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나오마사 초상화, 히코네성박물관 소장. 텟잔 소준(哲山紹沌)의 찬문이 적혀 있어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1561–1602) — 도쿠가와 사천왕 ②

Q: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는 누구인가?

A: 토토미 이이노야(遠江国 井伊谷, 현 하마마츠시 일대)의 몰락한 고쿠진 영주 가문 출신 무장(1561~1602). 아버지 이이 나오치카(井伊直親)가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에게 모반 혐의로 처형된 뒤 유아기부터 소년기까지 신변 위협을 피해 숨어 자랐다고 전한다. 1575년경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발탁되어 이이 가문을 복권했다. 1582년 다케다 가문 멸망 이후 옛 다케다 가신단을 대거 흡수해 “아카조나에(赤備え)“라 불리는 붉은 갑주 부대를 이끌었다. 오다와라 정벌(1590) 이후 간토 이봉에서 도쿠가와 가신단 중 최대 규모인 코즈케 미노와(上野国 箕輪) 12만 석에 봉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1600)에서는 도쿠가와 본대 선진으로 나서 활약했으나 시마즈군 퇴각전 추격 중 총상을 입었고, 이 부상이 악화되어 1602년 42세로 사망했다. 사후 가신단이 새 거성 히코네성(彦根城)을 지어 히코네번(彦根藩)의 기반이 되었다. 후대에 사카이 타다츠구·혼다 타다카츠·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함께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불렸다.

한눈에 보는 이이 나오마사

항목내용
이름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いい なおまさ)
유명(幼名)·아명토라마츠(虎松)
통칭만치요(万千代) → 효부노쇼(兵部少輔)
생몰1561년 3월 4일(에이로쿠 4년 2월 19일) ~ 1602년 3월 24일(게이초 7년 2월 1일) — 향년 42
출신지토토미 이이노야(遠江国 井伊谷, 현 하마마츠시 호쿠구 인사초)
부친이이 나오치카(井伊直親, ?~1562, 처형)
모친히요(ひよ, 오쿠야마 아사토시의 딸)
후견인이이 나오토라(井伊直虎) — 성별·실체에 대한 학계 논쟁 진행 중
이에야스 출사1575년경, 코쇼(小姓)로 발탁
다케다 유신 배속1582년, “아카조나에” 대장
최종 영지오미 사와야마(近江 佐和山) 18만 석 — 도쿠가와 사천왕 중 최고액
최종 관직종4위하 슈리노다이부(修理大夫)
별명이이의 붉은 도깨비(井伊の赤鬼), 히토키리 효부(人斬り兵部)
사후사와야마→히코네성 이전, 히코네번(彦根藩) 성립의 기반

이이 나오마사의 생애는 사카이 타다츠구보다도 사료 문제가 까다롭다. 타다츠구는 널리 퍼진 이야기가 사후 200여 년 뒤 문서 하나에서 처음 등장한다는 사실이 비교적 뚜렷했다. 나오마사는 다르다. 아버지의 처형부터 소년기 은신, 이에야스와의 관계, 심지어 그를 길렀다는 후견인의 성별까지, 여러 층위의 사료가 서로 다른 시점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겹겹이 쌓여 있다.

어떤 이야기가 몇 년 뒤 누구 손에서 어떤 목적으로 처음 기록됐는지 확인하고, 그 위에 후대가 무엇을 덧붙였는지 가려내는 순서로 층위를 하나씩 벗겨낸다.

1. 이이 가문의 몰락과 나오마사의 은신기 (1561~1575)

1-1. 이이노야의 고쿠진 영주, 이마가와 치하의 지위

이이 가문(井伊氏)은 토토미 이이노야(井伊谷, 현 하마마츠시 호쿠구 인사초 일대)를 근거지로 한 고쿠진(国人) 영주 가문이다. 독립 다이묘가 아니라 이마가와(今川) 가문의 유력 가신이었다. 나오마사의 조부 대인 이이 나오모리(井伊直盛, 이이가 22대 당주)는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따라 출진했다가 전사했다. 여러 사료가 이 대목은 똑같이 전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나오모리 사후 이이 가문은 후계자 문제에 휘말린다. 동시에 토토미 고쿠진들이 잇달아 이마가와를 이반한 이른바 “엔슈 소게키(遠州忩劇)“의 혼란에도 빠진다. 인근 히쿠마성(引馬城) 성주 이이오 츠라타츠(飯尾連龍)가 마츠다이라(도쿠가와) 측과 내통한 혐의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에게 살해된 사건(1565년)이 이 혼란의 정점으로 꼽힌다. 나오마사의 아버지 나오치카 처형(1562년)이 이 소요의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사료마다 서술이 갈려 정설이 없다.1

1-2. 이이 나오치카의 처형은 어떻게 기록됐나

에이로쿠 5년(1562), 이마가와 가신 오노 마사나오(小野政直)의 아들 오노 마사츠구(小野政次)가 “나오치카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해 모반을 꾀한다”고 참언했다. 이에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나오치카를 슨푸(駿府, 이마가와 가문의 본거지)로 소환해 주살했다. 여기까지가 흔히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사료를 찾아보면 문제가 있다. 이 서사를 상세히 전하는 『이이 가전기(井伊家伝記)』는 나오치카가 살해된 날짜를 에이로쿠 5년(1562) 12월 14일로 적고 있다. 이 책은 사건으로부터 약 168년이 지난 쿄호(享保) 15년(1730), 이이노야 류탄지(龍潭寺) 9대 주지 소잔 호닌(祖山法忍)이 쓴 가전(家伝)이다. 류탄지는 이이 가문의 보리사(菩提寺, 조상 위패를 모시고 대대로 후원받는 사찰)로, 어느 정도는 이이 가문에 유리하게 썼다고 봐야 하는 후대 편찬물이다. (여기서 짚어둘 것은, 이 서사가 “나오치카가 실제로 배신했다”가 아니라 “오노 마사츠구의 거짓 참언으로 억울하게 누명 쓰고 죽었다”는 쪽이라는 점이다. 조상이 반역자가 아니라 모함당한 피해자였다는 서사, 그리고 이마가와를 버리고 도쿠가와로 붙은 훗날의 선택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해주는 서사라는 점에서 가문에 유리하다 — 다만 이는 이 글의 추론이며, 이 구도 자체를 직접 뒷받침하는 사료나 연구를 확인한 것은 아니다.) 반면 『시즈오카현사(静岡県史) 자료편』은 이이 가문과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아이즈(会津, 도호쿠 지방) 지역의 별개 편년 기록 「이혼 토지초초(異本塔寺長帳)」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여기 적힌 날짜는 같은 해 3월 2일이다. 두 사료의 기록이 9개월 넘게 차이난다.2

