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된 히로시마성 천수각(2024년 촬영, CC BY 4.0) —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세키가하라 전공으로 얻었다가, 그 성벽을 둘러싼 분쟁으로 잃은 거성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1561–1624) — 시즈가타케 칠본창②

Q: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는 누구인가?

A: 오와리(尾張国)에서 통 만드는 일을 하던 후쿠시마 마사노부의 아들로 1561년 태어났다. 어머니 쪽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사촌이었다고 한다. 소년 시절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들어가 무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가장 먼저 창을 들이대고 적장의 목을 벤 공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전투의 일곱 용사 중 한 명으로 후대에 “시즈가타케 칠본창”이라 불린다. 임진왜란에 두 차례 종군한 뒤 히데요시가 죽고 정권이 흔들리자, 옛 동료 다이묘들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서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동군 선봉을 맡았다. 이 전공으로 서군 총대장의 옛 영지였던 아키·빙고 49만 8천 석, 히로시마성을 통째로 넘겨받아 다이묘로서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홍수로 파손된 히로시마성을 막부 허가가 내려오기 전에 수리했고, 조건부 사면으로 내려진 철거 명령마저 온전히 이행하지 않아 1619년 영지 대부분을 몰수당했다. 시나노의 산골 4만 5천 석으로 쫓겨나 5년 뒤 그곳에서 죽었다. 죽은 뒤에도 가신이 막부 검시관을 기다리지 않고 유해를 화장해버린 탓에 남은 영지마저 몰수되어, 다이묘 가문으로서 후쿠시마 가는 완전히 소멸했다.

한눈에 보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항목내용
이름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ふくしま まさのり)
아명이치마츠(市松)
생몰1561년(에이로쿠 4년) ~ 1624년 7월 13일(간에이 원년 6월 29일) — 향년 64
출신지오와리 아마군(尾張国海東郡, 현 아이치현 아마시)
부친후쿠시마 마사노부(福島正信) — 오케야(桶屋, 통 만드는 일)
히데요시와의 관계사촌(모계설이 통설이나 부계설도 제기됨 — 본문 1장 참조)
출사소년 시절 하시바 히데요시의 고쇼(小姓)로 발탁 (정확한 연도 미상)
초진1578년, 하리마 미키성 공격
대표 전공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일번창·일번쿠비, 5,000석 획득
통칭되는 별칭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七本槍)의 한 사람
조선 출병1592년 제5번대 주장, 1594년 거제도 송진포·장문포성 수비
세키가하라 이후 영지아키·빙고(安芸・備後) 49만 8천 석, 거성 히로시마성
몰락1619년 히로시마성 무단 수리를 이유로 개역, 시나노 다카이군·에치고 우오누마군 4만 5천 석으로 전봉
정실쇼운인(照雲院, 츠다 나가요시의 딸) — 산고로 사망
계실쇼센인(昌泉院, 마키노 야스나리의 딸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
후계적남 후쿠시마 타다카츠(1620년 생전 요절) → 삼남 마사토시(하타모토로 존속)
사인병사로 전해지나 확정되지 않음
최종 처분사후 무단 화장 사건으로 잔여 영지마저 몰수, 다이묘 가문 소멸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시리즈에서 다룬 가토 기요마사와 같은 시즈가타케 칠본창 출신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후 행로는 정반대로 갈라진다. 기요마사는 조선에서의 악명과 별개로 구마모토에서 신처럼 추앙받으며 생을 마쳤다.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 최대 수혜자 중 한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도쿠가와 체제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무너졌다.

시즈가타케 칠본창이라는 이름값, 히데요시와의 사촌 관계, 미츠나리와의 개인적 반목. 이 인물을 설명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통설들이다. 이 통설들을 하나하나 사료와 함께 대조하며 따라가보면 후쿠시마 마사노리라는 인간이 보이게 될 것이다.

1. 오케야의 아들, 히데요시의 사촌 — 출사와 시즈가타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1561년 오와리 아마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후쿠시마 마사노부는 통 만드는 일(桶屋)을 했다고 한다.1 사무라이가 되어 갑옷을 입고 창을 다루기 전에는 나무통을 짜던 집안 출신이었던 것이다.

다만 어머니 쪽 혈연이 이 집안을 평범하지 않게 만든다. 통설에 따르면 어머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백모뻘 되는 기노시타 가문(木下氏)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마사노리와 히데요시는 24살 터울의 사촌 사이가 된다.1 이 관계를 두고는 학설이 갈린다. 사학자 구로다 모토키(黒田基樹)는 그 모친이 실은 히데요시의 부계 친족이었을 것이라 본다. 마사노리가 시종(侍従)에 임관해 하시바(羽柴) 성을 하사받는 등 공가성(公家成) 다이묘급 대우를 받았다는 점이 근거다. 계보학자 기쿠치 히로유키(菊池浩之)는 이를 반박한다. 공가성이 부계에게만 주어졌다는 원칙은 근거가 없고, 다른 모계 사촌들은 단순히 시기가 맞지 않아 공가성을 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2 두 학설 중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확실한 것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히데요시의 조카가 아니라 사촌이라는 것이다.

