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 1548–1610) — 도쿠가와 사천왕 ④
Q: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는 누구인가?
A: 미카와 누카타군 구라마에(三河国額田郡蔵前, 현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출신의 무장(1548–1610).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마츠다이라 가문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세 살(세는나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당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오다카성 병량 반입으로 초진을 치렀다. 1566년 무렵부터 이에야스 직속 선봉 부대인 하타모토 사키테야쿠(旗本先手役)를 맡아 40년 넘게 이에야스 곁에서 싸웠다. 1590년 간토 이봉 때 가즈사 오타키(上総国大多喜) 10만 석을 받았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이 나오마사와 함께 선발대의 군감(軍監)을 맡아 서군 다이묘 조략 문서에 함께 서명했다. 전후 이세 구와나(伊勢国桑名) 10만 석으로 옮겨 성하 도시를 새로 구획했다. 1610년 구와나에서 병사했다. “평생 쉰일곱 번 싸워 한 번도 다치지 않았다”는 전설로 유명하며, 후대에 사카이 타다츠구·이이 나오마사·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함께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불렸다.
한눈에 보는 혼다 타다카츠
| 항목 | 내용 |
|---|---|
| 이름 |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 ほんだ ただかつ) |
| 아명 | 나베노스케(鍋之助) |
| 통칭 | 헤이하치로(平八郎) |
| 생몰 | 1548년 3월 17일(덴분 17년 2월 8일) – 1610년 12월 3일(게이초 15년 10월 18일), 향년 63 |
| 출생지 | 미카와 누카타군 구라마에(현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니시구라마에초) |
| 부친 | 혼다 타다타카(本多忠高), 1549년 안조 전투에서 전사 |
| 출사 | 1560년 오다카성 병량 반입이 초진, 1566년 무렵 하타모토 사키테야쿠 |
| 관직 | 종5위하 나카츠카사노다유(中務大輔). 서임은 1586년설과 1588년설이 있다 |
| 영지 | 가즈사 오타키 10만 석(1590) → 이세 구와나 10만 석(1601) |
| 정실 | 오히사노카타(於久の方, 見星院), 아치와 겐테츠(阿知和玄鉄)의 딸 |
| 자녀 | 장녀 코마츠히메(사나다 노부유키 정실), 장남 타다마사, 차남 타다토모 등 |
| 무구 | 창 톤보키리(蜻蛉切), 흑사위 도마루 구소쿠와 사슴뿔 투구(중요문화재) |
| 묘소 | 조도지(浄土寺, 미에현 구와나시), 분골 료겐지(良玄寺, 지바현 오타키마치) |
혼다 타다카츠는 도쿠가와 사천왕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 한국에서도 게임으로 접해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다. 일본에서는 “전국 최강의 무장”이라는 수식어가 거의 이름처럼 붙어 다니는 장수다. 『삼국지연의』 소설 속에 나오는 여포 같은 무력 최강의 이미지랄까? 이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이야기는 대략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평생 쉰일곱 번 싸웠지만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이야기. 둘째는 적군인 다케다 쪽에서 “이에야스에게는 과분한 것이 둘 있다”는 노래를 지어 혼다 타다카츠가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무장이라고 칭찬했다는 이야기. 셋째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두 그를 극찬했다는 이야기. 넷째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당시 히데요시의 대군을 앞에 두고 소수의 병사만 끌고 나서서 태연히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이야기가 언제 처음 기록됐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의외로 동시대의 문서로 확인되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실제로 남긴 문서는 전투 기록보다 교섭 문서가 훨씬 많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진 순서를 따라가면서,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가 아닌 사료로 확인되는 타다카츠의 모습을 함께 살펴본다. 현대의 이미지와 다를 수는 있겠으나 혼다 타다카츠는 이에야스가 오래 믿고 쓴 현장 지휘관이자 교섭 창구였고, 구와나라는 도시를 새로 구획한 영주였다.
1. 출사와 초기 전투 — 누카타의 소년에서 하타모토 선봉까지 (1548–1581)
1-1. 두 대가 전사한 집안
혼다 타다카츠는 덴분(天文) 17년(1548년) 2월 8일 미카와 누카타군 구라마에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오카자키시 니시구라마에초로, 탄생지에는 오카자키시 지정 사적 표석이 서 있다. 이에야스보다 다섯 살 아래다.1
혼다 가문은 대대로 마츠다이라 가문을 섬긴 후다이(譜代) 가신이었고 그 대가를 목숨으로 치렀다. 할아버지 혼다 타다토요(本多忠豊)는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가 퇴각할 때 후미를 막다 전사했고, 아버지 혼다 타다타카는 1549년 오다 쪽이 지키던 안조성을 공격하다 전사하고 마는데 당시 타다카츠의 나이는 두 살이었다. 그 뒤로는 숙부 혼다 타다자네(本多忠真) 밑에서 자랐다. 아명은 나베노스케, 통칭은 헤이하치로다.1
1-2. 초진과 “첫 수급” 이야기
에도 막부가 1812년에 완성한 공식 계보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에는 타다카츠의 초진이 에이로쿠(永禄) 3년(1560년) 오다카성 병량 반입 작전으로 기록돼 있다. 오케하자마 전투 직전, 이마가와 쪽 선봉이던 젊은 이에야스가 포위된 오다카성에 군량을 넣은 작전이다. 세는나이로 열세 살 때의 일이었다.2
초진 무렵의 일화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첫 수급” 이야기다. 숙부 타다자네가 적을 쓰러뜨리고 그 목을 조카의 공으로 삼으라고 건넸는데, 타다카츠가 “남의 힘을 빌려 공을 세울 수 있겠느냐”며 거절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직접 목을 베어 왔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 문헌 여러 곳에 실려 있다. 원문으로 확인한 것 가운데 성립 연도를 알 수 있는 가장 이른 기록은 1713년 무렵 편찬된 『세키가하라 군키 다이세이(関原軍記大成)』로, 사건으로부터 약 150년 뒤다. 이후 막부 공식 계보 『간세이 조슈쇼카후』(1812)와 일화집 『메이쇼 겐코로쿠(名将言行録)』(1869)에도 거의 같은 대사가 실렸다. 동시대 사료에서는 찾을 수 없다. 연도와 장소도 1561년 도야네(鳥屋根) 공격 때 열네 살이었다는 기록과 1562년 나가사와성에서 열다섯 살이었다는 기록으로 갈린다.2
1563년 미카와 잇코잇키(三河一向一揆)가 일어났을 때 혼다 일족 가운데 잇키 쪽에 선 사람도 있었지만 타다카츠는 이에야스 측에 섰다. 이듬해 이에야스가 가미와다성에서 잇키 세력을 격파할 때 함께 싸웠다는 기록이 17세기 중반 편찬물인 『이에타다 일기 증보추가(家忠日記増補追加)』에 있다. 흔히 함께 소개되는 “일향종에서 정토종으로 개종하고 이에야스 편에 남았다”는 이야기는 출전을 찾을 수 없었다.2
1-3. 하타모토 사키테야쿠와 “오츠키닌”
타다카츠의 경력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에이로쿠 9년(1566년) 무렵이다. 미카와를 평정한 이에야스는 자기 직속 부대인 하타모토 가운데 선봉을 맡는 사키테야쿠를 편성했고, 열아홉 살 타다카츠에게 기마 무사들을 붙여 그 한 축을 맡겼다. 『간세이 조슈쇼카후』에는 츠즈키 히데츠나(都筑秀綱), 혼다 마사시게(本多正重)를 비롯한 기마 50기가 붙었다고 나와 있다. 오자키 아키라(尾崎晃)는 향토사 학술지 『치바사학(千葉史学)』에 실은 글(2009)에서 54기로 봤다. 일본 역사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보이는 “55기”라는 숫자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3
이렇게 붙은 무사들은 타다카츠의 가신으로 편성됐지만 주종 관계 자체는 이에야스와 맺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오츠키닌(御付人)“이라 부르는 방식으로, 이이 나오마사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가신단도 같은 구조였다. 전투 때 지휘는 타다카츠가 맡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이에야스의 사람이었다. 이후 타다카츠는 이에야스의 거성 성하에 상주하면서 하타모토 부대의 지휘관으로 움직였다.3 이에야스가 “자기 사람”을 맡길 수 있는 지휘관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역할은 그가 은거할 때까지 40년 넘게 이어진다.
1-4. 1차 사료에 처음 나타난 타다카츠
타다카츠의 이름이 동시대 문서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에이로쿠 11년(1568년) 11월이다. 이에야스가 토토미의 고쿠진 호우다 신로쿠(祝田新六)에게 보낸 서장에 붙은 부장(副状), 즉 주군의 편지 내용을 보증하며 곁들여 보내는 가신의 편지 발신자로 이름이 나온다(「호우다 문서(祝田文書)」). 이에야스가 이마가와령 토토미로 진출하기 직전, 현지 고쿠진들을 끌어들이던 시점이다. 싸움터의 무사가 아니라 이에야스와 고쿠진 사이를 잇는 연락책(取次)으로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셈이다.4
이 첫 등장은 타다카츠가 어떤 가신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후에도 그가 남긴 문서는 거의 전부 교섭 문서이거나 다른 가신과 함께 서명한 문서다. 이 글 4장과 5장에서 다시 다룬다.
