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노 합전도 병풍》, 18세기 제작 6곡 1척 병풍. 왼쪽에 마방책과 오다·도쿠가와 철포대, 오른쪽에 다케다군과 나가시노성이 배치되어 있다. 도요타시립향토자료관 소장.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 1527–1596) 완전 정리 — 도쿠가와 사천왕

야마가타현 츠루오카(鶴岡)에 갔다가 지도박물관(致道博物館)에 들렀다. 옛 쇼나이번(庄内藩) 번주 사카이 가문의 은거소 자리에 세운 박물관이라 가문 전래품이 많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에 갑주 두 벌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색색의 실로 엮은 도마루(胴丸)였고, 다른 하나는 붉은 칠을 하고 커다란 금빛 사슴뿔을 단 구소쿠(具足)였다.

둘 다 안내판에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최고참 가신, 이른바 도쿠가와 사천왕의 필두라는 그 사람이다. 400년 전 사람이 입었다는 갑옷이 눈앞에 서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돌아와서 지정 원부를 찾아보니 표현이 미묘했다.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도마루 쪽 문화청 기록에는 “타다츠구의 소용(所用, 의식용)으로 전해지고”라고 적혀 있었다. 야마가타현 지정인 사슴뿔 쪽은 “타다츠구 전래도 수긍된다”였다. 둘 다 사카이 타다츠구가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사카이 타다츠구 소용으로 전해지는 이로이로오도시 도마루
이로이로오도시 도마루(色々威胴丸). 야마가타현 츠루오카 지도박물관 소장, 중요문화재. 무로마치 시대 후기 제작으로, 문화청 원부는 타다츠구 소용으로 "전해진다"고 적는다. Public Domain.
금빛 사슴뿔 와키다테를 단 주칠 갑주, 사카이 타다츠구 전래로 전해지는 슈누리 구로이토오도시 니마이도구소쿠
슈누리 구로이토오도시 니마이도구소쿠(朱塗黒糸威二枚胴具足).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야마가타현 지정. 투구에 붙은 금박 입힌 목제 사슴뿔이 지정 원부의 "대녹각 와키다테" 기술과 일치한다. 2026년 8월 츠루오카 지도박물관 전시실에서 직접 촬영.

박물관이 그의 대표 유물로 내세우는 갑옷인데 확실히 그가 사용하던 거라는 증거가 없다니. 그렇다면 이 사람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은 어디까지가 사실로 확인된 것일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에서 처음 만났던 사카이 타다츠구에 대해 파보기 시작했다.

1. 초년기 — 기록이 없는 32년 (1527~1559)

타다츠구는 다이에이 7년(1527) 미카와국 누카타군 이다성(井田城)에서 태어났다. 지금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이다초, 오카자키성에서 북쪽으로 2km쯤 되는 자리다. 유명(幼名)은 고헤이지(小平次), 통칭 고고로(小五郎)였다.

여기까지가 흔히 알려진 내용인데, 하나씩 확인해보면 남아 있는 기록이 별로 없다.

집안의 계보가 아버지 위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카이씨(酒井氏)가 마츠다이라씨(松平氏)와 시조를 공유한다는 전승이 있다. 마츠다이라 치카우지(松平親氏)의 서장자 사카이 히로치카(酒井広親)가 사카이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건 마츠다이라씨가 세이와겐지 닛타씨류(清和源氏新田氏流)를 사칭하면서 거기에 맞춰 이에야스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무가가 겐지 계보를 끌어다 붙여 출신을 꾸미는 건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일본대백과전서』와 『국사대사전』이 각각 “타다츠구의 아버지부터 계보가 쓰여 있고 그 사이는 명확하지 않다”고 적는다. 실증이 가능한 건 사카이 타다츠구와 그의 아버지 단 2대뿐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갈린다. 막부 계보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줄여서 『간세이후(寛政譜)』에는 사카이 타다치카(酒井忠親)의 차남으로 나오고, 쇼나이 사카이 가문 쪽 전승은 사카이 타다요시(酒井忠善)의 적장자라고 기록돼 있다. 간세이후에서 타다요시는 타다츠구의 형이다.

사카이 타다츠구가 태어났다는 이다성도 남아 있지 않다. 이다성터는 오카자키시 지정 사적 25건에 들어 있지도 않고 발굴 관련한 이야기도 전혀 없다. 옛 이다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건 에도시대의 그림 두 점이 전부다. 같은 도쿠가와 사천왕인 혼다 타다카츠의 탄생지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쪽도 성이 남아 있지 않고, 민가 마당에 석비와 안내판만 서 있는데 사적으로 지정이 돼 있다.

사카이 타다츠구의 가문은 마츠다이라 종가와 싸운 적도 있다. 덴분 4년(1535)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清康)가 진중에서 가신에게 살해된 모리야마쿠즈레(守山崩れ) 이후, 「酒井左衛門尉」는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에게 반대하고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쪽에 붙었다. 이시카와 키요카네(石川清兼)와 사카이 마사치카(酒井正親)의 할복을 요구하기까지 했다(히라노 아키오 2002). 이때가 타다츠구가 여덟 살 때인데, 사카이 가문이 대대로 도쿠가와가에 충성한 후다이 다이묘라는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1.1 이마가와 인질 시절 슨푸 동행설 검증

사카이 타다츠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돈독한 관계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이거다. 덴분 18년(1549) 유명(幼名)인 다케치요로 불리던 시절의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인질로 슨푸에 갈 때, 스물세 살 타다츠구가 사카이 마사치카 다음가는 최고령 수행자로 따라갔다는 것. 이에야스의 어린 시절 가장 힘들던 인질 시절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사카이 타다츠구와 이에야스는 평생의 동지였다는 이야기.

그런데 기록을 찾아보니 근거가 없었다.

사료성립슨푸 수행 명단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1622~1632명단 자체가 없다
『마츠다이라키(松平記)』17세기 전반아마노 야스카게 한 명
『간에이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1643사카이 마사치카
『간세이후』 권651812타다츠구

타다츠구가 당시에 이에야스와 함께 슨푸에 있었다는 서술이 처음 나오는 건 1812년이다. 사건에서 263년 뒤다. 원문은 「忠次舊臣等とともにしたがひたてまつり、駿府に住す」다. 타다츠구가 옛 가신들과 함께 다케치요를 따라 모시고 슨푸에 살았다고 적었다.

문제는 이 부분이 1643년 『간에이쇼카케이즈덴』이 사카이 마사치카에게 쓴 문장과 같은 문형이라는 것이다. 마사치카에게만 있던 서술이 169년 뒤 타다츠구 항목으로 옮겨 붙은 것인데, 아무래도 타다츠구가 당시 슨푸에 있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라기보다는 같은 사카이씨다 보니 옮겨 적는 과정에서 잘못 들어간 오류로 보인다.

“스물세 살”, “마사치카 다음 최고령”이라는 구체적 수치는 어느 사료에도 없다. 일본어 위키백과가 이 대목에 각주를 달아둔 곳이 오카자키시 관광 사이트인데, 정작 그 페이지에도 그런 서술이 없다.

『미카와모노가타리』를 전수 검색해봤다. 타다츠구가 처음 나오는 건 1563년 잇코잇키 대목의 「坂井左衛門丞」이고, 인질기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이 강조하는 건 후다이들이 다케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쪽이다.

덧붙이면 이마가와가 오카자키를 비워둔 것도 아니었다. 차엔 히로키(茶園紘己)는 아베 사다요시(阿部定吉)를 다루면서, 덴분 18년(1549) 이후에도 오카자키에서 즈이넨인(随念院)과 마츠다이라 봉행인들이 정무를 이어갔다고 논증했다(2020). 다만 이 시기 문서에 타다츠구 본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1.2 우키가이성 전투 무용담(1556) 검증

고지 2년(1556)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가 2천 기로 우키가이성(福谷城)을 치자 타다츠구가 성 밖으로 나가 격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최초의 사료는 『이에타다닛키 조호츠이카(家忠日記増補追加)』로, 1665~1668년에 걸쳐 쓰였다. 전투로부터 110년이 지난 뒤다.

미카와 지역의 지리지 『미카와국 후타바마츠(三河国二葉松)』(1740)의 실제 원문은 두 줄뿐이다. “우키가이무라 고성. 하라 우에몬, 사카이 사에몬. 이곳에 옛날 합전이 있었다.” 전투가 벌어진 연도도, 적이었다는 시바타 카츠이에에 대한 언급도, 양군의 병력에 대한 기록도 없다.

우키가이성이 실재했던 것은 확실하다. 발굴로 곽(曲輪, 성 안의 구획) 다섯 개와 공호(空堀, 물 없는 해자)가 확인됐고,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 유물이 나왔으며, 1562년 이후 폐성된 것으로 본다. 성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사카이 타다츠구가 이 성에서 뭘 했는지가 불분명하다.

1.3 첫 동시대 기록 (1559)

그가 동시대 문서에 처음 등장하는 건 에이로쿠 2년(1559) 8월 28일이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타다츠구 앞으로 발급해준 슈인조(朱印状, 붉은 도장을 찍은 명령 문서)로, 지금도 지도박물관에 남아 있다.

