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원계회도(薇垣契會圖)》, 조선 관료들이 강가에서 모임을 갖는 장면을 그린 계회도. 16세기 원본의 18세기 이모본,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

조선 초기 정승 가문은 조선 말기까지 흥했을까

전에 황희(黃喜)의 5대손 황진(黃進)에 대한 글을 쓰면서 “황희 이후로 이 집안에서 정승에 오른 직계 후손은 없다”고 적었다. 사료에 나와 있으니 거짓일 리는 없고.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황희 정도 되는 재상의 5대손이 왜 하필 무과를 택했느냐는 거였다.

답을 찾으려고 건국기 정승 가문 후손들의 관직을 찾아보니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황희 집안만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황희 집안 정도면 꽤나 자리를 잘 지킨 수준이었다. 그래서 질문 자체를 뒤집어보기로 했다. 조선 건국 초기에 정승, 그러니까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지낸 사람들의 가문은 조선 말기까지 얼마나 흥했을까.

표본, 그리고 그 한계부터

조사 대상은 조준, 하륜, 남재, 성석린, 유정현, 이원, 맹사성, 허조, 정도전, 황희 열 명으로 잡았다. 모두 태조에서 세종 연간에 정승을 지낸 인물들이다. (정도전만 예외로, 생전 최고 관직이 판삼사사·문하시랑찬성사였고 문하시중이나 영의정에 오른 적은 없다.) 이 열 가문을 조사하는 게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설계된 표본 연구는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인물로 열 개를 꼽은 것에 가깝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둔다.

아들·손자 대만 보면 그림은 나쁘지 않다. 열 가문 중 일곱 곳에서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오른 인물이 다시 나왔다. 조선 초기 당상관까지 오른 사람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 자손의 31–74퍼센트를 관직에 진출시켰다는 한충희의 연구가 있는데, 유력 가문일수록 이 비율은 더 높아진다. 초반 성적이 좋은 건 이 때문이다.

3–5대, 그러니까 16세기 중반까지 내려오면 결과가 확 달라진다. 정승·판서급이 계속 유지된 집안은 정도전과 남재 정도이고 나머지 집안은 대부분 핵심 관직에서 멀어진다. “조선 말기까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17–19세기 조선 후기까지 마저 추적했다. 그 결과가 아래다.

대가 끊긴 하양 허씨

허조(許稠, 1369–1439)는 세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아들 허후는 예조판서에 올랐지만 1453년 계유정난에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했다가 거제로 유배된 뒤 교살당했다. 손자 허조(許慥, 아버지와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도 1456년 단종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대 연속으로 이어진 정치적 참화였고, 가문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이후 조선왕조 전 기간을 통틀어 하양 허씨에서 정승이나 판서급 인물은 다시 배출하지 못하고 만다.

조선 후기에 유명한 정승 허적(1610–1680, 영의정을 세 차례 지냈다)과 허목(1596–1682, 우의정)이 있어서 하양 허씨가 후기에도 건재했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양천 허씨로, 하양 허씨와는 본관 자체가 다르다.

급락했지만 절멸은 아닌 집안 — 신창 맹씨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아들 맹귀미는 감찰, 손자 맹효증은 동지중추부사에 그쳤고, 증손 맹석흠이 1467년 적개공신(이시애의 난 진압 공신)에 책봉된 것을 마지막으로 판서급 이상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맹씨 가문도 몰락한 것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는 않았다. 17세기 이후로 맹세형(1623년 문과 급제, 봉상시정)과 그 아들 맹주서(1670년 무렵 황해도관찰사), 맹만택(1706–1709년 충청도관찰사), 맹지대(1773년 문과 급제, 병조참지)로 계보가 이어진다. 판서나 정승은 340년 가까이 다시 나오지 않았지만 당상관급 인사는 18세기 후반까지 꾸준히 배출됐다.

반전의 집안 — 의령 남씨

남재(南在)는 영의정을 지냈고 손자 남지(南智)도 좌의정에 올랐다. 이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파가 하나 나오는데, 남지의 아들 남칭에서 갈라진 이른바 부정공파다.