1-5. 아네가와에서 다카텐진까지
1570년 아네가와 전투부터 1581년 다카텐진성 탈환까지, 타다카츠는 이에야스가 치른 거의 모든 전투에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각 전투에서 어떤 공을 세웠는지는 기록마다 이야기가 다른 부분이 많다. 한 대학 세미나 논문(2022)에서는 관동 이봉 이전 타다카츠의 무공 기술이 대부분 『간세이 조슈쇼카후』의 그의 항목에만 나오고 다른 편찬물에서는 같은 공이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같은 다른 무장의 것으로 적힌 경우가 여럿이라고 지적하고 있다.5
| 전투 | 흔히 전하는 타다카츠의 활약 | 사료 상황 |
|---|---|---|
| 아네가와(1570) | 아사쿠라군의 거한 마가라 주로자에몬과 일기토 | 『신초코키(信長公記)』에는 마가라의 목을 벤 사람이 아오키 카즈시게로, 2020년대에 확인된 『真柄氏家記覚書』에는 도쿠가와 가신 사기사카 시키부로 기록돼 있다. 막부 편찬 『도쿠가와 짓키(徳川実紀)』에도 타다카츠는 아사이군 쪽으로 돌격한 인물로만 나온다. 일기토는 후대 창작 |
| 히토코토자카(1572) | 다케다군에 쫓기는 도쿠가와군의 후미를 맡아 분전 | 후미를 맡았다는 점은 여러 편찬물이 일치. 상세한 무용담은 18세기 이후 문헌에서 늘어난다(2장) |
| 미카타가하라(1573) | 야마가타 마사카게 부대를 격퇴 | 『도쿠가와 짓키』 해당 대목에 타다카츠 개인 활약은 나오지 않는다. 숙부 타다자네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
| 나가시노(1575) | 다케다군 격파에 공 | 『간세이 조슈쇼카후』에는 타다카츠의 활약이, 『이에타다 일기 증보추가』에는 야스마사의 활약이 기록돼 있다. 같은 부대에 있었을 가능성 |
| 다카텐진(1580–1581) | 외성 돌파, 출격한 성병의 목을 벰 | 『한칸후(藩翰譜)』·『이에타다 일기 증보추가』 등에 기록. 낙성 자체는 동시대 일기 『이에타다 일기(家忠日記)』에 있다 |
하지만 이런 기록의 오류로 인해 혼다 타다카츠의 전공이나 무용담이 전부 없었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타다카츠가 하타모토 선봉 지휘관으로서 이에야스의 주요 전투에 빠짐없이 나섰고 1572년 퇴각전에서의 후미처럼 위험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여러 문헌이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다. 개별적인 무용담 하나하나가 사실인지를 떠나서 이에야스가 위태로울 때마다 언제나 타다카츠가 맨 앞이나 맨 뒤에 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5
2. 전설의 출처를 찾아서
2-1. 쉰일곱 번 싸워 상처 하나 없었다
타다카츠를 상징하는 문장은 “평생 57번 싸워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문장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문헌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겐로쿠 15년(1702년)에 완성한 다이묘 가계 편찬물 『한칸후』다. 타다카츠가 죽은 지 92년 뒤다.6
忠勝十七歳の時初て軍し、大小の戦ひ五十七度、終に一度の不覚なし、又終に一所の手も負はず
타다카츠는 열일곱 살 때 처음 싸움에 나가 크고 작은 전투 쉰일곱 번에 끝내 한 번도 실수가 없었고, 또 끝내 한 군데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한칸후』 혼다 타다카츠 항목(1702, 사후 92년)
이 이야기에서 평생 몇 번의 싸움을 했는지는 기록마다 차이가 난다. 막부가 1812년에 완성한 공식 계보 『간세이 조슈쇼카후』에는 “대략 50여 번(凡五十余度)“이라고 기록돼 있다. 도쿄제국대학 사료편찬괘가 엮은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에는 타다카츠의 죽음을 다루는 조목에 혼다 가문 쪽 기록 여러 개가 나란히 실려 있다. 여기서도 “50여 번”과 “57번”이 섞여 있고 한 잡록에는 “큰 전투 57번, 작은 전투는 셀 수 없다”고 나와 있다. 첫 출진 나이도 열두 살, 열세 살, 열네 살, 열일곱 살로 제각각이다. 무엇보다 57번에 해당하는 전투 목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다. 그러므로 『한칸후』에 나오는 57이라는 숫자는 정말로 57번의 싸움에 나갔다기보다는 많은 싸움에 나갔다는 의미의 찬사로 쓴 숫자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6
| 문헌 | 성립 | 사후 경과 | 전투 횟수 | 첫 출진 |
|---|---|---|---|---|
| 『한칸후』 | 1702 | 92년 | 57번, 상처 없음 | 17세 |
| 『간세이 조슈쇼카후』 | 1812 | 약 200년 | 50여 번, 상처 없음 | 13세(초진 기사) |
| 『니혼가이시(日本外史)』 | 1827 | 217년 | 50여 번, 상처 없음 | 14세 |
| 『메이쇼 겐코로쿠』 | 1869 | 259년 | 57번, 상처 없음 | 14세 |
| 혼다 가문 쪽 가보·잡록(『다이니혼시료』 수록) | 미상 | 미상 | 50여 번 / 57번 / 큰 전투 57번 | 12세·13세 |
『한칸후』는 다이묘 가문들이 제출한 가보를 바탕으로 엮은 책이라, 이 문장도 혼다 가문 쪽 전승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추론이다). 같은 책에는 “끝내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終に一度の不覚なし)“는 표현이 다른 도쿠가와 가신 두 사람의 항목에도 똑같이 나온다. 상투적인 찬사의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한 군데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구절은 타다카츠 항목에만 고유하게 붙어 있는 표현이다.6 여하튼 이 구절이 메이지 초의 『메이쇼 겐코로쿠』로 이어지면서 오늘날의 “57전 무상”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지게 됐다.
임종 직전 작은 칼로 소지품에 이름을 새기다 손을 베고 “혼다 타다카츠도 상처를 입으면 끝이로구나”라고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에도 시대 문헌에서는 이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이 이야기에 대해 일본어 위키백과가 붙인 유일한 출처는 현대 아동용 무장 도감이다.7 무상 전설이 완성된 뒤에 그 전설에 맞춘 마지막 장면이 덧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가문은 그를 어떻게 기억했을까. 『다이니혼시료』에 수록된 혼다 가보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타다카츠는 평생 자기 전공을 남에게 말한 적이 없다(忠勝終身自己ノ戦功ヲ人ニ語リシ事無シ).” 이렇게 자랑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후손과 편찬자들이 “57”이라는 숫자까지 붙여 찬사를 남겼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6
2-2.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둘 있으니
家康に過たる物は二ツある 唐の頭に本多平八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둘 있으니, 카라노카시라(唐の頭)와 혼다 헤이하치.
1572년 다케다 신겐이 토토미로 쳐들어왔을 때, 퇴각하는 도쿠가와군의 후미를 맡은 타다카츠의 분전을 보고 다케다 쪽 사람이 지어 붙였다는 노래다. 흔히 “코스기 사콘(小杉左近)이 히토코토자카에 세운 낙서”로 소개된다.
이 노래가 실린 가장 이른 문헌은 다케다 가문의 군학서 『고요군칸(甲陽軍鑑)』 품39다. 오바타 카게노리가 겐나 연간(1615–1624)에 정리했고 현존 최고 사본이 1621년이니, 사건 후 약 45년 뒤의 기록이다. 원문을 보면 통설과 세 군데가 다르다.8
そこにて本多平八郎其歳廿五歳なれ共家康したにおいて度々の誉有よし、内々武田の家へも聞ゆる様なりつるが、彼平八郎甲にくろきかの角を立、身命をおしまず敵味方の間へのり入引たる様子は、(中略)信玄公の御家にも多なき人に相似たり、家康少身の家に過たる平八郎也、其上三河武者十人が七八人は唐の頭をかけて出る是も過たりと、小杉右近助と申、信玄公御旗本の近習、歌によみてみつけ坂にたつる
그때 혼다 헤이하치로는 그해 스물다섯이었으나 이에야스 휘하에서 여러 번 명예를 세웠다는 소문이 은근히 다케다 가문에까지 들려오던 터였다. 그 헤이하치로가 투구에 검은 사슴뿔을 세우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과 아군 사이로 말을 몰아 들어가 병력을 물린 모습은 (중략) 신겐 공의 가문에도 많지 않은 인물과 닮았다. 녹이 적은 이에야스 가문에는 과분한 헤이하치로다. 게다가 미카와 무사는 열 명에 일고여덟이 카라노카시라를 달고 나오니 이것도 과분하다며, 신겐 공 하타모토의 근습인 코스기 우콘노스케라는 자가 노래로 지어 미츠케 고개에 세웠다.