소년 시절 하시바 히데요시의 고쇼(小姓, 근시)로 들어가 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인데 정확한 연도가 나와있는 사료는 없다. 같이 자랐다고 전해지는 가토 기요마사가 히데요시의 나가하마성 성주 취임(1573년) 무렵 고쇼가 되었다는 정황에 기대어 비슷한 시기로 추정할 뿐이다.1 1578년 하리마 미키성 공격이 그의 초진(初陣)이었다. 이건 사료에 확실하게 나왔는데,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3 미키성 공방전은 히데요시가 성을 겹겹이 에워싸 병량 보급을 끊는 지구전이었다. 이른바 “미키 말려죽이기(三木の干し殺し)“라 불린 싸움이다. 이렇듯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첫 실전은 포위와 보급 차단으로 버티는 지루한 소모전이었다. 그의 이미지인 화려한 돌격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시즈가타케 전투(1583년)까지 5년간의 행적은 사료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기록의 공백은 5년 후인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끝난다.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맞붙은 이 싸움에서 마사노리가 시바타 측 노장 하이고 이에요시(拝郷家嘉)에게 가장 먼저 창을 들이대고 목을 벴다고 여러 사료가 적는다. 일번창(一番槍)·일번쿠비(一番首)의 공이다.4 하이고는 여러 무장에게 포위당한 끝에 전사했으므로 최종 결정타를 마사노리 단독의 공으로 못박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4 이 전투에서 마사노리와 나란히 창을 들었던 이시카와 카즈미츠(石川一光)라는 무사는 정작 전사해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두 사람이 전투 전야에 말다툼을 벌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에도 중기 『조잔키단(常山紀談)』에 실려 있는데, 사건이 있고 150년 뒤에 편찬된 설화집이다. 마사노리가 카즈미츠의 공을 정직하게 히데요시에게 보고해줬다는 미담도 전해지지만 원출처가 확인되지 않아 사실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5

전투 직후 마사노리는 5,000석을 받아 다이묘 반열에 올랐다. 함께 활약한 다른 무사들이 각 3,000석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특별히 후한 포상이었다.4 이 전투로 이름을 얻은 일곱 무장을 후대는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七本槍)“이라 부른다. 다만 이 블로그에서 이미 몇 차례 지적했듯 “시즈가타케 칠본창”이라는 이름은 당대에 붙여진 것이 아니고, 당시에 포상을 받은 무장도 일곱 명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이들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사건에서 42년이 지난 1625년의 『호안 다이코기(甫庵太閤記)』다. 하지만 전투 직후 성립한 동시대 사료 『덴쇼기(天正記)』 중 「시바타 갓센키」에는 칸조(感状)를 받은 무사가 아홉 명 열거되어 있고, 여기에는 “시즈가타케 칠본창” 외에 이시카와 카즈미츠와 사쿠라이 이에카즈 두 사람이 추가로 나온다.6 두 사람이 후대에 빠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둘 다 히데요시의 직속 가신이 아니었고, 두 번째로는 둘 다 요절해 다이묘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굳어진 데는 어감(語呂)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6 하여튼 마사노리를 포함한 나머지 여섯은 훗날 저마다 다이묘로 출세했고, 그만큼 무용담이 재생산될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절해버린 두 사람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 시기 마사노리의 성격을 직접 증언하는 동시대 사료는 확보되지 않는다. 하지만 후대에 굳어진 이미지는 이노시시무샤(猪武者), 지략보다 용맹이 앞서 앞뒤 없이 달려드는 무장이다. 이 이미지는 아무래도 적장을 향해 곧장 돌격한 시즈가타케 전투에서의 한 번의 행동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1

2. 조선의 바다에서 — 갈라지는 무단파와 문치파

시즈가타케 이후 마사노리는 히데요시 정권 안에서 승진을 거듭해 오와리 기요스 24만 석(자료에 따라 20만 석)까지 이르렀다.7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제5번대의 주장으로 조선에 건너갔다. 이 부대는 제4번대의 뒤를 이어 부산에 상륙했고, 조소카베 모토치카·구루시마 미치후사 등과 함께 북상해 충청도 방면으로 진군했다.7

마사노리가 맡은 역할은 최전선 돌격보다는 병참 보전과 수송에 가까웠다.7 1594년 정월 그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갔다. 강화 교섭이 진행되는 가운데 남부 주둔이 결정돼 거제도의 송진포성·장문포성 수비와 보급을 맡았다. 그해 10월 조선 수군을 이끌던 이순신이 장문포를 공격했다(장문포 해전). 이때 마사노리는 스스로 군선에 올라 지휘하며 적선을 불태우는 등 반격해 이를 격퇴했다고 전한다.7 시즈가타케에서 앞장서 창을 들이대던 사람이 여기서는 보급선을 지키는 역할이었다고 하니 이노시시무샤의 이미지와는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정권 내부의 균열이 곧바로 드러났다.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한 부교(奉行) 그룹과 마사노리·가토 기요마사·구로다 나가마사 등 실전 경험이 많은 무장 그룹 사이에는 임진왜란 중 병참·논공행상을 둘러싼 갈등이 쌓여 있었다. 두 그룹을 조정하던 마에다 도시이에가 1599년 죽자 균형이 무너졌다. 다음 날부터 마사노리를 포함한 무장들이 미츠나리의 오사카 저택으로 몰려간, 이른바 칠장습격사건(七将襲撃事件)이 벌어졌다.8

