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섬에서 만난 루이 14세와 펠리페 4세를 그린 자크 로모니에의 회화 — 프랑스-스페인 전쟁을 끝낸 1660년 회담 장면

안 도트리슈(1601–1666) — 루이 14세의 어머니, 『삼총사』가 지운 진짜 얼굴

1660년 6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의 비다소아강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에서 두 나라의 왕이 마주 앉았다. 24년을 끌어온 전쟁을 끝낸 평화를 두 왕실의 혼인으로 매듭짓는 자리였다. 한쪽은 프랑스 왕 루이 14세, 다른 한쪽은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두 사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이 두 왕 사이에는 한 사람의 여인이 있었다. 펠리페 4세의 누나이자 루이 14세의 어머니,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1601~1666)다. 마흔다섯 해 전 바로 이 섬에서 스페인 공주의 신분으로 프랑스에 넘겨졌던 그녀가, 이제는 프랑스 왕대비(선왕의 미망인 왕비)가 되어 같은 섬으로 돌아와 있었다.

안 도트리슈는 우리에게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 속 낭만적인 왕비로 더 익숙하지만, 역사적 기록을 되짚어 보면 전혀 다른 인물이 나온다.

1. 꿩섬에서 교환된 열네 살

안 도트리슈는 1601년 9월 22일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였다. 세례명은 아나 마리아 마우리시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인판타(왕녀)이자 오스트리아 대공녀라는 직함을 가졌다. “도트리슈”, 곧 “오스트리아의”라는 이름은 그녀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임을 가리킬 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1615년, 안은 열네 살에 같은 나이의 프랑스 왕 루이 13세와 결혼했다. 단순한 혼인이 아니라 두 왕가가 맞바꾼 이중 결혼이었다. 안이 프랑스로 가는 동시에, 루이 13세의 누이 엘리자베트가 훗날 스페인 왕이 되는 펠리페 4세에게 시집갔다.

왜 두 나라가 공주를 맞바꿨을까. 16세기 내내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다퉜다.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프랑스 종교전쟁 때는 스페인이 가톨릭 동맹을 도와 신교도 진영의 수장이던 앙리 4세에 맞섰다. 두 결혼은 이 오랜 적대를 혼맥으로 봉합하려는 것이었다. 신부가 상대 궁정에 들어가 있는 한 함부로 칼을 겨누기 어렵다는, 근세 유럽에서 흔히들 하던 생각이었다.

결혼을 밀어붙인 사람은 프랑스 왕대비 마리 드 메디시스였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앙리 4세의 왕비였고 이 결혼이 이뤄지면 안의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었다.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가 가톨릭 광신도 라바이야크의 칼에 암살되자, 그녀는 여덟 살에 왕위에 오른 아들 루이 13세를 대신해 섭정이 되었다. 죽은 남편 앙리 4세는 합스부르크를 견제하는 노선이었지만, 마리는 방향을 정반대로 틀어 스페인과 손잡는 가톨릭 친화 정책으로 돌아섰다. 그 정책의 핵심이 바로 이 이중 결혼이었고, 1612년 퐁텐블로에서 혼인 협정을 맺으면서 윤곽이 잡혔다.

프랑스 안에서는 반발이 컸다. 신교도(위그노)들은 가톨릭 대국 스페인과의 결합이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낭트 칙령을 위협한다고 보았고, 콩데 공을 비롯한 대귀족들은 섭정에 반기를 들었다. 이 갈등으로 1614년 삼부회가 소집됐는데,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9년까지 다시 열리지 않은 마지막 삼부회였다.

결혼 절차도 독특했다. 1615년 10월, 두 신부는 각자 자기 나라에서 신랑 없이 대리 혼인부터 치렀다. 안은 부르고스에서 펠리페 3세의 총신 레르마 공작을 루이 13세의 대리로, 엘리자베트는 보르도에서 기즈 공작 샤를 드 로렌을 펠리페 4세의 대리로 세워 식을 올렸다. 그런 다음 그해 11월 9일, 두 공주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흐르는 비다소아강의 꿩섬에서 서로 자리를 맞바꿨다. 강 한가운데에서 한 신부는 북쪽 프랑스로, 다른 신부는 남쪽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안과 루이 13세가 보르도에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식을 올린 것은 같은 달 24일이었다.

