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1575) — 3단 사격 전술의 신화에 감춰진 다케다 최후의 7년
Q: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는 무엇인가?
A: 1575년(덴쇼 3년) 음력 5월 21일, 미카와국 시타라가하라(三河国設楽原, 현 아이치현 신시로시)에서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과 다케다 카츠요리군이 맞붙은 전투다. 다케다군이 도쿠가와 측 나가시노성을 포위하자 연합군이 구원에 나섰다. 연합군은 마방책과 철포를 이용한 야전축성으로 다케다군의 반복된 기마 돌격을 저지해 대승을 거뒀다. 이 패전으로 다케다군은 야마가타 마사카게·바바 노부하루·나이토 마사토요 등 유력 중신 다수를 잃었다. 이후 7년에 걸친 다케다 가문 쇠퇴가 여기서 시작된다. 대중적으로는 “철포 3천 정으로 3단 사격을 구사해 다케다 기마군단을 전멸시킨 전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전술에 대한 서술은 동시대 1차 사료인 『신초코키(信長公記)』에 등장하지 않으며, 사건 후 약 49년 뒤 성립한 통속 군담에서 처음 등장한다.
한눈에 보는 나가시노 전투
| 항목 | 내용 |
|---|---|
| 명칭 |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 시타라가하라 전투(設楽原の戦い) |
| 시기 | 1575년(덴쇼 3년) 음력 5월 21일 |
| 장소 | 미카와국 시타라군 시타라가하라(三河国設楽原, 현 아이치현 신시로시) |
| 교전 세력 |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vs 다케다 카츠요리군 |
| 병력(통설) | 연합군 약 3만8천, 다케다군 약 1만5천 — 정확한 수치는 학계 재추정치가 서로 다름 |
| 주요 지휘관 |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사카이 타다츠구 / 다케다 카츠요리·야마가타 마사카게·바바 노부하루·나이토 마사토요 |
| 결과 |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대승, 다케다군 총퇴각 |
| 다케다측 손실 | ”다케다 사천왕” 중 3인(바바·야마가타·나이토) 등 유력 중신 다수 전사. 전사자 총수는 사료 간 편차가 큼(1천여~1만 명) |
| 이후 영향 | 이후 약 7년간 외교·군사적 고립이 누적되어 1582년 다케다 가문 멸망으로 이어짐 |
| 통설 vs 재평가 | ”철포 3천 정·3단 사격”설이 널리 퍼져 있으나, 최근 연구는 탄약 조달망(병참) 우위론으로 재해석하는 중 |
이 글에서는 통속적으로 알려진 서사와 1차 사료 사이의 간극을 사건의 배경부터 전투 경과, 결과, 이후 영향까지 층위별로 검증한다.
1. 배경 — 다케다 신겐 사후 정세와 나가시노성 공방전
1-1. 카츠요리의 승계와 다카텐진성 함락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1573년(겐키 4년) 음력 4월, 교토 진공을 노린 서상작전(西上作戦) 도중 시나노국 이나(伊那) 고마바(駒場)에서 53세로 병사했다.1 신겐이 자신의 죽음을 3년간 감추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신겐의 정식 후계자는 카츠요리(勝頼)와 정실 류쇼인(龍勝院) 사이에서 태어난 적손 노부카츠(信勝)이고 카츠요리 본인은 노부카츠가 성년이 될 때까지의 대리(陣代)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신겐 은거, 카츠요리 가독 상속”으로 발표됐다. 그런데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 등 인접한 다이묘에게는 신겐의 죽음이 유언과 달리 한참 빨리 알려졌다는 지적도 있어, 3년 동안 죽음을 숨기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 자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1
카츠요리가 승계한 다케다 가문은 곧바로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동맹(1562년 성립)과 미카와·토토미 방면에서 계속 대치했다. 1574년(텐쇼 2년) 카츠요리는 신겐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토토미의 다카텐진성(高天神城)을 공략해 항복시켰다. 오다는 잇코잇키 대응으로, 도쿠가와는 단독으로 원군을 보낼 여력이 없어 구원하지 못했다. 이 승리로 카츠요리의 무명(武名)이 크게 올랐다. 이 여세를 몰아 이듬해 나가시노 방면으로 진공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2
1-2. 나가시노성과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의 이반
나가시노성(長篠城)은 칸사가와(현 토요가와)와 오노가와(현 우레가와) 두 강의 합류점에 돌출한 단애 위에 세워진 성이다. 남쪽과 동쪽은 강바닥과 30m 가까이 낙차가 나는 천연의 요새였으며, 히가시미카와와 시나노·토토미·미노를 잇는 육상 교통로와 토요가와 수운이 교차하는 요충지이기도 했다.3
이 성을 지키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奥平貞昌, 훗날의 노부마사信昌)는 원래 다케다 측 고쿠진(国人)이었다. 1573년 다케다군이 노다성(野田城)을 함락시키고도 상경을 멈춘 채 카이로 회군하자 오쿠다이라 부자는 신겐의 죽음을 확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회유를 받아들여 도쿠가와 측으로 붙게 된다. 이 협상을 위해 이에야스는 딸 카메히메(亀姫)와 사다마사의 혼약, 영지 가증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이와 관련해 노부나가와도 상의했다고 한다. 격노한 카츠요리는 인질로 잡혀 있던 오쿠다이라 가문 사람들, 사다요시의 차남 센치요(仙千代)와 성주의 딸이자 사다마사의 처였던 오후(お福, 16세) 등을 처형해 본보기로 삼았다.34 이 처형이 있은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자신이 지키는 나가시노성에서 다시 다케다군과 마주하게 된다.
