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라기산에서 바라본 갓산토다성터. 1565년 모리군이 진을 쳤다고 전하는 산이다(야스기시 촬영, CC BY-SA 4.0)

아마고 요시히사(尼子義久, 1540–1610) — 성을 내주고 44년을 더 산 이즈모의 마지막 당주

Q: 아마고 요시히사(尼子義久)는 누구인가?

A: 이즈모(出雲)를 본거지로 산인(山陰) 일대를 지배한 센고쿠 다이묘 아마고 가문(尼子氏)의 마지막 당주다. 1561년 아버지 아마고 하루히사(尼子晴久)가 급사하자 가독을 이었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중재한 모리 가문(毛利氏)과의 화의가 1562년에 깨지면서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이즈모 침공을 맞았다. 고쿠진(国人, 다이묘에 직속되지 않고 자기 영지에 뿌리내린 지역 토호)들이 잇달아 떨어져 나간 끝에 본성 갓산토다성(月山富田城) 한 곳으로 몰린 뒤에도 4년을 버텼고, 1566년 11월 목숨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성을 내주었다. 이후 동생들과 함께 아키(安芸)의 한 절에 23년간 갇혀 지냈고 풀려난 뒤에는 모리 가문의 캬쿠분(客分)으로 살다가 1610년 나가토(長門)에서 71세로 죽었다. 에도 시대에 쓰인 전쟁 이야기책들은 그를 간신의 참언에 넘어가 충신 우야마 히사카네(宇山久兼)를 죽이고 성을 무너뜨린 어리석은 주군으로 그렸다. 그러나 사건 50일 뒤 아마고 가신들이 쓴 편지에는 그런 참언 이야기가 없다.

한눈에 보는 아마고 요시히사

항목내용
이름아마고 요시히사(尼子義久), 통칭 사부로시로(三郎四郎) — 아버지 하루히사도 쓴 아마고 적자의 통칭
날짜이 글의 월일은 모두 음력이다
생몰1540년(덴분 9년) – 1610년(게이초 15년) 8월 28일, 향년 71. 생년은 향년에서 역산한 값
부모아버지 아마고 하루히사, 어머니는 아마고 쿠니히사(尼子国久)의 딸로 전해진다
형제동생 아마고 토모히사(尼子倫久)·아마고 히데히사(尼子秀久) — 항복·유폐·만년을 끝까지 함께함
가독1561년 초(에이로쿠 3년 12월 24일 하루히사 사망 직후), 21세
본성갓산토다성(月山富田城, 현 시마네현 야스기시)
항복1566년 11월 21일 모리 측 혈판 기청문, 11월 28일 하성
유폐1566년 12월–1589년경, 아키 나가타(長田) 엔묘지(円明寺)
만년모리 가문 캬쿠분. 아키 시지(志道) 570석 → 1600년 이후 나가토 나고(奈古)
법호유린(友林)
묘소야마구치현 아부초(阿武町) 나고의 다이카쿠지(大覚寺) — 절 이름이 그의 법호에서 나왔다
가문조카 모토토모(元知)를 양자로 들임. 가명은 아마고 → 쿠사(久佐) → 사사키(佐々木)로 바뀌며 하기번(萩藩) 요리구미(寄組)로 막말까지 존속
통설 vs 재검증”참언에 속아 충신 우야마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에도 시대 이야기책이 출전이다. 동시대 편지에는 우야마 쪽의 역심이 토벌 이유로 나온다
아마고 하루히사 초상화 상반신 부분. 흰 옷을 입고 부채를 쥔 채 앉아 있다
아버지 아마고 하루히사의 초상화(부분, 야마구치현립 야마구치박물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요시히사 본인의 초상화는 공개된 것을 찾기 어렵다.

이 블로그의 인물 완전정리 시리즈는 지금까지 이긴 쪽 사람들을 다뤘다. 도쿠가와 가문을 받친 가신들, 도요토미 정권에서 영지를 받은 무장들이다. 아마고 요시히사는 처음으로 다루는 패배한 쪽의 당주다. 그는 가문을 잃었고 그 책임을 후대의 이야기꾼들에게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성을 내준 뒤에도 44년을 더 살았다. 같은 날 발행한 코즈키성 공방전 편에서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幸盛)와 아마고 카츠히사(尼子勝久)가 “아마고 재흥”을 걸고 싸우다 죽는 동안, 정작 그 가문의 마지막 당주는 아키의 절에 갇혀 있었다.

요시히사를 다룬 1차 사료는 생각보다 많다. 본인이 발급한 안도장(安堵状, 영지 소유를 인정해 주는 문서)과 칸조(感状, 전공을 치하하는 문서), 쇼군에게 낸 서약서, 모리 쪽이 그에게 보낸 서장이 『시마네현사(島根県史)』(1929) 같은 자료집에 원문으로 실려 있다. 반면 그를 어리석은 주군으로 만든 장면들은 대부분 사건 뒤 100년 넘게 지나 편찬된 책들에 나온다. 여기서는 두 층을 갈라 놓고 그 사이에서 실제로 확인되는 요시히사를 따라간다.

1. 가독 승계 — 아버지의 통칭을 물려받은 적자

1-1. 사부로시로라는 이름

요시히사는 1540년(덴분 9년) 무렵 태어났다. 생년이 직접 적힌 기록은 없고, 1610년 71세로 사망했다는 기록에서 역산한 값이다. 헤이본샤의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에는 생년이 아예 물음표로 표시돼 있다.1

통칭 사부로시로(三郎四郎)는 요시히사만의 이름이 아니었다. 아버지 하루히사도 젊은 시절 “사사키 아마고 사부로시로 아키히사(佐々木尼子三郎四郎詮久)“라고 서명한 기진장(寄進状, 신사나 절에 토지·재물을 바친다는 증서)을 남겼다. 사부로시로는 아마고 본가의 후계자가 대대로 쓰는 이름이었던 셈이다.2 어머니는 아마고 쿠니히사의 딸이라고 전해진다. 쿠니히사는 아마고 가문 최강의 무력 집단이던 신구토(新宮党)의 수장이었는데, 1554년 하루히사는 이 신구토를 숙청했다. 말하자면 요시히사가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을 친 것이다.2 코즈키성 공방전 글에 등장했던 인물로 훗날 재흥군이 옹립한 아마고 카츠히사는 이 숙청에서 살아남은 쿠니히사의 손자다. 하루히사가 사촌누이인 쿠니히사의 딸과 혼인했기 때문에, 카츠히사는 요시히사에게 외사촌이면서 증조부 아마고 츠네히사(尼子経久)를 함께 둔 6촌 형제가 된다.

1-2. 혼란 없는 승계

요시히사의 아버지 하루히사는 에이로쿠 3년 12월 24일(1561년 1월 9일) 밤 47세로 병사했다. 아마고가의 법호 기록에는 “한밤중에 병으로 죽었다(夜半ニ而病死)“고 적혀 있다.2 통설에 따르면, 아마고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던 하루히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가신단이 동요했고, 성 안에서 몰래 장례를 치를 만큼 다급했다. 여기에 친인척으로 이뤄져 있던 신구토를 숙청한 뒤였기 때문에, 기댈 일족도 많지 않은 젊은 당주 요시히사가 흔들리는 고쿠진들을 떠안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츠에시사(松江市史)』 편찬에 참여한 연구자 나카노 겐지(中野賢治)는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시히사는 하루히사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문서를 발급하고 있었고 후계자로서의 지위가 분명했기 때문에 하루히사의 죽음이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승계에 큰 혼란은 없었다고 본다.3 그리고 가독을 이을 때 요시히사의 나이는 21세로 당시를 기준으로 “어린 당주”라고 부를 나이는 아니었다. 몰래 장례를 치렀다거나 가신단이 동요했다는 이야기는 에도 시대 책들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동시대의 문서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확인되지 않는다.