미카와 다이주지에 세운 지불당 켄교인을 다룬 문서다. 진취(陣取, 군대 주둔)와 제역(諸役, 각종 부역)을 면제하고, 난폭한 자가 있으면 이름을 적어 올리라고 했다.

이 문서 한 장에서 확인되는 것은 세 가지다.

  1. 오케하자마 아홉 달 전 그는 슨푸가 아니라 미카와에, 그것도 생가 이다성의 지척에 있었다.
  2. 이마가와 요시모토로부터 직접 문서를 받는 위치였다.
  3. 그가 하던 일은 사원 구역의 치안과 세역 면제를 집행하는 행정이었다.

이렇게 32세가 되는 해에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알던 용맹한 무장이 아니라 행정 관리였다.

2. 동미카와 통치 시작 (1560~1569)

사카이 타다츠구 초상화
사카이 타다츠구 초상.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제작으로 추정되며, 원본은 그의 보리소인 교토 지온인(知恩院) 탑두 센구인(先求院)에 있다. Public Domain.

에이로쿠 3년(1560) 오케하자마 이후 그의 지위가 빠르게 올라간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주군인 마츠다이라 가문과의 혼인이었다.

정실 우스이히메(碓井姫)는 이에야스의 할아버지인 마츠다이라 키요야스의 딸이다. 우스이히메의 어머니 게요인이 키요야스와 재혼하기 전에 미즈노 다다마사의 처였고 그 사이에서 이에야스의 어머니인 오다이노카타를 낳았으므로, 우스이히메는 이에야스에게 친가 쪽 고모이면서 외가 쪽 이모가 된다. 타다츠구는 이에야스보다 열다섯 살 위였고, 이 혼인으로 이에야스의 고모부이자 이모부가 됐다.

그런데 우스이히메에게 이 혼인은 초혼이 아니었다. 우스이히메는 먼저 마츠다이라 종가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가문인 나가사와 마츠다이라가(長沢松平家)의 마츠다이라 마사타다(松平政忠)에게 시집갔고, 마사타다가 오케하자마에서 전사한 뒤 타다츠구에게 재가했다. 장남 사카이 이에츠구(酒井家次)가 에이로쿠 7년(1564)생이므로 혼인 시기는 1560년 하반기에서 1563년 사이로 좁혀진다.

타다츠구 쪽은 이 혼인이 초혼이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서른일곱에 첫아이를 봤으니 당시 무가로서는 늦은 편인데, 그 전의 혼인을 적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왜 이런 혼인 관계를 맺었는지를 알려면 이 시기의 상황을 다시 봐야 한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승리하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죽음을 맞게 된다. 이로 인해 이마가와 휘하에 있던 이에야스가 이마가와로부터 떨어져 나와 본거지에 남아 있던 가신단을 다시 묶던 국면이다. 이 혼담은 사카이 타다츠구와 이에야스의 오래된 인연 덕분에 시작된 게 아니라, 이에야스가 독립 세력을 구축하던 시기에 내린 정치적 판단으로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

이후에 벌어진 미카와의 잇코잇키(一向一揆, 정토진종 문도들이 일으킨 봉기, 1563~1564) 반란 사건에서는 사카이 일족이 둘로 갈렸다. 사카이 타다츠구는 이에야스의 편에 섰지만 같은 사에몬노조가 일족인 우에노성의 사카이 타다나오(酒井忠尚)는 이에야스에게 등을 돌렸다. 다만 흔히 말하는 “사카이 일족이 잇코잇키에 가담했다”는 도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히라노 아키오가 시간 순서를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타다나오의 거병이 잇키 발생보다 반년 이상 앞서고, 양측이 연락하거나 공동작전을 편 흔적이 없다(2017). 사카이 타다나오가 잇코잇키 반란 시기에 이에야스와 군사적으로 대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잇코잇키 반란의 일환도 아니었고, 사카이 타다나오가 갈라선 이유가 잇코슈 신앙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2.1 요시다성 입성 — 1564년설 vs 1565년설

요시다성(吉田城)은 이마가와 가문이 동미카와를 지배하던 시절 거점으로 삼았던 성이었다. 이 성을 얻는다는 것은 동미카와의 지배권을 확보했다는 의미였다.

요시다성터의 이시가키와 해자, 현 아이치현 도요하시 공원
요시다성터. 현재는 아이치현 도요하시 공원이다. 타다츠구가 1565년부터 20여 년간 동미카와 통치의 거점으로 삼은 성이다. 사진에 보이는 이시가키는 그가 떠난 뒤 이케다 테루마사가 쌓은 것이다. Public Domain.

사카이 타다츠구가 이 성의 책임자로 취임한 연도를 두고 1564년설과 1565년설이 갈려 있었는데, 원문을 보면 두 연도에 각각 서로 다른 사건이 있었다.

에이로쿠 7년(1564) 6월 22일자 이에야스 한모츠(判物, 서명을 넣은 명령 문서)가 지도박물관에 남아 있다. 문면에 「吉田東三河之儀申付候…其上於入城者、新知可申付候」라 적혀 있다. 동미카와 일을 맡기며, 입성한다면 새 지행(知行, 주군이 가신에게 주는 영지와 그 수입)을 주겠다는 조건절이다. 이 시점에 성은 아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실제 입성은 이듬해다. 기록을 보면 에이로쿠 8년(1565) 2월까지도 요시다성은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真)가 통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는데, 같은 해 3월 11일이 되면 성의 지배권이 이에야스 쪽으로 넘어간 것이 확인된다. 사카이 타다츠구가 부하에게 영지를 내려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1564년은 동미카와를 다스리라고 발령을 받은 해, 1565년은 이마가와 가문과의 교섭 끝에 요시다성의 지배권이 넘어오면서 실제로 부임을 하게 된 해라고 볼 수 있다.

덧붙이자면 사카이 타다츠구가 “요시다 조다이(城代)“라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후대에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은 직함으로 보인다. 『아이치현사』 강문을 1520~1570년 구간 전수 검색해도 城代라는 표현 자체가 단 한 건도 나오지 않고, 동시대 문서에는 「재성(在城)」이라고만 나온다.

2.2 요리오야로서의 통치와 권한의 한계

이후 그의 위치는 동미카와 요리오야(寄親)다. 도다 씨, 마키노 씨, 사이고 씨 같은 동미카와 4군의 호족을 통솔했다. 서미카와 쪽에는 이시카와 이에나리(石川家成)가, 에이로쿠 12년(1569)부터는 조카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数正)가 같은 역할을 맡았다.

요리오야가 어떤 역할을 하는 자리인지는 실제로 사카이 타다츠구가 본인 명의로 남긴 문서 20여 건에서 볼 수 있다. 이 문서들이 아이치현 공문서관이 공개한 강문 일람에서 확인된다.

연도문서
에이로쿠 8년(1565)하야시 주에몬(林十右衛門)에게 야시키지 급여
에이로쿠 9년(1566)초케이지(長慶寺)에 사령 안도, 제역 면제
덴쇼 5년(1577)신전의 정납고 결정
덴쇼 7년(1579)연공 정납 면허
덴쇼 12년(1584)오와리 오아가타샤에 사령 안도, 난폭·낭자 금지

부하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절에 세금을 매기거나 면제해 주고, 새로 일군 밭의 세를 정하고, 마을에 난동과 도둑질을 금하는 금제를 내렸다. 요시다령 안에서 그는 영주로 행세했다. 겐키 원년(1570)에는 도요카와를 건너는 흙다리 요시다대교를 놓기도 했다 — 뒤에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가 하류에 목조로 다시 놓은 것이 지금의 도요하시(豊橋)라는 지명이 됐다.

다만 그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이노야 산닌슈(井伊谷三人衆)의 지행지 급여는 에이로쿠 11년(1568) 이에야스가 직접 증문을 발급했다. 타다츠구를 거치지 않았다. 타다츠구 본인에 대한 직접 사료는 없지만, 비슷한 시기 이에야스의 다른 요리오야였던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를 연구한 고미야마 도시카즈(小宮山敏和, 2002)에 따르면 국인(国人, 재지 토호)이 원래 갖고 있던 본령(本領, 세습 영지)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안도(安堵)의 권한은 요리오야가 아니라 당주 이에야스에게 남아 있었다. 타다츠구도 같은 구조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건 유추이지 직접 증거는 아니다.

2.3 다케다 동맹의 인질로 보낸 딸 (1569)

에이로쿠 12년(1569) 말, 이에야스가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동맹을 맺을 때 타다츠구는 자기 딸을 인질로 다케다 가문에 보냈다. 그런데 신겐의 동생 다케다 노부토모(武田信友)가 도쿠가와 쪽과 사전 협의 없이 이마가와와 인질을 주고받는 일이 벌어졌다. 동맹은 애초에 이마가와 영국을 함께 치자는 반이마가와 밀약이었으므로, 다케다가 몰래 이마가와와 접촉한 건 맹약 위반이었다. 이에야스가 이를 걸어 항의했고, 다케다 쪽은 타다츠구의 딸을 돌려보냈다. 『전국유문(戦国遺文)』 다케다씨편 1369호에 남은 동시대 문서다.

