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도트리슈, 친정 스페인과 전쟁을 지휘한 왕비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의 비다소아강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에서 두 나라의 왕이 마주 앉았다. 24년을 끌어온 전쟁을 끝내는 자리였다. 한쪽은 프랑스 왕 루이 14세, 다른 한쪽은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두 사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이 가족 관계의 한가운데에 한 여인이 있었다. 펠리페 4세의 누이이자 루이 14세의 어머니,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1666)다. 마흔 몇 해 전 바로 이 섬에서 스페인 공주의 신분으로 프랑스에 넘겨졌던 그녀가, 이제는 자기 친정과 벌인 전쟁을 마무리하는 협상을 실질적으로 주재하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온 공주가 스페인과 전쟁을 했다. 한국어권에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 속 낭만적인 왕비로 더 익숙하지만, 사료를 따라가면 전혀 다른 인물이 나온다.
1. 꿩섬에서 교환된 열네 살
안 도트리슈는 1601년 9월 22일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였다. 세례명은 아나 마리아 마우리시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인판타(왕녀)이자 오스트리아 대공녀라는 직함을 가졌다. “도트리슈”, 곧 “오스트리아의”라는 이름은 그녀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임을 가리킬 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1615년, 안은 열네 살에 같은 나이의 프랑스 왕 루이 13세와 결혼했다.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두 왕가가 맞바꾼 이중 결혼이었다. 안이 프랑스로 가는 동시에, 루이 13세의 누이 엘리자베트가 훗날 스페인 왕이 되는 펠리페 4세에게 시집갔다. 두 공주는 비다소아강의 꿩섬에서 신병을 맞교환했다. 부르고스에서 대리인을 세워 먼저 혼인 의식을 치른 뒤, 양국 국경에서 서로를 넘겨받는 방식이었다.
열네 살 부부에게는 즉시 합방하라는 압력이 따라붙었다. 결혼이 완성되지 않으면 무효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혼은 시작부터 차가웠고, 그 냉기는 평생 풀리지 않았다.
2. 23년의 침묵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루이 13세가 “평생 왕비를 차가운 거리감으로 대했다”고 적는다. 왕은 왕비보다 측근들에게 마음을 두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좀처럼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결혼한 1615년부터 후계자가 태어나는 1638년까지 무려 23년이 걸렸다. 그사이 안은 여러 번 임신했지만 번번이 잃었다. 1619년 12월의 사산, 1621년 봄과 1622년 3월, 1626년 11월, 1631년 4월의 유산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흔히 네다섯 번의 유산과 사산으로 정리되는 긴 공백이었다.
후계가 없는 왕비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이었다. 그는 내정과 외교에서 왕비의 영향력을 누르려 했고, 안은 궁정 정치에서 점점 고립됐다. 스페인 출신이라는 출신 성분 자체가 의심의 빌미였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점차 적대로 돌아서던 시기에, 적국 왕의 누이가 프랑스 왕비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3. 1637년, 들통난 편지
그 의심은 1637년 현실이 됐다. 프랑스가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때, 안 도트리슈는 적국과 몰래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상대는 친정 오빠인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그리고 전 스페인 대사 미라벨 후작 등이었다. 편지는 파리의 발드그라스 수녀원을 중계 거점으로, 왕비의 하인 라 포르트를 인편으로 삼아 오갔다.