1-3. 나가시노성 공방전 (1575년 5월)
카츠요리는 1575년 4월 말 미카와로 진공해 니렌기성 등을 탈취하며 나가시노성 방면으로 전진했다. 5월 초 약 1만5천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다. 수비대는 오쿠다이라 사다마사 이하 약 500명에 불과했으나 철포 200정과 강고한 지형에 의지해 버텼다. 하지만 5월 13~14일 다케다군의 화공으로 병량고가 소실되면서 수일 내에 성이 함락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몰렸다.5 정확한 포위 개시 날짜는 5월 1일설과 5월 8일설(부성 완성일과 혼동 가능성) 등 사료마다 편차가 있어 이 글에서는 “5월 초 포위 개시, 5월 8일경 포위망 완성” 정도로 서술한다.5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가시노성 밖으로 목숨을 걸고 원군을 요청하러 나선 인물이 도리이 스네에몬이다.
2. 나가시노성 농성과 도리이 스네에몬의 일화
2-1. 밀사 임무와 처형
도리이 스네에몬(鳥居強右衛門, 본명 카츠아키(勝商), 1540~1575)은 나가시노성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가신인 아시가루였다. 1575년 5월 14일 밤, 병량고 소실로 낙성이 임박하자 그는 스스로 지원해 성의 하수구를 통해 탈출했다. 이튿날 아침 무사히 오카자키성에 도착해 원군이 올 것이라는 확답을 받게 된 스네에몬은 곧바로 기분 좋게 귀로에 올랐다. 그러나 16일 새벽 아루미무라 부근에서 다케다군에 붙잡히고 만다. 다케다 카츠요리는 그에게 목숨을 살려줄 테니 성을 향해 “원군은 오지 않는다”고 외치라고 했다. 하지만 스네에몬은 오히려 성안을 향해 “며칠 안에 원군이 올 것이다”고 외쳐 격노한 카츠요리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성 안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수비군의 사기가 올라가게 되었고,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방어를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일화의 줄거리다.6
2-2. “신초코키에는 없다” — 최초 출전과 성립 시기
이 일화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출전이다. 노부나가의 근시 오타 규이치(太田牛一)가 남긴 동시대 1차 사료 『신초코키』에는 나가시노 전투의 경과가 상세히 기록돼 있는데도 도리이 스네에몬에 관한 기술은 전혀 없다.6 이 일화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호안신초키(甫庵信長記)』(1624년 간행)와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1626년경 성립)로, 사건 발생 후 약 49~51년이 지난 시점이다. 스네에몬 일화는 노부나가 당시의 1차 사료에는 없고, 세월이 흐른 뒤 에도시대 초기에 성립한 후대의 군사기록물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다.6
『호안신초키』는 스네에몬이 참살당했다는 기록과 함께 “노부나가가 2~3일 안에 도착한다”고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미카와모노가타리』는 스네에몬이 책형에 처해졌다고 적으며, “노부나가·이에야스·노부야스의 원군이 다가오니 사흘 안에 상황이 호전된다”는 더 구체적인 발언이 적혀 있다. 양쪽의 기록이 미묘하게 갈리는데, 오늘날 대중서·기념물이 채택하는 쪽은 주로 책형설이지만 둘 중 무엇이 맞는지 확신할 근거는 없다.7
2-3. 인물은 실존, 디테일은 각색
이 일화에서 실제로 확인되는 부분은 분명하다. 스네에몬이라는 인물이 실재했고 원군 요청을 위해 성을 탈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붙잡혀 다케다군에 의해 처형된 것 자체는 계통이 다른 여러 사료가 공통적으로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가 소장한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츠구 배기」라는 물증이 있다. 책형에 처해진 스네에몬을 그린 하타사시모노(旗指物, 등에 꽂는 깃발)로, 16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며 화살·탄환 자국과 혈흔으로 보이는 얼룩까지 남아 있다.8
도쿄대 사료편찬소 준교수 가네코 히라쿠(金子拓)는 저서 『토리이 스네에몬: 이어지는 무사의 혼(鳥居強右衛門: 語り継がれる武士の魂)』(헤이본샤, 2018)에서 이 일화의 형성 과정을 자세하게 다뤘는데, 그는 “1차 사료는 확실하지 않으며 책형이라는 이야기도 최초기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9 여하튼 학계는 인물이 실재했고 처형됐다는 것까지는 인정한다. 대신 스네에몬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지에 관한 세부는 후대에 각색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스네에몬의 이야기는 1913년 국정교과서에 실려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나, 이후 교육 과정이 바뀌면서 전후에는 아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가 최후를 맞은 신시로시 아루미에는 지금도 책사(磔死)의 비와 목상이 남아 있으며 주변에 있는 JR이이다선의 역 이름도 “토리이역(鳥居駅)“이다.10

