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토 고몬의 형이 다스린 성: 다카마쓰의 마쓰다이라
Q: 다카마쓰의 마쓰다이라 가문은 어떤 집안인가?
A: 이코마 가문이 영지를 잃고 떠난 뒤, 1642년 사누키 다카마쓰에 새로 들어온 다이묘 가문이다. 초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시게는 미토 도쿠가와 가문 출신으로, 후대에 ‘미토 고몬’으로 유명해진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친형이다. 도쿠가와 일족인 친번(親藩)으로서 서쪽 지방의 다이묘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고, 막부가 끝날 때까지 11대에 걸쳐 다카마쓰성을 다스렸다. 형이면서도 동생에게 종가를 내준 요리시게의 사연, 두 집안이 자식을 주고받은 이야기, 그리고 막부 말기의 갈림길까지 이 가문의 200년 역사를 따라가보자.
한눈에 보는 다카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 항목 | 내용 |
|---|---|
| 입봉 | 1642년, 약 12만 석 |
| 초대 번주 | 마쓰다이라 요리시게 (미토 요리후사의 장남) |
| 종가 | 미토 도쿠가와 가문 |
| 가격 | 친번, 막부 정치의 최고 격식인 다마리노마(溜之間) |
| 역할 | 서쪽 지방 다이묘 감시 |
| 대수 | 11대 (1642~1871) |
| 주요 유산 | 리쓰린 공원, 다카마쓰 상수도, 사누키의 소금·설탕 |
| 마지막 번주 | 11대 요리토시 (정실이 이이 나오스케의 딸) |
태어나지 못할 뻔한 아들
다카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의 이야기는 한 아이의 출생에서 시작된다.
미토 번의 초대 번주 도쿠가와 요리후사에게 첫아들이 생겼을 때, 요리후사는 무슨 사정에선지 그 아이를 지우라고 명했다. 그 이유는 당대의 1차 사료에 분명히 적혀 있지 않다. 명을 받은 가로 미키 유키쓰구 부부는 차마 따르지 못하고, 에도의 저택에서 아이를 숨겨 몰래 길렀다.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가 훗날의 마쓰다이라 요리시게다.
몇 년 뒤 같은 측실이 또 아이를 가졌을 때도 요리후사는 같은 명을 내렸고, 미키 부부는 다시 한번 그 아이를 몰래 받아 길렀다. 그렇게 태어난 둘째가 도쿠가와 미쓰쿠니, 곧 후대에 ‘미토 고몬’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런데 형은 공표되지 못한 채 가신의 손에 자란 반면, 동생 미쓰쿠니는 미토 종가의 적자로 인정받아 2대 번주가 됐다.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요리시게가 태어났을 무렵엔 형뻘인 오와리·기이 두 종가에도 아직 적자가 없어, 막내인 미토가 앞질러 후계를 세우기를 꺼렸다는 설이 있다. 미쓰쿠니가 태어났을 때는 오와리와 기이 쪽에도 적자가 탄생하면서 후계자를 감춰야 할 이유가 해소된 상황이었다.
자식을 맞바꾼 형제
미쓰쿠니는 형을 제치고 자신이 미토를 이은 것을 평생 마음에 걸려 했다. 그가 택한 해결책은 독특했다. 자기 아들과 형의 아들을 맞바꾼 것이다.

미쓰쿠니는 자기 장남 요리쓰네를 형 요리시게의 양자로 보내 다카마쓰 2대 번주를 잇게 했고, 형의 아들 쓰나에다를 자기 양자로 들여 미토 3대 번주를 잇게 했다. 그 결과 다카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은 동생 미쓰쿠니의 핏줄이, 미토 종가는 형 요리시게의 핏줄이 이었다. 두 집안은 그 뒤로도 거듭 양자를 주고받아 혈통으로 한 몸처럼 얽혔다. 다카마쓰 번이 끝까지 미토 종가를 각별하게 여긴 데는 이런 내력이 있었다.