동맹의 담보로 자기 딸이 뽑혔다는 것 자체가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다케다 쪽에서 사카이 타다츠구의 딸이라면 인질로 가치가 있는 충분히 중요한 인물로 인정한 만큼, 마흔둘의 그는 도쿠가와가의 필두 가로(家老, 다이묘 가문의 최고위 가신)로 대외에 인지되고 있었다.

3. 전장 기록 검증 (1570~1585)

사카이 타다츠구가 썼다는 흑칠 군바이단선, 치도박물관 소장
구로누리 군바이단선(黒塗軍配団扇).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츠루오카 치도박물관 소장. 군바이는 진중에서 장수가 가신을 지휘하는 도구다. 중앙에 해·달·별과 간지를 그린 도판이 있고 그 위에 렌즈 두 개와 방위자석이 달렸는데, 안내판은 타다츠구가 싸움에 앞서 길흉을 점쳤을 것이라고 적는다. 2026년 8월 전시실에서 직접 촬영.

사료를 면밀히 조사해 보니 사카이 타다츠구가 전공을 세웠다고 나오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그의 활약상이 두드러지지 않았고, 심지어 일부 전투에서는 그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기록이 남아 있는 하나의 전투, 나가시노에서는 오히려 흔히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이 나와 있었다.

미카타가하라(1573년 1월, 다케다 신겐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 — 이에야스가 목숨만 겨우 건져 도주했을 만큼 참패해 도쿠가와가 최대 위기로 꼽힌다). 타다츠구가 등장하는 사료는 다케다 쪽 기록인 『고요군칸(甲陽軍鑑)』 하나뿐이다.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 부대를 쳤다가 아마리 부대의 옆찌르기를 받고 무너졌다는 내용이다. 『미카와모노가타리』에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아네가와(1570,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 연합군과 오미에서 맞붙어 이긴 전투). 흔히 선봉을 맡았다고 적히는데, 근거는 『간세이후』 권65 하나다. 동시대 사료인 『신초코키(信長公記)』 권3에는 도쿠가와 측 개별 지휘관 이름이 아예 없다.

다카텐진성(1574년 1차 함락, 1581년 2차 탈환 — 도토미의 이 성을 두고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뺏고 빼앗겼다). 1차 함락과 2차 탈환 어느 쪽에서도 그의 역할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 전역은 오스가 야스타카(大須賀康高)와 요코스카슈, 이시카와 야스미치(石川康通) 라인이 맡은 도토미 방면 작전이었다. 타다츠구는 동미카와를 지키고 있었다.

제1차 우에다 전투(1585,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시나노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를 치려다 훨씬 적은 병력에 참패한 전투). 여기에도 그는 없다.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히라이와 치카요시(平岩親吉)가 나갔고 이이 나오마사가 후속으로 붙었다.

3.1 나가시노 전투 — 도비가스야마 기습 (1575)

덴쇼 3년(1575) 나가시노 전투(시타라가하라 전투라고도 한다)는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가 미카와의 나가시노성을 포위하면서 시작됐다. 나가시노성은 이에야스의 가신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奥平貞昌)가 지키던 도쿠가와 영내의 성이었으므로, 이 싸움의 승패는 곧바로 도쿠가와가의 생존과 직결됐다. 본전에 나선 병력은 오다 쪽이 더 많았다(다카야나기 미츠토시 추정 오다 12,000–13,000, 도쿠가와 4,000–5,000). 다케다군은 이 전투에서 유력 무장 다수를 잃고 사실상 궤멸했고, 7년 뒤 다케다 멸망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으로 꼽힌다.

그 나가시노에서 벌어진 도비가스야마(鳶ヶ巣山) 기습이 타다츠구의 최대 전공으로 꼽힌다. 이건 동시대 사료로 확정된다.

오타 규이치(太田牛一)의 『신초코키』 권8에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내용이 매우 상세하다. 노부나가는 타다츠구를 이 병력 전체의 대장으로 삼았다. 도쿠가와 쪽 활·철포 병사 2000은 타다츠구가 직접 뽑은 병력이었고, 여기에 노부나가 직속 우마마와리의 철포 500정, 오다 측 검사(検使, 전황을 살피는 감독관) 네 명이 더해져 도합 약 4000. 나가시노 일대는 원래 타다츠구 자신의 관할 권역이라, 야간에 산길을 돌아가는 이번 작전에서 그는 지리에 밝은 쪽이었다. 5월 20일 술시(밤 8시에서 10시 사이)에 우레강을 건너 남쪽 심산을 돌았고, 21일 진시(아침 6시에서 8시 사이)에 도비가스야마로 돌격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다케다의 7개 부대는 혼비백산하여 패주했다.

도비가스야마 성채터, 아이치현 신시로시
도비가스야마(鳶ヶ巣山) 성채터. 타다츠구가 4000명을 이끌고 밤에 강을 건너 새벽에 친 곳이다. 촬영 Monado, CC BY-SA 2.5.

아쉽지만 사카이 타다츠구가 지휘한 병력의 규모까지 특정되는 이 기록은 그의 전 생애에서 유일하다. 다른 전투에서는 그가 몇 명을 지휘했는지는 어느 동시대 사료에도 없다. 피해에 대한 기록도 상세하게 남아 있는데, 별동대에 속한 후코즈 마츠다이라 코레타다(深溝松平伊忠)가 앞서 나갔다가 퇴각하던 오야마다 마사나리(小山田昌成)의 반격에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다.

3.2 다케다 멸망전 지휘권과 혼노지의 변 (1582)

덴쇼 10년(1582) 다케다 멸망전에서 그의 개별 임무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이 시기에 그의 지휘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았다.

후코즈 마츠다이라 가문 당주 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家忠)가 쓴 『이에타다닛키(家忠日記)』다. 저자는 타다츠구 휘하 동미카와 소속이었고, 덴쇼 10년 2월 기사에 이렇게 적었다.

  • 3일, 타다츠구로부터 경계의 성을 보수하라는 명령
  • 5일, 타다츠구로부터 출진 명령
  • 12일, 스루가 출진 관련 지시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성을 튼튼히 하고, 군대를 동원하고, 출진을 지시하는 상급 지휘관의 풍모를 보여준다. 부하가 실시간으로 쓴 일기라 자료로는 이게 가장 확실하다.

이에타다 일기에는 넉 달 뒤 혼노지의 변 당시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6월 3일조(条, 일기·사료에서 특정 날짜의 기사를 가리키는 말)에 「京都酒左衛門尉所より家康御下候者、西国へ御陣可有之由申来候」라 적었다. 교토의 사에몬노조 처소로부터, 이에야스께서 내려오시는 것은 서국으로 출진이 있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전해 왔다는 내용이다. 사카이(堺) 구경에 나선 이에야스를 수행하며 타다츠구가 보낸 전언이다. 그가 혼노지의 변 시점에 이에야스와 함께 간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이 동시대 사료로 확정된다.

이후 이가고에(伊賀越え, 혼노지의 변 직후 이에야스가 소수 인원만 데리고 적지나 다름없는 이가·고카 지역을 가로질러 자기 영지까지 탈출한 사건)에서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이때 이에야스를 수행한 34명의 이름이 흔히 도는데, 이 명단은 신뢰하기 어렵다. 그중 미우라 오카메는 이가고에 당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3.3 덴쇼 진고의 난 실패와 코마키·나가쿠테 승리 (1582~1584)

덴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 1582년 6월~12월)은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고(3월) 오다 노부나가마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6월), 주인을 잃은 옛 다케다 영지(가이·시나노·고즈케)를 두고 도쿠가와·호조·우에스기 세 세력이 벌인 쟁탈전이다. 타다츠구는 이 중 미나미시나노(南信濃) 방면 공략의 총지휘를 맡았는데, 그의 이력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 대목이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덴쇼 10년(1582) 6월 27일 그는 시나노로 파견돼 오쿠미카와와 이나를 거쳐 침공을 시작했다(『이에타다닛키』). 초반엔 이나군의 호족 시모조 요리야스(下条頼安)를 도쿠가와 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7월, 호조 편에 서 있던 스와군 다카시마성주 스와 요리타다(諏訪頼忠)를 조략(調略, 회유나 매수로 적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공작)하는 데 실패하면서 진군이 멈췄다. 결국 요리타다의 항복을 받아낸 건 다섯 달 뒤인 12월이다.

히라야마 유는 스와 요리타다뿐 아니라 오가사와라 사다요시(小笠原貞慶)의 이반까지 겹쳐 이 작전이 실패로 끝났다고 정리한다(2024). 방면군 전체의 지휘를 맡을 만큼 이에야스의 신임을 받았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작전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1584)는 노부나가 사후 그 후계 자리를 두고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카츠·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맞붙은 싸움이다. 이 전투에서 타다츠구는 승리했다.

3월 16일 야반, 그는 마츠다이라 이에타다 등과 함께 5000명을 이끌고 하구로로 은밀히 출진했다. 이튿날 미명 히데요시 쪽 장수 모리 나가요시(森長可) 부대를 기습해 패퇴시켰다. 이게 하구로 전투다. 본전인 나가쿠테 전투(4월 9일)에 앞서 거둔 도쿠가와 측 첫 승리이고, 그해 그의 최대 전공이다.

