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4년 유럽에서 간행된 라 플로리다 지도

후안 폰세 데 레온(1474?–1521) — 젊음의 샘이 아니라 권력을 쫓았다

1521년 7월 초, 쿠바 아바나. 한 남자가 상처의 감염으로 숨을 거둔다. 며칠 전 플로리다 남서부 해안에서 원주민의 화살에 넓적다리를 맞았고, 정착지 건설을 포기한 부하들이 그를 배에 실어 이곳까지 후송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이름은 후안 폰세 데 레온. 훗날 이 죽음은 “젊음의 샘을 찾아 헤매다 실패한 탐험가의 최후”로 전 세계에 알려진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젊음의 샘이라는 말은 그가 남긴 어떤 문서에도, 왕실과 맺은 어떤 계약서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런 것을 찾아다녔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이 전설은 그가 죽고 14년이 지난 1535년, 그의 정적 측에 섰던 한 연대기 작가의 붓끝에서 처음 태어났다. 폰세 데 레온은 샘을 찾다 죽은 몽상가가 아니라, 진압과 통치와 정치 싸움을 거듭하다 마지막 도박에서 목숨을 잃은 지극히 현실적인 정복자였다.

신대륙으로 건너온 소년

폰세 데 레온의 출생부터가 불분명하다. 스페인 바야돌리드 인근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 출신이라는 데는 사료들이 대체로 일치하지만, 태어난 해는 오랫동안 통용된 1460년설과 최근 학계가 제시하는 1474년경설로 학계의 의견이 아직 통일되지 않았다. 부모의 이름조차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건 가난한 하급 귀족 가문 출신으로, 페드로 누녜스 데 구스만이라는 기사 밑에서 종자로 자랐다는 정도다.

신대륙에 언제 건너왔는지도 마찬가지다. 16세기 연대기 작가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는 그가 1493년 콜럼버스의 2차 항해에 “젠틀맨 자원병” 신분으로 승선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는 1502년 니콜라스 데 오반도 총독의 함대를 타고 왔을 가능성을 더 높게 보고 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젊은 나이에 카리브해로 건너와, 곧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얻는다.

안토니오 데 에레라의 저서에 실린 폰세 데 레온 판화 초상화
안토니오 데 에레라 이 토르데시야스의 『Historia general de las Indias Occidentales』(1728년판) 수록 판화. 생전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고, 이 그림도 사후 200년 가까이 지나 그려진 상상화다.

그 기회는 1504년 이스파니올라 동부 이구에이 지역에서 왔다. 원주민 타이노족이 스페인 수비대를 궤멸시키자 총독 오반도는 진압군 지휘를 그에게 맡겼다. 그는 원주민 지도자 코투바나마를 상대로 작전을 지휘해 승리했고, 이 진압 과정에서 도미니크회 수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가 스페인 당국에 고발을 시도할 정도로 잔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승리의 대가로 오반도는 그에게 이구에이 지역의 통치권과 원주민 강제노동권(엔코미엔다)을 하사했다. 진압의 공로로 처음 출세를 하게 된 것이다.

총독이 된 진압자

이구에이에서 거둔 성공은 더 큰 무대로 이어졌다. 1508년 오반도의 허가를 받아 그는 산후안 바우티스타섬, 지금의 푸에르토리코를 탐사했다. 서부에서 사금 매장지를 발견했고, 산후안 만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자리에 카파라라는 정착지를 세웠다. 이듬해 페르난도 2세가 그를 정식 총독으로 인정해주면서 그는 카리브해 신생 식민지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통치자로서 그는 유능했다. 카파라에 금 제련소를 세우고 시의회를 소집해 왕실에 세입을 정기적으로 송금하는 행정 체계를 갖췄다.

과이나보에 남은 카파라 정착지 유적 석조 기단
과이나보(옛 카파라) 유적에 남은 석조 기단. 폰세 데 레온의 자택으로 추정되는 자리다.
하지만 강제노동과 학대가 누적되며 원주민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1511년, 카시케 아구에이바나 2세가 이끄는 타이노족의 대규모 봉기가 터졌다. 그는 크로스보우와 아르케부스로 무장한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 정복자로서 그의 이력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격렬했던 순간이다.

그런데 바로 이 승리의 순간에, 그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싸움에 발목을 잡힌다. 상대는 원주민이 아니라 콜럼버스의 아들이었다.

