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우타가와 요시후지가 그린 이시야마 혼간지 전쟁 상상도 우키요에. 화염에 휩싸인 군선과 뒤엉킨 군세를 담고 있다

키즈가와구치 해전(木津川口の戦い, 1576·1578) — '철갑선'의 전설에 감춰진 이야기

Q: 키즈가와구치 해전(木津川口の戦い)은 무엇인가?

A: 오다 노부나가가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를 포위한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 1570~1580) 도중,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혼간지에 해상으로 병량을 보급하려 하면서 오사카만 키즈가와 하구에서 두 차례 벌어진 해전이다. 1차 해전(1576년, 덴쇼 4년)에서는 모리·무라카미(村上) 연합수군이 호로쿠다마(焙烙玉) 화공으로 오다 수군을 대파하고 병량 반입에 성공했다. 이 패배 이후 노부나가는 이세(伊勢)의 무장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에게 대형 안택선(安宅船, 일본 수군의 대표적 대형 군선) 건조를 명했다. 2년 뒤인 1578년 2차 해전에서 이 배들이 대포·대철포로 모리 수군을 격퇴했다. 대중적으로는 “노부나가가 철갑선(鉄甲船)을 만들어 무적의 모리 수군을 일방적으로 격파했다”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배들이 실제로 철판으로 뒤덮여 있었는지는 학계에서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정작 이 서사가 가리는 1차 해전의 참패는 널리 퍼진 이야기 속에서 짧게만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한눈에 보는 키즈가와구치 해전

항목내용
명칭키즈가와구치 해전(木津川口の戦い) — 1차(1576)·2차(1578)
배경 전쟁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 1570~1580) — 오다 노부나가 vs 이시야마 혼간지
장소오사카만(大阪湾) 키즈가와(木津川) 하구 — 두 해전 동일 해역
1차 해전1576년(덴쇼 4) 7월 13일(음) — 모리·무라카미 연합수군 대승, 오다 수군 참패
2차 해전1578년(덴쇼 6) 11월 6일(음)/양력 12월 4일 — 오다 수군(구키 요시타카) 승리
1차 오다측 전력약 300척(안택선 10척 포함), 지휘 계통은 사료 간 편차 있음
1차 모리측 전력600~900척(사료·집계 방식별 편차)
2차 오다측 전력『신초코키(信長公記)』 기준 큰 배 6척(구키 요시타카)
2차 모리측 전력『신초코키』 기준 “서국 배 600여 척”
통설 vs 재검증”전신 철갑선이 무적이었다”는 통설이 널리 퍼져 있으나, “철”을 언급한 사료는 전문(伝聞) 기록 1건뿐이며 학계는 무장갑설·부분장갑설 등으로 갈려 있다
이후 영향해상 보급 약화에는 기여했으나 혼간지의 항복(1580)은 여러 사건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결과

1. 배경 — 이시야마 혼간지 포위전과 모리 수군의 참전

1-1. 노부나가의 이중 봉쇄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은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주지 켄뇨, 顕如) 사이에 1570년부터 1580년까지 약 10년간 벌어진 전쟁이다. 1576년(덴쇼 4년) 시점 노부나가는 혼간지를 육상에서 고립시키려고 아마가사키(尼崎)·스이타(吹田)·하나쿠마(花隈) 등 여러 곳에 즈케지로(付城, 포위용 성채)를 쌓았다. 동시에 오사카만에는 오다 수군을 전개해 바닷길도 막았다.1 같은 해 5월에는 텐노지 합전(天王寺合戦)도 벌어져 노부나가 측 지휘관 하라다 나오마사(原田直政)가 전사했다. 노부나가는 이후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를 텐노지에 주둔시켜 압박을 이어갔다.1 육상만 막아서는 혼간지 안의 병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오다 측은 키즈가와(木津川) 하구의 해상 보급로까지 틀어막아야 했는데, 이것이 오다의 수군이 키즈가와구치에 배치된 이유다.

1-2. 모리 데루모토의 해상 보급 결정

봉쇄가 육상과 바다 양쪽에서 조여오면서 혼간지는 병량이 모자랐다. 혼간지 측은 모리 데루모토에게 바닷길로 물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데루모토가 이에 응하면서 모리 수군이 처음으로 이 전쟁에 실전 개입했다. 덴쇼 4년(1576년) 7월 15일, 모리 측은 무기·탄약·병량을 실은 보급선단과 이를 호위하는 호위선(警固船)단을 이시야마 혼간지 방면으로 파견했다. 전체 규모는 사료와 집계 방식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대략 수백 척 단위였다는 데에는 여러 출처가 일치한다.2 당시 모리가(毛利家)는 아직 오다와 공식적으로 적대하지 않은 상태였고, 오다와 대립하는 잇코잇키(一向一揆)와 혼간지 진영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주는 형태로만 돕고 있었다. 그러나 모리는 이 개입을 계기로 오다와 맞서게 된다.