『고요군칸』 품39(1615–1621 무렵 성립, 사건 후 약 45년)
첫째, 작자는 “코스기 사콘”이 아니라 코스기 우콘노스케(小杉右近助)다. 혼다 가문 쪽 기록에도 “우콘노스케(右近之介)“로 나와 있다. 작자명은 이후 “우콘”, “코스게 우콘”, “코마츠 우콘노스케”로 오락가락하다가 근대 이후 “사콘”으로 굳어졌는데 잘못된 것이다. 막부 편찬 『도쇼구 고짓키 부록(東照宮御実紀附録)』(1840년대)에는 아예 “카이 사람(甲州人)“이라고만 나와 있다.8
둘째, 노랫말을 팻말에 써서 세워 둔 곳은 히토코토자카가 아니라 미츠케 고개(みつけ坂)다. 『메이쇼 겐코로쿠』에도 “미츠케의 고개”로 나와 있다. 혼다 가문 쪽 기록에는 “미츠케 역참 고개 위 왼쪽 세 갈래 삼나무 아래”라고 장소가 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히토코토자카에 팻말을 세웠다는 서술은 근대 지방지와 수필에서 자리 잡았다.8
셋째, 카라노카시라는 이에야스 개인의 투구 장식이 아니다. 카라노카시라는 티베트 야크의 꼬리털로 만든 장식인데, 『고요군칸』에는 “미카와 무사 열에 일고여덟이 달고 나온다”고 설명돼 있다. 도쿠가와 군 전체의 유행을 비꼰 것이다. 이에야스가 난파한 남만선에서 이 장식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원전에 없는 후대의 부연이다.8
이 노래를 적은 팻말이 1572년에 실제로 세워졌는지는 『고요군칸』 기록 외에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고요군칸』은 혼다 가문이 제출한 가보가 아니라 적이었던 다케다 쪽에서 나온 기록이다. 17세기 초의 다케다 유신들은 “스물다섯 살에 사슴뿔 투구를 쓰고 후미를 지휘한 이에야스의 젊은 장수”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그만큼 전장에서 눈에 띄는 지휘관이었다. 세부적인 내용이 부풀려졌을지는 몰라도 그가 다케다군에 남긴 인상까지 완전한 허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2-3.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칭찬
노부나가가 타다카츠를 “꽃과 열매를 겸비한 용사(花実兼備の勇士)“라 불렀고, 히데요시가 “동국 제일의 용사”라 칭찬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다. 출전을 하나씩 확인하면 모두 에도 중기 이후 편찬물이나 근대 기념지에서 나온다.9
| 발언자 | 문구 | 가장 이른 확인 출전 | 사건 후 경과 | 동시대 문서 |
|---|---|---|---|---|
| 오다 노부나가 | 花実兼備の勇士(꽃과 열매를 겸비한 용사) | 『간세이 조슈쇼카후』(1812). 1582년 다케다 정벌 개선 때 덴류강에서 했다는 말 | 약 230년 | 없음. 『신초코키』에 없다 |
| 도요토미 히데요시 | 日本第一、古今独歩の勇士(일본 제일, 고금에 홀로 우뚝한 용사) | 잡록 『落穂雑談一言集』(『다이니혼시료』 수록) | 성립 연대 미상 | 없음 |
| 도요토미 히데요시 | 天下無双の士(천하무쌍의 무사) | 『메이쇼 겐코로쿠』(1869). 코마키·나가쿠테 때의 말 | 285년 | 없음 |
| 도요토미 히데요시 | 東国一の勇士(동국 제일의 용사) | 『이에야스·타다카츠 두 공 300년제 기요(家康忠勝両公三百年祭紀要)』(1915) | 331년 | 없음. 에도 시대 용례를 찾지 못했다 |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동국의 혼다, 서국의 타치바나 무네시게를 당대 무쌍의 용사로 서로 인사시킴 | 『도쇼구 고짓키 부록』이 인용한 에도 중기 일화집 『메이료코한(明良洪範)』 | 100년 이상 | 없음 |
“花実兼備”는 원래 와카 평론에서 형식(꽃)과 내용(열매)을 함께 갖춘 노래를 가리키던 말이다. 노부나가가 전장에서 갑자기 와카 평론 용어로 동맹의 가신을 칭찬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어색하다. 무엇보다 노부나가의 행적을 가장 가까이서 기록한 『신초코키』에 이 장면이 없다. 히데요시의 칭찬들도 그의 서장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표의 문구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지만, 적어도 동시대 인물들이 남긴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9
2-4. 톤보키리와 사슴뿔 투구 — 실물로 남은 것
전설과 달리 실물로 남은 것도 있다. 타다카츠가 쓴 창 톤보키리(蜻蛉切)는 “후지와라 마사자네 작(藤原正真作)“이라는 명(銘)이 새겨진 오사사호야리(大笹穂槍)로, 날 길이 약 44cm다. 시즈오카현 지정문화재이며 개인 소장품으로 시즈오카현 미시마시의 사노 미술관에 기탁돼 있다. 그가 입었다는 흑사위 도마루 구소쿠(黒糸威胴丸具足)와 커다란 사슴뿔 와키다테를 단 투구는 1977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혼다 가문 전래품으로 오카자키의 “미카와 무사의 야카타 이에야스관”에 기탁돼 있다.10
문화청 해설에는 이 갑옷이 “투구에 커다란 사슴뿔 와키다테를 달고 어깨에 큰 염주를 거는 등 특색이 풍부하다”고 설명돼 있다. 도쿠가와 가신단이 저마다 개성 있는 토세이구소쿠(当世具足)를 입던 시대의 산물이다.10 『고요군칸』의 “투구에 검은 사슴뿔을 세우고”라는 묘사와도 맞아떨어진다. 전장에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차림이었다는 것만큼은 실물과 기록이 서로 뒷받침한다.
이름의 유래로 알려진 “창끝에 앉은 잠자리가 두 동강 났다”는 이야기는 에도 후기의 수필 『코카안 비망록(故花菴備忘録)』과 『메이쇼 겐코로쿠』에 실려 있다. 원문은 “잠자리가 날아와 닿자마자 잘렸다”이다. “창끝에 앉았다”는 현대의 풀이다. 같은 두 문헌에는 늙은 타다카츠가 구와나의 강변에서 이 창을 휘둘러 보고는 자루를 석 자쯤 잘라 버리며 “병장기는 제 힘을 헤아려 써야 한다”고 했다는 일화도 실려 있다.10
초상화 이야기도 사정이 비슷하다. 타다카츠가 세키가하라 이후 할 일이 없어진 것을 한탄하며 화가에게 초상화를 일고여덟 번 고쳐 그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과 대중 기사에 돌지만, 초상화를 소장·관리하는 지바현과 구와나시의 공식 설명에는 이 이야기가 없다. 지바현 쪽 설명이 확인해 주는 것은 타다카츠가 직접 도사파 화가에게 그리게 했다는 데까지다. 료겐지본의 유래기에는 원화 제작 연도가 분로쿠 4년(1595), 곧 세키가하라 이전으로 적혀 있다.11
3. 이가고에와 코마키·나가쿠테 — 류센지 강의 대치
3-1. 1582년 이가고에
덴쇼(天正) 10년(1582년) 6월 2일, 사카이를 유람하고 교토로 향하던 이에야스 일행은 혼노지의 변 소식을 듣는다. 앞서 보낸 사자 타다카츠가 가와치 히라카타 근처에서 교토의 상인 차야 시로지로(茶屋四郎次郎)를 만나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12
이때 이에야스가 “교토로 올라가 치온인에서 할복해 노부나가와 죽음을 함께하겠다”고 하자, 타다카츠가 “본국으로 돌아가 군세를 모아 아케치를 치는 것이 우다이진(右大臣, 노부나가의 관직)에 대한 보은”이라고 간해 마음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장면이 타다카츠의 말로 적힌 것은 막부 편찬 『도쿠가와 짓키』 정편(1843년 완성)과 그 부록, 그리고 『간세이 조슈쇼카후』다. 그보다 훨씬 이른 1665년의 『이에타다 일기 증보추가』에는 “노신들에게 간언을 받았다”고만 나와 있고 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없다. 동시대 일기인 『이에타다 일기』에는 이 대화가 없다. 할복을 만류한 사람이 타다카츠로 좁혀진 것은 혼다 가문이 막부에 제출한 가보가 편찬 사료에 반영된 이후로 보인다.12
같은 『도쿠가와 짓키』는 이가 산길을 넘는 동안 타다카츠가 톤보키리를 들고 맨 앞에 섰고 키즈가와 나루에 배가 없자 창을 뻗어 섶나무 배 두 척을 끌어와 일행을 건넨 뒤 창 물미로 배를 부숴 버렸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 역시 19세기 편찬물에 나오는 이야기로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반면 이가고에 직후인 6월 14일 이시카와 카즈마사와 타다카츠가 함께 서명한 문서가 오와리의 무장 요시무라 우지요시(吉村氏吉)에게 발송된 것은 확실하다. 같은 날 타다카츠 단독 명의의 문서도 나갔다. 이에야스가 가장 급박했던 순간에 타다카츠는 외부 무장에게 도쿠가와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12
3-2. 코마키·나가쿠테와 류센지 강
덴쇼 12년(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타다카츠는 사카이 타다츠구, 이시카와 카즈마사 등과 함께 코마키산 본진을 지키는 쪽에 남았다. 4월 9일 나가쿠테에서 이케다 츠네오키·모리 나가요시가 전사하자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나가쿠테 방면으로 움직였다. 타다카츠는 소수 병력으로 코마키산을 나와 히데요시군을 견제했다.13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다. 타다카츠가 500명으로 류센지 강 건너편에서 히데요시의 대군과 나란히 달리며 도발하다가, 홀로 강가에 내려가 태연히 말에게 물을 먹였다. 이 대담함에 감탄한 히데요시가 “저 자를 쏘지 말라”고 명했다. 이 장면에 대한 표현이 문헌마다 어떻게 달라지는지 성립 순서대로 표에 정리해 보았다.13
| 문헌 | 성립 | 사건 후 경과 | 병력 | 강가·말 장면 | 히데요시 반응 |
|---|---|---|---|---|---|
| 『고요군칸』 품59 | 1615–1621 무렵 | 약 35년 | 천 명 남짓 | 없음 | 헤이하치로를 보고 물러났다 |
|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 | 1622 | 38년 | 500 남짓 | 없음. 히데요시 부대 아래를 밀고 지나쳐 이에야스에게 합류 | 없음. “적도 아군도 칭찬했다” |
| 『이에타다 일기 증보추가』 | 1665 | 약 81년 | 300여 기 | 4–5정(약 400–500m)까지 다가가 철포 사격 | 부하들이 치려 했으나 히데요시가 허락하지 않았다 |
| 『간세이 조슈쇼카후』 | 1812 | 228년 | 300여 기 | 4–5정까지 다가가 철포 사격. 오다 노부카츠의 지시로 나섰다고 서술 | 부하들이 치려 했으나 히데요시가 허락하지 않았다 |
| 『도쿠가와 짓키』 정편 | 1843 | 259년 | ”적은 병력” | 말에서 내려 강가에서 말의 입을 씻겼다 | 이나바 잇테츠가 신원을 알려주자 눈물을 흘리며 “화살 한 대도 쏘지 말라” |
| 『도쇼구 고짓키 부록』 | 1840년대 | 약 260년 | 800 | 강물을 따라 서로 노려보며 나아감 | 대담함과 충렬에 감탄 |
| 『이에야스·타다카츠 두 공 300년제 기요』 | 1915 | 331년 | ”동국 제일의 용사” |
가장 이른 도쿠가와 쪽 기록인 『미카와 모노가타리』는 이에야스의 가신 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忠教)가 사건 38년 뒤에 쓴 회고다. 여기서 타다카츠의 행동은 단순하고 대담하다.
