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 1548–1606) — 도쿠가와 사천왕 ③
Q: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는 누구인가?
A: 미카와 우에노(三河国上野, 현 아이치현 도요타시) 출신의 무장(1548~1606). 어려서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당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코쇼(小姓)로 발탁되어 아네가와·미카타가하라·나가시노 전투에 잇달아 종군했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직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 하시바 히데요시)를 격렬히 비난하는 격문을 뿌려 그를 격노시켰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1590년 간토 이봉에서 고즈케 다테바야시(上野国 館林) 10만 석에 봉해졌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나카센도(中山道) 별동대에 배속되었으나 사나다 마사유키의 우에다성에 발이 묶여 본전에 지각했다. 전후에는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사이를 중재했고, 정작 자신에게 제안된 영지 가증은 사양했다. 1606년 다테바야시에서 병사했으며, 후대에 사카이 타다츠구·혼다 타다카츠·이이 나오마사와 함께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불렸다.
한눈에 보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 항목 | 내용 |
|---|---|
| 이름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 さかきばら やすまさ) |
| 유명(幼名) | 카메·카메마루(亀・亀丸) |
| 통칭 | 코헤이타(小平太) |
| 생몰 | 1548년(텐분 17년) ~ 1606년 6월 19일(케이초 11년 5월 14일) — 향년 59 |
| 출신지 | 미카와 우에노고(三河国上野郷, 현 아이치현 도요타시 가미고초) |
| 부친 | 사카키바라 나가마사(榊原長政) |
| 출사 | 1560년경, 마츠다이라 모토야스(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코쇼로 발탁 |
| 관직 | 종5위하 시키부노다이후(式部大輔, 1586년 서임) |
| 최종 영지 | 고즈케 다테바야시(上野国 館林) 10만 석 |
| 통칭되는 지위 | 도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 중 한 명 |
| 정실 | 젠가쿠인(善学院) — 오스가 야스타카의 딸 |
| 후계 | 삼남 사카키바라 야스카츠(榊原康勝)가 가독 상속 |
| 사인 | 모낭염(毛嚢炎) 악화 |
| 보리사 | 젠도지(善導寺, 다테바야시시) — 군마현 지정 사적 |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이 시리즈에서 다룬 다른 사천왕들과 결이 조금 다르다. 이이 나오마사에게는 어린 시절의 은신기와 나오토라 논쟁이라는 출생 이야기가 있었고, 사카이 타다츠구는 야사로 굳은 일화가 사후 200년 뒤 문서 하나에서 처음 등장한다는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야스마사는 조금 다르다. 그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는 히데요시를 격노하게 만들었다는 격문,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에 지각했다는 이야기다.
아네가와 강변에서 처음 이름을 알린 순간부터 다테바야시에서 제방을 쌓고 세키가하라에서 주군의 후계자를 감싼 순간까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이 유명한 일화들이 실제로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전설인지까지 함께 알아본다.
1. 출사와 초기 전투 — 아네가와·미카타가하라·나가시노 (1548~1575)
1-1. 마츠다이라 가문의 소년 무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텐분(天文) 17년(1548년) 미카와 우에노고(三河国上野郷, 현 아이치현 도요타시 가미고초)에서 사카키바라 나가마사(榊原長政)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카키바라 가문은 미카와의 명문 호족이 아니라 마츠다이라(도쿠가와) 가문의 배신(陪臣, 가신의 가신)에 지나지 않는 신분이었다. 한마디로 야스마사는 눈에 띌 것 없는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가 역사에 등장하는 계기는 열두 살 무렵 찾아왔다. 에이로쿠(永禄) 3년(1560년), 이마가와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카자키성으로 돌아온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독자 세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때 사카이 타다히사(酒井忠尚)의 코쇼(小姓)였던 소년 야스마사가 모토야스의 눈에 들어 그의 근신(近臣, 가까이서 모시는 측근)이 되었다고 일본의 표준 사전류(『国史大辞典』 등)에는 나와 있다.1
기회는 3~4년 뒤 다시 찾아왔다. 에이로쿠 6–7년(1563–1564년), 도쿠가와 가문의 존립을 뒤흔든 미카와 잇코잇키(三河一向一揆)가 터졌다. 잇코슈 신도와 사원 세력이 마츠다이라 가문에 반기를 든 내전으로, 가신단 상당수가 신앙을 이유로 모토야스에게 등을 돌렸던 사건이다. 당시 10대 중반이었던 야스마사는 이 진압전에서 전공을 세워 모토야스의 이름 중 “康” 자를 하사받았다.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인 그에게 이는 이례적으로 큰 영광이었을 것이다.
