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 소린(大友宗麟, 1530–1587) — 시마즈에 밀려 규슈 패권을 놓친 크리스천 다이묘
Q: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은 누구인가?
A: 분고(豊後, 지금의 오이타현)를 근거지로 규슈 북부에서 세력을 넓힌 센고쿠(戦国) 다이묘(大名)다. 본명은 요시시게(義鎮)이고, 1562년 출가한 뒤부터는 소린(宗麟)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550년 니카이쿠즈레의 변(二階崩れの変)으로 아버지 요시아키(義鑑)를 잃은 그는 21세에 가독(家督, 가문 당주의 지위)을 이었다. 막부로부터 분고 외에 히젠(肥前)·부젠(豊前)·치쿠젠(筑前) 슈고(守護, 막부가 임명한 지방 장관)를 받고 규슈탄다이(九州探題, 규슈 지역을 관할하는 막부 직책)에 올라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와 북규슈를 두고 싸웠다. 무역항 후나이(府内)를 통해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를 받아들였고 1578년 세례를 받았다. 같은 해 당주를 이어 받은 요시무네의 주도 하에 휴가(日向)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으나 미미카와 전투(耳川の戦い)에서 시마즈(島津) 가문에게 대패하면서 가문이 흔들렸다. 이에 오토모 소린은 1586년 직접 오사카성(大坂城)을 찾아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구원을 청했고, 1587년 히데요시의 규슈 원정이 진행되던 중에 츠쿠미(津久見)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눈에 보는 오토모 소린
| 항목 | 내용 |
|---|---|
| 이름 |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출가 후 사용 소린(宗麟). 세례명 프란시스코(돈 프란시스코) |
| 날짜 | 이 글의 일본 측 월일은 음력이다. 서양 역법과 어긋나는 곳은 병기한다 |
| 생몰 | 1530년(교로쿠 3년) – 1587년 5월 23일(서양 6월 28일). 향년 58세(세는 나이) |
| 가문 | 분고 오토모 가문(大友氏) 21대 당주(当主). 아버지 요시아키(義鑑), 아들 요시무네(義統) |
| 관위·직 | 규슈탄다이(九州探題, 1559),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 1560),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의 쇼반슈(相伴衆, 1563) |
| 영역 | 분고를 중심으로 히젠(肥前)·부젠(豊前)·치쿠젠(筑前) 슈고 보임. 치쿠고(筑後)와 히고(肥後)는 소린 이전부터 확보 |
| 대외 | 명·캄보디아·포르투갈령 인도와 서한 교환. 명과의 감합(勘合, 무역 허가증)은 얻지 못함 |
| 종교 | 선종(禅宗) 신자로 1562년 출가해 사찰을 후원했다. 1578년 우스키(臼杵)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세례 직전인 5~6월에도 전통 기도 답례장을 썼다 |
| 최대 패전 | 1578년 11월 12일(서양 12월 10일) 다카조(高城) 부근 다카조가와라(高城川原) 결전(통칭 미미카와 전투) |
| 최후 | 1586년 오사카성(大坂城) 알현, 같은 해 12월 헤츠기가와(戸次川) 패전과 후나이(府内) 함락, 1587년 5월 츠쿠미(津久見)에서 사망 |
| 통설 vs 재검증 | ”기독교 왕국 건설을 꿈꾼 광신자”는 예수회 선교사 프로이스의 서한 한 갈래에 기댄 이미지이고, 일본 측 문서는 이 구상을 직접 확인해 주지 않는다 |
오토모 소린은 흔히 이런 인물로 기억된다. 요시시게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선종 승려에게 출가해 소린이라는 이름을 쓰다가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신사와 절을 불태우고 신자를 위한 도시를 세우려다 미미카와에서 무너졌다는 이야기다. 이 인상은 주로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의 서한과 『일본사』에서 나왔고, 여기에 에도 시대(江戸時代)에 쓰인 전쟁 이야기책들이 교훈적인 줄거리를 보탰다.
하지만 동시대 문서와 서한을 함께 보면 다른 모습도 드러난다. 소린은 20년 가까이 북규슈를 두고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와 싸운 정치가였고, 명과 동남아, 포르투갈을 상대로 무역과 외교를 벌인 사람이었다. 세례를 받기 몇 주 전까지 신사에 승전을 빌었고, 선종 승려에게서 법명(法名)을 받은 출가자이기도 했다. 이 글은 이 두 모습이 사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가려 보고, 그가 실제로 무엇을 하려 했는지 따라간다.
1. 니카이쿠즈레의 변과 당주 계승
1-1. 후나이의 적남
소린은 1530년 분고 후나이(府内, 지금의 오이타현 오이타시)에서 오토모 가문의 20대 당주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아명은 시오호시마루(塩法師丸)였으며,1 1540년 2월 겐푸쿠(元服, 성인식)를 치르면서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의 이름 한 글자를 받아 요시시게(義鎮)가 되었다.2 “소린”이라는 이름은 1562년 출가한 뒤부터 사용한 것이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어린 시절까지 소린으로 통일한다.
생일은 1월 3일설과 5월 4일설로 갈리고,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확정할 수 없다. 교토의 공가(公家, 귀족 가문)인 보조(坊城) 가문의 딸이라는 설과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의 딸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느 쪽도 동시대 문서로 뒷받침되지 않는다.2 동생 하루히데(晴英)는 나중에 오우치 가문을 잇고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가 되는데, 소린과 어머니가 같은지 다른지도 학설이 갈린다.3 이름이 자주 함께 나오는 기쿠치 요시타케(菊池義武)는 형제가 아니라 아버지 요시아키의 동생, 즉 숙부다.3
1-2. 1550년 2월 10일, 오토모관의 변
1550년 2월 10일 후나이의 오토모관(大友館)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관의 2층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니카이쿠즈레(二階崩れ, 2층이 무너졌다는 의미)의 변이라 부른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정리된 사건의 경위부터 살펴보자.4
요시아키가 후계자로 내정돼 있던 적자 소린을 폐하고 셋째 아들인 시오이치마루(塩市丸)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고, 이로 인해 오토모의 가신단이 두 파로 갈렸다. 그러던 중 소린을 지지하던 중신 두 사람이 오토모관으로 가던 길에 살해되었고, 이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소린 지지파의 다른 두 중신이 오토모관 2층에서 자고 있던 요시아키와 시오이치마루, 그리고 그의 생모를 습격했다. 시오이치마루와 생모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요시아키는 부상을 입고 며칠 뒤 숨졌다. 사건 후 소린은 중신들에게 추대되어 21대 당주가 되었다.
이 사건의 계기는 오토모 요시아키가 셋째로 후계를 바꾸려 한 것인데, 그 계기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사료로 확인할 수 없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주석에는 소린의 생모가 오우치 가문과 연결돼 있어 가신단 내의 오우치 세력을 몰아내려는 계획이었다는 설이 소개돼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제시되지 않아 추정으로 봐야 한다.4
이 경위는 『구주치란기(九州治乱記)』, 『오토모키(大友記)』, 『분고란키(豊後乱記)』, 『오토모코하이키(大友興廃記)』 같은 에도 시대 책들에 실린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4 이 책들의 서술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는 이번 조사에서 원문으로 대조하지 못했다. 동시대 문서 가운데 사건을 직접 서술한 것도 확인하지 못했다.
소린이 이 사건 뒤에서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자주 보이지만 소린의 직접 가담을 학술적으로 논증한 글은 찾지 못했다.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550년 2월 오토모관에서 아버지 요시아키가 죽었고 소린이 21세에 뒤를 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가독 승계를 그가 기획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1-3. 당주 초기의 위기와 수습
당주가 된 직후 소린이 처음 마주친 것은 가문 밖에 있던 숙부의 위협이었다. 히고의 기쿠치 요시타케는 아버지 요시아키의 동생으로, 소린의 할아버지 오토모 요시나가(大友義長)가 기쿠치 가문의 후계로 점찍어 두었다가 1520년 그 가문의 당주가 된 인물이다. 그러나 1534년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사가라(相良) 가문과 손잡고 형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해 구마모토성(隈本城)에서도 밀려났다. 소린이 가독을 잇자 그는 곧 이 성을 되찾고 히고와 치쿠고 남부의 고쿠진(国人, 재지 영주)과 연합하려 했다. 소린은 영지 내부를 서둘러 수습하고 대군을 보내 구마모토성을 되찾았고, 요시타케는 시마바라로 달아나버렸다.3
소린의 초기 정권은 이후에도 흔들렸다. 1553년에는 핫토리 우쿄노스케(服部右京亮) 등의 암살 계획이 발각되었고, 1556년에는 오하라 아키모토(小原鑑元)의 모반이 일어났다.5 이 모반 진압에는 벳키 아키츠라(戸次鑑連)라는 가신도 나섰다. 그는 뒷날 타치바나 도세츠(立花道雪)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는 무장이고, 그의 딸 이야기는 타치바나 긴치요 편에서 다뤘다.
2. 6개국 체제와 북규슈 쟁탈
2-1. 슈고직 보임 시기와 문서
오토모 소린을 “6개국의 주인”이라 부르다 보니 그가 한꺼번에 6개국을 얻었다는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 나라 | 문서로 확인되는 것 |
|---|---|
| 분고 | 오토모 가문이 대대로 세습 |
| 치쿠고 | 1465년 쇼군이 오토모 가문을 치쿠고 전체의 슈고로 보임한 문서가 있고, 요시아키·소린 대의 별도 보임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
| 히고 | 1543년 5월 7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가 요시아키를 히고 슈고로 보임한 문서가 있다. 요시아키가 막부에 청원했다는 경위는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 |
| 히젠 | 1554년 8월 16일 쇼군 요시테루가 소린을 히젠 슈고로 보임한 문서가 있다 |
| 부젠·치쿠젠 | 1559년 6월 26일 쇼군 요시테루가 두 나라를 각각 별도 문서로 보임했다 |
| 규슈탄다이 | 1559년 11월 9일 쇼군의 서장 두 통이 “규슈탄다이직과 오우치 가독”을 함께 언급한다. 구로시마 사토시(黒嶋敏)는 보임이 아니라 계승을 인정한 것으로 읽는다 |
이 표는 쇼군이 발급한 문서를 기준으로 했다. 도쿄대 사료편찬소가 공개한 타치바나가사료관(立花家史料館) 소장 오토모가문서(大友家文書)의 이미지와 시료소란(史料綜覧)의 항목으로 확인했고, 슈고 보임은 쇼군이 직접 서명해 내리는 고한노미교쇼(御判御教書)로 이뤄진다.6 일본어 위키백과 몬지성 항목에는 1559년 6월 26일에 치쿠고도 함께 받았다고 되어 있지만, 이 서술은 지방사 책에 기댄 것이고 확인되는 문서에는 부젠과 치쿠젠 두 곳뿐이다. 기무라 다다오는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항목에서 1557년 오우치 요시나가 사후 부젠·치쿠젠·히젠을 제압하고 옛 영지와 합쳐 6개국을 손에 넣었다고 실효 지배와 보임을 묶어 서술한다. 문서로 정리하면 분고·치쿠고·히고는 소린 이전부터 오토모 가문의 것이었고, 소린 대에 히젠(1554)과 부젠·치쿠젠(1559)이 더해졌다.
