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궁정의 여성 화가,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Q: 소포니스바 앙귀솔라는 누구인가?
A: 1532년경 이탈리아 크레모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625년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사망한 르네상스 화가다. 16세기 후반 유럽에서 국제적으로 알려진 첫 여성 화가에 가깝다. 미켈란젤로에게 약 2년간 비공식 지도를 받았고, 1559년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초청으로 마드리드 궁정에 들어가 20년간 활동했다. 다만 공식 직함은 ‘궁정 화가’가 아니라 왕비의 ‘시녀’(dama de compañía)였다. 당시 스페인 궁정 제도에 여성을 위한 ‘궁정 화가’ 자리 자체가 없었다. 그녀가 스페인에서 그린 왕실 초상화 중 상당수는 1734년 마드리드 알카사르 궁 화재로 소실됐고, 살아남은 작품도 오랫동안 알론소 산체스 코엘로 같은 남성 화가의 이름으로 묶여 있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미술사가들이 그녀의 작품을 다시 골라내고, 1976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의 “Women Artists: 1550–1950” 전시가 열리면서 그녀는 미술사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한눈에 보는 소포니스바
| 항목 | 내용 |
|---|---|
| 본명 | Sofonisba Anguissola |
| 생몰 | c.1532 크레모나 – 1625년 11월 팔레르모 |
| 가계 | 크레모나 귀족 가문, 7남매 중 맏이 |
| 첫 스승 | Bernardino Campi (1546~), 이후 Bernardino Gatti |
| 비공식 멘토 | 미켈란젤로, c.1557~1558 (부오나로티 기록보관소 편지 2통 현존) |
| 스페인 궁정 | 1559~1579, 왕비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의 시녀 겸 그림 교사 |
| 첫 결혼 | 1571, 시칠리아 귀족 Fabrizio de Moncada (펠리페 2세가 12,000 스쿠디 지참금 지급) |
| 재혼 | 1580년 1월, 제노바 귀족 Orazio Lomellino (귀국 항해 중 만남) |
| 거주 이동 | 크레모나 → 마드리드 → 시칠리아 → 제노바 → 팔레르모 |
| 대표작 | The Chess Game (1555, 포즈난 국립박물관), Self-Portrait at the Easel (c.1556, Łańcut Castle), Portrait of Philip II (Prado) |
| 자화상 수 | 최소 12점. 뒤러와 렘브란트 사이 가장 다작의 자화상 화가 |
| 스페인 시기 작품 소실 | 1734년 12월 마드리드 알카사르 궁 화재 |
| 현대 재평가 | 1976 LACMA 전시, 1995 NMWA 단독전, 2019~2020 Prado 합동전 |
| 주요 소장처 | Prado, Uffizi, KHM Vienna, 포즈난 국립박물관, Boston Gardner, Capodimonte, Dublin |
‘시녀’라는 직함이 가진 무게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16세기 스페인 궁정에서 dama de compañía는 왕비의 사적 공간에 머무는 귀족 여성 동반자였고, 옷 시중부터 정서적 동무, 사적 통역, 비공식 교사까지 폭넓은 일을 맡았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가 1559년 마드리드 궁정에 도착했을 때 받은 직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펠리페 2세가 이탈리아에서 직접 부른 화가였지만, 당시 스페인 궁정 제도에 ‘여성 궁정 화가’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직함은 시녀였고, 일은 왕비의 그림 교사이자 왕실 초상화가였다.
이 글은 그녀의 약 90년 인생을 따라간다. 한 귀족 집안의 딸이 어떻게 미켈란젤로의 비공식 멘토십을 얻었는지, 스페인 궁정에서 20년을 살며 왕비의 절친한 친구가 된 과정이 어떠했는지, 92세에 시력을 잃은 상태로 젊은 앤서니 반 다이크에게 회화의 빛에 관해 어떤 조언을 남겼는지,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이 한 번은 화재로 한 번은 잘못된 이름표로 사라졌다가 1970년대에 다시 돌아온 경로가 어떠했는지를 본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Portrait of Philip II(c.156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오랫동안 알론소 산체스 코엘로의 작품으로 분류됐다가 후대에 소포니스바의 작품으로 재속성화된 초상.