좌천이 아니라 소송에서 진 것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506년 죽자, 아들 디에고 콜럼버스는 1492년 산타페 협약에 근거한 세습적 부왕 지위를 주장하며 신대륙 통치권을 요구했다. 스페인 왕실은 처음에는 폰세 데 레온을 직접 임명해 이 세습권 주장에 맞섰지만 몇 년에 걸친 임명과 해임, 재임명이 오가는 법정 다툼 끝에 저울은 결국 콜럼버스 가문 쪽으로 기울었다. 1511년 말, 그는 총독직에서 밀려났다.

흔히 이 사건은 “정치적 좌천”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사료를 따라가 보면 이야기는 더 복잡하다. 왕실이 그에게 준 보상은 격이 낮아진 자리가 아니었다. 1512년 2월 23일 부르고스에서 체결된 계약으로 그는 비미니라는 미지의 섬을 탐사할 권리를 얻었다. 직함도 “아델란타도이자 종신 총독”으로, 명목상으로는 오히려 더 높았다. 문제는 실질이었다. 이미 금광이 확인되고 정착이 진행된 안정적인 푸에르토리코를, 존재 여부조차 불확실한 미지의 땅과 맞바꾼 것이다. 게다가 원정 비용은 전액 자비 부담 조건이었다. 명목상 승격, 실질적으로는 확실한 것을 걸고 도박에 나선 셈이었다.

이 계약서 어디에도 젊음의 샘 이야기는 없다. 원주민 복속과 금 분배 방식에 대한 실무적 지침만 담겨 있을 뿐이다.

샘이 아니라 금과 땅을 찾아서

1513년 3월 4일, 그는 선박 세 척과 승선원 약 65명을 이끌고 푸에르토리코를 출항했다. 수석 조타수는 안톤 데 알라미노스, 승선자 중에는 훗날 멕시코 정복에도 참여하는 자유 아프리카인 후안 가리도도 있었다. 4월 초 육지를 목격한 그는 부활절 시기라는 뜻의 스페인어 “파스쿠아 플로리다”를 따 이 땅을 “라 플로리다”라 이름 붙였다. 정확한 상륙 지점은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관광지로서 이 지명을 내세우는 지금의 세인트오거스틴 인근이 유력하지만, 남쪽 멜버른 인근이라는 반론도 여전히 경합 중이다.

이 항해에서 그는 뜻밖의 것을 만난다. 남하하던 배가 강한 바람에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밀렸다. 바람보다도 강력한 조류를 만난 것이다. 유럽인이 걸프 스트림, 즉 멕시코 만류를 처음으로 기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스페인 왕실도 이 발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 해류가 실제로 지도에 그려지고 이름을 얻은 건 그로부터 250여 년이 지난 1768년, 벤저민 프랭클린의 손에서였다. 그가 우연히 마주친 현상이 훗날 스페인 보물선단의 표준 귀환 항로로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더 필요했다.

원정의 목적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새로운 영토, 금, 그리고 정치적 재기였다. 후대의 이야기들이 전하는 것처럼 젊음의 샘을 찾아 떠난 탐험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후 14년, 조롱으로 태어난 전설

그렇다면 젊음의 샘 이야기는 어디서 왔을까. 답은 명확하다. 1535년, 그가 죽고 14년이 지난 시점에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가 쓴 『인디아스 통사』에서였다. 오비에도는 원주민들 사이에 떠돌던 젊음의 샘 전설을 전하며, 폰세 데 레온과 그 일행이 “카라벨선을 이끌고 길을 잃은 채 이 샘을 찾아 헤맸다”고 적었다.

이 서술은 중립적인 기록이 아니었다. 오비에도는 그의 정적이었던 디에고 콜럼버스 진영에 서 있었고, 그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현대 학계는 이 기록을 의도적인 조롱으로 본다. 원주민의 이야기에 속아 헛수고를 한 얼간이로 그를 그려내려 했다는 해석이다. 이후 1601년 왕실 연대기 작가 안토니오 데 에레라가 이 이야기를 다시 서술하며 대중적으로 이 이야기가 더욱 널리 퍼지게 됐지만 에레라 역시 후안 폰세 데 레온 본인이 사망한 지 80년 뒤에 쓴 2차 서술자였을 뿐 뭔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목격자의 증언은 정반대였다. 후안과 함께 17년간 플로리다 원주민 사회에 억류됐던 에르난도 데 에스칼란테 데 폰타네다는 회고록에서 이 전설을 “웃음거리”라 부르며 비웃었다.

