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시카 호쿠사이가 그린 갑주 차림의 가토 기요마사 족자화(나고야 도켄 월드 소장)

가토 기요마사(1562–1611) 완전 정리 — 조선의 원수, 구마모토의 수호신

Q: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누구인가?

A: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출신의 무장(1562~1611). 도공의 아들로 태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쇼(小姓)로 출사했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1583)에서 이른바 “칠본창(七本槍)“의 한 명으로 이름을 알렸다. 규슈 정벌에 종군한 뒤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가 히고(肥後) 통치에 실패해 개역되자 그 뒤를 이어 1588년 히고 북반국의 영주가 됐다. 임진왜란에서는 2번대 지휘관으로 함경도까지 진격해 조선 왕자 두 명을 포로로 잡았다. 정유재란에서는 울산성(도산성) 농성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쓰나리·고니시 유키나가와 반목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해 히고 일국의 태수가 됐다. 구마모토성을 쌓고 치수 사업을 벌인 통치자였고 니치렌종(日蓮宗)의 독실한 신자였다. 1611년 도쿠가와-도요토미 회견을 성사시킨 직후 급사했다. 사후에는 “세이쇼코(清正公)“라는 신앙의 대상으로 추앙받았다. 일본에서는 충신·명군주·수호신으로, 한국에서는 함경도를 유린한 침략군 사령관으로 기억된다.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다.


한눈에 보는 가토 기요마사

항목내용
이름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かとう きよまさ)
유명(幼名)야샤마루(夜叉丸)
생몰1562년 6월 24일(에이로쿠 5년) ~ 1611년 6월 24일(게이초 16년) — 향년 50
출신지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尾張国愛知郡中村, 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부친가토 키요타다(加藤清忠, 도공)
모친이토(伊都) —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모와 인척 관계(정확한 촌수는 이설)
첫 출사1573년경, 히데요시의 고쇼(小姓)
첫 무공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칠본창”의 한 명, 3,000석
히고 최초 배령1588년, 히고 북반국 19만 5,000석
세키가하라 이후 영지히고 일국(표고 약 54만 석, 실고 약 79만 석)
최종 관직종오위상·시종 겸 히고노카미(肥後守)
별명세이쇼코(清正公), 호랑이 가토(虎加藤)
신앙니치렌종(法華宗) 독실한 신자
보리사혼묘지(本妙寺, 구마모토)
사후니치렌종 세이쇼코 신앙, 가토 신사(신불분리 이후)

가토 기요마사의 생애에는 상반된 세 축이 겹쳐 있다. 오와리의 도공 집안에서 대다이묘까지 오른 입신의 서사, 조선에서 침략군 사령관으로 남은 전쟁의 기억, 죽은 뒤 200년에 걸쳐 신으로 다시 만들어진 신앙의 역사다. 이 세 축은 한 사람 안에서 맞물리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같은 사람을 전혀 다른 얼굴로 기억한다. 아래 서술에서는 확실한 사실과 후대 전승을 구분하고, 이번 조사에서 새로 검증한 통설의 오류도 함께 밝힌다.


1. 나카무라의 도공의 아들 (1562~1573)

1-1. 출생과 가문

기요마사는 에이로쿠(永禄) 5년(1562년) 6월 24일,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현재 나고야시 나카무라구)에서 태어났다. 유명은 야샤마루(夜叉丸)라고 한다.1 『일본대백과전서』와 『세계대백과사전』에 이 출생지·생년이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다.2

나카무라구에는 기요마사의 생가터라고 하는 자리에 조센지(常泉寺)라는 니치렌종 사찰이 있다. 게이초 15년(1610년), 나고야성 축성 공사를 맡았던 기요마사 본인이 공사 감독소 건물을 본당으로 삼아 세운 절이다. 경내에는 “히데요시 탄생 목욕물 우물”이라는 유적도 있다. 기요마사와 히데요시가 같은 동네 출신이었다는 정황을 자치체가 유적 차원에서 뒷받침하고 있다.3

아버지 가토 키요타다는 오와리의 도공(刀鍛冶)이었다. 무사보다는 장인 계층에 가까웠던 듯하다. 기요마사가 3세이던 1564년에 사망했고 이후 모자는 쓰시마(津島)로 옮겨 살았다고 전한다.4

1-2. 히데요시와의 인척관계 — 통설과 이설

기요마사의 출세 배경으로 거의 모든 자료가 어머니 이토를 짚는다. 이토가 히데요시의 생모 오만도코로(大政所)와 친척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정확히 몇 촌인지는 사료마다 다르다. 가장 널리 퍼진 설명은 이토가 오만도코로의 사촌이었다는 쪽이다. 이 경우,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의 재종(마타이토코)이 된다.5 다만 상당수 자료는 “사촌, 또는 먼 친척”이라는 단서를 붙여 확정된 관계가 아님을 시사한다. 이토가 오만도코로의 여동생이었다는 이설, 히데요시 부계 쪽 인척이라는 이설도 함께 나온다.6

확실한 것은 히데요시와의 혈연관계가 기요마사의 출사와 초기 승진에 실제로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역사연구가 스즈키 신야(鈴木眞哉)는 기요마사가 10대 시절 오미 나가하마에서 지행을 가증받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히데요시에게 기요마사는 재종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발탁해준 것 아니겠냐”는 해석을 전한다.7


2. 고쇼에서 칠본창까지 (1573~1583)

