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베네치아 귀족 여성 초상 — 비앙카 카펠로

비앙카 카펠로, 대공비가 된 사형수

두 사람은 같은 날, 11시간 차이로 죽었다.

1587년 10월 8일, 피렌체 외곽의 메디치 가문 별장 포조 아 카이아노.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가 대규모 사냥 행사를 주최했고, 저녁에는 만찬이 차려진 뒤 카드놀이가 이어졌다. 그 자리에는 동생 페르디난도 추기경도 있었다. 프란체스코가 쓰러진 건 그날 밤이었다. 고열과 구토.

아내 비앙카 카펠로는 남편을 밤새워 간호하다 같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페르디난도는 두 사람을 각각 다른 방에 격리하고 외부 방문객을 막았다. 교황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는 병세를 일부러 줄여 보고했고, 모든 의학 공보를 직접 작성해 통제했다. 11일의 투병 끝에 프란체스코가 먼저 죽었고, 11시간 뒤 비앙카도 따라 죽었다. 공식 사인은 말라리아.

두 사람의 죽음을 가장 반긴 인물은 페르디난도였다. 형 부부가 죽자마자 추기경 서임을 반납하고 대공 자리에 올랐다. 비앙카의 시신을 어디 묻을 거냐는 물음에는 “어디든”이라고 답했다. 비앙카는 야밤에 비공개로 매장됐다. 무덤이 어디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비앙카 카펠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해하려면 이 장면이 아니라 24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1. 베네치아가 소녀에게 사형을 선고한 날

1563년 베네치아. 바르톨로메오 카펠로의 딸 비앙카는 열다섯 살이었다. 카펠로 가문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핵심 귀족 가문 중 하나였고, 그 딸이 적절한 귀족 남성과 결혼하는 일은 가문의 정치 셈법과 곧바로 얽혀 있었다. 비앙카는 그 계산을 무너뜨렸다.

택한 남자는 피에트로 보나벤투리. 피렌체에서 올라온 하급 상인 집안의 아들로, 귀족 사회의 기준으로는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신분이었다. 비앙카는 임신한 상태로 피에트로와 함께 베네치아를 빠져나갔다.

카펠로 가문은 곧장 움직였다. 베네치아 최고 권력기관인 십인위원회(Council of Ten)에 고발했고, 위원회는 열다섯 살 소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카펠로 가문은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에게까지 딸의 송환을 요청했지만 코시모는 거절했다.

베네치아는 기다리기로 했다. 언젠가 기회가 오거나, 세상이 그 도망자를 잊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잊지 않았다.

비앙카와 피에트로는 피렌체에 자리를 잡았지만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다. 피에트로는 상인 일을 계속했고 성과도 변변치 않았다. 베네치아 귀족 딸이 좁은 셋방에서 지내는 삶은 처음 꿈꾸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그런 어느 날, 비앙카는 이웃집 창문 너머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메디치 가문의 후계자 프란체스코. 코시모 1세의 아들이자 훗날 토스카나 대공이 될 인물이었다. 그 이후의 역사는 충분히 명확하게 남아 있다.

프란체스코는 비앙카에게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당시 그에겐 오스트리아 대공녀 조반나와의 정략결혼이 이미 성사된 상태였지만, 그 사실이 두 사람의 관계를 막지는 못했다. 비앙카는 유부녀였고 프란체스코도 유부남이 됐지만, 둘의 관계는 피렌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됐다.

프란체스코의 후원은 비앙카의 삶을 바꿨다. 1570년대 초, 그는 비앙카를 위해 피렌체 한복판에 궁전을 지어줬다. 건축가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의 첫 번째 공식 작품이었다. 정실 부인 조반나가 엄연히 살아 있는 상황에서.

1572년 피에트로 보나벤투리가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끝내 특정되지 않았다. 당시 용의자로 거론된 이름은 두 개. 비앙카 카펠로와 프란체스코 1세. 남편이 죽으면 두 사람의 결혼이 가능해지니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프란체스코에겐 여전히 조반나가 있었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딸을 마음대로 내보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1576년에는 비앙카가 아들을 낳았다고 알려졌다. 안토니오 데 메디치. 이 아이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소문이 따라붙었다. 비앙카가 실제로 임신한 게 아니라 하녀에게서 아기를 구해 자기 아들인 것처럼 속여 프란체스코에게 제시했다는 이야기. 프란체스코는 나중에 이 소문을 알고도 1583년 안토니오를 공식으로 인정했다.

안토니오 덕분에 비앙카는 결정적인 카드를 쥐었다. 1582년 프란체스코와 조반나 사이에서 낳은 적자 필리포가 사망하면서 후계자 자리가 비었고, 프란체스코는 안토니오를 공식 후계자로 선언했다.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승인도 받아냈다. 비앙카는 후계자의 어머니가 됐고, 단순한 정부 이상이 됐다.

비앙카 카펠로와 아들 안토니오 데 메디치 — Alessandro Allori 작, c.1580, 달라스 미술관

비앙카와 아들 안토니오 데 메디치 — Alessandro Allori, c.1580 / Dallas Museum of Art (공개 도메인)

2. 사형수에서 대공비로

1578년 4월 조반나 데 아우스트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프란체스코는 두 달을 기다리지 않았다. 1578년 6월 비앙카와 비밀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공개 결혼식으로 재확인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사형을 선고했던 도망자가 15년 만에 토스카나 대공비가 된 셈이다.