더 나아가 구로다 모토키(黒田基樹, 사이타마현립대학 교수)는 『井伊直虎の真実』(角川選書, 2017)에서 나오치카가 이이 가문 당주로서 처형되었다는 사건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이 나오치카라는 인물이 실재하기는 했으나 이이 가문의 당주는 아니었을 가능성, 그리고 처형을 당한 게 아니라 1565년경까지 살아 있었을 가능성까지 열어 뒀다.3 이러한 견해가 학계의 정설로 자리잡은 것은 아니고 오와다 테츠오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여전히 기존의 정설을 지지하고 있어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라 봐야겠다.

“나오치카가 모반 혐의로 처형됐다”는 이야기의 구체적 서사(누가 무엇을 참언했는지 등)는 『이이 가전기』 하나에만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검증 가능한 유일한 지점인 날짜에서부터 독립된 사료와 9개월 넘게 어긋난다. 유일한 검증 지점에서 오차가 난다는 것은, 검증할 수 없는 나머지 서술의 신뢰도도 함께 의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사건의 실재성 자체까지 학계에서 재검토되고 있다.

이이 가문의 보리사인 류탄지의 산문, 나무로 된 전통 사찰 정문
이이노야 류탄지(龍潭寺)의 산문. 『이이 가전기』를 쓴 9대 주지 소잔 호닌이 있던 곳이자, 나오마사의 은신기 서사에서 후견인들이 그의 거취를 상의한 무대로 등장한다. Wikimedia Commons, CC BY-SA 3.0(사진: Yanajin33).

1-3. 은신기 줄거리는 언제 만들어졌나

1562년 나오치카 처형 당시 나오마사(아명 토라마츠虎松)는 2세 유아였다. 이마가와 측 인물 니이노 치카노리(新野親矩)가 조명(助命) 탄원을 해 목숨을 구했으나 1564년 니이노가 전사하며 후견인을 잃는다. 1568년 이이 가문 내부 실권자 오노 미치요시(小野道好)가 다시 토라마츠를 노리자 조도지(浄土寺)를 거쳐 미카와 호라이지(鳳来寺)로 피신시켰다. 1572년 생모 히요가 도쿠가와 가신 마츠시타 키요카게(松下清景)와 재혼하면서 토라마츠는 마츠시타가의 양자가 되어 신변 안전을 확보했다. 1574년 아버지 13주기 법요를 계기로 류탄지에서 유우친니(祐椿尼)·나오토라·히요·주지 난케이 즈이몬(南渓瑞聞)이 상의해 이에야스에게 출사시키기로 결정한다. 여기까지가 흔히 전해져 내려오는 이이 나오마사의 어린 시절 숨어지내던 시기의 이야기다.4

이 줄거리를 상세히 전하는 사료도 역시 『이이 가전기』(1730년 성립)다. 사건이 벌어지고 150년 이상 지난 뒤 이이 가문과 우호적인 사찰의 인물에 의해 편찬됐다는 점은 나오치카 처형 이야기와 똑같다. 16세기 당대 문서 가운데 이 은신 과정을 직접 증명하는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확실한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나오마사가 결과적으로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코쇼가 됐다는 사실뿐이다. 이 사실에 『이이 가전기』(1730년)가 코쇼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서사로 만들어 더해준 셈이다. 이 서사를 에도 막부가 편찬한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1799~1812년)가 공식 기록으로 재정리했고, 근현대 향토사와 2017년 NHK 대하드라마가 그대로 계승·확대하면서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어린 시절 나오마사의 후견인이었다는 이이 나오토라와 나오마사의 관계도 혼선이 있다. 일부 대중 서술은 “나오토라가 나오마사를 길렀다”고 단순화하지만, 『인사초사(引佐町史)』(1991)가 전하는 통설은 나오토라가 자신의 생모인 유우친니(祐椿尼)와 상의해 나오마사의 생모인 히요를 마츠시타 가문에 재혼시키고 나오마사를 양자로 보냈다는 것이다.5 즉 나오토라 본인이 직접 길렀다기보다 이이 가문 당주 대리로서 출사·복권을 결정·주선한 역할에 더 가깝다.

1-4. 이이 나오토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오마사의 후견인으로 알려진 나오토라부터가 논쟁적인 인물이다. 오랜 통설에 따르면 나오모리의 딸이자 출가 후 “지로호시(次郎法師)“라 불리던 인물이 1565년 무렵 이이 가문의 여성 당주(女領主)가 되어 가문을 지탱했다. 이 통설은 2017년 NHK 대하드라마 「おんな城主 直虎」로 대중화됐다.