本田中務も、左衞門督と同意なれば、はうき守すゝまぬと見、さらば我等はおばたゑむかひに參らんとて、五百斗にて、くわんばく殿之備之下を、押してとほり、おばたの城へゆきて、御供を申而、小牧山へ來る。敵味方共に、本田中務をほめたり。
혼다 나카츠카사도 사에몬노카미(사카이 타다츠구)와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호키노카미(이시카와 카즈마사)가 나서지 않는 것을 보고 “그렇다면 우리는 오바타로 주군을 맞으러 가겠다” 하고 500명 남짓으로 간파쿠(関白, 히데요시)의 부대 아래를 밀고 지나 오바타성에 가서 주군을 모시고 코마키산으로 돌아왔다. 적도 아군도 모두 혼다 나카츠카사를 칭찬했다.
『미카와 모노가타리』(1622, 사건 후 38년)
말에게 물을 먹이는 장면, 이나바 잇테츠의 신원 확인, 히데요시의 눈물과 사격 금지 명령이 한 세트로 갖춰진 것은 『도쿠가와 짓키』 단계에서다. 『도쿠가와 짓키』 원문은 말의 입을 헹구게 했다는 것인데, 오늘날에는 이 장면이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오늘날 많이 인용되는 “500명, 5정 거리, 류센지 강에 홀로 들어가 말에게 물을 먹임”은 1622년의 “500”과 1843년의 “말 입 씻기”가 합쳐진 모습으로 보인다(그 결합 경위를 밝힌 연구는 찾지 못했다).13
날짜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히데요시와 타다카츠의 서장 사본을 근거로, 타다카츠 부대가 히데요시 본대와 실제로 맞붙은 것은 4월 9일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코마키 포위를 풀고 철수하던 5월 1일의 추격전이라는 견해가 있다.14 어느 쪽이든 『미카와 모노가타리』가 전하는 요지는 같다. 적 본대의 움직임을 보고 소수로 먼저 나서서 주군과 합류했고, 그 판단을 적과 아군 모두가 높이 샀다는 것이다. 히데요시가 이 무장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2년 뒤 동시대 일기에서 다른 방식으로 확인된다(4장).
4. 히데요시가 지목한 가신 — 교섭 창구와 오타키 10만 석
4-1. 혼례 사자로 불려 간 타다카츠
코마키·나가쿠테 이후 이에야스와 히데요시는 화의를 맺었다. 덴쇼 14년(1586년) 히데요시는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의 정실로 보냈다. 이때 이에야스가 축하 사자로 후다이 가신 아마노 야스카게를 보내자 히데요시가 불쾌해하며 사카이 타다츠구,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에 대해서는 도쿠가와 가신 마츠다이라 이에타다가 그때그때 쓴 일기 『이에타다 일기』에서도 확인된다.15 『도쿠가와 짓키』에도 이 대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濱松より納采の御使に本多忠勝をつかはさる。これも關白のあながちに忠勝が名をさしてよびのぼせられしなり。
하마마츠에서 납채 사자로 혼다 타다카츠를 보냈다. 이것도 간파쿠가 굳이 타다카츠의 이름을 지목해 불러올린 것이다.
『도쿠가와 짓키』 권3(1843)
2장에서 본 히데요시의 칭찬 문구들은 모두 후대 기록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이름을 짚어 타다카츠를 불렀다는 사실은 동시대 일기로 뒷받침된다. 히데요시는 코마키에서 자신에게 맞섰던 상대를 교섭 자리에서 보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9월 이에야스를 대리해 상경한 타다카츠·야스마사·나오마사 세 사람을 상방 무장들이 “도쿠가와 삼걸”이라 불렀다는 『사카키바라가보(榊原家譜)』의 기록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편에서 다뤘다.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신종한 뒤 타다카츠는 종5위하 나카츠카사노다유에 서임됐다. 서임 날짜는 1586년 11월 9일설과 1588년 4월 고요제이 천황이 히데요시의 저택 주라쿠다이(聚楽第)에 행차했을 무렵이라는 설이 함께 전해진다.16
4-2. 만키성에서 오타키로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로 호조 가문이 무너지고 이에야스가 간토로 옮기면서, 타다카츠는 가즈사에 10만 석을 받았다. 이이 나오마사의 12만 석 다음가는 규모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다테바야시 10만 석과 나란히 도쿠가와 가신단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17
이 배치에는 히데요시 쪽의 뜻도 섞여 있었다. 그해 8월 7일 타다카츠가 히데요시의 가신 다키가와 타다유키(滝川忠征)에게 보낸 서장(나고야대학 소장 「다키가와 문서(滝川文書)」)에는 만키성(万喜城)을 받게 된 것이 타다유키의 주선 덕분이라는 취지가 담겨 있다. 연구자 시바 히로유키(柴裕之)는 이 서장을 근거로 타다카츠의 가즈사 배치가 도요토미 정권의 간토 처분과 맞물려 있었다고 본다. 그가 처음 들어간 곳은 오타키가 아니라 만키성이었고 반년쯤 뒤에 오타키성을 거성으로 삼았다는 것이 근년의 연구다.17
가즈사 남쪽 아와에는 호조 가문 멸망 뒤에도 살아남은 사토미(里見) 가문이 있었다. 나카지마 쓰기타로(中嶋次太郎)는 도쿠가와 가신단 연구의 고전인 『도쿠가와 가신단의 연구(徳川家臣団の研究)』(1966)에서 타다카츠를 오타키에 둔 이유를 사토미 가문에 대한 대비로 설명했다. 간토 신영지의 남동쪽 끝, 아직 복속이 확실하지 않은 다이묘와 맞닿은 자리에 가장 신뢰하는 야전 지휘관을 둔 것이다.17
오타키 시절의 구체적 치적은 사료가 많지 않다. 현재의 지바현 오타키마치 공식 홈페이지에는 혼다 타다카츠가 성을 크게 고쳐 쌓고 성하 마을을 만들었다고 소개돼 있지만, 흔히 말하는 “3층 4계 천수각”은 학계에서 실존했었는지 여부부터 논쟁 중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1609년 이곳을 찾은 스페인 사람 돈 로드리고의 기록에 천수각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 천수각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의 근거로 인용된다.17 오타키에 타다카츠가 천수각을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타키라는 곳과 타다카츠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1601년 구와나로 옮긴 뒤에도 오타키는 차남 타다토모의 영지로 이어졌고 타다카츠의 분골도 오타키 료겐지에 모셔졌다.
5. 세키가하라 — 군감, 혈판 기청문, 그리고 전공
5-1. 히데타다군에서 선발대 군감으로
게이초(慶長)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타다카츠의 이미지는 흔히 “이에야스 본대에서 싸운 맹장”이지만 당시 그의 실제 동선은 조금 다르다. 타다카츠는 원래 이에야스의 본대가 아니라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타다가 이끄는 나카센도 부대에 속해 있었다. 나카센도 부대가 상대할 곳이 서군에 선 사나다 마사유키의 우에다성이었고, 타다카츠는 마사유키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위인 사나다 노부유키를 통해 사나다 가문과 교섭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카이도 쪽 선발대의 군감으로 먼저 나가 있던 이이 나오마사가 눈병을 앓자, 타다카츠가 그쪽으로 옮겨 나오마사와 함께 군감을 맡았다. 사나다 교섭과 혼다 가문의 주력은 적자 타다마사에게 넘어가 히데타다군에 남았다. 연구자 미즈노 도모키(水野伍貴)의 「세키가하라의 역과 혼다 타다카츠(関ヶ原の役と本多忠勝)」(2020)가 이 경위를 정리했다.18
이이 나오마사와 혼다 타다카츠 두 사람이 감독한 선발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비롯한 도요토미 은고 다이묘들이었다. 8월 오야마에서 서쪽으로 출발한 이들은 기요스에 모였다가 기후성을 함락하고 아카사카에 진을 쳤다. 이에야스 본대가 에도를 떠난 것은 9월 1일이다. 타다카츠는 본대보다 한 달 먼저 전선에 나가 도쿠가와 가문을 대신해 선발대를 감독하고 교섭을 맡았던 셈이다. 에도 전기에 쓰인 『간키부칸(管窺武鑑)』에는 이 두 사람의 역할이 “검사(檢使)“로 기록돼 있다.18
5-2. 9월 14일의 혈판 기청문
세키가하라 본전 전날인 9월 14일, 타다카츠와 나오마사는 서군 총대장 모리 테루모토의 일족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와 모리 가신 후쿠하라 히로토시(福原広俊)에게 피로 서명한 기청문을 보냈다. 이 문서는 「킷카와 가문 문서(吉川家文書)」와 「모리 가문 문서(毛利家文書)」에 남아 있다.19
一 対輝元聊以内府御如在有間敷候事 一 御両人別而被対内府御忠節上者以来内府御如在被存間敷候事 一 御忠節相究候者内府直之墨付輝元へ取候而可進之事 付御分国之事不及申如只今相違有間敷候事 慶長五年九月十四日 本多中務太輔忠勝(血判) 井伊兵部少輔直政(血判)
하나, 내부(이에야스)께서는 테루모토에 대해 조금도 소홀히 하시지 않을 것. 하나, 두 분께서 특별히 내부께 충절을 다하신 이상, 앞으로 내부께서 두 분을 소홀히 여기시는 일은 없을 것. 하나, 충절이 확인되면 내부의 직접 묵서를 테루모토께 받아 드릴 것. 덧붙여 영국(領國)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지금 그대로일 것. 게이초 5년 9월 14일, 혼다 나카츠카사노다유 타다카츠(혈판), 이이 효부쇼유 나오마사(혈판)
킷카와 히로이에·후쿠하라 히로토시 앞 혈판 기청문(1600년 9월 14일)
다음 날 본전에서 킷카와 히로이에는 난구산에 포진한 모리군의 앞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 전후 9월 23일에는 모리 테루모토가 타다카츠와 나오마사 앞으로 주선에 감사하며 오사카성 니시노마루를 비우겠다는 기청문을 냈다. 9월 30일에는 타다카츠·나오마사·야스마사 세 사람이 모리 가문의 인질 제출 등 최종 조건을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전달했다. 14일자 기청문은 전후 모리 처리 교섭의 기준점이 됐다.20 14일 같은 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중신들에게도 두 사람이 함께 서명한 같은 취지의 기청문이 나갔다.