내가 기억하는 펠리페 2세의 모습은 이 그림이다. 생경했던 이름 소포니스바 앙귀솔라를 처음 접하고 호기심에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이 그림이 그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랍고 또 반갑던지. 그때부터는 어쩐지 그녀에게 친근감을 갖고 조사에 임하게 되었다.
1. 1546년, 크레모나의 귀족 딸이 화가 작업실에 들어가다
소포니스바의 아버지 아밀카레 앙귀솔라(Amilcare Anguissola)는 크레모나의 귀족이자 인문주의자였다. 자식들에게 고대 그리스나 로마식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에서부터 그 성향이 드러난다. 맏딸의 이름 소포니스바는 카르타고 명문가의 인물에서 따 왔고, 동생들 이름인 미네르바, 엘레나, 루치아, 에우로파, 안나 마리아도 같은 결이었다. 막내 아들 이름은 아스드루발레로,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의 동생 이름에서 따 왔다.
1546년, 14세 무렵에 아밀카레는 소포니스바와 동생 엘레나를 화가 베르나르디노 캄피(Bernardino Campi, c.1522–1591)의 집에 보내 3년 동안 그림을 배우게 했다. 당시 여성이 화가의 작업실에 들어가 정식 도제 계약을 맺는 일은 거의 없었다. 길드 시스템이 여성 회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캄피의 집에 머물며 그림을 배웠는데, 이는 당시에 귀족 여성이 화가 수련을 받는 거의 유일한 합법적 길이었다. 캄피가 1549년경 크레모나를 떠난 뒤에는 베르나르디노 가티(Bernardino Gatti, c.1495–1576)에게서 약 3년을 더 배웠다.
이 시기에 그려진 자매들의 초상이 여러 점 남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1555년작 The Chess Game이다. 동생 루치아가 왼쪽에서 체스를 두고 있고, 가운데 서서 웃는 동생 에우로파, 오른쪽에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동생 미네르바, 그리고 우측 상단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나이 든 여성 시중이 함께 있다. 체스판 위에는 라틴어 명문 “ex vera”(실제로부터)가 새겨져 있다. 당시 체스는 남성적 지적 활동의 상징이었고, 여성 셋이 게임의 한가운데에서 능동적 주체로 등장하는 구성은 그 자체로 일종의 사회적 발언에 가까웠다. 이 작품은 지금 폴란드 포즈난 국립박물관(Muzeum Narodowe w Poznaniu)에 소장돼 있다.
2. 1554년, 가재에 손가락을 물린 동생을 그리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Asdrubale Bitten by a Crayfish(c.1554), 분필과 연필, 33.3×38.5cm.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 /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미켈란젤로가 "우는 소년을 그려 보라"고 던진 도전 과제의 답으로 알려진 드로잉.
1554년경, 소포니스바는 어린 동생 아스드루발레를 모델로 한 드로잉 한 장을 그렸다. 그가 바구니에 손을 넣었다가 가재에 손가락을 물려 우는 장면, 옆에서는 여동생 에우로파가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구도였다. 분필과 연필로 종이 위에 그린 33.3 × 38.5cm 크기의 이 작품은 지금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Asdrubale Bitten by a Crayfish라는 제목으로 보관돼 있다.
이 드로잉이 특별한 이유는, 그 시기 미켈란젤로가 소포니스바에게 보낸 비공식 도전 과제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그녀가 보내온 ‘웃는 소녀’ 드로잉을 본 뒤, “우는 소년을 그리는 게 더 어렵다”는 취지의 조언을 돌려보냈다. 가재 드로잉은 그 답이었다. 르네상스 미술 이론에서 espressione(표정·감정 표현)이 invenzione(창의적 구성)와 함께 화가의 핵심 능력으로 꼽혔던 맥락에서, 미켈란젤로의 요구는 일종의 기술 시험에 가까웠다.
