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토내해에 면한 다카마쓰성. 바닷물을 끌어들인 해자로 둘러싸여 '바다 위의 성'으로 불렸다. 이코마 치카마사가 1590년에 완성했다.

세 천하인을 섬기고 살아남은 무장: 이코마 치카마사

Q: 이코마 치카마사는 누구인가?

A: 16세기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이다. 미노국(지금의 기후현)의 작은 토착 무사, 곧 고쿠진(国人) 집안에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세 천하인을 차례로 섬기며 사누키국(지금의 가가와현) 한 나라를 통째로 받아 17만 석 다이묘까지 올랐고, 그 거점으로 다카마쓰성을 쌓았다. 전국시대의 수많은 무장이 한 주군과 함께 흥하고 망했지만, 치카마사는 세 명의 주군을 바꾸어 섬기며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한눈에 보는 이코마 치카마사

항목내용
이름生駒親正 (이코마 치카마사)
생몰1526년 ~ 1603년 (향년 78세)
출신미노국 가니군 쓰치다 (지금의 기후현 가니시)
섬긴 주군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
관위종5위하 우타노카미(雅楽頭)
영지사누키 1국, 약 17만 석 (다카마쓰 번 초대 번주)
주요 축성다카마쓰성, 마루가메성
임진왜란5번대에 편성, 약 5,500명 인솔
세키가하라본인은 서군, 아들 가즈마사는 동군
사망지다카마쓰성

노부나가의 먼 친척에서 히데요시의 실무가로

이코마 집안은 본래 야마토국 이코마(지금의 나라현 이코마시)에 뿌리를 둔 무사 가문으로,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오와리 쪽으로 옮겨 앉았다고 전한다. 치카마사의 집안은 오다 가문과 인척으로 얽혀 있었다. 노부나가의 생모, 그리고 노부나가의 측실 중 한 사람이 이코마씨와 연결되는 까닭에, 옛 사전과 계보는 치카마사를 노부나가의 종형제뻘로 적는다.

弘憲寺에 전하는 이코마 치카마사의 초상. 칼을 찬 무장이 아니라 삭발하고 법의를 걸친 내정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弘憲寺에 전하는 이코마 치카마사의 초상. 칼을 찬 무장이 아니라 삭발하고 법의를 걸친 내정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치카마사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566년, 노부나가가 미노를 칠 무렵이다. 그는 노부나가 휘하에 들어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부대에 배속됐다. 가네가사키 싸움, 나가시노 전투, 이시야마 혼간지 공격 같은 노부나가의 굵직한 전장에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무공 때문에 출세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개인의 무용으로 등장하는 일화는 사실상 하나뿐이다. 앞서 나온 가네가사키 싸움에서 노부나가가 군을 물릴 때, 후미를 맡은 히데요시에게 붙여준 다섯 용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치카마사가 꼽힌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조차 동시대 기록이 아니라 에도 시대에 쓰인 군기물 『신초키(信長記)』에 처음 보인다. 한 무장의 무공담이 후대의 창작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아니었음을 거꾸로 말해준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쓰러지자, 치카마사는 망설임 없이 히데요시의 직속 가신이 됐다. 야마자키 싸움, 시즈가타케 싸움, 오다와라 정벌까지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 길을 따라 걸으며, 1578년 무렵 천 석 남짓이던 그의 녹봉은 오미 다카시마 2만 석, 이세 간베 4만여 석, 하리마 아코 6만 석으로 차근차근 불어났다.

히데요시가 치카마사를 신임한 이유는 그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전국시대 말기의 도요토미 정권에는 가토 기요마사 같은 무단파와 이시다 미쓰나리 같은 문치파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치카마사는 그 어느 쪽과도 척을 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싸움터에서 앞장서 적진을 돌파하는 맹장이라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일에 능한 인물이었다.

‘산추로’라는 이름의 무게

히데요시 만년에 치카마사는 호리오 요시하루, 나카무라 가즈우지와 함께 이른바 ‘산추로(三中老)‘로 불렸다고 한다. 정권의 원로 격인 다섯 다이로(五大老)와 실무를 맡은 다섯 부교(五奉行) 사이에서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이야기는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다. ‘산추로’라는 직책 자체가 히데요시 당대의 1차 기록이 아니라, 에도 시대에 쓰인 오제 호안의 『태합기』(1625)나 야마가 소코의 『무가사기』(1673) 같은 후대 사료에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현대 연구자들 중에는 이 직책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세 사람이 함께 그런 역할을 맡았는지를 1차 사료로는 확인할 수 없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호리오 가문의 옛 가신이던 호안이 자기 옛 주군에게 권위를 입히려고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니 ‘산추로’는 치카마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화로 받아들이되, 확정된 제도처럼 단정하지는 않는 편이 옳다. 산추로가 실재하는 역할이었든 아니었든 상관없이 분명한 것은, 그가 무장이면서도 조정과 중재에 어울리는 인물로 여겨졌다는 사실이다.