2. 1차 키즈가와구치 해전(1576) — 호로쿠다마와 오다 수군의 참패

2-1. 날짜·장소와 오다 측 지휘 계통을 둘러싼 사료 간 불일치

1차 키즈가와구치 해전은 덴쇼 4년(1576년) 7월 13일(음력, 양력 환산 약 8월 7–9일) 오사카만 키즈가와 하구에서 벌어졌다. 오다 수군은 안택선 10척을 포함해 약 300척 규모였다.3 그런데 이 전투를 누가 지휘했는지는 사료마다 서술이 엇갈린다. 일본어 위키백과는 1차 사료인 『신초코키』와 「무라카미 모토요시 외 14명 연서 주진장(村上元吉外十四名連署注進状)」을 각주로 달고 있다. 여기서 사쿠마 노부모리는 배경 인물로만 나오고 해상 실전 지휘관으로는 마나베 사다토모(真鍋貞友)·누마 덴나이(沼間伝内) 등 선장급 7–8명을 나열한다.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라는 이름은 아예 없다. 반면 다수의 대중 역사 사이트와 영어판 위키백과는 구키 요시타카를 오다 측 총대장으로 명기한다.4 그러나 『신초코키』 권9에 이름이 나오는 오다 측 출전자 8명 가운데 구키는 없고, 구키 가문의 내력을 담은 『한칸후(藩翰譜)』에도 1576년 해전은 나오지 않는다. 구키가 1차 해전에 나갔다는 동시대 기록은 없다.

모리·무라카미 수군 측 지휘관으로는 노미 무네카츠(乃美宗勝)·무라카미 모토요시(村上元吉)·무라카미 카게히로(村上景広)·코다마 나리히데(児玉就英)·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 등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함대 규모에 대해서는 “약 700~800척”이라는 기록과 “보급선 600척+호위선 300척=약 900척”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보급선을 포함하느냐 마느냐와 같이 집계 기준에 따른 차이인 것으로 추정된다.5

2-2. 호로쿠다마 화공과 오다 수군의 참패

모리·무라카미 연합수군이 승리를 결정지은 무기는 호로쿠다마(焙烙玉, 焙烙火矢로도 표기)였다. 도기 접시 두 장 사이에 화약을 채우고 끈으로 묶은 무기로, 병사가 투척한다는 점에서 수류탄과 비슷하다. 심지에 불을 붙여 적선에 던지는 소이·폭발 병기로, 활로 쏘는 화살(火矢)보다 던지는 속도가 빠르고 던지는 쪽의 빈틈도 적었다.6 이 화공에 오다 측 안택선을 비롯한 대형선이 잇달아 불타 무너졌다. 『신초코키』 권9에는 출전자 8명 가운데 마나베 사다토모 등 7명의 이름을 들고 “이 밖에 이름 있는 이들 여럿이 전사했다”고 나와 있다.7 반면 모리·무라카미 측 손실은 “거의 없었다”고 하니, 오다 측의 일방적인 패배였다고 볼 수 있다.

2-3. 병량 반입 성공과 “가려진 완패”

모리·무라카미 연합수군은 오다 수군의 봉쇄선을 돌파해 예정대로 병량과 무기탄약을 이시야마 혼간지에 반입했다. 이로 인해 육상과 바다를 함께 막아 말려 죽인다는 노부나가의 고사(枯死) 전략에 차질이 빚어지게 된다. 덕분에 혼간지는 이후로도 수년간 항전을 지속할 물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8 이 완패가 대중 콘텐츠에서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학술 비평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정황을 보면, 2차 해전(1578년, 철갑선의 설욕)을 다루는 콘텐츠가 1차 해전을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극히 짧게만 처리하고 넘어간다. “축소”라기보다 1차 해전을 후속 승리 서사 아래 끼워 넣는 서술 방식에 가깝다. 어느 쪽이든 오다 수군이 여기서 참패했다는 사실은 대중의 기억에서 밀려나 있다.

3. 오다 노부나가는 “철갑선(鉄甲船)“을 건조하라고 지시했을까

3-1. 건조 지시와 규모 — 구키 6척, 다키가와 1척

1차 해전 참패 이후 노부나가는 이세시마(伊勢志摩)의 해적 출신 무장 구키 요시타카에게 대형 안택선 건조를 명했다. 노부나가의 정사(正史) 『신초코키』는 이 지시를 짧게 적어두었다.

