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노타니형 은박 투구를 쓰고 백마에 오른 구로다 나가마사를 그린 에도 시대 기마상 초상화(후쿠오카 시립 박물관 소장)

구로다 나가마사(1568–1623) 완전 정리 — 세키가하라를 설계한 크리스천 다이묘

Q: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는 누구인가?

A: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참모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 통칭 칸베에)의 적장자(1568~1623). 8세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인질로 보내졌고, 히데요시 부부 슬하에서 자랐다. 1587년 세례명 다미안을 받은 크리스천 다이묘인 그는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는 제3군 지휘관으로 평양성·벽제관·황석산성·직산·울산성 전투를 거쳤다.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 대립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진영에 급속히 편입됐고,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요시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 등 여러 다이묘를 동군으로 끌어들이는 회유공작을 주도한 뒤 본전에서도 직접 미츠나리 본진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부젠 나카츠 12만석에서 지쿠젠 후쿠오카 52만여 석으로 증봉되어 후쿠오카 번의 초대 번주가 됐고, 후쿠오카성을 쌓았다. 도쿠가와 막부의 금교령 이후 배교했고, 만년에는 후계자 타다유키(黒田忠之)의 자질을 우려해 폐적을 시도했다가 가신단의 반발로 철회했다. 1623년 교토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한눈에 보는 구로다 나가마사

항목내용
이름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くろだ ながまさ)
유명(幼名)쇼주마루(松寿丸)
생몰1568년 12월 3일(에이로쿠 11년) ~ 1623년 8월 29일(겐나 9년), 향년 56세
출신지하리마국 시메사이군 히메지성(播磨国飾東郡姫路城, 현 효고현 히메지시)
부친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 통칭 칸베에官兵衛, 출가 후 조스이如水)
모친구시하시 테루(櫛橋光)
세례명다미안(ダミアン, Damian, 1587년경 수세)
첫 영지1583년경 가와치국 450석
가독 상속1589년, 부젠국 나카츠(豊前中津) 12만석, 종오위하 카이노카미(甲斐守) 서임
세키가하라 이후 영지지쿠젠국 후쿠오카(筑前福岡) 52만여 석
주요 전공평양성·벽제관·황석산성·직산·울산성 전투 참전, 세키가하라 전투 전 동군 회유공작·본전에서 이시다 미츠나리 본진 공격
축성후쿠오카성(福岡城, 1601년 착공~1607년 완공 통설)
정실이토히메(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正勝의 딸, 1599년 이혼) → 에이히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와 재혼
후계자구로다 타다유키(黒田忠之)
사후1632~33년 가신단 내분 “구로다 소동(黒田騒動)“의 원인 중 하나로 그의 후계 구도가 지목됨

1. 인질로 자란 소년 (1568~1579)

구로다 나가마사는 1568년 12월 3일 하리마국 히메지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데라 가문(小寺氏)의 가신이자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참모가 되는 구로다 요시타카(칸베에), 어머니는 시카타성주의 딸 구시하시 테루였다.1

1577년 요시타카는 주군 오데라 마사모토(小寺政職)를 설득해 오다 노부나가 진영에 가담시켰다. 노부나가는 충성의 담보로 하리마의 다이묘들에게 인질 제출을 요구했는데, 정작 오데라 마사모토의 적자가 병약하다는 이유로 대신 요시타카의 적장자 쇼주마루(나가마사)가 인질로 지명됐다. 같은 해 10월 15일, 8세의 쇼주마루는 하시바 히데요시(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맡겨져 오미국 나가하마성에서 자랐다. 히데요시와 정실 네네 부부가 쇼주마루를 친자식처럼 아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2

이듬해인 1578년 오다 진영의 유력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가 반기를 들고 셋츠국 아리오카성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무라시게와 사이가 가깝던 요시타카가 항복을 설득하러 사자로 갔다가 도리어 성에 감금됐다. 요시타카가 돌아오지 않고 소식이 끊기자 노부나가는 그가 배반했다고 오판했고 격노해 인질로 잡혀 있던 쇼주마루의 처형을 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 휘하의 참모 다케나카 한베에(竹中半兵衛)는 쇼주마루를 몰래 자신의 영지인 미노국의 보다이산성 아래에 숨기고 처형을 마쳤다고 거짓 보고했다고 한다.3 구로다 가문이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후 가문(家紋)에 다케나카 가문의 문장 요소를 함께 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다만 정식 사료가 아니라 후대에 전하는 통속적인 일화이고 출처도 한 곳뿐이라,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4

이 이야기의 출처를 추적하면 후쿠오카번이 나가마사 사후 반세기 가까이 지난 1671~1688년에 엮은 가전(家伝) 사서 『黒田家譜』(구로다카후)가 나온다. 전국시대사 연구자 와타나베 다이몬은 이 책이 후대 편찬물이라 2차 사료로 봐야 한다고 지적하면서도, 다케나카 한베에가 쇼주마루를 구출했다는 이야기 자체는 “완전한 후대 창작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 일화 전체를 후대 창작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그 근거는 “구로다 요시타카의 배반죄에 대한 처벌이 고작 인질이었던 아들 한 명을 처형하는 것에 그친다는 것 자체가 시대 정황상 지나치게 가벼운 처벌이다”라는 것이다.5 다케나카 한베에가 숨겨준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요시타카가 유폐에서 풀려나며 쇼주마루도 무사히 하리마로 돌아갔다는 결론만큼은 사실이 분명하다.