정작 이 드라마 방영 직전인 2016년 12월, 이이가 분가 당주인 이이 미술관(井伊美術館) 관장 이이 타츠오(井伊達夫)가 새 사료를 공개하며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 문서는 에도 초기 이이가 가로(家老)가 청취한 기록을 1735년에 필사한 것이다.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가신 세키구치 우지츠네의 아들을 “이이 지로(井伊次郎)“로 삼아 이이 가문 영지를 맡겼다는 취지로 읽히는 대목이 담겨 있었다. 통설의 여성 당주 지로호시가 아니라 남성이었을 가능성을 가리키는 내용이다. 쿄토여자대학 모리 미와(母利美和) 교수는 필적이 다른 기록물과 일치한다며 신빙성을 높게 봤다. 오와다 테츠오는 “딸 지로호시가 있던 같은 시기에 지로를 칭하는 별도의 남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반론했다.6

이듬해 나온 구로다 모토키의 『井伊直虎の真実』은 이 남성설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했다. 나오토라의 문서는 통상 남성이 쓰는 마나문(真名文, 한문투 문서)으로 작성됐고 화압(花押, 서명 도장)을 썼다. 여성은 통상 인판(印判)을 쓴다. 구로다는 이를 근거로 나오토라가 나오모리의 친딸이 아니라 세키구치 우지츠네의 아들로서 이이가에 데릴사위 형태로 들어온 남성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나아가 지로호시(아명, 세키구치가의 아들)와 묘운인전 겟센유엔대저(妙雲院殿月船祐円大姉, 나오모리의 딸로 알려진 법명)가 애초에 별개 인물이었을 가능성까지 논지를 전개한다.7

이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와다 테츠오는 여전히 여성설을 옹호하고 있고 학계는 성별과 동일인 여부를 밑바닥부터 다시 따지는 중이다. 대중적으로는 대하드라마 이후 여성 성주 나오토라상이 고착화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점부터 학계에서는 그 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마마츠시 하마키타 도서관의 이이 나오토라 관련 서적 특별 전시 서가
하마마츠시 하마키타 도서관의 "이이 나오토라" 특설 코너. 2017년 NHK 대하드라마 방영을 계기로 관련 서적이 대거 출간되며 대중적 인지도가 크게 뛰었다. Wikimedia Commons, CC BY-SA 4.0(사진: Asturio Cantabrio).

2. 이에야스 출사와 남색설의 진짜 출전 (1575~1582)

2-1. 하마마츠에서 발탁되다

1574년 아버지 13주기 법요를 위해 류탄지를 찾은 나오마사(당시 마츠시타 토라마츠, 15세 전후)를 이듬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마마츠에서 만나 코쇼(小姓)로 발탁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이 가문이 복권되고 이이노야에 있던 옛 영지를 다시 인정 받았으며, 이름을 “이이 만치요(井伊万千代)“로 개명했다. 이 이야기 역시 근거는 이이 가문 측 사료(『이이 가전기』 등) 뿐이며 도쿠가와 측의 동시대 기록 가운데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발견되지 않았다. 몇 월 며칠에 어떤 방식으로 처음 만났는지는 전승으로 다뤄야 하는 대목이다.8 초진(初陣)은 1576년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와 싸운 시바하라(芝原) 전투로 전해진다.

2-2. 미소년 총애설은 어디서 왔나

나오마사를 다룰 때 반드시 마주치는 것이 이에야스와의 남색(男色) 관계설이다. 이 소재는 앞서 다룬 사카이 타다츠구의 슨푸 동행설과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사료 계보를 따라가면 사정이 다르다.

가장 이른 시기의 관련 기술은 다케다 가문 쪽 군학서 『고요군칸(甲陽軍鑑)』 품제59(品第五十九)에 나온다. 이 책은 다케다 신겐의 가신 코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의 구술을 바탕으로 오바타 카게노리(小幡景憲)가 겐나(元和, 1615~1624) 연간에 최종 정리·간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나오마사가 다케다 멸망(1582) 이후 시점을 다루는 대목에서 이렇게 적었다.

“扨又伊井万千代と云遠州先方衆侍の子なるが、万千代近年家康の御座をなおす、此万千代を兵部と名付、大身に取立らるゝ”

풀면 “그런데 또 이이 만치요라 하는 엔슈 사키가타슈 사무라이의 아들이 있는데, 만치요는 근년 이에야스의 오자(御座)를 돌보며, 이 만치요를 효부라 이름 짓고 큰 신분으로 발탁했다”는 뜻이다.9

“오자오 나오스(御座をなおす)“라는 표현은 훗날 대중 역사물에서 “밤 시중을 든다는 은어”로 풀이되는 근거로 쓰인다. 원문은 성적 관계를 명시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는 주군의 자리·처소를 돌본다는 뜻이다. 이를 성적 은어로 읽는 것은 후대에 덧붙은 주석이다. 고요군칸 원문에 “요토기(夜伽, 잠자리 시중)” 같은 표현이나 성적 관계를 직접 지시하는 서술은 없다.

미모와 총애를 훨씬 노골적으로 적은 문구도 있다. “용모가 아름다워 이에야스가 친히 총애했다”는 대목이다. 여러 대중 역사 기사는 이 문구가 실린 사료로 둘을 든다. 오와리번 유학자 아마노 노부카게(天野信景)가 겐로쿠–쿄호 연간(1690년대–1730년대)에 쓴 수필집 『시오지리(塩尻)』, 그리고 에도 막부 공식 사서 『토쿠가와 짓키(徳川実紀)』(1809–1843년 편찬)다.10 『토쿠가와 짓키』는 나오마사 사망(1602)으로부터 약 207–241년 뒤에 편찬됐다. 사카이 타다츠구의 통설이 처음 등장한 사료(1812년 성립)와 시기가 거의 겹친다.