마지막 도박과 죽음

1521년, 그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다. 이번에는 탐사가 아니라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이었다. 사제와 농부, 장인을 포함한 약 200명, 말 50필과 가축, 농기구를 배 두 척에 나눠 싣고 플로리다 남서부에 상륙했다. 정착지 건설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지역의 원주민 칼루사족이 공격해왔다. 전투 중 그는 화살에 부상을 입었고, 원정대는 정착을 포기한 채 쿠바 아바나로 퇴각했다. 그리고 도착 후 그곳에서 상처의 감염으로 숨을 거뒀다.

유해는 처음 쿠바에 묻혔다가 훗날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으로 옮겨져, 지금도 산후안 대성당에 안장돼 있다.

250년 뒤에야 알아본 발견, 그리고 되살아난 신화

그의 이름을 딴 지명 하나에는 오해가 섞여 있다. 푸에르토리코 제2의 도시 폰세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 맞지만 정작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증손자를 기려 붙여진 이름이다. 그가 세운 최초의 정착지 카파라는 습지와 풍토병 문제로 그가 죽은 뒤인 1521년 무렵 지금의 올드산후안으로 옮겨졌다. 이 과정에서 섬 전체의 이름이었던 “푸에르토리코”와 도시 이름이었던 “산후안”이 서로 바뀌게 되었다.

젊음의 샘 신화는 20세기 들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부활한다. 1904년, 세인트오거스틴의 한 우물이 “젊음의 샘”이라는 이름으로 관광지가 됐다. 흥미로운 건 그 다음이다. 1930년대와 1990년대 발굴 조사에서 이 부지는 실제로 1565년 스페인이 세운 최초의 정착지이자 미국 최초의 가톨릭 선교지 유적으로 밝혀졌다. 다만 그 진짜 역사는 폰세 데 레온과는 무관하다. 그가 실제로 이 자리에 상륙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름만 그의 전설을 빌렸을 뿐, 부지 자체는 우연히 진짜였던 셈이다.

세인트오거스틴 젊음의 샘 고고학 공원에 세워진 폰세 데 레온 동상
세인트오거스틴 "젊음의 샘 고고학 공원" 내 폰세 데 레온 동상. 산후안 동상의 복제품으로, 1904년 관광지 개장 이후 세워졌다.

그 신화는 지금도 소비되고 있다. 2025년에는 그의 전설에서 영감을 받은 애플TV플러스 영화 『Fountain of Youth』가 개봉했고, 2026년 플로리다 주는 미국 건국 2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주의회 광장에 그의 새 동상을 세웠다. 조지 워싱턴 동상과 마주 보는 자리다. 반대편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는 2022년 독립주의 단체가 그의 동상을 끌어내렸다가 하루 만에 시 당국이 복구하는 일이 있었다. 미국은 그를 건국 서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푸에르토리코는 정복자로서 그를 다시 밀어내려 한다. 같은 인물을 두고 두 곳에서 정반대의 재평가가 동시에 진행 중이다.

그는 살아서 걸프 스트림을 처음 만났지만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고, 죽어서는 찾은 적도 없는 샘의 전설로 기억됐다. 그가 실제로 한 일, 진압하고 통치하고 소송에서 지고 다시 도박에 나선 일들은 정작 신화의 그늘에 가려졌다.

주요 참고문헌

  • Robert H. Fuson, Juan Ponce de León and the Spanish Discovery of Puerto Rico and Florida (McDonald & Woodward, 2000)
  • Gonzalo Fernández de Oviedo y Valdés, Historia general y natural de las Indias (1535년경 집필)
  • Antonio de Herrera y Tordesillas, Historia general de los hechos de los castellanos (1601)
  • Hernando d’Escalante Fontaneda, Memoria de las cosas y costa y indios de la Florida (1575년경)
  • J. Michael Francis, “Juan Ponce de León and the Fountain of Youth: History, myth, and the commemoration of Florida’s past,” in The Voyages of Ponce de León: Scholarly Perspectives (Florida Historical Society Press)
  • T. Frederick Davis, 1513년 상륙 지점 연구 (193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