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수리남 곤충의 변태』(1705) 도판 18번. 구아바 가지 위의 핑크발끝 타란튤라가 벌새를 사냥하는 장면, 군대개미와 헌츠맨 거미도 함께 등장. BHL/Wikimedia Commons.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52세 독일 여성이 수리남 정글에서 보낸 21개월

Q: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누구인가?

A: 1647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1717년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한 독일계(스위스 메리안 가문) 자연학자이자 박물 화가다. 13살 무렵부터 집 안에서 직접 누에·애벌레를 길러 변태 과정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50대에 접어든 1699년에는 둘째 딸 한 명만 데리고 노예제 식민지 수리남으로 21개월간 곤충 탐사를 떠났다. 그 결과물인 『수리남 곤충의 변태』(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um, 1705)는 60장의 대형 동판 도판에 곤충의 알·애벌레·번데기·성충과 숙주 식물, 포식자, 기생자까지 한 화면에 함께 그려, 당시 유럽 자연철학의 정설이던 “곤충은 썩은 고기에서 저절로 생긴다”는 자발발생설을 그림 한 장 한 장으로 무너뜨렸다. 한 세대 뒤 카를 폰 린네는 자신이 가본 적 없는 남미 곤충과 식물 수십 종을 그녀의 도판만 보고 학명에 올렸고, 18–19세기 곤충학·도판 교과서의 표준이 됐다. 19세기 후반 한때 “장식적 꽃·곤충 화가”로 평가절하됐지만, 19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 과학사·식민 박물학·생태학 연구가 그녀를 박물학 한복판에 다시 올려 놓았다. 1992–2002년 사이 독일 500 마르크 지폐 전면에 그녀의 초상이 들어갔다.


한눈에 보는 메리안

항목내용
본명Maria Sibylla Merian
생몰1647년 4월 2일 프랑크푸르트 – 1717년 1월 13일 암스테르담
가계스위스 메리안 가문(판화·출판업), 부친 Matthäus Merian
활동 도시프랑크푸르트 / 뉘른베르크 / 비우베르트(라바디스트 공동체) / 암스테르담 / 수리남
수리남 체류1699년 9월 도착 – 1701년 6월 귀환, 21개월
대표작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um (Amsterdam, 1705), 60장 동판 도판
초기작Der Raupen wunderbare Verwandelung (Nürnberg 1679, Frankfurt 1683)
미공개 자료Studienbuch (30년에 걸친 사육·관찰 일지,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딸Johanna Helena(1668–1723), Dorothea Maria(1678–1743)
사후 학명 헌정Salvator merianae(테구), Eulaema meriana(난초벌), Watsonia meriana(붓꽃) 등
린네 인용 횟수Species Plantarum + Systema Naturae 합산 100회 이상
500 도이체마르크 지폐1992–2002 유통, 메리안 초상 + 뉘른베르크 풍경 + 민들레·자벌레·나비
사망 300주기2017년, 큐 왕립식물원·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프랑크푸르트 등에서 동시다발 전시

메리안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유럽과 식민지, 과학과 종교의 경계를 일곱 번 넘나든 여성 자연학자였다. 프랑크푸르트의 판화 가문에서 태어나, 뉘른베르크에서의 결혼 생활과 출판 산업을 거쳐, 프리슬란트의 종교 공동체로 들어갔다가, 그곳을 떠나 암스테르담의 도시 시민으로 살았고, 그 뒤 노예제 식민지 수리남까지 다녀왔다. 그 일곱 번의 이동 뒤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간적 디테일이 있다. 누구에게 의지해 정글을 다녔는지, 왜 남편을 떠나 종교 공동체에 들어갔는지, 그녀의 책이 어떻게 가족 비즈니스로 굴러갔는지. 이런 결로 그녀의 삶을 되짚어보면서 표트르 1세의 컬렉션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 사후 200년 동안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다르게 봐 왔는지도 함께 따라간다.


1. 1660년, 13살의 누에 상자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초상

야코뷔스 하우브라컨이 새긴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판화 초상, 1717년경 / Wikimedia Commons (공개 도메인). 그녀가 사망한 해에 제작된 가장 잘 알려진 도상.

메리안의 부친 마테우스 메리안(Matthäus Merian, 1593–1650)은 17세기 유럽에서 손꼽히는 동판·지도 출판인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출판소는 그가 죽은 1650년 이후에도 가문 이름으로 운영됐지만, 세 살에 아버지를 잃은 메리안은 그 인쇄소에서 직접 일을 배우며 자라지는 못한다. 어머니는 1651년 꽃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야코프 마렐(Jacob Marrel, 1614–1681)과 재혼했고, 메리안은 이 계부의 작업실에서 정물화와 동판 기술을 익히며 자랐다.