勢州之九鬼右馬允に被仰付、大船六艘作立、並瀧川左近大船一艘、是ハ白舟に拵

이세슈(伊勢州)의 구키 우마노조(九鬼右馬允, 요시타카)에게 명하여 대선(大船) 6척을 지어 세우게 하고, 아울러 다키가와 사콘(滝川左近, 카즈마스)에게 대선 1척을 짓게 하니, 이는 흰 배로 마련하였다.9

이렇게 구키 요시타카가 6척, 다키가와 카즈마스가 1척을 짓도록 명령했다는 것인데, 배의 크기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제법 차이가 난다. 나라(奈良) 고후쿠지 다몬인(多聞院)의 승려 에이슌(英俊)이 남긴 『다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는 “12–13간×7간”(약 21.8–23.6m×12.7m)으로 나와 있고, 손케이카쿠분코(尊経閣文庫) 소장 『신초코키』 사본에는 “18간×6간”(약 32.4m×10.8m)으로 되어 있다.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은 후자가 타당하다는 견해를 소개한다. 『다몬인 일기』 쪽은 뒤에서 보듯 에이슌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10

구키 요시타카의 대형 안택선 함대를 그린 근대 회화
중앙의 대형 안택선을 중심으로 그린 구키 함대 진형도(오사카성 천수각 소장, 퍼블릭 도메인).

3-2. “철(鉄)“을 언급한 사료는 단 한 건 — 그리고 그마저 전문(伝聞)이다

이 배들이 “철로 되어 있다”는 취지의 기록을 남긴 사료는 사실상 『다몬인 일기』 한 건뿐이다. 배가 사카이에 닿은 지 사흘 뒤인 덴쇼 6년(1578년) 7월 20일에 에이슌이 남긴 구절이다.

堺浦へ近日伊勢ヨリ大船調付了、人數五千程ノル、横へ七間、竪へ十二三間も在之、鐵ノ船也、テツハウトヲラヌ用意、事々敷儀也、大坂へ取ヨリ、通路トムヘキ用ト云々

요즘 이세에서 사카이 포구로 큰 배가 갖추어 왔다. 5천 명쯤 탄다. 가로 7간, 세로 12~13간이다. 철로 된 배이다. 철포(조총)가 뚫지 못하도록 대비한 것이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오사카로 다가가 길을 막으려는 용도라고 한다.11

그런데 이 기록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에이슌은 나라에 있었고 사카이(堺) 현장에 있지 않았다. 문장 끝의 “~라고 한다”가 보여 주듯, 에이슌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옮겨 적었다. 정작 노부나가의 종군 기록자였던 오타 규이치(太田牛一, 『신초코키』 저자) 본인은 장갑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사카이에서 이 배들을 직접 본 예수회 선교사 오르간티노(Organtino)도 마찬가지다. 서한에 대포와 총기에 대해서는 상세히 적으면서도 함선의 철 장갑에 대해서는 한 줄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12 “철갑선(鉄甲船)“이라는 명칭 자체도 당대 사료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으며, 확인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다몬인 일기의 “鐵ノ船也”(철로 된 배다)라는 구절뿐이다. 이것이 언제부터 “철갑선”으로 굳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13

3-3. 무장갑설·부분장갑설·이국식대선설 — 학계의 미해결 논쟁

현대 사료비판에서는 다몬인 일기의 “철로 된 배” 표현을 두고 해석이 세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무장갑설이다. 철판은 없었고 검게 칠한 목조 대선이었을 뿐이며 “철로 된 배”라는 기록 자체가 풍문의 오인이라고 본다. 부분장갑설은 총탄이 몰리는 자리에만 얇은 철판을 덧댔다고 본다. 세 번째는 남만(포르투갈) 선박을 흉내 낸 겉모습이 철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이국식대선설이다.14 조선공학 학회에 발표된 논문 「노부나가 철갑선의 복원성과 파랑 중 횡요 특성(信長の鉄甲船の復原性と波浪中横揺れ特性)」(가타야마 도루 외)은 선체 전체를 철판으로 감쌌다는 전제로 복원성(안정성)을 수치 해석했다. 무게중심이 과도하게 높아져 파랑 중 전복 위험이 커진다는 공학적 문제를 제기한다. 전신 장갑설을 의심하는 학자들은 이 계산을 근거로 제시한다.15 와타나베 다이몬은 전면이 철 장갑은 아니었더라도 일부에 장갑으로 썼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그의 결론은 “현시점에서 결정적인 설은 없다”는 유보다.16

4. 양측 전력과 함대 편성

4-1. 단노와 앞바다를 지나 사카이로

구키 요시타카의 흑선 6척과 다키가와 카즈마스의 백선 1척, 총 7척은 덴쇼 6년(1578년) 6월 26일 구마노 바다로 나가 기이 반도를 돌아 오사카로 향했다. 기이 북서쪽 단노와(淡輪) 앞바다에서 사이카(雑賀)의 무리와 단노와 포구의 작은 배들이 몰려와 사방에서 활과 철포를 쏘았다. 『신초코키』에는 이때의 싸움이 이렇게 나와 있다.

九鬼右馬允、七艘之大船に小船を相添、山の如く飾立、敵舟を間近く寄付、あいしらふ様に持なし、大鉄炮一度に放懸、敵舟餘多打崩候之間、其後ハ中々寄付不及行ニ

구키 우마노조가 큰 배 7척에 작은 배를 곁들여 산처럼 꾸미고, 적선을 가까이 끌어들여 상대하는 척하다가 대철포를 한꺼번에 쏘아 적선 여럿을 깨뜨리니, 그 뒤로는 (적이)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다.