에이로쿠 9년(1566년), 19세가 된 야스마사는 겐푸쿠(元服, 성인식)를 치르며 정식으로 “야스마사(康政)“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도쿠가와 정권의 핵심으로 편입되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침 이 무렵 이에야스는 미카와 통일을 계기로 군제를 개편해 가신단을 히가시미카와슈(東三河衆)·니시미카와슈(西三河衆)·하타모토(旗本)의 셋으로 나눴는데, 하타모토 사키테야쿠(旗本先手役)는 그 안에 새로 신설된 이에야스 직속 기동부대였다.
하타모토 사키테야쿠는 본진 호위와 전선 선봉을 겸하는 부대였다. 다만 당시 이에야스의 직신단은 대부분 병력이 적은 소영주들이라 혼자 힘으로는 제대로 된 전투단위(備)를 꾸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이 소영주들의 신하 신분과 영지는 그대로 둔 채, 전투 지휘권만 신뢰하는 장수 한 명에게 몰아주는 요리키도신제(寄騎同心制)를 썼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요리키(与力)가 된다고 해서 그에게 종속되는 신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전쟁 시의 지휘 계통만 그 장수 아래로 재편되는 방식이었다. 1567년 이 하타모토 사키테야쿠역에 편입된 야스마사는 요리키 4기를 지휘하게 된다. 참고로 1년 앞서 편입된 혼다 타다카츠의 요리키가 당시 54기였던 것에 비하면 한참 말단이었던 셈이다.1
1-2. 아네가와 전투
1570년,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과 아네가와(姉川)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야스마사가 세운 공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무너진 아사쿠라군의 측면을 찌른 돌격이다. 『무비신목초(武備神木抄)』는 그가 “隊を真一文字に進ませ、登り難い岸を声を掛け合って押しあがれ”(부대를 일직선으로 전진시켜, 오르기 어려운 강변 절벽을 서로 소리쳐 독려하며 밀고 올라가게 했다)고 지휘했고, 이를 지켜본 이에야스가 “この手の戦い方は、この度の康政が手本”(이런 식의 싸우는 법은, 이번 전투에서는 야스마사가 본보기다)라고 평했다고 전한다.2 스물두 살의 야스마사가 이에야스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은 순간이다.
이 전투에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활약에 대해 “적진 배후를 기습했다”고 하는 서술도 있는데 다소 과장으로 보인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팩트는 무너진 적 전열의 측면을 찌른 “요코야리(横槍)“에 가깝고, 배후를 기습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 일화의 근거 문헌으로는 『무비신목초(武備神木抄)』와 함께 『명장언행록』도 언급되는데, 후자는 신뢰도가 낮다고 평가받는 에도 후기의 이야기책이다.2
1-3.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 무렵 야스마사는 요리키 4기짜리 말단에서 벗어나 선수역의 장수 자리에 올라 있었다.1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는 이에야스 생애 최악의 패전으로 꼽힌다. 다케다 신겐의 대군에 참패한 도쿠가와군은 겨우 목숨만 건져 하마마츠성으로 도망쳤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야스마사는 곧장 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미처 성까지 도망가지 못한 채 어둠 속에 흩어진 병사들을 찾아 모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는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가 병사들에게 일제히 함성을 지르게 해 다케다 진영을 동요시켰다는 것이다. 적군에게 여전히 싸울 의지가 있는 부대처럼 보이게 만들어 추격을 망설이게 하려는 의도였다.3
다만 이 작전이 실제로 전황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는 알 수 없고, 원출전 사료명이 무엇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일부 기록에는 이 전투에서 혼다 타다카츠와 야스마사가 함께 야마가타 마사카게 부대를 돌파했다고도 하지만, 『코요군칸』에는 타다카츠의 활약만 기록돼 있어 야스마사의 이름은 그의 명성 덕분에 후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3
1-4. 나가시노 전투
1575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는 결사의 각오로 도쿠가와 본진에 돌격해온 타케다측 맹장 나이토 마사토요(内藤昌豊)를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맞아 싸워 이에야스를 지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원출전은 특정되지 않는다.4 다만 나이토 마사토요가 이 전투에서 전사한 것은 사실이므로 개연성은 있다고 볼 수 있다.