또 이 보임은 쇼군, 즉 막부가 한 것이다. 조정 관위와 슈고직을 섞어 쓰는 글이 많은데 이 둘은 엄연히 다른 계통의 제도다. 소린은 1560년 조정으로부터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의 관위를 받았고, 1563년에는 쇼군 요시테루의 쇼반슈(相伴衆)가 되었다.7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1559년의 슈고와 탄다이의 지위를 얻은 것이 막대한 헌금 공작의 결과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시기 오토모 가문이 쇼군에게 바친 돈으로 확인되는 것은 1558년 윤6월 쇼군이 즉위 비용(御即位要脚)을 보내 준 데 감사한 서장 정도이고, 이것이 슈고·탄다이 보임으로 이어졌다는 근거는 없다.7
2-2. 모리 모토나리와 20년
소린의 북규슈 정책은 서쪽의 오우치 가문 처리에서 시작해 모리 모토나리와의 충돌로 이어진다. 1551년 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 스에 하루카타(陶晴賢)의 쿠데타로 자결하자, 스에 하루카타는 소린의 동생인 오토모 하루히데를 오우치 당주로 맞았다. 이 동생이 이름을 바꾼 것이 오우치 요시나가다.8 이후 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모리가 스에를 꺾었고, 1557년 4월에는 모리에게 몰린 오우치 요시나가가 자결했다. 그 사이 소린은 위기에 몰린 동생을 구하러 가지 않았다.
그해 5월 소린이 모토나리에게 보낸 서장이 『하기한 바츠에츠로쿠(萩藩閥閲録)』에 실려 전해지고, 일본어 위키백과 ‘몬지성 전투’ 항목에도 인용되어 있다. 오우치의 북규슈 영지를 오토모가 물려받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취지이고, 동생 쪽의 가세 요청이 간곡했으나 모토나리와 맺은 약속 때문에 돕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내용이다.9 이 서장을 보면 소린은 동생의 죽음을 방관하고 북규슈의 영지를 챙기는 쪽을 택했다. 다른 가문의 대를 이은 혈연의 안위보다는 규슈에서 오토모의 지위를 확보하는 일이 먼저였던 것이다.
혈연의 죽음까지 불사하며 모리 모토나리와의 약속을 지켰으니 오우치 가문의 영토에 대해 권리를 얻게 될 거라고 생각한 오토모 소린이었지만, 모리 모토나리는 북규슈의 오우치 영토를 그대로 오토모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곧 두 가문 사이에 몬지성(門司城)을 두고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몬지성은 지금의 기타큐슈시 몬지구에 있던 성으로, 혼슈와 규슈 사이의 간몬 해협(関門海峡)과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제해권을 가질 수 있는 요충지였다. 1558년 모리가 몬지성을 공략했고, 오토모가 재탈환했으며, 1560년 12월 모리가 기습으로 되찾았다. 1561년 오토모군이 몬지성을 공략했지만 실패했다.9 몬지성 전투들의 상세한 내용이나 병력의 수는 책마다 달라 숫자를 신뢰하기 어렵고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9
몬지성 패전 이듬해인 1562년 소린은 출가했다. 아쿠타가와 다쓰오는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항목에서 이해에 다이토쿠지(大徳寺) 계 승려 이운(怡雲宗悦, 1518–1589)에게 삭발해 즈이호 소린(瑞峯宗麟)이 되었다고 썼다.10 문서상으로는 6월 15일부터 서명에 소린을 쓰기 시작했고 10월 17일부터 소린으로 통일했다.11 패전이 출가의 계기였다는 이야기가 위키백과에도 있지만 사료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점이 몬지성을 빼앗긴 이후인 것은 분명하다. 법명은 사전마다 즈이호 소린(瑞峯宗麟)과 큐안 소린(休庵宗麟)으로 갈리는데, 후자는 사후에 불교식으로 붙이는 이름인 카이묘(戒名)에도 나온다.10
모리와의 싸움은 전장에서의 흐름이 여의치 않은 경우 쇼군에게 호소하는 외교적인 해결 방법도 동원됐다. 1562년 1월 소린은 쇼군 요시테루에게 모리가 도리에 어긋나는 악행(悪逆非道)을 저지르고 있다고 호소했다. 쇼군은 쇼고인(聖護院) 사찰의 승려 도조(道増)를 보내 두 가문 사이를 중재하게 했다. 그 뒤에도 교섭이 이어져 1564년 7월 25일 소린이 모리 측 세 사람에게 기청문(起請文, 신과 부처에게 맹세하는 서약서)을 보냈고 이틀 뒤 모리 측 기청문이 돌아와 화의가 성립했다. 모리는 몬지성을 뺀 마츠야마·가와라다케 등 성을 포기했다.9 화의 성립 시점이 1562년으로 된 연표도 있어 시점이 둘로 갈린다. 여기서는 위키백과의 상세 서술을 따랐다.
화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카하시 아키타네(高橋鑑種), 츠쿠시(筑紫)와 아키즈키(秋月), 타치바나 아키토시(立花鑑載) 같은 북규슈의 토착 영주들이 1565년 이후 모리 측으로 돌아섰다. 1567년 9월에는 아키즈키 다네자네가 오토모군을 야습해 무너뜨렸고(야스미마츠 야습), 1569년에는 모리의 깃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와 고바야카와 타카카게가 타치바나야마성을 공격했다.12 이때 소린 진영은 모리 영내의 후방을 흔들 수단으로 오우치 테루히로(大内輝弘)를 스오에 상륙시켰고, 모리군은 그해 10월 무렵 북규슈에서 물러났다.12 『세계대백과사전』에는 1570년(겐키 1)에 소린이 모리와 화해(和睦)했다고 나와 있다.13 1564년 화의가 깨져 싸움이 되풀이되다가 1569년 모리군이 북규슈에서 물러난 뒤 두 번째 화해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2-3. 정무와 군사를 나눈 중신들
1551년부터 1570년까지 모리와 얽힌 이 20년 동안 오토모 가문을 지탱한 주요 가신들의 구성은 자료마다 다르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요시오카 나가마스(吉岡長増) 항목에 따르면 정무를 맡은 나가마스와 우스키 아키하야(臼杵鑑速)를 “부슈 이로(豊州二老)“라 하고, 군사 방면에서 벳키 아키츠라(타치바나 도세츠), 우스키 아키하야, 요시히로 아키마사(吉弘鑑理)14 세 사람을 “분고 삼로(豊後三老)“라 부른다.15
소린은 중앙에는 오토모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서가, 庶家) 출신들을 토시요리(年寄, 가문의 중신)의 자리에 앉혀 행정을 맡겼다. 반면 새로 넓힌 영지에는 성의 책임자인 조카쿠(城督)를 임명해 지역 군사·행정권을 모두 부여했다.6 앞서 다룬 타치바나 긴치요의 아버지가 치쿠젠 타치바나야마성의 조카쿠였던 것도 이 제도의 한 사례다.
3. 후나이의 항구와 아시아 외교
3-1. 나가사키보다 20년 앞선 남만 무역항
오이타시 공식 소개에 따르면 후나이는 프란시스코 자비에르의 방문(1551) 뒤 소린이 포르투갈 국왕에게 사절을 보내면서 남만 무역항이 되었다. 1552년 이후 포르투갈인 선교사와 상인이 이곳을 드나들었고 무역은 오키노하마(沖の浜)라는 해안에서 이뤄졌다. 나가사키 개항보다 약 20년 이르다는 설명이다. 수입품은 화약 원료인 초석과 납, 생사, 향료, 유리, 시계이고 수출품은 은과 유황이었다.16
자비에르 본인도 서간에 이 첫 접촉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1552년 1월 29일 코친에서 쓴 서간에서 그는 “분고의 왕”이 포르투갈 왕에게 벗의 반열에 넣어 달라는 편지와 함께 값진 갑옷 한 벌을 보냈고, 인도 총독에게도 사절을 보냈다고 적었다.16 왕의 이름은 자비에르의 서간에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 않지만 다른 사료와 맞춰 보면 오토모 소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린이 이어서 둔 외교의 한 수는 국가 간의 우호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후나이가 실제로 어떤 도시였는지는 발굴 성과로 알 수 있다. 국가 사적 오토모 가문 유적(2001년 지정)에서는 오토모관의 15–16세기 정원 유구와 명·동남아산 무역 도자기, 기리시탄 유물인 콘타츠(묵주)와 메달이 출토되었다. 도자기 다수에 불탄 흔적이 있어 1586년 시마즈의 후나이 소각과 맞아떨어진다고 한다.17
소린이 서양 무역에서 무엇을 원했는지는 그 자신의 서한에 남아 있다. 1567년 그는 중국에 체류하던 예수회 주교 카르네이루(Melchior Carneiro)에게, 자신이 야마구치의 왕(모리 모토나리)에게 승리하기를 바라는 이유 하나는 신부들을 더 후한 보호와 함께 그 땅에 돌려보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좋은 초석 열 피쿠를 포르투갈 선단 사령관이 해마다 가져오라고, 대가는 100타엘이라고 요구했다. 이 서한은 간다 센리가 예수회 일본 보고집에서 인용한 문장으로 확인했다.18 앞서 이야기했듯 초석은 화약의 원료다. 소린은 모리를 이기면 선교사들을 보호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모리와의 전쟁에 쓸 화약 원료를 포르투갈 쪽에서 들여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3-2. 명·캄보디아·포르투갈과 오간 서한
소린의 외교 상대는 포르투갈만이 아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명세종실록(明世宗実録)』을 인용해 1557년의 사정이 정리되어 있다. 소린은 왜구 단속을 요구하러 온 명의 사절 장주(蔣洲)가 귀국할 때 자기 배로 저장성(浙江省)까지 호송하며, 그 편에 감합(勘合, 무역 허가증) 발급을 요청했다. 명의 절직총독 호종헌(胡宗憲)은 소린의 사자가 감합이 없다고 보고하면서도 사자를 후하게 대접해 돌려보내자고 했다. 소린이 감합이나 “일본국왕”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이 서술은 가게 도시오의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2021)를 인용한 위키백과 각주를 거친 것이라 실록 원문은 보지 못했다.19
소린은 상대마다 다른 호칭으로 불렸다. 명과의 외교에서는 “분고 태수 미나모토 요시시게(豊後太守源義鎮)”, 캄보디아 국왕에게서는 “일본 규슈 대방주(日本九州大邦主)”, 포르투갈 쪽 기록에서는 “분고의 왕(Rey de Bungo)“이라는 호칭이 확인된다.19 캄보디아와는 사절을 주고받았고, 소린이 보낸 교역선이 1573년 귀항하다가 사츠마의 아쿠네 항에 대피한 뒤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1579년 캄보디아 국왕 측 교역선은 미미카와 패전 뒤 시마즈의 경제 봉쇄로 억류되었다.20 하카타 상인을 통해 명·조선과 무역했다는 서술도 있지만, 소린 개인이 조선 국서를 주고받은 사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가게 도시오는 이 외교·무역 활동을 근거로 소린을 기독교 편중 이미지에서 떼어 내 “아시아 전국 다이묘”로 다시 규정한다. 미네르바쇼보(ミネルヴァ書房)는 소개문에서 그의 책이 “키리시탄 다이묘의 이미지를 최신 연구에 따라 바로잡는다”고 밝힌다. 이 책을 직접 읽지는 못했고 출판사 소개문과 위키백과 각주로 방향만 확인했다.20
3-3. 쿠니쿠즈시라는 대포
소린의 이름과 함께 자주 나오는 것이 쿠니쿠즈시(国崩し), 곧 포르투갈식 대포다. 다만 이 대포 이야기는 전승과 기록을 갈라 봐야 한다.