“오자오 나오스”라는 완곡한 표현은 나오마사 사후 수십 년 이내의 비교적 이른 사료에 등장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미소년으로서 총애를 받았다”는 것은 100–200년 뒤에야 처음 등장한 이야기다. 사카이 타다츠구의 사례만큼 극단적인 후대 창작은 아니지만 이야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화되고 미화되는 패턴은 똑같다. 전국시대–에도시대 무가 사회에서 주군과 코쇼 간의 남색(슈도)은 흔히 서술되는 소재였다. 용모가 빼어나 총애를 받다가 결국은 크게 출세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이 시대의 뻔한 클리셰이기 때문에 이이 나오마사의 남색 이야기 역시 그냥 후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뒷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3. 겐푸쿠와 관위

1582년 22세에 겐푸쿠(元服, 성인식)를 치러 “나오마사(直政)“로 개명하고 같은 해 통칭을 “효부노쇼(兵部少輔)“로 고쳤다. 겐푸쿠와 개명, 효부노쇼 통칭 개칭이 모두 1582년에 몰린 것은 우연이 아니라 같은 해 이뤄진 다케다 유신 배속과 짝을 이루는 격상 조치로 봐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챕터에서 자세하게 다룬다. 이 시기부터는 관위에도 오르기 시작해 1586년 종5위하 서위, 1588년 시종(侍従) 임관이 이어진다.11

3. 아카조나에의 성립

3-1. 다케다 유신의 배속

1582년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 멸망 이후 이에야스는 카이(甲斐)·시나노(信濃)의 옛 다케다 영지와 그 유신단(遺臣)을 대거 흡수했다. 그중 상당수가 22세의 신참 대장 나오마사 휘하에 배속됐다.

“다케다 유신 74명과 반도(坂東) 무사 43명이 나오마사에게 배속됐다”는 숫자는 여러 출처에 동일하게 등장하는데, 최초 출전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겐로쿠 14–15년(1701–1702)에 편찬한 다이묘 계보서 『藩翰譜(한칸후)』인데, 사건으로부터 약 120년 뒤의 책이니 나오마사 당대의 1차 사료는 아니다. 1의 자리까지 정확해 보이는 이 숫자들이 실제로 1582년 당시에 기록된 것인지, 아니면 18세기 초 계보서 편찬 과정에서 정리된 수치인지는 아쉽지만 동시대 사료로 교차 검증할 길이 없다.12

이때 나오마사의 휘하에 배속된 인물 중 이름이 확인되는 사람으로는 카이 다케다의 가신이었던 이시하라 요시츠구(石原吉次)와 하라미이시 야스토키(孕石泰時)가 있다. 둘 다 원래 다케다 사천왕이자 아카조나에의 대장이었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 휘하의 가신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이이 나오마사의 아카조나에가 다케다 시절 아카조나에를 계승했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라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에야스의 측근인 키마타 모리카츠(木俣守勝)와 사이고 마사카즈(西郷正員)도 다케다 구신과 함께 나오마사 휘하에 배치됐는데, 이에 대해서는 히코네성박물관 자료를 포함해 자료마다 서술이 일치한다.13 하지만 이외의 인물들은 대중 역사 사이트의 정리에 의존한 것이라 원 출전 사료로 교차 검증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3-2. 붉은 갑주의 유래

붉은 갑주(赤備え)의 계보는 다케다 신겐의 중신 오부 토라마사(飯富虎昌)에서 시작한다. 오부가 죽은 뒤 동생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이어받았고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마사카게가 전사할 때까지 다케다군 최강의 상징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14 이에야스가 나오마사에게 이 전통을 계승하도록 명했다는 서술은 히코네성박물관을 비롯한 자료 대부분에 똑같이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직접 그런 뜻을 남긴 서장 같은 1차 사료는 찾지 못했다.

배속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은 자료마다 비슷하다. 신참이지만 급성장하던 22세의 나오마사를 그에 걸맞은 대장으로 만들려고 노련한 다케다 구신단과 이에야스 자신의 근시를 함께 붙여 보좌하게 했다는 설명이다.15 다만 이 역시 당시에 이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은 편지 등의 1차 사료가 남아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현대의 대중 역사서나 박물관 측의 추측에 의한 해설이라는 한계는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 병풍 속 이이 나오마사 부대의 붉은 갑주 기마무사들
《세키가하라 합전도 병풍(関ヶ原合戦屏風)》 속 이이 부대 부분. 붉은 갑주로 통일된 아카조나에의 모습이 뚜렷하다. Wikimedia Commons, CC BY-SA 3.0(업로더: Snlf1).

3-3. 코마키·나가쿠테 실전 데뷔

아카조나에는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처음 실전에 나섰다. 나가쿠테 당일 이에야스군은 우익 3,300명, 좌익에 나오마사의 아카조나에 3,000명, 여기에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부대 3,000명을 더해 포진했다. 하시바(도요토미) 측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모리 나가요시(森長可)는 이에야스의 배후를 노리고 진군하던 중 4월 6일 미카와 이와사키성(岩崎城)을 함락시킨 뒤 나가쿠테로 이동하다 이에야스 본대와 맞닥뜨렸다. 이 교전에서 나오마사 부대의 총격에 모리 나가요시가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다.16 이 전투 당시 붉은 갑주를 두른 나오마사 부대의 위용이 교토 사람들에게도 전해져 “붉은 도깨비(赤鬼)“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만 이 별칭이 최초로 등장한 기록이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4. 오다와라 정벌과 간토 이봉 (1590)

4-1. 시노쿠루와 급습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 나오마사가 세운 가장 뚜렷한 전공은 6월 22일 밤 오다와라성 외곽 방어시설 시노쿠루와(篠曲輪)를 급습해 함락시킨 것이다. 도쿠가와군 중 유일하게 성곽 내부까지 진입한 부대가 이이 나오마사의 부대였다는 서술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17 문제는 이 전공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사료는 에도 시대에 쓰인 『호조고다이키(北条五代記)』라는 점이다. 이 책은 이이 가문을 기리려고 쓴 색채가 짙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급습의 성격은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다. 『호조고다이키』는 나오마사의 활약을 “만사에 남보다 뛰어나 합전하여 천하에 명예를 얻고 후대에 이름을 남겼다”고 적으며 호조 측 병사 400명을 토벌했다고 기록한다.17 오다와라 정벌 자체가 대규모 포위전 위주로 진행돼 도쿠가와군 전체를 놓고 봐도 실제 교전이 벌어진 국면은 드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도쿠가와군 중 유일하게 성곽 내부까지 진입했다는 서술이 사실이라면, 정벌 기간 내내 큰 실전 기회가 없었던 도쿠가와 진영 안에서 나오마사 부대가 상대적으로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였다고는 말할 수 있다.