2-1. 나가하마의 고쇼

기요마사는 덴쇼(天正) 원년(1573년) 무렵, 히데요시의 고쇼로 출사했다.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오미 나가하마성을 하사받아 성주가 된 시점이다. 이때 나이 11세 전후였다.8 덴쇼 4년(1576년)에는 170석의 지행을 받았다.9

2-2. 시즈가타케 전투 — 칠본창의 한 명

1583년(덴쇼 11년) 4월,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시즈가타케에서 맞붙었다. 기요마사는 여기서 무공을 세워 이른바 “시즈가타케 칠본창”의 한 명으로 꼽혔다. 통설에 따르면 시바타 측 무장 야마지 마사쿠니(山路正国)를 토벌한 공으로 오미·야마시로·가와치에 걸친 약 3,000석(정확히는 2,947석)의 영지를 받았다.10

2-3. “칠본창”이라는 이름의 유래 — 서사와 사료의 간극

그러나 “칠본창”이라는 명칭 자체는 시즈가타케 전투 당시의 표현이 아니다. 에도 초기의 군담물 『호안 다이코키(甫庵太閤記)』에서 처음 등장한 후대의 서사다. 동시대 1차 사료인 『덴쇼키(天正記)』 중 「시바타 합전기」는 7명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감상(感状)과 은상을 받았다고 적는다. 『이치야나기가키(一柳家記)』에는 선봉대 14명이 열거되는데 그중에는 오타니 요시쓰구·이시다 미쓰나리도 들어 있다. 7명이라는 숫자는 실제 전공자 전체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에 나오는 숫자일 뿐이다.11

기요마사가 실제로 누구를 벴는지도 설이 갈린다. 스즈키 신야는 통설상의 야마지 마사쿠니가 아니라 격이 낮은 총병 대장 도나미 하야토(戸波隼人)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스즈키 신야 단독의 문제 제기일 뿐이고 다수 자료는 여전히 통설을 채택하고 있다.12


3. 후비의 5년 — 규슈 정벌과 히고 배령 (1583~1588)

시즈가타케에서 이름을 알린 뒤 기요마사가 곧바로 대다이묘가 된 것은 아니다. 3,000석에서 히고 19만 5,000석으로 도약하기까지 5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 시기 동안에 그가 무슨 역할을 맡았고, 어떤 활약을 했길래 히고 영주로 임명이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자료는 없었다.

3-1. 고마키·나가쿠테, 시코쿠 정벌 — 조용한 조연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약 150명 규모의 소부대를 이끌고 종군해 철수전의 후미를 맡았다. 1585년 시코쿠 정벌에도 참전했다. 여러 자료가 공통적으로 이 시기 기요마사의 역할을 “히데요시 주변을 지키거나 후방을 지원하는 후비(後備)“로 서술한다. 또한 전투 부대의 지휘보다는 부대의 재무·행정 실무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그가 뒷날 검지·축성·치수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13 같은 시기 종5위하·가즈에노카미(主計頭)에 서임됐다.14

3-2. 규슈 정벌과 우토성 성번

1586–1587년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시마즈씨 토벌전)에도 종군했다. 진용 편성 기록에 따르면 이번에도 히데요시 본대의 후비였고, 별도로 히고국 우토성(宇土城)의 성번(성 수비 책임자)을 맡았다는 기록도 있다. 기록은 병력 규모를 150~170명 선으로 적는다.15 이 시기 기요마사에게 기대된 것은 화려한 돌격이 아니라 병참·행정·현지 사정 파악이었다. 그가 뒷날 히고 배령의 적임자로 꼽히는 배경도 이러한 임무를 잘 수행한 것에 있다고 봐야 한다.

3-3. 삿사 나리마사의 실정과 히고 고쿠닌잇키

규슈 정벌이 끝나자 히데요시는 논공행상으로 히고국(구마·아마쿠사 2군 제외)을 삿사 나리마사에게 통째로 맡겼다. 히고는 고쿠닌(国人)층의 자치 전통이 강해 다스리기 까다로운 곳이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고쿠닌의 기존 지행을 인정하고 3년간 검지를 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였다고 전한다.16

하지만 나리마사는 이 조건을 어기고 부임 직후부터 검지를 강행했고, 고쿠닌이었던 구마베 치카나가(隈部親永) 부자가 히데요시의 주인장(朱印状)을 근거로 검지를 거부하며 거병했다. 이것이 히고 고쿠닌잇키(肥後国人一揆)다. 나리마사는 원정 중 본거지 구마모토성이 3만 5,000명 규모로 불어난 잇키 세력에 포위당해 자력 진압에 실패했다. 결국 이 봉기는 고바야카와 타카카게·다치바나 무네시게·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규슈 주변 다이묘들의 원군이 투입된 끝에 그해 12월에야 겨우 진압됐다. 고쿠닌 52명 중 48명이 전사·처형됐다고 한다.17

이 진압전에 가토 기요마사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참전했다는 서술이 지역사 정리 자료 일부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사료를 직접 대조해 보면 기요마사는 한결 같이 진압이 된 이후의 국면에서만 등장을 하기 때문에 기요마사가 직접 참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봐야겠다.18

3-4. 나리마사의 할복과 검사 기요마사

잇키를 자력으로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히데요시는 1588년 2월 사죄하러 올라온 나리마사와의 면회 자체를 거부하고 셋쓰 아마가사키에 유폐했다. 그해 윤5월 14일, 나리마사는 할복을 명받아 사망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가 검사(検使)로 파견됐다. 할복을 감독하고 확인하는 공식 역할이었다.19

3-5. 히고 북반국 19만 5,000석의 영주로

나리마사 개역 직후 히고국은 남북으로 분할됐다. 북반국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구마군을 제외한 남반국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주어졌다. 기요마사는 옛 구마모토(隈本)성에 입성했다. 이때 나이 26세로, 3,000석에서 단숨에 대다이묘로 뛰어올랐다.

