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 초상,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카네가사키 퇴각전: 히데요시 신화 뒤에 가려진 성주

와카사국(若狭国, 지금의 후쿠이현 서부) 산속에 쿠니요시성(国吉城)이라는 작은 산성이 있었다. 성주는 아와야 카츠히사(粟屋勝久)라는 인물인데, 와카사 다케다 가문(다케다 신겐의 가이 다케다 가문과는 오래전에 갈라진 별개 가문이다)을 섬기던 가신단 중 한 명이었다. 그리 잘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키는 성이 1563년부터 매년 에치젠(越前, 지금의 후쿠이현 동부)의 아사쿠라 가문 군대에 공격당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0년 연속으로, 하지만 성이 함락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토벌에 나섰을 때 첫 진영을 차린 곳이 바로 이 쿠니요시성이다. 이틀을 묵었다. 그리고 여기서 시작한 원정이 노부나가의 생애에서 유일한 패주, 카네가사키 퇴각전(金ヶ崎の退き口)으로 이어진다.


10년을 버틴 성

와카사 쿠니요시성 역사자료관 외관, 후쿠이현 미하마초
와카사 쿠니요시성 역사자료관(若狭国吉城歴史資料館). 후쿠이현 미하마초 사카키. 건물 앞 깃발에 "난공불락 쿠니요시성(難攻不落 国吉城)"이라 적혀 있다. 쿠니요시성터는 이 자료관 뒤편 산 정상에 있다. 사진: Asturio Cantabrio, 2022. CC BY-SA 4.0.

와카사는 원래 다케다 가문의 영지였는데, 1560년대 들어 당주 다케다 요시토요(武田義統)가 죽고 후계 문제로 흔들리자 옆 나라 아사쿠라가 개입할 틈이 생겼다. 아와야 카츠히사는 요시토요의 아들 다케다 모토아키(武田元明)를 옹립하며 아사쿠라의 개입에 맞섰고, 그 대가로 에이로쿠 6년(1563)부터 아사쿠라 카게노리(朝倉景紀)가 이끄는 침공군을 거의 매년 받아냈다.

결과만 보면 압도적인 수성전이다. 쿠니요시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다만 에이로쿠 11년(1568)에는 아사쿠라군이 아예 이 난공불락의 성을 우회해버렸다. 카츠히사가 옹립한 모토아키를 따로 붙잡아 에치젠 이치조다니(一乗谷)의 아사쿠라 저택에 유폐시킨 것이다. 주군이 인질로 잡혀간 뒤에도 카츠히사는 계속 성을 지켰다.

그리고 겐키 원년(1570) 4월 23일,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이 이 성에 도착한다. 정확히는 이날 원정군이 교토를 나선 지 사흘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출진한 4월 20일은 아직 에이로쿠 13년이었는데, 진군 도중인 4월 23일 조정이 연호를 겐키(元亀)로 바꿨다. 노부나가가 쿠니요시성에 여장을 풀 무렵엔 이미 새 연호가 시작돼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 성에서 카츠히사의 10년 항전을 치하했다고 전한다. 근거 사료는 후대의 군담 『쿠니요시로조키(国吉籠城記)』 계통이라 세부 대사까지 믿기는 어렵지만, 노부나가가 실제로 이 성에 이틀을 묵었다는 것 자체는 확실하다. 그리고 그 이틀 뒤, 원정군은 이 성을 발판 삼아 본격적으로 에치젠을 친다.


침공과 배신

카네가사키성터 사적비, 후쿠이현 츠루가시
카네가사키성터(金ヶ崎城跡) 사적비. 후쿠이현 츠루가시. 1936년 건립. 사진: 立花左近, 2012. CC BY-SA 3.0 / GFDL.

4월 25일, 노부나가군은 테즈츠야마성(天筒山城)을 격전 끝에 함락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카네가사키성(金ヶ崎城)의 아사쿠라 카게츠네(朝倉景恒)는 전의를 잃고 다음 날 순순히 항복했다. 아사쿠라군 본대는 츠루가(敦賀)를 포기하고 키노메고개(木ノ芽峠) 방면으로 물러났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운 진격이었다. 노부나가는 그대로 밀어붙여 아사쿠라 본거지 이치조다니까지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오미(近江, 지금의 시가현)를 지키던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가 배신했다는 소식이 도착한다.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お市)와 혼인한 매제였고, 동맹의 핵심축이었다. 그런 나가마사가 아사쿠라 편에 서면서, 노부나가군은 앞으로는 아사쿠라, 뒤로는 아사이의 협공에 갇히게 됐다.