미켈란젤로 본인이 소포니스바에게 보낸 편지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아밀카레가 미켈란젤로에게 보낸 편지 두 통이 피렌체의 부오나로티 기록보관소(Archivio Buonarroti)에 남아 있다. 1557년 5월 7일자 첫 번째 편지에서 아밀카레는 미켈란젤로가 소포니스바에게 보여 준 “명예롭고 다정한 애정”에 감사한다. 1558년 5월 15일자 두 번째 편지에서는 미켈란젤로를 “다른 모든 이보다 가장 덕망 있는 분”으로 칭하며, 그가 “내 딸 소포니스바의 그림을 칭찬하고 평가해 주신다”고 적었다. 같은 편지에서 아밀카레는 미켈란젤로가 드로잉을 보내 주면 소포니스바가 그것을 유화로 옮겨 그리겠다고 청하기도 했다. 남겨진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의 비공식 멘토십은 약 2년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물이 어떻게 평가됐는지는 1562년 1월 20일자 또 다른 편지에서 확인된다. 미켈란젤로의 측근이자 절친이었던 톰마소 데 카발리에리(Tommaso de’ Cavalieri)가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에게 가재 드로잉을 보내며, 미켈란젤로의 드로잉 한 점을 함께 동봉했다. 이 편지에서 카발리에리는 소포니스바의 드로잉이 단순히 아름다운 것에 그치지 않고 “상당한 inventione(창의적 발상)“을 보인다고 칭찬했다. 르네상스 미술 이론의 어휘에서 inventione는 단순 기술을 넘어선 화가의 지적 능력을 가리키는 고급 평가였다.
조르조 바사리의 르네상스 화가전(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1568년 2판에는 가재 드로잉이 직접 언급된다. “한 어린 여자아이가 가재에게 손가락을 물려 우는 소년을 보고 웃는 모습, 그 어떤 드로잉도 이만큼 우아하지 못하고 이만큼 자연을 닮지 못했다.” 1550년 초판에는 소포니스바가 등장하지 않는다. 바사리가 1566년경 직접 크레모나를 방문해 작품을 본 뒤에야 1568년 개정판에 그녀의 항목을 새로 넣었다.
3. 1559년, 마드리드로 부르는 펠리페 2세의 편지
1559년, 펠리페 2세는 이탈리아에서 화가 한 명을 마드리드 궁정으로 보내라는 요청을 알바 공작과 페스카라 후작에게 전달한다. 그 결과 소포니스바 앙귀솔라가 부름을 받았다. 당시 그녀는 26세였고, 펠리페 2세의 새 신부가 될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Élisabeth de Valois)는 14세였다.
소포니스바에게 주어진 공식 직함은 dama de compañía(또는 dama de honor), 곧 왕비의 시녀였다. 16세기 스페인 궁정에서 ‘여성 화가’라는 직함은 제도적으로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궁정에 들이려면 시녀 신분이 유일한 합법적 경로였다. 실제 업무는 더 복합적이었다. 왕비의 그림과 드로잉 교사, 왕실 가족의 초상화가, 정서적 동반자, 1568년 엘리자베스가 죽고 난 뒤에는 두 어린 인판타(이사벨라 클라라 에우헤니아, 카탈리나 미카엘라)의 그림 교사. 2021년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나온 학술서에서 학자 Diana Gamberini와 Susan Jones는 이 복합 역할을 artista de compañía(“동반자 화가”)라는 용어로 새로 명명했다.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는 단순한 교사-학생 사이를 넘어섰다. 처음 만났을 때 소포니스바는 26세, 엘리자베스는 14세였고, 이후 9년간 거의 매일 함께 지냈다. 이탈리아 대사들의 보고서에는 1568년 엘리자베스가 23세의 나이로 출산 중 사망했을 때 소포니스바가 보인 깊은 슬픔이 기록돼 있다. 엘리자베스는 유언으로 소포니스바에게 돈과 브로케이드 직물을 남겼고, 엘리자베스 사망 후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고 스페인에 잔류한 시녀는 소포니스바가 유일했다.
4. 살아남은 일곱 점의 스페인 궁정 초상화
스페인 궁정 체류 20년 동안 소포니스바가 그린 작품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핵심 초상화는 약 일곱 점이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이 그중 다섯 점을 소장한다.
