖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결혼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났다. 1537년 1월 6일 밤, 알레산드로는 사촌 로렌치노 데 메디치가 유인한 자리에서 암살되었다. 로렌치노는 “폭군을 타도했다”는 사과문을 남기고 도주했고, 훗날 베네치아에서 암살당했다. 결혼 1년도 안 돼 남편을 잃은 열네 살이었지만, 그 일을 두고 마르가레타 본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직접 기록한 동시대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이듬해 1538년 11월, 두 번째 결혼이 로마에서 성사되었다. 상대는 오타비오 파르네세. 교황 파울루스 3세의 손자였다. 마르가레타는 열다섯, 오타비오는 열넷이었다. 이 결혼은 카를 5세가 억지로 밀어붙인 정략결혼이었고, 마르가레타는 처음부터 강하게 반발했다. 두 사람은 별거 상태를 유지했다. 그런데 1541년 오타비오가 알제리 원정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오면서 둘 사이가 잠시 가까워졌다. 1545년 쌍둥이 아들도 얻게 됐다. 한 명은 유아기에 사망했고, 살아남은 아이의 이름은 알레산드로였다.
파르마 공작부인
오타비오는 1547년 파르마·피아첸차 공작위를 이어받았고, 마르가레타는 공작부인이 되었다. 두 사람은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오가며 공작령을 다스렸다. 마르가레타는 독자적인 궁정과 예배당을 유지했고, 1558년경 피아첸차에 팔라초 파르네세 건설을 명했다. 건축가 프란체스코 파초토, 이후 자코모 비뇰라가 참여한 이 궁전은 끝내 완공되지 못했다. 불과 1년 뒤인 1559년, 마르가레타가 네덜란드 총독이 되어 떠나게 됐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여성인 마르가레타가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가게 됐을까. 그 사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보자. 3년 전인 1556년, 카를 5세가 퇴위하면서 스페인 왕위와 네덜란드 군주 자리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신성로마황제 자리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겨줬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렇게 스페인 계통과 오스트리아 계통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네덜란드를 책임지게 된 펠리페 2세는 아버지 카를 5세와 달리 네덜란드를 직접 다스린 경험이 없었고, 그곳의 언어인 플랑드르어도 프랑스어도 유창하지 않았다. 1559년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카토-캉브레지 조약 이후,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대신 네덜란드를 맡아줄 누군가를 살폈는데, 그때 떠오른 게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이복 누나 마르가레타였다.
이 시대에 여성이 총독 자리에 오르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마르가레타 직전 총독도 카를 5세의 누나 마리아 폰 헝가리였다. 남성 총독은 현지에서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쌓아 독립을 꾀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여성은 그럴 위험이 낮다고 봤다. 마르가레타는 여기에 더해 카를 5세의 딸이라는 혈통, 이탈리아 궁정 26년의 경험,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외교적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이단 탄압으로 들끓는 네덜란드를 달래려면 강경한 군인보다 타협을 아는 인물이 필요했다. 적어도 펠리페 2세는 그렇게 판단했다.
안토니스 모르(Anthonis Mor), Portrait of Margaret of Parma(c. 1559), 필라델피아 미술관 /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네덜란드 총독 임명 직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공식 초상. 목의 진주 목걸이는 그녀의 이름 Margarita(라틴어로 '진주')를 암시한다.
브뤼셀, 권한 없는 총독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 중 하나였다. 안트베르펜의 거래소는 국제 금융의 중심이었고, 플랑드르 직물 무역이 대서양과 발트해를 연결했다. 이 지역을 관리하는 자리에 마르가레타가 앉았다.
명목은 총독이었지만 실제 결정권은 없었다. 중요한 결정은 죄다 마드리드 결재가 필요했고, 세금과 무역 정책 역시 처음부터 마드리드 소관이었다. 마르가레타가 쓸 수 있는 레버는 이단재판 집행 속도를 조절하는 것뿐이었다. 그 레버를 그녀는 최대한 늦추는 쪽으로 당겼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펠리페 2세가 심어둔 실세가 있었다. 추기경 그라벨 — 총독 마르가레타 위에서 실질적으로 정책을 좌지우지하며 이단 탄압을 밀어붙이던 인물이었다. 이런 그라벨에 대한 네덜란드 귀족들의 반감은 극심했고, 마르가레타 자신에게도 그라벨은 껄끄러운 존재였다. 1564년, 마르가레타는 펠리페 2세를 설득해 그라벨을 네덜란드에서 몰아낸다. 네덜란드 현지의 민심을 달래면서 본인의 권력 행사를 방해하던 장애물도 제거한, 재임 기간 가장 큰 성과였다.