전투가 끝난 뒤 이에야스는 최전방 거점인 코마키야마성을 그에게 맡기고 자신은 기요스로 옮겨갔다. 그해 말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와 단독으로 화목을 맺으면서 전쟁이 사실상 끝나자, 이에야스는 화해의 표시로 아들 오기이(於義伊, 훗날의 유키 히데야스)를 오사카에 인질 겸 양자로 보냈다. 타다츠구는 이시카와 카즈마사와 함께 이 호송을 맡았다.

4. 노부야스 사건에서 그가 한 일

덴쇼 7년(1579) 8월, 이에야스의 장남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信康)가 오카자키성에서 쫓겨나고 다음 달 할복한다. 노부야스의 어머니 츠키야마도노(築山殿)도 죽는다.

통설은 이렇다. 노부야스의 아내 토쿠히메(徳姫)가 아버지 노부나가에게 12개조 힐문장(詰問状, 잘잘못을 따져 묻는 문서)을 보냈고, 사자로 간 타다츠구가 조목조목 변호하기는커녕 대부분 사실이라고 인정해버려서 노부야스가 죽게 됐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는 덴쇼 7년 8월 8일자 이에야스 서장이다. 오다 가신 호리 히데마사(堀秀政)에게 보낸 것으로, 이렇게 적혀 있다.

이번에 사에몬노조(左衛門尉, =타다츠구)를 통해 아뢴 바… 사부로(=노부야스)가 불각오하여 지난 4일 오카자키에서 쫓아냈습니다.

추방하기로 결정한 주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이다. 사카이 타다츠구는 이러한 사실을 오다 노부나가에게 알리기 위해 이에야스가 보낸 사자였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회담의 결과에 대해 오다 측의 배려를 고맙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보면 사카이 타다츠구가 외교가 미숙해서, 노부야스의 잘못을 제대로 감싸주지 못해서 주군의 아들인 노부야스를 죽게 만들었다고 해석하기는 힘든 대목이다.

동시대 1차 사료인 『이에타다닛키』에는 노부나가가 어떤 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타다츠구가 사자로 파견됐다는 이야기도 아예 나오지 않는다. 준동시대인 『아즈치닛키(安土日記)』는 노부야스의 사망 원인을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으로만 적고 있으며 노부나가가 처형을 명령했다는 기록은 없다. 『도다이키(當代記)』는 노부나가가 “이에야스 뜻대로 하라”고 답했다고 적혀 있다.

사카이 타다츠구가 토쿠히메의 힐문장에 조목조목 반박하지 못하고 대부분을 사실로 인정해버려 노부야스가 죽게 됐다는 통설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미카와모노가타리』다. 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忠教)가 쓴 책으로,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의 필사기록(오쿠가키, 奥書)은 겐나 8년(1622)이라고 적혀 있지만, 학자들이 고증한 실제 집필 시점은 간에이 3년에서 9년(1626–1632)이다. 노부야스 사망 사건으로부터 43년 내지는 53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 것이다. 저자인 타다타카는 사건 당시 스무 살 안팎으로, 단순히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이 아니라 이에야스 휘하의 가신으로 사건이 벌어진 도쿠가와 진영 안에 있던 인물이다. 하지만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미카와모노가타리』는 “동시대 기록”이 아니라 “동시대인의 40여 년 뒤 회고”다. 게다가 이 책은 자손에게 남기는 가훈서 성격이고 오쿠보 가문의 공적을 현창하려는 동기가 뚜렷하다. 현대 일본사학자 야마무로 교코(山室恭子, 1956~ )는 1995년 저서에서 이 책을 정치성이 강한 후다이 프로파간다의 책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1579년 시점에 타다츠구가 노부야스를 변호했어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8월 8일 서장에서 확인했듯, 노부야스를 추방하기로 이미 결정한 사람은 이에야스 본인이었고 타다츠구는 그 결정을 오다 측에 통보하러 간 사자였을 뿐이다. 애초에 그에게 무언가를 변호하거나 판정할 임무가 주어진 적이 없다.

여기에 도쿠가와 가신단 내에서의 조직구조 문제도 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사카이 타다츠구는 동미카와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부야스 휘하 오카자키 가신단을 통솔한 것은 서미카와 하타가시라(旗頭)이자 노부야스의 후견인이었던 이시카와 카즈마사다. 타다츠구는 동미카와 계통이고 이에야스가 있는 하마마츠 쪽이다. 두 사람은 도쿠가와 가문 내에서 서로 다른 파벌에 속해 있었다. 참고로 노부야스 사망 사건 후 오카자키 조다이가 된 것도 카즈마사다.

현대 학계는 세부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갈리지만 결론은 비슷하다.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 시바 히로유키(柴裕之), 혼다 다카시게(本多隆成), 구로다 모토키(黒田基樹), 히라야마 유(平山優)가 각기 다른 분석을 내놓지만 전원이 도쿠가와 가문 내부 문제로 본다. 다만 “가문 내부 문제”라고 해서 노부야스가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 의견 차이로 죽였다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의 설은 츠키야마도노(혹은 오카자키 가신단)의 다케다 내통 의혹이라는 실질적 정치적 배경을 전제로 하며, 다만 그 책임이 노부야스 본인에게까지 있는지 어머니 쪽에 국한되는지가 갈린다.

한 가지 더 덧붙일 이야기. 이 문제의 발단이 됐다고 알려진 토쿠히메의 12개조 소장은 실물이 남아 있지 않다. 조수도 12조, 10조, 6조로 흔들린다. 동시대와 준동시대 사료에 일절 나오지 않는다. 원본도 사본도 확인되지 않고, 내용은 사건 후 43년 넘게 지나 나온 후대 편찬물에만 전한다는 뜻이다. 조수마저 판본마다 다르다는 건 누군가 실물을 보고 베낀 게 아니라 옮겨 적는 과정에서 계속 달라졌다는 뜻이니, 이 문서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8월 8일 서장에 대해 한 가지는 짚어야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건 원본이 아니라 사본인데, 이 사본에는 정작 몇 년도 문서인지가 빠져 있다. “덴쇼 7년(1579) 문서”라는 건 사본에 적힌 게 아니라, 『신수 오카자키시사』를 편찬한 학자가 내용을 근거로 추정한 연도다. 내용 자체는 앞뒤가 맞지만, 이걸 동시대 1차 사료라고 단정해서 쓰면 안 된다.

5. 도요토미 정권기와 은거 (1584~1588)

도쿠가와와 도요토미가 자웅을 겨룬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이 전투가 끝난 1584년부터 은거하는 1588년까지, 이 4년은 사카이 타다츠구에 대한 기록이 유난히 적다. 연월일이 특정되는 기사가 다섯 건뿐이고 그중 동시대 사료에 근거한 건 하나다.

그런데 그 하나밖에 없는 기록이 중요하다. 덴쇼 13년(1585) 11월 13일 이시카와 카즈마사가 히데요시에게 출분(出奔, 주군을 배신하고 몰래 이탈하는 것)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11월 23일, 히데요시가 보낸 사자 셋이 “타다츠구가 있는 곳으로부터” 오카자키성에 도착했다고 『이에타다닛키』가 적는다. 이는 도쿠가와가와 히데요시 사이의 외교 통로가 타다츠구를 거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필이면 얼마 전까지 정치와 외교 쪽 라인인 서미카와를 담당하던 하타가시라 이시카와 카즈마사가 적국(히데요시)으로 넘어가버린 직후였는데도, 도쿠가와 쪽 외교 창구 역할을 타다츠구가 맡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핵심 인물 하나가 갑자기 이탈해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타다츠구가 대히데요시 창구로 신뢰받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덴쇼 14년(1586) 10월 24일 그는 종4위하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 서임된다. 흔히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사에몬노조(左衛門尉)는 겐푸쿠(元服, 성인식) 이후 쓴 통칭이자 가문 호칭이고, 실제 서임된 관직은 사에몬노카미다. 조(尉)는 3등관이고 카미(督)는 장관급이니 통칭으로 불리는 관직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같은 해 서임된 다른 가신들의 관위와 비교해 보면 도쿠가와 가신단 내에서 사카이 타다츠구의 위상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인물서임일위계
사카이 타다츠구10월 24일종4위하
혼다 타다카츠11월 9일종5위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11월 9일종5위하
이이 나오마사11월 23일종5위하

위 표에서 볼 수 있듯 1586년 시점에 그는 도쿠가와 가신 중 관위 1위였다.

히데요시에게서 교토 사쿠라이의 저택과 오미(近江, 지금의 시가현 일대) 1000석(石, 쌀 생산량으로 영지 경제력을 표시하는 단위 — 1000석은 연간 쌀 1,000석이 나오는 영지라는 뜻)도 받았다. 참고로 도요토미 성(姓, 성씨)을 하사받았다는 서술이 종종 보이는데, 무라카와 고헤이(村川浩平)가 정리한 도요토미 성(豊臣姓) 일람표에 사카이 씨는 없다.