오토모 소린이 이 대포를 도입했다는 시기부터가 그렇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1576년(덴쇼 4년) 도입의 근거로 드는 것은 『오토모코하이키』다. 하지만 이 책은 약 60년 뒤인 1635년경, 에도 시대 초기에 쓰인 책이다.21 동시대 선교사 사료에서 1576년 도입이나 쿠니쿠즈시라는 이름을 확인하지 못했다. 『디지털 대사전(デジタル大辞泉)』의 설명도 소린이 포르투갈인에게서 이시비야(石火矢)를 얻어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는 전승형이다.21
이 대포를 실전에서 사용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1586년 12월 시마즈 이에히사의 공격을 받은 우스키성(니우지마성)에서 이 대포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같은 위키백과 항목의 주석을 보면 성에 함께 농성하던 시가 치카모리(志賀親守)가 이미 시마즈에 내통하고 있었다. 이 주석에는 시마즈 본군이 우스키성 공략을 중시하지 않고 후나이로 진군했다는 서술도 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대포가 시마즈를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과장일 수 있다.21
쿠니쿠즈시의 실물로 전해지는 것이 남아 있는데, 야스쿠니 신사 유슈칸 소장품이 유명하다. 오이타현은 소개 페이지에서 우스키성에 있던 것을 시마즈군이 빼앗았다는 설명의 진위가 확실하지 않다고 하면서, 오토모 군의 휴가 출병 때 노베오카에 가져갔다가 두고 온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인다.21
이 대포 이야기에서 사실로 확인되는 것은 이름의 유래나 실제 전장에서의 활약상이 아니라 소린이 초석과 화기를 계속 원했다는 점이다. 같은 1567년에 소린은 카르네이루에게 다른 서한도 보냈다. 인도 총독이 카르네이루의 중개로 대포 한 문을 보내 준 데 감사하면서, 그 대포가 말라카에서 오는 배 안에서 사라졌다고 적었다. 그래도 다른 대포를 얻을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고 썼다.18 1576년에 쿠니쿠즈시를 도입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보다 훨씬 앞선 1567년에 소린은 이미 인도 총독이 보내 준 대포를 받으려 했던 셈이다.
4. 기독교와 소린 — 선교사의 기록과 일본 측 문서
이 글에서 사료가 가장 크게 갈리는 대목이 소린의 신앙이다. 그 이야기는 거의 전부 예수회 선교사가 쓴 서한과 『일본사』에서 나왔고, 일본 측 문서에는 같은 사건을 다르게 보여 주는 대목이 있다. 아래에 옮긴 프로이스 서한의 서술은 간다 센리(神田千里)가 2014년 논문 「오토모 소린의 개종」에서 원문 서지를 밝혀 인용한 것을 그대로 따랐다.22 프로이스 원문은 직접 대조하지 못했다.
4-1. 자비에르 서간에 나오는 소린
1551년 자비에르가 후나이에서 소린을 만난 이야기는 매우 화려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예복을 차려입은 행렬, 궁정의 도열, 기독교 선교사와 불교 승려 간의 고상한 교리 논쟁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나 자비에르 본인의 1552년 1월 29일 서한에는 분고의 왕에게서 편지를 받고 포르투갈 배가 들어온 항구로 가서 “극진한 접견”을 받았다는 정도만 나온다.23 우리가 떠올리는 화려한 장면은 페르낭 멘데스 핀투(Fernão Mendes Pinto)의 『편력기(Peregrinação)』에서 나온 것이다. 자비에르 서한의 영역본을 낸 콜리지(Coleridge)도 각주에서 이 서술들이 핀투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바 있다.23
1553년에 소린이 선교사 일행을 만난 장면은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에 나온다. 발타사르 가고(Baltasar Gago) 일행이 면담을 청했을 때 소린은 그 자리에서 인도 총독에게 보낼 답신을 쓰고, 신부가 영내에 머무는 것에 큰 만족을 느끼며 신부의 중개로 인도 총독과 교섭할 수 있는 것은 진작부터 간절히 바라던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24 프로이스가 여러 해가 지난 뒤에 회상하며 재구성한 문장이지만, 소린이 선교사를 받아들인 동기가 종교보다 대외 교섭에 있었다는 점은 3장의 1567년 서한과 같은 방향이다.
4-2. 후나이의 병원과 고아원, 허가와 운영
오토모 소린이 후나이에 기독교 병원과 고아원을 세워 포교에 힘썼다는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이것이 사실인지 사료를 살펴보자. 1555년 발타사르 가고가 상급자에게 쓴 서한에는 소린의 허가(licença)를 얻어 부지를 사고 새 예배당을 짓는 한편, 옛 예배당을 고쳐 버려진 아이들의 고아원 겸 빈자 수용소로 삼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기록에 따르면 소린의 역할은 “허가”를 해 줬을 뿐이다. 이 외에 기관 설립에 비용을 대거나 인력을 제공하는 등 직접 “세웠다”라고 할 만한 1차 기록은 찾지 못했다.25 제임스 후지타니(James Fujitani)는 2019년 논문에서 이 병원의 설계와 운영, 인력 대부분을 예수회 의사가 아니라 일본인 신도 조직이 맡았고 불교 사찰의 요양소와 비슷하게 기능했다고 평가한다.25 그렇다면 이 시설이 정말로 기독교를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됐을까?
이 사업이 개종으로 이어졌느냐 하면 선교사 자신은 비관적이었다. 예수회 일본 포교장이던 프란시스코 카브랄(Francisco Cabral)은 1576년 9월 9일 서한에 후나이에서 20년 포교 활동을 하는 동안 사무라이 계급의 신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고 적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신도 대부분이 하층민 아니면 피부병 환자여서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 가기를 꺼려했다고 덧붙였다.26
4-3. 세례 전의 소린과 선종
프로이스는 1578년 10월 16일 서한에서 소린을 열혈 선종 불교 신자로 묘사했다. 소린이 교토 다이토쿠지에 화려한 건물을 세우고 그 유지비로 쓰도록 분고 영지의 막대한 수입을 바쳤으며, 우스키(지금의 오이타현 우스키시)에도 호화로운 불교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소린은 현세가 전부이고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했다. 신부들이 천국과 지옥을 설교하는 것은 사실 내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백성을 잘 다스리려고 진실을 감추는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고 한다.27
같은 시기 일본 측 문서에는 소린이 신사에 기도를 맡긴 흔적도 있다. 소린은 세례를 받던 1578년 5월 14일과 6월 25일에 산히사이(三非斎)라는 호로 신사 텐만구(天満宮)가 소린을 위해 올린 승전 기도에 대한 답례장을 썼다. 이 두 통 이후에는 이런 답례장이 확인되지 않는다. 간다는 소린이 개종을 생각하기 시작한 뒤에는 이런 기도를 그만둔 것으로 본다. 프로이스도 소린이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게 된 뒤로는 그토록 마음 쓰던 사찰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썼는데, 일본 문서에서 답례장이 끊긴 것과 맞아떨어진다고 본 것이다.28
소린이 기독교를 좋게 본 이유도 선교사 기록에 나온다. 조안 바티스타 몬테(João Baptista Monte)는 1564년 서한에서 소린이 신부들이 온 뒤 오래 원하던 아들을 얻었고 두 지역을 더 정복해 일본에서 금은이 가장 많은 영주가 되었다고 믿는다고 적었다. 수도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Luís de Almeida)는 같은 해 소린이 신부들을 추방해 달라고 청하는 승려들에게 “신부들이 오기 전에는 세 지역의 영주였으나 지금은 다섯 지역의 영주이고 일본의 어느 왕보다 부유해졌다”고 답했다고 기록했다.29 선교사가 옮긴 발언이라 그대로 소린의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간다가 지적하듯 소린에게 기독교는 현세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여러 신앙 가운데 하나로 보였다.
4-4. 1578년의 세례
세례는 1578년 우스키의 교회에서 카브랄이 주었고 세례명은 돈 프란시스코(Dom Francisco)였다.30 우스키시 안내에서는 덴쇼 6년 7월 25일, 포르투갈 측 자료에서는 1578년 8월 28일이다. 두 날짜는 같은 날로 보인다. 일본 측이 음력이고 포르투갈 측이 서양 역법이기 때문이다.30
세례까지의 경과는 프로이스가 소린에게 직접 한 말에서 드러난다. 프로이스는 1578년 성 야고보의 날(서양 7월 25일, 덴쇼 6년 6월 21일)에 소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신부들은 전하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설득하지 않았고, 전하도 몇 달 전까지는 개종할 마음이 없었다.”31 간다는 이 발언에서 소린이 개종을 생각하기 시작한 때가 이 대화보다 몇 달 앞선 무렵이라고 읽는다. 이는 세례 몇 주 전인 6월 25일에도 그가 텐만구에 기도 답례장을 쓰고 있었다는 앞의 사실과 맞는다.