나가시노 전투 자체가 워낙에 뎃포타이(鉄砲隊, 철포대)를 활용한 전술로 유명하다 보니 야스마사도 뎃포다이를 이용해 적군을 격퇴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지만 이는 확인되지 않는다. 사료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건 ‘본진 근접 방어전’이라는 맥락뿐이다.
2. “도쿠가와 삼걸”에서 사천왕으로
“도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 사카이 타다츠구,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 그리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이에야스가 무명의 미카와 소영주에서 천하인으로 올라서는 30여 년 동안 그의 곁을 지킨 네 사람이다. 흔히 무용(武勇)으로 뭉뚱그려 이야기되지만 넷의 실제 역할은 뚜렷이 갈렸다. 타다츠구는 최고참 원로, 타다카츠는 평생 무상(無傷)의 창술가, 나오마사는 다케다 유신을 흡수한 붉은 갑주 부대의 젊은 맹장이었다. 그리고 야스마사는 이 넷 중 유일하게 “문(文)과 무(武)를 함께 갖췄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실전에도 꾸준히 종군했지만, 동시에 도쿠가와 가문의 문서 행정을 맡을 만큼 글솜씨가 뛰어났다.
야스마사는 생전에 “사천왕”으로 불린 적이 없다. “도쿠가와 사천왕”이라는 네 글자 조합 자체가 동시대에 쓰이던 말이 아니라, 불교의 사방 수호신에서 따와 에도시대 이후에 붙여진 후대의 호칭이기 때문이다. 당대에 실제로 쓰인 것으로 확인되는 호칭은 따로 있다. 덴쇼(天正) 14년(1586년) 9월, 이에야스의 대리로 상경한 혼다 타다카츠·야스마사·이이 나오마사 3인을 상방(上方, 교토·오사카 일대) 무장들이 “도쿠가와 삼걸(徳川三傑)“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사카키바라케후(榊原家譜)』에 있다.5 이듬해 이에야스 본인이 상경해 이들이 함께 서위될 때 사카이 타다츠구까지 합류해 넷이 됐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때도 이 넷을 묶어 부르는 말로 “사천왕”이 쓰였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도쿠가와 삼걸이라는 명칭도 근거가 사카키바라 가문이 스스로 편찬한 『사카키바라케후』이기 때문에 가문을 드높이기 위해 후대에 윤색했을 가능성도 감안해야 한다.5 확실한 것은 야스마사가 1586년 11월 9일 상경 중 종5위하·시키부노다이후(式部大輔)에 서임됐다는 사실뿐이다.6
3. 코마키·나가쿠테 격문 사건 — 히데요시를 격노시킨 문장
3-1. 전해지는 이야기 — 격문에서 화해까지
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카츠와 손잡은 이에야스는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 하시바 히데요시)와 맞붙었다. 이때 야스마사가 히데요시를 겨냥해 뿌렸다고 전하는 격문(檄文) 한 장이, 사천왕 중에서도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이야기다.
격문의 내용은 길지 않아 아래에 전문을 옮긴다.