2. 히데요시 곁에서 자란 무장 (1579~1587)

아리오카성이 함락되고 요시타카가 구출된 뒤에도 나가마사는 히데요시 진영에서 계속 성장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무렵에 가와치국 내 450석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구로다 나가마사가 영지를 받은 첫 기록이다.6 이후 나가마사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1584), 시코쿠 정벌(1585)을 거쳐 규슈 정벌(1587)에도 참전하며 히데요시 휘하에서 활약했다.

규슈 정벌에서 나가마사의 전공으로 확인되는 것은 휴가국 다카라베성 공략전이다. 다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세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규슈 정벌 하면 흔히 함께 거론되는 이와이시성 공략은 실은 마에다 도시이에·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의 전공이다. 나가마사가 직접 관여했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7 하여튼 공이 있었기 때문에 규슈 정벌이 끝난 후의 논공행상으로 부젠국 6군(약 12만석)이 아버지 요시타카에게 주어졌다. 이 시점에도 구로다 가문의 명목상 영주는 여전히 요시타카였기 때문이다.


3. 크리스천 다이묘 다미안

나가마사가 세례를 받은 것은 1587년경이다. 규슈 정벌 직후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공포한 시점과 거의 겹친다. 세례명은 다미안(ダミアン). 동생 나오유키와 함께 받았고 일본의 가톨릭 역사 자료를 보면 아버지 요시타카가 직접 가족 모두의 개종을 이끈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나가마사의 개종은 개인적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아버지의 뜻을 따른 가문 단위의 개종이었다.8

요시타카 자신은 세례명 시메온으로, 크리스천 다이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의 권유를 받아 나가마사보다 먼저 개종했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서한에는 히데요시가 요시타카에게 “네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원래 주려던 것 중 많은 부분을 거두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종교가 논공행상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9

바테렌 추방령 이후, 요시타카가 실제로 크리스트교 신앙을 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말이 다르다. “즉시 배교했다”는 서술이 있는가 하면, 임종 직전까지 로사리오와 기도문을 요청하고 예수회에 유산을 기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겉으로는 히데요시의 뜻을 따르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사실은 믿음을 놓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10


4. 부젠 나카츠의 첫 시련 (1587~1590)

1589년 아버지 요시타카가 은거하면서 나가마사가 구로다 가문의 가독을 상속했다. 종오위하 카이노카미(甲斐守)에 서임되며 부젠국 나카츠의 영주로서 명실상부한 다이묘가 됐다.

통치는 순탄치 않았다. 부젠의 국인들은 종래의 지배권이 유지되리라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구로다 가문의 가신으로 재편됐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반발이 터져 부젠 국인잇키(豊前国人一揆, 1587~1588)로 이어졌다. 국인 키이 시게후사(城井鎮房)가 히데요시의 이봉 명령에 반발해 거병했고 나가마사가 히고 잇키 진압에 나가 있는 틈을 타 구로다 가신이 지키던 오히라성을 습격했다. 시게후사는 본래 영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13세 딸을 인질로 보낸다는 조건으로 구로다 가문과 화의를 맺었다. 그러나 1588년 4월 20일, 나가마사는 시게후사를 나카츠성 주연에 초대해 살해했고 대기하던 시게후사의 가신단도 함께 몰살됐다.11

이듬해인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아버지 요시타카가 강화 교섭의 사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요시타카는 다키가와 카츠토시(滝川雄利)와 함께 무기 없이 오다와라성에 입성해 호조 부자를 설득하고 개성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나가마사 본인이 이 전역에 어떤 형태로 참전했는지는 확인할 만한 자료를 찾지 못했고, 확인되는 것은 요시타카의 활약뿐이었다.12


5. 조선으로, 제3군의 진군 (1592~1593)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나가마사는 제3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와 병력을 합쳐 총 11,000명 규모였다. 자신에게 부과된 군역은 5,000명이었다. 3군은 서로를 맡아 김해에 상륙한 뒤 추풍령을 넘어 한성으로 향했다.13

평양성 1차 함락(1592년 6월) 국면에서, 조선군이 대동강에 진을 친 소 요시토시(宗義智) 부대를 야습했다. 나가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응전해 이를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나가마사가 맡은 것은 주력인 고니시 1군의 측면 지원이었다. 평양성 자체를 직접 공략하지는 않았다.14 이듬해 1593년 1월 명군이 평양을 탈환하자 나가마사는 패퇴하는 고니시 부대를 가신이 지키던 용천사로 받아들여 명군의 추격에서 보호했다.15