받은 석고는 자료에 따라 19만 5,000석과 25만 석 두 수치가 혼재해 왔다. 이번 리서치에서 사전 3종(『일본대백과전서』·『세계대백과사전』·『브리태니커 국제대백과전서』)을 대조하니 앞의 두 사전과 일본어 위키백과가 모두 19만 5,000석으로 일치했다. “25만 석” 계열 서술은 브리태니커 하나뿐이었다. 이 사전은 연도 자체를 1587년으로 다르게 기재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나리마사 처분과 히고 분할을 결정한 시점과 실제 입봉한 시점을 다르게 짚은 탓으로 보인다. 이 5년 사이 3,000석에서 곧바로 19만 5,000석으로 뛰어오르는 중간 가증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20


4. 히고의 첫 실적 — 치수와 통치 (1588~1592)

히고에 부임한 기요마사는 삿사 나리마사의 전례를 반면교사 삼아 고쿠닌을 회유하고 등용하며 온건하게 통치를 안정시켰다. 실제로 성과를 남긴 것은 치수 사업이었다. 시라카와(白川)·미도리카와(緑川)·기쿠치가와·구마가와 4대 하천을 대상으로 독창적인 관개 공사를 벌였다. 사선(斜め) 구조의 보를 쌓아 물길을 분산시킨 와타시카세키(渡鹿堰, 구마모토 평야 약 1,083정보를 관개), 암반을 뚫은 터널식 수로 하나구리이데(鼻ぐり井手, 1608년 축조), 거암을 그대로 활용한 세타세키(瀬田堰)가 그런 예다. 이 치수 사업 덕분에 구마모토번이 에도 시대 내내 안정적인 농업 기반을 유지했다는 것이 통설이다.21


5. 임진왜란 — 함경도로 (1592)

5-1. 2번대, 부산에서 함경도까지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기요마사는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을 거느린 2번대 지휘관으로 부산에 상륙했다.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와 합세해 한성까지 북상했다. 한성 점령 이후 두 사람은 황해도 금교역에서 갈라져 고니시는 평안도로,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격했다.22

5-2. 해정창 전투

함경북도병마절도사 한극함이 육진 병력과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영의 군사를 합쳐 약 1,000명으로 해정창에서 맞섰다. 초반에는 유리했다. 그러나 한극함의 성급한 지휘가 일본군의 유인 전술에 말려 패했고 짙은 안개를 이용한 기습에 재차 무너졌다. 이 패전으로 함경도 관군의 조직적 저항이 사실상 끝났다.23

5-3. 회령의 반란과 두 왕자

해정창 패전 닷새 뒤인 1592년 7월 23일, 회령의 토관 향리 국경인(鞠景仁)이 반란을 일으켰다. 근왕병을 모집하러 온 임해군·순화군 두 왕자와 호종 재신들을 결박해 가토 진영에 넘겼다. 조선왕조실록과 『농포집』 등 당대 기록은 이 사건을 단순한 일본군의 무력 정복으로 보지 않는다. 왕자들의 실정(약탈·민폐)으로 민심이 돌아섰고 국경인 등 순왜의 반란이 겹쳐 벌어진 일로 서술한다.24

일본 측에는 가토가 포로가 된 왕자를 정중히 대우했다는 일화가 널리 돈다. 이 일화의 원출처는 1차 사료 수준에서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뒤에 협상 카드로 쓰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가능성도 함께 지적된다.25 두 왕자는 부산에 억류돼 있다가 명나라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강화 교섭이 진행되는 가운데, 1593년 9월 조선 측에 인계됐다.26

5-4. 두만강을 넘다 — 여진족 원정과 북관대첩

기요마사는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 부락을 공격해 성 하나를 점거했으나 여진족의 반격과 보급 곤란으로 곧 물러났다. 이후 전 북평사 정문부가 함경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경성·장평·임명을 거쳐 1593년 1월 백탑교 전투까지 잇달아 이겼다. 이른바 북관대첩이다. 이 승전으로 반란 가담자들이 처단되고 기요마사군은 함경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27

이 승전을 기려 1709년, 함경북도 길주에 북관대첩비가 섰다. 이 비석은 러일전쟁 중 일본군에 반출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가 2006년 반환됐다. 정작 일본 측 가토 기요마사 서술에는 정문부도 북관대첩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조선 측 사료는 이 전투를 비석까지 세울 만큼 중요하게 취급하는데 일본 쪽 주류 서술은 이 패퇴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28


6. 갈라지는 두 사령관 — 고니시 유키나가와의 반목 (1592~1596)

6-1. 주진장 사건

가토 기요마사(니치렌종 신자)와 고니시 유키나가(가톨릭 세례명 아우구스티노)의 종교 차이는 두 사람의 불화를 설명하는 가장 널리 알려진 서사다. 그러나 정유재란기의 실제 갈등은 훨씬 구체적인 행정·군사 충돌에서 시작됐다.