13살 무렵부터 메리안은 집 안에서 누에를 길렀다. 자기 일기에 해당하는 Studienbuch 도입부에서 그녀는 누에를 키운 일을 자기 곤충 관찰의 출발점으로 회상한다. 누에가 알에서 깨어 잎을 먹고 고치를 짓고 나방으로 변하는 과정은 17세기 도시 아이라면 비단 산업의 일부로 누구나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메리안은 그 단계를 일일이 노트에 그리고 잎 종류와 시간을 기록했다. 가족들이 집 안에 벌레가 너무 많다고 한 소리씩 했다는 이야기는, 후대 전기 작가들이 그녀의 노트와 가정 환경을 종합해 재구성한 장면이다.1

당시 유럽 자연철학의 주류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한 자발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이었다. 곤충과 벌레는 썩은 고기, 진흙, 이슬, 부패한 식물에서 부모 없이 그대로 생긴다는 관념이다. 1665년 예수회 박물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지하 세계』(Mundus Subterraneus)에서 자기가 직접 실험으로 자발발생을 “증명”했다고 적었을 정도다.2

이 통설에 처음 본격적인 균열을 낸 것은 1668년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 1626–1697)였다. 토스카나 메디치 궁정의 시의로 일했던 그는 『곤충 발생에 관한 실험』(Esperienze intorno alla generazione degl’insetti)에서 고기 단지 두 개를 나란히 놓고, 한쪽은 열어 두고 다른 한쪽은 거즈로 입구를 막은 뒤 결과를 비교했다. 열어 둔 쪽에는 파리가 들어와 알을 낳고 곧 구더기가 생겼지만, 거즈로 막은 쪽에서는 같은 기간 동안 구더기가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자발발생설의 가장 흔한 증거였던 ‘고기에서 저절로 생기는 구더기’가 사실은 파리의 알에서 나왔다는 결정적 증명이었다. 다만 레디는 모든 자발발생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식물의 충영(gall, 잎이나 줄기 안에 기생벌이 만든 혹)에서 곤충이 나오는 경우 같은 일부 사례에 대해서는, “식물 내부에서 저절로 생긴다”는 유보를 남겨 두었다.

이듬해 166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얀 스밤메르담(Jan Swammerdam, 1637–1680)이 『곤충 일반사』(Historia Insectorum Generalis)에서 현미경 해부로 곤충의 일생을 알·애벌레·번데기·성충 4단계로 정리했다. 그가 보여 준 핵심은 곤충이 각 단계마다 별개의 생물이 아니라 같은 개체가 형태만 바꿔 가는 존재이며, 알 안에 이미 다음 단계의 기관 일부가 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변태는 무에서 유로 나타나는 마법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구조의 펼침이라는 시각이었다. 다만 그의 작업은 실험실 해부대 위에서 진행됐고, 곤충이 어떤 식물 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같은 생태적 맥락은 다루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의 작업이 학계 차원에서 자발발생설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이었지만, 일반 박물학·약학 교과서가 이 설명을 완전히 폐기한 것은 시간이 좀 더 흐른 18세기 후반이었다.

메리안이 첫 곤충책 『애벌레의 놀라운 변태와 기이한 꽃의 먹이』(Der Raupen wunderbare Verwandelung und sonderbare Blumennahrung)를 뉘른베르크에서 출간한 것은 1679년이다. 그 시점까지 그녀는 약 20년간 직접 곤충을 길렀고, 거기에서 얻은 데이터를 도판에 옮겼다.3


2. 결혼과 비우베르트, 두 딸을 데리고 남편을 떠난 1685년

비우베르트의 발타 성, 라바디스트 공동체 본부

발타 성(Walta-State), Wieuwerd, Friesland. 요한 안드레아스 그라프 채색 펜화, c.1686, Staatsarchiv Nürnberg / Wikimedia Commons. 메리안의 남편이었던 그라프가, 메리안과 두 딸이 이 공동체로 떠난 직후에 직접 그린 도면이다.

메리안은 1665년 5월, 18세에 계부의 제자였던 뉘른베르크 출신 화가 요한 안드레아스 그라프(Johann Andreas Graff, 1636–1701)와 결혼했다. 첫째 딸 요한나 헬레나는 166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고, 두 사람은 1670년 그라프의 고향 뉘른베르크로 이주했다. 둘째 딸 도로테아 마리아는 1678년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메리안의 첫 꽃 책 시리즈(Neues Blumenbuch)와 첫 곤충책이 모두 뉘른베르크에서 출판된다.4

당시 인쇄·출판 시장에서 메리안은 결혼 후 성인 “그라프”가 아니라 자기 친정 성인 “메리안”으로 자신을 표기했다. 단순한 자의식 표현을 넘어, 부친·계부 가계의 명성을 사업 브랜드로 활용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17세기 후반 도시 출판 시장에서 가문의 명성은 책의 신뢰도를 보증하는 역할을 했는데, 메리안 가문은 그 자체가 한 세대 이상 축적된 브랜드였기 때문이다.5

1681년 계부 야코프 마렐이 사망하자 메리안은 어머니의 유산을 정리하러 두 딸을 데리고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갔다. 남편 그라프는 한동안 가족을 따라왔지만, 1685년 메리안이 어머니와 두 딸과 함께 프리슬란트의 라바디스트 공동체로 옮겨가면서 사실상 별거에 들어간다. 그라프는 1686년 혼자 뉘른베르크로 돌아갔고, 1692년 양측의 이혼이 정식으로 확정됐다.6