두 공주가 다른 나라로 시집을 가면서 그녀들을 부르는 이름도 시집간 나라의 언어에 맞게 바뀌었다.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공주는 스페인 이름 이사벨로 불리게 됐고, 스페인 공주 아나는 프랑스 이름 안으로 불리게 됐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안 도트리슈 초상 — 검은 드레스에 흰 러프 칼라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프랑스 왕비 안 도트리슈(c.1622). 캔버스에 유채, 129×106cm. (Museo Nacional del Prado, Madrid)

이렇게 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직후, 14살 동갑내기 부부인 안과 루이 13세에게는 빨리 합방하라는 압력이 따라붙었다. 합방으로 결혼이 완결되지 않으면 결혼 자체가 무효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부 관계는 시작부터 냉랭하기 그지없었고, 이들의 관계는 평생 개선되지 않았다.

2. 23년의 침묵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루이 13세가 “평생 왕비를 차가운 거리감으로 대했다”고 적는다. 왕은 왕비보다 측근들에게 마음을 두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좀처럼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결혼한 1615년부터 후계자가 태어나는 1638년까지 무려 23년이 걸렸다. 그사이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638년 이전에도 안은 여러 번 임신했지만 아이를 낳는 데는 계속해서 실패했다. 1619년 12월의 사산, 1621년 봄과 1622년 3월, 1626년 11월, 1631년 4월의 유산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사산과 유산을 네댓 번 거듭하고도 끝내 건강한 아들을 본 것이라, 당대 사람들은 이를 기적으로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아이를 낳은 것은 안 도트리슈에게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그 후계를 얻기까지 그토록 긴 공백을 견뎌야 했다는 점이다.

후계가 없는 왕비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안의 경우에는 그 기간이 23년에 달했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입지가 조금씩 줄어드는 사이,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안과 함께 소설 『삼총사』에 등장하는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이었다. 그는 내정과 외교에서 왕비의 영향력을 누르려 했고, 안은 궁정 정치에서 점점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아이도 없는데, 경쟁국인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라는 점도 왕비를 의심하게 만드는 빌미가 됐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점차 적대로 돌아서던 시기에, 적국인 스페인 왕의 누이가 프랑스 왕비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니 말이다.

3. 1637년, 들통난 편지

그 의심은 1637년 현실이 됐다. 프랑스가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이 시기에 안 도트리슈는 적국과 몰래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상대는 친정 남동생인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그리고 전 스페인 대사 미라벨 후작 등이었다. 편지는 파리의 발드그라스 수녀원을 중계 거점으로, 왕비의 하인 라 포르트를 인편으로 삼아 오갔다.

리슐리외가 이 통신 경로를 적발한 것이 1637년 8월 11일 무렵이다. 라 포르트와 수녀원장이 비밀 연락 사실을 인정했고, 안은 8월 15일 자백했다. 8월 17일에는 앞으로 모든 서신을 검열에 맡기고 수녀원 출입을 제한하며 감시를 받아들이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이것이 안 도트리슈의 실제 “스파이” 사건이다. 다만 남아 있는 기록을 면밀히 조사해 보면 이 사건이 첩보 소설의 한 장면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향수병에 걸린 왕비가 친정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에 불과한데, 전시라는 당시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적국에 정보를 흘리는 행위로 여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적국 왕에게 보낸 비밀 서신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안이 그것을 자백하고 서약까지 맺어가며 다시는 편지를 보내지 않겠다 한 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군사정보를 팔아넘긴 것은 아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궁정에서 그녀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4. 삼총사가 지운 것

대중이 기억하는 안 도트리슈에게 위의 사건에서 드러난 스파이 같은 면모는 없다. 뒤마의 『삼총사』 속 왕비는 영국 버킹엄 공작과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그에게 건넨 다이아몬드 장식 줄(ferrets) 때문에 리슐리외와 밀라디의 음모에 휘말린다. 그리고 달타냥이 그 보석을 되찾아 와 위기를 모면한다.

이 다이아몬드 장식 이야기는 소설의 창작이다. 역사적 근거라 할 만한 것은, 안이 버킹엄에게 준 보석을 칼라일 백작부인 루시 헤이가 빼돌렸다는 라로슈푸코 회고록의 일화 정도인데, 이마저 확증되지 않았다. 일부 대중 서사가 전하는 “임종 때 버킹엄에게 받은 목걸이를 막내아들 필리프에게 물려줬다”는 이야기도 어떤 신뢰할 만한 사료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버킹엄과의 인연 자체가 통째로 허구는 아니다. 1625년, 영국 왕비가 될 헨리에타 마리아를 호위해 온 버킹엄 공작이 아미앵에서 안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한 사건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 역사가는 그가 밤 정원에서 왕비에게 무례를 범하려 했을 수 있다고 본다. 왕비의 비명에 시종들이 달려왔고, 이 소동은 안과 루이 13세 사이를 더 벌려놓았다. 실제로 있었던 것은 위험한 추문이었지, 순애보가 아니었다.