“羽柴秀吉は野人の子で、もともと馬前の走卒に過ぎず、信長公の寵遇を受けて将師に上げられると、その大恩を忘却して、子の信孝公とその生母や娘とともに虐殺し、いままた信雄公に兵を向ける。その大逆無道を黙視するにあたわず。わが主君源家康は、信長公との旧交を思い、信義を重んじて信雄公を助けんと蹶起せり” (하시바 히데요시는 야인의 자식으로, 원래 말 앞을 달리는 병졸에 지나지 않았으나, 노부나가 공의 총애를 입어 장수로 발탁되자 그 큰 은혜를 잊고 아들 노부타카 공과 그 생모·딸을 함께 학살했으며, 이제 또다시 노부카츠 공에게 군사를 겨눈다. 그 대역무도함을 묵과할 수 없다. 우리 주군 미나모토노 이에야스는 노부나가 공과의 옛 교분을 생각하고 신의를 중히 여겨 노부카츠 공을 돕고자 궐기하였다)7
미천한 출신을 들쑤신 이 문장에 히데요시는 격노했다고 전한다. 야스마사의 목을 벤 자에게 10만 석을 내리겠다는 현상금까지 걸었다는 이야기다(일부 사료는 액수를 특정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했다는 설도 있다).8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반전된다. 그해 11월 이에야스와 히데요시가 화의를 맺은 뒤, 야스마사가 이에야스의 사자로 상경해 히데요시와 마주하게 됐다. 원한을 살 만도 한 자리였는데, 오히려 히데요시는 격문의 문장력을 칭찬했다고 전한다.
“그대의 뜻이 실로 훌륭하다. 고헤이타(小平太, 야스마사의 통칭)라 부르게 해달라. 도쿠가와 공은 고헤이타 같은 무장을 두어 부럽구나”9
목에 현상금까지 걸었던 적장을 도리어 아끼는 후배처럼 대하며 애칭까지 요청했다는 이 반전이야말로, 300년 넘게 이 이야기가 사랑받아온 이유일 것이다.
이 화해 장면과 곧잘 함께 언급되는 유물이 하나 있다. 좌우로 넓게 뻗은 부채 장식이 달린 당관형 투구(唐冠形兜)로, 이때 히데요시가 야스마사에게 직접 내려준 것이라고 전한다.10 다만 이 역시 격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전해진다”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 유물 자체는 실재하지만, 하사 경위를 당대 문서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
3-2. 실전에서도 물러서지 않다
격문은 심리전이었을 뿐, 야스마사는 코마키·나가쿠테 전역 내내 실제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하구로 전투에서는 5,000명 부대를 이끈 지휘관 명단에 사카이 타다츠구·오쿠다이라 노부마사 등과 이름을 나란히 올렸고, 하쿠산바야시 전투에서는 미즈노 타다시게 등의 부대와 협공해 도요토미 히데츠구 부대를 기습해 궤멸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1 붓만 잘 쓰는 문관이 아니라, 실제로 창칼을 들고 싸운 장수였다는 뜻이다.
3-3. 이 이야기는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가
여기까지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제 사료를 따져볼 차례다.
결론부터 말하면, 격문·현상금·칭찬이라는 이 3막 구조 전체를 일본어 위키백과와 전문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모두 “후대의 지어낸 이야기”라고 판정했다.12 격문의 실물이나 사본은 현존하지 않고, 이야기를 전하는 가장 이른 사료조차 아라이 하쿠세키가 겐로쿠 14–15년(1701–1702)에 편찬한 『한칸후(藩翰譜)』로 사건 후 약 118년이 지난 것이다. 그보다 늦은 『무토쿠헨넨슈세이』(1740–1741, 사건 후 약 157년)와 『명장언행록』(1869, 사건 후 약 285년)이 뒤를 잇는다.12 격문의 정확한 문구도, 현상금 액수도, 칭찬의 발언도 사이트·사료마다 조금씩 다른데 후대에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옮겨지는 과정에서 조금씩 달라진 게 아닌가 싶다.