라바디스트는 프랑스 출신 신학자 장 드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가 칼뱅주의 안에서 분리해 세운 경건주의 공동체였다. 1675년경 공동체는 프리슬란트의 작은 마을 비우베르트(Wiuwert)의 발타 성으로 옮겨, 영주 가문의 보호 아래 자체 인쇄소·농장·학교를 운영했다. 이 공동체의 지적 중심은 17세기 유럽 최초의 여성 대학생으로 꼽히는 학자 안나 마리아 판 슈르만(Anna Maria van Schurman, 1607–1678)이었다. 5개 국어, 에티오피아어 사전, 라틴 시문, 신학 논문을 남긴 그녀는 62세에 모든 세속 학문을 포기하고 라바디스트에 합류했고, 비우베르트에서 1678년 사망했다.7

메리안이 합류한 1685년은 슈르만 사후 7년이 지난 시점이지만, 그녀의 학문관과 인쇄소 전통은 공동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메리안의 동복 오빠 카스파 메리안(Caspar Merian)이 이미 라바디스트 핵심 인사였다는 점도 그녀의 합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비우베르트는 그녀에게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가져다 줬다. 우선 공동체가 1684년 수리남의 솜멜스데이크(Sommelsdijk) 가문 영지에 자매 농장 라 프로비당스(La Providence, 프랑스어로 “신의 섭리”)를 세웠고, 거기에서 보내온 열대 곤충·식물 표본이 메리안의 손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농장 이름이 프랑스어로 붙은 것은 라바디스트의 창시자 장 드 라바디 본인이 프랑스인이었고, 공동체가 비우베르트로 옮긴 뒤에도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 그녀가 남편 없이 두 딸과 함께 자기 작업을 이어갈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1685년 두 딸을 데리고 종교 공동체로 들어간 결정은, 종교적 동기보다 자기 출판·과학 활동을 확장할 환경을 확보하려는 쪽에 가까웠다는 게 학계 다수의 시각이다.8

1690년 어머니가 비우베르트에서 사망하고, 창시자 라바디와 안나 마리아 판 슈르만이 모두 떠난 뒤로 새 신도 유입이 줄어 공동체의 신앙적 응집력과 재정이 함께 약해지자, 메리안은 1691년 두 딸과 함께 공동체를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다. 이 시점부터 그녀는 도시 시민으로서 자기 출판·식물원 네트워크·후원자 관계를 제대로 다지기 시작했다.


3. 1699년 6월, 둘째 딸과 함께 수리남으로

1700년경 수리남 지도

17세기 후반 수리남 지도. 수도 파라마리보와 코메바이너(Commewijne) 강이 한눈에 보인다. 라바디스트 자매 농장 라 프로비당스는 이 강 변에 있었다.

1699년 6월, 52세의 메리안은 암스테르담 시의 후원에 자비를 보태 둘째 딸 도로테아와 함께 수리남으로 출항한다. 본래 계획은 5년이었고, 거점으로 의지하려던 곳은 라바디스트 자매 농장 라 프로비당스였다. 하지만 그녀가 파라마리보에 도착한 1699년 9월, 농장은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다. 1680–90년대를 거치며 라바디스트 식민자들은 정글의 질병과 자금난, 해적 약탈에 차례로 시달려 죽거나 떠났고, 메리안이 도착했을 때는 버려진 농장이나 다름없었다.9

결국 그녀는 라 프로비당스에는 짧은 기간만 머물렀고, 파라마리보 시내와 인근 네덜란드 농장주 가정을 거점으로 옮겨가며 21개월을 보낸다. 정착지에서 정글 안쪽까지는 강을 거슬러 며칠간 노를 저어 들어가야 했다.

『수리남 곤충의 변태』 도판 캡션을 읽으면 메리안 본인이 채집·사육·해석을 누구에게 의존했는지가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여러 캡션에서 “내 인디언 여성”(meine Indianerin), “내 노예들”(meine Sklaven), “한 흑인 여자”(eine Negerin) 같은 표현을 거듭 쓴다. 정글의 식물 이름, 곤충의 현지명, 어느 잎이 어떤 애벌레의 먹이가 되는지 같은 정보는 21개월밖에 안 되는 짧은 체류였던 만큼, 현지인의 입에서 직접 받아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10

도판 45번 공작화(Caesalpinia pulcherrima, peacock flower) 캡션은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인용되는 대목이다. 메리안은 이 도판에 카롤라이나 박각시(Carolina sphinx moth)의 생활사를 공작화와 함께 그렸는데, 식물 자체에 대한 텍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디언들은 네덜란드인 주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아이들이 자신처럼 노예가 되지 않도록 이 씨앗을 사용해 낙태한다.”