세례를 받기로 한 동기에 대해 간다는 교리에 대한 신앙심보다는 현세에서의 복을 기원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한다. 새 아내의 병을 낫게 하고 싶다는 마음, 전 부인의 저주에 대항하려는 마음, 점령지 휴가에서 은거 통치를 하려는 구상이 겹쳤다고 본다.31 다만 이것은 간다의 해석이고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세례 장소를 츠쿠미라고 쓴 글도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찾지 못했다. 츠쿠미가 나중에 소린이 은거한 곳이고, 사망한 곳이다 보니 이런 설이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4-5. 정실 나타 부인과 이세벨 서사
소린의 신앙 이야기와 늘 함께 나오는 인물이 정실 나타 부인(奈多夫人)이다. 나타 부인은 하치만 나타구(八幡奈多宮)의 가장 높은 신관에 해당하는 다이구지(大宮司)인 나타 아키모토(奈多鑑基)의 딸이고, 뒤에 휴가 원정 총대장이 되는 중신 다와라 치카카타(田原親賢)와 남매간이다.32 프로이스는 나타 부인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는 신불(神仏, 일본의 신과 부처) 신앙이 깊고 기리시탄을 미워해서,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버리라고 애원하고 묵주와 성물을 불에 던졌다고 한다. 소린이 그녀의 시녀장이던 여성을 새 아내로 맞아 자신과 이혼하자 단검을 들고 자살하려 했으나, 딸과 시녀들이 단검을 빼앗지는 못한 채 밤낮으로 곁을 지켜 막았다고도 한다. 프로이스에 따르면 이 새 아내는 둘째 아들 치카이에(親家)의 장모, 곧 며느리의 친정어머니였고, 마흔이 넘은 병약한 여성이었다.32
프로이스는 나타 부인이 자살을 저지당한 뒤 신불에 더 많은 제물을 바치고 승려와 마술사를 불러 새 아내를 죽게 하거나 적어도 눈을 멀게 할 방법을 물었다고 썼다. 살아 있는 두꺼비나 개구리의 눈을 달군 쇠막대로 찌르라는 조언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언을 받은 뒤 오히려 나타 부인 자신이 눈병을 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다.32 선교사들이 그녀를 구약에서 신의 예언자들을 박해한 이세벨(Jezebel)에 견줘 그렇게 불렀다는 설명은 예수회원 카리온(Carrión)의 1579년 12월 10일 서한에 나온다.32 이 서한의 일본어 번역에서는 나타 부인을 가리키는 이 이름이 “이사벨(イザベル)“로 나오는데,32 나타 부인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이 이름은 세례명이 아니다.
일본 측 사료에는 나타 부인의 주술과 관련된 이야기도 나온다. 『오토모키』(『구주치란기』)에는 소린의 방탕한 행실을 미워한 부인이 조복(調伏, 주술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기도)을 하자 소린이 화가 나 관련된 사승들을 모두 처벌하라 명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에도 부인의 조복 이야기가 실려 있다.33 간다는 정실이 주술을 했다는 점에서 예수회 서한과 일본 측 책 두 종, 합쳐 세 사료가 일치한다고 본다. 다만 주술의 대상이 다르다. 프로이스는 새 아내를, 일본 측 두 책에서는 소린을 겨냥했다고 나온다. 『오토모키』와 『인토쿠타이헤이키』는 둘 다 에도 시대에 편찬된 책이다. 두 책에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서로 독립된 출처로 확인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당시 떠돌던 소문이 두 책에 똑같이 실린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혼의 시점과 이유에 대해서는 학설이 갈린다. 간다는 이혼 시점이 덴쇼 4년(1576) 이전이며 기독교와는 무관하다고 판단한다.32 이유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오토모키』에 나오는 “여색에 빠져 행실이 바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32 반면 일본어 위키백과 나타 부인 항목에 따르면 1578년에 새 저택을 짓고 이혼했고, 같은 위키백과의 오토모 요시시게 항목에서는 이혼의 원인을 소린이 기독교를 믿게 된 것으로 본다.32 한 사이트 안에서도 원인이 갈린다. 나타 부인 스스로가 남긴 이야기는 어떤 사료에도 남아 있지 않아서 그녀에 대한 서술은 전부 선교사가 남긴 기록이나 후대 기록에서만 확인할 수 있어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나타 부인은 1587년 2월 15일(서양 3월 23일) 우스키성에서 병사했다. 만년에는 예수에게 기도하고 일요일에 시녀들을 쉬게 했으나 끝까지 신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고 예수회 연보를 요약한 서술이 있다.32
4-6. 정리 — 선교사 수용에서 세례까지
이 장의 사료를 맞춰 보면 확인되는 것은 이렇다. 소린은 유럽 국가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화기를 수입해 전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선교사를 받아들였고, 선종 불교의 후원자이자 출가하여 후대에도 본명보다 법명인 소린으로 더 알려진 불교신자였으며, 세례를 받기 직전까지 신사에서 기도를 하던 사람이었다. 세례는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새 아내와 결혼을 하고, 은거에 들어가는 등 다양한 사건이 겹친 시기에 이뤄졌다.
5. 휴가 원정과 다카조가와라의 11월
5-1. 원정을 먼저 시작한 사람은 요시무네였다
1577년 12월 휴가의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가 시마즈에게 밀려 분고로 망명했다. 이 무렵 시마즈 요시히로와 요시히사가 같은 달 19일과 21일에 쓴 서장이 『사가라가문서(相良家文書)』에 남아 있다.34 당주 요시무네가 곧바로 움직였다. 이듬해 봄 휴가에 진입해 아가타(縣) 마츠오성(松尾城)의 츠치모치 가문을 멸망시켰고, 이 사실은 『오토모가문서록(大友家文書録)』에 실린 4월 14일자 요시무네 서장으로 확인된다.34 소린이 직접 휴가에 가기로 정한 것은 그 뒤다. 『히라바야시문서(平林文書)』에 실린 4월 24일자 요시무네 서장에 이 내용이 나온다.34
문서상 처음 움직인 것은 당주 요시무네였고, 소린은 그때 우스키에 은거해 있었다.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소린이 새 아내와 함께 은거하러 휴가에 가고 요시무네는 다른 지역들의 안정을 위해 남는 역할 분담이었다고 나와 있다.35
5-2. “기독교 왕국”이라는 말의 출처
소린이 휴가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려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구상의 가장 이른 출전은 예수회 서한이다. 프로이스는 1578년 10월 16일 서한에서 소린이 신부에게 이렇게 전했다고 적었다.35 소린은 자신이 휴가로 가되 그 땅 출신으로 기리시탄이 될 사람들과 자신과 함께 머물 병사 300명만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곳에 세울 도시는 일본의 것과 다른 새 법과 제도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휴가 출신자가 그와 가신들과 잘 어울리려면 전원이 기리시탄이 되어 형제 같은 우애로 살아야 하고, 신부 한 사람과 수도사 몇 명이 동행하기를 바라며, 자신도 그곳에서 세례를 받겠다는 것이다.35 여기에 카리온이 1579년 12월 10일 서한에서 이 “새 법과 제도”를 “기리시탄과 포르투갈인의 법에 따라(as leis dos Christãos, & dos Portugueses)“라고 부연 설명했다.36
구상의 내용은 프로이스 서한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왕국”이라는 낱말이 그 서한 인용문에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예수회 서한에서 “왕국(reino)“은 분고 같은 일반 다이묘의 영토(領国)를 가리키는 낱말로도 쓰인다는 점이 간다의 인용에서 보인다. 학계에서 이 구상을 부르는 이름은 와타나베 스미오(渡辺澄夫)의 1980년 논문 제목 「오토모 소린과 기독교적 이상국(キリスト教的理想国)」에서 퍼진 것으로 보인다.36
간다는 이 구상을 소린이 자신이 은거해 갈 점령지 휴가에 한정해 구상한 것으로 봤다. 소린 개인의 영향력이 직접 미치는 지역에서만 기독교 통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는 해석이다.35
이번 리서치에서 확인한 기록 중 이 구상이 언급된 것 중 가장 이른 서한은 1578년 10월 16일자다. 소린이 은거에 들어간 1576년부터 구상을 시작했다는 설도 있지만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언급은 전부 서양 쪽의 기록에서만 나왔고 일본 측의 문서에서는 이 구상을 직접 뒷받침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5-3. 휴가의 사찰·신사 파괴와 책임
휴가 원정에서 일어난 사찰 파괴에 대해서는 프로이스 서한의 경우엔 소린과 요시무네 두 사람 모두의 명령이었다고 나와 있는 반면 일본 측 문서에는 요시무네 한 사람의 정책을 비판하는 형태로만 나와서, 누구의 명령이었는지 사료로 확정하기 어렵다.
프로이스는 1578년 9월 30일과 10월 16일 서한에서 이 원정에서 있었던 사찰 파괴를 서술한다. 국왕(소린)과 왕자(요시무네)가 휴가의 사찰·신사를 불태우라고 명했고 그대로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실행자로는 기리시탄 무사 지안(ジアン)이 나오고, 순례객이 모이던 요코다케의 약사 사원(横岳の薬師)이 파괴된 곳 중 하나로 나온다.37 간다는 이러한 사찰·신사 파괴가 소린과 요시무네의 지시에 따른 것이지만 휴가에서만 한정적으로 행해진 것이고 분고 본국에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본다.35
이 서술을 두고 학계의 평가는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와타나베 스미오는 소린이 세례를 받은 뒤 사찰을 파괴했다고 보았다. 다만 분고 국내에서는 소극적이었고 휴가에서는 적극적이고 철저했다고 구별했다.36 기무라 다다오는 『세계대백과사전』 항목에서 다이묘 시절 소린에게는 이런 행동이 전혀 보이지 않고, 그 뒤의 것은 오다 노부나가를 흉내 낸 요시무네의 사찰·신사 압박이거나 전화(戦火)로 탄 것이 잘못 전해진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썼다.38 간다는 프로이스 서한상 소린 본인의 지시가 확실하다는 입장이라 기무라와 견해가 다르다.
