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옷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중심으로 학살의 도시와 궁정 만찬홀이 한 화면에 대비된 르네상스풍 일러스트

카트린 드 메디시스, 학살의 도시에서 마카롱을 굽다

1572년 8월 25일 아침의 파리에서는 전혀 다른 두 개의 모습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위그노 수천 명이 거리에서 살해되고 있었다. 8월 24일 새벽에 시작된 학살은 그날 종일 이어졌고, 다음 날 아침에도 시신 더미가 센강 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학살은 곧 프랑스 전역으로 번져 1만 명 넘게 죽었다. 영국 대사 프랜시스 월싱엄은 9월 2일 본국 외교를 총괄하던 토머스 스미스 경(Sir Thomas Smith)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무질서가 너무 광범위해서, 폭력을 휘두를 권한이 사실상 평민들의 손에 넘어가 있다(the sworde being commytted to the common people)“고 적었다.

같은 시간, 같은 도시의 다른 한쪽 궁정에서는 이탈리아 출신 셰프들이 새로 개발한 디저트를 굽고 있었고, 이탈리아 코미디 극단을 파리로 들이려는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향수를 입힌 장갑이 시녀들 사이에 돌아다녔고, 부르고뉴 호텔 무대에서는 발레의 원형이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풍경의 양면을 30년 동안 한 손으로 굴린 사람이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 / Caterina de’ Medici, 1519~1589)다. 한국어권에서는 이탈리아어 발음인 “카트린 드 메디치”로도 자주 표기되지만, 프랑스 왕비로서의 정식 호칭은 프랑스어 발음을 따른다.

1. 메디치의 14세 신부와 26년의 그림자

카트린은 1519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메디치 가문의 외동 상속녀였지만 부모는 그녀가 한 살이 되기 전에 모두 죽었고, 어린 시절은 수도원과 친척집을 떠돌았다. 1533년, 만 14세가 되던 해 그녀는 프랑스 왕세자 앙리(훗날의 앙리 2세)와 결혼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직접 결혼식을 주재한 정략 결혼이었다.

프랑수아 클루에가 그린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미니어처 — 16세기 중반, 검은 상복 차림의 정면 초상
프랑수아 클루에의 카트린 미니어처(c.1555). 양피지에 수채, 직경 9.5cm 원형. 1559년 남편 사망 이후 평생 입은 검은 상복 차림이다. (Victoria & Albert Museum)

이때부터 26년간, 카트린은 프랑스 궁정에서 사실상 “이름뿐인 왕비”였다. 남편의 마음은 결혼식 직후부터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클루에 공방이 그린 디안 드 푸아티에 초상 — 16세기 중반, 콩데 미술관 소장
카트린의 평생 라이벌이었던 디안 드 푸아티에. 앙리 2세보다 19살 연상이었다. (Atelier Clouet, c.1555, Musée Condé)

디안은 앙리보다 19살이나 연상이었다. 그녀가 받은 권력은 단순한 정부(情婦) 수준이 아니었다. 1548년 발랑티누아 공작부인 작위, 1553년 에탕프 공작부인 작위와 함께 약 30만 에퀴(écu, 당시 프랑스 금화 단위) 상당의 영지가 디안에게 들어갔다. 디안의 본거지 아네 성은 건축가 필리베르 들로름(Philibert Delorme)의 손으로 르네상스 별궁으로 개조됐다. 르와르 강 위에 다리처럼 걸린 셰농소는 1547년부터 디안의 안주인 노릇 아래 있었다.

카트린의 입장에서 가장 모욕적인 건 두 가지였다. 프랑스 왕실 보석(Crown Jewels of France)의 관리권이 왕비가 아니라 디안에게 넘어갔고, 자녀 양육의 실권도 디안의 몫이었다. 디안은 교육 담당관 장 드 위미에르와 빈번히 서신을 주고받으며 유모 채용·약 처방·아이들의 사소한 병치레까지 직접 지시했다. 디안의 친딸 프랑수아즈는 카트린의 수석 시녀로 배치됐다. 정부의 친족이 왕비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 희한한 구도였다.