부정공파는 남세건, 남응운(1509–1587, 이조참판)을 거쳐 남이공(1565–1640)에 이르러 인조 때 이조판서에 오른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남치훈(1645–1716, 도승지·형조참판)을 거쳐 남태제(1699–1776)가 1767년, 영조 후반에 다시 이조판서에 오른다. 비슷한 시기 남태기(1699–1763)도 예조판서를 지냈다. 건국 초기 정승부터 18세기 후반까지, 열 가문 중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정승·판서급을 배출한 가문이다.

남구만(1629–1711, 1687년 영의정), 남유용(영조 대 대제학), 남공철(1760–1840, 순조 때 영의정)을 남재로부터 나온 부정공파에 엮어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들의 계보를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남구만의 아버지는 남일성, 남공철의 계보는 남유용, 남한기, 남정중, 남용익으로 이어지는데 이 이름들이 위에서 확인한 부정공파 계보의 어느 이름과도 맞지 않는다. 넓은 의미에서 의령 남씨인 건 맞지만, 남재의 직계 후손이라는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형제의 후손이 더 흥한 창녕 성씨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태종 15년(1415) 영의정에 올랐다. 세종실록에 실린 졸기를 보면 아들이 성지도와 성발도 둘뿐이었다고 나온다. 그중 성발도가 의정부 참찬과 형조판서까지 올랐는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성발도 이후 후손의 이름 자체가 실록에도, 어느 인물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직계는 사실상 성발도 대에서 끊겼다.

하지만 창녕 성씨라는 성관 자체가 몰락한 것은 아니다. 몰락은커녕 조선시대 내내 명문으로 통했다. 우의정 성봉조, 영의정 성준(1503년), 좌의정 성세창(1545년), 그리고 사육신 성삼문까지 나왔다. 다만 전부 성석린의 형제인 성석용과 성석인의 후손이고, 성석린의 직계는 아니다.

조준家에서도 반복되는 착시 — 평양 조씨

창녕 성씨와 비슷한 패턴이 조준(趙浚) 집안에서도 나타난다. 조준은 1400년(정종 2) 영의정에 올랐고 아들 조대림은 태종의 부마가 됐지만 이건 실직이 아니다. 손자 조무영이 지돈녕부사에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직계 후손의 관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한편 평양 조씨 중 조선 후기에 이름을 남긴 인물로 조심태(1740–1799, 형조판서·한성부판윤)와 조희연(1856–1915, 갑오개혁 때 군부대신)이 있다. 이들은 조준이 아니라 조준의 아우 조견(趙狷)의 후손이다. 앞의 창녕 성씨와 같다.

회복했다가 다시 조용해진 집안들 — 봉화 정씨·진주 하씨·문화 유씨

정도전(鄭道傳)은 1398년 처형됐다. 그런데 아들 정진이 세종 때 형조판서에 오르고, 증손 정문형이 1496년 우의정에 오르면서 4대 만에 회복한다.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지 100년도 안 돼 손자뻘 후손이 우의정에 오른 셈이니 극적인 반전이다. 정문형 이후로는 봉화 정씨 인물 자체가 자료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름이 나오는 건 1886년생 독립운동가 정용선이다. 그 사이 400년 동안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하륜(河崙, 1347–1416)과 유정현(柳廷顯, 1355–1426)은 아예 회복할 기회조차 못 가진 경우다. 태종실록에 실린 하륜의 졸기는 “아들이 하구 하나”라고 명기하고 있고, 하구의 졸기는 다시 “아들이 하복생 하나”라고 적는다. 하복생 이후로는 이름 말고 아무 기록도 남지 않았다. 하연(河演, 1376–1453, 영의정)이 진주 하씨라서 하륜의 후손으로 오해받기 쉬운데, 하연의 계보는 하윤원으로 이어지는 다른 갈래다.

유정현도 사정이 비슷하다. 세종실록의 졸기에 아들 유의와 유장이 나오는데, 손자로 추정되는 유수강이 1444년 중추원부사(종2품)에 오른 기록은 있지만, 유수강이 정말 유장의 아들인지는 위키백과 계보도 말고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정승은 고사하고 그 손자가 실존 후손인지조차 불확실한 채로 이야기가 끊긴다.

한 세기를 건너뛴 장수 황씨

반신상으로 그린 황희 초상, 분홍색 관복과 검은 사모 차림
황희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덕수5524), 공공누리 제1유형.