이 블로그의 다른 글에서도 다룬 바 있듯이 “습격”이라는 표현부터가 에도기 편찬물이 정착시킨 통설일 가능성이 있다. 사건 당시의 1차 사료 『토키츠네쿄키(言経卿記)』에는 군사 충돌의 우려가 적혀 있을 뿐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은 나와있지 않다. 사학자 시라미네 준(白峰旬)은 실제로는 무력 습격이 아니라 미츠나리에 대한 소송이나 탄핵과 같은 정치적 공세였을 것이라고 본다.8

이 갈등을 무단파(武断派) 대 문치파(文治派)라는 이념 대립으로 설명하는 틀도 마찬가지다. 전후 역사학자 스즈키 료이치가 제창한 후대의 개념이고, 도요토미 정권 당대의 1차 사료로는 두 세력의 존재가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학계에 있다.8 마사노리와 미츠나리가 개인적으로 미워했다는 일화들이 있는가 하면, 후에 포로가 된 미츠나리를 마사노리가 매도했다는 버전과 위로했다는 버전의 이야기가 둘 다 전해진다. 여러 대중 사료 사이트도 “후세의 창작이 많아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고 인정할 정도인데, 아무튼 마사노리를 미츠나리의 원수로 그리는 이야기에는 사실보다 후대의 각색이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8

3. 사촌을 등지다 — 세키가하라의 선봉장

원한 이야기보다 훨씬 확실한 물증이 있다. 혼인이다. 1599년 마사노리의 양자 후쿠시마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복동생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양녀인 만텐히메(満天姫)와 혼인했다.9 이 혼사는 히데요시가 1595년 반포한 「御掟(온오키테)」 제1조를 위반했다. “여러 다이묘의 혼인에 관한 일은 [주군의] 허락을 얻은 뒤에 정할 것”9이라는 조항이다. 이 조항은 히데요시의 조카 히데츠구 숙청 이후 다이묘 간 혼인이 모반 준비로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만든 규정이다.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9월) 1년 전에 마사노리는 이미 이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이에야스 쪽으로 줄을 댔다. 따라서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에 즉흥적으로 전향했다는 서사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한 관계라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 계산은 이른바 오야마평정(小山評定)에서 겉으로 드러난다. 통설에 따르면 1600년 7월 25일 아이즈 정벌 중이던 다이묘들이 시모츠케 오야마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마사노리가 가장 먼저 나서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그로써 서군에 맞선 상경이 결정됐다. 그런데 이 평정이 실제로 열리기는 했는지를 두고 2012년 이후 시라미네 준과 혼다 다카아키(本多隆成)가 10년 넘게 논쟁을 이어왔다. 쟁점은 이에야스가 마사노리에게 보낸 서한의 날짜다. 시라미네는 7월 19일로 읽어 평정보다 엿새 앞서 지시가 이미 내려갔다고 본다. 혼다는 7월 24일, 곧 평정 전날로 읽어 통설에 부합한다고 본다.10 어느 쪽이 맞든 마사노리의 선택이 그 자리에서 내린 즉흥적 결단은 아니었다. 사전에 상당 부분 조율된 결과라는 정황은 그대로다.

1600년 8월 기후성 공략전에서는 이케다 데루마사와 선진을 다투었다. 9월 15일 세키가하라 본전에서는 약 6,000명을 이끌고 우키타 히데이에의 1만 7,000 대군과 맞붙었다. 개전 초반에는 아카시 젠토가 이끄는 우키타군 전위의 창 대형에 밀려 500미터를 후퇴하며 전사자 20~30명을 냈으나 마사노리가 직접 병사들을 독려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으로 돌아섰다. 킷카와 가문의 문서는 이때 우키타군의 전황을 “구구(区区, 통제되지 않고 혼란한 상태)“로 적었다.11

전후 논공행상에서 마사노리는 서군 총대장 모리 테루모토의 옛 영지, 아키·빙고 49만 8천 석과 그 거성 히로시마성을 통째로 받았다. 절대 증가폭(와타나베 다이몬의 집계로 약 29만 8천 석, 이봉 전 석고를 20만 석으로 볼 때의 계산이다)만 놓고 보면 도쿠가와 일문과 다른 몇몇 다이묘보다 낮은 9위다. 그래도 서군 총대장의 본거지를 그대로 넘겨받았다는 점 때문에 그는 세키가하라 최대 수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2

옛 주군의 가문인 도요토미를 등지고 이 자리에 오른 것을 마사노리가 훗날 후회했다는 일화도 있다. “천하를 팔아넘긴 것이 아닌가”, “3년 일렀거나 3년 늦었다”고 중얼거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1차 사료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 이야기가 나오는 출처는 단 하나뿐인데 그 출처조차 이 이야기가 소설적 각색일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13 극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후대의 상상에 가깝다고 봐야겠다.