1592년 9월, 기요마사는 히젠 나고야의 마와리슈 조두 기노시타 요시타카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자신이 담당한 함경도는 안정됐지만 고니시가 담당한 평안도는 치안이 불안하다는 지적이었다. 이후, 이시다 미쓰나리·구로다 요시타카 등이 주도한 군사 회의에서 자신이 배제된 것을 알고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오히려 고니시의 담당 구역인 평안도 공격을 자원했다. 조선 부교 마시타 나가모리·오타니 요시쓰구는 거꾸로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겪은 패배를 문제 삼았다. 결국 기요마사는 귀국·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 처분의 배경에 이시다 미쓰나리의 의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이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영향을 미친 균열의 시작이었다는 것이 최근 연구의 평가다.29

6-2. 반목의 뿌리 — 종교보다 실무

고니시는 사카이의 상인 집안 출신이다. 기요마사에게 “약방집 자식”이라는 멸시를 받았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두 사람의 영지가 히고에서 붙어 있어 수리권을 둘러싼 경계 분쟁이 이어진 것도 반목을 키웠다. 종교 차이는 실재했다. 다만 사료가 보여주는 갈등의 실제 표면은 담당 구역 실적을 둘러싼 상호 비방, 자신을 배제한 군사 회의에 대한 불만, 참소로 인한 처벌, 신분을 깔보는 모욕, 영지가 붙어 있어 생긴 이해 다툼이 겹친 결과였다. 종교적 대립은 이 다툼에 정서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편이 사료에 더 부합한다.30


7. 사명당과의 네 번의 회담 (1594~1597)

정유재란 강화 교섭기, 울산에 주둔하던 기요마사는 사명대사 유정과 최소 네 차례 회담했다(1594년 7월, 12월, 1597년 3월 등). 이 회담에서 기요마사가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라고 묻자, 사명당이 “당신의 머리가 조선의 보배”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종교인끼리 교리를 논한 자리라기보다 적의 정세를 파악하고 강화 조건을 떠보려는 실무 회담에 가까웠다.31


8. 정유재란과 울산성 (1597~1598)

8-1. 재침과 도산성 축성

1596년 명·일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1597년 재침을 명했다. 전라·충청도를 재공략한 뒤, 일본군은 경상도 남해안 일대에 왜성군을 쌓아 방어선을 치기로 했다. 기요마사가 직접 성터를 정해 축성을 계획한 울산(도산)은 그 최동단이었다. 목책과 해자 등 외곽 시설이 채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명·조선 연합군이 기습적으로 성을 에워쌌다.32

8-2. 제1차 울산성 전투 — 말의 피와 오줌

1597년 12월, 명나라 경리 양호가 이끄는 명군(약 4만~4만 4천)과 조선 도원수 권율의 조선군(약 1만 1,500명)이 울산왜성을 포위했다. 양호는 초기 강공이 실패하자 성 주변 우물을 메우고 태화강 물줄기를 봉쇄하는 고사(枯死) 작전으로 돌아섰다. 열흘 남짓 계속된 농성전에서 성내 병사들은 식량과 식수가 완전히 끊긴 채 말의 피와 오줌을 마시고 종이와 흙벽까지 삶아 먹었다. 종군승 게이넨의 일기 『조선일일기』 등 동시대 일본 측 1차 사료가 이 참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33

농성 14일째, 모리 요시나리·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이끄는 약 1만 3천 명의 원군이 도착하자 양호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이때 명나라 감찰관 정응태가 양호를 탄핵하며 조·명 연합군 사상자를 2만 명으로 부풀렸다. 그 수치가 명사(明史)에 남았는데 명군의 공식 집계(전사 798명, 부상 후 사망 823명, 부상 2,908명)와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탄핵하려고 부풀린 숫자를 일본 측 대중 서술이 사료 비판 없이 전과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34

8-3. 제2차 울산성 전투와 철수

같은 해 9월, 명 제독 마귀와 조선 별장 김응서가 이끄는 연합군이 다시 울산을 공격했다. 이번에는 완성된 성벽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연합군은 억류돼 있던 조선인 포로 1,100여 명을 구출했으나 성을 함락하지는 못했다.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 주둔군 전면 철수가 결정됐다. 기요마사는 그해 12월 울산에서 철군해 귀국했다.35


9. 미쓰나리의 몰락과 세키가하라 (1598~1600)

9-1. 오다이로 체제와 도시이에의 죽음

히데요시 사후 정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도시이에·모리 테루모토·우키타 히데이에 등 오다이로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 오부교의 합의체로 운영됐다.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유명을 어기고 다이묘들과 사사로이 혼인을 맺기 시작하면서 내부 갈등에 불이 붙었다. 게이초 4년(1599년) 윤3월, 오다이로 필두격인 마에다 도시이에가 병사하자 세력 균형이 급격히 무너졌다.36

9-2. “칠장습격사건”의 진실

도시이에 사망 직후, 기요마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를 압박한 무장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른바 “칠장습격사건”이다. 미쓰나리는 이 사건으로 실각해 사와야마로 은거했다.37

이 사건의 극적인 통설은 최근 20여 년간 학계에서 크게 재검토됐다. 역사학자 가사야 가즈히코는 2000년 논문에서 “미쓰나리가 후시미의 이에야스 저택으로 피신해 보호를 요청했다”는 통설이 동시대 사료에는 없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실제로는 후시미성 안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을 뿐이라고 했다. 이 일화는 1700년대 초 성립한 『이와부치야와(岩淵夜話)』에서 처음 등장해 이후 군기물을 타고 퍼졌다. “습격”이 아니라 “소송” 내지 “제재·할복 요구”에 가까웠다는 재해석도 나오고, 참가 인원이 7명이 아니라 10명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8