요리시게가 다카마쓰에 받은 영지는 약 12만 석이었다. 미토 종가의 곁가지 다이묘로서는 파격적인 규모였다. 막부가 이렇게 후하게 대접한 것은, 본래 장남이면서도 종가를 잇지 못한 요리시게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고 전해진다.
세토내해를 감시하는 친번
막부가 도쿠가와 일족을 다카마쓰에 앉힌 데는 분명한 계산이 있었다. 다카마쓰는 세토내해의 길목을 노려보며 시코쿠와 서쪽 지방의 외양(外様) 다이묘를 감시하기에 알맞은 자리였다. 요리시게는 입봉과 함께 서쪽 제번을 살피는 감찰역을 맡았다. 친번은 요지에 앉히고 멀리서 굴러들어온 외양 다이묘는 변두리로 밀어내는 것이 도쿠가와 막부의 기본 방침이었는데, 다카마쓰가 바로 그 포석이었다.
요리시게는 성을 다스리는 데도 부지런했다. 1644년에는 가신 야노베 헤이로쿠에게 명해 다카마쓰 성하에 상수도를 깔았다. 에도의 간다 상수에 이어 일본에 건설된 두 번째 상수도였다. 그는 저수지를 만들고 염전 개발을 장려해 번의 살림 기반을 다졌으며, 다도와 와카 같은 문화에도 힘을 쏟았다.
소금과 설탕의 땅
다카마쓰 번이 200년을 버틴 힘은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력에 있었다. 사누키는 비가 적은 땅이라 일찍부터 저수지와 특산품 개발에 매달렸는데, 그 결실이 소금과 설탕과 무명이다. 훗날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묶어 ‘사누키 삼백(三白)‘이라 불렀다. 다만 이 이름은 에도 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 산업이 오히려 기울기 시작한 메이지 시대에 가서야 붙은 호칭이다.
설탕은 5대 번주 요리타카 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리쓰린의 별저에 약초원을 두고 학자들을 불러 모았는데, 그중 한 명인 의사 이케다 겐조와 그 제자 무카이야마 슈케이가 제당법을 연구해, 18세기 말 사누키 특유의 고급 설탕 와산본(和三盆)을 만들어냈다. 소금은 한참 뒤인 9대 번주 요리히로 대에 본격적으로 개발된다. 실학자 구메 미치카타가 사카이데 앞바다의 갯벌을 막아 거대한 염전을 일궜는데, 이 사카이데 소금은 훗날 일본 전국 소금의 절반 가까이를 댔다.
5대 요리타카가 약초원으로 불러 모은 인재 가운데 한 사람이 히라가 겐나이다. 사누키 시도 출신의 이 별난 재주꾼은 번의 후원으로 나가사키에 유학했고, 약초와 물산을 다루는 일을 맡았다. 다만 그는 번의 울타리 안에 머물기에는 호기심이 너무 컸다. 결국 정식으로 사직을 청해 에도로 떠났고, 그곳에서 일본 최초의 물산 박람회를 여는 등 한 시대의 기인으로 이름을 남긴다.
5대에 걸쳐 가꾼 미슐랭 3스타 정원
마쓰다이라 가문이 남긴 대표적 유산은 리쓰린 공원이다. 이 정원의 뿌리는 이코마 가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가꾼 것은 마쓰다이라 가문이었다. 초대 요리시게가 입국한 1642년부터 역대 번주가 손을 더해, 100년쯤 지난 5대 요리타카 대인 174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리쓰린 공원은 번주의 별저였다. 시운산(紫雲山)을 배경으로 빌려 쓰고, 여섯 개의 못과 열세 개의 동산을 두루 거닐게 만든 회유식 정원이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풍경이 바뀐다고 해서 ‘일보일경(一歩一景)‘이라 불렸다. 후지산을 본떠 쌓은 비래봉(飛来峰)에 오르면 남호(南湖)의 물과 다실 국월정(掬月亭)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국가 특별명승으로 지정되어 있고, 미슐랭 여행 안내서가 최고 등급인 별 세 개를 매긴 정원이기도 하다.