2. 두 번째 인생의 시작

1559년 6월 30일, 앙리 2세가 마상시합에서 가브리엘 드 몽고메리의 부러진 창 파편을 황금 투구 차양 사이로 맞았다. 파편은 왕의 오른쪽 눈을 뚫고 뇌까지 들어갔다. 왕은 열흘간 의식을 잃었다 깨었다 하며 디안의 이름을 부르며 신음했지만, 카트린은 디안을 임종실에 들이지 않았다.

7월 10일 앙리가 죽자마자 카트린은 행동했다. 디안에게 왕실 보석 전량 반환을 명령했고, 셰농소를 왕실 자산이라는 법적 근거로 회수하면서 더 음울한 요새형 성 쇼몽쉬르루아르와의 강제 교환을 통보했다. 디안은 처형되거나 수녀원에 유폐되는 대신 자신의 본거지 아네로 물러나 1566년까지 자선 사업으로 여생을 보냈다. 카트린은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 복수보다는 인내를 선택했다.

그로부터 1589년에 사망하기까지 30년간, 카트린은 어린 세 아들(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이 차례로 즉위하는 동안 사실상 프랑스를 운영했다. 그리고 흔들리는 발루아 왕조의 정통성을 보여줄 도구로 “문화”를 골랐다.

3. 돌과 정원으로 새긴 메시지

카트린이 가장 먼저 손댄 건 건물이었다. 1563년 파리 서쪽 옛 기와공장 자리에 새 궁전 튀일리(Tuileries)를 짓기 시작했다. 건축가는 필리베르 들로름이었고, 1570년 이후에는 장 뷜랑이 이어받아 공사를 진행했다. 그녀 생전에 완공되지 못한 이 궁은 이후 앙리 4세부터 나폴레옹까지 단계적으로 확장됐다가 1871년 파리 코뮌 때 불타고 1883년 철거됐다.

르와르 강 위에 다리처럼 걸린 셰농소 성 — 카트린이 디안에게서 회수한 뒤 갤러리 다리를 올렸다
셰농소 성의 갤러리 다리. 카트린이 디안에게서 회수한 뒤 다리 위에 갤러리를 올렸다.

셰농소에서는 디안 시절에 착공된 강 위 다리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그 위에 갤러리를 새로 올렸다. 블루아 성도 증축했다. 왕가 묘역인 생드니 대성당에는 발루아 가문 전용 예배당(Rotonde des Valois)을 따로 계획했다. 프리마티초가 1563년 설계를 시작했지만 자금 부족과 종교전쟁의 격화로 공사는 1585년에 중단됐고 18세기 초 철거됐다. “프랑스 왕권은 여전히 장엄하다”는 메시지를 돌과 정원으로 새기려 한 30년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4. 마카롱 신화의 진실

식탁에서는 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게 통설이다. 카트린이 시집올 때 데려온 피렌체 셰프와 제과사들이 포크, 냅킨, 음식이 순차적으로 서빙되는 코스 형태의 식사, 무라노 유리잔, 파엔차 도자기를 프랑스 궁정 식탁에 깔았다는 이야기다. 마카롱이나 크레이프, 오렌지 소스 오리 같은 메뉴도 이 시기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는 미식 칼럼에서도 종종 인용하곤 한다.

그런데 학계의 입장은 정반대에 가깝다. 바버라 케첨 휘튼(Barbara Ketcham Wheaton)의 Savoring the Past(1983) 이후로 “카트린이 프랑스 요리에 끼친 직접적 영향은 거의 없다”는 게 표준 입장이다. 1533년 결혼 행렬에 “이탈리아 요리사·제과사 부대”가 동행했다는 동시대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는 당대가 아닌 17세기 말~18세기에 처음 등장해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항목별로 보면 더 명확하다. 마카롱은 카트린 이전부터 베네치아·코르므리 두 갈래 기원설이 있다. 포크는 11세기 비잔티움에서 베네치아로 들어와 카트린 사후 100년이 지난 루이 14세 궁정에 가서야 프랑스 표준 식기가 됐다. 셔벗·아이스크림은 17세기 후반 카페 프로코프(1686)가 시초였다고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렌지 소스 오리(canard à la bigarade)의 경우는 가장 이른 공식 출판 레시피가 카트린 사망 후 세월이 200년도 넘게 흐른 1813년이다.