5. 기적의 출산과 권력의 귀환

전술했듯 23년의 공백 끝에 1638년 9월 5일 안이 아들을 낳았고, 이 아이가 훗날의 루이 14세다. 너무 오래 기다린 후계였던 탓에 당대 사람들은 그를 “신이 주신 아이(Dieudonné)“라 불렀다. 1640년 9월 21일에는 둘째 아들 필리프가 태어났다.

아들을 얻자 왕비의 처지는 달라졌다. 그리고 1643년 5월 14일 루이 13세가 죽으면서 안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다. 새 왕 루이 14세는 네 살이었다.

루이 13세는 죽기 전 유언으로 안의 섭정 권한을 자문회의에 묶어두려 했다. 안은 이 유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리 고등법원을 움직여 유언의 제약을 무효로 만들고 온전한 섭정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모두를 놀라게 한 선택을 했다. 자신을 그토록 견제했던 리슐리외의 후계자, 마자랭 추기경을 재상 자리에 그대로 앉힌 것이다.

필리프 드 샹파뉴가 그린 마자랭 추기경 초상
안 도트리슈가 섭정 내내 권력을 함께 행사한 마자랭 추기경. 필리프 드 샹파뉴 그림.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Berlin)

궁정은 그녀가 리슐리외 일파를 쳐낼 것이라 예상했지만, 안은 정반대로 갔다. 마자랭과 안은 섭정기 내내 권력을 양분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두 사람의 관계를 두고 연인이라거나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편지들을 보면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깊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연애나 비밀 결혼이 사실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증된 바 없다. 수백 년째 이어지는 논쟁거리일 뿐이다.

6. 친정과의 전쟁

안이 섭정으로 프랑스를 통치하던 시기, 프랑스는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다. 1635년부터 1659년까지 이어진 프랑스-스페인 전쟁이다. 스페인에서 온 공주가, 이제는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로서 친정 남동생 펠리페 4세의 나라와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안팎의 압박은 컸다. 1648년부터 1653년까지 귀족과 고등법원, 파리 민중이 섭정인 안과 마자랭에 반기를 든 프롱드의 난이 터졌다. 반대파는 마자랭을 조롱하는 풍자 팸플릿을 쏟아냈는데, 이를 마자리나드(Mazarinades)라 불렀다. 그중에는 안과 마자랭이 연인이라거나 부부라는 빈정거림도 섞여 있었다. 외국 출신 왕비와 추기경이라는 조합은 공격하기 좋은 표적이었다.

필리프 드 샹파뉴가 그린, 두 아들과 함께 삼위일체에 기도하는 안 도트리슈
두 아들 루이 14세, 필리프와 함께 삼위일체에 기도하는 안 도트리슈(1640년대). 필리프 드 샹파뉴 작. 백합 무늬 망토를 두른 두 어린 왕자가 함께 그려졌다.

전쟁은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끝났고, 이듬해 루이 14세가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면서 마무리됐다. 신부는 안 도트리슈에게는 친정 조카딸이었다. 글머리에서 본 꿩섬의 회담이 바로 이 장면이다. 어린 시절 인질 교환하듯 프랑스로 넘겨졌던 스페인의 공주가,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모인 자리에 아들인 프랑스 왕과 남동생인 스페인 왕과 함께 참석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안은 1615년에 헤어진 뒤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친정 동생 펠리페 4세와 45년 만에 마주했다. 펠리페가 지난 전쟁을 입에 올리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전한다. “제가 그토록 충실한 프랑스인이었던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들인 왕과 프랑스에 그래야 했으니까요.”

7. “내 어린 딸”

안 도트리슈를 둘러싼 이야기 중 가장 자극적인 것은 둘째 아들 필리프에 관한 것이다. 형 루이 14세의 왕권을 지키려고 어머니가 일부러 동생에게 여장을 시키고, 사냥과 검술 대신 자수와 춤을 가르쳐 위협이 못 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는 사료로 확인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갈라 봐야 한다. 분명히 기록된 쪽은 성인이 된 필리프의 취향이다. 그는 평생 여성 복식과 화장, 보석을 즐겼고 무도회에 여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생시몽의 회고록이나 두 번째 아내 리젤로테의 편지에 그런 모습이 거듭 등장한다. 안이 그를 “내 어린 딸(ma petite fille)“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여러 전기에 전한다. 다만 “어머니가 어린 그를 여자아이로 입혀 키웠다”는 대목은 주로 슈아지 신부의 회고록에 기댄 것인데,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게다가 당시 귀족 사내아이는 일고여덟 살까지 누구나 치마 형태의 옷을 입었으니, 어린 시절 옷차림만으로 안이 아들에게 불순한 의도로 여장을 시켰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갑옷 차림의 젊은 필리프 도를레앙 초상 — 17세기 작자 미상
루이 14세의 동생 필리프 도를레앙(무슈). 작자 미상의 17세기 초상. (Château de Saint-Cloud, 사진 Jean-Luc Paillé)

필리프의 평전을 쓴 역사가 낸시 니컬스 바커는 “동생을 무력화하려고 일부러 여자처럼 키웠다”는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의도로 여장을 시켰든, 또 그 결과 어른이 된 필리프가 여장을 즐겼든, 정작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안과 마자랭이 필리프를 정치적으로 소외시키려 줄곧 애썼다는 점이다.