리슐리외가 이 통로를 적발한 것이 1637년 8월 11일 무렵이다. 라 포르트와 수녀원장이 비밀 연락 사실을 인정했고, 안은 8월 15일 자백했다. 8월 17일에는 앞으로 모든 서신을 검열에 맡기고 수녀원 출입을 제한하며 감시를 받아들이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이것이 안 도트리슈의 실제 “스파이” 사건이다. 다만 사료를 정직하게 읽으면, 이를 첩보 소설처럼 묘사하기는 어렵다. 향수병에 걸린 왕비가 친정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가, 전시라는 상황 때문에 적국에 정보를 흘리는 행위로 번진 쪽에 가깝다. 그럼에도 전쟁 중에 적국 왕에게 보낸 비밀 서신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안이 그것을 자백하고 서약으로 끊어내야 했던 것도 분명하다. 프랑스 궁정에서 그녀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4. 삼총사가 지운 것
대중이 기억하는 안 도트리슈는 이 사건과는 결이 다르다. 뒤마의 『삼총사』 속 왕비는 영국 버킹엄 공작과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그에게 건넨 다이아몬드 장식 줄(ferrets) 때문에 리슐리외와 밀라디의 음모에 휘말린다. 그리고 달타냥이 그 보석을 되찾아 와 위기를 모면한다.
이 다이아몬드 장식 이야기는 소설의 창작이다. 역사적 근거라 할 만한 것은, 안이 버킹엄에게 준 보석을 칼라일 백작부인 루시 헤이가 빼돌렸다는 라로슈푸코 회고록의 일화 정도인데, 이마저 확증되지 않았다. 일부 대중 서사가 전하는 “임종 때 버킹엄에게 받은 목걸이를 막내아들 필리프에게 물려줬다”는 이야기도 어떤 신뢰할 만한 사료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버킹엄과의 인연 자체가 통째로 허구는 아니다. 1625년, 영국 왕비가 될 헨리에타 마리아를 호위해 온 버킹엄 공작이 아미앵에서 안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한 사건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 역사가는 그가 밤 정원에서 왕비에게 무례를 범하려 했을 수 있다고 본다. 왕비의 비명에 시종들이 달려왔고, 이 소동은 안과 루이 13세 사이를 더 벌려놓았다. 실제로 있었던 것은 위험한 추문이었지, 순애보가 아니었다.
5. 기적의 출산과 권력의 귀환
23년의 공백 끝에, 1638년 9월 5일 안이 아들을 낳았다. 훗날의 루이 14세다. 너무 오래 기다린 후계였던 탓에 당대 사람들은 그를 “신이 주신 아이(Dieudonné)“라 불렀다. 1640년 9월 21일에는 둘째 아들 필리프가 태어났다.
아들을 얻자 왕비의 처지는 달라졌다. 그리고 1643년 5월 14일 루이 13세가 죽으면서 안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다. 새 왕 루이 14세는 네 살이었다.
루이 13세는 죽기 전 유언으로 안의 섭정 권한을 자문회의에 묶어두려 했다. 안은 이 유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리 고등법원을 움직여 유언의 제약을 무효로 만들고 온전한 섭정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모두를 놀라게 한 선택을 했다. 자신을 그토록 견제했던 리슐리외의 후계자, 마자랭 추기경을 재상 자리에 그대로 앉힌 것이다.
궁정은 그녀가 리슐리외 일파를 쳐낼 것이라 예상했지만, 안은 정반대로 갔다. 마자랭과 안은 섭정기 내내 권력을 함께 굴렸고, 두 사람의 관계를 두고 연인이라거나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남은 편지들은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신뢰를 보여준다. 그러나 연애나 비밀 결혼이 사실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증된 바 없다. 수백 년째 이어지는 논쟁거리일 뿐이다.
6. 친정과의 전쟁
안이 섭정으로 프랑스를 통치하던 시기, 프랑스는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다. 1635년부터 1659년까지 이어진 프랑스-스페인 전쟁이다. 스페인에서 온 공주가, 이제는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로서 친정 오빠 펠리페 4세의 나라와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안팎의 압박은 컸다. 1648년부터 1653년까지 귀족과 고등법원, 파리 민중이 섭정 정권과 마자랭에 반기를 든 프롱드의 난이 터졌다. 반대파는 마자랭을 조롱하는 풍자 팸플릿을 쏟아냈는데, 이를 마자리나드(Mazarinades)라 불렀다. 그중에는 안과 마자랭이 연인이라거나 부부라는 빈정거림도 섞여 있었다. 외국 출신 왕비와 추기경이라는 조합은 공격하기 좋은 표적이었다.