일곱 척은 7월 17일 사카이(堺)에 닿았고, 다음 날부터 오사카 앞바다 곳곳에 배를 세워 바닷길을 막았다. 9월 30일에는 노부나가가 직접 사카이에 와서 깃발과 장막으로 꾸민 구키의 배를 둘러보고 상을 내렸다. 11월 6일에는 2차 키즈가와구치 해전에 나섰다.17

4-2. 대포와 대형 화승총, 확실한 화력 우위

장갑이 철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중이지만, 이 함대에 대포와 대형 화승총을 여러 정 실었다는 것은 사료가 든든하게 뒷받침해준다. 사카이에서 이 배들을 직접 본 예수회 선교사 오르간티노가 본국에 보낸 서한에 이렇게 적었다. 아래 번역은 1928년에 나온 일본어 번역본을 옮긴 것이다.

배에는 대포 세 문이 실려 있었는데, 어디서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분고(豊後)의 왕[오토모 소린]이 주조하게 한 몇 문의 소포(小砲)를 제외하면, 일본국 안에 다른 대포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직접 가서 이 대포와 그 장치를 보았으며, 또한 무수히 정교하고 큰 장총을 갖추고 있었다.18

당대 일본에서 배에 대포를 싣는 일은 그만큼 드물었다. 다만 포의 종류가 수입 불랑기포(佛狼機砲, 포르투갈식 후장포) 계열인지 일본산 화포인지는 이 서한만으로 특정할 수 없다.18

4-3. 모리·무라카미 수군의 규모

『신초코키』에는 모리 측 전력이 “서국 배 600여 척(西國舟六百余艘)“으로 나와 있다. 구키 가문의 기록 『구키 고덴키(九鬼御伝記)』에는 요시타카가 “적선은 적어도 500척은 될 것이나, 우리 배는 겨우 6척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말은 『신초코키』에는 없고, 『구키 고덴키』 원본도 확인하지 못했다.19 다만 2차 해전 당일 모리 측을 구체적으로 누가 지휘했는지는 자료가 빈약하다. 위키백과는 총대장으로 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武吉)를 언급하지만, 정작 위키백과 원문 그 서술 자리에는 “[요출전]“(출전 필요) 표시가 붙어 있다 — 위키백과 스스로도 근거를 대지 못하는 서술이라는 뜻이다. 무라카미 모토요시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2차 해전을 지휘했다는 서술도 찾지 못했다. 오히려 무라카미 모토요시는 1차 해전(1576년)의 지휘관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1차와 2차의 지휘관을 섞어 쓴 경우로 보인다.20

에도시대에 그려진 이시야마 합전 당시 양측 진영 배치도
이시야마 합전 당시 양측 진영 배치를 그린 에도시대 배진도(오사카성 천수각 소장, 퍼블릭 도메인).

5. 2차 키즈가와구치 해전(1578) 경과

5-1. 시간대별 전개

덴쇼 6년(1578년) 11월 6일(양력 12월 4일), 2차 해전은 1차 해전과 같은 해역에서 벌어졌다. 진시(辰刻)부터 오시(午刻)까지, 오전부터 정오 무렵까지 이어졌다. 구키 요시타카가 배를 몰고 나가자 무라카미·모리 연합수군이 구키 함대를 에워쌌다. 초반은 모리 측이 우세해 보였다. 그런데 구키는 대철포를 많이 실은 큰 배 6척으로 적선을 가까이 끌어들인 뒤, 대장의 배로 보이는 것을 대철포로 깨뜨렸다. 이에 겁을 먹은 모리 측 배들은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고, 구키는 수백 척을 키즈우라(木津浦)로 몰아붙였다.21 『신초코키』 원문은 이렇다.

九鬼右馬允乘向候へハ取籠、十一月六日辰刻南へ向て午刻迄海上にて舟軍有、初ハ九鬼支合候事難成見え候、六艘之大船に大鐵炮餘多在之、敵船を間近く寄付、大將軍の舟と覺しきを大鐵炮を以て打崩候へハ、是に恐れて中々不寄付、數百艘を木津浦へ追上、見物之者共九鬼右馬允手柄成と感せぬハなかりけり

구키 우마노조가 맞서 나가자 (적이) 에워쌌다. 11월 6일 진시에 남쪽을 향해 오시까지 바다에서 배싸움이 있었다. 처음에는 구키가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큰 배 6척에 대철포가 많이 실려 있어, 적선을 가까이 끌어들여 대장의 배로 보이는 것을 대철포로 깨뜨리자 (적은) 이를 두려워해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다. 수백 척을 키즈우라로 몰아붙이니, 구경하던 사람들 가운데 구키 우마노조의 공이라고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22

4-1에서 본 단노와 앞바다 싸움과 달리, 이날 승부를 가른 것은 적의 대장선을 깨뜨린 일이었다. 『신초코키』에는 이날 싸운 배가 6척으로만 나와 있고, 다키가와의 흰 배는 나오지 않는다.