당주인 요시히사 뒤에서 다른 누가 실권을 쥐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료도 없다. 당시 문서를 보면 요시히사가 문서 머리(袖)에 화압(花押, 이름을 도안처럼 흘려 쓴 서명)을 두고 그 아래에 부교닌(奉行人)들이 연서하는 “소데한 부교닌 연서 봉서(袖判奉行人連署奉書)“가 여러 건 확인된다. 하루히사 시대에 정비된 부교닌 합의 체제가 그대로 굴러갔다는 뜻이다. 나카노에 따르면 요시히사는 햇수로 4년의 짧은 재위 동안 가신과 신사·절의 영지를 인정해 주는 안도장을 대량으로 발급했다.3 실권 없는 허수아비 당주였다면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다만 이 안도장들은 훗날 뜻밖의 운명을 맞는데, 이 이야기는 6장에서 다룬다.

2. 운게이 화의와 이즈모의 붕괴 (1560–1565)

2-1. 화의는 하루히사 때 시작됐다

요시히사 치세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운게이 화의(雲芸和睦, 이즈모와 아키의 화의)다. 통설은 이렇다. 하루히사가 죽자 요시히사가 오랫동안 모리와 맞서 온 아버지의 노선을 버리고 쇼군의 중재로 모리와 화의를 맺었는데, 이때 이와미(石見)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이와미의 반모리 고쿠진이 고립되고 아마고의 신망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료에 나오는 순서는 조금 다르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1559년(에이로쿠 2년)부터 아마고와 모리 두 가문 간의 화의를 추진했다. 1560년 5월에는 쇼군의 사자 쇼고인 도조(聖護院道増)가 내려와 중재를 맡았고, 같은 해 11월 2일 요시테루는 “아마고 슈리다이부(尼子修理大夫)”, 곧 하루히사 앞으로 “지난 원한을 서로 거두고 쇼고인이 전하는 대로 동의하라”는 고나이쇼(御内書, 쇼군이 직접 내는 서장)를 보냈다. 나카노는 이 시점에 이미 모리와 아마고 간의 정전이 성립했다고 본다.4 하루히사가 살아 있을 때 이미 두 가문 간의 화의가 막부 주도로 굴러가고 있었고, 요시히사는 그것을 물려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2-2. 먼저 서약한 쪽, 끝까지 버틴 쪽

요시히사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측근인 오다치 하루타다(大館晴忠)·신시 하루이에(進士晴舎) 앞으로 낸 기청문(起請文, 신불에 맹세하는 서약서)이 남아 있다.

抑毛利元就此方半之儀、雖累年之確執候、以聖護院御門跡被成御下知之條、於自今已後令和平、無二可申談候、聊以搆表裏儀不可有之候

무릇 모리 모토나리와 이쪽 사이는 여러 해 반목해 왔으나, 쇼고인 몬제키를 통해 (쇼군의) 하명이 내려졌으니 이제부터는 화평하여 한마음으로 상의하겠습니다. 조금도 겉과 속이 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아마고 요시히사 기청문, 12월 14일(연도 표기 없음)5

이 문서에는 연도가 없다. 에이로쿠 3년이면 하루히사가 죽기 열흘 전이고, 4년이면 요시히사가 가독을 이은 이후인데 어느 쪽이 됐든 아마고 쪽에서는 서약서를 낸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모리 쪽에서는 확답을 안 하고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이로쿠 4년으로 추정되는 윤3월 12일 요시테루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보낸 고나이쇼에는 “이즈모와의 화목을 두고 모토나리·다카모토에게 재작년부터 일러 왔으나 결론이 나지 않는다”며 쇼고인을 다시 내려보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시마네현사』 편자도 이 문서를 근거로 “요시히사는 화평에 동의했는데 모토나리 혼자 동의하지 않았다”고 정리했다.5

2-3. “이와미 불간섭”이라는 조건

화의 조건으로 흔히 드는 “이와미 불간섭”은 어디서 왔을까. 이번에 확인한 쇼군 고나이쇼의 문언은 “이와미 방면의 일은 서로 원한을 거두라(石州表之儀、互止意趣)“다. 이 문언은 쌍방 정전이지, 아마고가 이와미에서 손을 뗀다거나 이와미 은산을 포기한다는 조문은 아니다. “불간섭 조건”은 역사학자 미야모토 요시미(宮本義己)가 1974년과 1978년 논문에서 이 화의가 실제로 성립했음을 밝히면서 내놓은 해석을 일본어 위키백과 등이 요약한 표현이다.6 미야모토의 원 논문은 이번에 열람하지 못해서 이 조건이 조문으로 존재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결과적으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1차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에이로쿠 5년(1562) 것으로 추정되는 정월 12일자 편지에서, 모리 쪽 중재역 세 사람이 아마고 사자가 전한 요시히사의 입장을 이렇게 옮겼다.

於義久無許容との事は事旧候…いかに義久堅申付候へ共、湯原・本城・牛太なと無心得候て下知にも不任為体候…此藝雲御和談事は天下への御請申たる事にて心底少も無表裏候

요시히사가 (후쿠야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요시히사가 아무리 엄하게 명해도 유하라·혼조·우시오 등이 분별없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형편이다. …이 이즈모·아키 화담은 쇼군께 약속드린 일이라 마음속에 조금도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 — 立雪·周瑞·恵心 연서장, 정월 12일(『모리가 문서』 수록)7

모리에 맞서 봉기한 이와미 지역의 고쿠진 후쿠야 다카카네(福屋隆兼)를 요시히사는 돕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이와미에 주둔한 아마고 가신 유하라(湯原)·혼조 츠네미츠(本城常光)·우시오(牛尾)는 당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요시히사는 가문 안조차 다스리지 못하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쇼고인이 더 머물며 중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걸 보면 요시히사는 화의를 깨뜨리고자 한 경솔한 당주가 아니고, 쇼군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다 현장 가신들을 통제하지 못해 곤혹스러워하는 당주라고 봐야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신 통제에 실패했다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은 증조부 츠네히사 이래 아마고 가문이 늘 안고 있던 약점이기도 했다.3

2-4. 파기를 선언한 것은 모리였다

에이로쿠 5년 6월 23일, 모토나리와 다카모토는 한 서장에서 화의 파기를 선언했다. 쇼군의 명령이 해마다 있었기에 참아 왔으나, 오토모(大友) 세력과 부젠 모지(門司)에서 싸우는 틈에 후쿠야가 다시 모반을 꾀한 것이 분명하니 “앞으로는 (화평을) 지킬 수 없다는 각오”라는 선언이었다.8 같은 서장에는 이와미의 성들이 잇달아 항복하거나 비워져 “이와미 일은 남김없이 뜻대로 되었다”고도 나와 있다. 이와미 은산을 지키던 혼조 츠네미츠가 이 무렵 모리에 투항했다.9

정리하면 화의 파기는 모리가 후쿠야의 봉기를 아마고 쪽 위반으로 규정하면서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요시히사가 후쿠야를 돕지 않겠다고 한 사실을 놓고 보면 “모리가 후쿠야 사건을 구실로 삼았다”고 읽을 여지가 있지만, 실제로 그랬는지 아니면 단순히 화의를 깨기 위한 구실이었는지는 해석의 영역이다.

2-5. 이즈모가 무너진 3년

화의가 깨지자 이즈모는 빠르게 무너졌다. 날짜는 모리 쪽 서장과 칸조로 꽤 촘촘하게 확인된다.