전쟁은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끝났고, 이듬해 루이 14세가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면서 마무리됐다. 신부는 안 도트리슈에게는 친정 조카딸이었다. 글머리에서 본 꿩섬의 회담이 바로 이 매듭이다. 한때 그 섬에서 스페인 공주로 넘겨졌던 여인이, 이번에는 자기 아들과 친정 오빠가 그 섬에서 전쟁을 끝내는 모습을 만들어냈다.
7. “내 어린 딸”
안 도트리슈를 둘러싼 이야기 중 가장 자극적인 것은 둘째 아들 필리프에 관한 것이다. 형 루이 14세의 왕권을 지키려고 어머니가 일부러 동생에게 여장을 시키고, 사냥과 검술 대신 자수와 춤을 가르쳐 위협이 못 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는 사료로 확인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갈라 봐야 한다. 분명히 기록된 쪽은 성인이 된 필리프의 취향이다. 그는 평생 여성 복식과 화장, 보석을 즐겼고 무도회에 여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생시몽의 회고록이나 두 번째 아내 리젤로테의 편지에 그런 모습이 거듭 등장한다. 안이 그를 “내 어린 딸(ma petite fille)“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여러 전기에 전한다. 다만 “어머니가 어린 그를 여자아이로 입혀 키웠다”는 대목은 주로 슈아지 신부의 회고록에 기댄 것인데,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게다가 당시 귀족 사내아이는 일고여덟 살까지 누구나 치마 형태의 옷을 입었으니, 어린 시절 옷차림만으로 특별한 양육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정작 근거가 약한 것은 그 동기다. “동생을 무력화하려 일부러 그렇게 키웠다”는 해석을 두고, 필리프 평전을 쓴 역사가 낸시 니컬스 바커는 오히려 반박하는 쪽이다. 바커가 사료로 확인하는 것은 여성화가 아니라 정치적 견제다. 루이 13세의 동생 가스통 도를레앙이 형의 치세 내내 반란을 거듭한 전례가 있었던 만큼, 안과 마자랭은 필리프를 권력과 야심에서 멀찍이 떼어놓기로 분명히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옷차림이 아니라 처신의 문제였다.
실제로 필리프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1677년 카셀 전투에서 오라녜공 빌럼을 꺾은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바로 그 역량과 인기 때문에 형 루이 14세는 동생을 정치 무대에서 의도적으로 밀어냈다. 여장 때문에 위협이 못 됐다는 통속적인 그림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권력과 신앙 사이에서
안 도트리슈는 독실한 신앙으로도 유명했다. 1638년 루이 14세를 무사히 낳은 데 대한 감사로 파리에 발드그라스 성당 건립을 명했다. 1645년 착공된 이 성당은 프랑수아 망사르가 설계를 시작했고 자크 르메르시에가 이어받아 완성했다. 1661년 마자랭이 죽은 뒤, 안은 이 성당에 딸린 수도원으로 물러나 만년을 보냈다.
안은 1666년 1월 20일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 몸은 왕가 묘역인 생드니 대성당에, 심장은 발드그라스에 묻혔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졌다는 별명을 들으며 회자되던 왕비의 마지막이었다.
한 사람 안에 세 개의 정체성이 충돌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딸, 프랑스의 섭정, 그리고 태양왕을 길러낸 어머니. 스페인은 그녀를 친정과 전쟁을 벌인 배신자로 볼 수 있었고, 프랑스 궁정은 적국에 편지를 보낸 외국인 왕비로 의심했다. 어느 쪽에서도 온전히 신뢰받지 못한 자리에서, 안은 결국 아들에게 절대왕정의 길을 닦아줬다. 『삼총사』가 그린 낭만적인 왕비보다, 이 모순을 평생 짊어진 정치가 쪽이 훨씬 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