디테일이야 어찌됐든 스네에몬이 성 밖에서 목숨을 걸고 전한 이 소식이 나가시노성을 지켜냈고, 곧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성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3. 양측 전력과 포진 — 병력 수와 마방책
3-1. “3만8천 대 1만5천”은 정설이 아니다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약 3만8천(오다 3만, 도쿠가와 8천), 다케다군 약 1만5천이라는 숫자는 오늘날 가장 흔히 알려진 양측의 병력 규모다. 하지만 이 수치가 어느 1차 사료에서 직접 유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신초코키』는 병력 총수를 표기하는 방식 자체가 아예 달라서 사람 수가 아니라 개별 장비의 수를 기록하는 방식에 가깝다.11
다카야나기 미츠토시는 시타라가하라의 지형이 좁다는 점을 근거로 오다군 1만2천–1만3천, 도쿠가와군 4천–5천, 다케다군 8천–1만으로 한참 낮게 잡았다. 니시마타 후사오는 다케다군을 오히려 1만8천 정도로 높게 봤다. 히라야마 유는 철포 장비율을 기준으로 연합군 3만5천, 다케다군의 철포 장비율도 연합군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재검증 결과를 냈다.11 세 연구자의 재추정치는 서로 크게 엇갈리고 있는데, 기존의 3만8천 대 1만5천이라는 통설이 학계에서 합의된 수치는 아니라는 점만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자.
3-2. 마방책 — 3중 목책의 실체
렌고가와를 사이에 두고 연합군은 마방책(馬防柵) 뒤편에, 다케다군은 맞은편에 포진했다. 통설은 이 마방책을 “전장 약 2km, 3중으로 세워진 목책”으로 설명한다. 신시로시 향토사 자료에 따르면 실제 구조는 단순 목책이 아니라 마른 해자(空堀)→목책→토루가 결합된 복합 방어시설이었다. 이 “해자·목책·토루 3단 구조”라는 해석 자체도 시대고증가 나와 유미오(名和弓雄)가 고안한 복원 모델이 지역 사적지 안내에 채용된 것으로, 실제 유물이 발굴된 것은 아니고 후대 고증가의 가설이 정설처럼 유통되고 있는 것뿐이다.12 지금 시타라가하라 옛 전장에서 볼 수 있는 마방책도 지역 보존회가 이 가설에 기반하여 대략 5년에 한 번씩 새로 세우는 재현물이다.12

3-3. 사카이 타다츠구의 배후 기습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정면 대결에만 집중하지 않고 별동대도 편성했다.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가 이끄는 도쿠가와 측 궁·철포 정예 약 2천에 오다 측 철포 500정과 카네모리 나가치카 등 감독역을 더해 총 약 4천 규모였다. 이들은 5월 20일 밤 마츠야마고개를 넘어 도요가와를 은밀히 건너 다케다군 배후로 우회했다.13 사카이 타다츠구를 다룬 글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작전이 노부나가 본진의 군의에서 처음엔 질책당했다가 은밀히 재가받았다는 일화가 에도 중기의 일화집 『조잔키단(常山紀談)』에 전한다. 이 사료는 이야기를 극적으로 그려내는 2차 편찬물이라 적당히 걸러서 받아들여야 한다.13
3-4. 다케다군은 왜 결전을 강행했나
『고요군칸(甲陽軍鑑)』 계통 서술에 따르면 바바 노부하루·야마가타 마사카게 등 노신들은 대군을 상대로 철수를 진언했으나 나가사카 미츠켄을 비롯한 측근들이 결전론을 주장했고, 카츠요리는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다만 『고요군칸』은 오랫동안 위작·윤색 논란이 있어온 사료다. 노신 대 측근이라는 대립 구도 자체가 한 세대를 호령하던 다케다의 사천왕이 모두 살아 있는 상태에서 다케다군이 허망하게 패배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카츠요리에게 책임을 씌우고자 후대에 만들어진 서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14 확실한 것은 카츠요리가 나가시노성 포위를 지속하던 중 연합군 구원군이 다가오면서 퇴각과 결전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결전을 택했다는 결과뿐이다.
1575년 5월 21일 시타라가하라 전투 포진. 렌고가와를 사이에 두고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서쪽, 마방책 뒤)과 다케다군(동쪽)이 대치했다. 사카이 타다츠구 별동대가 남쪽으로 크게 우회해 도비노스야마 등 배후 성채를 기습하면서 협공이 완성됐다.