아사이 나가마사 초상
아사이 나가마사 초상. 고야산 지묘인(持明院) 소장, 1580~90년대 제작 추정. Public Domain.

이 소식이 어떻게 노부나가에게 전해졌는지를 둘러싸고 아주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오이치가 친정 오빠에게 양쪽 끝을 실로 묶은 팥 주머니를 보냈고, 노부나가가 그 모양을 보자마자 “포대 양쪽이 묶였다 — 협공이다”라고 알아챘다는 이야기다. 극적이긴 한데, 이 이야기가 실린 사료는 에도 시대 중기에 성립한 『아사쿠라케키(朝倉家記)』 하나뿐이다. 동시대 기록인 『신초코키(信長公記)』에도, 아사쿠라 쪽 기록인 『아사쿠라시마츠키(朝倉始末記)』에도 이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어떤 경로로 정보가 들어왔는지는 명확히 남아있지 않다. 확실한 건 노부나가가 협공 위기를 인지하자마자 즉각 퇴각을 결정했다는 것뿐이다.

여기서부터는 정규 회전이 아니라 퇴각전이다. 오다군은 진형을 갖추고 맞서 싸운 게 아니라 도망치는 쪽이었기 때문에, 정작 실제 교전이 어디서 어떻게 벌어졌는지, 병력이 얼마나 부딪혔는지 같은 전투 자체의 디테일은 사료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후 남은 기록들은 대부분 “누가 후비를 맡았는가”, “누가 무사히 빠져나갔는가”에 쏠려 있다.


후비, 그리고 지워진 이름들

퇴각을 결정하면 누군가는 뒤에 남아 추격을 막아야 한다. 이 역할이 후비(殿, 신가리)다. 나머지 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군을 저지해야 하기 때문에 퇴각 작전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이다.

이 후비를 키노시타 토키치로(木下藤吉郎,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원해서 맡았다는 게 널리 퍼진 이야기다. 대중매체에서 카네가사키 퇴각전을 다룰 때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고다이지 소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교토 고다이지(高台寺) 소장, 1598년경 제작. 1570년 카네가사키 당시 그는 아직 이 이름도 이 지위도 갖기 전인 키노시타 토키치로였다. 통설이 기리는 "영웅"의 이미지는 이렇게 만년의 모습으로 소급 투영된 것이다. Public Domain.

그런데 당시 문서들을 보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무가운전(武家雲箋)』이나 잇시키 후지나가(一色藤長)가 남긴 서장 등에는 토키치로뿐 아니라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그리고 셋츠(摂津) 이케다 가문 당주 이케다 카츠마사(池田勝正)도 후비에 함께 있던 것으로 나온다. 더군다나 카츠마사는 당시 토키치로보다 격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연구에서는 오히려 카츠마사가 후비 병력을 실질적으로 지휘해 아사쿠라군의 추격을 막아냈을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그렇다면 “토키치로 단독 활약”이라는 이미지는 어디서 왔을까. 유력한 후보는 『태합기(太閤記)』다. 유학자 오제 호안(小瀬甫庵)이 에도 시대 초기(1625년경)에 쓴 히데요시 일대기로, 이야기꾼들의 강담(講談) 소재로 널리 퍼지면서 후대의 히데요시 이미지를 사실상 완성한 책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시작해 천하를 잡는 입지전적 인물이니만큼, 그의 첫 결정적 활약을 극적으로 부풀릴 의도가 어느 정도 있는 책이다. 토키치로가 후비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지만, 후비 내에서 격이 더 높았던 미츠히데와 카츠마사를 밀어내고 그가 후비의 주역으로 대중의 뇌리에 새겨지게 된 건 이 책 이후로 굳어진 이미지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야스는 그 자리에 있었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 가노 탄유 작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 가노 탄유(狩野探幽) 작. Public Domain.

이 원정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오다 노부나가와 동행했다는 게 통설이다. 그런데 이것도 확인해보면 간단하지가 않다.

동시대 사료인 『신초코키』에는 이에야스의 이름이 이 원정과 관련된 부분에 나오지 않는다. 이에야스가 참전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건 『간에이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이나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같은 후대 도쿠가와 가문의 사서들인데, 하나같이 가문을 미화하는 성격이 강한 문헌이다. 이들 사서는 이에야스가 철포를 쏘며 응전하면서 퇴각해 큰 전공을 세웠다고까지 적고 있다.

