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위스퀴다르 지구의 아탁 발리데 모스크 복합단지 전경. 미마르 시난이 설계해 1583년 완공된, 오스만 왕실 여성이 후원한 건축단지 중 최대 규모다.

누르바누 술탄(1525?–1583) — 노예 소녀에서 오스만 제국의 태후로

1583년, 베네치아 원로원은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자국민도 공직자도 아닌, 오스만 술탄의 궁정 안에 있는 한 여인에게 2,000두카트에 달하는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명목은 감사였다. 레판토 해전 이후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던 오스만과의 긴장 상태를, 그 여인이 몇 차례나 파국으로부터 구해줬다는 이유였다.

이름은 누르바누. 셀림 2세의 하세키(총애 후궁)였고, 아들 무라트 3세 대에는 발리데 술탄(태후)이었다. 그런데 그가 처음 오스만 궁정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름도 신원도 불분명한 노예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파로스인가 코르푸인가: 풀리지 않은 출신

누르바누의 출생년은 확실하지 않다. 1525년경으로 보는 자료가 많지만 1530년경으로 보는 자료도 있다. 1537년 무렵 오스만 해군 사령관 하이레딘 바르바로사 휘하 함대가 에게해를 휩쓸던 중 파로스 섬 혹은 코르푸 섬에서 포로가 되어 어쩌다보니 궁정으로 흘러들어가게 됐다는 이야기가 여러 자료에 반복되지만, 이 서사를 당대에 직접 확인해주는 1차 사료는 없다.

누르바누의 출신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1900년 이탈리아 역사가 에밀리오 스파니가 베네치아 문서고 사료를 근거로 내놓은 것으로, 베네치아 귀족 니콜로 베니에르와 비올란테 바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체칠리아 베니에르-바포가 1537년 습격 때 납치되어 누르바누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20세기 오스만사학자 프란츠 바빙거가 이 설을 지지했고, 2018년 피나르 카야알프도 저서에서 당대 베네치아 원로원 서한을 신뢰할 만한 사료로 재평가하며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문제는 검증이었다. 스파니 본인의 후속 조사도, 이후 학자 에토레 로시의 연구도 베니에르 가문과 바포 가문 사이의 실제 혼인 기록을 문서고에서 찾아내지 못했다. 마리아 피아 페다니는 아예 이 “베네치아 술타나” 서사 자체가 16세기 베네치아 원로원이 외교적 필요에 따라 사후적으로 지어낸 계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1992년 텔아비브 대학의 벤저민 아르벨은 다른 설을 내놓았다. 코르푸의 그리스인 니콜라오스 카르타노스의 딸 칼레 카르타누가 실제 신원이며, “베니에르-바포”라는 귀족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1537년 납치 이후 베네치아 원로원이 오스만 궁정 내 유력 인물과의 연고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나중에 붙였고, 누르바누 본인도 정치적·물질적 이익을 위해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다고 아르벨은 설명한다. 아르벨 이후 페다니와 튀르키예 학자 에므라흐 사파 귀르칸도 이 설을 지지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오스만 궁정은 노예 출신 여성의 포획 이전 신원을 체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고, 남아 있는 단서 대부분은 정치적 동기로 왜곡될 수 있는 베네치아 측 외교문서에서 나온다. 당대에도 이미 누르바누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뭐가 사실이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베네치아 혈통의 술타나”라는 이야기 자체가 훗날 그의 외교에서 실질적인 자산으로 쓰이게 된다는 점이다.

셀림의 후궁, 하세키 술탄

1543년에서 1545년 사이(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누르바누는 마니사에 있던 왕자 셀림, 훗날의 셀림 2세의 후궁이 되었다. 딸 여럿을 낳았고 1546년에는 아들 무라트를 낳았다. 베네치아 대사 자코포 소란초는 그를 “미모뿐 아니라 비범한 지성으로 총애와 존경을 받는” 인물로 기록했다.

1566년 9월 7일 셀림 2세가 즉위하면서 누르바누는 하세키 술탄, 곧 후궁 중 최고 지위에 올랐다. 이 지위가 얼마나 확고했는지는 재정 배정에서 드러난다. 누르바누는 하루 1,100아크체를 받았는데, 왕자를 낳은 다른 후궁들이 받던 40아크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격차였다. 셀림 재위 8년 동안 그는 톱카프 궁전에 머물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셀림 2세 초상, 오스만 세밀화

셀림 2세(재위 1566–1574) 초상. 아가 칸 박물관(Aga Khan Museum) 소장 /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누르바누가 하세키 술탄으로 재정·정치적 지위를 누리던 시기의 술탄이다.