1차 해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호로쿠다마를 활용한 화공을 모리 측이 2차에서도 다시 썼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모리 수군이 1차와 같은 전술을 재시도했다가 화력에 밀려 실패했다는 서술은 여러 대중 문헌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정황 추정일 뿐 이를 확인할 수 있는 1차 사료는 없다.23

5-2. 실제 전과 — “100척 이상 격침”은 근거 불명

『구키 고덴키』에는 “적선 24척을 사로잡았다”고 나와 있다. 600여 척이라는 함대 규모에 견주면 적은 수다. 반면 일부 후대 대중 서술은 “100척 이상 격침”이라는 훨씬 부풀린 수치를 내놓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1차 사료는 없다.24 이처럼 2차 전투에서 오다 측의 전과는 기록마다 편차가 크다. 오다 측의 손실을 “0척”이라고 적는 자료도 있으나 이는 오다 측 시점 기록에만 의존한 숫자라 모리 측 기록과 교차검증되지는 않았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는 모리 수군이 괴멸적으로 섬멸당한 것은 아니고, 오다의 화력에 밀려 주력 함대가 접근을 포기하고 키즈우라 쪽으로 밀려난 전투로 보는 것이 사료에 더 부합하는 해석이다.

6. 오다 측의 2차 전투 승리 요인은 무엇인가

6-1. “철갑이 화공을 막았다”는 설명은 사료로 검증되지 않는다

통설은 이렇게 설명한다. 1차 해전에서 위력을 떨친 호로쿠다마가 오다 함대의 철 장갑에 막혀 무력해졌고, 선체 크기 차이로 배에 올라붙는 백병전도 불가능해 일방적으로 포격당했다는 것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승패를 가른 것은 기술이 앞섰다는 사실 하나, 곧 철갑과 대포다. 그러나 앞서 3장에서 살펴본 대로 전신 철갑 자체가 사료로는 불확실하다. 철판이 호로쿠다마를 막았다는 설명은 전제부터 검증되지 않았다. 와타나베 다이몬 등은 대선의 주된 목적이 위협과 과시, 그리고 병량 수송로를 막는 것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25

6-2. 수적 열세를 뒤집은 것은 사거리와 화력이었을 가능성

500~600척이나 되는 무라카미·모리 측이 패주한 것은 숫자보다 화력과 사거리가 결정적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소형 고속선이 다수 몰려들었다가 화포 사거리 안에서 하나씩 깨지는 전술적 실책을 범했다고도 볼 수 있다. 통설처럼 철갑이라는 방어무기 덕분에 이긴 것이 아니라 대포·대철포라는 공격무기가 승리의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4장에서 본 오르간티노의 목격담과도 맞는다. 배에 대포를 싣는 것 자체가 당시로선 극히 드문 일이었다.

6-3. 모리 측은 완전히 물러났는가

찾아본 자료 범위에서는 2차 해전 이후에도 모리 측이 키즈우라(木津浦)에 상륙해 혼간지 측 승병 지휘관 시모츠마 요리렌(下間頼廉)과 협의한 뒤 지구전 태세를 갖췄다는 서술이 나온다. 혼간지 측은 병량 반입을 두고 모리 측에 감사장을 보냈다고도 전한다.26 통설은 2차 해전으로 모리 수군이 완전히 궤멸·철수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들과는 맞지 않는다. 모리 측은 대해전에서는 물러났지만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부분은 원사료 직접 대조가 더 필요한 지점으로 남겨둔다.

7. 해전 이후 이시야마 혼간지가 항복하기까지

7-1. “완전 봉쇄”는 아니었다

2차 해전 이후 오다 측은 오사카만 봉쇄를 강화했다. 그렇다고 완전한 해상 봉쇄에 성공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앞서 살펴본 대로 모리 측이 키즈우라 거점을 유지했다는 정황이 있다. 구키 요시타카 본인도 병량이 모자라 사카이에서 따로 보급을 받았다고 한다.26 이 승리로 해상 보급 여건이 나빠진 것은 분명하지만, 완전하게 끊겼다는 것은 과장된 이야기다.