4-2. 미노와 12만 석 — 사천왕 중 최대

오다와라 정벌로 호조 가문이 멸망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카이 5개국을 반납하고 간토 8개국으로 영지를 옮겼다. 이때 나오마사는 코즈케 미노와(箕輪, 현 군마현 다카사키(高崎)시)에 12만 석으로 봉해졌다. 도쿠가와 가신단 전체를 통틀어 최고 석고였다.18

미노와는 다케다 신겐을 여섯 차례나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무장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의 옛 거성이었다. 나리마사 사후 아들 나리모리(業盛) 대에 성이 함락되고 다케다 가문 수중에 들어갔다가 오다·호조 가문을 거쳐 1590년 도쿠가와령이 되며 나오마사에게 주어지게 된 것이다. 나오마사가 다케다 구신단을 상당수 흡수해 통솔했다는 사실과 맞물려, 다케다 신겐도 꺾지 못한 나가노 나리마사의 옛 거성을 하필 다케다 유신단의 새 지휘관에게 맡겼다는 점에서 미노와 입봉이 단순한 영지 배분 이상의 상징적인 뜻을 지녔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19

4-3. 다카사키 이전과 개명설

나오마사는 게이초 2년(1597) 미노와 남쪽 옛 와다성(和田城) 터에 새 성곽 축성을 시작했다. 이듬해(1598) 완공 전인 새 성곽으로 거성을 옮기며 미노와성을 폐성했다.20 여러 향토사 자료가 전하는 이전 사유는 나카센도(中山道)와 미쿠니카이도(三国街道)가 갈라지는 교통 요충지를 감시·통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다카사키”라는 지명에도 사연이 있다. 통설은 원래 와다(和田)로 불리던 이 땅을 1598년 나오마사가 다카사키로 고쳤다는 것인데 그 어원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이야기가 다르다. 첫 번째로는 류코지(龍広寺)의 승려 하쿠안(白庵) 화상이 “성공고대(成功高大)“에서 “고(高)“를 쓰자고 제언했다는 설이 있다. 두 번째로는 에토쿠지(恵徳寺)의 승려 류잔에이탄(龍山詠潭) 화상이 “소나무는 말라 죽을 수 있지만 높이(高)에는 한계가 없다”고 진언해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설도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레퍼런스협동데이터베이스는 무로마치기 문헌(『信濃宮伝』 등)에 오에이–메이오 연간(1394–1501년경)부터 이미 “다카사키”라는 지명이 등장한다는 기록을 소개한다.21

이 마지막 설이 사실이라면 나오마사는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기존에 쓰이던 지명 중 하나를 성의 정식 이름으로 채택하여 공식화한 것이라 봐야 한다. 그런데 현대의 다카사키시에서 편찬한 자료를 보더라도 여러 설을 함께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아직 미궁 속이다.

5. 세키가하라 (1600)

5-1. 누케가케 사건의 사실여부

게이초 5년(1600) 9월 15일, 동군 선봉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부대가 맡기로 정해진 상태였다. 통설에 따르면 나오마사는 자신의 사위이자 이번 전투가 첫 출전인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 이에야스의 4남)에게 공을 세우게 하고 싶어 안개 속을 틈타 진군했다. 후쿠시마 부대에게 발각되자 “초진인 타다요시 님께 전장을 보여드리려는 것”이라며 둘러대고 통과해 우키타(宇喜多) 부대를 먼저 공격했다는 것이다.

이 통설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시대별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이이 가문 측 가전 『이이가 게이초키(井伊家慶長記)』가 나오마사의 무용을 극적으로 서술한다. 둘째, 19세기 초 성립한 『간세이 조슈쇼카후』가 나오마사의 진군을 이에야스가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일화와 함께 공식적인 사실로 정착시켰다. 셋째, 근세 국제사 연구자 가사야 가즈히코(笠谷和比古)는 『関ヶ原合戦と近世の国制』(2000)에서 이 누케가케(抜け駆け, 명령 없이 단독으로 앞서 나가 공을 세우려는 군율 위반 행위)를 안개 속에서 벌어진 “우발적 조우전”으로 재해석한다. 세키가하라 전문 연구자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은 더 나아가 나오마사 자신이 전투가 벌어지기 두 달 전인 그해 7월 15일 제정한 “누케가케 금지” 군법과 이에야스가 나오마사에게 작전 지휘를 위임했음을 보여주는 서장을 근거로 “나오마사의 누케가케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고까지 결론짓는다. 이에야스를 대리하던 나오마사가 새치기해서 얻을 실익이 없었고 자신이 만든 군법을 스스로 어길 개연성도 낮다는 논리다.22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선봉이었는데 나오마사가 새치기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기는 어렵다. 가사야의 우발적 조우전설과 와타나베의 “애초에 누케가케가 없었다”는 재해석을 함께 놓고 봐야 한다.

이 국면에서 주목할 것은 나오마사가 맡은 역할의 무게다. 같은 해 8월 4일 자로 이에야스가 보낸 서장은 나오마사를 파견하니 작전은 그와 상의하고 지시에 따르라는 취지를 담고 있다.22 즉 나오마사는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단순히 3,000명 규모 부대를 이끄는 일개 장수가 아니라, 이에야스를 대리해 동군 작전 지휘 전반에 관여하는 위치에 있었다. 새치기해서까지 공을 세울 유인이 크지 않았다는 와타나베의 해석도 이 위임 관계를 전제로 한다.