기무라가 말한 “노부나가를 흉내 낸 요시무네”는 일본 측 동시대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다만 그 문서가 비판하는 것은 휴가가 아니라 분고 안의 사찰·신사 정책이다. 난군슈(南郡衆)의 이름으로 요시무네에게 전하려 한 것으로 보이는 『시가 도에키 외 렌쇼조쇼(志賀道易他連署条書, 시가 도에키 등이 연명한 조목서)』(1580년 초로 추정)에 이런 대목이 있다. “죄 없는 사찰을 노부나가 흉내라며 부수는 일이 무슨 재주인지 알 수 없다.”39 다만 이 문서는 익명의 투서를 베낀 것인 점은 감안해서 봐야 한다.39
5-4. 11월 12일 다카조가와라
원정 본대를 지휘한 사람은 소린이 아니었다. 다카조(高城) 포위군의 총대장은 다와라 치카카타(田原親賢, 출가명 쇼닌, 紹忍)다.40 다와라 치카카타는 나타 아키모토의 아들로, 오토모 일족인 다와라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 성을 바꿨다. 소린의 정실 나타 부인과는 남매간이다.41 당주 요시무네는 분고 노즈(野津)에서 후방을 지휘했고, 소린은 휴가 무카(無鹿)의 본영에 있었다.40 일본어 위키백과의 시간표에는 소린이 결전 당일 밤 무카에서 분고로 물러난 것으로 나온다.40 소린이 휴가로 떠난 날짜는 기록마다 8월 중순과 9월 초, 10월 초로 제각각이어서 확정할 수 없었다.
결전은 덴쇼 6년 11월 12일, 서양 역법으로 1578년 12월 10일에 다카조가와라(高城川原)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를 흔히 미미카와 전투라 부르지만 미미카와(耳川)는 결전지가 아니라 오토모군이 패배해 도망가던 길에 있는 강이다.40 양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숫자가 다르다.
| 출처 | 오토모 | 시마즈 |
|---|---|---|
| 프로이스 1578년 서한 | 요시무네 지휘 약 6만 | - |
| 프로이스 『일본사』 | 4만(3월 침공군) | 5만 |
| 『엔료세이칸(延陵世鑑)』 | 3만여 | - |
| 『시마즈코쿠시(島津国史)』 | 10만 | - |
| 일본어 위키백과 개요 | 3–4만 | 2–3만 |
프로이스 한 사람이 남긴 기록조차 서한과 『일본사』 양쪽의 수치가 다르다. 표의 수치는 오토모가 3만에서 10만, 시마즈가 2만에서 5만까지 범위가 너무 커서 어느 하나를 택하기는 어렵고, 일본어 위키백과 「미미카와 전투(耳川の戦い)」 항목의 개요에서 쓰는 3–4만 대 2–3만도 참고 수준으로만 봐야 한다. 표에서 프로이스의 서한은 오토모 군의 총대장을 요시무네로 적고 있어, 앞에서 본 다와라 총대장 서술과 다르다.42 시마즈가 소수의 미끼 병력을 내보내 오토모군을 끌어낸 뒤 숨어 있던 주력이 덮쳤다는 이야기는 프로이스가 오토모 측으로부터 들은 정보를 옮긴 것으로 보이며, 마쓰다 기이치(松田毅一)·가와사키 모모타로(川崎桃太)의 일본어 번역에 실려 있다.42 이 전술은 흔히 “츠리노부세(釣り野伏せ)“라 불린다.42
오토모 진영에 내분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일본어 위키백과 「미미카와 전투(耳川の戦い)」에 따르면 군의에서 의견이 갈렸다. 다와라 치카카타는 시마즈와 화친 교섭을 진행하고 있으니 싸우면 안 된다고 했고, 주전파인 다키타 시게치카(田北鎮周)는 교전을 주장했다. 사에키 소텐(佐伯宗天)은 원래 다와라와 함께 신중론을 폈으나 군의에서 다키타에게 모욕을 당해 참지 못하고 다키타와 함께 공격에 나섰다고 한다. 두 사람은 다와라의 설득에도 시마즈군을 공격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다키타 시게치카(田北鎮周)」 항목은 다키타가 아군을 고무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모하게 돌격했다고 한다.42 하지만 이 이야기들 모두 출전을 밝히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료에 근거한 이야기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5-5. 패인을 둘러싼 해석
패전 뒤 오토모 진영에서 나온 첫 해석은 “신불의 벌”이었다. 카리온의 1579년 12월 서한에 따르면 분고의 병사들은 오토모 가문이 기리시탄이 되었기에 신불의 벌이 내렸다고 말했고, 선교사들은 철수 도중 습격당할 뻔했다.43 일본 측 문서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도세츠는 1580년 2월 16일 남분고를 맡은 13명에게 보낸 서장의 첫 조항에 이렇게 썼다. 소칸(宗歓, 요시오카 나가마스)과 아키하야가 죽은 뒤 “당신들의 분고는 도리대로 운영되지 않고 신벌 때문에 근년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며 평판은 모든 곳에서 무너졌다.”43 도세츠는 이 서장에서 반란 세력인 아키즈키 다네자네의 편지도 인용한다. 그 편지에서 다네자네는 귀인부터 남녀노소가 모두 “인도의 종파”로 개종하고 절과 신사가 부서지며 불상과 신상이 강에 던져지거나 땔감이 되는 일은 선대에 들은 적이 없다고 비난한다.43 다만 이 서장에서 도세츠의 관심은 기독교 하나에 한정되지 않았고(스트래선), 다루는 범위도 분고 영내다.43
신불의 벌이라는 인식이 당시 오토모 가신단에 퍼져 있었다는 것은 카리온 서한과 일본 측 문서가 독립적으로 일치하므로 신뢰도가 높다. 그러나 종교 갈등이 실제 패인이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두 종류의 사료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군사적 요인은 지휘 분열, 급조된 연합군, 시마즈의 기동이다.
소린 개인의 책임을 직접 지적한 동시대 일본 측 문서는 찾지 못했다. 문서가 문제 삼은 것은 오토모 정권 전체의 도리와 신불에 대한 태도의 붕괴였다. 소린의 잘못을 직접 저격하는 서술은 그보다 늦은 시기에 나온다. 『오토모코하이키』에서는 오토모가 쇠퇴한 원인이 군바이샤(軍配者, 출진의 길일과 방위를 점치는 군사 참모) 가쿠마 세키소(角隈石宗)의 진언을 무시한 데 있다고 본다. 군바이샤의 조언을 듣지 않은 주군의 과오라는 교훈 서사다.44 1620년 기독교 신자였다가 배교자가 된 일본인 후칸 파비안(Fabian Fucan)은 『하다이우스(破提宇子)』에서 소린이 신불에 의지하던 동안에는 무력이 규슈에 퍼졌으나 데우스의 신자가 된 뒤 군운이 떠났고 미미카와에서 패해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돌아왔다고 썼다.45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글이다. 그런데 이 두 글은 모두 전투가 벌어지고 반세기 정도 흐른 뒤에 모종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붙인 해석이다.
6. 패전 이후 — 이탈과 반란
다카조가와라 패배 후 오토모 가문의 붕괴는 한꺼번에 오지 않고 1578년 11월부터 1580년까지 단계적으로 진행됐다. 나가시노 전투 후 다케다 가문이 즉시 붕괴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밖에서는 시마즈가 오토모를 압박했다. 시마즈 요시히사는 12월 10일자로 모리 테루모토에게 보낸 서장에서 오토모를 “6개국의 흉도(六ヶ国之凶徒)“라 불렀다(『시마즈가문서(島津家文書)』 1423호).46 시마즈가 명분으로 삼은 것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고나이쇼(御内書, 쇼군이 직접 내는 서장)다. 요시아키는 오토모를 상경을 방해하는 “6개국의 흉도”로 규정하고 시마즈 등에게 오토모를 치게 하려 했고, 이 고나이쇼는 1578년 9월 11일 시마즈에 전달되었다.46 다만 시마즈의 휴가 제압과 오토모의 침공은 모두 이 고나이쇼보다 앞서므로 고나이쇼를 휴가 전쟁의 원인이라 하면 시간순이 맞지 않는다. 고나이쇼는 그 뒤 시마즈의 북진을 정당화하는 데 쓰인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도 미미카와 직후 오토모 영역을 잠식해 1580년까지 치쿠젠·치쿠고·히고·부젠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는 서술이 있다.47
안에서도 이탈이 이어졌다. 치쿠고 고쿠진들이 1579년경부터 이탈했다.47 가신의 반란도 일어났다. 반란의 주역은 다와라 종가의 사위이자 양자로 대를 이은 다와라 치카츠라(田原親貫)다. 종가의 당주 다와라 치카히로(田原親宏)가 죽은 1579년 9월 이후, 주군인 오토모 소린과 소린이 총애하던 다와라 치카카타(5장의 총대장)가 소린의 아들 치카이에(親家)를 다와라 종가의 후계로 들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반기를 들었다.48
가문 안에서 종교 갈등도 불거졌다. 프로이스에 따르면 당주 요시무네는 어머니 나타 부인과 함께 반그리스도교 쪽으로 돌아섰고,49 간다 역시 요시무네가 예수회에서 멀어져 갔다고 정리했다.50 중신 여럿은 요시무네에게 신불을 모시던 때는 가문이 번영했는데 제사를 그만두자 신불이 지켜 주지 않게 되었다며 사찰을 재건하라고 요구했고, 기독교로 개종했던 가신들도 잇따라 배교했다.49 반면 소린은 세상이 신앙을 거부해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서약했다고 한다.49
이 무렵 소린은 은거에서 나와 군을 이끌었다. 스트래선은 소린이 1579년의 대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은거에서 다시 나와 승리했다고 썼다.49 반란 주모자 다와라 치카츠라는 1580년 가을 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최후를 맞았으나, 자결했는지 도주 후 살해되었는지는 자료마다 다르다.48
7. 1586년 오사카성에서 츠쿠미, 그리고 개역까지
7-1. 1586년 오사카성 알현
1585년 10월 2일 히데요시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정전을 명했다. 오토모는 수락했고 시마즈는 가문 안에서 격론을 벌인 끝에 받아들였다. 소린은 1586년 상경해 새로 지은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했다. 일자는 4월 5일설과 6일설이 있다. 오이타시 자료에 따르면 히데요시가 소린에게 성 안을 직접 안내했고, 쿠니와케안(国分案, 영지 배분안)을 오토모는 받아들이고 시마즈는 거부했다.51
이때 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가 소린에게 “사적인 일은 소에키(센노 리큐), 공적인 일은 재상(나)이 맡는다”고 말한 대목이 소린 쪽 기록에 남아 있다(『오토모가문서록(大友家文書録)』).52
7-2. 헤츠기가와와 후나이의 불
히데요시의 중재에도 시마즈는 멈추지 않았다. 1586년 7월 시마즈가 이와야성(岩屋城)을 함락해 다카하시 조운(高橋紹運)이 전사했고, 10월 중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3만이 히고를 거쳐,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1만이 휴가를 거쳐 분고로 들어왔다. 이리타 요시자네(入田義実)와 시가 치카노리(志賀親度, 3장의 치카모리의 아들)가 시마즈에게 내응했다.53
1586년 12월 12일(서양 1587년 1월 20일) 헤츠기가와(戸次川)에서 오토모와 히데요시가 보낸 시코쿠 군세가 시마즈 이에히사와 맞붙었다.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의 아들 노부치카(信親), 소고 마사야스(十河存保)가 도하 공격을 감행했다가 시마즈의 유인 매복에 무너졌고 노부치카(22세)를 비롯한 여럿이 전사했다.53 히데요시가 싸움을 시작하지 말라고 엄명했는데 히데히사가 어기고 도하했다고 전해진다.53 프로이스는 요시무네가 히데히사·모토치카와 함께 성을 쌓으면서 향연과 음란한 놀이에 빠져 있었다고 비판한다. 이튿날 후나이성이 함락되었고 요시무네는 북쪽 산성으로 물러났는데, 어느 성으로 어떤 순서로 갔는지는 자료마다 다르다.54
후나이는 불탔다. 앞에서 본 오토모 가문 유적의 불탄 도자기가 이때의 것과 맞는다고 한다. 소린은 우스키성, 곧 니우지마성(丹生島城)에 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소린은 기독교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성에 피난시키고 주먹밥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다만 선교사가 기록했다고 할 뿐 어느 기록인지는 밝히지 않는다.54 시마즈 이에히사는 우스키성을 포위했으나 공략하지 못하고 물러났다.54