시기사건근거
1562년 6월혼조 츠네미츠 투항, 이와미 평정모토나리·다카모토 서장
1562년 7월미사와(三沢)·미토야(三刀屋) 등 이즈모 고쿠진 이반, 모토나리 이즈모 진입다카모토 서장
1562년 9월모토나리 “아마고는 토다 한 곳으로 몰렸다”모토나리 서장
1562년 11월 5일모리가 혼조 츠네미츠 일족을 시지(宍道) 진영에서 주살 → 일부 고쿠진이 아마고로 복귀칸조
1562년 12월분고의 오토모 소린이 요시히사와 연대 의사 표명킷카와가 문서
1563년 10월시마네반도 쪽 요충 시라가성(白鹿城) 함락10월 13일 합전 칸조
1565년 정월나카우미 연안 성들 함락, 해로 봉쇄나카노 정리

모리에 투항한 혼조를 모리가 다섯 달 만에 일족 전부 죽여버린 사건은 이즈모 지역의 고쿠진들을 다시 흔들었다. 쿠마노(熊野)·요네하라(米原)·마츠다(松田) 같은 집안이 이 일을 계기로 다시 아마고 측으로 돌아섰다.10 요시히사는 이 시기 충성하는 가신에게 가문을 다시 세워 주겠다고 약속하는 봉서를 내고, 신사에 농성 승리를 비는 기진장을 바쳤다. 1563년 5월 아사야마(朝山) 가문에게 준 봉서에는 “더욱 충의를 다한다면 아사야마 가문을 다시 세워 주겠다”는 뜻이 적혀 있다.11 오토모 소린은 “지금 요시히사와 서로 뜻을 맞춘다면 피차 오래 평온할 것”이라며 모리의 배후를 흔들 연대를 제안했다.10 이런 것들을 보면 요시히사는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외교에서 손을 뗀 당주는 아니었다.

3. 갓산토다성 농성 — 성 안의 요시히사

3-1. 총공격과 병량 봉쇄

1565년(에이로쿠 8년) 4월, 모리군은 갓산토다성을 세 방면에서 공격했다. 통설에 따르면 정면 미코모리구치(御子守口)는 모토나리, 남쪽 시오야구치(塩谷口)는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북쪽 스가야구치(菅谷口)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맡았고, 성 쪽은 요시히사가 미코모리구치, 동생들이 나머지 입구를 지켰다. 다만 이 배치는 후대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믿을 만한 정도가 떨어지는데, 1차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모리군이 4월에 토다 주변 보리를 베어 가며 공격하다 28일 본진으로 물러났다는 사실 정도이다.12

갓산토다성 그림지도. 산 위의 성곽과 기슭의 성하 마을, 그 앞을 흐르는 강이 그려져 있다
갓산토다성 그림지도(복제품, 야스기시립역사자료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원도의 제작 연대는 확인하지 못했다. 산 위의 성곽과 기슭의 성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후 모리는 무력으로 성을 함락시키는 대신 굶기는 쪽을 택했다. 해로와 육로를 막아 보급을 차단하자 성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이 늘었다. 모토나리는 1566년 6월 28일 서장에 이렇게 썼다.

爰元之儀、近日者從富田五拾人百人充切々被退候間可心安候

이쪽 사정은, 근래 토다에서 50명, 100명씩 끊임없이 빠져나오고 있으니 안심하라. — 모리 모토나리 서장, 6월 28일(『하기한 바츠에츠로쿠』)13

모리 쪽에서 쓴 『온코시키(温故私記)』와 『요시다 모노가타리(吉田物語)』에는 모리가 처음에는 도망쳐 나오는 자를 여자·아이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다가, 나중에는 “성에서 나오는 자는 무사히 보내 준다”는 고찰(高札)을 세워 방침을 바꿨다고 나와 있다. 처음에 탈주자를 죽인 것은 성 안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겁을 줘 병량을 빨리 떨어지게 하려는 의도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18세기 초 모리 쪽 기록에만 나오는 이야기고, 1차 사료로 확인되는 내용은 “탈주자를 대거 받아들였다”는 정도뿐이다.14

3-2. 문서가 보여주는 농성 중의 당주

농성 중 요시히사가 무엇을 했는지는 후대 기록보다 그가 직접 낸 문서에서 더 잘 드러난다.

갓산토다성 혼마루 터에서 내려다본 이이나시강 유역의 히로세 마을과 건너편 쿄라기산
갓산토다성 혼마루에서 바라본 히로세 마을과 쿄라기산(Reggaeman 촬영, CC BY-SA 3.0). 농성하던 요시히사가 보던 적진 쪽 풍경이다.

1566년 5월 24일, 성의 한 입구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모리 쪽 기록에도 같은 날 교전이 있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요시히사는 그날 바로 칸조를 썼다. “오늘 적이 움직였을 때 마츠오나카우네(松尾中壠)에서 하치야(鉢屋)의 카모 야사부로가 싸운 것이 기특하다는 뜻을 전하라”는 짧은 문서다. 교전 당일에 발급된 칸조이므로 요시히사가 성 안에서 전투를 보고받고 포상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15

연도가 적히지 않은 6월 22일자 서장에서는 히노미사키(日御碕) 신사의 검교가 보내 준 병량미 100표(俵)와 상선 3척에 감사한다. “병량미 원조로 100표를 보내 주니 매우 기쁘다. 특히 상선 3척을 돌려 보내 주니 그 성의가 바라던 바이다.” 『시마네현사』 편자는 이 문서를 농성하던 시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모리의 봉쇄를 뚫고 바다로 식량을 운반하려는 시도를 당주가 직접 감사를 표한 기록이다.15 농성 중에도 그는 공을 세운 신직과 가신에게 옛 영지를 돌려주거나 신주직을 안도하는 봉서에 소데한을 찍었다.

이 문서들이 요시히사의 전술 능력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1차 사료 속 요시히사는 “성 깊숙이 틀어박혀 총신과 총희에게 둘러싸인 주군”이라는 후대 기록의 묘사와 달리, 포위된 성 안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당주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우야마 히사카네 주살 — 후대 이야기책과 50일 뒤의 편지

4-1. 후대 이야기책의 줄거리

요시히사를 암군으로 만든 일화는 거의 하나다. 에도 시대 책들에 나오는 줄거리는 이렇다.

농성이 길어지자 가로 우야마 히다노카미 히사카네(宇山飛騨守久兼)는 자기 재산을 털어 다지마·단바·와카사에서 병량을 사들여 성에 넣고, 도망치려는 병사들을 붙잡아 두었다. 그러자 요시히사의 총신 오츠카 요사에몬(大塚与三右衛門)이 “우야마가 도망병을 붙잡아 두는 것은 성의 병력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모토나리와 내통해 유사시 배반하려는 음모”라고 참언했다. 요시히사는 이를 믿고 에이로쿠 9년(1566) 정월 초하루 우야마 부자를 죽였다. 이 일로 옛 가신들이 주군을 원망하며 잇달아 성을 빠져나갔고, 성은 무너졌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문헌들은 성립 시기가 제각각이다.