발리데 술탄, 제도가 되다

1574년 12월 15일 셀림 2세가 사망하고 아들 무라트 3세가 즉위하면서, 누르바누는 발리데 술탄(태후) 자리에 올랐다. 하세키와 발리데를 모두 거친 오스만 최초의 여성이었다. 튀르키예 종교청 이슬람 백과사전(TDV İslâm Ansiklopedisi)에 따르면 “발리데 술탄”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처음 쓴 인물도 그였다. 재정 배정은 하루 2,000아크체로 늘었다. 하세키 시절 하루 1,100아크체였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다. 이 재정은 궁정이 왕실 여성에게 매일 지급하던 수당으로, 개인 살림과 측근 인원을 유지하는 데 쓰였다.

역사학자 레슬리 피어스는 이 시점을 오스만 제국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짚는다. 16세기 중반 이후 오스만 제국은 술탄이 직접 전장을 누비는 정복 군주 체제에서 이스탄불에 정주하며 관료제로 통치하는 왕조 국가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 전환 속에서 하렘과 발리데 술탄직은 왕조의 존속을 보장하는 핵심 제도로 격상되었고, 누르바누가 바로 그 제도화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그는 말한다.

이 틀은 흔히 “여인들의 술탄국(Sultanate of Women)“이라 불린다. 쉴레이만 1세의 하세키였던 휴렘 술탄이 후궁의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선례를 열었고, 누르바누는 그것을 발리데 술탄이라는 공식 제도로 굳혔다. 이후 사피예 술탄, 쾨셈 술탄으로 이어지는 권력 계승이 이 제도 위에서 가능해졌다.

발리데 술탄이 된 누르바누는 측근 여성들을 궁정 요직에 배치했고 사위인 대재상 소콜루 메흐메드 파샤와 정례적으로 협의하며 국정에 개입했다고 전해진다. 베네치아 대사 파올로 콘타리니가 “모든 선과 악은 어머니 여왕으로부터 나온다”고 본국에 보고한 것도 이 무렵이다. 활동 범위는 궁정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프랑스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직접 서신을 교환하며 통상특권 갱신을 도운 사실도 확인된다.

오스만-베네치아, 비밀의 채널

발리데 술탄으로서 누르바누가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곳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한 외교였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가 궤멸당한 뒤, 오스만과 베네치아 사이에는 언제 다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긴장이 감돌았다. 수전 스킬리터가 편역한 누르바누와 그의 키라 사이의 서한은 이 시기 베네치아와의 서신 교환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1차 사료다. 베네치아도 가만있지 않았다. 본명이 키아라(Chiara)인 베네치아 태생 여성은 10인위원회의 첩자로 하렘에 들어가 누르바누의 개인 시종(칼파) 자리까지 올랐고, 기록에는 “키라나”라는 이름으로 남아 정보 제공의 대가로 수당을 받았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일화는 카푸단 파샤(오스만 해군 총사령관) 울루치 알리의 크레타 공격 계획이다. 레판토에서 유일하게 함대를 온전히 빼내 살아남은 이 지휘관이 크레타를 노렸을 때, 누르바누가 이를 만류해 대베네치아 선전포고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는 일화다. 해적 습격으로 벌어진 배상 분쟁을 중개해 확전을 방지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글의 도입부에 언급한 1583년 베네치아 원로원의 감사 선물은 베네치아가 누르바누 술탄과의 채널을 실질적인 외교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누르바누를 비롯한 오스만 궁정의 여인들이 실제 외교 무대에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결정적이었는지는 다른 문제다. 학계의 평가는 두 갈래다. 에므라흐 사파 귀르칸은 누르바누처럼 출신부터 오스만과 베네치아 양쪽에 걸쳐 있던 인물들이 오스만-베네치아 관계에서 실질적인 중개와 완충 기능을 했다고 본다. 반면 레슬리 피어스 계열의 연구는 하렘 여성의 권력 행사를 제도적으로 의도된 정치 구조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영향이 있었다”는 것과 “그 영향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계량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주장이라는 방법론적 신중함을 유지한다.

다시 누르바누와 베네치아 강화조약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누르바누-베네치아 채널이 전쟁 이후 관계 회복과 전쟁 재발 방지에 기여했다는 근거는 비교적 탄탄하다. 그러나 1573년 강화조약 자체의 협상 결과를 그가 좌우했다는 직접 증거는 없다.

아탁 발리데: 벽돌로 남긴 위신

오스만 체제에서 여성은 공직에 직접 나설 수 없었다. 그런 왕실 여성이 정치적 위신을 과시할 수 있는 방법이 자선 건축이었다. 누르바누가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 지구에 세운 아탁 발리데 모스크 복합단지는 그 정점에 해당한다.