루이 13세의 동생 가스통 도를레앙이 형의 치세 내내 반란을 거듭한 전례가 있었던 터라, 안과 마자랭은 섭정기 동안 필리프를 권력과 야심에서 멀리 떼어 놓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더군다나 왕자로서 필리프는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1677년 카셀 전투에서 오라녜공 빌럼을 꺾은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런 동생을 형 루이 14세가 정치에서 의도적으로 밀어낸 것은, 필리프의 역량과 인기가 도리어 왕권에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8. 발드그라스에서의 말년

안 도트리슈는 독실한 신앙으로도 유명했다. 1638년 루이 14세를 무사히 낳은 데 대한 감사로 파리에 발드그라스 성당 건립을 명했다. 1645년 착공된 이 성당은 프랑수아 망사르가 설계를 시작했고 자크 르메르시에가 이어받아 완성했다. 1661년 마자랭이 죽은 뒤, 안은 이 성당에 딸린 수도원으로 물러나 만년을 보냈다.

파리 발드그라스 성당의 정면과 돔
안 도트리슈가 루이 14세 출산에 대한 감사로 지은 파리 발드그라스 성당. (사진 Zairon, CC BY-SA 4.0)

안은 1666년 1월 20일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 몸은 왕가 묘역인 생드니 대성당에, 심장은 발드그라스에 묻혔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졌다는 별명을 들으며 회자되던 왕비의 마지막이었다.

한 사람 안에 세 개의 정체성이 충돌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딸, 프랑스의 섭정, 그리고 태양왕을 길러낸 어머니. 스페인은 그녀를 친정과 전쟁을 벌인 배신자로 볼 수 있었고, 프랑스 궁정은 적국에 편지를 보낸 외국인 왕비로 의심했다. 어느 쪽에서도 온전히 신뢰받지 못한 자리에서, 안은 결국 아들에게 절대왕정의 길을 닦아줬다. 『삼총사』가 그린 낭만적인 왕비보다, 이 모순을 평생 짊어진 정치가 쪽이 훨씬 더 입체적인 매력을 가진 인물로 다가온다.

출처

  • Ruth Kleinman, Anne of Austria: Queen of France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985) — 안 도트리슈의 첫 본격 학술 전기. 리슐리외와의 갈등, 1637년 발드그라스 서신 사건, 섭정기 정치를 사료에 근거해 재평가한다.
  • Nancy Nichols Barker, Brother to the Sun King: Philippe, Duke of Orléans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9) — 둘째 아들 필리프 도를레앙의 평전. “형 왕권을 위해 일부러 여자처럼 키웠다”는 통설을 사료로 반박하고 정치적 소외의 실제 맥락을 다룬다.
  • Encyclopædia Britannica, “Anne of Austria.” — 출생·결혼·섭정 개요와 루이 13세의 냉대, 두 아들 출산으로 입지가 달라진 과정을 정리한 기본 항목.
  • Encyclopædia Britannica, “Peace of the Pyrenees.” — 1659년 피레네 조약과 비다소아강 꿩섬 회담, 루이 14세·마리아 테레사 혼인 조항의 근거.
  • Museo Nacional del Prado, “Anne of Austria, Queen of France.” — 루벤스가 그린 c.1622년 초상(캔버스에 유채, 부친 펠리페 3세 사후 상복 차림)의 소장 기록과 도상 해설.
  • Val-de-Grâce (church), Wikipedia. — 1638년 루이 14세 출산 감사로 세운 성당의 건립 경위와 프랑수아 망사르·자크 르메르시에의 설계 이력.

히어로 이미지는 1660년 꿩섬 회담을 그린 자크 로모니에의 회화. 본문 삽화는 루벤스의 안 도트리슈 초상(Museo Nacional del Prado), 필리프 드 샹파뉴의 마자랭 추기경 초상(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및 안 도트리슈와 두 아들 그림, 필리프 도를레앙 초상(Château de Saint-Cloud), 발드그라스 성당 사진(Zairon, CC BY-SA 4.0) 등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자유 이용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