흥미로운 우연 하나, 야스마사가 실제로 최종 받은 영지가 다테바야시 10만 석이었다는 점이 “10만 석 격문”이라는 통칭이 후대에 정착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을 여러 대중 사이트가 언급한다. 다만 사료로 검증된 인과관계는 아니기 때문에 재미로만 보도록 하자.8
4. 오다와라 정벌과 간토 이봉 — 다테바야시 10만 석 (1590)
1590년 오다와라 정벌로 호조 가문이 멸망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도카이 지방에서 간토로 이봉시켰다. 이때 야스마사는 고즈케 다테바야시(上野国 館林) 10만 석을 받아 초대 번주가 됐다. 사천왕 중 이이 나오마사(12만 석, 사천왕 중 최대)에는 못 미쳤지만, 혼다 타다카츠와 나란히 2위 규모였다.13
다테바야시에서 야스마사는 단순히 성에 들어앉은 영주가 아니었다. 성을 확장하고 성하마을을 정비했으며, 도네강·와타라세강의 제방 공사를 주도해 수해에 시달리던 이 지역의 기반을 다졌다. 나카센도와 이어지는 닛코 협로(日光脇往還)도 이때 정비됐다.14 지금도 다테바야시시가 그를 “초대 번주”로 삼아 전용 관광지도까지 만들어 소개하는 것은, 그가 남긴 내정의 흔적이 400년이 지난 지금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간토 소부교(関東総奉行)로서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등 다른 가신들을 감독하는 위치에도 있었다.13 전쟁터를 달리는 무장이자 유능한 행정가이기도 했던 그의 문무를 겸비한 능력이 진면목을 발휘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5. 세키가하라 — 나카센도 지연 (1600)
5-1. 히데타다의 첫 원정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군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에야스 본대는 도카이도로, 아직 스물두 살이던 후계자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끄는 별동대 약 3만 8천은 나카센도로 서진했다. 야스마사는 이 히데타다 별동대에 군감(軍監, 군사 전반을 자문·감독하는 역할)으로 종군했다. 젊은 후계자의 첫 단독 원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역할이었다.15
행군 도중 히데타다군은 시나노 우에다성(上田城)을 지키던 사나다 마사유키·노부시게 부자와 맞닥뜨렸다. 이 대치가 예상보다 길어지는 사이, 이에야스로부터 “속히 서쪽으로 오라”는 상경 명령서가 도착했지만 폭우로 강이 불어나 전달 자체가 늦어졌다. 결국 히데타다군은 9월 15일 세키가하라 본전에 참전하지 못했다. 종전 후에야, 대략 5일 늦게 오미 쿠사쓰에 도착해 이에야스와 합류했다.16
5-2. 처벌을 각오한 간언
늦게 도착한 아들을 이에야스가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통설은 이에야스가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사흘간 면회를 거부하고 격노했다고 전한다. 이때 야스마사가 나섰다고 한다. 처벌을 각오하고 직접 이에야스 앞에 나가 간언했다는 것이다.
야스마사의 간언: “弓矢の道において父君の御心にかなわぬ者なりと世に示されなば、人々のあなどりを受け申すべし。これ御子の恥辱のみならず、父君御身の恥辱にてはあらずや。” (무예의 도리에서 아버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라고 세상에 보이신다면,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아드님의 치욕일 뿐 아니라, 아버님 자신의 치욕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이에야스가 마음을 누그러뜨려 다음 날 대면을 허락했다고 한다. 히데타다는 이후 야스마사에게 이런 감사장을 내렸다고 전한다.
히데타다의 말: “此度の心ざし、我が家の有らんかぎりは、子々孫々にいたるまで、忘るる事あるまじ。” (이번에 그대가 보여준 충심은, 우리 가문이 존속하는 한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17
전공을 세우지 못한 채 지각한 후계자와, 자기 목숨을 걸고 그 후계자를 감싼 늙은 장수. 세키가하라를 둘러싼 여러 일화 중에서도 유독 인간적인 장면이다.
5-3. 이 장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가
다만 이 극적인 장면의 상당 부분은 사건 후 약 100년 뒤 성립한 『藩翰譜』(1701–1702)에 의존한다.17 근래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은 이에야스가 화가 나 면회조차 거절했다는 “사흘간 격노” 통설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실제로는 연락 지연과 악천후가 겹친 불운이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18 지연의 책임을 놓고도 해석이 갈린다. 전통적으로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계략에 빠진 것을 원인으로 보지만, 역사학자 야마기시 료지는 당대 서장을 근거로 애초 명령 자체가 “우에다를 공략한 뒤 상경하라”는 것이었다며 오히려 히데타다 자신의 서투른 전략을 원인으로 지목한다.19 다만 어느 해석에서도 야스마사에게 책임을 지우는 경우는 없고, 모든 시대에 걸쳐 그는 사태를 수습하는 중재자의 역할로만 묘사된다.19
논공행상에서도 이 사실은 확인된다. 야스마사는 세키가하라 본전에 참전하지 못했으므로 전공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에야스는 히타치 미토 25만 석이라는 파격적인 가증전봉을 제안했다. 야스마사는 이를 스스로 사양했다. 세키가하라에서 전공이 없었다는 것과, 다테바야시가 에도성 참근에 편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20 순수한 겸양이라기보다 실리적 명분이 섞인 처신이지만, 어느 쪽이든 그가 실질적 불이익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6. 혼다 마사노부와의 관계, 그리고 자진 퇴장
야스마사와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의 관계에는 흥미로운 반전이 있다. 다테바야시 부임 초기, 야스마사는 간토 소부교로서 마사노부를 포함한 가신들을 감독하는 상급 위치에 있었다.13 그런데 세키가하라 이후 상황이 뒤집혔다. 마사노부와 오오쿠보 타다치카가 먼저 로주(老中) 반열에 올랐고 야스마사는 밀려났다.