문헌편찬 쪽성립사건 후
『운요군짓키(雲陽軍実記)』아마고 옛 가신 카와모토 다카마사(河本隆政)자칭 1580년. 17세기 이후 서적명이 나오는 등 후대 가필 확실자칭 14년
『인토쿠키(陰徳記)』킷카와가(이와쿠니) 가로 카가와 마사노리(香川正矩)1660년94년
『요시다 모노가타리(吉田物語)』하기번사1702년136년
『온코시키(温故私記)』하기번사1710년 이전144년 이내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카가와 카게츠구(香川景継) 증보1712년 간기(실제 반포는 1717년이라는 설도 있음)146년
1911년 활자본 운요군짓키의 한 면. 아마고 가신의 모리 투항과 우야마 히다노카미가 참언을 당한 일을 다룬 장의 제목이 보인다
1911년 활자본 『운요군짓키』에서 「아마고 가신들이 모리에 항복하고 우야마 히다노카미·나카이 스루가노카미가 참언을 당한 일(尼子家臣降毛利 并宇山飛驒守中井駿河守被讒事)」 장이 시작되는 면(국립국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장 제목부터 우야마를 참언의 피해자로 규정한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후대의 책들끼리도 세부 내용은 맞지 않는다.16 『운요군짓키』에서 우야마는 토벌대가 저택을 에워싸자 자택에서 할복한다. 『인토쿠타이헤이키』에서는 정월 하례차 성에 올라왔다가 가신 야부키(屋葺)에게 붙잡히고 타치하라(立原)에게 세 번 찔려 죽는다. 요시히사를 가장 어리석게 그리는 장면, 곧 수급을 보고 웃으며 “우야마가 쌓아 둔 식량을 본성으로 옮겨 병량에 보탬이 되니 기쁘다”고 말하는 장면은 『운요군짓키』에만 있다.17 그런데 요즘 해설에서 흔히 보이는 “우야마가 병량을 사유화했다는 참언” 문구는 이번에 확인한 이 책들의 원문 어디에도 없었다. 이 책들에 나오는 참언은 어디까지나 “도망병을 붙잡아 둔 것은 내통의 준비”라는 내용뿐이었다.16

4-2. 사건 50일 뒤의 편지

이 사건을 직접 언급한 동시대 문서가 하나 있다. 에이로쿠 9년 2월 20일, 아마고 가신 네 사람이 미마사카(美作)의 동맹 고쿠진 에미(江見) 가문에게 보낸 연서장이다. 같은 날 요시히사도 에미 가문에게 영지의 세금 문제를 처리하는 서장을 보냈고, 네 사람의 편지는 그와 함께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態令啓達候、依宇山以張行傍輩共企逆心候、證據依不紛、飛彈父子就被討果、彼一類之者共闕落候、雖然各無二之被成覺悟、當城堅固候

일부러 알려 드립니다. 우야마의 전횡으로 동료들이 역심을 꾸몄고 그 증거가 명백하였기에 히다(노카미) 부자를 토벌하였습니다. 그 일족들은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두 마음 없는 각오를 하였으니 이 성은 견고합니다. — 타치하라 유키타카(立原幸隆)·혼다 이에요시(本田家吉)·야부키 유키카타(屋葺幸堅)·카와조에 히사모리(河副久盛) 연서장, 에이로쿠 9년 2월 20일(『미마사카 고칸슈(美作古簡集)』 수록)18

여기에는 오츠카도, 참언도 나오지 않는다. 토벌 이유는 “우야마의 전횡(張行)“과 “역심의 명백한 증거”다. 서명자 넷 가운데 타치하라·혼다·야부키는 후대 기록이 우야마를 죽인 사람으로 지목한 바로 그 인물들이다. 물론 가해자 입장인 사람들이 사건 발생 50일 후에 동맹에게 보낸 공식 설명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이 서장의 표현도 모호하다. 우야마 본인이 역모의 주모자라는 뜻인지, 우야마의 독단적인 행동이 동료 가신들의 이반을 불렀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이 서장에서 말하는 “역심”이 모리와 내통하는 것을 의미하는지조차도 문서만 봐서는 알 수 없다.

모리 쪽 문서도 하나 있다. 에이로쿠 12년(1569) 아마고 재흥군이 토다성을 에워쌌을 때, 성을 지키던 모리 쪽 조다이(城代, 주군을 대신해 성을 맡아 지키는 책임자) 아마노 다카시게(天野隆重)가 성 안에서 함께 싸운 우야마 젠고로(宇山善五郎)에게 서장을 보냈다. 젠고로는 죽은 우야마 히다노카미의 아들로, 아버지 사후 모리 쪽으로 넘어와 있었다. 서장에는 “부친 히다노카미 님께 모토나리가 여러 영지를 약속하셨던 바”라는 구절이 있다.19 모리가 우야마에게 영지를 약속한 적이 있다는 것을 모리 쪽 조다이가 문서로 인정한 셈이다. 적어도 우야마와 모리 사이에 모종의 접촉이 있었다는 뜻이니, 우야마를 참언에 억울하게 희생된 충신으로만 볼 수는 없게 된다.

4-3. 무엇이 확인되고 무엇이 남는가

1936년 『미마사카 고칸슈』에 주석을 단 야부키 긴이치로(矢吹金一郎)는 후대 기록과 이 편지가 어긋난다는 점을 짚고 이렇게 판단했다. 이 무렵 토다의 장병 가운데 적에게 항복하는 자가 적지 않았는데, 우야마가 정말 충신이었다면 참언이 있었다 해도 가신들이 단번에 그를 죽이기까지 했겠는가, “아마 네 무사의 서한 쪽을 믿어야 할 것”이라고. 다만 긴이치로는 요시히사의 잘못을 가리려고 우야마를 억지로 역신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남겨 두고 “잠시 정설을 기다린다”고 덧붙였다.18 『시마네현사』(1929) 편자는 여러 기록이 오로지 오츠카의 참언을 원인으로 드는 가운데 모리 쪽 『로오키(老翁記)』에만 우야마 자신의 행실 탓으로 나와 있다고 소개하고, 모토나리의 이간책이 참언의 구실이 된 것이 아니냐고 추정했다.20

현재 사료로 판정할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다. 1566년 2월 20일 이전에 우야마 히다노카미 부자가 아마고 쪽에 의해 토벌됐고, 아마고 정권은 이를 역심에 대한 처벌이라고 동맹에게 알렸다. 모토나리는 그 전에 우야마에게 영지를 약속한 적이 있다. 그것이 실제 내통 합의였는지, 모리가 일방적으로 벌인 이간 공작이었는지, 요시히사가 참언에 흔들린 것인지는 1차 사료로 가릴 수 없다. “충신이 간신의 참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줄거리는 사료비판을 통과한 사실이 아니라 후대 이야기책이 짠 줄거리다.

“우야마 일족이 몰살됐다”는 서술도 사실과 다르다. 일족 가운데 우야마 우쿄노스케(宇山右京亮)는 성이 떨어질 때까지 요시히사를 따랐고 아키까지 동행했다. 아들 젠고로는 모리 쪽에서 살아남아 영지를 받았다.21

우야마 사건 때문에 성이 무너졌다는 인과는 어떨까. 모토나리의 서장에 따르면 탈주는 1565년부터 이미 대량으로 이어졌고, 우야마가 죽고 다섯 달 뒤인 1566년 6월에도 하루 50–100명씩 계속됐다. 성은 우야마 사후 약 10개월 뒤에 떨어졌다. 사료를 시간 순으로 보면 우야마 사건은 장기간 이어진 봉쇄 상황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이탈의 흐름 속 한 장면에 가깝다. 나카노 겐지는 2021년 강연에서 에이로쿠 9년의 경과를 1차 사료로 정리하면서 우야마 사건을 아예 언급하지 않고, 함락의 원인을 봉쇄와 탈주로 설명했다.3

5. 항복 — 네 사람의 혈판 기청문

5-1. 목숨을 보장받은 개성

1566년(에이로쿠 9년) 11월 21일, 모리 모토나리·고바야카와 다카카게·킷카와 모토하루·모리 테루모토 네 사람이 피로 화압을 찍은 기청문을 요시히사 삼형제 앞으로 보냈다.

今度和談之儀、至藝州以可有御下向之旨令入眼候、殊更對此方自今以後不可有御惡心之由、慥承知仕候、然上者於御身上一切不可有聊爾候

이번 화의에 따라 아키로 내려가시기로 결정되었습니다. 특히 이쪽에 대해 앞으로 악심을 품지 않으시겠다는 뜻을 확실히 받았습니다. 그러한 이상 신상에 대해 일절 함부로 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 모리 모토나리 등 4인 연서 혈판 기청문, 에이로쿠 9년 11월 21일21

26일에는 모리 중신 세 사람이 같은 취지의 기청문을 따로 냈고, 테루모토는 같은 날 “요시히사는 오는 28일 하성하기로 정해졌고 곧 아키로 내려갈 것”이라고 썼다. 다카카게는 28일 “오늘 요시히사가 하성했다”고 알렸다.21 11월 21일을 “항복한 날”로 적는 자료가 많은데, 21일은 기청문을 받은 날이고 성을 나온 날은 28일이다. 『운요군짓키』와 『인토쿠타이헤이키』에 나오는 7월 6일 개성설은 이 문서들과 맞지 않아 『시마네현사』 편자가 이미 오류로 판정했다.