5-3. 본전의 전공 — 확인되는 것과 아닌 것
본전에서 타다카츠의 개인 전공은 무엇이 확인될까. 흔히 전하는 이야기를 출전별로 따져 보았다.21
| 흔히 전하는 이야기 | 출전 | 판단 |
|---|---|---|
| 병력 500명으로 참전, 본대 2,500명은 타다마사가 이끌고 히데타다군에 배속 | 일본어 위키백과 등. 해당 문장에 출전 표기 없음 | 수치의 출전 미확인. 주력이 타다마사 쪽에 있었다는 방향 자체는 5-1의 경위와 맞다 |
| 적 수급 90여 개 | 『간세이 조슈쇼카후』(1812) 단독 | 동시대 문서 없음 |
| 애마 “미쿠니쿠로(三国黒)“가 시마즈군 총탄에 쓰러짐 | 『이에타다 일기 증보추가』(1665)·『한칸후』(1702)에는 말을 잃고 가신 가지 킨페이가 말을 바쳤다고 나옴. “미쿠니쿠로”라는 이름은 1차 사료에 없음 | 말을 잃은 일은 개연성 있음. 이이 가문 가신 미우라 가문의 후대 가전에는 말을 바친 사람이 미우라 야스히사로 나와 엇갈림 |
| 전후 “생각보다 약한 적이었습니다”라고 답함 | 『도쇼구 고짓키 부록』(1840년대) | 후대 일화 |
이렇게 혼다 타다카츠 개인이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에 직접 누구를 베어 어떤 전공을 세웠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전쟁에서 그가 맡은 일은 기록에 잘 남아 있다. 이에야스의 본대보다 한 달 앞서 전선에 나가 도요토미 은고 다이묘들을 감독했고, 본전 전날 서군의 한 축을 묶어두는 문서에 피로 서명했으며, 전후에는 모리 처리와 논공행상 심의에 참여했다.20
5-4. 구와나 이봉과 사나다 구명
게이초 6년(1601년) 2월, 타다카츠는 가즈사 오타키 10만 석에서 이세 구와나 10만 석으로 옮겼다. 석고가 같으니 가증은 아니지만 옛 영지 오타키는 차남 타다토모에게 5만 석으로 주어져 혼다 가문 전체로는 15만 석이 됐다. 이에야스가 5만 석을 더 주려 했으나 타다카츠가 사양해 차남에게 돌렸다는 이야기가 『오타키마치사(大多喜町史)』에 “일설”로 실려 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한 나라를 기대하며 가신들에게 줄 지행 목록까지 만들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태워버렸다는 출처 없는 이야기도 돌아다닌다. 양쪽 모두 근거가 빈약해 어느 쪽도 사실이라 하기는 어렵다.22
구와나는 도카이도가 이세만을 건너 이세로 들어가는 요충이었고, 오사카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서쪽에서 견제하는 자리였다. 같은 시기 이이 나오마사가 오미 사와야마에 들어간 것과 같은 성격의 배치로 볼 수 있다.22
세키가하라 직후 타다카츠는 사나다 부자의 목숨을 구하는 데도 나섰다. 서군에 선 사나다 마사유키와 노부시게(유키무라)는 우에다성에서 히데타다군을 붙잡아둔 장본인이라 처형이 거론됐다고 전한다. 동군에 선 장남 노부유키가 아버지와 동생의 목숨을 탄원했고 장인인 타다카츠가 여기에 동조해 이에야스를 설득했다. 사나다 가문 연구자 히라야마 유(平山優)는 이 일화에 대해 “혼다 가문이 그 뒤에도 노부유키의 탄원을 도왔으므로 사실일 것”이라고 평가한다. 두 사람은 목숨을 건져 기이 구도야마(九度山)로 유배됐다. 청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위와 함께 농성하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는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다. 한편 사나다 가문 쪽 기록 「사나다케 부코 고조노 오보에(真田家武功口上之覚)」(1617년 이후 성립)에는 이이 나오마사가 앞장서 이에야스를 설득하고 타다카츠가 여기에 동조했다고 나와 있다. 다만 나오마사가 직접 남긴 문서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히라야마 유는 부자가 처형될 뻔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노부유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본다.23
6. 구와나 번주 — 게이초 마치와리
6-1. 1601년 4월 24일의 입성
구와나 선창가의 양조업자 오타 요시키요(太田吉清)는 1599년 가을부터 1615년 정월까지 마을의 일을 일기로 남겼다. 『게이초 지키(慶長自記)』라 불리는 이 기록에 게이초 6년(1601년) 4월 24일 타다카츠가 적자 타다마사와 함께 처음 구와나에 들어왔다는 대목이 있다. 번주가 아니라 그를 맞은 마을 사람이 남긴 기록으로, 구와나 번정 초기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동시대 재지 사료다.24
이때 타다카츠는 쉰네 살이었다. 전장에서 보낸 40년을 뒤로하고 그는 이제 한 도시를 다시 만드는 작업을 맡게 됐다.