그렇다고 해서 마드리드의 네덜란드 통치에 대한 방침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단 탄압법 유지, 이단재판 지속. 1565년 펠리페 2세는 이른바 “세고비아 숲의 편지들”에서 네덜란드 측 요구를 전면 거부했다. 종교의 자유, 신분제 의회 소집 요구 모두 불가하다는 답변이었다.
1566년 여름, 성상들이 쓰러지다
1566년 4월 5일, 마르가레타의 아들 알레산드로의 결혼식이 브뤼셀 궁정에서 열리던 즈음, 다른 방에서는 저지 귀족 200~400명이 조용히 서명을 받고 있었다. “귀족의 타협안(Compromis des Nobles)“이었다. 이단 탄압 정지, 종교재판 철폐, 신분제 의회 개최 요구를 담은 청원서가 마르가레타 앞에 제출되었다.
마르가레타의 측근 샤를 드 베를레몽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걱정 마십시오, 저것들은 그냥 거지들(gueux)에 불과합니다.” 청원인들은 그 말을 오히려 명예 훈장으로 삼았다. “거지들의 전쟁”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마르가레타는 스스로에게 권한이 없으니 마드리드에 전달하겠다고 하며, 그 사이 이단법 집행을 임시로 정지시켰다. 이것이 “완화 조치(Moderation)“였다.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단속이 멈추자 오히려 그동안 숨어 있던 칼뱅파가 한꺼번에 양지로 나오게 된 것이다. 잡혀갈 걱정이 사라지자 신도들은 도시 성벽 밖 들판에 모여 대규모 야외 설교를 열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어로 하헤프레이켄(hagepreken, ‘울타리 밖 설교’)이라 불린 이 집회에 수천 명이 몰렸다. 이단법 집행이 멈췄는데 오히려 분위기는 더욱 들끓었다.
1566년 8월 10일, 플랑드르 서쪽 끝 소도시 스텐부르데의 수도원 교회에서 신교 시위대에 의해 성상들이 박살났다. 폭동은 빠르게 번졌다. 8월 20일 안트베르펜, 22일 겐트, 24일 델프트. 한 달이 지나기 전에 네덜란드 전역이 베엘던스토름(Beeldenstorm) — 성상파괴의 폭풍 — 에 휩쓸렸다.
프란스 호헨베르흐(Frans Hogenberg), Beeldenstorm in Antwerpen(1566), 판화.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1566년 8월 안트베르펜 성당 내부의 성상파괴 장면을 기록한 동시대 판화. 이 사건이 마르가레타의 첫 번째 총독직이 끝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르가레타는 펠리페 2세에게 편지를 썼다. 통제가 무너진 상황을 두고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이 나라에서는 이제 가톨릭 신앙만 빼고 무엇이든 허용되는 지경입니다.” 이단을 단속해야 할 나라에서 오히려 가톨릭이 위협받고 있다는 한탄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빌럼 판 오라녜(Willem van Oranje)와 노이르카름(Noircarmes) 같은 유력 귀족들을 주요 도시로 보내 질서를 회복하게 했다. 8월 23일에는 앞서 타협안에 서명했던 그 귀족 연합 — ‘거지들’ — 과 협정을 맺었다. 이미 예배가 열리고 있던 장소에서는 칼뱅파 집회를 계속해서 허용하는 대신, 연합이 해산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협정은 마르가레타가 원해서 맺은 것은 아니었다. 지역 귀족들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병력을 보태달라는 요청을 거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맺은 협정이라고 봐야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마드리드는 더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왕국군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알바 공작이 왔다
1567년 4월 27일, 펠리페 2세는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 알바 공작 — 에게 네덜란드 파견을 명했다. 약 9,000명의 스페인·이탈리아 병사들이 “스페인 가도(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까지 이어진 합스부르크 육상 보급로)“를 따라 북쪽으로 행군했다.
마르가레타는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그 겨울 충성파 귀족과 독일 용병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고, 1567년 봄까지 남부의 칼뱅파 거점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3월 안트베르펜 인근 오스테르베일에서 반군을 격파했고, 비슷한 시기 발랑시엔이 포위 끝에 항복했다. 개신교 진영의 핵심이던 빌럼 판 오라녜마저 신변에 위협을 느껴 독일로 몸을 피했다. 알바의 군대가 국경을 넘는 시점에는 마르가레타가 이미 네덜란드의 질서를 상당 부분 되돌려놓은 상태였다.