이때 그가 보인 반응이 인상적이다. 권력을 다투는 대신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老臣権を争うは亡国の兆しなり”(원로 신하가 권세를 다투는 것은 나라가 망할 조짐이다)라며 중앙 정치에서 손을 뗐다고 전해진다.21 한때 감독하던 위치에 있던 사람이 그 밑으로 밀려나는 상황에서도, 권력투쟁을 하는 대신 조용히 뒤로 물러난 것이다.
혼다 마사노부와의 갈등을 좀 더 극적으로 만드는 일화도 있다. 야스마사가 마사노부를 “腸の腐った奴”(창자가 썩은 놈)라 불렀다는 이야기라든가, 혼다 타다카츠도 마사노부를 “사도의 겁쟁이”라 부르며 같은 혼다 성씨임에도 동족 취급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22 다만 이 발언들의 1차 사료상 출전은 확인되지 않고, “규탄 서한을 보냈다”는 형태의 구체적 서한은 애초에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 무공파(사카이·혼다 타다카츠·이이·사카키바라) 대 문치파(혼다 마사노부)라는 파벌 구도는 자료마다 일관되게 나오지만, 사카키바라 가문과 혼다 가문 사이의 “가문 대 가문” 라이벌 서사로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혼다 마사노부와 혼다 타다카츠는 무관한 별개 가문이고, 2011년 하마마츠 행사에는 두 집안 후손이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23
7. 만년과 죽음 (1606)
야스마사의 정실은 오스가 야스타카(大須賀康高)의 딸인 젠가쿠인(善学院)이다. 장남 오오스가 타다마사(大須賀忠政)는 외가인 오오스가 가문에 후계자가 없어 1589년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고, 차남 타다나가(忠長)는 요절했다. 이 때문에 삼남 사카키바라 야스카츠(榊原康勝, 1590~1615)가 다테바야시 10만 석 가독을 상속했다. 야스카츠의 정실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딸이었다.24
케이초(慶長) 11년(1606년) 5월 6일, 야스마사는 모낭염(毛嚢炎)을 앓기 시작했고 병세가 악화되어 같은 달 14일 사시(巳刻, 오전 9~11시경) 다테바야시에서 사망했다. 향년 59세.25 가독을 이은 야스카츠도 오래 살지 못했다. 1614–1615년 오사카 전투(겨울의 진·여름의 진)에 출전했다가, 여름의 진 직후인 1615년 6월 이전부터 앓던 종기로 26세에 사망했다.26
야스마사 사후 사카키바라 가문은 여러 차례 전봉을 겪는다. 1643년 시라카와(白河) 전봉은 야스마사의 손자 대(사카키바라 타다츠구榊原忠次)에서 이루어진 일로, 야스마사 사망 후 37년 뒤다. 이후 히메지(1649)→무라카미(1667)→히메지(1704)를 거쳐 1741년 에치고 다카다(高田)로 전봉되는데, 8대 당주 사카키바라 마사미네(榊原政岑)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검약령을 어기고 사치를 부린 데 대한 징벌이었다.27
8. 인물평 — 문무겸전의 사천왕, 그러나 가장 조용한 이름
야스마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아네가와부터 나가시노까지 이에야스의 초창기 전쟁을 빠짐없이 치렀고, 코마키·나가쿠테에서는 실전과 심리전을 동시에 수행했으며, 다테바야시 10만 석을 훌륭하게 다스렸고, 세키가하라에서는 자기 몸을 던져 주군의 후계자를 지켰고, 정작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은 스스로 사양했다. 사천왕 중 유일하게 “문(文)과 무(武)를 겸비했다”는 평을 받는 이유다.