덴쇼 15년(1587)의 기록은 딱 한 줄이다. 10월 15일 이에야스가 타다츠구의 저택에 가서 노(能)를 보았다.

5.1 은거의 배경 — 주라쿠다이 행행과 서열 역전

덴쇼 16년(1588) 4월 14일, 히데요시가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을 자신의 저택 주라쿠다이(聚楽第, 히데요시가 교토에 지은 초호화 정무 공간)로 맞이했다.

주라쿠다이를 그린 에도시대 병풍
《주라쿠다이도 병풍》. 미쓰이문고 소장. 이에야스가 가신들을 데리고 참석한 그 자리다. Public Domain.
주요 다이묘들이 천황 앞에서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 정치적 의례였고, 이에야스도 가신들을 데리고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이 나오마사만 시종(侍従)에 임관됐다. 시종은 승전(昇殿, 궁궐 정전에 올라 천황을 가까이서 알현할 수 있는 자격)이 허용되는 자리다. 필두 가로 타다츠구를 포함한 고참들은 전원 쇼다이부(諸大夫, 궁중 정전에 오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하급 관위)에 머물렀다.

두 해 전 종4위하로 가신 중 1위였던 사람이, 종5위하였던 후배가 자기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됐다.

그리고 반년 뒤인 덴쇼 16년 10월, 그는 물러난다. 예순하나였다. 두 사건을 인과로 잇는 사료는 없다. 다만 은거 사유에 대해서도 사료에 적힌 게 없기는 마찬가지다. 쇼나이 사카이 가문의 전승에 의하면 안질 때문이라고 하고 “거의 실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막부가 각 가문의 자기신고를 받아 편찬한 『간세이후』 권65의 원문은 이 한 문장이 전부다.

十六年十月致仕し、櫻井の邸に住す

덴쇼 16년 10월에 물러나 사쿠라이 저택에 살았다는 뜻이다. 그게 전부다.

사유가 아예 적혀 있지 않다. 노령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5.2 은거 후 교토 생활과 죽음 (1588~1596)

은거 뒤 그는 교토 사쿠라이 저택에 살았다. 이걸 인질 생활로 보는 해석이 있는데 사료와 잘 맞지 않는다. 저택과 지행지를 받은 시점(1586)이 은거(1588)보다 앞선다. 게다가 애초에 이 시기 도쿠가와 가문의 실질적인 인질은 이에야스의 아들 오기이(於義伊, 훗날의 유키 히데야스)였다. 오기이는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 직후 오사카에 인질 겸 양자로 보내졌는데, 그때 타다츠구가 오기이를 오사카까지 호송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자신이 인질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이초 원년(1596) 10월 28일 그 집에서 죽었다. 향년 70. 법명은 센구인 덴요코게쓰엔신 거사다.

묘는 교토 지온인(知恩院)의 탑두 센구인(先求院)이다. 원래 센구안(仙求庵)이던 것을 그의 법명을 따 개칭했다. 센구인에는 위패와 초상만 있고, 실묘는 지온인 뒤편 총묘지에 우스이히메와 나란히 있다. 위에 실은 초상화가 이 센구인 소장본이고, 츠루오카 지도박물관에 걸린 초상은 이것을 현대에 모사한 것이다.

은거 후 여덟 해를 더 살았지만 그 사이 정치나 군사 기록이 사실상 없다.

6. 사후 가문의 성장 — 쇼나이 14만석

덴쇼 18년(1590) 간토 이봉(移封, 영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 재배치하는 것)에서 후대에 도쿠가와 사천왕(그중 사카이 가문은 타다츠구가 은거해 아들 이에츠구가 대신 나온다)이라 불리는 가신들 가문이 받은 영지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인물봉지석고
이이 나오마사고즈케 미노와(현 군마현 다카사키시)12만석
혼다 타다카츠가즈사 오타키(현 치바현 오타키마치)10만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고즈케 다테바야시(현 군마현 다테바야시시)10만석
사카이 이에츠구시모우사 우스이(현 치바현 사쿠라시)3만석

같은 사천왕이라고 하기에는 격차가 서너 배나 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을 흔히들 말하듯 “이에야스가 아들 노부야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은 응보”라고 하기에는 걸리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 간토 이봉 당시에 석고가 깎인 게 아니다. 이에츠구는 덴쇼 16년(1588) 아버지 타다츠구로부터 가독을 이을 때 이미 미카와 요시다 3만석을 받고 있었다. 1590년의 우스이 3만석은 같은 석고를 다른 곳으로 옮긴 것뿐이다. 정확한 말은 “가증(加増, 기존 영지에 더해 영지를 늘려주는 것)에서만 빠졌다”이다.

둘째, 직접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1590년 시점에 타다츠구는 이미 은거한 몸이고 당주는 아들이다. 나머지 셋은 모두 현역 당주였다. 게다가 타다츠구는 히데요시에게서 받은 저택과 오미 1000석으로 따로 생활하고 있었다.

셋째, 애초에 간토 이봉 시점 도쿠가와 가신들의 영지 규모를 이에야스가 정한 게 아닐 수 있다. 혼다·사카키바라·이이의 소령 배치와 석고를 결정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라는 유력설이 있다. 가와타 사다오(川田貞夫)가 처음 제기했고, 우에스기 가문의 아이즈 이봉 때 나오에 카네츠구에게 취해진 동일한 조치가 방증으로 거론된다. 히라노 아키오(平野明夫)가 「간토 영유기 도쿠가와씨 가신과 도요토미 정권」(2007)에서 정리했다. 어느 설을 따르든 사카이는 이 조치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른 셋의 고액 석고가 이에야스의 결정이 아니라면, “이에야스가 사카이만 낮게 줬다”는 명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격차의 구조적 원인을 정면으로 다룬 논문은 찾지 못했다. 통설이 흔들린다는 것이지 대체할 정설이 나왔다는 뜻은 아니다.

6.1 역대 당주 영지 확대 연표 (1590~1632)

연도당주영지석고
1590사카이 이에츠구(酒井家次)시모우사 우스이3만석
1604사카이 이에츠구(酒井家次)고즈케 다카사키5만석
1616사카이 이에츠구(酒井家次)에치고 다카다10만석
1619사카이 타다카츠(酒井忠勝)시나노 마츠시로10만석
1622사카이 타다카츠(酒井忠勝)데와 쇼나이13만 8000석
1632사카이 타다카츠(酒井忠勝)데와 쇼나이14만석

겐나 8년(1622) 10월 손자 사카이 타다카츠가 츠루가오카성에 들어갔다.

츠루가오카성터의 해자, 현 야마가타현 츠루오카 공원
츠루가오카성터의 해자. 현재는 츠루오카 공원이고, 산노마루 터에 이 글 첫머리의 치도박물관이 있다. 촬영 掬茶, CC BY-SA 4.0.
간에이 9년(1632)에 아테라자와 1만 2000석을 받고 마루오카 1만석을 떼어주면서 14만석이 확정된다.

이 가문은 막부가 명한 전봉을 한 번도 겪지 않고 막말까지 갔다. 녹봉이 큰 후다이 다이묘 중에 드문 사례다. 교통 요충 사카타의 가메가사키성도 존속이 허용되어 소번으로서는 이례적인 2성 체제가 됐다.

덴포 11년(1840) 막부가 삼방영지대체(三方領知替え)를 명해 쇼나이 사카이가를 에치고 나가오카로 옮기고 가와고에 마츠다이라가를 쇼나이로 들이려 했다. 빚이 많고 수해로 영지가 황폐하던 가와고에 번주 마츠다이라 나리츠네(松平斉典)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21남을 양자로 들인 뒤 이에나리에게 쇼나이로 보내달라고 청한 결과였다. 표고(表高, 막부가 공인한 명목상 석고)는 14만석이지만 실고(実高, 실제 수확에 근거한 석고)는 20만석을 넘는다고 알려진 땅이었다.

이에 대해 영지민들이 사형을 무릅쓰고 막부에 직소를 감행했다. 1차로 보낸 11명은 번 당국에 전원 체포됐고, 2차에서 11명이 에도에 닿아 덴포 12년(1841) 1월 막부 정무를 총괄하는 로주(老中)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 등에게 가고소(駕籠訴, 등청하는 가마를 막고 소장을 내미는 직소)를 했다. 중앙 막부뿐 아니라 센다이·아이즈·미토 등 다른 번에도 소장을 보내 지방 다이묘들의 여론도 움직였다. 그해 7월 막부는 명령을 철회했다. 번정을 비판한 게 아니라 번주를 지키려고 한 직소라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다만 사카이가가 처음부터 영지민들에게 이런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쇼나이에 들어간 직후에는 검지(検地, 논밭을 측량해 수확량을 다시 매기는 토지 조사)로 실고를 늘리고 징세와 축성 부역을 밀어붙여 영지민의 도산(逃散, 농민이 논밭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을 불러일으켰고, 간에이 11년(1634)에는 견디다 못한 영지민을 대신해 유자향(遊佐郷)의 오키모이리(大肝煎, 여러 마을을 관할하는 향촌 우두머리) 다카하시 타로자에몬(高橋太郎左衛門)이 막부에 직소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이묘의 번정을 막부에 고발하는 직소였다. 그러던 곳에서 200년 뒤 이번엔 다이묘를 바꾸지 말아달라는 정반대 방향의 직소가 나온 셈인데, 후대 다이묘들이 영지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던 것일까 추측했지만 그 사이에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다룬 자료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막말 석고는 16만 7000석이다. 유신 후 백작이 됐고, 사카이 종가는 지금도 츠루오카에 산다.

