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마쓰성의 바닷물 해자. 이코마 치카마사가 세토내해의 물을 그대로 끌어들여 만든 해성 구조로, 지금도 조석에 따라 수위가 오르내린다.

바다 위의 성을 지은 가문은 왜 사라졌나: 이코마 소동

Q: 이코마 소동이란 무엇인가?

A: 에도 막부 초기, 사누키(지금의 가가와현) 다카마쓰 번을 다스리던 이코마 가문이 가신단의 내분 끝에 영지를 통째로 몰수당한 사건이다. 1640년의 일이다. 이코마 치카마사가 세 천하인을 섬기며 어렵게 세운 그 가문은, 사누키 한 나라를 받은 지 채 반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다이묘 자리에서 끌어 내려졌다. 표면적인 이유는 어린 영주의 무능과 가신들의 권력 다툼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외가의 후견을 받는 새 가신과 이코마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가신 사이의 구조적인 갈등이 깔려 있었다. 막부가 다이묘를 길들이던 방식이 이 사건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코마 소동 일지

시점사건
1587년이코마 치카마사, 사누키 입국
1588~1590년다카마쓰성 축성
1600년세키가하라 이후 가문 존속
1610년2대 가즈마사 사망
1621년3대 마사토시 요절, 11세 다카토시가 4대 승계
~1630년외조부 토도 다카토라가 후견
1637년가로 이코마 다테와키, 막부에 19개조 소장 제출
1639년평정소에서 양측 대결, 결론 미루어짐
1640년다카토시 개역, 데와 야시마 1만 석으로 유배

바다 위에 성을 쌓은 까닭

1부에서 본 대로, 이코마 치카마사는 1587년 사누키 한 나라를 받아 들어왔다. 그가 새 거점으로 택한 곳은 세토내해에 면한 ‘노하라’라는 항구였고, 1588년부터 1590년까지 그 자리에 쌓은 것이 다카마쓰성이다.

이 성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닷물을 그대로 해자에 끌어들인 해성(海城) 구조다. 세토내해의 물길을 성안으로 직접 통하게 해, 군선이 성 가까이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일본에서는 다카마쓰성과 이마바리성, 나카쓰성을 묶어 3대 수성(水城)이라 부르는데, 그중에서도 다카마쓰성은 규모가 컸다. 바다를 등진 영주가 수군을 운용하기에 더없이 맞춤한 성이었다.

에도 시대에 그려진 「다카마쓰 성하 병풍도」. 바닷물 해자에 둘러싸인 다카마쓰성과 격자형 성하 시가지, 만에 정박한 배가 한 화면에 담겨 있다.
에도 시대에 그려진 「다카마쓰 성하 병풍도」. 바닷물 해자에 둘러싸인 다카마쓰성과 격자형 성하 시가지, 만에 정박한 배가 한 화면에 담겨 있다.

누가 이 성의 설계를 맡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구로다 간베에가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퍼져 있지만, 이를 뒷받침한다는 사료의 기록에 모순이 있어 확정하기 어렵다. 호소카와 다다오키, 토도 다카토라 같은 이름도 거론되지만 어느 것도 확증은 없다. 공교롭게도 토도 다카토라는 뒷날 이코마 가문의 외척이 되어, 이 가문의 운명에 다시 한번 끼어든다. 치카마사가 사누키 개발의 기초를 닦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검지로 토지를 정리하고 만노이케 같은 저수지를 손봐 가뭄에 대비하며, 한 지방을 다스리는 틀을 갖춰 나갔다.

어린 영주와 외가의 그늘

치카마사가 1603년 세상을 떠난 뒤, 가문은 2대 가즈마사로, 다시 3대 마사토시로 이어졌다. 문제는 마사토시가 1621년 서른여섯의 나이로 일찍 죽으면서 시작됐다. 뒤를 이은 4대 다카토시는 그때 겨우 열한 살이었다.

어린 영주가 가문을 잇자 외조부인 토도 다카토라가 후견을 맡았다. 이세 쓰 번의 번주였던 다카토라는 자기 가신을 사누키로 보내 번정을 돕게 했다. 그러면서 이코마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일문(一門) 가로 이코마 쇼겐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마에노 스케자에몬과 이시자키 와카사를 새로 가로 자리에 앉혔다. 그중 마에노 스케자에몬은 토도 다카토라의 사위로, 장인의 알선을 받아 이코마 가에 들어온 토도 가문 쪽 인물이었다. 이시자키 와카사는 그와 결탁한 한 패였다.

이것이 결국은 커다란 갈등의 씨앗이 된다. 한쪽에는 외가 토도 가문의 후원을 업고 새로 들어온 가신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이코마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가신들이 있었다. 4대 당주 이코마 다카토시가 암군으로 전해지기는 하나, 일련의 사건을 단순히 어느 못난 영주의 실정으로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앞으로 서술할 사건은 외가에서 파견된 후견 명목의 가신들과 본래의 가신단이 번의 주도권을 두고 부딪친 정치권력 투쟁으로 봐야 한다.