같은 맥락에서 “가토·후쿠시마 등 무단파 vs 이시다·고니시 등 문치파”라는 이분법도 도요토미 정권 당대 사료가 아니라 에도시대 군기물과 전후 역사학이 만든 후대의 분석틀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최근 연구는 파벌 구도를 5개 이상으로 세분화한다.39

9-3. 세키가하라 — 규슈에서 벌어진 옛 이웃과의 전쟁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9월) 국면에서 기요마사는 동군에 가담했다. 당시 히고에는 구마모토의 가토 기요마사, 우토의 고니시 유키나가, 히토요시의 사가라 요리후사 세 다이묘가 있었다. 고니시가 서군으로 세키가하라 본전에 출진한 사이, 기요마사는 동군 편에서 고니시의 우토성을 공격했다. 세키가하라 본전 결과가 전해지기 약 열흘 전부터 진공을 시작한 것을 보면, 이에야스에게 미리 진공 권한을 받아둔 상태였을 것이다. 우토성은 병력이 모자라는데도 분전했으나 서군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개성해 개전 약 한 달 만에 함락됐다.40

세키가하라에서 패해 도주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시가·기후 경계의 이부키산에서 촌장에게 붙잡혀 그해 10월 1일, 교토 로쿠조가와라에서 처형됐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참수 전 정토종 의식을 거부하고 예수·마리아 성화를 세 차례 머리 위로 받든 뒤 참수됐다고 한다.41

전후 논공행상으로, 기요마사는 고니시의 옛 영지를 흡수해 히고 일국의 태수가 됐다. 표고(表高, 막부가 공인한 명목상 석고) 기준으로 히고국 단독 약 52만 석에 분고국 쓰루사키 등 비지 약 2만 석을 더한 총 영지 표고는 54만 석이었다(두 수치는 시점 차이가 아니라 집계 범위의 차이다). 검지를 거쳐 다시 매긴 실고(実高, 실제 수확량에 근거한 석고. 표고와 짝을 이루는 개념)는 약 79만 석에 달했다.42


10. 히고 태수 — 축성과 신앙 (1600~1611)

10-1. 구마모토성, 1599년의 신성

1588년 히고에 입성한 기요마사는 처음에는 옛 구마모토(隈本)성을 그대로 정비해 썼다. 조선 출병에서 귀환한 뒤인 1599년(게이초 4년), 옛 성 뒤편 차우스야마 구릉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신성 축조에 착수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구마모토성이다. 구마모토시 문화재과가 서로 다른 시기에 독립적으로 작성한 공식 조사보고서 두 건이 동일하게 이 연도를 명시한다. 인터넷에 종종 등장하는 “1591년 개축설”은 성곽과 무관한 별개의 사건, 즉 나고야성(가라쓰) 축성 명령이나 구마모토 조카마치 조성에 관한 기록이 잘못 전이된 것으로 확인된다.43

1600년 세키가하라 승전으로 히고 전체를 영유하면서 혼마루 확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신성은 1607년(게이초 12년) 완공됐고 지명 표기도 “구마모토(隈本)“에서 “구마모토(熊本)“로 바뀌었다. 옛 성역은 약 98만 제곱미터, 둘레 약 5.3킬로미터, 천수 2기·야구라 49동을 갖췄다. 석축(石垣, 이시가키)은 아래는 완만하고 위로 갈수록 급경사가 되는 “무샤가에시(武者返し)” 구조가 특징이다. 1877년 세이난전쟁에서 사이고군의 등반을 실제로 막아내 실전 방어력이 입증됐다고 한다. 이 기법이 울산왜성 축성 경험에서 나왔다는 설이 대중 매체에 돈다. 그러나 한국 국가유산청 자료나 일본 학술 성곽사 자료 어디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44

구마모토성 무샤가에시 석축, 아래는 완만하고 위로 갈수록 급경사가 되는 부채꼴 곡선 구조
구마모토성의 무샤가에시(武者返し) 석축. 뒤로 천수가 보인다. Wikimedia Commons, CC BY-SA 3.0(사진: 663highland).

10-2. 니치렌종 신앙과 혼묘지

기요마사는 니치렌종의 열렬한 신자였다. 1585년, 어려서 여읜 아버지의 명복을 빌려고 오사카 나니와 인근에 사찰을 세웠는데, 이것이 훗날 혼묘지(本妙寺)의 기원이 됐다. 이 절은 그가 히고 영주가 된 후 구마모토성 안으로 옮겨졌다. 사후에는 나카오산 중턱으로 다시 옮겨져 오늘날 그의 묘소가 있는 사찰로 남았다.45

고니시 유키나가(가톨릭)와의 대립은 흔히 “법화종 대 가톨릭의 종교전쟁”으로 단순화된다. 그러나 향토사·저널리즘 자료는 종교가 갈등의 상징이었을지언정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고 본다. 실제로는 출신 신분, 군사 노선, 영지가 붙어 생긴 이해관계가 함께 얽혔다는 것이, 6장에서 살펴본 내용과 같은 결론이다.46