같은 달 벽제관 전투에서는 본대 선진 5,000명을 지휘했다. 이여송의 명군은 평양 탈환의 여세를 몰아 한성으로 남하하다 이 전투에서 매복에 걸려 패퇴했다. 나가마사는 전투 후반 선봉대의 철수를 독려했던 것으로 전한다.16


6. 정유재란, 다시 조선으로 (1597~1598)

1597년 정유재란 재출병에서 나가마사는 가토 키요마사(加藤清正)·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등과 함께 우군을 형성했다. 황석산성 전투(8월)에서는 함양의 요충지를 동쪽에서 포위 공격해 함락시켰다. 직산 전투(9~10월)에서는 5,000명으로 시작해 3만 명까지 증원된 병력을 이끌고 야간 학익진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이 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전투였다.17

정유재란 후반, 가토 키요마사가 새로 쌓은 울산왜성(도산성)이 조명연합군에 포위됐다. 나가마사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모리 히데모토 등과 함께 원군으로 도착했다. 이때 이끈 병력은 600명이었다. 나가마사를 비롯한 구원군이 명군을 격파하고 추격전에서 30리 넘게 적을 쫓았다는 것이 일본 측 기록이다.18

구원전이 끝나자마자 나가마사는 히데요시로부터 전공을 치하하는 주인장을 받았다. 그런데 군목부(軍目付, 전선의 다이묘들을 감찰해 중앙에 보고하는 직책)였던 후쿠하라 나가타카(福原長堯, 미츠나리의 사위)가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구로다 나가마사가 명군이 진영에 몰려왔을 때 맞서 싸우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히데요시는 격노해 이에마사에게는 칩거를 명하고 나가마사에게는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엄히 처분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조선 주둔 제장들이 히데요시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전선 축소(울산·순천 등 전방 왜성 포기)를 독자적으로 결정한 연서장 사건까지 겹쳤는데, 이 연서장에는 이에마사가 이름을 올렸을 뿐 나가마사는 서명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있다. 그런데도 나가마사가 함께 처벌된 데는 그의 정실이 이에마사의 이복 누이였다는 인척 관계가 연좌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시각이 있다. 포상과 처벌을 거의 동시에 겪은 이 사건은 훗날 나가마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고 미츠나리를 원망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거론된다. 다만 나가마사가 이때부터 계속해서 미츠나리를 강하게 원망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이야기꾼들이 붙인 창작일 수도 있다.1920

정유재란 기간 나가마사는 양산에 왜성(梁山倭城)을 쌓아 직접 지켰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고 전선을 줄이자는 논의가 오가던 국면에서, 여러 왜성을 포기하자는 안 가운데 승인된 것은 나가마사의 양산성 하나뿐이었다. 이후 나가마사는 구포왜성(龜浦倭城)으로 진영을 옮겼다.21


7.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와의 대립 (1598~1599)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사망했을 때, 나가마사는 오다이로(五大老)·오부교(五奉行, 도요토미 정권의 최고 협의체와 실무 부교단)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견 다이묘(부젠 나카츠 12만석)였다. 이듬해(1599년 2월) 이른바 사혼 문제로 나가마사는 정권 다툼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히데요시는 생전 다이묘 가문 간 혼인을 정권의 합의 없이 진행하지 못하도록 서약을 받아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어기고 조카이자 양녀인 에이히메를 나가마사에게 시집보냈다. 이시다 미츠나리를 비롯한 오부교 측이 이를 문제 삼아 이에야스를 규탄했으나 이에야스는 위반을 인정하면서도 별다른 처벌 없이 무마시켰다.22 이 혼인을 하려면 나가마사는 15년을 함께한 정실 이토히메(하치스카 마사카츠의 딸이자 히데요시의 양녀이기도 했다)와 먼저 이혼해야 했다. 도요토미 가문과의 오랜 인연을 끊고 도쿠가와 가문과 새로 인척을 맺는, 정치적으로 큰 결단이 필요한 선택이었다.23

같은 해 윤3월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나가마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토 키요마사 등 이른바 무단파 칠장과 함께 오사카에서 미츠나리를 노렸다. 미츠나리는 사전에 낌새를 채고 우키타 히데이에의 저택을 거쳐 후시미성 안 자신의 저택으로 피신했고, 칠장 측이 후시미성을 에워싸며 대치가 이어졌다. 인근 무코지마 저택에 있던 이에야스가 중재에 나서 미츠나리의 은거와 울산성 전투 전공을 재심사하는 조건으로 양측을 화해시켰다. 이 국면을 거치며 미츠나리는 부교직에서 물러나 사와야마성으로 은거했다. 다만, 이 “칠장습격사건”이 실제로 무력을 동원한 습격이었는지, 아니면 정치적 탄핵 절차에 가까운 것이었는지는 근래 학계(시라미네 준과 고자 유이치)에서도 아직 논쟁 중이다.24