6-2. 도시 계획을 새로 짜다
구와나시와 구와나시박물관은 타다카츠가 입봉 직후 성을 고쳐 쌓고 “게이초의 마치와리(慶長の町割)“를 단행했다고 설명한다. 마치와리는 성하 마을의 구획을 정하는 도시 계획이다. 구와나시박물관장 스기모토 류(杉本竜)는 타다카츠가 중세의 구와나를 거의 빈 땅으로 만든 다음 근세 성하 마을을 새로 조성했다고 말한다.25
구와나시의 설명에 따르면 마치와리의 핵심은 세 가지다. 해자로 성곽 구역과 주거 구역을 나눴다. 도카이도를 마을 안으로 통과시키고 항구, 무가 거주지, 역참의 기능을 구역별로 배치했다. 이때 정한 구획과 동네 이름 상당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구와나는 성하 마을이자 항구 마을이고 어촌이자 역참 마을이라는 네 가지 성격을 함께 갖게 된다.25
물길도 바꿨다. 마치야가와(町屋川, 지금의 인베가와)의 흐름을 마을을 비껴가도록 돌렸고, 오야마다가와(大山田川)도 손봤다는 향토사 서술이 있다. 다만 물길을 어느 방향으로 돌렸는지는 시 관광 사이트, 박물관 취재 기사, 지역 향토사 사이트마다 서로 다르게 나와 있다. 공사 기간 4년이라는 수치도 향토사 사이트 한 곳에만 나온다. 물길을 돌렸다는 사실까지만 확인된다.25
구와나성은 바다에 면해 부채를 편 모양이라 “오기성(扇城)“이라 불렸다. 4층 천수각과 망루 51기, 다몬야구라 46기를 갖춘 성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성곽 전체가 완성된 것은 타다카츠 이후 후대의 번주 대에 이르러서라는 서술도 있으며, 타다카츠 대는 성곽 건설에 착수하는 단계로 보는 편이 맞다. 천수각은 1701년 화재로 불탄 뒤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25
6-3. 시치리노와타시는 그의 사후
구와나를 대표하는 풍경인 시치리노와타시(七里の渡し), 그러니까 아츠타의 미야에서 구와나까지 바닷길 7리를 건너는 도카이도 해상 구간을 만든 것도 흔히 타다카츠의 업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1601년 도카이도에 역마 제도가 시행되면서 구와나가 역참으로 지정된 것과 타다카츠가 구와나에 부임한 것이 같은 해라서 이렇게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야와 구와나 사이의 해로가 “시치리노와타시”로 자리 잡은 것은 겐나 2년(1616년) 무렵이다. 하야시 라잔은 그해의 여행기 『헤이신 기코(丙辰紀行)』에 “아츠타에서 바닷길 7리를 건너 이세 구와나에 이른다”고 적었다. 1816년의 『오와리국 지명고(尾張国地名考)』에는 이 뱃길이 “겐나 2년부터 성해졌다”고 나와 있다. 타다카츠가 죽은 지 6년 뒤다.26
타다카츠가 역참과 항구와 성하를 한 도시 안에 배치하는 계획을 짠 것은 사실이지만 그 위에서 뱃길이 번성한 것은 다음 세대의 일이다. 구와나시와 박물관이 그를 “구와나번 창설의 명군”이라 부르는 것도 타다카츠의 대에 도시가 번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타다카츠가 도시의 기본 계획을 정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25
7. 가족과 만년, 그리고 헤이하치로 가문의 행방
7-1. 혼인으로 묶은 두 가문
타다카츠의 정실은 아치와 겐테츠의 딸 오히사노카타(見星院)이고, 측실로 마츠시타 야이치의 딸 오토메노카타(月量院)가 있었다. 자녀로는 장녀 코마츠히메(1573–1620), 장남 타다마사(1575–1631), 차남 타다토모(1582–1615)와 딸 여럿이 알려져 있다.27
가족사에서는 두 혼인이 도드라진다. 하나는 장녀 코마츠히메가 사나다 마사유키의 장남 노부유키에게 시집간 일이다. 1585년 누마타 영유 문제로 도쿠가와와 사나다가 싸운 제1차 우에다 합전 뒤의 화해책이었다. 혼인 연도는 1583년부터 1590년까지로 설이 여럿 갈리는데, 우에다시립박물관은 1589년으로 본다. 코마츠히메가 이에야스의 양녀 자격으로 시집갔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사나다 가문의 후대 공식 문서와 보리사 다이에이지의 기록에는 히데타다의 양녀로 적혀 있다.27
NHK 대하드라마 『도우스루 이에야스(どうする家康)』(2023)에도 나오는 장면인데 1600년 코마츠히메가 누마타성을 지키며 서군으로 가던 시아버지 마사유키의 입성을 거절했다는 일화는 18세기 편찬물 『조잔키단(常山紀談)』과 사나다 가문의 가기(家記)에서 나온다. 역사학자 구로다 모토키(黒田基樹)는 당시 코마츠히메가 오사카에서 오타니 요시츠구의 보호 아래 있었다는 서장을 근거로 이 일화를 부정하고, 히라야마 유는 오사카에 있던 그녀가 이미 1599년에 누마타로 돌아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일화의 진위 여부는 이렇듯 학계에서도 아직 논쟁 중이지만, 이 혼인으로 맺어진 인연이 사나다 부자의 구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앞에서 본 것과 같다.27
다른 하나는 장남 타다마사가 1590년 무렵 이에야스의 손녀 쿠마히메(熊姫)와 혼인한 일이다. 쿠마히메는 1579년 할복으로 생을 마친 이에야스의 장남 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의 딸로 오다 노부나가의 외손녀다. 딸은 사나다로, 며느리는 도쿠가와 본가에서. 타다카츠는 혼인으로 자기 가문을 도쿠가와와 사나다 양쪽에 이어 두었다.27
7-2. 소외된 무장이었나
타다카츠의 만년은 흔히 “문치파 혼다 마사노부에게 밀려난 무공파의 쓸쓸한 말년”으로 묘사된다. 같은 혼다 성이지만 전혀 다른 가문인 마사노부를 두고 “사도노카미(마사노부)는 겁쟁이다, 같은 혼다라도 그놈과는 무관하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 발언은 출전을 확인할 수 없었다. 또한 타다카츠의 은거를 마사노부의 권세와 인과관계로 연결한 학술 근거도 찾지 못했다.28
확인되는 사실만 놓고 보면 사정이 조금 다르다. 게이초 9년(1604년) 타다카츠가 병을 이유로 은거를 청하자 이에야스가 만류했다. 은거가 받아들여진 것은 게이초 14년(1609년) 6월로, 가독은 타다마사가 이었다. 은거한 뒤인 1610년 윤2월에도 쇼군 히데타다의 다하라 사냥에 동행했다는 기록이 있다.29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야전 지휘관이었던 타다카츠와 같은 무장의 설 자리는 분명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타다카츠에게는 주군이 은거를 한 번 붙잡을 만큼의 신임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7-3. 구와나에서의 죽음
만년의 타다카츠는 눈병을 앓았다. 『다이니혼시료』가 수록한 한 가문 기록은 그가 눈병을 근심하여 “낫지 않을 병이라면 어서 목숨을 거둬 달라”고 이세의 신에게 빌었다고 전한다. 같은 곳에는 마치야가와의 홍수를 보러 나갔다가 몸이 이상해 성으로 돌아와 그날 죽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29
게이초 15년(1610년) 10월 18일, 타다카츠는 구와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 가신 나카네 타다자네(中根忠実)와 가지 카츠타다(梶勝忠)가 뒤따라 순사했다. 두 사람은 구와나 조도지의 타다카츠 묘 좌우에 묻혔다. 가지 카츠타다는 5장의 세키가하라 기록에서 말을 잃은 주군에게 자기 말을 바쳤다고 전하는 바로 그 가지 킨페이다.29
7-4. 유훈과 사세, 그리고 편찬자의 판단
타다카츠가 남긴 것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유훈이 있다.
侍は首取らずとも不手柄なりとも、事の難に臨みて退かず、主君と枕を並べて討死を遂げ、忠節を守るを指して侍と曰ふ。
무사란 적의 목을 베지 못하더라도, 공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일이 어려울 때 물러서지 않고 주군과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전사하며 충절을 지키는 자를 가리켜 무사라 한다.
『메이쇼 겐코로쿠』(1869)가 「타다카츠 유서(忠勝遺書)」에서 인용한 대목
그런데 이 문장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간행본은 사후 259년 뒤의 『메이쇼 겐코로쿠』로, 근대 국가의 사료 편찬 기관은 이 텍스트를 아예 걸러냈다. 『다이니혼시료』 편자는 혼다 가보를 인용하면서 말미의 유교(遺教) 부분을 잘라내고 “의심스러우므로 채택하지 않는다(疑ハシキヲ以テ採ラズ)“는 주를 달았다.30
또 흔히 “혼다 타다카츠 기키가키(本多忠勝聞書)“가 타다카츠의 교훈집으로 소개되지만, 이 책은 타다카츠가 가까이서 들은 이에야스의 말을 적었다는 형식의 어록이다. “책을 읽는 것은 몸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유명한 문장도 이 책 안에서는 이에야스의 말로 적혀 있다.30 타다카츠의 사세(辞世)로 알려진 “죽고 싶지 않구나, 아아 죽고 싶지 않구나(死にともな 嗚呼死にともな)” 유형의 노래도 『메이쇼 겐코로쿠』에는 타다카츠를 따라 순사한 가신의 하인이 남긴 노래로 기록돼 있다.30
7-5. 헤이하치로 가문의 행방
타다카츠가 죽은 뒤 혼다 가문은 그가 살아서 보지 못한 굴곡을 겪는다.31
| 연도 | 사건 |
|---|---|
| 1615 | 차남 타다토모, 오사카 여름의 진 텐노지 전투에서 선봉으로 돌입해 전사(34세). 겨울의 진에서 실수로 이에야스에게 질책받은 뒤였다 |
| 1616 | 손자 타다토키(타다마사의 아들)가 쇼군 히데타다의 장녀 센히메와 혼인. 센히메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미망인이었다 |
| 1617 | 타다마사, 하리마 히메지 15만 석으로 이봉. 타다토키는 센히메의 화장료로 별도 10만 석 |
| 1621 | 타다토키와 센히메의 아들 코치요, 세 살로 요절 |
| 1626 | 5월 타다토키가 결핵으로 31세에 사망, 가신 두 명이 순사. 6월 타다마사의 정실 쿠마히메(이에야스의 손녀)도 사망 |
| 1769 | 여러 차례 전봉 끝에 혼다 헤이하치로 가문, 미카와 오카자키 5만 석으로 입봉 |
| 1871 | 폐번치현까지 오카자키 번주로 존속 |
타다카츠가 딸과 며느리로 맺은 도쿠가와와의 혼인은 그의 사후 손자 대에서 센히메라는 이름으로 한 번 더 이어졌다. 도요토미 가문이 무너진 오사카성에서 살아 나온 센히메를 맞은 것이 혼다 가문이었다. 그 혼인의 흔적은 센히메를 위해 지은 히메지성 니시노마루의 케쇼야구라(化粧櫓)라는 건물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차남은 오사카에서 전사했고, 센히메와 타다토키 사이의 아들은 세 살에 죽었으며, 타다토키 자신도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쿠마히메까지 잃으면서 히메지의 혼다 가문은 한 해에 적자와 안주인을 모두 잃었다.31
그 뒤 헤이하치로 가문은 야마토 고리야마, 무츠 후쿠시마, 에치고 무라카미, 미카와 가리야, 이와미 하마다 등을 전전했다. 그리고 메이와 6년(1769년), 타다카츠가 태어난 미카와 오카자키의 번주가 되어 돌아왔다. 가문은 그곳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까지 유지되다가 메이지 유신과 폐번을 맞았다.31 1915년 오카자키에서 “이에야스·타다카츠 두 공 300년제”가 열렸을 때, 탄생지에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 탄생지”라는 비석을 세운 사람은 그의 후손 혼다 타다타카(本多忠敬)였다.32
8. 인물평 — 사료로 확인되는 타다카츠
혼다 타다카츠에 붙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은 거의 모두 뒤늦게 기록됐다. “57전 무상”은 타다카츠 사후 92년, 노부나가의 칭찬과 류센지 강가에서 말에게 물을 먹인 장면, “동국 제일의 용사”는 각 사건으로부터 약 230년·259년·331년 뒤의 문헌에서 처음 확인된다. 숫자는 문헌마다 바뀌고 노래의 작자와 장소도 시대를 따라 옮겨 다녔다. 전설이 커진 경로도 대략 보인다. 혼다 가문이 막부에 제출한 가보가 『한칸후』와 『간세이 조슈쇼카후』에 들어갔고, 막부가 편찬한 『도쿠가와 짓키』가 장면을 극적으로 완성했으며, 메이지의 『메이쇼 겐코로쿠』와 1915년의 300년제가 그것을 대중에게 넘겼다. 이 과정에서 타다카츠는 한 사람의 무장에서 “미카와 무사의 이상형”으로 바뀌었다(이 흐름은 필자의 정리다).