베네치아의 반응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1579년 6월 베네치아 원로원이 표결에 부쳤다. 찬성 195표, 반대 9표, 기권 11표. 의결 결과: 비앙카 카펠로를 “공화국의 딸(vera e particolare figlia della Repubblica di Venezia)“로 선언한다. 십인위원회는 비앙카와 전 남편에 대한 기존 형사 기록도 모두 파기했다.

1563년 사형을 선고했던 바로 그 기관이, 16년 뒤 그녀를 공화국의 딸로 선언했다. 사형수로 판결 받았던 기록까지 없앴다. 비앙카는 이제 토스카나의 대공비였다. 베네치아와 메디치 가문 사이의 무역로와 외교 채널을 유지하려면, 16년 전 십인위원회의 결정을 계속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외교는 원칙보다 이해관계로 움직였다.

비앙카 카펠로 초상 — Scipione Pulzone 작, 1584,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비앙카 카펠로 — Scipione Pulzone, 1584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공개 도메인). 비앙카가 베네치아 지인에게 직접 선물한 초상화로, 페르디난도의 파괴를 피해 살아남았다.

두 사람이 결혼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메디치 가문 내부, 특히 프란체스코의 동생 페르디난도 추기경은 비앙카를 혐오했다. 피렌체 귀족 사회도 베네치아 출신 평민 도망자가 대공비 자리를 차지한 것에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페르디난도에겐 무기가 있었다. 안토니오 출생 논란. 비앙카의 임신이 가짜였고 안토니오는 하녀의 아이라는 소문은, 프란체스코가 살아 있는 동안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공식 후계자로 인정된 아이를 뒤집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페르디난도는 기회를 기다렸고, 1587년 10월에 그 기회가 왔다.

사냥 행사를 마치고 만찬이 차려진 그날 저녁, 페르디난도도 그 자리에 있었다. 로마에서 형과 화해하러 왔다는 게 공식 이유였다. 일부 기록은 비앙카가 직접 그를 초청했다고도 한다.

그날 밤 프란체스코가 쓰러졌고, 비앙카도 같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증상은 파상적이었다. 심한 오한과 고열, 구토가 이어지다가 잠시 회복하는 듯하다가 다시 악화됐다. 페르디난도는 두 사람을 각각 별도의 방에 격리했다. 11일간의 투병 끝에 프란체스코가 1587년 10월 19일 새벽에 숨을 거뒀다. 비앙카의 마지막 말로 전해지는 건 이랬다. “내 소원대로, 나는 나의 주인과 함께 죽어야 한다.” 그로부터 11시간 뒤, 비앙카도 죽었다.

공식 사인은 말라리아.


3. 2006년, 비소

2006년 피렌체 대학교 법의학 연구팀이 두 사람의 유해를 분석한 논문을 BMJ에 발표했다. 결과는 이랬다. 비앙카에게서 검출된 연조직 비소 농도는 20.81mg/kg, 프란체스코의 시료에서도 비슷한 수치가 나왔다. 비노출 일반인의 정상 수치가 0~0.092mg/kg인 점을 감안하면 수백 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연구팀은 두 사람이 말라리아가 아닌 급성 비소 중독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결과라고 결론 내렸다.

다만 이 결론이 확정된 건 아니다. 2010년 피사 대학교 연구팀이 프란체스코의 유골에서 열대열 말라리아 원충을 실제로 검출했고, 말라리아 감염이 사실이었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두 원인 중 어느 쪽이 실제 사인인지에 대한 학계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다.

페르디난도는 형 부부가 죽자마자 대공이 됐고, 그러고는 비앙카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은 저택 곳곳에서 비앙카의 초상화를 태우고 흉상을 부쉈다. 비앙카 이름이 새겨진 주화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메디치 건물에서 카펠로 가문의 문장을 정으로 깎아냈고, 그 자리에는 조반나 데 아우스트리아의 문장을 새겨 넣었다. 페르디난도는 베네치아에도 공식 서한을 보내 공개 애도를 금지해달라고 요청했고, 베네치아는 수락했다.

페르디난도는 안토니오를 성 스테파노 기사단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결혼도 후계도 불가능한 자리. 비앙카의 마지막 후계 카드를 그렇게 무력화한 것이다.

그래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비앙카가 생전에 베네치아 지인에게 선물한 초상화는 이미 피렌체 밖에 있었고, 지방 교회 사망 기록은 중앙에서 손댈 수 없었다. 피렌체 비아 마조에 있는 비앙카의 궁전은 메디치 소유 건물이 아니어서 카펠로 가문 문장이 외벽에 그대로 남았다.

팔라초 디 비앙카 카펠로 — 피렌체 비아 마조,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 설계 (1570~74)

피렌체 비아 마조의 팔라초 디 비앙카 카펠로. 베르나르도 부온탈렌티 설계(1570~74), 스그라피토 파사드 장식(1574~79). 메디치 소유 건물이 아니었기에 카펠로 가문 문장이 지금도 외벽에 남아 있다. / CC BY 4.0

비앙카 카펠로는 열다섯에 사형 선고를 받고 서른아홉에 독살 의혹 속에 죽었다. 그 24년 사이에 대공비가 됐고, 두 나라의 외교 관계를 바꿨고, 메디치 가문에는 끝까지 골칫거리로 남았다.

죽은 뒤 기록이 지워졌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피렌체 골목 어딘가에는 비앙카의 이름이 붙은 궁전이 아직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