사카이 타다카츠 초상, 에도시대 지본착색, 치도박물관 소장
《사카이 타다카츠 초상》. 에도시대, 지본착색, 츠루오카 치도박물관 소장. 안내판은 겐나 8년(1622) 시나노 마츠시로에서 쇼나이로 들어온 3대 타다카츠의 초상으로 "전해진다"고 적고, 필자와 제작 연대는 알 수 없다고 밝힌다. 2026년 8월 전시실에서 직접 촬영.

번외로 쇼나이 초대 번주 사카이 타다카츠(1594–1647)와 와카사 오바마 번주이자 다이로(大老)를 지낸 사카이 타다카츠(1587–1662)는 다른 사람이다. 한자까지 酒井忠勝으로 같아서 한자를 봐도 구분이 안 된다. 전자는 통칭 구나이타이후(宮内大輔)이고 이 글의 주인공인 사카이 타다츠구의 친손자, 후자는 통칭 사누키노카미(讃岐守)이고 이 글의 서두에 얘기했던 사카이 가문의 두 계통 중 사카이 타다츠구와 다른 우타노카미가(雅樂頭家) 계통이다. 흔히 인용되는 “다이로 사카이 타다카츠”는 후자다.

7.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들

여기까지가 사료로 따라갈 수 있는 그의 이력이다. 이제 우리가 그에 대해 안다고 믿는 것들을 보자.

7.1 ‘도쿠가와 사천왕’ 호칭의 유래

그는 생전에 도쿠가와 사천왕이 아니었다.

‘도쿠가와 사천왕’이라는 말 자체가 동시대에 사람들이 쓰던 용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잘 알려진 ‘다케다 사천왕’이라는 명칭 역시 마찬가지다. 뛰어난 가신 넷을 사천왕으로 묶어 부르는 이런 이름은 에도시대에 들어 불교의 사방 수호신에서 따와 만들어진 것이다. ‘도쿠가와 사천왕’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를 특정한 연구는 지금까지 없어 정확히 언제 누가 만들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는 호칭은 따로 있다. 덴쇼 14년(1586) 9월, 이에야스를 대리해 상경한 세 사람을 상방(上方, 교토·오사카 일대) 무장들이 ‘도쿠가와 삼걸(徳川三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사카키바라가보(榊原家譜)』에 있다. 이이 나오마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혼다 타다카츠 셋이다.

타다츠구는 여기에 없다. 바로 그 해에 그가 가신 중 관위 1위였는데도 그렇다.

그렇다면 질문부터가 잘못된 게 아닐까? 사천왕이라는 말 자체가 후대 사람들이 갖다 붙인 것이니, 왜 같은 사천왕인데 남들은 10만석씩 받을 때 사카이 타다츠구만 3만석밖에 못 받았냐는 의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얘기 아닌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도쿠가와 사천왕”이라는 말에 대해 여담으로 한 가지만. 후대 사람이 붙인 말인 것은 맞지만, 이 말이 후대에 널리 쓰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1894년 영국인 프레더릭 딕킨스(F. V. Dickins)가 쓴 해리 파크스 전기에 이이·혼다·사카키바라·사카이 네 가문이 세간에서 불교의 사천왕으로 불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적어도 메이지 중기에는 사람들이 흔히 아는 명칭이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7.2 4대 일화의 최초 출전 정리

‘4대 일화’라고까지 부르기에는 거창할지 모르겠지만 ‘사카이 타다츠구’ 하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네 가지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1. 미카타가하라에서 패주한 아군을 위해 성문을 열고 북을 쳤다는 이야기.
  2. 나가시노에서 다케다군 배후를 치는 기습을 오다 노부나가에게 제안했다는 이야기.
  3.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가 죽을 때 변호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
  4. 그 대가로 간토 이봉 때 3만석밖에 못 받았다는 이야기.

각각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나오는 기록이 어디인지 찾아본 결과는 아래와 같다.

이야기 (사건 시점)최초 출전성립사건과의 간격
노부야스를 변호하지 않았다 (1579)『미카와모노가타리』1622–1632년경43–53년
이에야스가 만년에 원망했다 (1616 무렵)『조잔키단(常山紀談)』1739년 자서, 1770년 완성123–154년
나가시노 기습을 발안했다 (1575)『조잔키단』1739년 자서, 1770년 완성164–195년
미카타가하라에서 북을 쳤다 (1573)『미카와고카이코쿠비코타이젠(三河御開国備考大全)』1742–1755년경169–182년
3만석은 노부야스의 응보다 (1590)『도쇼구고짓키(東照宮御実紀)』 부록1809년 착수, 1843년 완성219–253년

출처가 동시대 사료인 것은 하나도 없고, 가장 가까운 시기의 기록도 반세기 가까운 시차가 있다. 그리고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습격을 발안했다는 이야기와 이에야스가 타다츠구를 원망했다는 이야기의 출처는 동일하다. 각각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알아보자.

7.3 나가시노 발안설 검증

통설은 이렇다. 군의에서 타다츠구가 기습을 제안하자 노부나가가 “그런 잔재주는 쓸 것이 아니다”라며 면전에서 매도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물러난 후에 사카이 타다츠구를 은밀히 불러 “정보가 샐까 봐 일부러 각하했다, 네 안이 최선이니 지휘를 맡긴다”고 했다. 전투가 끝난 뒤 노부나가가 “앞에만 눈이 있는 게 아니라 뒤에도 눈이 있구나”라 칭찬하자 타다츠구는 “저는 뒤를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받았다. 앞만 보고 달려드는 장수가 아니라 뒤까지 살피는 지휘관이라는 칭찬인데, 타다츠구는 그 ‘뒤’를 무사가 달아날 때 보이는 등으로 받았다. 자기는 물러선 적이 없다는 뜻이다.

반면 오다 노부나가의 일대기를 기록한 『신초코키』에는 이 장면이 없다. 그냥 타다츠구를 불러 부대를 편성하고 명령했다고만 적혀 있다. 오히려 아군을 한 명도 잃지 않도록 노부나가가 깊이 헤아렸다고 나와 있는데, 말하자면 이 작전을 낸 사람은 사카이 타다츠구가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라는 이야기다.

앞서 본 것처럼 『신초코키』의 나가시노 기록은 시각과 병력과 철포 수와 검사 이름까지 적을 만큼 상세하다. 그런데 사카이 타다츠구의 헌책(献策, 계책을 올려 제안하는 것)에 대한 기록은 한 줄도 없다. 이 정도로 세밀한 기록이 굳이 “이 계책은 사카이 타다츠구가 세운 것이다”라는 이야기만 쏙 빼놨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이 계책을 사카이 타다츠구가 입안했다는 일화의 확인되는 가장 이른 출전은 『조잔키단』 권4다. 유아사 조잔(湯浅常山)이 1739년에 서문을 쓰고 1770년에 완성한 무장 일화집이다. 사건으로부터 164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데다가 구성도 근세 일화집의 클리셰다. 모두가 있는 군략회의에서 계책을 냈다가 총사령관이나 군사에게 면박을 당하고, 자리가 파한 뒤 밤에 따로 불려가고, 사실은 니 말이 맞는데 계책이 샐까 봐 그랬다. 이런 구성은 옛 전쟁 이야기에서 숱하게 되풀이된다. 주군의 지려와 가신의 충의를 동시에 세우는 장치다.

일본 학계에서 이 일화의 진위는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난 문제다. 다만 노부나가 혼자 이 전략을 생각해 냈다는 것도 입증된 이야기는 아니다. 『신초코키』는 노부나가를 현창하는 성격의 문헌이기에 노부나가에 유리한 서술이 많고, 별동대의 태반이 도쿠가와 병력이었으며, 이 지역의 지형을 아는 것도 도쿠가와 쪽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전략을 누가 냈는지는 지금 남아 있는 사료로는 특정할 수 없다.

7.4 ‘사카이의 북’ 일화 검증

다음 이야기도 메이지 이래 여러 작품에 등장해 잘 알려져 있다. 미카타가하라 패전 후 하마마츠성으로 도주하는 이에야스를 위해, 성에 남아 있던 타다츠구가 성문을 열고 화톳불을 피운 뒤 망루에서 북을 쳤다. 그러자 다케다군은 복병을 의심해 물러났다. 빈 성을 일부러 열어 보여 매복이 있는 것처럼 믿게 만든 셈이니,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공성계(空城計)와 같은 수라고 볼 수 있다. 남아 있는 병력이 거의 없는 위기의 상황에서 사카이 타다츠구가 공성계를 써 이에야스와 패잔병을 구하고 성도 지켜냈다는 일화, 이른바 ‘사카이의 북’이다.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우키요에 '타다츠구 때 북을 치는 그림'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 《타다츠구 때 북을 치는 그림(忠次時鼓打之図)》. 메이지 시대. 1873년 가부키 초연을 계기로 대중화된 '사카이의 북' 전승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Public Domain.