7-3. 1587년 5월 23일
1587년 2월 15일(서양 3월 23일) 나타 부인이 우스키성에서 병사했다.55 4월 17일(서양 5월 24일) 히데나가 군이 네지로자카에서 시마즈를 격파했다.56 소린은 1583년부터 츠쿠미에서 지냈고(츠쿠미시 관광협회는 그곳을 소린이 세운 교회 “덴토쿠지(天徳寺)“로 소개한다),57 1587년 5월 23일(서양 6월 28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였다.58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사인으로 티푸스설이 유력하다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제시되지 않아 추정으로 봐야 한다.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와 『야마카와 일본사소사전(山川 日本史小辞典)』에는 병사(病死)라고만 나와 있고 병명은 없다.58
장례는 기독교식이었다고 천주교 오이타 교구와 츠쿠미시 관광협회가 전한다. 이어 후나이의 다이치지(大知寺)에서 요시무네가 불식으로 다시 장례를 지내고 묘도 불식으로 고쳤다는 서술이 일본어 위키백과에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제시되지 않았다.59 소린이 죽고 한 달쯤 뒤인 1587년 6월 19일(서양 7월 24일) 히데요시가 바테렌(伴天連,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고, 요시무네는 이해 4월 세례를 받았다가 추방령 뒤 배교했다는 서술도 일본어 위키백과에 있다.59
7-4. 사후 6년 — 개역과 남은 가문
오토모 가문이 분고를 잃은 것은 소린이 죽고 6년 뒤인 1593년 5월 1일이다. 히데요시가 요시무네의 영지를 몰수하는 개역(改易)을 통고했다. 개역의 표면상 사유는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명·조선 연합군에 포위되어 퇴각할 때 요시무네군이 원호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일본어 위키백과 설명으로는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와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도 거절했으므로 요시무네만의 개역 사유가 되기 어렵다. 같은 항목에는 히데요시가 자신의 주인장에서 요시무네를 겁쟁이라 낙인찍고 “징계를 위해서”라 했다는 대목도 있다.60 가게 도시오는 개역의 진짜 이유로 오토모 가문이 여러 아시아 나라와 독자적으로 외교를 이어 온 것이 히데요시의 외교권 일원화 구상에 방해가 된 점을 든다. 다만 이것은 가게 도시오 개인의 해석이며 사료에 직접 이렇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60
요시무네는 삭발하고 소간(宗厳)을 칭하며 유폐되었다가 1599년 풀려났으나 1600년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 측에 서서 분고로 들어갔다가 이시가키바루(石垣原)에서 패해 히타치로 유배되었고 1605년 죽었다.60 아들 오토모 요시노리(大友義乗)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하타모토가 되어 히타치 츠쿠바군 3천 석과 무사시 우시고메 3백 석을 받았다. 요시노리의 뒤를 이은 요시치카(義親)가 후계 없이 1619년 죽으면서 종가 적통이 끊겼고, 요시무네의 아들이라고 전해지는 마츠노 마사테루(松野正照)의 아들 오토모 요시타카(義孝)가 오토모 가문을 다시 이었다. 요시타카는 1689년 고케(高家, 막부의 의례를 맡은 가문) 직에 올랐다.61 소린의 직계는 다이묘로 남지 못하고 에도 시대 고케 하타모토 가문으로 이어졌다.
8. 인물평 — 사료로 확인되는 오토모 소린
통설과 나란히 놓아 보면 다음과 같다.
| 통설 | 사료로 확인되는 것 | 강도 |
|---|---|---|
| 니카이쿠즈레의 변에 소린이 가담했다 | 학술적 근거 없음. 소설·창작 유통 | 근거 없음 |
| 소린은 6개국을 한꺼번에 얻었다 | 분고·치쿠고·히고는 소린 이전, 히젠 1554, 부젠·치쿠젠 1559. 1559년에 치쿠고도 받았다는 서술은 문서와 어긋남 | 원 문서로 확인 |
| 자비에르가 소린과 불승 논쟁을 벌였다 | 자비에르 서간은 “극진한 접견”만 전함. 논쟁 장면은 핀투 단독 출전 | 사실로 쓸 수 없음 |
| 소린이 병원·고아원을 세웠다 | 소린은 허가, 운영은 일본인 신도 조직 | 학설(후지타니 2019) |
| 소린은 기독교 왕국을 세우려 했다 | 프로이스 서한에 새 법·제도의 신자 도시 구상. 일본 측 문서 없음. 은거령 한정이라는 해석 | 예수회 단독 |
| 소린이 휴가 사찰을 불태웠다 | 프로이스 서한이 소린·요시무네 양쪽에 귀속시킴. 학설 갈림. 일본 측 직접 기록 없음 | 학설 대립 |
| 미미카와 패인은 종교 갈등이었다 | 동시대 인식은 “신불의 벌”(프로이스·도세츠 서장 일치). 실제 패인은 아님 | 인식은 확정, 원인은 근거 약함 |
| 나타 부인은 “이사벨” | 선교사들이 구약 이세벨에 빗댄 별명(일본어 번역은 이사벨로 표기). 세례받지 않음. 이혼 시점·이유는 학설 갈림 | 학설 대립 |
| 쿠니쿠즈시가 시마즈를 물리쳤다 | 1576년 도입은 에도 시대 기록이 출전. 실전 활약 근거 약함 | 전승 |
소린을 기독교에 빠진 광신자로도, 기독교를 이용만 한 정치가로도 단정하기 어렵다. 사료가 뒷받침하는 범위에서 소린은 무역과 화기, 병 치료, 은거 뒤의 새 출발이라는 현세의 이유와 종교적 관심을 함께 지녔던 사람이다.
출처
1차·준1차 사료 (인용된 것만. 「오토모가문서(大友家文書)」와 자비에르 서간 영역본을 제외하면 모두 2차 문헌을 거쳐 확인)
- 루이스 프로이스 서한(1578년 9월 30일, 10월 16일, 카리온 1579년 12월 10일, 카브랄 1576년 9월 9일, 몬테 1564년 10월 9일, 알메이다 1564년 10월 14일, 소린 서한 1567년)과 『일본사』, 『16·17세기 예수회 일본보고집(十六・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 수록분, 가고 1555년 서한(MHSI 137): 간다 센리(2014)와 후지타니(2019) 논문의 인용을 통해서만 확인
-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서간(코친 1552년 1월 29일): Coleridge 영역본(1890)
- 『시가 도에키 외 렌쇼조쇼(志賀道易他連署条書)』, 타치바나 도세츠(立花道雪) 서장(1580년 2월 16일), 소린 답례장(1578년 5월 14일·6월 25일): 다키타 마나부(田北学) 편 『조호테이세이헨넨오토모시료(増補訂正編年大友史料)』의 문서를 간다·스트래선이 인용한 것으로 확인
- 「오토모가문서(大友家文書)」(立花家史料館 소장, 도쿄대 사료편찬소 Hi-CAT Plus 이미지로 직접 확인: 슈고 보임장과 쇼군 서장), 『시료소란(史料綜覧)』(다이니혼시료 종합 데이터베이스): 슈고·탄다이 보임
- 『명세종실록(明世宗実録)』, 『하기한 바츠에츠로쿠(萩藩閥閲録)』, 『시마즈가문서(島津家文書)』, 『오토모가문서록(大友家文書録)』, 『사가라가문서(相良家文書)』, 『히라바야시문서(平林文書)』, 『간세이주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예수회 일본연보(イエズス会日本年報)』 1586년: 일본어 위키백과 각주 또는 2차 문헌 인용으로만 확인
- 『오토모코하이키(大友興廃記)』(1635년경, 에도 초기에 쓰인 책), 『오토모키(大友記)』, 『구주치란기(九州治乱記)』,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 후칸 파비안 『하다이우스(破提宇子)』(1620), 다나카 뎃켄(田中鉄軒) 『사츠한센시코쇼(薩藩戦史考証)』(1913): 간다·스트래선·위키백과의 인용으로 확인
현대 연구자·학술 논문 (신뢰도 A–B)
- 간다 센리(神田千里), 「오토모 소린의 개종 ― 그 실태와 배경 ―(大友宗麟の改宗 ― その実態と背景 ―)」, 『도요대학 문학부 기요 사학과편(東洋大学文学部紀要 史学科篇)』 40(2014), pp.71–110 (원문 전체 확인)
- Alan Strathern, “Immanent Power and Empirical Religiosity: Conversion of the Daimyo of Kyushu, 1560–1580,” Japanese Journal of Religious Studies 47/2 (2020), pp.247–278 (해당 대목 원문 확인)
- James Fujitani, “The Jesuit Hospital in the Religious Context of Sixteenth-Century Japan,” Japanese Journal of Religious Studies 46/1 (2019), pp.79–101
- Alan Strathern, “The Many Meanings of Iconoclasm,” Journal of Early Modern History 25 (2021), pp.163–193
- Christopher Mayo(2015), Xia-Kang Ziyi(영역), Hibbard and Hiraishi(1963): 스트래선 논문의 인용으로만 확인
- 구로시마 사토시(黒嶋敏), 「규슈탄다이 고찰(九州探題考)」, 『사학잡지(史学雑誌)』 116-3(2007), pp.54–57
- 아라키 가즈노리(荒木和憲), 「무로마치기 북부 규슈 정치사의 전개와 특질(室町期北部九州政治史の展開と特質)」, 『일본사연구(日本史研究)』 712(2021)
- 가게 도시오(鹿毛敏夫),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ミネルヴァ書房, 2021): 출판사 소개문과 위키백과 각주로 확인
- 도야마 미키오(外山幹夫), 『오토모 소린(大友宗麟)』(吉川弘文館 人物叢書, 1988): 서지만 확인
- 와타나베 스미오(渡辺澄夫), 「오토모 소린과 기독교적 이상국(大友宗麟とキリスト教的理想国)」(『사학논총(史学論叢)』 11, 1980): 간다 논문의 인용으로 확인
- 고토 다케오(後藤武夫, 1987), 아베 다케시(阿部猛)·니시무라 게이코(西村圭子) 편 『센고쿠 인명사전(戦国人名事典)』(1990), 기무라 다다오(木村忠夫) 「오토모씨의 분고 지배(大友氏の豊後支配)」(1973), 八木田政治(1999), 伊集守道(2010), 미야모토 요시미(宮本義己) 논문: 일본어 위키백과 각주의 인용 또는 서지로만 확인
공식·표준 참고자료 (신뢰도 B)
-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아쿠타가와 다쓰오(芥川龍男)),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기무라 다다오(木村忠夫)), 『야마카와 일본사소사전(山川 日本史小辞典)』, 『브리태니커(ブリタニカ)』, 『디지털 대사전(デジタル大辞泉)』(コトバンク)
- Encyclopaedia of Portuguese Expansion 「Francisco Cabral」 항목,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협동DB
- 오이타시 「오토모 소린과 그 시대(大友宗麟とその時代)」·오토모 가문 유적 안내, 오이타현 「오토모포(大友砲(国崩し))」, 우스키시 안내, 츠쿠미시 관광협회, 천주교 오이타 교구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E)
- 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니카이쿠즈레의 변(二階崩れの変)」·「몬지성 전투(門司城の戦い)」·「미미카와 전투(耳川の戦い)」·「나타 부인(奈多夫人)」·「헤츠기가와 전투(戸次川の戦い)」·「호사츠 합전(豊薩合戦)」·「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프랑키포(フランキ砲)」·「요시오카 나가마스(吉岡長増)」 등
- 개인 블로그(rekishikomugae 등), rekimoku 연표 사이트,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의 Yahoo!ニュース 기사: 서장·병력·전개 확인 등 보조용으로만 사용
확인하지 못한 것
- 프로이스 『일본사(日本史)』 원문(Wicki 교정본, 마쓰다·가와사키 번역)과 『보고집(報告集)』, 『오토모코하이키(大友興廃記)』·『오토모키(大友記)』·『오토모가문서록(大友家文書録)』 원문은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이 글의 프로이스 인용은 모두 간다·스트래선 논문 등 2차 문헌의 인용을 옮긴 것이다.