사누키 한 나라를 받다

1587년,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이 끝난 뒤 치카마사는 현재의 가가와현, 곧 시코쿠 북동부에 해당하는 사누키 한 나라를 받아 입국했다. 처음에는 히케타성, 이어 쇼쓰지성을 거점으로 삼았으나 영지의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거나 공간이 너무 비좁은 등의 문제가 있어, ‘노하라(野原)‘라 불리던 항구에 새 성을 쌓기로 했다. 1588년에 시작해 1590년에 완성한 그 성이 다카마쓰성이고, 지명도 이때 ‘노하라’에서 ‘다카마쓰’로 바뀌었다. 바닷물을 그대로 해자에 끌어들인 해성(海城) 구조는 이 성의 가장 큰 특징인데,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그사이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에서 치카마사는 5번대에 편성돼 약 5,500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넜다. 5번대는 충청도 방면의 병참과 수송을 맡은 부대여서 전투의 전면에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사누키로 돌아온 그는 검지(토지 측량)를 실시하고 만노이케 같은 저수지를 손봐 가뭄에 대비하는 등, 한 나라를 다스리는 영주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미노의 작은 무사 집안에서 시작한 사내가 이제 한 지방을 다스리는 어엿한 영주가 된 것이다.

세키가하라, 아버지와 아들이 갈라서다

1600년, 천하의 향배를 가른 세키가하라 전투가 닥쳤다. 아버지 치카마사는 서군(이시다 미쓰나리 편)에 가담해 단고 다나베성 공격에 가신을 대리로 보냈고, 아들 이코마 가즈마사는 동군(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붙어 본전에서 무공을 세웠다. 한 집안이 두 진영으로 갈라선 것이다.

왜 부자가 양쪽으로 나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서군이 거병할 때 치카마사가 마침 오사카에 있어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해석도 있고, 어느 쪽이 이기든 가문은 살아남도록 일부러 양쪽에 발을 걸쳤다는 해석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나자 치카마사는 머리를 깎고 고야산으로 물러났지만, 동군에서 공을 세운 아들 가즈마사 덕분에 이코마 가문은 사누키 영지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

이런 처세는 치카마사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같은 세키가하라에서 사나다 마사유키·노부유키 부자도 똑같이 동서로 갈라섰고, 그 덕에 사나다 가문은 멸문을 피했다. 한쪽이 져도 다른 쪽이 가문을 잇게 하는 이 방식은, 천하가 어디로 기울지 끝까지 알 수 없던 시대의 생존술이었다. 치카마사는 노부나가에서 히데요시로 주군을 바꿀 때 보여준 그 감각을, 마지막에는 아들과 편을 나누는 방식으로 한 번 더 발휘했다.

살아남은 자가 남긴 것

치카마사는 1603년, 자신이 쌓은 다카마쓰성에서 78년의 생을 마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연 바로 그해다. 세 천하인의 시대를 모두 지켜본 사람이, 새 시대가 막 열리던 해에 세상을 떠난 셈이다.

그가 남긴 것은 사누키라는 영지와 다카마쓰성, 그리고 살아남은 가문이었다. 미노의 고쿠진에서 출발해 한 나라의 주인이 되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시대를 거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신중함으로 지켜낸 가문이 그다음 세대에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치카마사가 그토록 조심스럽게 세운 이코마 가문은, 채 반세기도 못 가 사누키에서 통째로 사라진다. 그 몰락과, 그가 바닷물 위에 쌓은 성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룬다.


이코마와 다카마쓰성 3부작

참고 자료

  • 『寛政重修諸家譜』 (간세이 중수 제가보) — 이코마 치카마사 생몰·관위
  • 『香川県史 通史編 近世1』 (가가와현사)
  • 谷口克広, 『豊臣政権の権力構造』 — ‘산추로’ 실재성 논의
  • 高松市 「玉藻公園 歴代城主」 (다카마쓰시 공식)
  • 본문 초상: 「生駒親正像」 弘憲寺 소장(高松市 지정 유형문화재),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 히어로 이미지: 다카마쓰성(다마모 공원), 先従隗始, CC0,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