4. 시타라가하라 전투 경과
사료를 맞춰 보면 1575년 5월 21일 당일의 전개는 대략 이렇다. 시각은 자료마다 한두 시간씩 편차가 있어 폭을 두어 표기한다.
| 시각 | 전개 |
|---|---|
| 5/20 야간 | 사카이 타다츠구 별동대(약 4천), 마츠야마고개를 넘어 도요가와를 도하해 배후로 우회 |
| 5/21 새벽 | 별동대, 도비노스야마를 비롯한 다케다측 배후 성채 5곳을 일제 기습 |
| 5/21 오전 | 별동대, 도비노스야마 함락 — 나가시노성 포위망이 배후에서 붕괴 |
| 5/21 오전 6시경 | 시타라가하라 본전투 개시. 야마가타 마사카게 부대가 선봉으로 첫 돌격 |
| 오전~오후 2시경 | 다케다군, 약 8시간에 걸쳐 기마 돌격을 반복. 마방책에 저지되며 연합군 철포에 순차적으로 피해 |
| 오후 | 바바 노부하루·야마가타 마사카게·나이토 마사토요 등 중신 다수 전사, 카츠요리 총퇴각 결정 |
도비노스야마 배후 기습이 성공하면서 다케다군은 나가시노성 포위를 유지할 수도, 퇴로를 안전하게 확보할 수도 없는 상태에 놓였다. 이 협공 속에서 다케다군은 마방책을 넘지 못한 채 반복된 돌격으로 병력을 소진했다. 오후 들어 유력 중신들이 잇달아 전사하면서 전투력이 급격히 무너져 총퇴각으로 이어졌다.15 “정오 무렵 일시 소강됐다가 재개됐다”는 설도 있고, 오전부터 오후까지 쉼 없이 연속해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자료도 있다. 확실한 것은 이 8시간의 전투 결과, 다케다군은 전투력의 핵심이라 할 유력 중신 다수를 잃었다는 것이다.
5. 핵심 사건 A — “3단 사격” 전설의 성립과 실체
5-1. 당대 기록인 신초코키에 남아있는 것
나가시노 전투를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철포 3천 정을 3열로 나눠 교대로 재장전시키며 연속 사격해 다케다 기마군단을 전멸시켰다”는 이야기로, 이는 단순히 전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구시대의 정점이었던 다케다를 신시대의 정점인 오다 노부나가가 교체한다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대 기록인 『신초코키』 권8 「미카와 나가시노 전투 조」에는 이런 3단 사격 전술에 대한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원문에서 확인되는 것은 삿사 나리마사·마에다 토시이에 등 5명의 부교 지휘 아래 “철포 천 정 정도(鉄砲千挺計)“를 배치해 접근전을 벌였다는 기록과, 사카이 타다츠구의 별동대에 철포 500정이 배속됐다는 기록뿐이다.16
5-2. 최초 출전은 호안신초키, 정착시킨 것은 근대 육군
3열 교대 재장전이라는 전술을 처음 명문화한 문헌은 오제 호안(小瀬甫庵)이 쓴 통속 군담 『호안신초키』다. 나가시노 전투로부터 약 49년 뒤 성립한 이 책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천 정씩 사격을 가하되, 한 단씩 번갈아 번갈아 교대하며 쏘게 하라(千挺宛放ち懸け、一段宛立ち替はり立ち替はり打たすべし)“고 적었다.17 반면 『고요군칸』(다케다 가문 계열 군학서)에는 이런 구체적 교대사격 전술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 책은 주로 마방책 관련 방증으로만 인용될 뿐이다.
이 서술이 근대에 “3단 사격”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진 통설이 된 것은 1903년(메이지 36년) 육군 참모본부가 편찬한 『니혼센시(日本戦史)·나가시노야쿠(長篠役)』를 거치면서다. 이후 교과서와 통사류로 퍼져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정착됐다.17
5-3. 후지모토 마사유키의 부정론과 히라야마 유의 반론
이 통설에 처음 의문을 제기한 것은 후지모토 마사유키(藤本正行)다. 그는 1980년 논고 이래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PHP연구소, 2003) 등에서 부정론을 폈다. 첫째, 시타라가하라 전장이 평탄하지 않아 다케다군 전체가 철포대 전원의 사거리 안에 동시에 들어오기 어렵다. 둘째, “1천 명이 1m 간격으로 늘어서면 양끝 거리만 1km에 달하는데, 대체 누가 어떤 방법으로 3천 명에게 계속 일제사격 구령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라며 지휘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었다. 여기에 여러 가문에서 급조 편성된 혼성부대가 고도의 집단훈련을 요하는 교대사격을 해냈다고 볼 근거도 없다.18 스즈키 신야(鈴木眞哉)도 같은 입장에서 힘을 보탰다.