막부와 함께 저문 가문
다카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은 막부 정치에서 다마리노마(溜之間)라는 최고 격식의 자리에 앉았다. 히코네의 이이 가문, 아이즈의 마쓰다이라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쇼군의 정치 고문 격이었다.
막부 말기에 이르러 이 가문은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11대 번주 요리토시의 정실이 다이로(大老, 막부의 임시 최고직) 이이 나오스케의 딸이었던 탓이다. 핏줄로는 미토 종가의 갈래였지만, 혼인으로 얽힌 줄은 정반대였다. 장인 이이 나오스케는 막부의 권위를 세우려 존황양이파를 누른 좌막(佐幕)의 거두였고, 본가 미토는 천황을 받드는 존황론의 본산이었다. 두 집안은 막말 정국의 양 극단이어서, 1860년에는 미토 낭사들이 이이를 암살하는 사쿠라다몬의 변까지 벌어진다. 다카마쓰는 핏줄이 닿은 본가가 아니라 사위로 맺어진 장인 쪽, 곧 막부를 지키는 편에 서게 됐다.
1868년, 다카마쓰 번은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옛 막부 편에 가담했다가 조정의 적으로 몰렸다. 번은 살아남기 위해 집정 두 사람에게 책임을 지워 할복시키고 그 목을 신정부에 바쳐 공순의 뜻을 보였다. 번주 요리토시는 성을 나와 절에서 근신했다. 1월 20일 다카마쓰성은 싸움 없이 열렸고, 군자금 12만 냥을 바치기로 하고(우선 8만 냥을 그해 봄에 냈다) 사면을 받았다. 이후 판적봉환과 폐번치현을 거치며 번은 사라졌고, 요리토시는 메이지 시대에 백작이 됐다.
현재의 다카마쓰성
다카마쓰성의 천수는 한때 시코쿠에서 손꼽히는 규모였으나, 1884년 낡았다는 이유로 헐렸다. 천수대를 수리하던 2000년대 발굴에서 그 초석 쉰여덟 개가 드러났지만, 천수 자체는 지금도 복원되지 않은 채 자리만 남아 있다.

대신 바다 쪽에는 옛 모습이 제법 남아 있다. 입항하는 배를 살피던 망루 월견루, 바다로 곧장 열리는 성문 수수어문은 해성다운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45년 공습으로 불탔던 사쿠라고몬은 12년에 걸친 복원 끝에 2022년 다시 문을 열었다. 지금 이곳은 다마모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되고 있는데, 바닷물을 끌어들인 해자에는 여전히 도미가 헤엄친다. 세 천하인을 섬긴 무장이 바다 위에 쌓고, 한 가문이 잃고, 미토에서 온 형이 이어받은 성이 지금도 이 물가에 남아 있다.
이코마와 다카마쓰성 3부작
- 1부 · 세 천하인을 섬기고 살아남은 무장: 이코마 치카마사
- 2부 · 바다 위의 성을 지은 가문은 왜 사라졌나: 이코마 소동
- 3부 · 미토 고몬의 형이 다스린 성: 다카마쓰의 마쓰다이라 (이 글)
참고 자료
- 高松市 「玉藻公園 歴代城主」 (다카마쓰시 공식)
- 香川県 「特別名勝 栗林公園」 (가가와현 공식)
- 溝渕利博, 「明治中期香川県における『讃岐三白』誕生の背景」, 高松大学
- 香川県立図書館 「近代 年表」 (막말 다카마쓰 번)
- 坂出市 「坂出塩田の父 久米通賢」 (사카이데시 공식)
- 히어로 이미지: 리쓰린 공원, Mason tang photography, CC BY-SA 4.0,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