- Portrait of Elisabeth of Valois (마드리드 프라도)
- Portrait of Philip II (마드리드 프라도). 오랫동안 알론소 산체스 코엘로의 작품으로 분류됐다가 후대에 소포니스바의 작품으로 재속성화됐다.
- Portrait of Anne of Austria (마드리드 프라도)
- Portrait of the Infantas Isabel Clara Eugenia and Catalina Micaela (마드리드 프라도)
- Portrait of Giovanna of Austria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 Portrait of Alessandro Farnese (더블린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 Portrait of Infanta Isabella Clara Eugenia (c.1573, 토리노 갤러리아 사바우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Portrait of Elisabeth of Valois(c.156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소포니스바가 9년간 가까이서 그림을 가르쳤고 정서적 동무로 지냈던 왕비를 그린 초상이다. 흰담비 모피와 흑색 벨벳, 보석으로 장식된 정장이 합스부르크 궁정 예법을 그대로 보여 준다.
펠리페 2세가 1571년 그녀의 결혼식 때 12,000 스쿠디라는 거액의 지참금을 지급한 기록, 그리고 연간 100 두카트의 종신 연금을 부여한 기록은 그녀에 대한 궁정의 평가가 어느 수준이었는지 보여 준다. 16세기 후반 스페인에서 100 두카트는 도시 숙련공 한 해 수입의 두세 배, 중급 궁정 관리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무엇보다 결혼 후 별도 노동 없이도 평생 끊기지 않는 종신 보장이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궁정 화가급 처우를 받았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Portrait of Alessandro Farnese(c.1561), 더블린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후일 네덜란드 총독이 되는 파르네세 공작이 10대 후반에 마드리드 궁정에 머물던 시기의 초상.
알론소 산체스 코엘로(Alonso Sánchez Coello, c.1531–1588)는 같은 시기 펠리페 2세의 공식 궁정 화가였다. 소포니스바의 작품 중 다수가 오랫동안 코엘로의 이름으로 잘못 분류된 핵심 이유는, 두 사람이 같은 궁정에서 같은 시기에 같은 인물들을 그렸기 때문이다. 두 화가의 양식 차이는 미세하다. 소포니스바는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부드러운 명암 처리에 더 가깝고, 코엘로의 선은 좀 더 날카롭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양식 분석으로 재속성화가 이루어졌다. 한 가지 흥미로운 측면 기록은, 펠리페 2세가 자기 아들 돈 카를로스의 초상화 한 점을 두고 코엘로에게 “13점 이상 복제하라”고 명령했다는 점이다. 그 원본을 누가 그렸는지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소포니스바의 작품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5. 두 번의 결혼, 그리고 제노바 시기
1568년 왕비 엘리자베스가 죽고 나자, 펠리페 2세는 39세에 가까워진 소포니스바의 미래를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26세에 시녀 신분으로 궁정에 들어와 약 12년을 보내는 동안 결혼하지 않은 채로 왕비의 친밀한 동반자이자 그림 교사로 살았다. 16세기 귀족 여성이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결혼하던 시기에 39세까지 미혼이었던 것은, 시녀 직책 자체가 결혼과 양립하기 어려운 자리였기 때문이다. 시녀는 왕비의 사적 공간에 상주하며 정서적 동반자 노릇을 하는 자리였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면 그 역할이 불가능했다. 그 사이 그녀는 화가 경력을 이어 가는 쪽을 택했다. 왕비가 사라지자 시녀라는 자리도 곧 사라졌고, 펠리페 2세는 그녀에게 안정된 미래를 마련해 주는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1571년, 펠리페 2세의 주선으로 소포니스바는 시칠리아 부왕 파테르노 공작의 아들 파브리치오 데 몬카다(Fabrizio Moncada Pignatelli, c.1530~1578/79)와 결혼했다. 12,000 스쿠디라는 거액의 지참금은 그녀의 결혼 생활과 화가 경력을 동시에 보장하려는 장치였다. 파브리치오는 그녀의 그림 활동을 지지했고, 두 사람은 시칠리아 파테르노에 정착했다.