4. 히로시마의 성주 — 통치자 후쿠시마 마사노리

히로시마에 입성한 마사노리는 즉흥적인 무장의 이미지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입국 이듬해인 1601년 가을까지 그는 영내 전역에 검지(検地)를 실시해 900여 개의 무라(村)를 새로 편성했다. 군부교(郡奉行)와 무라야쿠닌(村役人)을 앞세운 통치 체계와 연공 징수 제도도 이때 정비했다.14 히로시마성 주변 하천에는 대안(對岸)보다 높은 제방을 쌓아 성 쪽 침수를 막았다. 가마가리섬에는 계단식 선착장(雁木)을 축조해 항만 기능을 정비했다. 서국가도를 성 아래로 끌어들여 조닌 거주구를 확장하고 동서 두 곳에 시장을 세워 상업을 촉진하기도 했다.14 1603년에는 아키 국경 인근에 가메이성(亀居城)을 쌓기 시작했다. 영지를 빼앗아온 옛 주인 모리 가문을 막으려는 목적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서군 총대장의 옛 땅을 물려받은 다이묘가 이제는 도쿠가와 정권을 대신해 그 서쪽 경계를 지켰다.14 지행고 역시 1601년 49만 8천 석에서 개역 직전에는 51만 5천 석까지 늘었다는 기록이 있다. 새로운 밭을 개발하는 등 실질 생산력이 늘어난 결과로 보인다.14

이런 실무 기록을 보면 무예만 있고 지략은 없는 무장이라는 흔히 알려진 이미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노시시무샤의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일화는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닌다. 아침부터 술에 취해 있던 마사노리가 간언하는 가신에게 격분해 술기운에 할복을 명했다. 가신은 즉시 명을 따랐다. 술이 깬 마사노리는 그를 다시 찾다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오열하며 거듭 사죄했다고 한다.15 이 일화는 원출전이 확인되지 않고 일본의 역사 잡학 사이트에만 나오는 것으로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런데 가족 안에서는 실제로 확인 가능한 기록이 있다. 1607년 그는 양자 후쿠시마 마사유키를 “근래 난행을 저지르는 광질(狂疾)“이라며 막부에 고발해 유폐시켰고 마사유키는 이듬해 굶어 죽었다. 이 고발이 친아들 타다카츠에게 가독을 잇게 하려는 조작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16

두 차례에 걸친 오사카의 진(1614~1615년) 당시 마사노리는 에도성 유수역(留守居役)을 명받아 전장에는 나가지 못했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마사노리는 여전히 히데요시의 코쇼 출신 무단파 가운데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사카 편으로 마음이 기울까 우려했다는 해석이 있다.17

세상을 뜨기 얼마 전 병문안 온 마사노리에게 이에야스가 냉담하게 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아키로 돌아가시라. 쇼군가에 불복이 있다면 거리낌 없이 병사를 일으키셔도 좋다.” 그러자 마사노리는 “지금까지 봉공에 힘써왔음에도 그런 말씀을 들으니 참담하다”고 답했다는 이야기다.18 이 일화는 대중 사료에만 나와 신뢰도가 높지 않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죽기 직전까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경계했다는 정황은 여러 자료에서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다.

5. 큰 잔, 명창, 그리고 소문 — 쿠로다부시 속의 마사노리

이 일화 자체는 시간순으로 따지면 세키가하라나 히로시마 시절보다 앞선 사건이다. 다만 이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과정, 즉 문헌화·시가화·전국화를 거친 수용사(受容史) 전체를 한 덩어리로 봐야 이 인물에게 어떤 이미지가 어떻게 쌓였는지 드러나기 때문에, 연대순을 잠시 벗어나 여기서 다룬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라는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건 술자리에서의 일화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명으로 사자가 되어 후시미의 후쿠시마 저택을 찾은 모리 타헤에(母里太兵衛)에게 마사노리가 술을 강권했다. 구로다 가문에는 “사자로 가서는 술을 받아 마시지 말라”는 가훈이 있었다. 타헤에가 거듭 사양하자 마사노리는 “구로다 무사가 이 정도 술도 못 마시는 겁쟁이냐”는 취지로 도발했다. 그러자 타헤에는 태도를 바꿔 큰 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고, 그 대가로 그는 마사노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하사받았던 천하 3대 명창 중 하나 니혼고(日本号)를 얻어냈다는 이야기다.19