황희(黃喜, 1363–1452)로 돌아가 보자. 아들 황치신은 판중추부사, 막내 황수신은 1467년 영의정에 올랐다. 손자 황사효는 동지중추부사, 증손 황개는 아예 무반 명예직에 그쳤고, 5대손 황진은 앞서 소개한 대로 무과를 택해 진주성에서 전사했다. 같은 항렬에서 다른 갈래로는 황맹헌(1498년 문과, 한성부판윤)이 있었고, 16세기 말에는 황윤길(1590년 통신사 정사)이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17세기에는 특별히 벼슬을 한 기록이 없다. 황윤길 이후로 한 세기가 넘도록 판서급 인물이 확인되지 않다가, 18세기 후반에 황경원(1709–1787, 예조·형조·공조판서, 대제학)과 그 동생 황승원(1732–1807, 형조판서)이 다시 등장한다. 정승까지는 못 올랐지만 판서급으로는 확실히 재기했다.

관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몰락 — 고성 이씨

이원(李原, 1368–1430)은 좌의정까지 올랐다가 1426년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아들 이지가 다시 관직에 나섰고, 손자 이육(1438–1498)은 문과 장원급제 후 예조·병조·형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내며 사암공파를 일으켰다.

그러나 5대째에서 급격히 가문이 몰락한다. 그 후손이 바로 이괄(李适, 1587–1624)이다. 무과 출신으로 한성부판윤과 평안병사 겸 부원수까지 올랐던 이괄은 1624년 인조반정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그 결과 후손들은 조선시대 내내 고성 이씨라는 본관을 쓰지 못하고 진주 이씨로 위장한 채 살아야 했다. 고성 이씨로 돌아온 건 해방 이후다.

종합 — 왜 이런 편차가 생겼나

열 가문을 정리하면 이렇다.

가문마지막 확인 정승·판서급패턴
하양 허씨(허조)허조 본인, 1439년완전 절멸
신창 맹씨(맹사성)맹지대, 1773년(당상관)급락했으나 절멸 아님
의령 남씨(남재)남태제, 1767년 이조판서후기까지 지속
창녕 성씨(성석린)성발도, 15세기 전반직계 단절, 방계는 대성
평양 조씨(조준)조무영, 15세기 전반직계 단절, 방계는 대성
봉화 정씨(정도전)정문형, 1496년 우의정회복 후 재단절
진주 하씨(하륜)하구, 1417년손자 대 단절
문화 유씨(유정현)유정현 본인, 1426년사실상 본인 대 단절
장수 황씨(황희)황승원, 1807년 몰(형조판서)공백 후 재기
고성 이씨(이원)이괄, 1624년(반란으로 몰락)관직 대신 은신

이 편차를 설명하는 학술적 근거로 한충희의 음서 연구가 자주 인용된다. 조선 초기 당상관에 오른 인물은 과거와 음서를 합쳐 자손의 31–74퍼센트를 관직에 진출시켰고 파평 윤씨나 청주 한씨처럼 유력한 성관은 이 비율이 더 높았다. 초반 세대가 대체로 선전한 이유는 이걸로 설명이 된다.

문제는 3–5대를 넘어가는 순간부터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설명하기도 했지만, 최근 연구들은 훈구가 사림처럼 결속된 하나의 정치 세력이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신 몇 가지 제도적 요인이 겹쳐 있었다. 하나는 토지다. 과전법은 애초에 세습을 인정하지 않는 토지였는데, 1466년 직전법으로 전환되며 그 여지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관직을 잃으면 곧바로 경제적 기반도 함께 잃는 구조였다. 둘은 청요직이다. 양반이라는 신분은 세습돼도 사헌부·사간원·홍문관 같은 요직은 사실상 문과 급제자의 자리였고, 음서로 관직에 들어가도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뿐이지 정승이나 판서가 되는 것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매 세대가 다시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는 뜻이다. 셋은 반복된 정치적 숙청이다. 계유정난부터 4대 사화, 숙종대 환국까지 격변이 이어지며 이번 세대에 오른 가문도 다음 세대엔 무너질 수 있었다. 넷은 혼맥이다. 조선 양반가는 특정 두세 가문끼리만 뭉치지 않고 여러 유력 가문에 두루 걸쳐 혼인했는데, 이 분산 구조가 권력이 한곳에 고이는 걸 막았다.