8. 세키가하라 전야, 회유공작의 설계자 (1600)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9월 15일)를 앞두고 나가마사는 도쿠가와 측 회유·이간 공작의 핵심 실무자로 나섰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두고는 나가마사가 “미츠나리 편에 설 리 없다”고 이에야스에게 직접 보증했다. 이 보증은 이에야스가 마음 놓고 아이즈 정벌에 나서는 데 크게 작용했다. 요시카와 히로이에와는 개인적 친분을 앞세워 빈번히 서신을 주고받으며 모리 가문을 사실상 전투에서 이탈시키는 공작을 벌였다. 히고의 사가라 요리후사와는 기청문(起請文, 신 앞에 맹세하는 서약서)을 교환해 충절을 확보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이탈에도 히데아키의 중신인 히라오카 요리카츠(나가마사와 인척)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기록도 있다.25

연구자들은 이 회유공작 서사의 대부분이 후쿠오카번이 편찬한 『黒田家譜』 계통에서 유래한다는 사료 비판을 제기해 왔다. 역사학자 시라미네 준은 이 책이 후대 편찬물이어서 신뢰도가 낮다고 봤다. 나가마사의 “지장(智將)” 이미지 자체를 자가(自家) 정사가 상당 부분 만들어냈을 수 있다는 것이 시라미네의 지적이다.26

그런데 이 서사를 뒷받침하는 완전히 독립된 사료가 하나 있다. 놀랍게도 그 출처는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1601) 4월 25일 기사다. 여기에는 일본에 억류됐다 탈출한 조선인 강사준·여진덕 등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때 흑전갑비수(黑田甲斐守)란 자가, 휘원(모리 테루모토)의 사위 축전주 중납언과 종제 운주 시종이 속으로 휘원에게 붙으려 하지 않는 뜻이 본래부터 있음을 알고서 몰래 가강(이에야스)에게 내통하니”라는 대목이다.27 세키가하라 이듬해의 조선 조정 기록인데, 구로다 가문에서 나온 사서를 전혀 참고하거나 인용하지 않은 자료다. 여기에 나가마사가 모리 가문 내부를 이간해 이에야스 쪽으로 내통시켰다는 첩보가 실명으로 남아 있다. 적어도 이 기록에 비춰 보면, 나가마사가 회유공작에 능하다는 평판은 후쿠오카번에 의해 후대에 미화된 설화가 아니라, 사건 직후부터 조선까지 퍼져 있던 동시대의 소문이었다.

세키가하라 국면에서, 부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은거해 있던 요시타카는 규슈에서 독자적으로 거병해 오토모·시마즈 등 서군 세력을 상대로 세력을 넓히려 했다. 이 행보를 두고 “천하를 노렸다”는 해석이 통설로 자리 잡았다. 반면 아들 나가마사는 이에야스 진영에 가담해 도쿠가와 정권 아래 대다이묘 자리를 얻는 길을 택했다. 요시타카는 이 전쟁이 장기전이 되리라 봤다. 실제로는 나가마사를 비롯한 동군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반나절 만에 승부가 갈렸다.28

두 사람의 노선이 이렇게 갈린 것은 성정 자체가 달랐던 탓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요시타카는 결단이 빨랐고 나가마사는 매사 신중해 판단에 시간이 걸리는 쪽이었다. 은거한 요시타카가 아들의 느린 결단력을 두고 “생각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다만 후대에 엮은 일화집 계통의 이야기라 1차 사료로 확인되지는 않는다.29


9. 세키가하라 본 전투와 후쿠오카 52만석 (1600)

전투 당일, 나가마사는 다케나카 시게카도(竹中重門, 다케나카 한베에의 아들)와 함께 전장을 조망할 수 있는 오카야마(마루야마) 봉화대에 진을 쳤다. 병력은 4,500~5,400명 선으로 자료마다 숫자가 다르다. 개전과 동시에 이시다 미츠나리의 본진을 직접 상대했다. 시마 사콘(島左近)이 이끄는 방어선이 좀처럼 무너지지 않자 북쪽으로 우회해 측면을 치는 전술로 바꿨다. 이 측면 공격에서 가신 스가 마사토시(菅正利)의 철포대가 사콘을 저격해 중상을 입혔다. 사콘의 이탈을 서군 붕괴의 요인 중 하나로 보는 평가가 많다.30

전투 직후, 나가마사는 정치적 성공과는 별개로 신앙의 무게를 시험받았다. 패전 뒤 처형된 크리스천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는 처형 직전 같은 크리스천이던 나가마사에게 고해성사를 부탁했으나 이에야스의 명으로 거절당했다. 사제가 성사를 집전하려 했으나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600년까지도 나가마사는 주변에서 크리스천으로 통했다. 그러면서도 신앙의 의리보다 정치적 처신을 앞세웠다.31