알바 공작이 브뤼셀에 도착한 것은 1567년 8월 22일이었다. 마르가레타는 충성을 유지한 도시들에는 병력을 주둔시키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알바는 이를 거절했다. 왕국군 사령관이긴 하나, 왕족인 현지 총독의 요청을 거절하다니. 이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알바의 권한은 마르가레타 위에 있었다. 펠리페 2세가 알바에게 내린 위임장이 그를 네덜란드 주둔 전군의 총사령관으로 명시하고, 군사에 관한 전권을 그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다. 총독은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고, 알바는 총독의 동의 없이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마르가레타는 펠리페 2세에게 편지를 써서 경고했다. 알바의 강경책이 재앙을 부를 것이라고. 펠리페 2세는 알바 편이었다.
9월 9일, 피의 평의회(Raad van Beroerten)가 설립되었다. 같은 날, 그동안 마르가레타에게 협력했던 에흐몬트 백작(Egmont)과 호른 백작(Horn)이 체포되었다. 반란도 이단도 아닌, 협상과 타협의 길을 걸었던 귀족들이었다.
이런 상황에 무력감과 회의감을 느낀 마르가레타는 사임서를 제출했다. 9월 13일 무렵이었다. 12월 30일, 그녀는 브뤼셀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두 번째 소환, 두 번째 실패
마르가레타가 예상한 것처럼 알바 공작의 네덜란드 통치는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수천 명을 처형하고, 전례 없는 세금(십분의 일세)을 부과했다. 네덜란드의 민심은 들끓었고 반란은 내전 수준으로 확대됐다.
알바 공작은 실정의 책임을 물어 1573년 결국 본국으로 소환됐다. 후임 레케센스가 부임했다가 1576년 죽고, 그 뒤를 마르가레타의 이복동생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 레판토 해전의 영웅 — 이 이었다. 그런데 그 돈 후안마저 1578년 티푸스로 급사했다. 펠리페 2세는 다시 마르가레타를 불렀다. 그녀의 직위는 군권은 없는 민정 총독이며, 군사 총지휘는 마르가레타의 아들인 알레산드로가 맡도록 했다.
모자(母子) 공동 통치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알레산드로는 군사와 민정을 모두 자신이 통솔해야 한다며 펠리페 2세에게 압력을 넣었다. 어머니의 강점인 외교와 타협은 1차 총독기에나 필요했던 것이고, 이제는 남부를 무력으로 되찾아야 하는 국면이었다. 펠리페 2세는 검증된 야전 사령관인 아들에게 단일 지휘권을 몰아주는 쪽을 택했다. 1582년, 마르가레타는 나뮈르로 물러났다. 이듬해 이탈리아 귀환 허가가 났다.
두 번 소환, 두 번 퇴장.
오르토나에서의 마지막
마르가레타에게 이탈리아 귀환은 낯선 곳으로의 후퇴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버지 카를 5세에게서 물려받은 아브루초 일대의 영지 — 펜네를 수도로 삼은 이른바 ‘파르네세 영지’ — 를 1567년 첫 번째 귀환 때부터 다스려 왔다. 1583년 네덜란드를 완전히 떠난 뒤로는 치타두칼레와 라퀼라 사이의 이 산악 지대에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권한 없는 자리만 전전하던 그녀가 온전히 자기 뜻대로 다스린 땅은 이 말년의 아브루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브뤼셀에서는 사소한 결정 하나도 마드리드의 결재를 기다려야 했지만, 여기서는 도시를 사들이고 세금을 정하고 궁전을 올리는 일을 누구의 허락도 없이 결정했다.
영주로서 그녀는 수완가에 가까웠다. 침체된 지역 경제를 일으키는 데 공을 들였고, 라퀼라에는 로마 시절 자신의 저택 이름을 딴 ‘팔라초 마다마’를 두어 시인과 음악가, 조각가, 철학자를 불러모았다. 작은 문예 부흥이 그녀의 궁정을 중심으로 일었다. 오늘날까지 아브루초 곳곳의 길과 광장에 그녀의 이름이 남아 있고, ‘두케사(공작부인)의 산’이라 불리는 자연보호구역도 그 흔적이다.
1582년, 그녀는 아드리아 해안의 소도시 오르토나를 사들였다. 가격은 52,000두카트. 아브루초 영지를 통할할 새 거점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건축가 자코모 델라 포르타에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궁전 설계를 맡겼고, 1584년 공사가 시작됐다. 기공식에서 그녀는 건물 네 귀퉁이마다 청동 동전 세 개씩을 던져 넣었다. 고대 로마식 의례였다.