- 니카이쿠즈레 사건을 각 책에 어떻게 다르게 나오는지, 프로이스가 이 사건을 어떻게 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 『오토모가문서록(大友家文書録)』(『오이타현사료(大分県史料)』 31~34)는 열람 제한으로 보지 못했고, 규슈탄다이 관련 서장의 본문은 흘림체라 일부만 판독했다. 소린이 휴가로 떠난 날짜는 확정하지 못했다.
- 와타나베 스미오(渡辺澄夫)의 원논문 본문, 가게 도시오(鹿毛敏夫)의 2021년 저서 본문, 고노 요시노리(河野純徳) 번역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전서간(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全書簡)』은 열람하지 못했다.
- 한국어로 소린을 집중적으로 다룬 단행본·논문(KCI)은 찾지 못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개설 수준의 항목이 있다.
- 이 글의 서양 역법 환산(덴쇼 6년 7월 25일=1578년 8월 28일 등)은 일부가 위키백과 표기이고 일부는 이 글의 계산이며,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 구분은 확인하지 못했다.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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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아쿠타가와 다쓰오(芥川龍男) 집필)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항목(코토방크, https://kotobank.jp/word/大友宗麟-17573)과 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 장남이라는 점은 사전, 아명 시오호시마루와 출생일 두 설은 위키백과에 따랐다. ↩
-
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 원복 시기와 요시하루의 이름 한 글자, 생일 두 설, 어머니 설은 모두 이 항목의 서술이며 각주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2
-
일본어 위키백과 「기쿠치 요시타케(菊池義武)」·「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 항목(기무라 다다오(木村忠夫) 「오토모씨의 분고 지배(大友氏の豊後支配)」, 『구마모토 사학(熊本史学)』 42, 1973과 아베 다케시(阿部猛)·니시무라 게이코(西村圭子) 편 『센고쿠 인명사전(戦国人名事典)』, 1990 인용). ↩ ↩2 ↩3
-
일본어 위키백과 「니카이쿠즈레의 변(二階崩れの変)」 항목(後藤武夫, 「하치만 가마도 신사의 가마도씨와 대반야바라밀다경(八幡竈門神社の竈門氏と大般若波羅密多経)」, 『벳푸의 문화재(べっぷの文化財)』 18, 別府市教育委員会, 1987 인용). 각 책의 원문은 대조하지 못했다. ↩ ↩2 ↩3
-
일본어 위키백과 「니카이쿠즈레의 변(二階崩れの変)」·「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 ↩
-
東京大学史料編纂所 Hi-CAT Plus(https://wwwap.hi.u-tokyo.ac.jp/ships/w81/search)가 공개하는 立花家史料館 소장 「오토모가문서(大友家文書)」(중요문화재, 290통)의 이미지와 같은 기관의 다이니혼시료 종합 데이터베이스 『시료소란(史料綜覧)』 항목. 히고 보임은 成巻文書3-14, 히젠은 大友書翰9-13, 부젠은 成巻文書3-16, 치쿠젠은 大友書翰9-6, 규슈탄다이 관련 서장은 大友書翰29-1·9-5. 슈고 보임장은 정형 서식이라 본문을 판독했고, 규슈탄다이 관련 서장은 흘림체라 일부만 판독했다. 치쿠고 보임 이력은 『시료소란(史料綜覧)』 7編의 항목과 아라키 가즈노리(荒木和憲), 「무로마치기 북부 규슈 정치사의 전개와 특질(室町期北部九州政治史の展開と特質)」, 『일본사연구(日本史研究)』 712(2021)을 참고했다. 구로시마 사토시(黒嶋敏), 「규슈탄다이 고찰(九州探題考)」, 『사학잡지(史学雑誌)』 116-3(2007) pp.54–57. 『오토모가문서록(大友家文書録)』(『오이타현사료(大分県史料)』 31~34)는 열람 제한으로 보지 못했다. ↩ ↩2
-
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 『일본대백과전서』. 즉위 비용 서장은 大友書翰9-2이고 금액은 판독할 수 없다. 『시료소란(史料綜覧)』에는 永禄2년 9월 17일 쇼군이 히젠 슈고 보임의 예물에 감사한 항목(출전 『오토모가문서록(大友家文書録)』)이 있으나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구로시마 사토시(黒嶋敏)(2007) 주65는 1543년 요시아키가 규슈탄다이 취임에 드는 예전(礼銭)을 막부에 물었다가 전례가 없다는 답을 듣고 단념했다고 서술한다. ↩ ↩2
-
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 항목. ↩
-
일본어 위키백과 「몬지성 전투(門司城の戦い)」 항목(『하기한 바츠에츠로쿠(萩藩閥閲録)』·『가츠라 긴엔 오보에가키(桂岌円覚書)』, 八木田政治 1999 인용). 서장 원문은 위키백과가 전재한 것이고 원본은 대조하지 못했다. 병력 수는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의 수치다. ↩ ↩2 ↩3 ↩4
-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아쿠타가와 다쓰오(芥川龍男)),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기무라 다다오(木村忠夫)), 『브리태니커(ブリタニカ)』(코토방크). 카이묘는 츠쿠미시 관광협회 안내(https://tsukumiryoku.com/pages/54/)와 간다 센리(2014) 주석을 참고했다. ↩ ↩2
-
八木田(1999) p.84, 일본어 위키백과 「몬지성 전투(門司城の戦い)」 주석의 인용. 이 문헌의 서지는 위키백과에 표기된 「八木田(1999)」 외에는 확인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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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몬지성 전투(門司城の戦い)」·「요시오카 나가마스(吉岡長増)」 항목, rekimoku 연표(https://rekimoku.xsrv.jp/2-zinbutu-05-ootomo-yoshishige.html, 출전은 병기되어 있으나 원문 검증 불가). ↩ ↩2
-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기무라 다다오(木村忠夫) 집필, 코토방크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항목)의 “70年(元亀元)毛利氏と和睦” 서술. 앞서 정리한 1564년 화의와의 관계는 사전이 설명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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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히로 아키마사(吉弘鑑理)의 이름(鑑理)은 일본어 위키백과 「요시히로 아키마사(吉弘鑑理)」 항목이 아키마사(あきまさ)와 아키타다(あきただ) 두 가지로 병기하고, 이 글은 그중 앞의 아키마사를 따랐다. 위키백과 항목과 개인 사이트(越後屋 인물 사전 등)를 확인했지만 두 독음이 갈리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어느 쪽이 맞는지 가려 주는 사료·문헌은 찾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가나로 쓴 서명이 남지 않은 센고쿠 시대 무장의 이름(諱)은 편찬서마다 독음이 갈리는데, 이 인물도 그런 경우로 보인다는 것이 이 글의 추정이다. 처음 이름은 鑑直(아키나오)였다고 한다. 타치바나 긴치요 편에서 쓴 “아키토시”는 어느 문헌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독음이라 이 글과 함께 정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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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요시오카 나가마스(吉岡長増)」·「우스키 아키하야(臼杵鑑速)」·「요시히로 아키마사(吉弘鑑理)」 항목. 삼로의 구성은 자료마다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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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타시 「오토모 소린과 그 시대(大友宗麟とその時代)」(https://www.city.oita.oita.jp/o157/bunkasports/citypromotion/1369370791117.html). 자비에르 서간은 Coleridge 역, The Life and Letters of St. Francis Xavier, vol.2 (Burns & Oates, 1890) pp.343–345(Internet Archive). 고노 요시노리(河野純徳) 역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전서간(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全書簡)』(平凡社, 1985)은 열람하지 못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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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타시 오토모 가문 유적 안내(https://www.city.oita.oita.jp/bunkasports/rekishi/otomoshiiseki/index.html)와 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씨 유적(大友氏遺跡)」 항목(프로이스 『일본사』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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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센리(2014)가 인용한 카르네이루 앞 1567년 서한(『16·17세기 예수회 일본보고집(十六・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 Ⅲ-3, pp.253·255). 간다는 두 서한이 남만 무역으로 무기를 얻으려는 소린의 관심, 특히 모리와의 전쟁을 의식한 것을 보여 준다고 본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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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명세종실록(明世宗実録)』과 가게 도시오(鹿毛敏夫)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인용). 호종헌의 보고에는 소린의 사자 일행(43명)이 저장의 저우산 섬에 와서 무역 허가를 청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위키백과가 전한다. 실록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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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 ミネルヴァ書房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소개문(https://www.minervashobo.co.jp/book/b548715.html), 吉川弘文館 저자 페이지(https://www.yoshikawa-k.co.jp/author/a46262.html). 가게 도시오(鹿毛敏夫)의 저서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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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프랑키포(フランキ砲)」·「우스키성(臼杵城)」·「호사츠 합전(豊薩合戦)」·「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 『디지털 대사전(デジタル大辞泉)』(코토방크 「쿠니쿠즈시(国崩し)」), 오이타현 「오토모포(大友砲(国崩し))」(https://www.pref.oita.jp/site/archive/200771.html).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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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센리(神田千里), 「오토모 소린의 개종 ― 그 실태와 배경 ―(大友宗麟の改宗 ― その実態と背景 ―)」, 『도요대학 문학부 기요 사학과편(東洋大学文学部紀要 史学科篇)』 40(2014) pp.71–110(https://toyo.repo.nii.ac.jp/records/7214). 논문 전문을 직접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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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eridge 역, The Life and Letters of St. Francis Xavier, vol.2 pp.343–345. 핀투 유래라는 언급은 콜리지의 각주.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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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81(프로이스 『일본사(日本史)』 제1부 제10장, 『프로이스 일본사(フロイス日本史)』 6권 9장 p.114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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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Fujitani, “The Jesuit Hospital in the Religious Context of Sixteenth-Century Japan,” Japanese Journal of Religious Studies 46/1 (2019) pp.79–101(가고 1555년 서한은 MHSI 137, pp.549–550·567 인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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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p.79–80(카브랄 1576년 9월 9일 서한, TTJ ff.44v–45, CEV I ff.356v–357, 『보고집(報告集)』 Ⅲ-4 p.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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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p.77–78(프로이스 1578년 10월 16일 서한, TTJ ff.68v–69, 『보고집(報告集)』 Ⅲ-5 pp.8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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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의 인용, 『조호테이세이헨넨오토모시료(増補訂正編年大友史料)』 24권 75호·81호. 간다는 이 이후에 칸주 답례장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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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p.81–82(몬테 1564년 10월 9일 서한, 『보고집(報告集)』 Ⅲ-2 pp.237–238, 알메이다 1564년 10월 14일 서한). 