10-3. 조선인 소년과 닛초

임진왜란 당시, 기요마사의 부장이 경상도 하동 출신 소년 여대남(余大男)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데려왔다. 한시를 지어 바친 이 소년의 재능을 알아본 기요마사는 그를 곁에 두어 보살폈고, 여대남은 혼묘지에 맡겨져 승려가 되어 법명 “닛초(日遙)“를 받았다. 훗날 혼묘지 3대 주지로 취임했다. 포로로 잡혀온 소년이 정복자 쪽 교단의 주지가 된 것이다. 임진왜란은 이런 인적 교류도 남겼다.47


11. 니조성의 마지막 임무 (1611)

11-1. 회견을 성사시키다

1611년 3월,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교토 니조성으로 불러 회견을 요청했다. 히데요리에게는 12년 만의 첫 외출이었다. 회견 여부를 자문받은 기요마사는 “히데요리가 거부하면 겁 많은 주군으로 여겨져 도요토미가의 위신이 실추된다”고 주장해 회견을 성사시켰다. 만일의 사태에 히데요리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회견 당일에는 히데요리를 이에야스보다 낮은 자리에 앉혀 인사하도록 자리를 배치했다. 이에야스가 대등한 자리를 권하자 말없이 고개를 저어 격하를 관철시켰다.48

11-2. 죽음 — 사인을 둘러싼 논쟁

회견을 마치고 히데요리를 오사카성까지 호송한 뒤, 기요마사는 귀국길 배 안에서 발병했다. 히고로 돌아온 뒤, 병세가 악화되어 게이초 16년(1611년) 6월 24일, 구마모토성에서 사망했다. 태어난 날과 같은 날짜였다. 향년 50세다.

사인을 두고는 열병(뇌일혈)설·매독설·독살설(독만두설)·한센병설 등 여러 설이 경합한다. 가장 동시대에 가까운 사료(『기요마사기』 계열)는 회견 이후 장거리 이동의 피로가 겹쳐 급성으로 발병했고 실어 증상을 보이다 사망했다고 적는다. 반면 청대 문헌 계열의 후대 기록은 독살설을 전한다. 회견 자리에서 나온 만두에 바늘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었다고 한다. 이를 의심하면서도 먹은 기요마사가 2개월 뒤 사망했다는 이야기다. 이 설은 조루리·가부키를 타고 크게 퍼졌다. 근거로 드는 사료 자체는 사건 당대의 1차 사료가 아니라 후대의 일화집·문예물이다. 지금 일본 역사학계의 주류 평가는 열병(뇌일혈)설 쪽으로 기운다. 독살설이 이에야스에게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편리한 결말이라는 의심은 있으나 의학적 근거가 박약하고, 가장 이른 사료의 임상 묘사와 맞아떨어지는 쪽은 열병설이기 때문이다.49


12. 세이쇼코 — 신이 된 사내 (1611~현재)

기요마사는 사후 그가 귀의한 혼묘지를 중심으로 “세이쇼코(清正公)“라는 신앙의 대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이 신앙이 곧바로 퍼진 것은 아니다. 1786년 시라카와 범람, 1792년 재해 등 구마모토 번에 잇단 재난이 겹쳤다. 1818년, 기요마사 200주기 법요를 계기로 구마모토 번(호소카와 가문)이 이를 민심 수습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면서 전국 규모의 민간신앙으로 번졌다. 영험의 내용도 출세·상업 번창, 액막이, 한센병 치유, 콜레라 진정 등으로 다양해졌다.50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불분리 정책으로 신앙은 혼묘지(불교)와 가토 신사(신도)로 양분됐다. 세이난전쟁(1877) 이후에는 군인들이 후원에 나서면서 “무운장구의 군신”으로 모습을 바꿔 청일·러일 전쟁의 전승 기원 대상이 되기도 했다.51

오늘날 널리 알려진 “호랑이 사냥 명장” 이미지의 핵심 근거인 호랑이 사냥 일화는, 임진왜란 종전으로부터 약 140년이 지난 1739년에 성립한 일화집 『조잔키단(常山紀談)』에 처음 실린다. 처음에는 총으로 잡았다는 이야기였는데 이후 우키요에·소설 삽화를 거치며 창과 낫으로 격투 끝에 잡았다는 형태로 각색됐다. “충신·명장·수호신”이라는 이미지가 통째로 사후에 날조된 것은 아니다. 그 구체적 서사의 상당 부분은 번과 종교 교단이 사후 200년에 걸쳐 계속 다시 짜고 부풀린 것으로 보는 쪽이 사료상 더 설득력 있다.52

가토 기요마사가 창으로 호랑이를 찌르는 장면을 그린 목제 액자(에마) 그림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 우나코로와케 신사(宇奈己呂和気神社)에 걸린 대형 에마(絵馬)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퇴치」, 메이지 42년(1909) 봉납. 구마모토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도호쿠 지방까지 이 전승이 퍼졌음을 보여준다. 실제 사건이 아니라 종전 140년 뒤 문헌화된 전승을 그린 것이다. Wikimedia Commons, CC BY-SA 3.0(사진: Bachstelze).

13. 두 개의 얼굴 — 한국과 일본의 기억

13-1. 일본 — 충신에서 군신으로

일본에서 기요마사의 핵심 정체성은 도요토미가에 대한 은의를 지킨 충신, 구마모토의 개발군주, 사후 수호신이다. 죽음마저 회견을 성사시키려다 순직한 비극적 충신의 이야기로 소비된다. 일본에서는 독살설마저 그의 헌신을 극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쪽으로 읽는다.