1867년 우타가와 요시이쿠가 그린 후쿠시마 마사노리 목판화
메이지 유신 직전인 1867년, 우타가와 요시이쿠가 그린 후쿠시마 마사노리 목판화. 사후 200년이 넘도록 용맹한 무장이라는 대중적 이미지가 확대·재생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일화가 언제 실제로 일어났는지부터 자료마다 편차가 있다. 1596년 정월이라 특정하는 자료가 있는가 하면, 조선 출병 휴전 중이라고만 두루뭉술하게 적은 자료도 있다.19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따져봐야 하는 건 이 이야기가 언제 처음 문헌에 나타났느냐다. 통상 최초로 지목되는 것은 구로다 가문의 공식 가보 『구로다 가보(黒田家譜)』다. 이 책은 유학자 카이바라 에키켄이 1671년 편찬을 시작해 1688년에 완성했다. 사건이 있었다는 1590년대 중반과는 최소 75~95년의 시차가 날 뿐만 아니라 구로다 가문에 유리하게 서술했을 가능성이 높다.19

이 일화가 오늘날 쿠로다부시(黒田節)라는 민요로 불리는 것은 또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의 일인데, 1822년 지쿠젠 구로다 번의 유학자 후타가와 소킨이 자신의 56세를 기념해 노랫말을 지었다. 이것이 번주에게 헌상되어 “지쿠젠 이마요(筑前今様)“라는 곡조로 불리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쿠로다부시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1928년이다. NHK 후쿠오카 방송국원 이노우에 세이조가 이 지역 곡조를 소개하면서였다. 지금 우리가 아는 가사는 그보다도 늦은 1942년 첫 음반화를 거쳐 1950년 재발매되면서 확정되었다.19 1590년대 어디쯤 있었다는 사건이 1688년에 글로 등장했다가, 1822년에 노랫말이 됐고, 1928년에 전국으로 퍼진 다음 1950년에 현재의 가사로 확정됐다. 300년 넘게 여러 편찬자와 매체를 거치며 켜켜이 쌓인 이야기인 것이다.

이 일화가 왜 하필 마사노리에게 붙었을까. 아무래도 술을 좋아하는 그의 이미지 때문인 것 같은데 그에게는 술과 얽힌 다른 일화들도 여럿 남아 있다. 병든 술친구 마츠다 사콘에게 단기로 달려가 문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가 하면 하치조섬에 유배된 우키타 히데이에가 쇼군가 헌상용 술 깃발을 보고 손을 흔들자 가신들이 몰래 한 통을 그를 위해 남겨두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마사노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5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하나하나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결은 비슷하다는 게 재미있다. 대주가에 다혈질이고, 그러면서 뒤늦게 눈물을 보이는 인정 많은 사람. 에도 시대 이래 대중들에게 기억되는 마사노리라는 인물은 이렇게 일관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6. 무너진 성벽을 수리하다 무너진 가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후쿠시마 마사노리 초상화(모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한 후쿠시마 마사노리 초상화. 원본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에 제작된 모사본(模本)이다.

1616년 또는 1617년(사료마다 연도가 엇갈린다), 큰 홍수가 히로시마성 혼마루·니노마루·산노마루와 석垣·야구라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18 1615년 반포된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는 “각 지방의 거성은 비록 수리(修補)라 할지라도 반드시 [막부에] 보고해야 한다”고 못박았다.20 마사노리 쪽은 실제로 로주 혼다 마사즈미에게 수리 신고서를 제출했다. 양측 서한으로 확인된다.21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오랫동안 통용된 설명은 혼다 마사즈미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제거하기 위해 신고를 고의로 묵살했거나 회신을 미뤘다는 쪽이다. 도쿠토미 소호의 『킨세이 니혼 코쿠민시(近世日本国民史)』 이래 학계의 일반적인 의견이 그래 왔다. 그런데 사학자 가사야 가즈히코(笠谷和比古)가 1차 사료를 직접 대조해 발표한 논문은 이 ‘음모설’을 채택하지 않는다. 그는 개역의 직접 원인을 “막부 정·부의 책모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 대부분 후쿠시마 측 행동의 미숙함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결론짓는다.21 실제 쟁점은 따로 있었다. 막부는 사면 조건으로 ‘혼마루 이외 전부 파괴’를 내걸었는데, 마사노리 쪽은 혼마루 수리분만 철거하는 데 그쳤다. 가사야는 이를 두고 “니노마루 이하를 파괴하면 혼마루만은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가능성을 짚는다. 후쿠시마 측이 “이 정도면 봐주겠지” 하고 오판한 것이다.21

1619년 이 결정이 내려질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미 죽고 없었고, 개역은 전적으로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단독 정권 아래에서 결정됐다.22 히데타다는 처음에 조건부 사면을 시도했다. 그러다 파괴가 “불충분(杜撰)“하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아키·빙고 영지 전체를 몰수하기로 했다. 에도의 다이묘들에게 병력을 소집시켜 마사노리의 저택을 포위하는 보여주기식 조치까지 취했다.18 마사노리 본인은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처분에 응했다. 처분 조건이던 아들 타다카츠의 에도 출두는 늦어졌다. 그 경위를 해명해야 할 자리에서 타다카츠 측은 “모든 것은 아버지 뜻대로(万事親次第)“라며 변론 자체를 거부했다.18 절차를 설명하고 협상하는 일에 이 가문은 유난히 서툴렀다.