론다 시빙거(Londa Schiebinger)는 『식물과 제국』(2004)에서 이 한 문장을 17–18세기 식민 박물학 전체에서 매우 드문 사례로 평가한다. 동시대 카리브해를 돌아본 한스 슬론(Hans Sloane)의 『자메이카 여행기』(1707, 1725)에는 노예제와 약용 식물 정보가 풍부하게 실려 있지만, 노예제 자체를 비판하는 어조는 거의 없다. 1648년 출판된 빌렘 피소와 게오르크 마르크그라프의 『브라질 자연사』 역시 식물·동물을 종별로 나열했을 뿐 노예의 시점은 다루지 않는다. 메리안은 식민 박물학 텍스트 안에 노예의 시점을 짧게나마 끼워 넣은 거의 유일한 자연학자에 가깝다.11

다만 시빙거가 동시에 짚듯, 메리안의 텍스트는 노예제를 비판하는 어조일 뿐, 식민 경제 자체의 정당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녀 역시 농장주의 환대를 받았고, 본인도 노예를 부리는 백인 식민자의 위치에서 수리남을 다녔다.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는 이를 “공감하지만 동조하기도 한다(compassionate but complicit)“고 요약한다.12

원래 계획은 5년이었지만, 21개월 만에 그녀는 말라리아로 보이는 열대성 질병에 걸려 1701년 6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다. 절반도 채우지 못한 탐사였지만, 그 짧은 체류로 그녀는 약 60장 분량의 도판 소재를 모았다.


4. 1705년 출판, 가족 비즈니스로 굴러간 한 권의 책

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um Plate 45, 공작화와 박각시

『수리남 곤충의 변태』(1705) 도판 45번, 공작화(Caesalpinia pulcherrima)와 카롤라이나 박각시. 본문 캡션에 노예 여성들이 이 씨앗을 낙태제로 썼다는 기록이 들어 있다.

1705년 암스테르담에서 『수리남 곤충의 변태』가 라틴어판과 네덜란드어판으로 동시에 출판된다. 60장의 대형 동판(약 53×35 cm)으로, 출판인은 헤라르트 발크(Gerard Valk)였다. 메리안은 양피지에 원본 수채화를 직접 그렸지만, 동판 조각은 본인이 일부만 새기고 나머지는 직업 조각가 요세프 뮐더(Joseph Mulder)와 피터르 슬뤼터르(Pieter Sluyter)에게 맡겼다. 손채색본은 메리안과 두 딸이 주문 단위로 직접 채색해 판매했고, 비채색본보다 약 3–4배 비쌌다.13

초판 정가는 라틴어판 손채색본이 약 45–50 길더로 추정된다. 당시 암스테르담 평균 숙련공의 약 2–3개월치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주요 구매자로는 영국의 컬렉터 한스 슬론, 프랑스 자연학자 르네 레오뮈르(René Réaumur), 함부르크·뉘른베르크의 부유한 시민, 그리고 결정적으로 러시아의 표트르 1세가 있었다.14

메리안의 출판은 처음부터 가족 공방의 성격이 강했다. 첫째 요한나 헬레나(1668–1723)는 1692년 암스테르담에서 동인도회사 상인 야코프 헤롤트와 결혼한 뒤에도 어머니의 작업장에서 채색·드로잉을 계속했고, 어머니 사후인 1722년경 어머니의 작업을 정리하러 직접 수리남에 다녀온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도로테아 마리아(1678–1743)는 어머니의 수리남 동반자이자 가장 가까운 협력자로, 어머니의 미완성 도판을 마무리하고 추가 판본을 출판한 책임자가 됐다.15

이 작업장의 비즈니스 모델은 오늘날 한정판 도서·굿즈 시장의 이중 가격 구조와 닮아 있다. 손채색본은 가족 노동으로 마진을 높이고, 비채색본은 학자·도서관 대량 판매로 회전율을 잡는 식이다. 17세기 후반 도시 출판 시장에서 가족 공방형 협업은 메리안만의 특수 사례가 아니라, 당시 박물학·천문학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작동 방식이었다.


5. 자발발생설을 깬 것은 부정 실험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메리안의 작업은 레디·스밤메르담의 부정 실험·해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자발발생설을 무너뜨렸다.

먼저 시간 축의 시각화다. 메리안은 1660년대부터 약 30년간 누에·나방·나비를 직접 사육하면서, 한 마리가 알에서 시작해 애벌레, 번데기, 성충으로 변해가는 전 과정을 같은 페이지 안에 동시에 그렸다. 1679년 첫 곤충책에서 이미 이 구성이 완성돼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한 화면에 압축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곤충은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시각으로 답한다.

여기에 더해 숙주 식물을 같은 화면에 동시 배치했다. 그녀는 곤충의 변태 4단계를 그릴 때, 그 곤충이 실제로 먹는 잎과 꽃 위에 배치했다. 케이 에세리지(Kay Etheridge)는 『생태학의 개화』(The Flowering of Ecology, Brill 2021)에서 메리안이 약 30년에 걸쳐 약 300종의 곤충을 직접 길러 사육·관찰 데이터를 모았고, 이 “한 판 안에 곤충과 숙주 식물”이라는 구성이 현대 생태학적 도판의 직접적 조상이라고 평가한다.16