7-2. 육상 전선의 결정타

1578년 10월 셋츠(摂津)의 요충 아리오카성(有岡城)을 지키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가 오다에 반기를 들었다. 2차 해전(11월)과 시기가 거의 겹친다. 혼간지 고립을 실제로 가속한 것은 오히려 이런 육상의 사건들이었다. 1579년 11월 아리오카성이 떨어지면서 혼간지 뒤를 받쳐주던 방패가 없어졌다. 1580년 1월에는 하리마(播磨)의 모리 측 지원 거점이던 미키성(三木城)마저 함락돼 모리 가문의 지원 여력도 끊겼다. 여기에 1579년 모리 데루모토 본인이 상경(원군 파견)을 단념하면서 혼간지는 사실상 고립됐다.27

7-3. 조정의 강화 중재와 항복

1580년 3월 1일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이 칙사를 파견해 강화를 중재했다. 3월 17일 노부나가가 혼간지에 대한 총사면(惣赦免) 서약 혈판 기청문을 작성했다. 윤3월 5일 켄뇨가 이를 수락하며 전투가 정지됐다. 4월 9일 켄뇨는 적자 쿄뇨(教如)에게 혼간지를 넘기고 기이(紀伊) 사기노모리별원(鷺森別院)으로 퇴거했다.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던 쿄뇨도 8월 2일 마침내 혼간지를 넘기고 물러났다. 직후 원인 불명의 화재로 혼간지 건물이 사흘 밤낮 불타 소실됐다.28

해전 승리(1578.11)에서 항복(1580.8)까지는 약 1년 9개월의 시차가 있다. 그 사이에 아라키 무라시게의 반란과 진압, 미키성 함락, 조정의 칙명 강화가 차례대로 일어났다. 해전에서 이겼으니 곧바로 항복했다는 식의 설명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무시해버리는 셈이다.

7-4. 켄뇨-쿄뇨 부자 대립과 동서 혼간지 분열

강화 수리 직후 쿄뇨는 이를 번복하고 항전을 계속하자며 사이카슈(雑賀衆)에게 서한을 보냈다. 부자가 서로를 비난하는 국면이 이어졌고, 한때 쿄뇨는 의절 처분까지 받았다. 이 부자 대립이 훗날 1602년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가 갈라져 나오는 원인이 됐다. 오늘날 교토에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가 나란히 있는 것도 바로 이 분열의 결과다.29

출처

1차 사료·공식 사서

  • 『신초코키(信長公記)』(오타 규이치(太田牛一) 저) 권9·권11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활자본(781193)의 쪽 이미지로 확인
  • 『다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이슌(英俊), 나라 고후쿠지 다몬인) 덴쇼 6년 7월 20일 — “鐵ノ船也” 기록의 유일한 동시대 출전(전문 기록), 산쿄쇼인판(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207471)으로 확인
  • 「무라카미 모토요시 외 14명 연서 주진장(村上元吉外十四名連署注進状)」 — 1차 해전 관련 모리(무라카미) 측 1차 사료
  •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서한(예수회, 1578년 사카이 현장 목격담) — 『야소카이시 니혼츠신(耶蘇會士日本通信)』 하(1928) 434쪽의 일본어 번역으로 확인
  • 『한칸후(藩翰譜)』(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702) 구키 항목
  • 『구키 고덴키(九鬼御伝記)』(구키 가문 기록) — 『도바 시사(鳥羽市史)』 상권(1991) 313쪽 경유 재인용

학술 연구·전문가 기고

  • 후지모토 마사유키(藤本正行), 『노부나가의 전쟁: 「신초코키」로 본 전국 군사학(信長の戦争 「信長公記」に見る戦国軍事学)』(고단샤 학술문고)
  •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오다 노부나가가 오사카 혼간지와의 싸움에서 쓴 철갑선은 정말 철 장갑으로 덮여 있었을까(織田信長が大坂本願寺との戦いで用いた鉄甲船は、本当に鉄の装甲で覆われていたのか)」外, Yahoo!ニュース 개인 전문가 칼럼
  • 가타야마 도루(片山徹) 외, 「노부나가 철갑선의 복원성과 파랑 중 횡요 특성(信長の鉄甲船の復原性と波浪中横揺れ特性)」, 일본선박해양공학회 학술강연회 예고집(日本船舶海洋工学会 学術講演会予稿集) 32권 (J-STAGE)

표준 참고서지

  • 「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제2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二次木津川口の戦い)」・「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철갑선(鉄甲船)」・「안택선(安宅船)」・「쿄뇨(教如)」, 일본어 위키백과
  • 「Battles of Kizugawaguchi」・「Siege of Ishiyama Hongan-ji」, English Wikipedia

대중 역사 콘텐츠 (교차확인·보조 인용, 신뢰도 C~D)

  • 「키즈가와구치 전투 옛 전장(木津川口の戦い古戦場)」, ホームメイト(刀剣ワールド)
  • 「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 무라카미 수군의 호로쿠비야에 대패(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村上水軍の焙烙火矢に大敗)」外, BUSHOO!JAPAN
  • 「구키 요시타카: 구키 수군을 이끈 오다 가문·도요토미 가문의 수군 대장(九鬼嘉隆~九鬼水軍を率いた織田家・豊臣家の水軍大将)」, senjp.com
  • 「해전의 혁명을 일으킨 오다 노부나가(海戦の革命を起こした織田信長)」, 戦国武将研究会
  • 「키즈가와구치 전투: 철갑선이 제해권을 바꾼 해전(木津川口の戦い|鉄甲船が制海権を変えた海戦)」, 戦国ジャーナル
  • 「철갑선 전설(鉄甲船伝説)」外, 戦国日本の津々浦々(개인 사료 검토 사이트)
  • 「키즈가와구치 전투: 육상에서 봉쇄된 이시야마 고보로 물자를 들이는 일을 둘러싼 오다 수군과 모리 수군의 해전(【木津川口の戦い】陸上封鎖された石山御坊への物資搬入をめぐる織田水軍と毛利水軍の海戦)」, 日本史あれこれ