아키·빙고 49만 8천 석은 시나노 다카이군과 에치고 우오누마군을 합친 4만 5천 석으로 줄어들었다. 약 91퍼센트의 감봉이다.23 학계는 직접 원인이 절차 위반과 그 사후 대응 실패였다고 보면서도, 그 결과가 도자마 다이묘 통제에 활용됐다는 점은 함께 인정한다. 원인과 결과를 나눠보는 절충적 해석이다. 몰수로 생긴 빈 땅에 막부 직할지나 신판·후다이 다이묘를 채워 넣어 쇼군 권력을 굳히는 것은 에도 초기 다이묘통제 정책의 흔한 수순이었다.24

7. 다카이노의 마지막 나날

전봉지는 시나노 다카이군 다카이노(高井野, 현 나가노현 다카야마무라)였다. 흔히 가와나카지마로 쫓겨났다고들 하는데, 다카이노는 가와나카지마 평야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산간지역으로 부정확한 표현이다.23 마사노리는 적남 타다카츠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해 ‘고사이(高斎)‘라는 호를 썼다. 이곳에서 머문 5년 동안에도 검지와 치수 공사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세부 사항은 1차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다.25

1624년 7월 13일, 마사노리는 다카이노에서 죽었다. 향년 64. 사인은 병사로 전해지나 확정된 것은 아니다.26 절차도 신고도 없이 제 판단대로 일을 처리하는 버릇은 죽는 순간에도 되풀이됐다. 막부의 검시역이 도착하기 전에 가신 츠다 시로베에가 독단으로 유해를 화장해버렸다. 다이묘가 죽으면 막부의 검시를 받아야 한다. 이 규정을 어긴 탓에, 1620년 타다카츠 사망으로 반납한 2만 5천 석을 뺀 뒤 남아 있던 영지 2만 석마저 몰수되었다.27

8. 남은 이야기들

시나노로 이봉된 후쿠시마는 이후 계속해서 무너져간다. 1620년 마사노리 생전에 적남 타다카츠가 병사하면서 에치고령 2만 5천 석을 막부에 반납했다. 1624년 마사노리가 죽은 뒤에는 화장 사건으로 잔여 2만 석마저 몰수돼 다이묘 가문으로서 소멸했다. 여기에 막내아들 마사토시가 3,112석 하타모토로 존속하다 후사 없이 죽어 가문이 한때 완전히 끊겼다.28 그러다가 타다카츠의 손자 대에서 가문이 재흥해 2,000석 하타모토로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했다.28

앞서 살펴봤듯 어린 시절 함께 히데요시의 고쇼로 자란 사이였던 가토 기요마사와 마사노리는 1599년 칠장습격사건에서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세키가하라 이후부터 기요마사가 죽은 1611년까지 두 사람이 어떻게 교류했는지 보여주는 사료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롭다.17

오사카 전투를 앞두고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병을 앓는다는 소식이 들리면 오사카성으로 문병을 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런 태도가 4장에서 본 이에야스의 경계심을 더 굳혔다는 해석이 있기도 하다.17 세키가하라에서 옛 주가인 도요토미를 등지고 정점에 오른 인물이 말년까지도 그 주가를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면, 이는 그 선택이 순수한 확신이 아니라 계산과 미련이 뒤섞인 결정이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일 수 있다.

근현대 학계의 시선도 이런 재조정을 거쳐왔다. 마사노리를 상세하게 다룬 평전(福尾猛市郎·藤本篤, 中公新書1491, 1999)과 개역 연구(白峰旬, 1999), 그가 직접 발급한 고문서를 실증적으로 검토한 기초연구(黒田基樹, 1998)가 나와 있다.29 무단파의 전형, 다혈질에 술버릇 나쁜 무장이라는 이미지는 오래됐다. 이미 메이지기 논문 제목(“福島正則の狂暴”, 1893년경)에서부터 반복돼 왔다.29 그러나 문서에 남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검지와 치수, 조카마치 정비 기록은 영지를 실제로 잘 다스린 그의 행정 능력을 보여준다. 히로시마시는 그의 400주기가 되는 2024년에 기념사업을 열었다. 무용만 앞세운 무장이 아니라 도시 인프라를 구축한 초대 번주로 그를 다시 본 것이다.29 한국어권에는 이 인물을 다루는 자료가 많지 않다. 한국어 위키백과 항목은 출처가 불충분하다는 경고가 붙은 스텁 수준이고, 단독으로 그를 다룬 한국어 단행본은 확인되지 않는다.30