5-2. 시마즈 퇴각전과 나오마사의 부상

전투 후반 서군 소속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는 항복도 우회도 아닌 정면 돌파를 택해 동군 포위망을 뚫고 이세카이도 방면으로 퇴각했다. 병력을 몇 명씩 남겨 추격을 저지하고 전멸하면 다음 조가 다시 저지하는 굉장히 특이한 방식의 전법이라 “시마즈의 스테가마리(捨て奸)“라는 이름이 붙었고, 또한 이 퇴각전 전체를 일컬어 “시마즈의 노키구치(島津の退き口)“라 부르게 되었다. 나오마사는 혼다 타다카츠·마츠다이라 타다요시와 함께 이 퇴각하는 시마즈군을 추격하다 부상을 입었는데, 이 부상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이야기가 다르다. 저격수가 카시와기 겐토(柏木源藤)였고 사격을 명령한 인물이 카와카미 시로베에(川上四郎兵衛)였다는 데는 여러 서술이 일치한다. 다만 부상 부위는 오른팔이라는 것이 통설이고, 다리를 다쳤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두 군데에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3 이 에피소드가 후대에 거듭 재구성·윤색되며 세부가 흔들렸다고 볼 만하다.

같은 전투에서 나오마사가 시마즈 도요히사(島津豊久, 시마즈군 후위 지휘관)를 직접 토벌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도요히사의 최후에 대해서는 나오마사에 의해 오즈자카(烏頭坂)에서 전사했다는 설과 카츠지토게(勝地峠)를 넘어 자결했다는 설이 있어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24 확실한 것은 나오마사가 부상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전후 처리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6. 전후 처리와 서군 다이묘 존속 교섭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나오마사는 서군 측 다이묘들과의 강화 교섭 창구를 맡았다. 왜 이 역할을 맡은 것이 사카이 타다츠구나 혼다 타다카츠가 아니라 나오마사였는지 비교·설명한 학술 서술은 찾지 못했으나 그 배경은 짐작할 만하다. 첫째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부상당한 당사자였고, 둘째로 도쿠가와 가신 중 최고 대우를 받을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마지막으로 히코네성박물관 자료는 “명문 출신이라는 점과 대외 교섭력”을 근거로 든다.25

서군 총대장이었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와의 교섭에서는 나오마사가 사죄장을 받았고 스오·나가토 2개국 안도에 관여했다고 전한다. 서군 총대장이었던 모리가가 완전 개역을 면하고 2개국으로 감봉되어 세력이 존속하게 된 것은 나오마사와의 교섭 덕분이었다고 봐야 한다.26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건에서는 “나오마사가 구제하려 애썼지만 결국 개역됐다”는 것 정도만 통설로 알려져 있는데, 나오마사 본인의 서장을 보면 훨씬 구체적인 경위가 드러난다. 나오마사의 서장에 따르면 모리치카는 토사(土佐)를 몰수당하는 대신 “고칸닌분(御堪忍分)“이라는 형태로 대체 영지를 받을 예정이었다. 나오마사는 자신의 가신을 토사로 보내 모리치카 본인이 직접 상경해 이에야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권했다. 다만 결과적으로 모리치카가 상경하던 중 영지에서 우라도 잇키(浦戸一揆)가 일어나 이 약속이 파기됐고 최종적으로 개역됐다.27 나오마사가 애썼지만 결국 실패한 셈이다.

시마즈 가문과의 교섭은 더 오래 걸렸다. 요시히로는 1600년 11월 이에야스에게 사죄 사자를 보내며 교섭 창구를 나오마사에게 의뢰했지만 영지 안도 보장 없이는 상경하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나오마사는 협상이 끝나기 전인 게이초 7년(1602) 2월 1일(양력 3월 24일)에 사망했다. 교섭은 그 뒤에도 이어졌고, 시마즈 타다츠네(島津忠恒, 훗날 이에히사)가 그해 12월 25일 교토에 들어온 뒤 사츠마·오스미·휴가 일부(약 60만 석) 본령 안도가 확정된 것으로 정리된다. 이 시기 이에야스 쪽 창구로는 하타모토 야마구치 나오토모(山口直友)의 서장이 확인된다. 다만 나오마사와 시마즈측이 실제로 주고받은 서한이 남아 있는지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다.28

사나다 가문 쪽 기록에는 나오마사가 노부유키의 간청을 받아들여 사나다 마사유키·노부시게(유키무라) 부자의 구명에 앞장섰고, 혼다 타다카츠가 여기에 동조했다고 나와 있다.29 세키가하라 이후 도쿠가와 정권의 대외 교섭 실무는 이렇게 나오마사의 손을 폭넓게 거쳤다.

모리·조소카베·시마즈·사나다까지 전방위에 걸친 이 교섭 실적을 한데 놓고 보면, 나오마사는 세키가하라 직후 도쿠가와 정권의 대외 교섭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인물이었다. 부상당한 몸으로 죽기 직전까지 시마즈 교섭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에야스가 그를 대체하기 어려운 협상 창구로 생각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7. 죽음과 히코네번의 성립 (1602)

7-1. 밝혀지지 않은 사인

나오마사는 게이초 7년(1602) 2월 1일(양력 3월 24일), 향년 42세로 사와야마성에서 사망했다. 세키가하라의 총상이 원인이라는 것 자체에는 이견이 없으나 정확한 병리 경과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전통적으로는 총상 부위의 파상풍 감염과 그에 따른 패혈증이 사인으로 꼽혀왔으나, 파상풍의 잠복기는 통상 3일~3주에 불과해 세키가하라(1600년 9월) 이후 약 1년 5개월 뒤에야 사망한 경과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대안으로 체내에 남은 납제 총탄이 서서히 용출되며 만성 중독을 일으켰다는 설, 가스괴저에 따른 패혈증·다발성 장기부전설이 최근 들어 제기되고 있으나 어느 쪽도 정설은 아니다.30

7-2. 히코네성 축성은 나오마사 생전의 일이 아니다

나오마사는 세키가하라 공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의 옛 영지인 오미 사와야마 18만 석을 받아 1601년 초 사와야마성에 입성했다. 그런데 히코네성 축성은 나오마사 생전에 결정·착수된 사업이 아니다. 착공 연도는 1603년설과 1604년설이 있지만 히코네시와 히코네성 공식 사이트는 모두 게이초 9년(1604)이라 적고 있다. 1603년이든 1604년이든 이이 나오마사 생전에 착공하지 않은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31