눈에 띄는 건 18세기 디드로의 앙시클로페디다. “Cuisine” 항목에는 “그래서 산 너머 요리사들이 프랑스에 자리잡았는데,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궁정에서 봉직한 그 한 무리의 타락한(corrompus) 이탈리아인들에게 우리가 진 빚이라고 해봐야 보잘것없다”라는 원문이 나온다. 칭송이 아니라 이미 비꼬는 톤이다. 그게 19세기 낭만주의 음식사가들의 손에 들어가 오히려 “그러니까 진짜 그 시점에 이탈리아 요리사들이 왔다”는 통설로 굳어졌다.

5. 무대 위의 정치

음식 쪽이 후대의 신화라면, 발레 쪽은 실재한다.

1582년 출간된 발레 코믹 드 라 레인의 첫 장면 삽화 — 자크 파탱 작
1582년 출간된 *Balet comique de la Royne* 첫 장면 삽화. 발레사 최초의 인쇄 문헌이다. (자크 파탱, BnF Gallica)

1581년 10월 15일, 카트린은 며느리 루이즈 드 로렌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조이외즈 공작의 결혼식 축하 연회의 절정으로 발레 코믹 드 라 레인(Ballet Comique de la Reine)을 후원했다. 장소는 루브르 옆 부르봉 저택. 상연 시간은 5시간 30분. 왕(앙리 3세)과 왕비(루이즈 드 로렌)가 직접 무대에 올랐는데, 왕비는 3단 분수 장치 위에서 드라이어드 차림으로 등장했다.

연출과 안무를 맡은 발타사르 드 보주아유(Balthazar de Beaujoyeulx)는 본명 발다사레 다 벨조이오소. 피에몬테 출신 이탈리아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카트린이 30년간 측근 시종(valet de chambre)으로 곁에 둔 사람이었다. 작품은 호메로스 오디세이아의 마녀 키르케 신화를 빌려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비유극(알레고리)이었다. 그 마녀가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리는 한편, 프랑스 왕이 마녀를 제압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스토리. 1582년 인쇄본 서문은 네 가지 해석을 제시하는데, 학계는 “키르케=내란, 왕=이성과 질서, 결말의 평화 회복=프랑스의 미래 희망”이라는 일반화된 해석을 표준으로 본다.

이 작품은 무용과 음악, 시, 무대장치를 한 작품에 다 묶은 형식이라 브리태니커는 “최초의 본격 궁정 발레”로 평가한다. 루이 14세의 태양왕 궁정보다 100년이 앞선 실험이었다. 1582년 인쇄본은 국왕의 명으로 유럽 각국 궁정에 보내려고 제작한 외교 선물용 출판물이었고, 현재 BnF Gallica에서 디지털로 열람 가능하다.

발레만이 아니었다. 카트린의 후원으로 1577년에는 이탈리아 코미디 극단이 파리의 부르고뉴 호텔에 상주했고, 이 건물은 17~18세기에 들어 파리의 대표 극장으로 성장했다. 한쪽에서는 종교전쟁의 칼날이 도시를 휩쓰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17세기 프랑스 공연예술의 인프라가 묵묵히 깔리고 있었다.

6. 폴란드 왕을 만든 협상가

카트린의 정치 감각이 가장 화려하게 발휘된 건 1573년 폴란드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마지막 야기에우워 왕조 군주 지그문트 2세가 1572년 후사 없이 죽자, 폴란드 귀족 약 4만 명이 모이는 자유 선거가 열렸다. 후보는 합스부르크 대공 에른스트, 모스크바 차르 이반 4세, 스웨덴 왕 요한 3세, 그리고 카트린의 셋째 아들 앙주 공 앙리. 카트린은 외교관 장 드 몽뤽(Jean de Monluc, 발랑스 주교)을 파견해 약 9개월의 캠페인을 벌였다.

몽뤽의 무기는 세 가지였다. 첫째, 압도적 웅변. 선거 의회에서 3시간에 걸친 라틴어 연설을 했고, 그 연설문은 1,500부가 인쇄되어 의원들에게 배포됐다. 16세기 기준으로는 최첨단 캠페인 전략이다. 둘째, 매수. 처음 제시한 5만 에퀴는 10만 에퀴까지 올라갔다. 셋째, 양보. 5월 9일 앙리가 사실상 당선이 굳어지자 신교도 측이 보장 입법을 요구했고, 그 결과 협상된 것이 앙리키안 조항(Henrician Articles / Articuli Henriciani)이다.