마지막으로 포식자와 기생자의 관계다. 수리남 도판에서는 같은 화면 안에 사냥하는 거미, 알을 깐 기생벌, 잎을 먹는 애벌레가 함께 등장한다. 도판 18번(구아바 가지 위의 새잡이거미)에는 핑크발끝 타란튤라가 벌새를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19세기 영국 박물학자 랜스다운 길딩(Lansdown Guilding)이 1834년 잡지 『The Magazine of Natural History』에 “공상적이다(fanciful)“고 단정한 이래 150년 가까이 후대 박물학자들이 그녀의 신뢰성을 깎는 근거로 끌어왔다. 그러다 1990년대 야외 행동생태학 연구에서 남미 새잡이거미(Avicularia avicularia)가 실제로 작은 새를 사냥한다는 사례가 영상에 잡히면서, 메리안의 관찰은 다시 사실로 인정받았다. 흥미롭게도 이 거미가 속한 속명 Avicularia 자체가 “작은 새”라는 뜻으로, 메리안의 도판이 학명 어원까지 만든 셈이다.17

자발발생설을 깬 것은 레디의 거즈 단지도, 스밤메르담의 해부 핀셋도 아니었다. 메리안의 사육 상자와 그림판이었다고 봐도 좋다. 통설은 “곤충이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부정으로만 답할 때 깨지지 않는다. “어떤 곤충이 어떤 식물 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긍정적인 그림이 채워졌을 때, 그제야 자리를 잃는다.

18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곤충학 교과서를 쓴 르네 레오뮈르의 『곤충사 기고』(Mémoires pour servir à l’histoire des insectes, 6권, 1734–42)는 메리안의 관찰을 거듭 인용한다. 독일권에서는 아우구스트 요한 뢰젤 폰 로젠호프(August Johann Rösel von Rosenhof)의 『곤충의 즐거움』(Insecten-Belustigung, 1746–61)이 메리안의 사육·삽화 방식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


6. 1717년 1월, 표트르 1세의 주치의가 그녀의 집을 찾아오다

메리안은 1717년 1월 13일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마지막 몇 해는 건강 악화와 함께 작업장 운영 부담이 컸고, 1715년에는 뇌졸중으로 보이는 발작을 겪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런데 사망 직후 그녀의 작업장 문을 가장 먼저 두드린 사람은 가족도, 유언 집행인도 아니었다. 러시아 표트르 1세의 주치의이자 스코틀랜드 출신 의사 로버트 어스킨(Robert Erskine, Areskin으로도 표기)이었다.18

표트르 대제는 두 번에 걸쳐 메리안의 작업을 접했다. 첫 만남은 1697–98년 그의 대사절단(Grand Embassy)이 암스테르담에 머물 때였고, 두 번째는 1716–17년 두 번째 네덜란드 방문 때다. 1717년 1월 메리안 사망 직후, 어스킨이 그녀의 유족에게서 미공개 연구 노트(Studienbuch)와 양피지 수채화 컬렉션을 한꺼번에 매입한다. 거래 규모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같은 해 10월에 메리안의 둘째 딸 도로테아 마리아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 게오르크 그젤(Georg Gsell, 1673–1740)이 표트르의 초청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 정황을 보면, 이 거래는 단순한 도서 매입이 아니라 가족 단위의 인적 이동까지 포함한 셈이다.19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게오르크는 궁정 화가이자 새로 건설된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가 됐다. 도로테아는 표트르가 세운 자연사 컬렉션 쿤스트카메라(Kunstkamera)의 큐레이터 겸 페트린 과학아카데미 미술 강사가 됐고, 어머니의 도판을 정리하고 추가 18장을 더해 1719년 라이프치히에서 『수리남 곤충의 변태』 2판을 출판한다. 1730년대에는 자신의 인장이 들어간 후속 판본을 감수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은 메리안 자료는 현재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자료소장처규모비고
양피지 수채화 컬렉션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도서관(BAN)약 196장식물·곤충·해양생물·광물, 1717년 어스킨 매입분
Studienbuch(연구 노트)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도서관(BAN)1책30년에 걸친 사육·관찰 일지, 1976년 페트로그라드판으로 영인본 출판

이 컬렉션은 2003년 프레스텔 출판사가 The St. Petersburg Watercolours라는 도판집으로 정리해 처음 일반에 공개했고, 2017년 사망 300주기 전후 큐 왕립식물원과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전시 때 상당수가 대출 전시됐다.20


7. 카를 폰 린네가 그녀의 그림에 기댄 100번 이상

아르헨틴 검은흰 테구 (Salvator merianae)

아르헨틴 검은흰 테구(Salvator merianae). 1839년 프랑스 동물학자 듀메릴(A. Duméril)과 비브롱(G. Bibron)이 메리안에게 헌정해 명명했다. 메리안 사후 122년 뒤의 헌정이다.