오르토나의 팔라초 파르네세. 마르가레타가 자코모 델라 포르타에게 맡겨 1584년 착공했으나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했다. 아드리아 해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한다. 사진: Pia81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그러나 궁전의 완공은 끝내 보지 못했다. 1586년 1월 18일, 마르가레타는 오르토나에서 세상을 떴다. 향년 예순셋. 미완으로 남았던 그 궁전은 후대에 완성되어, 지금은 현대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유해는 본인의 뜻에 따라 피아첸차 산시스토 교회에 안장되었고, 묘비는 7년 후인 1593년에야 조각가 시모네 모스키노의 손으로 완성되었다.
같은 해 9월, 오타비오 파르네세도 뒤를 따랐다.
어머니가 막으려 한 전쟁의 결말
마르가레타가 8년간 외교와 타협으로 막으려 했던 전쟁을, 아들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끝내 닿지 못한 군사적 성취를 이뤘다. 앞서 본 안트베르펜 함락이 그 정점이었다.
오토 판 빈(Otto van Veen), Portrait of Alessandro Farnese(16세기 말),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마르가레타의 아들이자, 스페인이 네덜란드에 보낸 가장 유능한 사령관으로 꼽힌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둘 다 궁극적으로는 실패했다. 마르가레타의 타협이 전쟁을 막지 못했고, 알레산드로의 군사적 접근 방법으로도 역시 네덜란드 북부를 되찾지는 못했다. 스페인이 원하던 것 — 통일된 가톨릭 네덜란드 — 은 어느 쪽의 방법으로도 달성되지 않았다.
19세기 역사가 존 로스럽 모틀리는 마르가레타를 두고 “남성적이지만 일종의 장엄한 매력이 있었고, 윗입술에 콧수염으로 유명했다”고 썼다. 적대적 관계였던 남자들이 남긴 조롱을 역사가가 증폭시킨 것이다. 실제 공식 초상화 — 안토니스 모르가 그린 두 점 — 에는 검은 옷을 입고 단정히 앉은 여인이 있을 뿐이다.
현대 연구자들은 대체로 다른 방향의 결론을 내린다. 마르가레타의 실패는 개인 역량의 문제가 아니었다. 판세를 제대로 분석한 마르가레타의 요청과 경고는 모두 마드리드에 의해 무시 당했고, 그들은 오히려 강경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알바 공작을 보내며 마르가레타의 정책을 뒤집었다. 그녀가 현지에서 볼 수 있었던 것들 — 귀족들의 불만, 종교 갈등의 온도, 상인 계층의 이해관계 — 은 결정권이 있는 사람들에게 닿지 않았다.
태피스트리 직조인의 딸이 황제의 딸로, 공작부인으로, 두 번의 총독으로. 그것도 충분히 먼 길이었다. 다만 그 자리에서 쓸 수 있는 패가 처음부터 충분하지 않았다.
출처
- Charlie R. Steen, Margaret of Parma: A Life (Brill, 2013) — 마르가레타의 생애 전반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현대 전기.
- Geoffrey Parker, The Dutch Revolt (Penguin, 1977) — 베엘던스토름 전후 정황과 마르가레타의 대응. 본문에 인용한 서한 문구(“이 나라에서는 이제 가톨릭 신앙만 빼고 무엇이든 허용되는 지경입니다”)의 근거.
- John Lothrop Motley, The Rise of the Dutch Republic (1856) — 마르가레타의 “남성적 외모·콧수염” 묘사가 후대에 증폭된 출처. 19세기 서술이라는 한계를 감안해 비판적으로 참고.
- “The Beeldenstorm and the Spanish Habsburg Response (1566–1567),” BMGN – Low Countries Historical Review (2016) — 성상파괴 운동과 합스부르크의 대응에 관한 학술 분석.
- “The Nobility of Abruzzo: Margherita of Austria,” La Gazzetta Italiana — 말년 아브루초 영지 통치와 오르토나 팔라초 파르네세 관련.
- Philadelphia Museum of Art — 안토니스 모르의 마르가레타 초상화(c. 1559) 소장 정보.
- Gemäldegalerie, Berlin — 안토니스 모르의 마르가레타 초상화(c. 1562) 소장 정보.
본문의 인물 초상 및 판화 이미지는 Wikimedia Commons의 공개 도메인 자료다. 오르토나 팔라초 파르네세 사진은 Pia81의 촬영물로 CC BY-SA 3.0 라이선스를 따른다. 히어로 이미지(안트베르펜 그로테 마르크트)는 AI로 생성한 이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