모리 모토나리 초상화 상반신 부분. 가문 문양이 들어간 갈색 옷을 입고 에보시를 썼다
모리 모토나리 초상화(부분, 모리박물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요시히사 삼형제의 목숨을 보장한 기청문 네 서명자 가운데 첫 번째다.

후대 기록과 『시마네현사』에는 요시히사가 “나 혼자 할복할 테니 성 안 사람들을 살려 달라”고 청했고, 모리 가신들은 삼형제와 주요 가신의 할복을 주장했으나 모토나리가 “큰 적을 몰아붙여 목숨을 청해 올 때는 살려 주는 것이 궁시(弓矢)의 법”이라며 삼형제를 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후대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고 당대의 1차 사료로는 확인되지 않는다.22 1차 문서에 나오는 조건은 “아키로 내려간다”와 “신상에 해를 가하지 않는다” 두 가지뿐이다.

5-2. 끝까지 남은 113명

아마고 후손 집안에 전해진 『아마고가 구기(尼子家旧記)』에는 “에이로쿠 9년 11월 28일 운슈 토다 하성까지 따른 자들”의 명부가 있다. 시분(士分, 아시가루나 하인이 아닌 정식 무사 신분) 이상이 114명이다. 그중 한 명은 포위 중 미마사카에 파견돼 있었으니 실제로 성을 함께 나온 사람은 113명이고, 여기에 승려 23명이 더해진다.21 탈주가 하루 수십 명씩 이어지던 성에서 이만큼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이들 대부분은 아키까지 갈 수 없었다. 이즈모 서쪽 키즈키(杵築)에서 요시히사는 따라온 옛 가신들과 헤어졌다. 이 무리에는 훗날 재흥군을 일으킨 야마나카 유키모리와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久綱)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인토쿠타이헤이키』와 아사야마 가문 계보에는 요시히사의 정실(오미의 교고쿠 가문 딸로 전해진다)도 이곳에서 억지로 남편과 헤어져 출가했다고 나와 있다. 반면 아마고 후손가의 기록은 그녀가 개성 이틀 전에 죽었다고 적어, 『시마네현사』 편자도 “더 연구가 필요하다”며 판단을 미뤘다.23

모리 쪽에서 쓴 『인토쿠타이헤이키』는 이 호송 장면을 헤이케의 도읍 함락에 빗대어 슬프게 그린다. 시마네대학의 다나카 노리오(田中則雄)가 지적한 대로, 승자 쪽 편찬물이 패자를 조롱하지 않고 “비운의 패자”로 그린 것이다.24

6. 엔묘지 23년 — 갇힌 당주, 지워진 당주

6-1. 목책을 두른 절

키즈키를 떠난 요시히사 삼형제는 이즈모의 타기(田儀), 이와미의 카와이·이즈하(河井·出羽), 아키의 요코타(横田)를 거쳐 1566년 12월 14일 아키 나가타(長田)의 엔묘지(円明寺)에 닿았다.25 모리의 본거지 요시다(吉田)에서 1리 남짓 떨어진 곳이다. 이 절은 나가타 영주 나이토(内藤) 가문의 기원사였고 현재 절터 일대는 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시(安芸高田市)의 시 지정 사적이다.26

감시를 맡은 나이토 가문 쪽 기록 『바이세츠 오보에가키(梅雪覚書)』에는 절을 어떻게 고쳤는지 적혀 있다.

圓明寺と申寺を御宿所に普請申付、壁かうし、所々に矢藏申付候、門より五間置しやくをふりやらいを付候、又五間置しやくを振やらいを付申候由

엔묘지라는 절을 (아마고 형제의) 숙소로 고치게 하여, 벽에는 격자를 대고 곳곳에 망루를 세우게 했다. 문에서 5간 떨어진 곳에 목책을 두르고, 다시 5간 떨어진 곳에 또 목책을 둘렀다. — 『바이세츠 오보에가키』(『시마네현사』 인용)27

감시 책임자는 나가타 영주 나이토 모토야스(内藤元泰)였다. 모리 쪽은 그 대가로 나이토에게 출진과 여러 공역을 면제했다. 모토나리·테루모토, 킷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각각 감시역을 따로 보냈는데, 동시에 “세 사람을 후하게 대우하라”는 지시도 함께 내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세 형제가 각기 다른 방에 있다가 나중에 한곳에 모였다. 7년쯤 지나자 모토야스가 “오래 절에 갇혀 있어 울적할 테니 사저로 불러 기분을 풀어 드리자”고 청해 해마다 두 번 나이토 사저에 초대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 1582년(덴쇼 10년) 무렵에는 모토야스의 직접 감시를 풀고 위사(衛士) 14명이 지키는 체제로 바뀌었다.27 『바이세츠 오보에가키』는 감시한 쪽 가문이 뒤에 정리한 기록이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각색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감시의 수위가 차츰 느슨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6-2. “당가는 이미 단절됐다”

요시히사가 갇혀 있던 1569년,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은 아마고 카츠히사를 받들고 이즈모에 상륙했다. 재흥군이 한때 이즈모 대부분을 되찾은 이 전쟁은 코즈키성 공방전 편에서 다뤘다. 여기서는 재흥군이 요시히사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본다.

붉은 칠을 한 2층 누문과 돌계단이 있는 히노미사키 신사 입구
이즈모 서쪽 끝 히노미사키 신사의 누문(Naokijp 촬영, CC BY-SA 4.0). 지금의 사전들은 17세기 전반 에도 막부의 명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요시히사는 이 신사에 농성 승리를 비는 기진장을 바쳤고, 7년 뒤 재흥군은 같은 신사에 "당가 단절"을 적은 기진장을 바쳤다.

그해 9월 카츠히사가 히노미사키 신사에 바친 기진장과 유키모리 등 네 사람이 붙인 부서(副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毛利一族之者共就當國亂入、當家斷絶之以來三四ヶ年

모리 일족이 이 나라에 난입하여 당가가 단절된 지 3–4년이 되었다. — 야마나카 유키모리 등 4인 연서 부서, 에이로쿠 12년 9월 15일28

재흥군에게 아마고 가문은 요시히사가 성을 내주고 이즈모를 떠난 순간 이미 끊긴 것이었다. 살아 있는 전 당주는 구출하거나 받들 대상이 아니었다. 나카노 겐지는 그 이유를 재흥군이 발급한 안도장에서 찾는다. 카츠히사가 옛 영지를 다시 인정해 준 계목안도(継目安堵) 23건 가운데 요시히사의 안도장을 근거로 삼은 것은 한 건도 없다. 거의 모두 “하루히사 때처럼”, “하루히사의 판형(判形)대로”였다. 이즈모 타이샤의 한 신관 가문은 하루히사와 요시히사의 안도장을 모두 갖고 있었는데도 재흥군 쪽에 하루히사 판형을 근거로 문서를 고쳐 달라고 요구해 관철했다. 나카노의 해석은 이렇다. 이즈모의 여러 세력은 직전 당주 요시히사 시대가 아니라 하루히사 시대의 질서가 돌아오기를 바랐고, 재흥군은 그 지지를 얻으려고 요시히사의 존재를 지울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28