전후 논공행상에서, 나가마사는 부젠 나카츠 12만석에서 지쿠젠 후쿠오카 52만여 석으로 4배 넘게 증봉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회유공작을 통한 동군 결집과 본전에서의 미츠나리군 격파를 파격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32

세키가하라 이후로도 나가마사는 이이 나오마사와의 교섭을 발판 삼아 도쿠가와가와 실질적인 관계를 만들어 갔다. 이에야스가 명한 에도성 등 대규모 축성 부역(덴카부신, 天下普請)에도 성실히 응했다. 특히 에도성 덴슈다이·혼마루 석축 공사에서 두각을 나타내 외양(도자마) 다이묘 신분인데도 이에야스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33


10. 세키가하라의 투구 —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맞바꾼 이치노타니형

이 글 맨 위 초상화에서 나가마사가 쓴 투구는 옆으로 완만하게 휘어진 부채꼴이다. 이것이 “이치노타니형 투구(一ノ谷形兜)“다. 정식 명칭은 은박압 이치노타니형 투구(銀箔押一の谷形兜), 무게 약 3.1kg. 겐페이 전쟁 당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가 기습을 걸었던 절벽 이치노타니(현 고베시 스마구, 神戸市須磨区)의 험준한 지형을 본뜬 모양이다. 지금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후쿠오카 시립 박물관이 소장한다. 이 투구를 쓴 모습을 그린 기마 초상화도 따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같은 박물관에 있다.34

원래 이 투구의 주인은 나가마사가 아니라 후쿠시마 마사노리였다. 조선 출병 중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가 귀국 후 화해했고 그 증표로 나가마사가 즐겨 쓰던 물소뿔 장식 투구와 마사노리의 이치노타니형 투구를 맞바꿨다고 전한다. 후쿠오카 시립 박물관 측 자료는 나가마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바로 이 투구를 쓰고 출진했다고 설명한다. 다만 교환한 것이 서로가 실제로 착용하던 실물인지, 아니면 똑같이 생긴 레플리카인지는 출처마다 기록이 달라 알 수 없다.34

구로다 나가마사가 원래 쓰던 흑칠 모모나리 대수우각 와키다테 투구 실물 사진
나가마사가 이치노타니형 투구와 맞바꾸기 전 쓰던 물소뿔 장식 투구(黒漆塗桃形大水牛脇立兜). 후쿠오카 시립 박물관 소장.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11. 후쿠오카 번조의 축성과 통치 (1600~1611)

나가마사는 1600년 12월 지쿠젠에 입성해 처음에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옛 거성 나지마성에 자리 잡았다. 이후 하카타에 가까운 후쿠사키 구릉으로 옮겨 1601년부터 약 7년에 걸쳐 새 성과 성하마을을 지었다. 구로다 가문의 옛 근거지인 비젠국 오쿠군 후쿠오카에서 이름을 따 후쿠오카로 개칭했다.35 성의 설계는 나가마사 자신이 주도했고 축성 실무는 가신 노구치 카즈시게(野口一成)가 총괄했다. 성은 망루 47기와 성문 10개를 갖춘 약 24만 제곱미터 규모였다.36

성 위에 실제로 천수가 서 있었는지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1646년에 그려진 가장 오래된 후쿠오카 성의 그림에는 천수가 없다. 그래서 애초에 짓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던 2024년 후쿠오카 시립 박물관이 찾아낸 에도 초기 가신 서한에 “천수가 세워졌기 때문에 석축이 완만해졌다”는 취지의 기록이 있었고, 이후 발굴 조사에서도 천수가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기초석 구조가 나왔다. 이 발견으로 인해 처음부터 천수가 있었던 것으로 학계가 완전히 결론을 낸 것은 아니지만, 천수를 지었다가 나중에 철거했다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37

후쿠오카성 천수대 석축과 기초석 유구 현재 모습
후쿠오카성 천수대(天守台) 석축과 기초석. 천수 실재 여부 논쟁의 물증인 초석 구조가 바닥에 남아 있다.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촬영: kamoseiro).

번정 운영에서는 지쿠고강·온가강의 물을 끌어들여 새 논밭을 개간하도록 장려했다. 이토시마 지구의 간척사업을 통해 2만 석 규모의 논밭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하카타닌교·하카타오리·다카토리야키 등 전통 공예 진흥에도 힘을 쏟았고 하카타의 유력 상인 오가 소큐를 통해 슈인센(朱印船, 막부의 해외무역 허가장을 받은 무역선) 무역에 관여했다. 나가마사가 영지로 받았던 당시 하카타 시가지 자체는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었다. 나가마사가 지쿠젠을 받은 1600년보다 이른 1587년에 히데요시의 명으로 아버지 요시타카와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무를 맡아 이미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나가마사는 이미 조성되어 있던 시가지를 물려받아 번을 원활하게 운영했다.38