이 조항은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왕은 자유 선거로만 선출하고(세습 금지), 2년에 한 번 반드시 의회(세임, Sejm)를 소집하며, 후계자·왕비 결정·전쟁 선포에 대한 통제권은 의회에 있다. 종교 자유를 보장하고, 만약 왕이 이 조항들을 어기면 폴란드 귀족(슈라흐타, szlachta)은 자동으로 신민의 의무에서 해제된다. 폴란드 의회사 측 공식 자료에 따르면, 이 앙리키안 조항은 1791년 5월 3일 헌법까지 218년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사실상 헌법으로 기능했다. 카트린이 아들의 왕관 하나를 얻으려고 받아들인 조건이 결과적으로 유럽 입헌주의의 가장 이른 형태 중 하나를 만들어낸 셈이다.

7. 검은 전설의 그림자

카트린은 한편으로 “검은 왕비(Reine Noire)“이기도 했다.

프랑수아 뒤부아가 그린 생바르톨로메 학살 — 위그노 화가가 동시대에 남긴 거의 유일한 현장 그림
위그노 화가 프랑수아 뒤부아가 그린 생바르톨로메 학살(c.1572~1584). 로잔 칸톤 미술관 소장.

대중적 기억에서 그녀는 점성술사를 옆에 두고 독약 향수 장갑으로 정적을 죽이는 마키아벨리적 모후, 1572년 8월 24일 생바르톨로메 학살의 단독 주모자다. 이 이미지는 1574~1575년 위그노 진영에서 익명으로 나온 격렬한 팸플릿 Discours merveilleux de la vie, actions et déportements de Catherine de Médicis에서 시작해 19세기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여왕 마고(La Reine Margot)(1845)와 1994년 파트리스 셰로 감독의 동명 영화로 굳어졌다.

20세기 후반 학계는 이 도식을 사실상 해체했다. 출발점은 장루이 부르종(Jean-Louis Bourgeon)의 L’Assassinat de Coligny(Droz, 1992)였다. 부르종은 자신의 작업을 “프랑스 정치적 통속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위조”를 해체하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결론은 콜리니 암살 시도(8월 22일)와 8월 24일 본격 학살을 주도한 것은 왕실이 아니라 위그노에 적대적인 파리시와 기즈 가문이며, 샤를 9세에게는 사전 모의의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드니 크루제(Denis Crouzet)는 더 나아가 카트린이 신플라톤주의 영향 아래 종교적 화합을 진심으로 추구한 인물이었고, 8월 23일 밤의 결정은 절망적 위기관리였다고 본다. 가장 최근의 흐름은 제레미 푸아(Jérémie Foa)의 사회사적 전환이다. 학살의 실행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이웃을 죽인 이웃들”이며, 누가 위그노이고 누가 가톨릭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동네 사람들뿐이었다는 시각이다.

흥미롭게도 1572년 9월에 이미 영국 대사 월싱엄이 이 수정주의의 시각과 동일한 의견으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폭력을 휘두를 권한이 평민들의 손에 넘어가 있다”는 그 한 문장이다. 영문 표준 전기 로버트 넥트(Robert Knecht)(1998)의 잠정 결론은 “카트린이 학살 전체를 사전에 모의했다고 단정할 사료는 없다. 다만 콜리니와 그 측근 제거는 그녀가 승인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정도다.

점성술 쪽도 비슷하다. 카트린이 코시모 루지에리(Cosimo Ruggieri)와 노스트라다무스를 가까이 둔 건 사실이다. 1556년 노스트라다무스를 파리로 불러 자녀들의 천궁도를 보게 한 만남, 1564년 살롱드프로방스 자택에 들른 만남은 1차 사료로 확인된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앙리 2세에게 “황금 우리를 뚫고 두 눈을 꿰뚫으리라”는 4행시(예언서 Les Centuries I-35)로 마상시합을 피하라 권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런데 16세기 점성술은 의학·천문학과 분리되지 않은 학문이었고, 황실·교황청·신성로마제국 어디서나 자문을 받았다. 카트린만 특별히 미신적이었던 게 아니다.