스웨덴 분류학자 카를 폰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는 자신의 두 대표작 『식물 종지』(Species Plantarum, 1753)와 『자연 체계』(Systema Naturae) 제10판(1758)에서 메리안의 도판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플로렌스 피터스와 다니엘 빈하헌이 1999년 학술지 Archives of Natural History에 게재한 분석에 따르면, 린네의 두 저작에서 메리안 도판이 직접 참조된 횟수는 100회를 넘는다.21

특히 곤충 분야에서 린네가 직접 가본 적 없는 남미 종들을 묘사할 때, 메리안의 수리남 판화는 사실상 “유형 도판(type illustration)” 노릇을 했다. 정식 표본이 아닌 도판이 모식 자료로 인정된 드문 사례에 속한다. 18세기 박물학에는 표본을 보존하고 옮기는 문제가 늘 따라다녔다. 그래서 메리안 같은 현지 관찰자의 도판이 표본을 대신해 분류의 기준이 된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메리안에 대한 헌정 학명(eponyms)은 거의 모두 그녀 사후에 붙은 것이다. 본인은 생전에 학명에 자기 이름이 들어가는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 대표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분류군학명명명자·연도비고
도마뱀(테구)Salvator merianaeDuméril & Bibron, 1839아르헨티나·우루과이 서식
난초벌Eulaema merianaG. A. Olivier, 1789남미산 대형 난초벌, 메리안 수리남 도판과 연결
거미Avicularia merianaeC. L. Koch, 1842새잡이거미과(Theraphosidae)
식물Watsonia meriana(L.) Mill., 1768남아프리카산 붓꽃과
식물Mesembryanthemum merianaeL. ex Haw., 1819남아공산 다육식물

이밖에 18–20세기 곤충 분류 논문에 메리안 도판을 근거로 기재된 신종이 수십 종 더 있고, 식물 분야에도 헌정 사례가 흩어져 있다.22

이런 인용 관행에서 비롯된 흥미로운 부작용 하나는 등불벌레(Fulgora laternaria)의 발광설이다. 메리안은 수리남에서 현지인이 “이 곤충이 밤에 빛난다”고 말했다는 보고를 도판 49번 옆에 적어 뒀지만, 본인이 발광을 직접 확인했다고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 린네는 이를 메리안 본인의 관찰처럼 받아들여 이 종을 “야간 발광” 특성과 함께 기재했고, 19세기 박물학자들이 이 잘못된 관찰을 확인하지 못한 채 메리안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또 다른 근거로 삼았다. 실제로 Fulgora laternaria는 발광 곤충이 아니다. 메리안이 기록한 것은 어디까지나 “현지인의 말”이었고, 잘못 읽은 쪽은 후대 학자였다.


8. 19세기의 평가절하, 1992년 500마르크 지폐

메리안 사후 50년간 그녀의 도판은 유럽 박물학·약학·예술의 표준 참고자료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박물학이 린네 체계 중심의 표본·표지 분류학으로 전환되면서, 메리안의 “정교한 그림 + 생태적 맥락 + 본문 서술” 양식을 사람들은 점차 “장식적”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1834년에 나온 길딩의 비판이 이 흐름에 쐐기를 박았다. 그는 거미의 새 사냥, 등불벌레의 발광, 일부 변태 기간을 “공상적이다”고 단정했고, 그 한 단어를 19세기 내내 박물학자들이 그녀의 신뢰성을 깎는 근거로 끌어왔다.

19세기에 메리안은 두 갈래로 좁아졌다. 한편으로 박물학 전공자들은 그녀를 “린네 이전의 흥미로운 사례” 정도로 다뤘다. 다른 한편 미술사·도서 컬렉팅 시장에서는 그녀를 17세기 “꽃·곤충 보태니컬 아트의 거장”으로 다뤘지만, 과학적 기여보다 시각적 매력에 비중을 두었다. 예외는 있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자신의 광학·식물학 연구 시절 메리안의 책을 직접 소장했고, 자기 노트에 그녀의 관찰을 인용했다.23

1897년 그녀의 250번째 생일을 계기로 독일·네덜란드 박물학 커뮤니티에서 작은 재발견이 시작된다. 뉘른베르크 게르마니쉬 국립박물관에서 첫 회고 전시가 열렸고, 엘리자베트 뤼커(Elisabeth Rücker) 같은 미술사학자가 그녀의 뉘른베르크 시기 작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계가 본격적으로 그녀를 재평가한 것은 20세기 후반 페미니스트 과학사 등장 이후다.

론다 시빙거의 『정신에는 성별이 없는가』(The Mind Has No Sex?, 1989)와 나탈리 제몬 데이비스의 『변경의 여성들』(Women on the Margins, 1995)이 등장하면서, 메리안은 “예외적 여성 화가”라는 자리에서 “17세기 박물학의 핵심 인물”로 옮겨 앉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결정적 변화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났다.

하나는 새잡이거미 관찰이 다시 인정받은 일이다. 1990년대 행동생태학 연구에서 남미 새잡이거미가 실제로 작은 새를 사냥한다는 사례가 야외 관찰과 영상으로 기록되면서, 길딩 이래 150년간 의심받던 메리안의 도판 18번 관찰이 사실로 확인됐다.

다른 하나는 노예제 비판 텍스트가 다시 읽힌 일이다. 시빙거는 『식물과 제국』(2004)에서 공작화 캡션의 노예 낙태제 언급을 식민 박물학사의 핵심 텍스트로 다시 끌어올렸고, 메리안 연구는 “여성 과학자 발굴”에 머물지 않고 식민사·젠더사·과학사가 만나는 자리가 됐다.