확인하지 못한 것

  • 『구키 고덴키(九鬼御伝記)』 원본과 오가와 유(小川雄) 2020의 원서
  • 『호안 신초키(甫庵信長記)』・『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가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 등 에도 시대 기록이 이 해전·철갑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서술했는지의 원문
  • “철갑선” 통설이 근대 이후 어느 문헌에서 처음 형성됐는지의 구체적 계보

Footnotes

  1.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 일본어 위키백과, https://ja.wikipedia.org/wiki/石山合戦 ↩ ↩2

  2. 「키즈가와구치 전투 옛 전장(木津川口の戦い古戦場)」, ホームメイト(刀剣ワールド), https://www.touken-world.jp/dtl/kidugawaguchi/ ; 「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일본어 위키백과 ↩

  3. 「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일본어 위키백과, https://ja.wikipedia.org/wiki/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

  4. 위와 동일 문서(오다 측 지휘관 명단) ; 「구키 요시타카: 구키 수군을 이끈 오다 가문·도요토미 가문의 수군 대장(九鬼嘉隆~九鬼水軍を率いた織田家・豊臣家の水軍大将)」, senjp.com, https://senjp.com/kuki/ ; 「Battles of Kizugawaguchi」, English Wikipedia — 이 항목이 구키를 1차 해전 총대장으로 명기하며 다는 각주는 Stephen Turnbull, The Samurai Sourcebook (2000), p.228 한 건뿐이며, 『신초코키(信長公記)』 등 일본어 1차 사료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는다 ; 『신초코키(信長公記)』 권9 “打向人數、まなべ七五三兵衛・沼野傳內・沼野伊賀・沼野大隅守・宮崎鎌太夫・宮崎鹿目介・尼崎小畑・花くまの野口、是らも三百余艘乘出し、木津川口を相防候”(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3, 15쪽 쪽 이미지) ; 『한칸후(藩翰譜)』 구키 항목(f108.p003)은 덴쇼 2년 나가시마 다음에 덴쇼 6년으로 넘어간다 ↩

  5. 戦国武将研究会, 「해전의 혁명을 일으킨 오다 노부나가(海戦の革命を起こした織田信長)」, https://sengokuken.tokyo/kizugawa/ ↩

  6. 「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 무라카미 수군의 호로쿠비야에 대패: 신초코키 제138화(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村上水軍の焙烙火矢に大敗|信長公記第138話)」, BUSHOO!JAPAN, https://bushoojapan.com/bushoo/mouri/2020/05/14/147722 ↩

  7. 『신초코키(信長公記)』 권9 “七三兵衛・伊賀・傳內・野口・小畑・鎌太夫・鹿目介、此外歴々數輩討死候”(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3, 15쪽). 같은 곳에 모리 측은 “大船八百艘計”, 오다 측은 “三百余艘”로 나와 있다. 원문은 출전자 8명 가운데 7명의 이름을 들고, 그 밖의 전사자는 이름 없이 덧붙인다 ; 「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일본어 위키백과 ; BUSHOO!JAPAN, 위 기사 ↩

  8. 「키즈가와구치 전투 옛 전장(木津川口の戦い古戦場)」, ホームメイト ; 「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일본어 위키백과 ↩

  9.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1 덴쇼 6년(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3, 25쪽 쪽 이미지) ↩

  10.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기린이 온다 칼럼] 오다 노부나가가 오사카 혼간지 공격에 쓴 구키 수군의 철갑선은 어떤 배였나(【麒麟がくる】コラム 織田信長が大坂本願寺攻めで用いた九鬼水軍の鉄甲船とはどんな船なのか)」, Yahoo!ニュース, 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33a8cf058ceb2869ad753787e19fe172466c6c96. 치수에 대해서는 “こちらが妥当であるという”라고 남의 견해를 전하는 형식으로 썼다 ↩

  11. 『다몬인 일기(多聞院日記)』 덴쇼 6년 7월 20일(쓰지 젠노스케(辻善之助) 편, 산쿄쇼인판 제3권,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207471, 19–20쪽 쪽 이미지) ↩