히라야마 유는 이를 반박했다. 손케이카쿠문고본의 “3천여 정” 기록을 근거로 철포 3천 정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봤다. 『호안신초키』의 “단(段)“도 “물리적으로 3개 열을 지어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격 준비가 끝난 순서대로 개별적으로 나서 쏘는 유동적 윤번 사격”으로 읽으면 반대파 학자들이 지적한 지형이나 지휘 통제로 인한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19
“3천 정을 정확히 3열로 나눠 기계적으로 교대 재장전하며 끊임없이 연속 사격했다”는 그림, 흔히 교과서 삽화나 대중매체에서 보이는 형태는 1차 사료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이 점에는 후지모토·스즈키·히라야마 모두 이견이 없다. 실제로는 마방책과 토루를 이용한 야전축성으로 기마 돌격을 저지한 뒤 여러 부대·개인 단위로 비동기적인 지속사격을 이어갔다고 보는 연구자가 지금은 더 많다. 다만 철포 총수(1,000~1,500정인지 3,000정인지)와 “단(段)“이 정확히 어떤 운용을 가리켰는지는 여전히 학자별로 이견이 남아 있어,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아직 완전히 합의된 정설이 없다.

6. 핵심 사건 B — 다케다 명장들의 전사와 손실 규모
6-1. “사천왕 전멸”이라는 오류
“다케다 사천왕”은 통상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春)·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나이토 마사토요(内藤昌豊)·고사카 마사노부(高坂昌信) 4인을 가리킨다. 이 중 바바·야마가타·나이토 3명이 나가시노에서 전사했다. 고사카 마사노부는 이 전투 당시 북시나노 가이즈성에서 우에스기에 대한 방비를 맡아 참전하지 않았다. 대신 적자인 고사카 마사즈미가 출진했다가 전사했다. 그러므로 “다케다 사천왕이 나가시노에서 전멸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고, 정확히는 4인 중 3인이 전사한 것이다.20
6-2. 전사자들의 마지막 — 사료가 갈리는 지점들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다케다군 좌익을 지휘하며 오전 11시경 첫 돌격에 나섰다가 격퇴당했다. 고야산 조쿄인의 『카이국 쿠요초(甲斐国供養帳)』에는 전사 시각이 오후 2시경으로 적혀 있는데, 이는 공격 도중이 아니라 퇴각 작전 중에 죽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신초코키』는 오다측이 확인한 전사자 명단 첫머리에 “야마가타 사부로효에(山県三郎兵衛)“를 명기했다. 오다 측이 그만큼 큰 전과로 쳤다는 말이다.21
바바 노부하루는 다케다 노부토라·신겐·카츠요리 3대를 섬긴 최고참 중신이다. 카츠요리의 퇴각을 확인한 뒤에도 후퇴하지 않고 추격하는 연합군을 저지하며 싸우다 전사했다. 『신초코키』는 적장임에도 이례적으로 “바바 미노노카미의 눈앞에서의 활약은 비할 데가 없었다(馬場美濃守手前の働き、比類なし)“고 기록했다.21 나이토 마사토요의 사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는 통속 서술이 있는가 하면, 『고요군칸』은 “이마가와 우지자네의 사자에게 살해당했다”는 색다른 전승을 전한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 판별할 수 있는 자료는 현재로서는 발견된 것이 없다.21 사나다 가문의 사나다 노부츠나·마사테루 형제도 함께 전사하는데, 이로 인해 사나다 가문의 가독은 삼남 사나다 마사유키가 잇게 된다.21
6-3. 다케다 가문의 정확한 전사자 수
『신초코키』는 “주요 무사와 잡병 약 1만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此外宗徒の侍雑兵一万計討死申)“고 적었다. 반면 제3자인 나라 고후쿠지의 승려 에이슌이 쓴 기록 『타몬인닛키(多聞院日記)』는 “가이 지역 무사 1천여 명이 전사했다(甲斐国衆千余人討死)“고 하니 10배 차이가 난다.22 『신초코키』는 오다측 전과를 부각하는 승자측 기록이라 과장 가능성이 있는 반면, 『타몬인닛키』는 교토·나라 지역에 전해진 풍문 기록이라는 정확도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두 기록 다 있는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전사자의 수가 1천이든 1만이든 관계없이 확실한 것은 있다. 이 전투에서 다케다 가문은 신겐 시대부터 가문을 지탱해온 최고참 세대의 상당수를 한꺼번에 잃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입은 피해에 비견될 만하다.
7. 전투 이후 — 다케다 가문의 몰락 과정
7-1. 패전 직후 카츠요리의 재기 시도
패전 직후 카츠요리는 수백 명 남짓한 호위만을 데리고 퇴각해 부세츠성에 몸을 의탁했다가 시나노 다카토성으로 물러났다. 6월 2일에는 본거지인 고후로 귀환했다. 다케다 세력은 곧바로 무너지지 않았다. 전후에도 일부 방면에서 영토를 넓히려는 시도를 이어갔고 1581년에는 새 거성인 신푸성 축성에 착수했다.23 나가시노에서 패배한 후 다케다가 그대로 망했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 할 수 있다.