설계는 오스만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맡았다. 1570년대에 착공해 누르바누가 사망한 1583년 말 완성되었다. 모스크, 신학교, 초등학교, 목욕탕, 병원, 수피 수도장, 급식소, 도서관까지 아우르는 이 복합단지는 오스만 왕실 여성이 후원한 시설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두 개의 미나레트와 도서관을 모두 갖춘 여성 후원 건축으로는 최초이기도 하다.

아탁 발리데 모스크 내부, 이즈니크 타일 장식

아탁 발리데 모스크 내부. 미마르 시난이 설계했으며 이즈니크 타일 장식이 특징이다. 사진: Dosseman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피나르 카야알프는 이 사업이 단순한 자선을 넘어 누르바누의 자기 이미지 구축 전략이었다고 본다. 부지 선정과 시설 구성에는 위스퀴다르를 수니 정통과 수피 신비주의가 공존하는 새로운 도시 중심지로 만들려는 정치적 야심도 읽힌다.

1583년, 마지막

1583년 12월 7일, 누르바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 안팎으로 추정된다. 며느리 사피예 술탄 계파의 독살설이 따라붙지만, 이는 주로 대중 역사서에서 다뤄지는 이야기일 뿐 학술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다.

장례는 이례적이었다. 그는 하기아 소피아의 셀림 2세 영묘에 합장되었는데, 술탄의 배우자가 술탄 본인과 같은 무덤에 묻힌 첫 사례로 기록된다. 오스만 술탄은 통상 가족의 장례 행렬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궁에 머물렀는데, 아들 무라트 3세는 이 관례를 깨고 어머니의 관을 직접 도보로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누르바누의 장례 행렬을 그린 1592년 오스만 세밀화

낙카쉬 오스만과 그의 공방, 누르바누의 장례. 세이이드 로크만의 《셰헨샤흐나메》(1592)에 실린 세밀화 95점 중 하나다. 톱카프 궁전 박물관(TSM B200) 소장 /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파로스에서 왔는지 코르푸에서 왔는지, 그것도 아니면 애초에 베네치아 원로원의 창작이었는지, 그녀의 출신은 지금도 알 수 없다. 실제 출신보다 중요한 것은 누르바누가 자신을 둘러싼 출신에 대한 소문조차 정치적 자산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노예로 끌려온 소녀 누르바누. 그녀는 발리데 술탄이라는 제도를 처음 만든 장본인이자 요동치던 16세기 지중해의 외교무대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출처

  • Leslie P. Peirce, The Imperial Harem: Women and Sovereignty in the Ottoman Empire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 발리데 술탄직 제도화와 “여인들의 술탄국” 논의의 핵심 학술서.
  • Leslie P. Peirce, Empress of the East: How a European Slave Girl Became Queen of the Ottoman Empire (Basic Books, 2017).
  • Benjamin Arbel, “Nur Banu (c. 1530–1583): A Venetian Sultana?,” Turcica 24 (1992): 241–259 — 코르푸-카르타누 출신설의 근거 논문.
  • Pınar Kayaalp, The Empress Nurbanu and Ottoman Politics in the Sixteenth Century: Building the Atik Valide (Routledge, 2018).
  • Susan A. Skilliter, “The Letters of the Venetian ‘Sultana’ Nur Banu and Her Kira to Venice,” in Studia Turcologica Memoriae Alexii Bombaci Dicata (Istituto Universitario Orientale, 1982), 515–536.
  • Ioanna Iordanou, Venice’s Secret Service: Organizing Intelligence in the Renaissance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 키라 중개인과 베네치아 정보망 관련.
  • Emrah Safa Gürkan, “His Bailo’s Kapudan: Conversion, Tangled Loyalties and Hasan Veneziano between Istanbul and Venice (1588–1591),” Osmanlı Araştırmaları / Journal of Ottoman Studies 48 (2016): 277–319.
  • TDV İslâm Ansiklopedisi, “Nurbânû Sultan,” Vol. 33 (2007), 250–251.
  • Franz Babinger, “Nurbanu,” in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Treccani.

아탁 발리데 모스크 내부 사진은 Dosseman의 촬영물로 Wikimedia Commons에 CC BY-SA 4.0으로 공개되어 있다. 셀림 2세 초상과 누르바누 장례 세밀화, 히어로 이미지(아탁 발리데 모스크 전경)는 Wikimedia Commons의 공개 도메인 및 CC BY-SA 4.0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