이 사이에 한국·일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건이 하나 있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독일연방은행은 500 도이체마르크(DM) 지폐 전면에 메리안의 초상을 넣어 발행했다. 배경에는 뉘른베르크 시가가, 옆에는 곤충(말벌) 한 마리가 배치됐고, 뒷면에는 민들레 위의 자벌레와 나비가 그려졌다. 유로 전환과 함께 유통이 중단됐지만, 독일 화폐 시리즈에서 과학자·예술가를 전면에 세운 마지막 세대로 그녀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24

2017년은 그녀의 사망 300주기였다. 큐 왕립식물원,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프랑크푸르트 역사박물관, 워싱턴 D.C. 국립 여성 미술관 등에서 동시다발 전시가 열렸다. 이 시기에 그녀의 Studienbuch가 디지털 영인본으로 일반 공개되면서, 연구자가 처음으로 그녀의 30년치 사육 기록을 곤충 종·식물 종 단위로 검색할 수 있게 됐다.25


9. 같은 시대 베를린의 마리아 키르히

메리안과 거의 같은 시대를 산 독일 여성 과학자가 베를린에도 있었다. 천문학자 마리아 마가레타 키르히(Maria Margaretha Kirch, 결혼 전 Winckelmann, 1670–1720)다. 1670년 라이프치히 인근에서 태어나, 1700년부터 남편 고트프리트 키르히와 함께 베를린 왕립 아카데미에서 천문 관측·역서(calendar) 제작에 종사했다. 1702년 그녀는 새 혜성 C/1702 H1을 처음 발견했지만, 공식 발견자는 남편 또는 같은 밤 독립적으로 관측한 이탈리아 천문학자 비안키니·마랄디에게 돌아갔다. 1710년 남편이 죽은 뒤 아카데미 임용을 신청했지만, 베를린 아카데미는 그녀를 정식 직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26

광범위한 1차 자료, 즉 키르히의 베를린 아카데미 서신과 메리안의 암스테르담·뉘른베르크 통신, 두 사람을 동시에 후원한 인물의 문서 어디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의외의 결과는 아니다. 메리안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도시 시민·식물원·인쇄업 네트워크 안에서 활동했고, 키르히는 베를린 왕립 아카데미와 라이프치히 학술 출판 쪽에서 움직였다. 두 사람의 활동 거점이 갈라져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을 한 쌍으로 묶어 볼 만한 조건은 거의 같다. 하나는 가족 공방형 협업이라는 점이다. 메리안은 두 딸과 함께 채색·판매·연구를 진행했고, 키르히는 남편 사후에 자녀 크리스토프·크리스틴·마르가레테를 직접 훈련시켜 천문 관측·역서 제작을 가업으로 이어갔다. 또 하나는 정기 인쇄물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학술 단행본만이 아니라 시민·항해자·농민을 대상으로 한 정기 인쇄물(메리안의 꽃 책 시리즈, 키르히의 연간 역서)을 핵심 수입원으로 삼았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 모두 생전에는 정식 학회 회원·교수직을 갖지 못했지만, 후대에 자신의 이름이 학명·천체명에 새겨졌다.

게임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 마리아 마가레타 키르히의 인연 연대기에 메리안이 함께 등장한다. 두 사람이 실제 역사에서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게임의 캐릭터 구성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독일어권 여성 자연과학자의 평행한 두 궤적을 한 화면에 잘 짚었다고 볼 수 있다.


10. 다시 메리안에게로

17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 여성이 자기 작업을 평생 이어가는 자연학자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은 의외로 까다로웠다. 부친 가계의 인쇄·출판 명성, 계부의 작업장에서 익힌 기술, 도시 출판 길드의 느슨한 규제, 종교 공동체의 일시적 보호, 식민지 자매 정착지의 정보, 부유한 컬렉터의 후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족 노동으로 굴릴 두 딸의 존재까지. 이 일곱 가지가 동시에 갖춰지지 않았다면 1699년의 수리남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메리안이 남긴 것은 60장의 도판과 약 300종의 사육 기록이지만, 그녀의 진짜 유산은 “어떤 곤충이 어떤 식물 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한 화면 안에 그릴 수 있다고 본 시각 언어 자체다. 그 시각 언어가 자발발생설을 한 장 한 장 무너뜨렸고, 한 세대 뒤 린네의 분류 체계 안에 표본 대신 들어갔다. 두 세기가 흘러 페미니스트 과학사·식민 박물학 연구가 그것을 다시 끌어냈다.

19세기 어느 박물학자는 그녀의 그림을 “공상적이다”고 단정했다. 그가 들여다본 것은 17세기 여성이 남긴 비공식 도판이었다. 1990년대 어느 야외 생태학자는 새잡이거미가 새를 사냥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가 확인한 사실은, 메리안이 290년 전 이미 한 화면에 함께 그려 둔 장면이었다.


출처

Footnotes

  1. 13살 무렵 누에 사육 기록은 메리안 본인의 Studienbuch 도입부와, Kim Todd, Chrysalis: Maria Sibylla Merian and the Secrets of Metamorphosis (London: I.B. Tauris, 2007), Ch. 1–2의 정리 참조.

  2. Athanasius Kircher, Mundus Subterraneus (Amsterdam, 1665). 자발발생설 17세기 양상 정리는 Marc Ratcliff, The Quest for the Invisible: Microscopy in the Enlightenment (Farnham: Ashgate, 2009), Ch. 1.