하지만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전설적인 이야기들을 빼고 봐도 사료로 확인되는 행적이 적지 않다. 그는 열아홉 살에 이에야스 직속 선봉 부대를 맡아 예순 살이 넘어 은거할 때까지 4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켰다. 이에야스가 “자기 사람”들을 맡긴 지휘관이었고 1572년의 퇴각전처럼 위험한 후미에 선 사람이었다. 적이었던 다케다 쪽 기록조차 사슴뿔 투구를 쓴 스물다섯 살의 그를 기억했다. 동시대 문서 속의 타다카츠는 의외로 싸우는 장수보다 교섭 문서에 이름을 올린 가신으로 더 자주 나온다. 1568년 고쿠진에게 보낸 부장, 이가고에 직후 이시카와 카즈마사와 함께 서명한 문서, 히데요시가 굳이 이름을 짚어 부른 혼례 사자, 세키가하라 전날 피로 서명한 기청문이 그렇다. 이에야스는 전장에서 믿는 사람에게 교섭도 맡겼고, 타다카츠는 그 두 역할을 함께 해낸 드문 가신이었다.
그는 사위의 아버지와 동생을 살리려 주군 앞에 섰고 딸과 며느리로 도쿠가와와 사나다를 묶었다. 쉰넷에 들어간 구와나에서는 해자와 길과 물길을 새로 그었다.
구와나에는 그가 정한 동네 이름이 지금도 여럿 남아 있다. 그가 죽은 뒤 다른 곳을 떠돌던 혼다 가문은 160년 가까이 지나 그가 태어난 오카자키로 돌아와 마지막 번주의 시대를 보냈다.
출처
동시대 문서·일기 (모두 활자본 또는 2차 자료를 통한 재인용)
- 「祝田文書」 — 에이로쿠 11년(1568) 11월 11일 이에야스 서장의 부장(『시즈오카현 사료(静岡県史料)』 第五輯 수록)
- 「吉村文書」·「高木文書」 — 덴쇼 10년(1582) 6월 14일 연서·단독 문서
- 「滝川文書」 — 덴쇼 18년(1590) 8월 7일 타다카츠 서장, 나고야대학 소장
- 「吉川家文書」·「毛利家文書」 — 게이초 5년(1600) 9월 14일 혈판 기청문, 9월 30일 연서
- 『家忠日記』 — 마츠다이라 이에타다의 일기(1577–1594)
- 『慶長自記』 — 구와나 오타 요시키요의 일기(1599–1615), 『구와나시사 보편(桑名市史 補編)』 수록
편찬물·일화집 (성립 시기 명시)
- 『信長公記』 — 오타 규이치, 아네가와 전투 수급 기록(2차 자료를 통한 재인용)
- 『真柄氏家記覚書』 — 마가라 가문 기록, 2020년대 후쿠이현립역사박물관 확보(보도를 통한 재인용)
- 『甲陽軍鑑』 — 겐나 연간(1615–1624) 오바타 카게노리 정리 (Wikisource 원문 대조)
- 『三河物語』 — 1622년 무렵 오쿠보 타다타카 (Wikisource 원문 대조)
- 『家忠日記増補追加』 — 1665년 무렵
- 『管窺武鑑』 — 에도 전기
- 『藩翰譜』 — 겐로쿠 15년(1702) 아라이 하쿠세키
- 『関原軍記大成』 — 1713년 무렵 성립(통설), 첫 수급 일화의 확인된 가장 이른 기록
- 『明良洪範』 — 에도 중기 일화집(『東照宮御実紀附録』 인용을 통해 확인)
- 『柏崎物語』 — 성립 연도 미상(『東照宮御実紀附録』 인용을 통해 확인)
- 『常山紀談』 — 18세기 유아사 조잔
- 『榊原家譜』 — 사카키바라 가문 편찬 가보
- 『寛政重修諸家譜』 — 1812년 완성, 막부 공식 계보
- 『日本外史』 — 1827년 라이 산요
- 『東照宮御実紀』·『東照宮御実紀附録』(『徳川実紀』) — 1809–1843년 막부 편찬 (Wikisource 원문 대조)
- 『名将言行録』 — 1869년 오카야 시게자네
- 『故花菴備忘録』 — 에도 후기, 성립 연도 미상
- 『本多平八郎聞書』 — 『史籍雑纂』(1912) 所収 『松のさかへ』 巻一
- 『大日本史料』 第十二編之七 — 도쿄제국대학 사료편찬괘. 〔本多家譜〕·〔参考本多系伝〕·〔落穂雑談一言集〕·〔本多家武功聞書〕 수록
- 『家康忠勝両公三百年祭紀要』 — 1915년
- 林羅山 『丙辰紀行』(1616), 『尾張国地名考』(1816) — 시치리노와타시 관련(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를 통한 재인용)
현대 연구
- 柴裕之, 「豊臣政権の関東仕置と徳川領国―本多忠勝の上総万喜入城を通じて―」, 佐藤博信 編 『中世房総と東国社会』, 岩田書院, 2012
- 水野伍貴, 「関ヶ原の役と本多忠勝」, 『研究論集 歴史と文化』 6号, 2020
- 尾崎晃, 「本多忠勝(一五四八~一六一〇)—徳川幕府創出の功労者」, 『千葉史学』 54号, 2009
- 中嶋次太郎, 『徳川家臣団の研究』, 吉川弘文館, 1966
- 村川浩平, 「天正・文禄・慶長期、武家叙任と豊臣姓下賜の事例」, 『駒沢史学』 80号, 2013
- 平山優, 『真田信之 父の知略に勝った決断』, PHP新書, 2016
- 野田浩子, 『彦根城博物館研究紀要』 18, 2007 — 사나다 부자 구명과 이이 나오마사(「真田家武功口上之覚」 인용)
- 大鹿真和, 「本多忠勝の居所と行動」, 京都先端科学大学 人文学会, 2022 (학부 세미나 논문. 사료 목록 대조용으로 참고)
- 郡義武, 『桑名藩』(시리즈 번사) —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 인용을 통해 확인
- 『村上郷土史』(1931), 『오카자키시사(岡崎市史)』(1934), 南方熊楠 『南方随筆』(1926) — 낙수 작자명·카라노카시라 해석의 근대 변이 확인용
-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本多忠勝の娘で徳川家康の養女となった稲(小松姫)」·「徳川家康から隠居を慰留された本多忠勝の晩年」)
- 구로다 모토키·히라야마 유의 코마츠히메 누마타 일화 관련 학설(일본어 위키백과 「小松姫」 항목 인용을 통해 확인)
공식·표준 참고자료
- 文化庁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黒糸威胴丸具足〈鹿角脇立兜・小具足付/(本多忠勝所用)〉」
- 千葉県教育委員会·千葉県立中央博物館 「紙本著色本多忠勝像」 해설, 桑名市 文化財 「紙本淡彩 本多忠勝像」
- 岡崎市 「市指定史跡 本多忠勝誕生地」
- 桑名市 「桑名の歴史をたずねて」·「藩主一覧」·キッズページ 「本多忠勝」, 桑名市立中央図書館 「『慶長自記』から見る桑名」
- 大多喜町 「房総の小江戸大多喜」
- 上田市立博物館 「上田人物伝 小松姫」
- 国立国会図書館 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각 사료 활자본), 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 「七里の渡し」
- 国土交通省 多言語解説文(姫路城)
- 코토방크(kotobank.jp) 「本多忠勝」(日本大百科全書·世界大百科事典)
-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本多忠朝」・「本多忠刻」・「本多忠政」・「妙高院」・「小松姫」・「真田昌幸」・「吉川広家」・「小牧・長久手の戦い」・「関ヶ原の戦い」・「大多喜城」・「岡崎藩」 항목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D, 개별 각주에 표시)
- 歴史街道(PHP), PR TIMES(桑名市博物館 보도자료), 中日新聞, 文春 本の話, 日経ビジネス(加来耕三 연재), 刀剣ワールド, 攻城団, artexhibition.jp, 益世地区 향토사 사이트, 개인 연구 블로그 note(「本多平八郎忠勝」 연재)
확인하지 못한 것
- 혼다 타다카츠를 다룬 학술 출판사의 단독 평전은 CiNii 검색 범위에서 찾지 못했다. 연구 성과의 중심은 구와나시박물관(1992, 2021)·오카자키시미술박물관(2012)·지바현립 소난박물관(1985)의 전시 도록이며, 이번 조사에서는 도록 원문을 열람하지 못했다.
- 류센지 일화, 57전 무상 전설을 학계 연구자가 직접 논평한 글은 찾지 못했다. 이 글의 판단은 문헌 성립 연대 대조에 근거한다.
- 『落穂雑談一言集』·〔本多家武功聞書〕 등 혼다 가문 쪽 기록의 정확한 성립 연대.