문제는 『신초코키』, 『미카와모노가타리』, 『도다이키』, 『고요군칸』 어디에도 이 일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전거로 자주 거론되는 『미카와고후도키(三河後風土記)』는 애초에 위서로 분류되는 책인데, 하라 후미히코(原史彦)가 2016년에 확인해보니 그 책에도 이 이야기가 없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사카이 타다츠구의 담력과 지모를 자랑할 이야깃거리가 분명한데, 쇼나이번 자체의 역사서에도 전혀 언급이 없다. 게다가 당시 타다츠구는 성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성을 맡는 유수거(留守居)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이 일화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메이지 창작설이었다. 1873년 3월 가와타케 모쿠아미(河竹黙阿弥)가 대본을 쓰고 9대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郎)가 주연한 가부키 《다이코노오토 치유노산랴쿠(太鼓音智勇三略)》에 이런 이야기를 넣은 것이 시발점이 되어 역사적 사실처럼 알려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2022년에 메이지 창작설을 뒤집는 자료가 하나 나왔다. 사카타시립 고큐분코(光丘文庫)가 소장한 『미카와고카이코쿠비코타이젠』에서 거의 같은 내용이 확인됐는데, 이 책은 1742년에서 1755년경 편찬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가부키의 초연보다 130년 이상 앞선 시기에, 이미 ‘사카이의 북’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일화가 역사적 사실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앞서 본 유수거 문제와 쇼나이번 기록의 침묵은 바로 이 2022년 조사에서 함께 지적된 반증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시즈오카현 이와타시(磐田市)의 옛 미츠케 학교 1층에 「전(伝) 사카이의 북」이 전시돼 있다는 것이다.

옛 미츠케 학교 건물, 시즈오카현 이와타시
옛 미츠케 학교(旧見付学校), 시즈오카현 이와타시. 1875년에 지은 서양식 소학교 건물로, 1층에 「전(伝) 사카이의 북」이 전시돼 있다. 사카이 가문의 츠루오카가 아니라 하마마츠 근처에 남았다. 촬영 Qurren, CC BY-SA 4.0.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데 거기 등장하는 북은 현존한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싶다. 반전은 이 북이 이와타시 지정문화재라서 이와타시가 방사성탄소 측정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결과가 에도시대 제작으로 나왔다는 것. 결국 북도 사건보다 한참 뒤에 만들어진 물건이라 이야기를 뒷받침해주지는 못한다.

7.5 일화들이 형성된 시간 순서

각각의 이야기들이 언제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하는지 정리해보면 순서는 아래와 같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불리한 이야기, 이에야스의 아들인 노부야스의 변호에 실패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다. 1620년대 오쿠보 가문이 자기 집안을 자랑하려고 쓴 『미카와모노가타리』에 이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다. 1660년대에는 우키가이성에서 시바타 카츠이에를 격퇴했다는 무용담이 『이에타다닛키 조호츠이카』에 나타났다.

타다츠구가 자랑할 만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100년쯤 뒤, 사카이 가문이 쇼나이 14만석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시기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기습을 제안해 성공한 이야기가 『조잔키단』에 처음 등장하고, 미카타가하라 전투 패전 후 북을 쳐서 공성계로 가문을 구한 이야기는 『미카와고카이코쿠비코타이젠』에 나온다. 아울러 노부야스를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에야스의 원망을 샀고 그 결과 만년에 냉대받아 영지 규모가 작다는 얘기도 『조잔키단』에 같이 실렸다.

1800년대에는 이에야스가 어린 시절 슨푸에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끌려갈 때 수행했다는 이야기가 붙는다. 원래 사카이 마사치카에게만 있던 서술이 1812년 타다츠구 항목으로 옮겨온 것이다. 막부가 편찬한 정사에는 노부야스 이야기가 실리며 영지가 3만석에 불과했던 것에 인과관계를 제공했고, 1873년 가부키를 통해서는 ‘사카이의 북’ 이야기가 대중에 퍼지게 된다.

결국 이 이야기들은 타다츠구가 살아있을 당시가 아닌, 그의 후손이 영지를 늘려 쇼나이에서 번성한 후에 생겨난 것이다.

7.6 쇼나이 번의 자체 사료비판

앞서 살펴본 자료 중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현창 문헌인 『신초코키』, 오쿠보 가문의 현창 문헌인 『미카와모노가타리』가 있었다. 이들 기록은 아무래도 주인공인 오다 노부나가와 오쿠보 가문에 유리한 이야기, 멋있어 보이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싣고 있어 현창 대상에 대한 미화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사카이 가문이 쇼나이로 이전해 대성한 이후 타다츠구에 대해 쓴 현창 문헌도 비슷한 느낌일까?

지도박물관에 『잇치공 세이키(一智公世紀)』라는 책이 있다. 잇치는 타다츠구가 출가하며 쓴 이름이고, 쇼나이번이 편찬한 그의 전기다. 『대일본사료』 편찬 해제가 이 책을 이렇게 설명한다.

편자인 쇼나이 번사 호리 스에오(堀季雄)가 선행하는 여러 기록의 사료비판과 고증을 행한 상세한 안문(按文, 편자가 붙인 고증 주석)을 붙여 두었다. …당시 사람들의 나가시노 전투를 둘러싼 역사인식을 아는 데 귀중한 증언이 된다.

이렇듯 에도시대 쇼나이의 번사가 이미 앞선 시대의 기록을 검증하고 있었다. 현창 문헌이라고 해서 전부 다 무비판적으로 현창 대상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적는 것은 아니다.

8. 사료로 확인되는 것

사료로 확인되는 건 이 정도다.

에이로쿠 2년(1559). 서른두 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문서를 받아 사원 구역의 치안과 세역 면제를 집행했다. 그가 동시대 문서에 처음 나타나는 순간이다.

에이로쿠 12년(1569). 동맹의 담보로 자기 딸을 다케다 가문에 보냈다.

덴쇼 3년(1575). 나가시노 전투에서 4000명 별동대를 이끌고 밤에 강을 건너 아침에 도비가스야마를 쳤다.

덴쇼 7년(1579). 주군의 적자 노부야스를 폐적한다는 통보를 들고 오다 가문에 갔다.

덴쇼 10년(1582). 부하들에게 성을 쌓으라고, 병사를 소집하라고, 스루가로 출진하라고 명령했다.

덴쇼 13년(1585). 히데요시가 보낸 사자가 그를 거쳐 오카자키에 들어왔다.

용맹하게 적진을 돌파하는 무공담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직을 굴리고 관리하는 인물이었다. 전투에서의 공적에 대한 기록보다는 문서로 처리한 일에 대한 기록이 더 많다. 처음 사료에 등장한 모습이 행정관이었는데, 역사적으로는 끝까지 그런 일을 주로 맡은 사람이었다고 보인다. 소설에서 처음 접했던 그의 우직하고 용맹한 무장의 이미지는 사실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신장의 야망》 같은 게임에서도 무력이 높은 무장으로 등장하지만, 사료에는 그의 용력이나 단독 전투력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게임에서 그의 내정 수치는 사천왕 중에서도 낮은 편인데, 사료만 놓고 보면 이쪽이 올라가야 맞지 않나 싶다.

덧붙이자면 일본 학계에서도 그를 단독으로 다룬 심사 논문은 사실상 없다. 단행본 전기는 구와타 타다치카(桑田忠親)의 『사카이 타다츠구공 전(酒井忠次公傳)』(1939) 하나뿐인데, 발행 주체가 센구인 당우(堂宇, 절의 전각) 수선 후원회라 현창 문헌 성격이 강하다. 87년째 대체되지 않았다. 지금 가장 신뢰할 만한 종합 자료는 2022년 츠루오카 지도박물관이 낸 특별전 도록이다. 학술 논문이 없어서 박물관 도록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어로 된 신뢰할 만한 서술은 찾지 못했다. 학술 데이터베이스에도 번역서에도 없다.

출처 및 사실 확인

이 글은 사료를 성립 시기에 따라 층으로 갈라 다뤘다. 아래도 같은 순서로 정리한다.

동시대 1차 사료 — 본문에서 “확인된다”고 쓴 근거

  • 『이에타다닛키(家忠日記)』 — 마츠다이라 이에타다 자필, 1577년 10월~1594년 9월. 원본 7책, 2020년 중요문화재 지정, 고마자와대 소장. 타다츠구를 기록한 유일한 동시대 1차 사료다. 다만 저자가 타다츠구 휘하 동미카와 소속이라는 구조적 편향이 있다.
  • 『신초코키(信長公記)』 권8 — 오타 규이치, 1610년경 완성. 나가시노 도비가스야마 별동대의 병력·시각·검사 이름 기술의 원전.
  • 「아즈치닛키(安土日記)」 — 오타 규이치, 1600년 전후. 노부야스 사건을 “모반 소문”으로만 기록.
  • 덴쇼 7년 8월 8일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서장(호리 히데마사 앞) — 신코묘지 문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문서 총목록』 No.3006. 현존본은 연차가 빠진 사본이고, 덴쇼 7년 비정은 『신수 오카자키시사』 편자의 판단이다.
  • 『전국유문(戦国遺文)』 다케다씨편 1369호 — 1569년 타다츠구 딸의 인질 제공과 반환.
  • 에이로쿠 원년 4월 26일자 이마가와 요시모토 감장 — 『아이치현사 자료편10 중세3』(2009) 수록.