13-2. 한국 — 가토가 잡아간다

한국에서 그의 이미지는 정반대다.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벌인 군사 행동 탓에 조선 민간에서 그를 보는 눈은 시종 나빴다. “말 안 듣는 아이는 가토가 잡아간다”는 으름장이 전승됐다는 언급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다만 이 표현의 최초 출처와 형성 시기를 명시한 학술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53

13-3. 왜곡과 속설 — 쾌지나 칭칭나네, 귀신 얼굴

경상도 민요 “쾌지나 칭칭나네”의 후렴구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에서 따온 말이라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돈다. 이 주장은 2005년 북한 주간지 『통일신보』가 처음 제기했다. 한국 전통음악 학계의 통설은 “칭칭나네”가 꽹과리·징 등 타악기 소리를 흉내 낸 여음이라고 본다. 가토 기요마사 유래설은 학술적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속설이다. 이런 주장이 북한에서 되풀이되는 데는 정치적 동원 의도가 있을 가능성도 지적된다.54

한국 대중문화(게임·소설)에서 기요마사는 종종 험상궂거나 귀신 같은 얼굴로 그려졌다. 이 콘텐츠를 접한 어린이들 사이에서 그가 실제로 귀신처럼 생겼다는 오인이 퍼진 사례도 있다. 실제로는 얼굴 생김새가 아니라 투구에 붙은 위협적인 면구(面具)를 본떠 그린 것이다.55

두 이미지는 정반대지만 공통점도 있다. 둘 다 사후 오랜 세월에 걸쳐 각자의 사회적 필요에 따라 재생산되고 부풀려졌다. 일본에서는 번의 민심 수습과 종교적 영험이, 한국에서는 침략을 경계하는 마음의 세대 간 전승이 그 필요였다.


14. 사료와 평가

14-1. 주요 사료·자료 신뢰도

자료성격비고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조선 조정의 동시대 공식 기록회령 반란, 왕자 포로, 울산성 전투
『농포집』(정문부)당대 문집북관대첩 관련 1차 기록
게이넨, 『조선일일기』정유재란 종군승의 일기울산 농성전 참상의 동시대 1차 사료
笠谷和比古(2000) 동료심사 논문학술지 게재 연구칠장습격사건 통설 재검토의 핵심 근거
야마다 다카시(2012) 연구구마모토현립미술관 학술 전시도록 수록세키가하라 이후 석고 수치의 핵심 전거
구마모토시 문화재과 공식 조사보고서(2018·2023)지자체 학술 조사보고서구마모토성 착공 연도의 핵심 전거
『기요마사기(清正記)』 계열후대 편찬 무장 전기죽음 정황의 가장 이른 서술이나 원문 직접 열람은 못함
청대 문헌 『십죽재필기(十竹斎筆記)』 계열후대 일화집독살설(독만두설)의 원출처, 1차 사료 아님
『조잔키단(常山紀談)』(1739)에도 중기 일화집호랑이 사냥 설화 최초 문헌화, 종전 후 약 140년 뒤

14-2. 이번 조사에서 바로잡은 통설

  1. 히고 최초 배령 석고는 25만 석이 아니라 19만 5,000석이다. 세키가하라 이후 표고 52만/54만 석은 시점 차이가 아니라 히고 단독분과 분고 비지를 합친 집계 범위의 차이다. 실고는 약 79만 석이다.
  2. 기요마사가 1587년 히고 고쿠닌잇키 진압전에 직접 참전했다는 서술은 근거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진압 이후 삿사 나리마사 할복의 검사(検使)로 등장한다.
  3. 구마모토성 착공은 1591년이 아니라 1599년이다. “1591년설”은 성곽과 무관한 다른 사건에서 잘못 옮겨온 서술이다.
  4. “칠본창”이라는 명칭, 무샤가에시의 “조선 기원설”, 독살설과 호랑이 사냥 설화는 모두 사건 당시가 아니라 사후 수십~수백 년 뒤 문예물·군담물을 타고 형성·확산된 서사다.
  5. “쾌지나 칭칭나네”의 가토 기요마사 유래설은 2005년 북한이 제기한 속설로, 한국 전통음악 학계에서 반박된 주장이다.

15. 한국어권에서 이 인물을 다룰 때 정리해둘 것

앞서 14-2에서 정리한 다섯 가지 통설 정정 외에 하나만 더 짚어둔다. 게임·창작물에서 굳어진 “귀신 얼굴” 이미지는 실제 용모가 아니라 투구 면구를 본뜬 모습이다.


16. 참고 문헌

1차 사료·공식 자료

온라인 공식기관·박물관

  • 熊本城 공식 홈페이지 (castle.kumamoto-guide.jp)
  • 熊本市 문화재과 조사보고서 (city.kumamoto.jp)
  • 国土交通省 九州地方整備局 (qsr.mlit.go.jp)
  • 農林水産省 (maff.go.jp)
  • 国立公文書館 (archives.go.jp)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우리역사넷 (contents.history.go.kr)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heritage.go.kr)
  • 宇土市立宇土市歴史資料館 (city.uto.lg.jp)

이 글은 사료 중심으로 정리한 필러 페이지다. 한국·일본·영어 사료를 교차 검증했으며, 나무위키는 어떤 서술의 근거로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류·수정 제안은 댓글로 환영한다.