7-2. 나가시노 패전 후 7년에 걸친 붕괴
다케다 가문 멸망까지의 실제 과정은 나가시노 전투 하루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후 약 7년간 쌓인 외교·군사적 실책과 이반이 겹친 결과였다.
| 시기 | 사건 | 함의 |
|---|---|---|
| 1578.3~1580 | 우에스기 겐신 급사 후 벌어진 오타테의 난에 개입 | 우에스기 가게카츠를 지지하며 호조가 지지하는 후보 가게토라와는 대립 구도 형성 |
| 1579.7 | 갑상동맹(다케다-호조) 파탄 | 동쪽 호조, 서쪽 오다-도쿠가와 사이 양면 협공 구도에 놓임 |
| 1581.3 | 고텐진성 함락 (성주 오카베 모토노부 이하 옥쇄) | 카츠요리가 구원을 보내지 않아 스루가 방면 고쿠진들의 신뢰 실추 |
| 1581 | 신푸성 축성 착수 | 이미 피폐해진 영지·가신단에 추가 부담, 미완성으로 종료 |
| 1582.1~2 | 기소 요시마사 이반 | 오다-도쿠가와-호조의 카이(甲斐, 옛 지명 고슈甲州) 정벌 개시의 빌미, 방어선 급속 붕괴 |
| 1582.3 | 아나야마 바이세츠·오야마다 노부시게 이반 | 카츠요리의 퇴로가 완전히 끊김 |
| 1582.3.11 | 텐모쿠잔에서 카츠요리·적자 노부카츠 자결 | 다케다씨 멸망 |
히라야마 유는 저서 『다케다씨 멸망(武田氏滅亡)』(가도카와선서)에서 카츠요리를 “암우한 패장”으로 단순화하는 통속적 서사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가 보기에 카츠요리는 나가시노 이후에도 상당한 군사·외교 노력을 기울였다. 오타테의 난 개입에 따른 외교 고립, 고텐진성 구원 실패에 따른 구심력 약화, 신푸성 축성에 따른 내부 불만, 1582년 초 잇따른 유력 가신 이반이라는 최소 네 갈래가 겹쳐 무너졌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24 나가시노 전투는 이 장기 붕괴의 결정타가 아니라 발단이었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중론에 가깝다.
8. 군사사적 의의
8-1. “화력 혁명”이라는 이미지는 언제 만들어졌나
“나가시노 전투 = 철포에 의한 전술 혁명”이라는 해석 틀은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1624년 『호안신초키』가 3단 사격의 원형을 처음 문자화했고, 1903년 육군 참모본부의 『니혼센시(日本戦史)·나가시노야쿠(長篠役)』가 이를 근대적 전술 개념으로 재구성해 교과서에 실었다. 이후 시바 료타로 등의 대중소설·영상매체가 “철포 일제사격이 기마군단을 전멸시켰다”는 극적인 이미지를 반복 재생산하며 대중적으로 굳어졌다. 도쿄대 사료편찬소 가네코 히라쿠는 『나가시노 합전의 사료학(長篠合戦の史料学)』(벤세이샤, 2015)과 후속작 『나가시노 합전 철포전의 허상과 실상(長篠合戦 鉄砲戦の虚像と実像)』(주오코론신샤, 2023)에서 이 형성 과정 전체를 사료학적으로 추적해, “합전의 기억”이 성립 시기별로 어떻게 층을 이루며 구성됐는지를 검증했다.25
8-2. 화력 우위론에서 병참 우위론으로
최근 연구는 설명의 축 자체를 옮기고 있다. 히라야마 유는 나가시노 전적지 출토 납탄을 화학·동위원소 분석한 결과, 오다-도쿠가와 측 탄환에서 사카이(堺)를 통해 들어온 태국산 납 등 해외 조달 경로를 확인했다(NHK 「역사탐정(歴史探偵)」, 2021년 소개). 납탄 분석은 병참·자원 우위론을 뒷받침한다. 다케다군도 철포를 상당수 보유했지만 탄약 원료 조달망에서는 사카이를 지배한 오다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는 설명이다.26 이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단순한 화력 격차가 아니라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동원력과 경제력의 격차였다. 학계의 설명은 그쪽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9. 나가며
3천 정의 철포도, 기계적인 3단 사격도, 이를 향해 무모하게 돌격하던 다케다 기마군단의 순식간의 전멸도 사료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신화적인 장면이 없었다고 해서 나가시노 전투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나 군사학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쿠다이라 사다마사가 지킨 나가시노성, 도리이 스네에몬이 목숨을 걸고 전한 원군 소식, 렌고가와를 따라 세운 야전축성, 사카이 타다츠구의 배후 기습이 맞물린 전후방 포위 협공. 그 결과 신겐 시대부터 다케다 가문을 지탱해온 노신 세대가 하루 사이에 대거 스러졌다. 물론 앞서 살펴봤듯 이날의 패배가 곧바로 다케다의 멸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후 7년간 카츠요리가 겪은 외교적인 고립과 가신단의 이반이 여기서 시작됐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출처
1차·준1차 사료
- 『信長公記』(太田牛一) — 나가시노 전투 당대 기록. 필사본 계통(건쿤신사본·이케다가문고본·손케이카쿠문고본)에 따라 철포 수량 기술이 다름
- 『甫庵信長記』(小瀬甫庵, 1624년 간행) — “3단 사격” 서술의 최초 출전
- 『三河物語』(大久保忠教, 1626년경 성립) — 도리이 스네에몬 일화의 초기 출전 중 하나
- 『甲陽軍鑑』(다케다 가문 계열 군학서, 신뢰도 논쟁 있음) — 다케다측 군의·마방책 관련 방증
- 『多聞院日記』(英俊, 나라 고후쿠지) — 다케다측 전사자를 “1천여 명”으로 기록한 제3자 기록
- 『甲斐国供養帳』(고야산 조쿄인) — 전사자 공양 명단, 야마가타 마사카게 전사 시각 기록
- 「落合左平次道次背旗(鳥居強右衛門磔図)」—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소장 도상 사료