이에야스 가신 오쿠보 타다타카가 쓴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에는 조금 다른 뉘앙스의 기록이 남아 있다. 카네가사키성이 항복한 그날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게 퇴각을 진언했는데 노부나가가 아무 답도 없이 이에야스에게 알리지도 않고 먼저 퇴각해 버렸다고 적고 있다. 노부나가가 매정하게 이에야스를 버렸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카네가사키성까지 겨우 합류한 이에야스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토키치로·미츠히데·카츠마사와 함께 신가리를 맡았다는 이야기다. 이 설이 맞다면 이에야스는 단순 동행이 아니라 후비의 일원이었던 셈인데, 정작 후비 구성원을 나열한 당대 문서(『무가운전』, 잇시키 후지나가의 서장)에는 이에야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어찌 됐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실제 행적을 그날그날 따라갈 만한 동시대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이에야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쿠츠키고에

퇴각 경로로는 산길이 선택됐다. 오미 남쪽 쿠츠키(朽木) 계곡을 넘는 길이었는데, 이 지역 영주 쿠츠키 모토츠나(朽木元綱)는 원래 아사이·아사쿠라 쪽에 가까운 인물이라 노부나가 입장에서는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구간이었다. 여기서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가 나서서 모토츠나를 설득했고, 모토츠나는 노부나가를 맞아들여 직접 교토까지 길을 안내했다.

이때 노부나가를 수행한 인원은 열 명 안팎이었다고 전한다. 원정을 나설 때의 대군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로 적은 숫자다. 이 여정이 지금도 “쿠츠키고에(朽木越え)“라는 이름으로 따로 불릴 만큼, 노부나가로서는 가장 위태로웠던 순간 중 하나였다.


쿠니요시성으로 돌아와서

노부나가는 살아서 교토에 닿았고, 두 달 뒤 6월에는 이번엔 정면으로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과 붙어 이긴다. 아네가와 전투다. 이때 도쿠가와 세력도 참전이 확인되는데, 사카이 타다츠구가 선봉을 맡았다는 이야기 역시 근거가 『간세이초슈쇼카후』 하나뿐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건 별도로 다룬 적이 있다.

아와야 카츠히사는 그 뒤로도 쿠니요시성에 남아 있었다. 아사쿠라와의 싸움은 3년을 더 끌었고, 텐쇼 원년(1573) 노부나가의 2차 에치젠 침공에 카츠히사도 참전해 마침내 아사쿠라 가문의 멸망을 지켜봤다. 10년 넘게 막아낸 적이 무너지는 걸 본 것이다. 그는 텐쇼 13년(1585)에 죽었다. 끝내 한 번도 성은 빼앗기지 않은 그였다.

출처

동시대·당대 1차 사료

  • 『신초코키(信長公記)』 — 오다 노부나가의 동시대 기록. 이 글에서 다루는 여러 후대 서술(콩 주머니 일화, 이에야스의 참전·신가리 동참)이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사료 비판의 기준선이 된다.
  • 『무가운전(武家雲箋)』, 잇시키 후지나가(一色藤長)가 남긴 서장 — 후비(신가리) 구성원을 아케치 미츠히데·이케다 카츠마사까지 포함해 기록한 당대 문서.

후대 편찬 사서·군담 (신뢰도 낮음, 성립 시기·편찬 의도에 따라 서술이 갈림)

  • 『아사쿠라케키(朝倉家記)』 — 에도 시대 중기 성립. 노부나가가 콩 주머니로 협공을 알아챘다는 일화의 유일한 출처.
  • 『아사쿠라시마츠키(朝倉始末記)』 — 아사쿠라 쪽 후대 기록.
  • 『쿠니요시로조키(国吉籠城記)』 — 아와야 카츠히사의 10년 항전을 다룬 후대 군담.
  • 『간에이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 『도쿠가와짓키(徳川実紀)』 — 도쿠가와 가문을 미화하는 성격이 강한 후대 사서. 이에야스의 참전과 철포 응전 활약을 기록한 근거가 이 두 책뿐이다.
  •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 — 이에야스 가신 오쿠보 타다타카가 쓴 도쿠가와 가문사. 정반대로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게 버려졌다는 뉘앙스의 서술을 담고 있다.
  • 『태합기(太閤記)』 — 오제 호안(小瀬甫庵)이 에도 시대 초기(1625년경)에 쓴 히데요시 일대기. “도키치로 단독 활약”이라는 통설 이미지가 굳어진 유력한 출처로 추정된다.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 사카이 타다츠구의 아네가와 전투 선봉설의 근거가 되는 후대 계보서(별도 글에서 다룬 사안).

이 글은 별도의 딥리서치 원자료(참고 서적·논문 목록) 없이 위 원전 사료를 직접 인용·비교하는 방식으로 작성됐다. 현대 연구자의 학술적 재해석까지 확인이 필요하면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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