재흥군과 유폐된 요시히사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1차 사료는 없다. 19세기 한문 사서 『이즈모 시시(出雲私史)』에는 코즈키성이 떨어질 때 카츠히사가 유키모리에게 “때를 얻거든 나가타 님(요시히사)을 받들어 재흥을 꾀하라”고 유언했다고 나오지만, 사건 뒤 200년 넘게 지나 나온 이야기라 전승 수준으로만 다뤄야겠다.29 옛 가신들이 가문을 되살리려 목숨을 걸던 10년 동안, 그 가문의 마지막 당주인 요시히사가 적군인 모리의 감시를 받는 목책 안에서 그 소식을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6-3. 세 형제가 울며 내준 칼

유폐가 끝나 갈 무렵의 일화가 하나 있다. 모리 쪽은 아마고가 대대로 전해 온 명도 쿠니유키(国行)를 보고 싶어 했다. 요시히사는 “토다성에 두고 왔다”며 두 번이나 내놓지 않았다. 감시역 나이토 쪽이 테루모토의 서장을 받아 와 보여 주자, 그제야 칼을 꺼냈다. 『바이세츠 오보에가키』에는 그 장면이 이렇게 나와 있다. “형제 세 분이 칼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며 건네셨다(御兄弟三人御覽被成御泪をながされ刀を御渡し被成).”30

6월 15일자 서장에서 테루모토는 “이번 상경에 즈음하여 (쿠니유키) 칼을 보내 주셨다. 이 칼은 명물인 데다 대대로 비장해 오신 것이니 그 각별한 후의는 말로 다할 수 없다. 결코 잊지 않겠다”고 썼다. 수신인은 “요시히사 님께(義久参御宿所)“로, 격식을 갖춘 서식이다. 테루모토의 상경을 계기로 삼았으므로 1588년(덴쇼 16년)의 일로 보인다. 테루모토는 뒤에 이 칼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30

같은 기록에는 요시히사가 칼의 존재가 새어 나간 것을 가로 오니시 쥬베에(大西十兵衛)의 누설 탓이라 의심해 그를 직접 베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리 쪽은 문제 삼으려 했으나 나이토 쪽의 진언으로 불문에 부쳤다.30 몰락한 주군을 끝까지 따라온 가신을 손수 벤 이 이야기는 요시히사의 성정에 대해 좋은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이 역시 감시하던 쪽의 기록이라는 한계는 감안해야 한다.

인터넷에서는 “요시히사가 가보 명도를 바친 대가로 유폐에서 풀려났다”는 서술을 자주 볼 수 있다. 칼을 바친 때와 유폐가 풀린 때가 겹치는 것은 맞지만, 칼이 석방의 대가였다고 적은 사료는 없다.

7. 캬쿠분 유린 — 나고의 만년과 이어진 가문

7-1. 570석의 캬쿠분

『시마네현사』에 인용된 『바이세츠 오보에가키』에 따르면, 1588년 나이토 모토야스가 요시다로 가서 “이제 천하가 태평하니 요시히사 형제를 편히 살게 해 드리자”고 청했다. 테루모토는 이를 받아들여 아키 시지(志道)의 네노타니(根ノ谷)에 집을 짓게 하고 형제를 옮겨 살게 한 뒤 570석을 주었다. 현지 안내판과 나카노 겐지의 강연 자료에는 형제가 풀려난 것이 1589년(덴쇼 17년)이라고 나와 있는데, 1588년에 청원이 있었고 이듬해 옮겨 갔다고 보면 두 기록이 모두 들어맞는다.31 나이토의 감시하에 갇히게 된 1566년 12월로부터 23년 만이다.

이때부터 요시히사는 모리 가문의 캬쿠분이 됐다. 가신이 아니라 손님으로 대우받는 신분이다. 1929년 『시마네현사』 편자는 모리의 방침을 “안으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겉으로는 주의를 기울여 우대하고 캬쿠분으로 다루어 그 재흥의 뜻을 누그러뜨렸다”고 요약했다.32 군역은 동생 토모히사가 맡았다. 『시마네현사』에는 요시히사가 병약해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때 토모히사가 대신 나갔다고 나와 있다. 토모히사는 조선에서 부상을 입었고 세키가하라 때는 오미의 오츠 쪽을 지켰다.32 요시히사 본인이 조선이나 세키가하라에 나갔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법호 유린(友林)을 언제부터 썼는지는 자료마다 다르다. 『시마네현사』에는 1566년 성을 열고 항복하면서 출가했다고 나와 있고,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나가토의 한 절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나와 있다. 1598–1600년 무렵으로 추정되는 모리가 분한장(分限帳)에 이미 “쿠사 유린(久佐友林)“이라는 이름이 보이므로, 적어도 세키가하라 전부터 유린으로 불렸다고 보는 편이 안전하다.33 이 이름 앞의 “쿠사(久佐)“는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7-2. 나고에서 세운 아버지의 공양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패한 서군의 총대장을 맡았던 모리 가문의 영지가 스오·나가토 두 지역으로 줄어들자, 요시히사 형제도 따라서 나가토로 옮겼다. 모리 쪽 지행 목록에는 “유린 몫 아부군 나고(奈古) 758석여, 즈이칸(瑞閑, 토모히사) 몫 같은 군 후쿠(紫福) 425석여, 간척지 대체지 108석여, 합계 1,292석여”라고 적혀 있다.34 흔히 “요시히사가 1,292석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는 형제 몫을 합친 숫자다.

나고로 옮기고 3년 뒤인 1603년(게이초 8년) 5월 11일, 요시히사는 아버지 하루히사를 위해 무언가를 세웠다. 아마고가의 법호 기록에 “에이로쿠 3년 12월 24일이 기일인 운슈 아마고 슈리다이부 하루히사 님. 게이초 8년 5월 11일 아마고 유린이 이를 세움”이라고 남아 있다.35 위패였는지 공양탑이었는지, 어디에 세웠는지는 기록에서 분명하지 않다. 아버지가 죽은 지 42년, 성을 내준 지 37년 뒤다. 여기서 그는 모리 쪽 명부에 오른 “쿠사”가 아니라 “아마고 유린”으로 서명했다.

7-3. 조카를 양자로

요시히사에게는 친자식이 없었다. 동생 토모히사의 장남 쿠이치로(九一郎)를 후계로 삼고 싶다고 테루모토에게 청했다. 테루모토가 출가한 뒤의 이름 소즈이(宗瑞)로 보낸 답장이 남아 있다.

御領分之儀無實子候故、瑞閑息九一郞殿ね御相續有度之由、御內存之通具承屆候、尤存候、不可有余儀候

영지의 일, 친자식이 없으니 즈이칸의 아들 쿠이치로께 상속시키고 싶다는 뜻을 속내 그대로 잘 알아들었습니다. 지당한 일이니 이의가 없습니다. — 모리 테루모토(宗瑞) 서장, 10월 2일(수신 友林)36

소즈이라는 서명으로 보아 1600년 이후, 요시히사가 죽은 1610년 이전의 문서다. 쿠이치로는 테루모토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아 모토토모(元知)가 됐다. 그는 이와미 은산의 번소(番所)를 맡았는데, 번소가 이와미의 쿠사(久佐)에 있어 “쿠사 쇼겐(久佐将監)“이라 불렸다.37 분한장의 “쿠사 유린”도 같은 흐름이다. 요시히사 대부터 이 집안은 공식적으로 “아마고”가 아닌 “쿠사”를 칭하고 있었다.

7-4. 다이카쿠지

요시히사는 1610년(게이초 15년) 8월 28일 나고에서 죽었다. 71세였다. 한 해 전인 1609년에는 막내 히데히사가 먼저 나고에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법호는 다이엔 신카쿠 다이코지(大圓心覺大居士)다.32 요시히사가 묻힌 나고의 절은 본래 코오지(光応寺)였는데, 요시히사가 죽은 뒤 그의 법호를 따 다이카쿠지(大覚寺)로 이름을 바꿨다.38 본당 뒷산에 요시히사의 묘로 전하는 보협인탑이 있고, 앞쪽 석책에 아마고 가문의 카몬(家紋)인 네모 매듭 무늬(平四つ目結)가 새겨져 있다. 이 묘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경내에서 야마구치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커다란 향나무 한 그루다.38

동생 토모히사는 1623년 78세로 죽었다. 양자 모토토모는 그보다 한 해 앞선 1622년에 죽었고 가문은 모토토모의 양자 나리야스(就易)에게 넘어갔다.