축성의 공식 명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이었다. 실무는 나오마사의 가로 키마타 모리카츠(木俣守勝)가 이에야스와 상담해 진행했다. 축성 부지에 대해서는 애초에 이소야마(磯山)가 예정지였다가 아들 나오츠구(直継) 대에 이르러 지금의 히코네야마로 변경됐다.32 “나오마사가 사와야마가 협소하고 이시다 미츠나리의 성이었다는 이유로 꺼려 새 거성을 계획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나오마사 본인이 생전에 그런 의사를 표명했다는 사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축성에 착수한 것도, 부지를 결정한 것도 결국 나오마사가 아니라 가신단과 아들 나오츠구다. 나오마사의 유지(遺志)라는 명분은 있었겠지만 히코네성과 관련된 실행은 모두 나오마사 사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풍이 물든 히코네성 천수각 전경
히코네성 천수각. 나오마사 사후 게이초 9년(1604) 착공되어 아들 나오츠구·나오타카 대에 걸쳐 완성됐다. Wikimedia Commons, CC BY-SA 4.0(사진: Martin Falbisoner).

7-3. 히코네번의 성립과 그 이후

나오마사 사후 장남 나오츠구가 가독을 계승했으나 병약하고 인망이 부족해 가신단에 내분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사카 후유노진(1614)을 앞두고 이에야스는 이이 가문의 대장으로 차남 나오타카(直孝)를 발탁했고 이듬해(1615) 나오츠구를 대신해 나오타카가 나오마사의 가독을 잇도록 명했다. 나오타카는 오사카 나츠노진(1615)에서 형을 대신해 아카조나에를 이끌고 참전한 공으로 가증되며 히코네 2대 번주가 됐다.33

이후 나오타카 계통(彦根藩主 계승)은 “이이 카몬노카미가(井伊掃部頭家)“로, 나오츠구/개명 후 나오카츠(直勝) 계통은 안나카번→니시오번→카케가와번→요이타번으로 이어지는 지번 “이이 효부노쇼가(井伊兵部少輔家)“로 갈렸다. 나오타카 계통은 30만 석 규모의 후다이 대명가로 확립되어 훗날 다이로(大老)를 배출하는 가문 중 하나가 됐다. 히코네번 이이가는 이 계승 원칙을 따라 막말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까지 이어지는 도쿠가와 최고위 후다이 가문으로 자리잡았다.34

8. 인물평 — “오니노 나오마사”가 아니라

이이 나오마사 하면 “오니노 나오마사(鬼の直政)“류의 표현을 떠올리기 쉽지만, 정작 이 표현 자체는 사료에서도 대중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어 자료에서 실제로 널리 쓰이는 별명은 “이이의 붉은 도깨비(井伊の赤鬼)“와 “히토키리 효부(人斬り兵部)” 두 가지다. 전자는 아카조나에를 이끌고 투구에 도깨비 뿔 모양 장식을 붙인 데서, 후자는 관직 효부노쇼(兵部少輔)에 “사람을 벤다(人斬り)“는 행적을 결합한 데서 왔다.35

히코네역 앞에 서 있는 붉은 갑주 차림에 뿔 모양 투구를 쓴 이이 나오마사 기마상
히코네역 앞 광장의 이이 나오마사 동상. "이이의 붉은 도깨비" 별칭의 근거가 된 투구 뿔 장식이 그대로 재현돼 있다.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가신의 사소한 실수도 용서하지 않고 손수 베어 죽이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 지나치게 엄격한 봉공 태도는 자신에게만 그치지 않고 주위에도 강요할 정도였다”, “이이 가문 가신 중에는 나오마사의 엄격한 군율을 견디지 못해 혼다 타다카츠 밑으로 떠난 이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들이 이런 별명의 근거로 거론된다.36 다만 이 일화들 각각의 최초 출전(에도시대 어느 편찬물인지)은 확정되지 않았다. 가신들이 혼다 타다카츠 쪽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그나마 사실관계에 가까운 인사이동 기록일 수 있지만 가신들을 자주 손수 처형했다는 일화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개별 일화의 신빙성과는 별개로, 나오마사가 엄격한 군율의 지휘관이었다는 평가는 서로 독립된 여러 자료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가신들이 혼다 타다카츠 쪽으로 옮겨갔다는 인사이동 기록이 그 방증이고, 22세의 신참 대장에게 다케다 유신 74명과 반도 무사 43명을 한꺼번에 붙였다는 것도12 이에야스가 그를 엄격한 통솔력을 갖춘 인물로 봤다고 볼 수 있다. 손수 베어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나열할 수는 없지만, “나오마사 밑에서 버티기 힘들었다”는 동시대인들의 이미지 자체는 여러 방향에서 사료로 뒷받침된다.

이이 가문이 후대까지 이만한 위상을 지킨 배경에는 이 결과물이 있다. 나오타카 대에 확립된 30만 석(실질 35만 석으로도 불린다)은 에도시대를 통틀어 후다이 다이묘 가운데 가장 큰 석고였고, 이이 가문은 후다이 다이묘 중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전봉(轉封)당하지 않은 채 막말까지 히코네를 지켰다.37 그런 가운데 막부 체계의 최고위 관료인 다이로를 여러 차례 배출했고 이 흐름이 막부 말기의 이이 나오스케로 이어졌다. 숨어 지내며 성장한 소년이 실제로 어떤 성격의 리더였는지는 사료마다 다르게 나오지만, 그가 일군 이이 가문의 기반만큼은 도쿠가와 막부 260년 내내 흔들리지 않았다.