  3. Maria Sibylla Merian, Der Raupen wunderbare Verwandelung und sonderbare Blumennahrung (Nürnberg, 1679 / Frankfurt, 1683). 분석은 Kay Etheridge, The Flowering of Ecology: Maria Sibylla Merian’s Caterpillar Book (Leiden: Brill, 2021), Ch. 2–3.

  4. Ella Reitsma, Maria Sibylla Merian and Daughters: Women of Art and Science (Amsterdam: Rembrandthuis / Los Angeles: Getty Museum, 2008), pp. 22–28.

  5. Natalie Zemon Davis, Women on the Margins: Three Seventeenth-Century Live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 pp. 144–149.

  6. Todd, Chrysalis, Ch. 5 “The Labadists”; Florence F. J. M. Pieters, “Notes on Maria Sibylla Merian (1647–1717) and her daughters,” Archives of Natural History 26:1 (1999), pp. 1–18.

  7. T. J. Saxby, The Quest for the New Jerusalem: Jean de Labadie and the Labadists, 1610–1744 (Dordrecht: Martinus Nijhoff, 1987), Ch. 14–16; Joyce Irwin (ed.), Anna Maria van Schurman: ‘Whether a Christian Woman Should be Educated’ and Other Writing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서문.

  8. Davis, Women on the Margins, pp. 162–179; Saxby, Quest for the New Jerusalem, pp. 247–262.

  9. Atlas of Mutual Heritage, “Map of the Labadist settlements,” atlasofmutualheritage.nl; Todd, Chrysalis, Ch. 8 “Paramaribo.”

  10. Reitsma, Maria Sibylla Merian and Daughters, pp. 165–192.

  11. Maria Sibylla Merian, 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um (Amsterdam: G. Valk, 1705), Plate 45. 영역과 분석은 Londa Schiebinger, Plants and Empire: Colonial Bioprospecting in the Atlantic World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pp. 105–107, 150–158. Hans Sloane, A Voyage to the Islands Madera, Barbados, Nieves, S. Christophers and Jamaica (London, 1707–1725) 비교.

  12. Davis, Women on the Margins, pp. 184–202.

  13. Reitsma, Maria Sibylla Merian and Daughters, pp. 198–212; Marieke van Delft and Hans Mulder (eds.), Maria Sibylla Merian: Changing the Nature of Art and Science (Tielt: Lannoo, 2016), pp. 78–96.

  14. 17세기 후반 암스테르담 임금·물가 데이터는 Jan de Vries and Ad van der Woude, The First Modern Economy: Success, Failure, and Perseverance of the Dutch Economy, 1500–1815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15. Pieters, “Notes on Maria Sibylla Merian (1647–1717) and her daughters” (1999), 연표 부록; Reitsma, Maria Sibylla Merian and Daughters, pp. 247–256.

  16. Kay Etheridge, “Maria Sibylla Merian and the metamorphosis of natural history,” Endeavour 35:1 (2011), 16–22; Etheridge, The Flowering of Ecology (Brill, 2021), 결론장.

  17. Lansdown Guilding, “Observations on the work of Madame Merian on the insects of Surinam,” Magazine of Natural History 7 (1834). 1990년대 새잡이거미 관찰 복권은 Todd, Chrysalis, Ch. 9 “Aftermath”; Reitsma, Maria Sibylla Merian and Daughters, pp. 220–225.

  18. 1715년 발작 기록은 Reitsma, Maria Sibylla Merian and Daughters, pp. 240–245.

  19. Eckhard Hollmann (ed.), Maria Sibylla Merian: The St. Petersburg Watercolours (Munich: Prestel, 2003), 서문 및 Robert Erskine 항목; Lindsey Hughes, Russia in the Age of Peter the Great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8), pp. 273–296.

  20. Royal Botanic Gardens Kew, “Maria Sibylla Merian — the woman who made science beautiful,” kew.org 큐레이션 페이지 (2017년 이후).

  21. Florence F. J. M. Pieters and D. Winthagen, “Maria Sibylla Merian, naturalist and artist (1647–1717): a commemoration on the occasion of the 350th anniversary of her birth,” Archives of Natural History 26:1 (1999), pp. 1–18, 특히 pp. 12–15.

  22. GBIF Backbone Taxonomy 데이터베이스 Salvator merianae, Eulaema meriana, Watsonia meriana 항목 (2026-05 접속).

  23. 괴테 소장본 출처는 Reitsma, Maria Sibylla Merian and Daughters, pp. 270–272, 부록.

  24. Deutsche Bundesbank 500 도이체마르크 시리즈(1991/1992 발행, 2002 회수) 공식 디자인 자료.

  25. Maria Sibylla Merian, Leningrader Studienbuch 디지털 영인본 공개 정보(BAN, 2017); 2017년 사망 300주기 전시 자료(Kew, Rijksmuseum, NMWA Washington 등).

  26. Londa Schiebinger, “Maria Winkelmann at the Berlin Academy: A Turning Point for Women in Science,” Isis 78:2 (1987), pp. 174–200; Londa Schiebinger, The Mind Has No Sex? Women in the Origins of Modern Scienc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9), Ch.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