현대 연구자
- 藤本正行, 『長篠の戦い』(PHP研究所, 2003) 외 — 3단 사격 부정론의 선구
- 鈴木眞哉, 『鉄砲隊と騎馬軍団』(洋泉社, 2003) — 다케다 기마대 신화 비판
- 平山優, 『検証 長篠合戦』(吉川弘文館, 2014)・『武田氏滅亡』(角川選書) — 병력·병참 재검증, 다케다 몰락 과정 재평가
- 金子拓, 『鳥居強右衛門: 語り継がれる武士の魂』(平凡社, 2018)・『長篠合戦の史料学』(勉誠社, 2015)・『長篠合戦 鉄砲戦の虚像と実像』(中央公論新社, 2023) — 통설 형성사 검증
- 磯田道史 — 平山優, 『敗者の日本史9 長篠合戦と武田勝頼』(吉川弘文館) 서평 — 히라야마 저서 논지 확인
공식·표준 참고자료
- 신시로시(新城市)·아이치현·츠루오카시(鶴岡市)·히가시미카와(東三河) 지역 공식 관광·문화재 페이지 — 나가시노성터·마방책·시타라가하라 전적지·도비노스야마 기습로
-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 — 『信長公記』 판본 서지
- 도쿄대학(東京大学) 공식 발표·BiblioPlaza — 落合左平次道次背旗 기탁, 金子拓 저서 소개
- 일본어 위키백과 각 「長篠の戦い」・「長篠城」・「鳥居強右衛門」・「奥平信昌」・「おふう」・「山県昌景」・「馬場信春」・「内藤昌豊」・「高坂昌信」・「新府城」・「御館の乱」・「高天神城の戦い」・「甲州征伐」・「鈴木眞哉」・「平山優 (歴史学者)」 항목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D, 개별 각주에 표시)
- senjp.com, 戦国ヒストリー(sengoku-his.com), JBpress, 東洋経済オンライン, PRESIDENT Online, 歴史街道(rekishikaido.php.co.jp), アゴラ(agora-web.jp), 気ままに江戸♪, ホームメイト(touken-world.jp), Bushoo!Japan, daitakuji.jp(사찰 현지 고증), サライ.jp, 戦国史跡巡り(sengokushiseki.com), デジタル城下町(note), えびけんの積読・乱読(note, 三河物語 원문 대조), ALL REVIEWS,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渡邊大門·原田ゆきひろ 기고), sengokumap.net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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渡邊大門, 「自らの死を三年間秘密にした武田信玄」,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일본어 위키백과 「高天神城の戦い」・「武田勝頼」 항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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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高天神城の戦い」 항목; ホームメイト touken-world.jp 「武田勝頼の歴史」・「第一次高天神城の戦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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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長篠城」・「奥平信昌」 항목; 신시로시(新城市) 공식 「長篠・設楽原の戦い」; 歴史街道(rekishikaido.php.co.jp) 「奥平信昌」. ↩ ↩2
-
Bushoo!Japan 「奥平信昌の生涯」; 「仙千代の処刑と墓② そして顕彰碑の誤り」(daitakuji.jp, 현지 사찰 고증); 일본어 위키백과 「おふう」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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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長篠の戦い」・「長篠城」 항목(각주에 信長公記・甲陽軍鑑・三河物語・徳川実紀 서지 명시); 아이치현(愛知県) 공식 「長篠・設楽原決戦場跡」; JBpress 「織田・徳川連合軍と武田の戦い」.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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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鳥居強右衛門」 항목(信長公記에 기술 없음을 각주와 함께 명시); 渡邊大門, 「長篠の戦いで磔になった鳥居強右衛門は、なぜ犠牲になったのだろうか」,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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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鳥居強右衛門を『三河物語』から読む」(えびけんの積読・乱読, 三河物語 원문 대조 시도); 일본어 위키백과 「鳥居強右衛門」 항목(甫庵信長記・三河物語 서술 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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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料編纂所所蔵『落合左平次道次背旗』の寄託」, 東京大学 공식; 신시로시 공식 「鳥居強右衛門磔図 — 設楽原歴史資料館 名品10選」. ↩
-