7-5. 쿠사에서 사사키로

가명(家名)이 “사사키(佐々木)“로 바뀐 것은 나리야스 대다. 1624년 모리 히데나리(毛利秀就)가 준 판물(判物, 화압을 찍어 내린 문서)에서 그는 “쿠사 마고사부로(久佐孫三郎)“였고, 1634년 문서에서는 “사사키 마고사부로”였다.39 아마고 가문은 본래 우다 겐지(宇多源氏) 사사키 가문 교고쿠 계통이므로, 사사키는 본성(本姓)으로 돌아간 이름이다. 왜 이때 바꿨는지 밝힌 사료는 찾지 못했다. 1942년에 나온 한 전기는 아마고라는 성으로 모리에 대대로 신속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풀이했지만, 이는 후대의 해석이다.39

사사키가는 하기번의 요리구미(寄組, 번의 상급 가신 계층)에 속했다. 녹은 1625년 900석으로 줄었다가 1691년 개간 석고를 더해 1,034석여로 고정됐다. 번 안에서 유일하게 영지의 상납미를 모두 흰쌀로 받는 특례를 누렸고, 이 대우는 막말까지 이어졌다고 『시마네현사』는 전한다.32 오니시·츠모리·치카라이시·야마나카 네 가신 집안도 하기로 따라와 살며 이 집안을 섬겼다.

7-6. 남은 문서

이 집안은 가문의 기록도 지켰다. 요시히사가 받은 모리 4인의 혈판 기청문, 테루모토의 칼 사례 서장과 양자 승인 서장, 요시테루가 하루히사에게 보낸 고나이쇼, 츠네히사·하루히사 시대의 문서들이 “사사키 문서”로 전해졌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가 1916년과 1937년 두 차례 당시 당주의 집에서 이 문서군을 조사해 237점의 영사본을 만들었다. 원본은 지금 행방을 알 수 없지만 영사본 덕분에 내용은 모두 남았고 1999년 시마네현 고대문화센터가 『센고쿠 다이묘 아마고씨가 전한 고문서: 사사키 문서(戦国大名尼子氏の伝えた古文書―佐々木文書―)』로 간행했다.40 이 글에 인용한 기청문과 서장 상당수가 여기서 나왔다. 성을 잃은 당주가 44년을 살아남아 지켜 낸 종이 뭉치가, 400년 뒤 그 가문을 다시 읽게 해 주는 셈이다.

출처

1차·준1차 사료 (대부분 자료집·현사를 통한 재인용)

  • 尼子義久 起請文·寄進状·感状·書状, 尼子義久 袖判 奉行人連署奉書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 足利義輝 御内書 (永禄3年 11月 2日 하루히사 앞, 閏3月 12日 小早川隆景 앞)
  • 立雪·周瑞·恵心 連署状 (『毛利家文書』 858)
  • 毛利元就·隆元·輝元, 小早川隆景 書状, 毛利 측 칸조 (『萩藩閥閲録』 등, 『시마네현사(島根県史)』·中野賢治 사료집 수록)
  • 大友宗麟 書状 (吉川家文書)
  • 立原幸隆·本田家吉·屋葺幸堅·河副久盛 連署状, 永禄9年 2月 20日 (『美作古簡集』)
  • 天野隆重 書状写, 永禄12年 (『萩藩閥閲録』 88)
  • 毛利元就 등 4인 連署 血判 起請文, 永禄9年 11月 21日 (佐々木文書)
  • 尼子勝久 寄進状·山中幸盛等 連署 副書, 永禄12年 9月 15日 (日御碕神社)
  • 毛利輝元 書状 (国行 사례, 養子 승인) (佐々木文書·『萩藩閥閲録』)
  • 「尼子家法号写」·『尼子家旧記』 (아마고 후손 佐々木家 전래)
  • 『梅雪覚書』 (감시역 内藤 가문 측 각서, 후대 정리)
  • 『毛利家 広島御時代分限帳』 (1598–1600년경 추정, 전사본 경유)

근세 편찬물 (성립 시기 명시)

  • 河本隆政, 『雲陽軍実記』 (자칭 1580년, 후대 가필)
  • 香川正矩, 『陰徳記』 (1660년) / 香川景継, 『陰徳太平記』 (1712년 간기)
  • 杉岡就房, 『吉田物語』 (1702년)
  • 国重政恒, 『温故私記』 (1710년 이전)
  • 『出雲私史』 (19세기)

현대 연구·자료집

  • 中野賢治, 「尼子家の『御一家再興』戦争と山中幸盛」, 島根歴史講座 강연 자료, 島根県, 2021
  • 中野賢治, 「尼子氏の滅亡と『御一家再興』」, 松江市史講座 레주메·사료집, 松江市, 2015
  • 長谷川博史, 「戦国時代の松江地域」, 松江市史講座 자료, 松江市, 2013
  • 長谷川博史, 서평 『戦国大名尼子氏の伝えた古文書―佐々木文書―』, 『史学雑誌』 109-12, 2000
  • 秋山伸隆, 「毛利元就が結ぶ石見銀山と嚴島神社」, 島根の世界遺産講座 자료, 島根県, 2020
  • 田中則雄, 「読本における尼子史伝」, 『山陰研究』 5, 島根大学, 2012
  • 宮本義己, 「足利将軍義輝の芸・雲和平調停」(1974), 「戦国大名毛利氏の和平政策」(1978) (본문 미열람, 요약 경유)
  • 矢吹金一郎 編, 『美作古簡集註解』 上, 1936
  • 島根県 編,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7巻(1928)·第8巻(1929)
  • 島根県古代文化センター 編, 『戦国大名尼子氏の伝えた古文書―佐々木文書―』, 1999
  • 『大日本史料』 第12編之30
  • 『出雲尼子史料集』 (사료 번호는 中野賢治 사료집을 통해 확인)
  • 勝田勝年 校注, 『尼子毛利合戦 雲陽軍実記』, 新人物往来社, 1978 (일본어 위키백과 재인용, 본문 미열람)
  • 今井尭 編, 『日本史総覧』 3, 1984 (일본어 위키백과 재인용, 생몰년)
  • 『佐々田懋翁伝』, 1942 (사사키 개성 이유에 대한 해석 인용)

공식·표준 참고자료

  • 코토방크(kotobank.jp) 「尼子義久」·「陰徳太平記」·「雲陽軍実記」 항목
  • 安芸高田市 교육위원회 「尼子三兄弟ゆかりの墓」·「旧円明寺跡」, 阿武町 「大覚寺」·「文化財一覧」, 山口県 관광 사이트 「大覚寺」
  • 일본어 위키백과 「尼子義久」·「雲芸和議」·「月山富田城の戦い」·「雲陽軍実記」·「尼子元知」·「尼子就易」·「尼子氏」 항목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D)

  • 日本史研究のための史料と資料の部屋 (분한장 전사), 山城攻城記 (현지 안내판 전사)

확인하지 못한 것

  • 하세가와 히로시(長谷川博史)의 『戦国大名尼子氏の研究』(2000)와 1995년 논문 「尼子氏直臣河副久盛と美作倉敷江見久盛」은 우야마 사건 연서장을 다뤘을 가능성이 높지만 본문을 열람하지 못했다. 요네하라 마사요시(米原正義)·후지오카 다이세츠(藤岡大拙)의 저작도 서지만 확인했다. 이들의 요시히사 평가는 이 글에 반영하지 않았다.
  • 우야마 사건이 성 함락의 결정적 원인이 아니라는 판단은 모리 쪽 서장의 탈주 기록을 대조한 필자의 해석이며, 이를 명시적으로 논증한 연구는 찾지 못했다.
  • 요시히사 명의로 만년에 발급한 문서는 찾지 못했다. 한국어로 요시히사를 따로 다룬 단행본이나 논문도 찾지 못했다.