  12. 오르간티노 서한(1578년 9월 30일자 프로이스 서한에 수록), 무라카미 나오지로(村上直次郎) 역, 『야소카이시 니혼츠신(耶蘇會士日本通信)』 하(이코쿠 소쇼 제3, 1928), 434쪽(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186699). 서한에는 구키의 이름 없이 “노부나가가 이세에서 짓게 한 배”라고만 나와 있다 ;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오다 노부나가가 오사카 혼간지와의 싸움에서 쓴 철갑선은 정말 철 장갑으로 덮여 있었을까(織田信長が大坂本願寺との戦いで用いた鉄甲船は、本当に鉄の装甲で覆われていたのか)」, Yahoo!ニュース, 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1278872e09dd6118f110122a359e3407804bdc55 ↩

  13. 「철갑선(鉄甲船)」, 일본어 위키백과, https://ja.wikipedia.org/wiki/鉄甲船 ; 「안택선(安宅船)」, 일본어 위키백과 ↩

  14. 「철갑선(鉄甲船)」, 일본어 위키백과 ; 「철갑선 전설(鉄甲船伝説)」, 戦国日本の津々浦々, https://proto.harisen.jp/koramu/koramu-tekkousen.htm ↩

  15. 가타야마 도루(片山徹) 외, 「노부나가 철갑선의 복원성과 파랑 중 횡요 특성(信長の鉄甲船の復原性と波浪中横揺れ特性)」, 일본선박해양공학회 학술강연회 예고집(日本船舶海洋工学会 学術講演会予稿集) 32巻, J-STAGE, https://www.jstage.jst.go.jp/article/conf/32/0/32_513/_pdf ↩

  16.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오다 노부나가가 오사카 혼간지와의 싸움에서 쓴 철갑선은 정말 철 장갑으로 덮여 있었을까(織田信長が大坂本願寺との戦いで用いた鉄甲船は、本当に鉄の装甲で覆われていたのか)」(주12) “全面が鉄の装甲ではなかったにしても、装甲として部分的に用いられた可能性はある”, “現時点では決定的な説がないといえよう” ↩

  17.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1 덴쇼 6년 6월 26일·7월 17일·7월 18일·9월 30일(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3, 25·27쪽 쪽 이미지). 단노와는 원문에 “谷之輪”로 나와 있다. 9월 30일 포상(황금 20매 등)은 2차 해전보다 앞선 일이다 ↩

  18. 오르간티노 서한, 『야소카이시 니혼츠신(耶蘇會士日本通信)』 하, 434쪽(주12) ↩ ↩2

  19.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1 덴쇼 6년 11월 6일(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3, 27쪽 쪽 이미지) ; 『구키 고덴키(九鬼御伝記)』의 내용은 「제2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二次木津川口の戦い)」(일본어 위키백과)가 『도바 시사(鳥羽市史)』 상권(1991) 313쪽을 출처로 들어 인용한 것으로만 확인했다 ↩

  20. 「제2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二次木津川口の戦い)」・「제1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一次木津川口の戦い)」, 일본어 위키백과 (지휘관 명단 대조) — 무라카미 다케요시를 모리 측 총대장으로 적은 대목 자체에 위키백과 원문이 “[要出典]” 표시를 달아둠 ↩

  21. 『신초코키(信長公記)』 권11 덴쇼 6년 11월 6일(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1193, 27–28쪽 쪽 이미지) ↩

  22. 위와 같음. 이 원문 앞에 “西國舟六百余艘木津表へ乘出し候”가 있다 ↩

  23. 「키즈가와구치 전투: 철갑선이 제해권을 바꾼 해전(木津川口の戦い|鉄甲船が制海権を変えた海戦)」, 戦国ジャーナル ↩

  24. 『구키 고덴키(九鬼御伝記)』, 『도바 시사(鳥羽市史)』 상권(1991) 313쪽 경유, 「제2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二次木津川口の戦い)」, 일본어 위키백과 재인용(24척 나포) ; 「해전의 혁명을 일으킨 오다 노부나가(海戦の革命を起こした織田信長)」, 戦国武将研究会(과장 수치 비교용) ↩

  25.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앞 Yahoo!ニュース 칼럼 ↩

  26. 「키즈가와구치 전투: 육상에서 봉쇄된 이시야마 고보로 물자를 들이는 일을 둘러싼 오다 수군과 모리 수군의 해전(【木津川口の戦い】陸上封鎖された石山御坊への物資搬入をめぐる織田水軍と毛利水軍の海戦)」, 日本史あれこれ, https://love-japanese-history.com/ikusa%EF%BD%B0kizugawagutinotatakai/ ; 구키가 사카이에서 보급을 받았다는 점은 「제2차 키즈가와구치 전투(第二次木津川口の戦い)」(일본어 위키백과)가 오가와 유(小川雄) 2020, 108쪽을 근거로 든 것으로, 원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 ↩2

  27.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 일본어 위키백과 ↩

  28.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쿄뇨(教如)」, 일본어 위키백과 ↩

  29. 「쿄뇨(教如)」, 일본어 위키백과, https://ja.wikipedia.org/wiki/教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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