나가마사를 받든 정예 가신 24인은 후대에 “구로다 니주욘키(黒田二十四騎)“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그중 8인은 따로 “구로다 핫코(黒田八虎)“로 불렸다. 다만 이 호칭들은 나가마사 생전이 아니라,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늦어도 18세기 초(교호 연간, 1716~1736)에는 가문을 현창하려고 후대에 정리된 이름이다.39 24기 중 창술의 명수 모리 타헤에(母里太兵衛)가 “무슨 일이 있어도 술을 마시지 말라”는 나가마사의 명을 어기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의 술내기에서 이겨 천하 3대 명창 중 하나인 니혼고(日本号)를 받아냈다는 일화는 지금도 후쿠오카 민요 「구로다부시(黒田節)」로 전한다. 다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가마사가 아니라 타헤에이며, 정사가 아니라 후대 가전 사서 계통의 전승에 가깝다. 니혼고는 1978년 구로다 가문이 후쿠오카시에 기증해 지금도 후쿠오카 시립 박물관에 있다.40

모리 타헤에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앞에서 큰 잔의 술을 들이켜는 장면을 그린 삽화, 옆에 명창 니혼고가 세워져 있다
모리 타헤에가 대배를 비우고 니혼고를 받아내는 장면을 상상해 그린 AI 생성 삽화. 실제 유물·초상 사진이 아니다.

12. 아버지의 죽음과 다도 후원 (1604~1612)

1604년 3월, 아버지 요시타카가 사망했다. 장례는 그리스도교와 불교 방식으로 함께 치러졌다. 나가마사는 이후 교토 다이토쿠지에 탑두 사찰 류코인을 세워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다.41 1612년에는 이 류코인 경내에 다인 고보리 엔슈(小堀遠州)가 자신의 보리소(菩提所, 명복을 비는 사찰)로 다실 고호안(孤篷庵)을 지었다. 엔슈 유파 쪽 자료에 따르면 나가마사가 이 건립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그가 임진왜란 때 데려온 조선 도공 야산(八山, 일본명 다카토리 하치조 시게사다)에게 열게 한 다카토리야키 가마도 다도용 도자기로 이름을 얻었다. 다만 나가마사 자신이 다회를 열거나 명물 다구를 소장했다는 직접 기록은 확인되지 않아 다도와의 관계는 애호가라기보다 후원자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42


13. 배교자가 된 크리스천 다이묘 (1612~1614)

도쿠가와 막부는 1612년 3월 교회 파괴·포교 금지를 명하는 금교령을 내렸고 1614년에는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 시기 나가마사는 하카타의 교회당을 부수고 선교사를 추방했으며 영내 크리스천을 박해하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한때 스스로 크리스천이었던 인물이 도쿠가와 정권 아래에서는 오히려 박해자가 됐다. 이 급격한 태세전환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자료의 기록이 일치한다. 만년에는 선종 신앙에 깊이 귀의했다고 하는데, “배교 후에도 은밀히 크리스트교 신앙을 유지했다”는 설은 이번 조사에서 신뢰할 만한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다.43


14. 오사카 전투, 마지막 출진 (1614~1615)

만년의 나가마사는 도요토미 가문의 최후를 결정하는 두 전투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여했다. 오사카 겨울의 진(1614년 11월)에서는 나가마사 본인은 출진하지 않았다. 대신 적자 타다유키가 대리로 나섰고 나가마사는 에도에 남았다. 이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이야기가 갈린다. 스스로 에도성 유수(留守, 성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성을 지키는 직무)를 자청했다는 쪽이 있는가 하면, 옛 가신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 본명 고토 모토츠구, 後藤基次)가 이미 구로다가를 떠나 도요토미 쪽 낭인이 돼 있던 터라 이에야스 측의 의심을 받아 사실상 에도에 머물도록 요구받았다는 쪽도 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해 9월 나가마사가 도쿠가와 측에 기청문을 제출했고, 12월에는 이에야스에게 납 3,000근을 헌상해 오사카성 공략을 물자로 지원했다는 점은 확인된다.44

이듬해 오사카 여름의 진(1615년)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나가마사는 4월 25일 후쿠오카성에서 병력 1만 명에게 보름치 병량·사료를 준비하라는 동원령을 내리고 직접 출진해 5월 5일 효고에 도착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휘하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와 함께 진을 치고 도요토미 측과 교전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나가마사 개인의 구체적인 전투 행적까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전후 나가마사는 가신 구로다 카즈나리(黒田一成)에게 이 전투를 그린 「오사카 여름의 진 병풍(黒田屏風)」을 만들게 했다.44

나가마사가 제작을 명한 오사카 여름의 진 병풍, 오사카성과 금빛 구름 속 대군세를 그린 부분
나가마사가 가신 구로다 카즈나리에게 제작을 명한 「오사카 여름의 진 병풍(黒田屏風)」 중 오사카성 주변부. 오사카성 텐슈카쿠 소장, 퍼블릭 도메인(Wikimedia Commons).