- “코스기 사콘”이라는 작자명이 처음 등장한 문헌.
- 9월 14일 기청문의 전사문은 『大日本古文書』 활자본과 대조하지 못했다.
- 한국어로 된 타다카츠 단독 연구서·번역서는 찾지 못했다.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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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방크 「本多忠勝」(日本大百科全書·世界大百科事典);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 항목(『오타키마치사(大多喜町史)』 1991 인용); 岡崎市 「市指定史跡 本多忠勝誕生地」. ↩ ↩2
-
『寛政重修諸家譜』 巻第六百八十一(1923년 활자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코토방크 「本多忠勝」(世界大百科事典); 大鹿真和 2022(『家忠日記増補追加』 재인용). 첫 수급 일화: 『関原軍記大成』 巻15(1713년 무렵 성립은 통설,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OCR 텍스트로 확인); 『寛政重修諸家譜』 巻第六百八十一(1923년 활자본 617쪽); 岡谷繁実 『名将言行録』 巻之五十四(1944년 岩波판 28–29쪽, 1896년판 453쪽, 페이지 이미지로 확인); 『大日本史料』 第十二編之七 〔本多家譜〕(永禄4年7月 長沢으로 기재, 편자 주 “寛政書上本多系譜は永禄五年”). 1561년 도야네설은 『武徳編年集成』·『日本外史』 등. 『藩翰譜』·『武徳大成記』는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다. 개종설은 일본어 위키백과 본문에 각주 없이 실려 있다. ↩ ↩2 ↩3
-
『寛政重修諸家譜』(大鹿 2022 재인용); 尾崎晃, 『千葉史学』 54号, 2009(일본어 위키백과 재인용); 大鹿 2022(小宮山敏和의 “御付人” 개념 적용). “55기”는 일본어 위키백과 「旗本先手役」 항목과 일부 해설 사이트에 보이나 전거가 제시돼 있지 않다. ↩ ↩2
-
「祝田文書」(『시즈오카현 사료(静岡県史料)』 第五輯, 1941), 大鹿 2022 본문과 주(14) 재인용. ↩
-
大鹿 2022 제3장 「本多忠勝の武功検証」; 簑輪諒, 文春 本の話 칼럼(『信長公記』 수급 기록 인용); 中日新聞 「真柄十郎左衛門 実は2人いた」(2022-03-08); 『東照宮御実紀』 巻二(Wikisource). ↩ ↩2
-
新井白石 『藩翰譜』(1896년 활자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寛政重修諸家譜』 巻第六百八十一; 『大日本史料』 第十二編之七 慶長15年10月18日条(〔本多家譜〕·〔参考本多系伝〕·〔落穂雑談一言集〕); 頼山陽 『日本外史』(1873년 간본); 岡谷繁実 『名将言行録』 巻之五十四(1944년 활자본). 『藩翰譜』의 “終に一度の不覚なし” 동일 표현 용례는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전문검색으로 확인. ↩ ↩2 ↩3 ↩4
-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 항목(해당 일화의 출처로 『戦国武将 群雄ビジュアル百科』(ポプラ社)를 제시).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전문검색에서 에도·메이지기 용례를 찾지 못했다. ↩
-
『甲陽軍鑑』 品第三十九(Wikisource); 『大日本史料』 第十二編之七 〔本多家武功聞書〕; 『東照宮御実紀附録』 巻二(Wikisource, 『柏崎物語』 인용); 『名将言行録』 巻之五十四; 『村上郷土史』(1931)·『오카자키시사(岡崎市史)』(1934)(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南方熊楠 『南方随筆』(1926). ↩ ↩2 ↩3 ↩4
-
『寛政重修諸家譜』 巻第六百八十一; 『大日本史料』 第十二編之七 〔落穂雑談一言集〕; 『名将言行録』 巻之五十四;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家康忠勝両公三百年祭紀要』 1915 인용); 『東照宮御実紀附録』 巻廿五(Wikisource, 『明良洪範』 인용). ↩ ↩2
-
文化庁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黒糸威胴丸具足」 해설; artexhibition.jp 佐野美術館 「名刀ズラリ」 리포트(2025-01-22); 『故花菴備忘録』(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名将言行録』 巻之五十四;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蜻蛉切 항목). ↩ ↩2 ↩3
-
千葉県教育委員会 「紙本著色本多忠勝像」 해설; 千葉県立中央博物館 「本多忠勝像」 해설; 桑名市 文化財 「紙本淡彩 本多忠勝像」; 加来耕三, 日経ビジネス 연재(2023-08-04, 출전 표기 없음). ↩
-
『東照宮御実紀』 巻三; 『東照宮御実紀附録』 巻四(Wikisource); 大鹿 2022(『家忠日記増補追加』·『寛政重修諸家譜』 대조, 「吉村文書」·「高木文書」 주석). ↩ ↩2 ↩3
-
『三河物語』 第三下(Wikisource); 『甲陽軍鑑』 品第五十九(Wikisource); 『東照宮御実紀』 巻三; 『東照宮御実紀附録』 巻四; 大鹿 2022(『家忠日記増補追加』·『寛政重修諸家譜』 요약);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郡義武 『桑名藩』 15쪽 인용). ↩ ↩2 ↩3
-
일본어 위키백과 「小牧・長久手の戦い」 항목(『豊臣秀吉文書集成』·『기후현사(岐阜県史)』 수록 서장 사본 인용). ↩
-
大鹿 2022(『家忠日記』 인용); 『東照宮御実紀』 巻三(Wikisource). ↩
-
『榊原家譜』(이 시리즈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편 각주 참조);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村川浩平, 『駒沢史学』 80号, 2013 인용); 코토방크 「本多忠勝」(日本大百科全書). ↩
-
柴裕之 2012; 「滝川文書」(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 재인용); 中嶋次太郎 1966(일본어 위키백과 재인용); 大多喜町 「房総の小江戸大多喜」; 일본어 위키백과 「大多喜城」. ↩ ↩2 ↩3 ↩4
-
水野伍貴 2020(大鹿 2022·일본어 위키백과 재인용); 『管窺武鑑』 下之下 第九巻(Wikisource). ↩ ↩2
-
「吉川家文書」·「毛利家文書」(일본어 위키백과 「吉川広家」 항목). 전사문은 개인 연구 블로그(note, 「慶長5年9月14日 吉川広家・福原広俊宛本多忠勝・井伊直政血判起請文」)에 실린 것을 옮겼으며, 『大日本古文書』 활자본과는 대조하지 못했다. ↩
-
大鹿 2022(『新訂徳川家康文書の研究』·「毛利家文書」 인용); 개인 연구 블로그(note) 「戦後交渉への関与」.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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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関ヶ原の戦い」; 大鹿 2022(『寛政重修諸家譜』·『家忠日記増補追加』·『藩翰譜』 인용); 『東照宮御実紀附録』 巻十(Wikisource); 개인 연구 블로그(note) 「忠勝の愛馬・三国黒は実在したのか」(미우라 가문 가전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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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鹿 2022(『当代記』·『慶長見聞録』 등 인용);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오타키마치사(大多喜町史)』 482–483쪽 “일설” 인용); 桑名市 キッズページ 「本多忠勝」.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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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山優 2016, PHP 온라인 발췌 기사 「真田信之、父・昌幸と弟・信繁の助命嘆願に奔走す」; 일본어 위키백과 「小松姫」・「真田昌幸」・「井伊直政」; 野田浩子, 『彦根城博物館研究紀要』 18, 2007(전거 「真田家武功口上之覚」, 『真田家文書』 中巻, 1982 수록). 해당 기록의 풀이는 野田浩子의 블로그 「彦根の歴史」(hikonehistory.hatenablog.com, 2017-12-02)에서 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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桑名市立中央図書館 블로그 「『慶長自記』から見る桑名」(『구와나시사 보편(桑名市史 補編)』 활자본 소개); 桑名市 「藩主一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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桑名市 「桑名の歴史をたずねて」; 歴史街道 「本多忠勝は武辺だけではない…」(桑名市博物館 杉本竜 인터뷰); PR TIMES 桑名市博物館 特別企画展 「本多忠勝と桑名」(2021) 보도자료; 益世地区 향토사 사이트 「益世地区の基盤」. ↩ ↩2 ↩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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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立国会図書館 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 「七里の渡し」(林羅山 『丙辰紀行』, 『尾張国地名考』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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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小松姫」・「妙高院」; 渡邊大門 「本多忠勝の娘で徳川家康の養女となった稲(小松姫)」; 上田市立博物館 「上田人物伝 小松姫」.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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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 逸話 절(출전 표기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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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방크 「本多忠勝」(日本大百科全書);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郡義武 『桑名藩』 16쪽 인용, 순사자와 가지 카츠타다의 통칭 킨페이); 渡邊大門 「徳川家康から隠居を慰留された本多忠勝の晩年」; 『大日本史料』 第十二編之七 〔参考本多系伝〕 소인 「横井氏筆記」.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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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将言行録』 巻之五十四(「忠勝遺書」 인용 및 순사 가신의 하인 사세 대목); 『大日本史料』 第十二編之七 편자 주; 『本多平八郎聞書』(『史籍雑纂』 所収, 1912).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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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朝」・「本多忠刻」・「本多忠政」・「妙高院」・「岡崎藩」; 桑名市 「藩主一覧」; 攻城団 「本多家(本多平八郎家)」; 国土交通省 多言語解説文(姫路城).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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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崎市 「市指定史跡 本多忠勝誕生地」; Wikimedia Commons 『家康忠勝三百年祭記念写眞帖』(1915) 수록 사진 파일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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