출처

학술 단행본

  • 黒田基樹, 『井伊直虎の真実』, 角川選書 586, KADOKAWA, 2017
  • 笠谷和比古, 『関ヶ原合戦と近世の国制』, 2000
  • 渡邊大門, 『大坂落城 戦国終焉の舞台』, 角川学芸出版, 2012
  • 高橋陽介, 『一次史料にみる関ヶ原の戦い』(개정증보판)

1차·준1차 사료 (성립 시기 명시)

  • 『井伊家伝記』 — 쿄호 15년(1730), 류탄지 9대 주지 소잔 호닌 저
  • 『甲陽軍鑑』 품제59 — 겐나 연간(1615~1624) 오바타 카게노리 정리
  • 『藩翰譜』 — 겐로쿠 14–15년(1701–1702), 아라이 하쿠세키 편찬
  • 『寛政重修諸家譜』 — 칸세이 11년(1799) 착수, 분카 9년(1812) 완성
  • 『徳川実紀』 — 분카 6년(1809) 착수, 텐포 14년(1843) 완성
  • 『塩尻』 — 아마노 노부카게, 겐로쿠–쿄호 연간(1690년대–1730년대)
  • 『시즈오카현사 자료편(静岡県史 資料編)』
  • 『大日本古文書 家わけ第十六 島津家文書之五』 — 도쿄대학사료편찬소 공식 해설(시마즈 타다츠네 입경과 야마구치 나오토모의 창구 역할 확인용, 서장 원문은 미열람)

박물관·공식 기관 자료

  • 彦根城博物館, 「井伊の赤備え―勇猛なる軍団」, 「井伊直政と直孝―井伊家の礎を築いた名将―」, 「彦根藩主井伊家」
  • 彦根市 공식 사이트, 国宝 彦根城 공식 사이트
  • 일본어 위키백과 「彦根藩」 「井伊直政」 「島津義弘」 항목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협동데이터베이스, 「高崎という地名の由来について」

연구자 기고

  •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 다수 (「井伊直政のスピード出世の秘密」 외)

Footnotes

  1. 일본어 위키백과 「遠州忩劇」·「飯尾連龍」 항목 종합. ↩

  2. 「井伊家伝記」 서지 정보 및 『시즈오카현사 자료편(静岡県史 資料編)』 인용, 일본어 위키백과 「井伊直親」 항목 종합. ↩

  3. 黒田基樹, 『井伊直虎の真実』, 角川選書 586, KADOKAWA, 2017. ↩

  4. 『井伊家伝記』 기반 통설 서사, 류탄지 공식 사이트 「井伊直虎(次郎法師)」 종합. ↩

  5. 『인사초사(引佐町史)』(1991), 일본어 위키백과 「井伊直虎」 항목 인용. ↩

  6. 「「井伊直虎」女性でなかった? 井伊美術館が新史料」, 日本経済新聞, 2016년 12월. ↩

  7. 黒田基樹, 『井伊直虎の真実』, 前掲. ↩

  8. 일본어 위키백과 「井伊直政」 항목, 하마마츠시 「人物像」 페이지. ↩

  9. 『甲陽軍鑑』 品第五十九, Wikisource 판본. ↩

  10. 『塩尻』, 『徳川実紀』 관련 대중 기사 인용 종합. ↩

  11. 일본어 위키백과 「井伊直政」 항목. ↩

  12. 『藩翰譜』, 일본어 위키백과 및 일본 국립공문서관 해설 종합. ↩ ↩2

  13. 彦根城博物館, 「井伊の赤備え―勇猛なる軍団」. ↩

  14. 일본어 위키백과 「赤備え」 항목. ↩

  15. 彦根城博物館, 前掲; 하마마츠시 공식 블로그 「井伊直政 大出世のキーアイテム赤備えのルーツは武田にあり?」. ↩

  16.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관련 종합 서술. ↩

  17. 『北条五代記』 인용, 일본어 위키백과 「井伊直政」 항목. ↩ ↩2

  18. 간토 이봉 관련 종합 서술. ↩

  19. 미노와성 전사(前史) 및 나가노 가문 관련 종합 서술. ↩

  20. 다카사키 거성 이전 관련 종합 서술. ↩

  21.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협동데이터베이스, 「高崎という地名の由来について」. ↩

  22. 笠谷和比古, 『関ヶ原合戦と近世の国制』, 2000; 渡邊大門, 「関ヶ原合戦で東軍を勝利に導いた井伊直政は、本当に抜け駆けをしたのか」,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 ↩2

  23. 일본어 위키백과 「島津の退き口」 항목; 渡邊大門, 『大坂落城 戦国終焉の舞台』, 角川学芸出版, 2012. ↩

  24. 일본어 위키백과 「島津豊久」 항목. ↩

  25. 彦根城博物館, 「井伊直政と直孝」; 渡邊大門, 「井伊直政のスピード出世の秘密とは」,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

  26. 일본어 위키백과 「井伊直政」 항목. ↩

  27. 일본어 위키백과 「長宗我部盛親」 항목. ↩

  28. 일본어 위키백과 「井伊直政」·「島津義弘」 항목 종합. 타다츠네의 입경일(게이초 7년 12월 25일)과 야마구치 나오토모의 창구 역할은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大日本古文書 家わけ第十六 島津家文書之五』 해설(https://www.hi.u-tokyo.ac.jp/publication/syoho/51/pub_komonjo-iewake-16-05/)을 따랐고 각 서장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29. 일본어 위키백과 「井伊直政」 항목(野田浩子, 『彦根城博物館研究紀要』 18, 2007 인용. 전거는 사나다 가문 쪽 기록 「真田家武功口上之覚」(1617년 이후 성립), 『真田家文書』 中巻, 1982 수록). 나오마사가 직접 남긴 문서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

  30. 세키가하라 이후 사인 논쟁 관련 종합 서술. ↩

  31. 彦根市 공식 사이트; 国宝 彦根城 공식 사이트, 「彦根城について」. ↩

  32. 国宝 彦根城 공식 사이트, 前掲. ↩

  33. 彦根城博物館, 「彦根藩主井伊家」. ↩

  34. 彦根城博物館, 前掲. ↩

  35. 일본어 위키백과 「井伊直政」 항목; 관직 효부노쇼 관련 서술. ↩

  36. 일본어 위키백과 「井伊直政」 항목. ↩

  37. 「彦根藩」, 日本語版ウィキペディア; 彦根城博物館 공식 사이트 종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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