15. 만년의 후계 갈등과 죽음 (1623)

나가마사는 만년에 장남 타다유키의 그릇이 좁고 성정이 거칠다는 것을 걱정했다. 타다유키를 폐적하고 셋째 아들 나가오키에게 가독을 넘기는 방안까지 진지하게 고려했다. 타다유키에게 “2000석 전지를 줄 테니 백성이 되거나, 1만 냥을 줄 테니 상인이 되거나, 1000석 지행으로 절을 세워 승려가 되라”는 극히 가혹한 선택지를 내민 서장까지 남겼다고 한다.45 나가오키를 편애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나가오키의 생모 나가코가 다름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였기 때문이다.46

가로(家老, 번의 최고위 가신) 구리야마 다이젠(栗山大膳)을 비롯한 중신들이 반발했다. 번사들의 적자들을 모아 “폐적을 철회하지 않으면 전원 할복하겠다”는 혈판장을 받아 나가마사에게 제출했다. 결국 나가마사는 이 청원을 받아들였다. 타다유키를 정식 후계자로 두는 대신 구리야마 다이젠에게 그 후견을 맡겼다. 셋째 나가오키에게는 아키즈키 5만석을 분할 상속하도록 했다.47

나가마사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상경에 앞서 먼저 교토에 올라와 있었다. 그러던 중 호온지에서 병을 얻어 1623년 8월 29일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유해는 하카타 스자쿠지에 안장됐다.48


16. 나가마사 사후 구로다 소동과 후대의 평가

나가마사가 걱정한 그대로였다. 타다유키는 번주가 된 뒤 무가제법도를 무시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독단적 행보를 반복했다. 나가마사의 유언으로 후견을 맡은 구리야마 다이젠이 거듭 간언했으나 타다유키는 듣지 않았다. 결국 1632~33년, 다이젠은 타다유키를 막부에 고발하는 소장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이 구로다 소동이다. 나가마사는 타다유키를 후계자로 두되 다이젠에게 감독을 맡겼다. 이 유훈이 역설적으로 번주와 필두 가로 사이에 처음부터 감시자-피감시자 관계를 설정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정면충돌로 번졌다는 해석이 있다.49

후대는 나가마사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해 왔다. 이유는 둘이다. 우선 아버지 요시타카가 수많은 대중문화에서 천재 군사로 묘사되면서 상대적으로 아들 쪽은 저평가됐다. 나머지 하나는 공적이 다른 무장에게 넘어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토 키요마사의 “호랑이 퇴치” 일화다. 원래 나가마사와 그 가신들의 이야기였다고 여러 매체가 지적한 대목이다.5051 나가마사와 아버지 요시타카를 둘러싼 통설적 이미지의 상당 부분이 후쿠오카번의 공식 사서 『黒田家譜』에 근거한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2023년 나가마사 몰후 400년을 맞아 후쿠오카 시립 박물관이 특별전을 열면서 재평가 흐름도 이어지고 있다.52


17. 참고 문헌

Footnotes

  1. サライ.jp(小学館), 「黒田長政(幼名・松寿丸)の生き様」; 刀剣ワールド, 「黒田長政の歴史」

  2. サライ.jp; bushoojapan, 「窮地を救ったのが細川ガラシャとは?」

  3. sengoku-his.com(戦国ヒストリー), 「黒田官兵衛はなぜ1年も幽閉されたのか?」; bushoojapan, 「松寿丸に信長が殺害命令」

  4. rekishiru.site, 「【豊臣兄弟】竹中半兵衛の兜をなぜ黒田長政がかぶったのか」(단일 출처, 통속적 전승)

  5.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信長が処刑命令!黒田官兵衛の嫡男・長政を救った竹中半兵衛の知られざる決断とは?」; 「私たちが知る黒田官兵衛の姿は、『黒田家譜』に書かれた虚像だった」; Yahoo!知恵袋(익명 Q&A) 회의론

  6. 刀剣ワールド, 「黒田長政の武将年表」

  7.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長政」; 성곽 답사 개인 사이트, 「豊前 岩石城」(정정 근거)

  8. Laudate 日本キリシタン物語 제13회;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孝高」

  9.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孝高」(프로이스 서한 재인용)

  10. 歴史街道(PHP研究所), 「洗礼名「ドン・シメオン」黒田官兵衛とキリスト教の関係」; 戦国未満, 「黒田長政とは」

  11. 일본어 위키백과, 「豊前国人一揆」; 요시토미초(吉富町) 공식 자료

  12. 小田原市 공식 역사 자료; 영어 위키백과, “Siege of Odawara (1590)”

  13.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長政」

  14. 歴史の目的をめぐって, 「黒田長政」연표

  15. 위 자료 동일

  16. 일본어 위키백과, 「碧蹄館の戦い」(『西國太平記 毛利秀元記』 각주 인용)

  17.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어 위키백과, 「직산 전투」

  18. 일본어 위키백과, 「蔚山城の戦い」; 한국어 위키백과, 「제1차 울산성 전투」

  19. 古上織蛍の日々の泡沫, 「考察・関ヶ原の合戦 其の十(2)」(히데요시 주인장 인용)