향수 제조자 르네 르 플로랑탱(René le Florentin)도 실존 인물이다. 늦어도 1547년부터 카트린의 공식 궁정 향수 제조자로 봉직했고, 파리 시테 섬의 퐁 생미셸 다리 위에 가게가 있었다. 1572년 6월 9일 잔 달브레(나바라 여왕, 미래 앙리 4세의 어머니, 위그노 지도자) 사망 사건에서 “카트린이 르네에게 독을 묻힌 향수 장갑을 만들게 해 잔에게 보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지만, 잔의 주치의 진단은 폐 농양·흉막염·결핵이었고 현대 의학계도 자연사로 본다. 그녀가 죽고 약 10주 뒤 학살이 터졌기에, 두 사건이 후대 서사에서 인과적으로 묶이며 “카트린=독, 르네=독약 향수사”라는 결합이 굳어진 셈이다.

8. 무너진 왕조, 살아남은 브랜드

브랑톰의 영주 피에르 드 부르데유는 카트린 사후 Recueil des Dames에서 그녀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그녀는 자식들과 그 치세를 떠맡고, 구해내고, 지켜냈으며, 보존했다(Elle entreprit, sauva, garantit et préserva ses enfants et leurs règnes).” 그녀의 개인 인장에는 라틴어 좌우명 “Lacrymae hinc, hinc dolor”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서 눈물이, 이곳에서 슬픔이.” 1559년 앙리 2세의 죽음 이후 평생 상복을 입은 그녀의 자기 정체화가 이 한 줄에 응축되어 있다.

1589년 1월 5일, 카트린은 블루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8월 1일 마지막 아들 앙리 3세도 도미니크회 수도사 자크 클레망의 칼에 찔려 죽었다. 발루아 왕조는 그렇게 끝났고, 왕위는 위그노 지도자였던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에게 넘어가 부르봉 왕조가 시작됐다. 그녀가 평생 지키려 한 발루아 가문은 결국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무너졌다.

프란스 푸르뷔스 2세가 그린 마리 드 메디시스 — 1610년경, 루브르 소장. 카트린과 결혼으로 종조숙모-종손녀 사이
한 세대 뒤 또 한 명의 메디치 가문 출신 프랑스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 카트린과는 결혼으로 종조숙모뻘이지만 둘이 만난 적은 없다. (Frans Pourbus le Jeune, c.1610, Louvre)

하지만 카트린이 30년 동안 깔아둔 문화 인프라는 그녀의 죽음을 초월하여 살아남았다. 튀일리 궁은 앙리 4세부터 나폴레옹까지 단계적으로 확장되며 19세기 말까지 파리의 중심으로 기능했다. 부르고뉴 호텔의 이탈리아 코미디 극단은 17세기 프랑스 코미디의 모태가 됐고, 발레 코믹 드 라 레인이 깔아둔 궁정 발레의 문법은 한 세기 뒤 루이 14세의 태양왕 궁정에서 “프랑스 럭셔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났다. 카트린의 도서·필사본 컬렉션은 1594년 자크 오귀스트 드 투를 거쳐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에 흡수됐다.

한 세대 뒤, 또 한 명의 메디치 가문 출신 여자가 같은 길을 걸었다.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édicis / Maria de’ Medici, 1575~1642). 마리는 메디치 본가에서 갈라진 카트린의 먼 친척으로,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적은 없다(카트린이 사망한 1589년에 마리는 열네 살이었다). 1610년 마리의 남편 앙리 4세가 광신도 프랑수아 라바이악(François Ravaillac)에게 암살되자, 마리는 아홉 살 아들 루이 13세의 섭정 모후가 됐고, 1615년에는 뤽상부르 궁 공사를 시작했다. 1621년에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에게 자신의 삶을 알레고리로 다룬 24점 대형 회화 연작을 의뢰했다. 카트린이 발루아 태피스트리로 후원자 시점에서 가문의 영광을 기록했다면, 마리는 자기 자신을 알레고리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두 메디시스 왕비의 자기표현 방식은 그만큼 달랐지만,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이 프랑스 궁정에 깔아놓은 르네상스 인프라라는 점에서는 같은 계보였다.

영화 여왕 마고는 우리에게 카트린의 어두운 면을 보여줬지만, 그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풍경이 한 가지 더 있다. 학살의 도시에서 마카롱을 굽고, 발레 무대를 깔고, 폴란드 왕관을 협상하던 그 30년의 다른 쪽 풍경. 검은 옷을 입은 모후는 거기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