출처

1차·준1차 사료

  • 『天正記(덴쇼기)』중「柴田合戦記(시바타 갓센키)」— 오무라 유코 편찬, 덴쇼기 성립 (시즈가타케 9인 칸조 기록)
  • 『柴田退治記』— 위키소스 수록 원문 (九人 열거 직접 확인)
  • 『甫庵太閤記』— 오제 호안, 1625년 성립 (“시즈가타케 칠본창” 초출)
  • 「御掟」(1595, 도요토미 히데요시 반포) 제1조 원문
  • 「武家諸法度」(元和令, 1615) 원문 — Wikisource
  • 福島正則書状(가사야 논문 인용, 元和4~5年) — 히로시마성 수리 관련 서한
  • 개역 신고장(改易申渡状) 일부 — 가사야 논문 인용
  • 『言経卿記』케이초4년 윤3월조 (칠장습격사건 관련 기록)
  • 『黒田家譜』— 카이바라 에키켄 편찬, 1671~1688년 성립 (쿠로다부시 일화 최초 문헌)
  • 『常山紀談』— 유아사 조잔 편찬, 에도 중기 (이시카와 카즈미츠 일화)

현대 연구자·학술서

  • 笠谷和比古,「徳川幕府の大名改易政策を巡る一考察(一)」, 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日文研)紀要 수록 — 개역 사건의 절차적 경위를 1차 서한으로 재구성한 핵심 논문
  • 白峰旬,「福島正則改易事件に就いての一考察」,『愛城研究報告』4号, 1999
  • 白峰旬, 오야마평정 실재 논쟁 관련 연구 (2012년 이후) — SYNCHRONOUS 대담 경유 소개
  • 本多隆成, 오야마평정 실재 옹호론 (시라미네 설과의 논쟁 상대)
  • 黒田基樹,「福島正則文書の基礎的研究」,『芸備地方史研究』210・211号, 1998
  • 黒田基樹, 『羽柴秀吉とその一族』, KADOKAWA (히데요시 혈연관계 부계설)
  • 菊池浩之, 『豊臣家臣団の系図』, KADOKAWA新書 (혈연관계 부계설 반박)
  • 福尾猛市郎・藤本篤, 『福島正則―最後の戦国武将―』, 中公新書1491, 中央公論新社, 1999
  • 瀬川秀雄,「福島正則の改易を論ず」,『史学雑誌』8編1・3・4号
  •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 다수 (세키가하라 전투 우키타군 격전, 논공행상 순위 분석)

공식·표준 참고자료

  • 코토방크(kotobank.jp) 「福島正則」 항목(『国史大辞典』등 표준 사전 통합)
  • 일본어·한국어 위키백과 각 「福島正則」・「賤ヶ岳の戦い」・「拝郷家嘉」・「石川一光」・「七将襲撃事件」・「文治派」・「武断派」・「御掟」・「満天姫」・「改易」・「黒田節」・「黒田家譜」・「母里友信」・「福島正之」 항목
  • 위키소스(ja.wikisource.org) 「柴田退治記」・「武家諸法度(元和令)」
  • 히로시마성 공식 사이트(hiroshimacastle.jp) 「福島氏の入国と改易」
  • 히로시마시 공식 「福島正則没後400年記念事業」
  • 기후 세키가하라 고전장 기념관(sekigahara.pref.gifu.lg.jp) 「福島正則コース」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D, 개별 각주에 표시)

  • 戦国ヒストリー(sengoku-his.com), 刀剣ワールド(touken-world.jp), 歴史人(rekishijin.com), 攻城団ブログ(kojodan.jp), BUSHOO!JAPAN, 月桂冠 문화 콘텐츠, ゆるりと戦国(yururito-sengoku.com), 酒豪列伝(sake.science), real-juku.jp, 歴史上の人物.com(colorfl.net), 渤海之狼 블로그(valhae.kr), ameblo.jp(구로다 모토키·기쿠치 히로유키 학설 대조 경유), Japaaan, WEB歴史街道(PHP研究所), 文春オンライン, 歴史の魅力(rekishi-miryoku.com), 江戸ガイド, 歴史トラベル

Footnotes

  1. 일본어 위키백과 「福島正則」 항목; 구로다 모토키·기쿠치 히로유키 학설 대립 관련 정리(ameblo.jp 경유, 원저는 각각 KADOKAWA 학술서·신서). ↩ ↩2 ↩3 ↩4

  2. 黒田基樹, 『羽柴秀吉とその一族』, KADOKAWA; 菊池浩之, 『豊臣家臣団の系図』, KADOKAWA新書 (두 논지의 대조는 ameblo.jp 블로그 경유로 확인). ↩

  3. 일본어 위키백과 「福島正則」 항목; 戦国ヒストリー 「福島正則の生涯を『サラリーマン人生』に例えてみました」. ↩

  4. 일본어 위키백과 「賤ヶ岳の戦い」・「拝郷家嘉」 항목; 歴史人(rekishijin.com) 「福島正則は、なぜ賤ヶ岳の一番槍になれたのか?」. ↩ ↩2 ↩3