Footnotes

  1. 코토방크 「尼子義久」(改訂新版 世界大百科事典, 日本人名大辞典+Plus); 일본어 위키백과 「尼子義久」 항목(今井尭 編 『日本史総覧』 3, 1984 인용). ↩

  2.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島根県, 1929), 「尼子家法號寫」와 하루히사 계보 서술(NDL 디지털 공개본); 같은 책 第7巻(1928) 수록 天文2年 尼子詮久 寄進状. ↩ ↩2 ↩3

  3. 中野賢治, 「尼子家の『御一家再興』戦争と山中幸盛」, 島根歴史講座 강연 자료(島根県, 2021). ↩ ↩2 ↩3 ↩4

  4. 中野賢治, 「尼子氏の滅亡と『御一家再興』」, 松江市史講座 레주메·사료집(松江市, 2015), 사료1(足利義輝 御内書, 『出雲尼子史料集』 987, 佐々木文書). ↩

  5.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尼子義久 起請文(12月14日)과 足利義輝 御内書(閏3月12日, 小早川隆景 앞). ↩ ↩2

  6. 宮本義己, 「足利将軍義輝の芸・雲和平調停」, 『国学院大学大学院紀要』 6, 1974; 同, 「戦国大名毛利氏の和平政策―芸・雲和平の成立をめぐって―」, 『日本歴史』 367, 1978. 두 논문 모두 본문을 열람하지 못했고 일본어 위키백과 「雲芸和議」 항목의 요약으로 확인했다. ↩

  7. 立雪·周瑞·恵心 連署状(永禄5年 추정 正月12日, 『毛利家文書』 858),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

  8. 毛利元就·隆元 書状(永禄5年 6月23日), 中野賢治 2015 사료집 사료3(『出雲尼子史料集』 1157). ↩

  9. 秋山伸隆, 「毛利元就が結ぶ石見銀山と嚴島神社」, 島根の世界遺産講座 자료(島根県, 2020); 中野賢治 2015 레주메. ↩

  10. 中野賢治 2015 레주메·사료집 사료4·5·7(毛利隆元 書状 7月23日, 毛利元就·隆元 書状 9月18日, 大友宗麟 書状 12月23日);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本城常光 주살 관련 칸조. ↩ ↩2

  11. 尼子義久 袖判 奉行人連署奉書(永禄6年 5月17日, 朝山氏 앞),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尼子義久 寄進状(永禄5年 9月26日, 日御碕神社 앞), 中野賢治 2015 사료집 사료6. ↩

  12. 毛利元就 書状(5月2日, 『萩藩閥閲録』),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일본어 위키백과 「月山富田城の戦い」 항목(배치·병력은 후대 기록 기반). ↩

  13. 毛利元就 書状(6月28日),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中野賢治 2021. ↩

  14. 国重政恒, 『温故私記』 권10(1710년 이전 성립); 杉岡就房, 『吉田物語』 권9(1702년). 모두 長周叢書(1898) 활자본, NDL 디지털 공개본. ↩

  15.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尼子義久 感状(永禄9年 5月24日, 立原源太兵衛 앞)과 尼子義久 書状(6月22日, 御崎殿 앞). ↩ ↩2

  16. 河本隆政, 『雲陽軍実記』(松陽新報社, 1911 활자본); 『陰徳太平記』 권40(1911 활자본); 『温故私記』; 『吉田物語』; 코토방크 「陰徳太平記」·「雲陽軍実記」 항목; 일본어 위키백과 「雲陽軍実記」 항목(勝田勝年 校注本의 성립 연대 비판 인용). ↩ ↩2

  17. 『雲陽軍実記』(1911 활자본) 「宇山飛騨守父子讒死」 장; 일본어 위키백과 「雲陽軍実記」 항목(勝田勝年 校注 『尼子毛利合戦 雲陽軍実記』, 1978, p.287의 권말 총평 인용). ↩

  18. 矢吹金一郎 編, 『美作古簡集註解』 上(1936), 卷之一 立原幸隆等 連署状(永禄9年 2月20日, 江見左衛門佐 앞)과 편자 주, NDL 디지털 공개본. ↩ ↩2

  19. 天野隆重 書状写((永禄12年) 9月28日, 宇山善五郎 앞, 『萩藩閥閲録』 88 井原孫右衛門), 長谷川博史, 「戦国時代の松江地域」, 松江市史講座 자료(松江市, 2013)에 전문 수록. ↩

  20.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우야마 사건 서술. ↩

  21.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毛利元就等 連署 起請文(永禄9年 11月21日), 福原貞俊等 起請文(11月26日), 毛利輝元 書状(11月26日), 小早川隆景 書状(11月28日), 『尼子家旧記』 하성 명부. 우야마 젠고로의 이후 행적은 각주 20의 자료. ↩ ↩2 ↩3 ↩4

  22. 『温故私記』 권10;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항복 경위(후대 기록 인용). ↩

  23.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키즈키 이별, 정실에 관한 『陰徳太平記』·朝山氏系図·佐々木家 기록 대비). ↩

  24. 田中則雄, 「読本における尼子史伝」, 『山陰研究』 5, 島根大学法文学部山陰研究センター, 2012. ↩

  25. 中野賢治 2021. ↩

  26. 安芸高田市 교육위원회, 「尼子三兄弟ゆかりの墓」·「旧円明寺跡」 시 사적 안내. ↩

  27.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梅雪覚書』 인용과 毛利輝元 書状(内藤元泰 앞 공역 면제) 등. ↩ ↩2

  28. 中野賢治 2021;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尼子勝久 寄進状과 山中幸盛等 連署 副書(永禄12年 9月15日, 日御碕神社). ↩ ↩2

  29. 『出雲私史』,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인용. ↩

  30.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梅雪覚書』와 毛利輝元 書状(6月15日, 義久 앞, 佐々木家文書). ↩ ↩2 ↩3

  31.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梅雪覚書』 요약); 中野賢治 2021; 広島市 安佐北区 白木町 志路 尼子屋敷跡 현지 안내판(山城攻城記 블로그 전사, 신뢰도 낮음). ↩

  32.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요시히사·토모히사 후일담, 모리의 대우 방침, 사사키가 특권). 이 가운데 “병약” 서술에는 전거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 ↩2 ↩3 ↩4

  33.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일본어 위키백과 「尼子義久」 항목; 『毛利家 広島御時代分限帳』(山口県文書館 소장, 「日本史研究のための史料と資料の部屋」 전사). ↩

  34.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지행 목록(『萩藩閥閲録』). ↩

  35.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尼子家法号写」 인용. ↩

  36.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수록 毛利輝元(宗瑞) 書状(10月2日, 友林 앞). ↩

  37. 일본어 위키백과 「尼子元知」 항목; 『大日本史料』 第12編之30(元和5年 陣立 「久佐將監組」). ↩

  38. 阿武町 공식 「大覚寺」·「文化財一覧」; 山口県 관광 사이트 「大覚寺」. ↩ ↩2

  39. 일본어 위키백과 「尼子就易」 항목(『萩藩閥閲録』 巻29 「佐々木舎人」 인용); 『시마네현사(島根県史)』 第8巻; 『佐々田懋翁伝』(1942). ↩ ↩2

  40. 島根県古代文化センター 編, 『戦国大名尼子氏の伝えた古文書―佐々木文書―』(1999, CiNii 서지); 長谷川博史, 서평, 『史学雑誌』 109-12(2000); 일본어 위키백과 「尼子氏」 항목.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