선교사가 옮긴 발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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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키시 안내(https://www.city.usuki.oita.jp/docs/2014020600551/), Encyclopaedia of Portuguese Expansion 「Francisco Cabral」 항목(https://eve.fcsh.unl.pt/en/people/francisco-cabral-1533-1609). 음력 7월 25일을 서양 8월 28일로 환산한 것은 이 글의 계산이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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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p.83–87(프로이스 1578년 10월 16일 서한, TTJ f.72v, CEV I ff.421v–422, 『보고집(報告集)』 Ⅲ-5 p.95). 동기에 대한 해석은 간다의 것이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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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p.83–90(프로이스 1578년 10월 16일 서한 TTJ ff.69–69v, 『보고집(報告集)』 Ⅲ-5 pp.88–89, 『프로이스 일본사(フロイス日本史)』 7권 37장, 카리온 1579년 12월 10일 서한 CEV I f.436v). 일본어 위키백과 「나타 부인(奈多夫人)」·「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협동DB(https://crd.ndl.go.jp/reference/detail?page=ref_view&id=1000261431). 나타 부인의 생몰·혼인 시기는 위키백과 서술이 서로 다르다. ↩ ↩2 ↩3 ↩4 ↩5 ↩6 ↩7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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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가 인용한 『오토모키(大友記)』(『구주치란기(九州治乱記)』) 「부인의 저주에 관한 일(御簾中御呪詛之事)」와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 권58. 두 책 모두 에도 시대 편찬물이며 서로 참조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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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p.90–92(『사가라가문서(相良家文書)』 12월 19·21일, 『오토모가문서록(大友家文書録)』 4월 14일 요시무네 서장, 『히라바야시문서(平林文書)』 4월 24일 요시무네 서장). Strathern(2020)은 3월 진입, 5월 마츠오성 점령으로 서술해 시기가 조금 다르다.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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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p.93–96(프로이스 1578년 10월 16일 서한, TTJ ff.70v–71, CEV I f.420, 『보고집(報告集)』 Ⅲ-5 pp.91–92). ↩ ↩2 ↩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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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p.96–97과 주석 14(카리온 1579년 12월 10일 서한, CEV I f.437). 와타나베 스미오(渡辺澄夫), 「오토모 소린과 기독교적 이상국(大友宗麟とキリスト教的理想国)」, 『사학논총(史学論叢)』 11(1980)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서지(https://iss.ndl.go.jp/books/R000000004-I2113575-00)만 확인했다.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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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93, Alan Strathern, “The Many Meanings of Iconoclasm,” Journal of Early Modern History 25 (2021) pp.163–193(프로이스 1578년 9월 30일 서한, Jap.Sin.45II ff.4v–5). 신전 이름은 두 논문이 다르게 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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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기무라 다다오(木村忠夫) 집필, 코토방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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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p.99–102(『시가 도에키 외 렌쇼조쇼(志賀道易他連署条書)』, 『조호테이세이헨넨오토모시료(増補訂正編年大友史料)』 24권 408호, 다키타 마나부(田北学)는 덴쇼 8년 초의 문서로 봄).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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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미미카와 전투(耳川の戦い)」 항목, Strathern(2020)(Tawara Chikakata가 다카조 포위를 맡고 요시무네는 노즈에서 지휘). 소린의 결전 당일 철수는 위키백과의 시간표(『가와카미 히사타츠 미미카와 일기(川上久辰耳川日記)』 인용)에 의존한다. 서양 역법 환산(12월 10일)도 위키백과 표기를 따랐고 율리우스력·그레고리력 구분은 확인하지 못했다.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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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p.67–70(나타 아키모토의 아들이 다와라 치카카타임). 다와라 가문 양자 입양은 일본어 위키백과 「다와라 치카카타(田原親賢)」 항목에 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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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미미카와 전투(耳川の戦い)」·「다키타 시게치카(田北鎮周)」·「츠리노부세(釣り野伏せ)」 항목, rekishikomugae 블로그(프로이스의 일본어 번역 인용, https://rekishikomugae.net/entry/2022/06/22/081649), 다나카 뎃켄(田中鉄軒), 『사츠한센시코쇼(薩藩戦史考証)』(皆兵社, 1913). 프로이스 『일본사』 원문은 대조하지 못했다. 병력과 군의 세부는 2차 서술이며 출전은 확인하지 못했다. “츠리노부세”라는 명칭은 확인되는 가장 이른 용례가 1913년의 『사츠한센시코쇼』이고, 전술 자체는 동시대 기록에 있지만 이름은 근대에 붙은 것으로 보인다.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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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thern(2020)(타치바나 도세츠(立花道雪) 서장, 『조호테이세이헨넨오토모시료(増補訂正編年大友史料)』 24권 214–215호, 영역은 Xia-Kang Ziyi, Mayo 2015 참조. 본문 인용문은 이 영역을 우리말로 옮긴 것), 간다(2014) p.103(카리온 1579년 12월 10일 서한, CEV I ff.440v–441, 『보고집(報告集)』 Ⅲ-5 pp.151–153).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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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코하이키(大友興廃記)」 항목. 『오토모코하이키(大友興廃記)』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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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thern(2020)(Hibbard and Hiraishi 1963 영역 pp.6–7 인용). 프로이스에 이미 같은 논리가 있으므로 이를 최초 출전으로 볼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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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각주(『다이니혼코몬조 시마즈가문서 3(大日本古文書 島津家文書之三)』 1423호), 「미미카와 전투(耳川の戦い)」 항목, 伊集守道 2010(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서지, https://ndlsearch.ndl.go.jp/books/R000000004-I10867664).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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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 수치와 연도는 위키백과 내부에서도 갈리는 곳이 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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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thern(2020)(프로이스 『일본사』 인용). 스트래선은 이 반란자를 치카히로(Chikahiro)라고 쓰지만, 일본어 위키백과 「다와라 치카츠라(田原親貫)」에서는 반란 주모자가 치카츠라이고 치카히로(親宏)는 반란 직전인 1579년 9월에 죽은 종가 당주여서, 스트래선이 이름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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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2014) p.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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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규슈 평정(九州平定)」 항목, 오이타시 「소린과 천하인(宗麟と天下人)」(https://www.city.oita.oita.jp/o205/documents/sourinntotennkabito.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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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항목(미야모토 요시미(宮本義己) 논문 인용). 『오토모가문서록(大友家文書録)』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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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호사츠 합전(豊薩合戦)」·「헤츠기가와 전투(戸次川の戦い)」·「규슈 평정(九州平定)」 항목.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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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헤츠기가와 전투(戸次川の戦い)」·「호사츠 합전(豊薩合戦)」·「우스키성(臼杵城)」·「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 프로이스의 요시무네 비판은 「헤츠기가와 전투(戸次川の戦い)」의 인용.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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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나타 부인(奈多夫人)」 항목(『예수회 일본연보(イエズス会日本年報)』 1586년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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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규슈 평정(九州平定)」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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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쿠미시 관광협회(https://tsukumiryoku.com/pages/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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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야마카와 일본사소사전(山川 日本史小辞典)』·『브리태니커(ブリタニカ)』(코토방크), 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항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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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오이타 교구(https://oita-catholic.jp/pages/102/), 츠쿠미시 관광협회, 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항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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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 항목(가게 도시오(鹿毛敏夫)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인용),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기사(Yahoo!ニュース). 히데요시 주인장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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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오토모 요시노리(大友義乗)」·「오토모 요시치카(大友義親)」·「오토모 요시타카(大友義孝)」·「오토모씨(大友氏)」 항목(『간세이주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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