약 8년 뒤인 1579년경 파브리치오가 탄 배가 팔레르모 해안에서 알제리 해적의 습격을 받았고, 그는 익사로 생을 마감했다. 16세기 후반 시칠리아 해안은 바르바리 해적이 끊임없이 노리던 약탈 지대였다. 파브리치오는 소포니스바와 비슷한 나이대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같은 해 말 소포니스바는 47세에 과부가 된 채 크레모나로 돌아가는 배를 탔다. 그 배 위에서 그녀는 제노바 귀족 오라치오 롬엘리노를 만났고, 1580년 1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첫 결혼이 펠리페 2세가 주선한 정략 결합이었다면, 두 번째 결혼은 본인의 선택이었다.
1584년부터 약 1616년까지 30년 가까이 두 사람은 제노바에 살았다. 이 시기에 소포니스바는 다시 활발하게 그림을 그렸고, 자화상도 여러 점 남겼다. 1620년 무렵 두 사람은 시칠리아 팔레르모로 다시 이주했다. 마지막 자화상으로 꼽히는 Self-Portrait aged 78(1610)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6. 1624년 7월 12일, 반 다이크가 노화가를 찾아가다
1624년 여름, 25세의 플랑드르 화가 앤서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가 시칠리아 팔레르모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그때 이탈리아 각지를 돌며 Italian Sketchbook이라는 노트에 견문과 스케치를 기록하던 중이었고, 7월 12일 노화가 소포니스바 앙귀솔라를 직접 찾아갔다. 그가 노트의 110번째 장(leaf 110)에 남긴 이탈리아어 메모와 스케치는 오늘날 런던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 Cat. No. 1957,1214.207.110)에 소장돼 있다.
메모의 핵심을 옮기면 이렇다.
팔레르모에서 1624년 7월 12일, 96세의 화가 시뇨라 소포니스바를 실제로 그렸다. 그녀의 기억력과 두뇌는 여전히 매우 명민하다. 그녀는 나에게 여러 조언을 해 주었다. 빛을 너무 높이 잡지 말 것, 그러면 노년의 주름에 그림자가 너무 크게 진다. 그 밖에도 좋은 관찰을 많이 들려주었다. 그녀가 천성적인 화가, 기적적인 화가(pittora de natura)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시력이 떨어져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손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단단했다.
반 다이크는 96세라고 기록했지만, 후대 학자들의 재계산으로는 89~92세가 실제 나이에 가깝다. 어쨌든 그녀는 그해 만남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25년 11월 팔레르모에서 사망했다.
반 다이크가 이 만남에서 받은 인상은 뒤에 자주 인용된 한 줄로 요약된다. “한 맹인 여성의 말 한 마디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에서보다 더 많은 지혜를 얻었다.” 이 만남을 바탕으로 반 다이크가 그린 유화 초상은 영국 켄트의 놀 하우스(Knole House, National Trust)에 소장돼 있다.
7. 1734년의 화재, 그리고 잘못된 이름표로 보낸 200년
소포니스바의 사후 약 100년 뒤인 1734년 12월 24일부터 28일까지, 마드리드 알카사르 궁(Real Alcázar de Madrid)에 큰 화재가 났다. 궁에 보관돼 있던 약 2,000점의 회화 중 약 500점이 소실됐는데, 소포니스바가 스페인 궁정 체류 20년 동안 그린 왕실 초상화의 상당수가 이 화재로 사라졌다. 어떤 작품이 정확히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세부 목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일부 영문 백과사전이 “17세기 화재”라고 적은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학계 정설은 1734년 화재다.
화재로 작품이 사라진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살아남은 그림들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잘못 분류됐다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오랜 기간 티치아노, 엘 그레코, 카라치, 알론소 산체스 코엘로, 후안 판토하 데 라 크루스 같은 남성 화가들의 작품으로 잘못 분류됐다. 이 탓에 19세기 동안 미술사 서술에서 소포니스바의 이름은 거의 사라졌다.