  20. 위 자료 동일; 일본어 위키백과, 「福原長堯」

  21. 歴史の目的をめぐって, 「黒田長政」연표(양산왜성 축성·구포왜성 이진)

  22.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徳川家康が五奉行から激しく糾弾された当たり前の理由」

  23.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徳川家康が五奉行から激しく糾弾された当たり前の理由」(이토히메 15년 혼인·히데요시 양녀 관련); note/ameblo 개인 블로그(참고용)

  24. 일본어 위키백과, 「七将襲撃事件」(시라미네 준·고자 유이치 논쟁 인용)

  25. 渡邊大門, 「黒田長政は調略戦だけでなく…」; PHP研究所, 「黒田長政・父譲りの調略で呼び込んだ関ケ原の勝利」

  26. 白峰旬(別府大学 교수) 관련 검색 결과;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家譜」

  27. 국사편찬위원회,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1601) 4월 25일,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404025_011

  28. 위 자료 동일

  29. 刀剣ワールド, 「黒田長政の歴史」; 渡邊大門 관련 기고(부자 성격 대비, 후대 일화집 계통)

  30. 岐阜関ケ原古戦場記念館 공식, 「黒田長政コース」; 일본어 위키백과, 「菅正利」

  31. 일본어 위키백과, 「小西行長」

  32.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長政」(諏訪勝則, 2013 인용)

  33. 刀剣ワールド, 「黒田長政の歴史」; note/ameblo 개인 블로그(이이 나오마사 교섭·에도성 덴카부신 관련, 참고용)

  34. 福岡市博物館 공식 블로그, 「【ふくおかの名宝】鑑賞ガイド⑭ 黒田長政の武功を伝える甲冑と兜」; 福岡市文化財データベース, 「銀箔押一の谷形兜」; 福岡市博物館 리프렛 No.092「変わり兜展」; 歴史街道(PHP研究所), 「黒田長政の『一の谷形』の兜は金色に輝いていた?」; 和樂web, 「黒田長政と福島正則が兜交換で仲直り?」 2

  35. 福岡城・鴻臚館 공식, 「黒田長政」

  36. 攻城団ブログ, 「築城の名手(3)黒田官兵衛が築いた城」

  37. TNCニュース(福岡TNC), 「『福岡城に天守閣はあったのか』」, 2026년 5월

  38. 遠賀町誌; 博多の魅力, 「豊臣秀吉 博多の町の復興 “太閤町割り”」

  39.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二十四騎」

  40. 攻城団, 「黒田節と名槍「日本号」」; ホームメイト(刀剣コレクション名古屋), 「母里太兵衛と名槍「日本号」の逸話」; 公益財団法人 日本民謡協会, 「黒田節」해설; 일본어 위키백과, 「日本号 (槍)」(출전 부족 경고 있음, 참고용)

  41. 刀剣ワールド, 「黒田長政の歴史」

  42. 遠州流茶道 공식 사이트, 「黒田長政」·「龍光院」항목(고호안 건립 후원 서술); 일본어 위키백과, 「龍光院 (京都市北区)」·「高取焼」

  43. 歴史の目的をめぐって, 「黒田長政」; CiNii Research, 清水紘一 「慶長17年のキリシタン禁教令再考」(서지 확인)

  44.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長政」; 歴史の目的をめぐって, 「黒田長政」연표(1614년 11월 호소카와 다다오키 서한, 12월 납 헌상 기록); 福田千鶴, 「大坂冬の陣開戦までの西国大名の動向―黒田長政・島津家久を中心に」, 『九州文化史研究所紀要』59号(2016), 서지·목차만 확인, 본문 미열람; ホームメイト, 「黒田長政の武将年表」 2

  45. 華盛頓,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黒田長政の死後に訪れた試練!」

  46. 朝倉市 공식, 「秋月藩初代藩主 黒田長興」(나가오키 생모 나가코가 이에야스 양녀라는 서술)

  47. 위 자료 동일; 朝倉市 공식, 「秋月藩初代藩主 黒田長興」

  48.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長政」; コトバンク, 「黒田長政」

  49. 攻城団ブログ, 「黒田騒動 忠臣の中の忠臣・栗山大膳」; 일본어 위키백과, 「黒田騒動」

  50. 渡邊大門, 「私たちが知る黒田官兵衛の姿は、『黒田家譜』に書かれた虚像だった」

  51. netabare1.com, 「実話・黒田長政と加藤清正の虎退治(虎狩り)」; Japaaan, 「加藤清正だけじゃない!文禄・慶長の役で虎狩りを行った勇猛な戦国武将たち」

  52. 福岡市博物館 공식, 「特別展 黒田長政没後400年」; CiNii Research, 「大坂冬の陣開戦までの西国大名の動向」, 『九州文化史研究所紀要』59号(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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