에도 전기 편찬물 — 통설이 처음 나타나는 자리

  • 『미카와모노가타리(三河物語)』 — 오쿠보 타다타카. 현존 최고본 오쿠가키 1622년, 실제 성립은 1626~1632년 추정(다카기 쇼사쿠 1970). 노부야스 사건 통설의 최초 출전이며 오쿠보 가문 현창 동기가 뚜렷하다.
  • 『도다이키(當代記)』 — 간에이 연간(1624~1644). 노부나가가 “이에야스 뜻대로 하라”고 답했다고 기록.
  • 『고요군칸(甲陽軍鑑)』 — 원층 1575~77년, 현존 최고 사본 1621년. 미카타가하라에서 타다츠구가 등장하는 유일 사료이나, 나가시노 도비가스야마는 언급이 없다.
  • 『마츠다이라키(松平記)』 — 17세기 전반 추정. 오다 가문에 간 사자를 타다츠구와 오쿠보 타다요 2인으로 적는다.

에도 중후기 — 일화가 만들어진 자리

  • 『이에타다닛키 조호츠이카(家忠日記増補追加)』 1665~1668년 — 우키가이성 무용담의 최초 확인 출전.
  • 『미카와국 후타바마츠(三河国二葉松)』 1740년 — 우키가이성 관련 지리지.
  • 『조잔키단(常山紀談)』 — 유아사 조잔, 1739년 자서·1770년 완성. 나가시노 발안설과 이에야스의 만년 원망 대사가 둘 다 이 책에서 처음 나온다.
  • 『미카와고카이코쿠비코타이젠(三河御開国備考大全)』 1742~1755년경 — 사카타시립 고큐분코(光丘文庫) 소장. ‘사카이의 북’ 최초 확인 출전이며 2022년에 발견됐다. 야마가타신문 2022년 10월 17일 보도, 츠루오카시사 편찬위원 아키호 료(秋保良) 조사.
  • 『간세이초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권65 「사카이」 — 1799년 착수, 1812년 완성. 사카이가 계보의 기준 텍스트다. 안질 기재가 없고 3만석 일화도 싣지 않는다.
  • 『도쇼구고짓키(東照宮御実紀)』 — 1809년 착수, 1843년 완성, 1849년 부록 완료. “너도 제 자식은 귀여운가” 일화의 초출이며 본편이 아니라 부록에 실려 있다.
  • 『미카와고후도키(三河後風土記)』 — 쇼호(1645~48) 이후 성립, 위서설이 통설. ‘사카이의 북’의 전거로 자주 거론되나 원문에 해당 기술이 없다(하라 후미히코, 2016).

현대 연구

  • 히라노 아키오(平野明夫) 「간토 영유기 도쿠가와씨 가신과 도요토미 정권」(사토 히로노부 편 『중세 동국의 정치구조』 이와타쇼인, 2007) — 1590년 석고 결정 주체 논의. 가와타 사다오(川田貞夫)의 최초 제기를 정리. / 『미카와 마츠다이라 일족』 신진부츠오라이샤, 2002, p.326 — 모리야마쿠즈레 직후 사카이 사에몬노조의 반히로타다 행보. / 「에이로쿠 6년·7년 이에야스의 싸움 — 미카와 잇코잇키의 과정」(『전국기 정치사 논집 서국편』 이와타쇼인, 2017) — 사카이 타다나오의 거병과 잇코잇키의 시간 순서.
  • 혼다 다카시게(本多隆成) 「마츠다이라 노부야스 사건에 대하여」『시즈오카현 지역사연구』 7, 2017 / 『정본 도쿠가와 이에야스』 요시카와코분칸, 2010 — 미카와 3봉행 부정론.
  • 다니구치 가쓰히로(谷口克広)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 기요스 동맹의 실체』 갓켄, 2012 — 『미카와모노가타리』 서술 부정.
  • 구로다 모토키(黒田基樹) 『이에야스의 정실 츠키야마도노』 헤이본샤신서, 2022 — 츠키야마도노의 이마가와 조카설을 후대 창작으로 판단.
  • 시바 히로유키(柴裕之) 『전국·직풍기 다이묘 도쿠가와씨의 영국 지배』 이와타쇼인, 2014.
  • 히라야마 유(平山優) 『신설 이에야스와 미카타가하라 합전』 NHK출판신서, 2020 — 타다츠구의 하마마츠성 재진. / 『코마키·나가쿠테 합전 —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천하 가름의 진상』 가도카와신서, 2024, pp.41-43 — 덴쇼 진고의 난에서 스와 요리타다·오가사와라 사다요시 이반.
  • 고미야마 도시카즈(小宮山敏和) 『후다이 다이묘의 창출과 막번체제』 요시카와코분칸, 2015. 본문에서 요리오야 권한의 한계 근거로 든 것은 그의 2002년 이이 나오마사 연구(츠케비토·요리키 관계, pp.51-62)인데, 수록지 서지를 확정하지 못했다.
  • 무라카와 고헤이(村川浩平) 「하시바씨 하사와 도요토미성 하사」『고마자와사학』 49, 1996 — 도요토미 성 일람표에 사카이씨가 없음을 확인.
  • 하라 후미히코(原史彦) 「도쿠가와 이에야스 미카타가하라 전역 화상의 수수께끼」『긴코소쇼』 43, 2016 — ‘사카이의 북’ 전거 부재 확인.
  • 야마무로 교코(山室恭子) 『군웅창세기』 아사히신문사, 1995 — 『미카와모노가타리』를 후다이 프로파간다로 규정.
  • 다카기 쇼사쿠(高木昭作) 「미카와모노가타리의 성립 연도에 대하여」『도쿄대학 사료편찬소보』 5, 1970 — 성립 연대 고증.
  • 다카야나기 미츠토시(高柳光寿) — 나가시노 병력 추정치.
  • 차엔 히로키(茶園紘己) 「안조 마츠다이라가에서 아베 오쿠라의 위치와 역할」(『논집 전국 다이묘 이마가와씨』 이와타쇼인, 2020) — 이마가와 지배기 오카자키의 통치 구조.
  • 『일본대백과전서』·『국사대사전』 — 사카이씨 계보가 타다츠구의 아버지 위로는 불명확하다는 기술.
  • 『아이치현사』 강문 — 1520~1570년 구간 전수 검색으로 城代 용례 부재 확인.

전기·도록·기관

  • 구와타 타다치카(桑田忠親) 『사카이 타다츠구공 전(酒井忠次公傳)』 센구인 당우 수선 후원회, 1939 — 유일한 단행본 전기이나 현창 문헌 성격.
  • 치도박물관 『도쿠가와 사천왕 필두 사카이 타다츠구 — 사카이가 쇼나이 입부 400년 기념 특별전』 2022 — 현재 가장 신뢰도 높은 종합 자료.
  • 『대일본사료』 해제 —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잇치공 세이키(一智公世紀)』의 사료비판 성격에 대한 평가.
  • 아이치현 공문서관 — 타다츠구 명의 문서 20여 건 강문 일람.
  • 문화청 국가지정문화재 데이터베이스, 야마가타현 지정문화재 원부 — 갑주 2점의 “전(伝)” 표기 확인.
  • 이와타시(磐田市) 구 미츠케 학교 — 「전(伝) 사카이의 북」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확인하지 못한 것

  • 다니구치 히사시(谷口央) 「근세 사회 속의 나가시노 전투 — 도비가스야마채 공격의 발안자로 보는 일시론」(가네코 히라쿠 편 『나가시노 합전의 사료학 — 전투의 기억』 벤세이출판, 2018)과 가네코 히라쿠(金子拓) 『나가시노 합전』 주코신서, 2023 — 본문 미열람. 발안자 논쟁의 핵심 문헌이나 배치와 제목으로만 논지를 추정했다.
  • 사카이 타다츠구를 단독으로 다룬 심사 논문은 CiNii·J-STAGE·NDL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 한국어로 된 신뢰할 만한 서술은 찾지 못했다. KCI·RISS·DBpia에 관련 논문이 없고 번역서도 없다.
  • 일본어 위키백과는 각주 추적 용도로만 썼고, 각주가 없는 서술은 채택하지 않았다. 나무위키는 출처로 사용하지 않았다.

본문 이미지: 히어로는 《나가시노 합전도 병풍》(18세기, 도요타시립향토자료관 소장). 이로이로오도시 도마루와 슈누리 구로이토오도시 니마이도구소쿠는 츠루오카 치도박물관 소장으로, 후자는 2026년 8월 전시실에서 직접 촬영했다. 초상화는 센구인 소장본, 우키요에는 츠키오카 요시토시 《타다츠구 때 북을 치는 그림》. 촬영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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