Footnotes

  1. 일본어 위키백과, 「加藤清正」— 출생지·유명 야샤마루

  2. 코토방쿠(kotobank.jp), 「加藤清正」항목(『日本大百科全書』·『世界大百科事典』 통합) — 출생 사전적 확정

  3.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공식 홈페이지, 「常泉寺」

  4. Japanese Wiki Corpus, “Kiyomasa KATO”

  5. touken-world.jp, 「加藤清正の歴史」; 歴史街道(PHP研究所), 鈴木眞哉 기고

  6. 일본어 위키백과, 「加藤清正」(이설 병기)

  7. 鈴木眞哉, 歴史街道(PHP研究所), 「虎退治で有名な勇将・加藤清正は、実際のところ、どこまで強かったのか」

  8. touken-world.jp, 「加藤清正の歴史」

  9. 일본어 위키백과, 「加藤清正」; touken-world.jp

  10. 일본어 위키백과, 「加藤清正」·「賤ヶ岳の戦い」

  11. 일본어 위키백과, 「賤ヶ岳の戦い」; 草の実堂, 「賤ケ岳七本槍の武将は実は9人だった」

  12. 鈴木眞哉, 歴史街道(PHP研究所)

  13. サライ.jp, 「加藤清正の生涯」; touken-world.jp, 「加藤清正の武将年表」

  14. 위 자료 동일(서임 연도 1585/1586 자료 간 이설)

  15. sengokumap.net; 국づくり狂言プロジェクト, 「加藤清正公略年譜」

  16. 일본어 위키백과, 「佐々成政」·「肥後国人一揆」

  17. 일본어 위키백과, 「肥後国人一揆」; 熊本県の歴史(新版県史43, 山川出版社, 1999); 小和田哲男, 『戦争の日本史15 秀吉の天下統一戦争』(吉川弘文館, 2006)

  18. 일본어 위키백과, 「肥後国人一揆」wikitext 원문 대조; 戦国ヒストリー; bushoojapan.com; English Wikipedia, “Sassa Narimasa”

  19. 일본어 위키백과, 「佐々成政」

  20. 코토방쿠, 「加藤清正」(日本大百科全書·世界大百科事典·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비교); 일본어 위키백과, 「加藤清正」

  21. 国土交通省 九州地方整備局, 「加藤清正公の治水」; 農林水産省, 「肥後治水と利水事業を拓いた加藤清正」

  2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해군」;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정창전투」

  24. 국사편찬위원회, 『선조수정실록』 26권; 정문부, 『농포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해군」

  25. 戦国未満, 「加藤清正とは 王子と虎を捕える朝鮮出兵」

  26.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두 왕자가 붙잡히다」

  27.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정문부(鄭文孚)가 적병을 대파하다」

  28. 한국어 위키백과, 「북관대첩비」; 아사히넷(asahi-net.or.jp)

  29.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関ヶ原合戦で加藤清正と小西行長が激しく対立したのは、朝鮮出兵にも原因があった」

  30. 宇土市立宇土市歴史資料館, 「小西行長と加藤清正は本当に仲が悪かったの?」

  31. 경향신문(이기환), 「사명대사는 왜 “조선의 보배는 가토 기요마사의 목”이라 했을까」; 김문자(2005), 「임진왜란기 일·명 강화교섭의 파탄에 관한 一考察」

  32. 일본어 위키백과, 「蔚山城の戦い」

  33. 게이넨, 『朝鮮日々記』; 『浅野家文書』;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34. Kenneth M. Swope, A Dragon’s Head and a Serpent’s Tail(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009); 『明史』

  3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울산전투」; English Wikipedia, “Second siege of Ulsan”

  36. 일본어 위키백과, 「五大老」

  37. 일본어 위키백과, 「七将襲撃事件」

  38. 笠谷和比古, 「豊臣七将の石田三成襲撃事件」, 『日本研究』(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紀要), 2000

  39. 일본어 위키백과, 「文治派」(大島正隆·鈴木良一·朝尾直弘 학설사)

  40. 宇土市立宇土市歴史資料館, 「熊本の関ヶ原〜宇土城攻防戦〜」

  41. 일본어 위키백과, 「小西行長」

  42. 야마다 다카시, 「関ヶ原合戦前後における加藤清正の動向」, 『生誕四五〇年記念展 加藤清正』(熊本県立美術館, 2012, 戎光祥出版 재수록 2014)

  43. 熊本市 문화재과, 「특별사적 熊本城跡 보존관리계획서」(2018); 「특별사적 熊本城跡의 개요, 역사적 변천」(2023); 구마모토성 공식 관리 사이트

  44. 城びと, 「加藤清正はどんな城を造ったの?」;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울산왜성」

  45. 구마모토시 관광가이드, 「本妙寺」

  46. 宇土市立宇土市歴史資料館(위 31 동일)

  47. 한국어 위키백과, 「여대남」

  48. 国立公文書館, 「二条城会見|徳川家康」

  49.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加藤清正が亡くなった原因は毒饅頭か? 3つの説から考える」

  50. 일본어 위키백과, 「清正公信仰」

  51. 위 자료 동일

  52. 歴史ミステリー大辞典, 「加藤清正の最後 4つの死亡説」; 아틀라스뉴스(『常山紀談』 1739년 성립 관련)

  53. 피플워치,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 이유」

  54. SBS 뉴스, 「북, “쾌지나 칭칭나네는 왜장 격퇴서 유래”」(2005)

  55. 이번 리서치 정리 내용 — 게임·창작물 속 외양 왜곡 사례에 대한 별도 학술 출처는 확보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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