소포니스바의 이름이 다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1971년 미국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발표한 에세이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는 여성 미술가가 역사에서 사라진 구조적 원인을 분석한 이정표였고, 그 후속으로 1976년 노클린은 앤 서덜랜드 해리스(Ann Sutherland Harris)와 함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Women Artists: 1550–1950”이라는 대형 전시를 공동 큐레이션했다. 이 전시에 소포니스바 앙귀솔라의 작품이 들어갔다. 1995년에는 워싱턴 D.C.의 국립여성미술관(NMWA)에서 첫 단독 전시가 열렸다. 2019~2020년에는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A Tale of Two Women Painters라는 제목으로 소포니스바와 라비니아 폰타나의 합동 전시가 진행됐다.
오늘날 그녀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것은 보통 50점 안팎이다. 2019년 마이클 콜(Michael Cole)이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낸 Sofonisba’s Lesson은 한 발 더 보수적이다. 그녀의 작품으로 거론된 약 200점을 검토해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34점뿐이라고 정리했다.
8. 자화상이 남긴 것
소포니스바 앙귀솔라, Self-Portrait at the Easel(c.1556), 폴란드 우안추트 성(Łańcut Castle) /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그녀가 평생 그린 12점 이상의 자화상 중 초기 대표작. 캔버스 위에 성모자상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그렸다.
소포니스바가 평생 그린 자화상은 최소 12점, 위키미디어 커먼스 기준으로 추적 가능한 자화상이 약 26점이다. 일부 학자는 그녀를 알브레히트 뒤러와 렘브란트 사이 가장 다작의 자화상 화가로 평가한다. 그렇게 많이 그린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실용적인 이유로, 여성으로서 라이브 인체 모델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본인과 가족이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다른 하나는 전략적인 이유로, 자화상은 화가의 자기 광고였다. 길드와 아카데미에 접근할 수 없는 여성 화가가 자기 이름과 얼굴을 후원자들 사이에 유통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자화상이었다.
대표 자화상 몇 점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 Self-Portrait at the Easel (c.1556, 폴란드 우안추트 성 / Łańcut Castle)
- Miniature Self-Portrait (c.1556, 보스턴 미술관 MFA)
- Self-Portrait at a Spinet (나폴리 카포디몬테)
- Portrait of Bernardino Campi Painting Sofonisba (c.1559, 시에나 국립회화관)
- Self-Portrait aged 78 (1610, 개인 소장)
이 중 시에나의 Portrait of Bernardino Campi Painting Sofonisba는 따로 언급할 가치가 있다. 첫 스승 캄피가 캔버스 위의 소포니스바를 그리는 장면을, 다시 그 소포니스바가 그린 이중 초상이다. 2002년 복원 과정에서 그림 안에 ‘제3의 팔’이 발견됐는데, 처음에 다른 자세로 그렸다가 다시 수정한 흔적이었다. 미술사가 휘트니 채드윅(Whitney Chadwick)은 이 작품을 두고 “여성 화가가 스스로 주체와 객체의 위치를 의식적으로 무너뜨린 최초의 역사적 사례”라고 평했다. 그림을 그리는 자와 그려지는 자가 같은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16세기 화가가 한 작품 안에 의도적으로 새겨 넣었다.
참고 자료
- Encyclopaedia Britannica, “Sofonisba Anguissola” — britannica.com
- Museo del Prado, “Sofonisba Anguissola” collection page — museodelprado.es
- National Museum of Women in the Arts, “5 Fast Facts: Sofonisba Anguissola” — nmwa.org
- Smarthistory, “Sofonisba Anguissola” — smarthistory.org
- Michael Cole, Sofonisba’s Lesson: A Renaissance Artist and Her Work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9)
- Whitney Chadwick, Women, Art, and Society (Thames & Hudson, 1990)
- Linda Nochli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ARTnews, 1971)
- Archivio Buonarroti, Florence — Amilcare Anguissola 편지 1557년 5월 7일, 1558년 5월 15일
- British Museum, Cat. No. 1957,1214.207.110 — Anthony van Dyck, Italian Sketchbook leaf 110 (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