「鳥居強右衛門: 語り継がれる武士の魂」(金子拓), UTokyo BiblioPlaza 소개; 平凡社 서적 소개 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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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로시 공식 「鳥居強右衛門」; サライ.jp 「戦国版”走れメロス”鳥居強右衛門の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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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Bpress 「なぜ信長は鉄砲隊を千挺しか配置しなかったのか」・「長篠合戦の主役は織田軍の鉄砲隊ではなかった?」(西股総生); PRESIDENT Online 「武田勝頼は鉄砲をナメていたから負けたのではない」(平山優 저서 요약); 吉川弘文館 『検証 長篠合戦』 서지.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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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로시 공식 「馬防柵」; 「長篠合戦の馬防柵は堀と土塁もセットだった!」(戦国史跡巡り, 名和弓雄式 복원 모델 출처).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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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루오카시(鶴岡市) 공식 「長篠・設楽原決戦場跡/鳶ヶ巣山砦跡」(常山紀談 일화 및 병력 편성); 히가시미카와(東三河) 지역 관광 공식 「連合軍鳶ヶ巣山砦奇襲攻撃コース」.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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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Bpress 「武田勝頼はなぜ、長篠合戦で織田・徳川連合軍に挑み、敗れたのか?」; 일본어 위키백과 「平山優 (歴史学者)」 항목(나가사카 초칸 수신자 재검증); ALL REVIEWS 「長篠合戦と武田勝頼」 磯田道史 서평. ↩
-
senjp.com 「長篠の戦い(設楽原の戦い)の解説と考察」; 츠루오카시 공식, 前掲. ↩
-
sengokumap.net 「三州長篠御合戦之事」(信長公記 원문 소재); 「三千挺の鉄砲による三段撃ちは史実か」(気ままに江戸♪, 필사본 계통 정리);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 「『信長公記』を原本に近いもので見たい」. ↩
-
東洋経済オンライン 「家康と信長が圧勝「長篠の戦い」今も残る大きな謎」(甫庵信長記 원문 인용 및 日本戦史 성립 경위); 戦国ヒストリー(sengoku-his.com) 「鉄砲三段撃ちはウソ!?長篠の戦いの真実とは」. ↩ ↩2
-
アゴラ 「大河ドラマ『どうする家康』解説③:鉄砲3段撃ちはあったか」(藤本正行 논거 인용); 일본어 위키백과 「鈴木眞哉」 항목. ↩
-
平山優, 『敗者の日本史9 武田勝頼と長篠合戦』(吉川弘文館, 2014) 논지 요약(mixi 日記 경유 재인용, 원저 대조 권장); 「三千挺の鉄砲による三段撃ちは史実か」, 前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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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山県昌景」・「馬場信春」・「内藤昌豊」・「高坂昌信」 항목; 「拙者の履歴書 Vol.249〜海津に二十年、行かざりし長篠〜」(デジタル城下町, 고사카 마사노부 불참 관련). ↩
-
『信長公記』(Wikisource 전사본) 巻八 전사자 명단·바바 노부하루 평; 고야산 조쿄인 『甲斐国供養帳』(渡邊大門 기고 경유 재인용); 戦国ヒストリー 「内藤昌秀(昌豊)」・「真田信綱・昌輝兄弟」. ↩ ↩2 ↩3 ↩4
-
『信長公記』(Wikisource) 巻八; 『多聞院日記』(2차 해설 경유 재인용); PRESIDENT Online 「「大量の鉄砲が武田の騎馬隊を蹴散らした」はウソであ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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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新府城」 항목;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長篠の敗戦を巻き返せ!実は合戦後に領土を広げ、盛り返しを目指し続けた武田勝頼」(原田ゆきひ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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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DOKAWA 『武田氏滅亡』(平山優) 서지; ALL REVIEWS 磯田道史 서평, 前掲; 일본어 위키백과 「御館の乱」・「高天神城の戦い」・「甲州征伐」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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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大学 BiblioPlaza 「長篠合戦の史料学」; 中央公論新社 「長篠合戦 鉄砲戦の虚像と実像」 서지 소개. ↩
-
歴史街道(PHP) 「武田軍も鉄砲を使っていた?『鉛の研究』で見えた長篠合戦の新事実」; NHK「歴史探偵」(2021) 소개 내용(2차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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