  5. 일본어 위키백과 「石川一光」 항목(『常山紀談』・『武家事紀』 두 계통 일화 병기); Japaaan 「死ぬまで秘めた恋心……一番槍を果たしながら『賤ケ岳の七本槍』から洩れてしまった名将・石川一光」. ↩

  6. 일본어 위키백과 「賤ヶ岳の戦い」 항목 각주8; WEB歴史街道(PHP研究所) 「じつは9人だった『賤ヶ岳七本槍』」; 渡邊大門, 「『賤ヶ岳の七本槍』になれなかった、豊臣秀吉に仕えた2人の武将」,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위키소스 「柴田退治記」 원문(九人 열거 직접 확인). ↩ ↩2

  7. 일본어 위키백과 「福島正則」 항목(제5번대·거제도 송진포·장문포성·이순신 장문포해전 서술 직접 확인). ↩ ↩2 ↩3 ↩4

  8. 일본어 위키백과 「七将襲撃事件」・「文治派」・「武断派」 항목; 文春オンライン 「なぜ石田三成は『七将襲撃事件』で加藤清正ら秀吉子飼いの武将から襲われたのか?」. ↩ ↩2 ↩3 ↩4

  9. 일본어 위키백과 「御掟」・「満天姫」 항목(御掟 제1조 원문 수록). ↩ ↩2

  10. SYNCHRONOUS 「【乃至政彦×高橋陽介】『小山評定』は本当に行われたのか?『福島正則宛徳川家康書状』から実像を考える」; 기후 세키가하라 고전장 기념관 「福島正則コース」. ↩

  11. 渡邊大門, 「福島正則は関ヶ原本戦で宇喜多秀家を打ち破り、東軍を勝利に導いた」,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

  12. 渡邊大門, 「軍功だけがすべてじゃなかった! 関ヶ原合戦で禄高が増えた戦国大名ランキングTOP10」,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코토방크 「福島正則」 항목. ↩

  13. 歴史の魅力(rekishi-miryoku.com) 「福島正則の後悔」(해당 사이트 스스로 야담·소설식 각색 가능성을 밝힘). ↩

  14. 히로시마성 공식(hiroshimacastle.jp) 「福島氏の入国と改易」; 일본어 위키백과 「福島正則」 항목(지행고 변화 각주). ↩ ↩2 ↩3 ↩4

  15. 酒豪列伝(sake.science) 「福島正則」; ゆるりと戦国(yururito-sengoku.com) 「福島正則の良い逸話&ちょっとダメな逸話」. ↩ ↩2

  16. 일본어 위키백과 「福島正之」 항목. ↩

  17. 七将襲撃事件 관련 위키백과 서술 종합; 刀剣ワールド 「東軍 福島正則」. ↩ ↩2 ↩3

  18. BUSHOO!JAPAN 「史実の福島正則すったもんだの改易劇と生涯」; 戦国ヒストリー(sengoku-his.com) 「福島正則 改易」. ↩ ↩2 ↩3 ↩4

  19. 攻城団(kojodan.jp) 「黒田節と名槍『日本号』」; 月桂冠 「『黒田節』誕生の地、伏見」;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節」・「黒田家譜」・「母里友信」 항목. ↩ ↩2 ↩3 ↩4

  20. 위키소스 「武家諸法度(元和令)」 원문. ↩

  21. 笠谷和比古,「徳川幕府の大名改易政策を巡る一考察(一)」, 日文研紀要. ↩ ↩2 ↩3

  22. 江戸ガイド 「徳川家康、死去」; 歴史トラベル 「元和2年(1616年)4月17日 徳川家康、75歳で死去」. ↩

  23. 일본어 위키백과 「福島正則」 항목(석고 수치·전봉지 표기); 히로시마성 공식 「福島氏の入国と改易」. ↩ ↩2

  24. 일본어 위키백과 「改易」 항목(동시대 사료에 ‘改易’ 용어 부재 서술). ↩

  25. 일본어 위키백과 「福島正則」 항목. ↩

  26. real-juku.jp 「福島正則の死因を解説!」; 일본어 위키백과 「福島正則」 항목. ↩

  27. BUSHOO!JAPAN, 前掲; real-juku.jp, 前掲. ↩

  28. 歴史上の人物.com(colorfl.net) 「福島正則 何度も断絶の危機を乗り越えた子孫」; 戦国ヒストリー 「【家系図】福島正則のルーツ、そして子孫はどうなった?」. ↩ ↩2

  29. 福尾猛市郎・藤本篤, 『福島正則―最後の戦国武将―』, 中公新書1491; 黒田基樹, 「福島正則文書の基礎的研究」; 白峰旬, 「福島正則改易事件に就いての一考察」; 히로시마시 공식 「福島正則没後400年記念事業」. ↩ ↩2 ↩3

  30. 한국어 위키백과 「후쿠시마 마사노리」 항목; 渤海之狼 블로그(valhae.kr) 「후쿠시마 마사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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