못난 영주라는 이야기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서 4대 다카토시는 전형적인 암군이다. 군기물과 후대의 기록은 그가 정무를 가신들에게 떠넘기고, 미소년을 모아 춤추게 하는 놀이에 빠졌다고 적는다. 세상 사람들은 이 놀이를 ‘이코마 춤(生駒踊り)‘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실이 친정인 로주(老中, 막부 최고위 행정직) 도이 도시카쓰 가문에 남편의 행실을 일러바칠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다만 이런 대목은 가려 읽을 필요가 있다. ‘이코마 춤’이나 미소년 이야기는 당대의 1차 사료가 아니라 후대에 쓰인 군기물 계열의 서사에 기대고 있다. 무능한 주군 아래 간신이 날뛰고 충신이 들고일어난다는 구도는 에도 시대 어가소동(御家騒動) 이야기에 거듭 등장하는 전형적인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카토시가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이 일화들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너무 어린 나이에 외가의 그늘 아래 영주가 됐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솔숲을 벤 손

대립이 폭발한 계기는 솔숲 한 자락이었다. 막부가 다이묘들에게 에도성 수축 공사를 분담시켰고, 그 비용을 대느라 재정이 쪼들린 이코마 가문은 빚을 졌다. 새로 들어온 가신들은 이 빚을 갚으려고 다카마쓰성 남쪽 이시노오산(石清尾山)의 솔숲을 베어 목재로 팔았다.

문제는 그 솔숲이 보통 숲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가문의 시조 이코마 치카마사가 다카마쓰성을 쌓을 때 “유사시 적을 막는 요해이니 베지 말라”며 벌채를 금한 땅이었다. 그러니 대대로 섬겨온 가신들은 그 솔숲을 베어 판 것을 단순한 목재 거래가 아니라 가문을 세운 조상의 유훈을 짓밟은 짓으로 받아들였다. 당주의 곤란한 입장을 고려해 참고 지내던 기존 가신단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이 사건이었다.

막부 앞에 선 가문

신참 가신들에게 밀려났던 일문 가로 쇼겐의 아들 이코마 다테와키가 반격에 나섰다. 1637년, 그는 마에노와 이시자키 일파의 횡포를 19개 조목으로 정리했다. 처음에는 도이, 토도, 와키자카 같은 인척 다이묘 가문에 먼저 사정을 호소했고, 그것으로 풀리지 않자 막부에까지 들고 갔다.

막부는 1639년 평정소에서 양측을 마주 세웠다. 한때는 싸움을 일으킨 양쪽 모두에게 책임을 묻는 ‘싸움양성패(喧嘩両成敗)‘의 원칙에 따라 주모자들을 함께 처단하려 했으나,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아 이듬해로 넘어갔다. 그사이 사정을 뒤늦게 안 어린 영주 다카토시가 충의를 보인 다테와키를 처벌할 수 없다며 반발하면서, 후견을 맡았던 토도 가문이 손을 떼는 등 사태는 더 꼬였다.

가문이 영지를 잃는 법

1640년 7월, 막부의 판단이 내려졌다. 다카토시는 가신단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누키 17만여 석을 몰수당했다. 그는 데와국 유리군 야시마(지금의 아키타현)로 옮겨져, 이 시기에는 녹으로 1만 석을 받았는데, 무가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품위유지비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한 나라의 주인이었던 영주가 작은 유배지로 밀려난 것이다.

소란을 일으킨 양쪽 가신들도 처벌을 피해가지 못했다. 새로 들어온 일파 가운데 이시자키 와카사와 마에노 지타유는 할복했고, 그 자식들은 사죄(死罪)에 처해졌으며, 도당을 짜고 번을 떠난 자들도 사형을 받았다. 다만 흔히 신참파의 수괴로 지목되는 마에노 스케자에몬 본인은 사건 심리 도중에 병으로 죽어, 정작 할복한 것은 그 아들 지타유였다. 반대편의 다테와키는 충의에서 일을 일으켰으되 처리를 그르쳤다는 이유로, 이즈모 마쓰에 번에 맡겨지는 비교적 가벼운 처분에 그쳐 목숨을 건졌다.

막부가 가문을 무너뜨린 명분은 영주의 ‘감독 책임’, 곧 가신들의 다툼을 다스리지 못한 책임이었다. 에도 막부는 이런 식으로 다이묘 가문의 내분에 개입해 통제가 어렵다 싶은 가문을 솎아내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이코마 가문 역시 그 본보기였다.

주인을 잃은 사누키

이코마 가문이 떠난 사누키는 한동안 막부 직할을 거쳐 나뉘었다. 1641년 서사누키에는 야마자키 가문이 들어와 마루가메 번이 섰고, 동사누키의 다카마쓰에는 그 이듬해 새 주인이 들어온다.

야시마로 쫓겨난 이코마 가문은 그 뒤로도 명맥을 잇는다. 다카토시의 후손은 8천 석 규모의 하타모토(旗本) 격으로 가문을 지켰고, 200여 년이 흐른 보신전쟁 때 신정부 편에 서서 다시 다이묘로 복귀해 야시마 번을 세웠다. 무너졌던 가문이 두 세기를 견뎌 되살아났다. 그러나 다카마쓰성과 사누키 한 나라는 영영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됐다. 바닷물 위에 성을 쌓은 가문이 사라진 자리에 막부가 앉힌 새 주인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진다.


이코마와 다카마쓰성 3부작

참고 자료

  • 『香川県史 3 通史編 近世1』 (가가와현사)
  • 『生駒家廃乱記』 (香川叢書 2 수록)
  • 北島正元, 『御家騒動 上』
  • 高松市 「玉藻公園 歴代城主」 (다카마쓰시 공식)
  • 国立国会図書館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 「生駒騒動에 관한 자료」
  • 히어로 이미지: 다카마쓰성 해자(다마모 공원), 先従隗始, CC0,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