실제로 표본을 보면 사화나 반정 같은 정치적 사건으로 몰락한 집안(하양 허씨, 고성 이씨)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사건 없이 그냥 서서히 잦아든 집안(신창 맹씨, 진주 하씨)도 있고, 그 반대로 특별한 계기 없이 몇 세대씩 다시 판서를 배출한 집안(의령 남씨, 장수 황씨)도 있다. 하나의 원인으로 열 가문의 흥망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조선만 이랬을까 — 일본·중국·고려와 비교하면

이 정도로 대물림이 안 되는 게 조선만의 특이 현상인지 궁금해졌다. 비교해보니 조선은 동아시아 안에서도 유독 불안정한 축에 속했다.

같은 시기 일본을 보면 그림이 완전히 다르다. 에도 막부의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는 세키가하라 전투(1600) 이전부터 도쿠가와를 섬긴 가신 가문인데, 이들은 개인이 아니라 “이에(家)” 단위로 영지와 관직을 세습했다.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가문은 히코네번 35만석을 봉토 이전 한 번 없이 메이지 유신까지, 그러니까 270년 가까이 단절 없이 지켰다. 당주가 후사 없이 죽어도 양자를 들여서라도 가문 자체를 존속시키는 게 원칙이었다. 물론 일본도 완전히 안정적이지는 않았다. 세키가하라 직후 서군에 가담한 다이묘 가문들이 대거 개역(改易, 봉지 몰수)됐고 에도 초기엔 개역이 잦았다. 그래도 한번 자리를 잡은 가문이 조선처럼 3–4대 만에 흔들리는 일은 드물었다.

중국은 오히려 두 극단을 다 보여준다.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는 호유용의 옥(1380)과 남옥의 옥(1393)으로 개국공신을 거의 통째로 처형했다. 조선의 계유정난이나 사화가 특정 가문이나 정파를 겨냥한 사건이었다면, 이쪽은 개국공신이라는 집단 자체를 물리적으로 절멸시킨 규모였다. 반대로 청나라는 철모자왕(鐵帽子王)이라는 예외 조항을 둬 일부 종실 가문에는 대대로 작위가 깎이지 않는 영구세습을 허락했다. 하나의 문명으로 뭉뚱그리기 어려울 만큼 명과 청의 접근이 정반대였다.

가장 흥미로운 비교 대상은 고려다. 조선 바로 앞 왕조인 고려의 경원 이씨는 이허겸부터 이자겸까지 4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며 권력을 세습했다. 이게 가능했던 핵심은 음서 제도의 폭이었다. 고려 음서는 5품 이상 관료의 자손이면 받을 수 있었고 사위·외손까지 대상에 포함됐으며, 무엇보다 승진 상한이 없어서 음서로 들어간 사람의 절반 이상이 재상까지 올랐다. 반면 조선 음서(문음)는 대상을 2품 이상으로 좁히고 외가를 아예 제외했으며, 문음 출신에게는 승진 상한을 둬서 애초에 정승·판서로 가는 길 자체를 막아버렸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며 이 안전장치를 스스로 걷어낸 셈이다. 물론 고려도 이자겸의 난(1126)으로 경원 이씨가 무너지고, 이후 무신정변(1170)이 100년 가까이 이어지며 문벌귀족의 세습 사슬 자체를 끊어놓긴 했다. 다만 그 뒤에 세워진 나라가 조선이다. 조준처럼 권문세족 출신도 있었지만 정도전처럼 향리 집안 출신도 섞여 있는 신흥사대부 연합이 세운 나라였고, 이것이 고려와 조선이 관직의 세습에 대해 정반대의 제도를 갖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정리하면 일본은 가문 단위 세습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쪽, 중국은 시기별로 절멸과 영구세습을 오갔던 쪽, 고려는 음서 하나로 사실상 세습에 가까웠던 쪽이다. 조선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신분은 세습되나 관직은 능력주의인 왕조였다.

그렇기에 조선 건국 초기에 정승을 했던 인물의 가문 중에는 대가 끊긴 집안도, 몇 세기를 건너 다시 부흥한 집안도, 아예 가문 자체를 숨겨야 했던 집안도 있었다. 이번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쓰는 계기가 된 황희의 5대손 황진. 그가 무과를 택한 것도 황희의 집안이 특이 케이스로 몰락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조선 시대에는 흔히 있을 법한 얘기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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