문제는 이 평판을 뒷받침하는 가장 유명한 일화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의 격문 하나이라는 것인데 이를 보강할 별도의 자필 문서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허점이 있고,28 일본에서도 그를 다룬 단독 학술 연구서도 이이 나오마사·혼다 타다카츠에 비해 드물다.29 그럼에도 초기 도쿠가와의 문서 행정을 도맡았다는 점, 다테바야시에서 실제로 남긴 치적, 세키가하라에서 보여준 처신은 모두 독립된 사료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하나의 화려한 일화가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두루 보여준 활약이 쌓여 만든 명성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렇게 균형 잡힌 인물임에도 사천왕 중 가장 조용히 잊혔다는 점이다. PRESIDENT Online의 한 기사는 그를 “사천왕 중 가장 마이너하지만 무용에도 지략에도 뛰어났다”고 소개한다.30 그가 가장 극적으로 회자되는 장면이 “전투에서의 활약”이 아니라 “지각한 주군의 후계자를 감싼 조정자” 역할이라는 점이, 사카이·혼다·이이 3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림이 되는 무용담이 부족한 이유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히데요시를 분노하게 만든 유명한 격문이 사실이 아니어도 좋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실전에서 물러선 적 없고, 행정에서 누구보다 많은 흔적을 남겼으며, 권력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나 탐하지도 않았던 사람. 사천왕 중 가장 덜 알려졌을 뿐, 가장 무결점의 완벽한 사나이였을지도 모른다.
출처
1차·준1차 사료 (성립 시기 명시, 모두 2차 자료를 통한 재인용)
- 『藩翰譜』 — 겐로쿠 14–15년(1701–1702), 아라이 하쿠세키 편찬
- 『武徳編年集成』 — 겐분 5년/칸포 원년(1740–1741), 기무라 다카아츠 편찬
- 『名将言行録』 — 메이지 2년(1869), 오카타니 시게자네 편찬
- 『榊原家譜』 — 사카키바라 가문 자체 편찬 가보
- 『甲陽軍鑑』 — 겐나 연간(1615~1624) 오바타 카게노리 정리 (원문은 Wikisource로 대조)
- 『武備神木抄』
- 『徳川実紀(台徳院殿御実紀)』 — 분카–덴포 연간(1809–1843) 막부 공식 편찬
현대 연구자·언론 기고
-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 다수(「小牧・長久手の戦い。徳川家康の家臣・榊原康政は、本当に豊臣秀吉を激しく非難したのか?」・「徳川秀忠が関ヶ原合戦に間に合わず、父の家康から厳しく叱責されたのは事実か」)
- 山岸良二, 「関ヶ原の戦い「よく聞く通説」はウソだらけだ」, 東洋経済オンライン
- 나카무라 타츠오(中村達夫)·무라야마 카즈오(村山和夫)의 “도쿠가와 삼걸→사천왕” 호칭 성립 연구(일본어 위키백과 「徳川四天王」 항목 인용을 통해 재확인)
- 프레더릭 빅터 디킨스(Frederick Victor Dickins), 『Life of Sir Harry Parkes』 vol.2, 1894 (서지 정보는 위키백과 경유)
공식·표준 참고자료
- 코토방크(kotobank.jp) 「榊原康政」 항목(『国史大辞典』 등 표준 사전 통합)
- 일본어·영어·한국어 위키백과 각 「榊原康政」・「榊原氏」・「榊原康勝」・「大須賀忠政」・「徳川四天王」・「本多氏」・「上田合戦」・「小牧・長久手の戦い」・「長篠の戦い」・「本多忠勝」・「徳川秀忠」 항목
- CiNii Research(cir.nii.ac.jp), JapanKnowledge(ジャパンナレッジ) 「榊原康政」 표제어
- 国立国会図書館リサーチ・ナビ 「戦国史を動かした武将の書簡」
- 国立公文書館 「49. 藩翰譜」・「42. 御実紀(東照宮御実紀)」
- 다테바야시시(館林市) 공식 관광 자료 「榊原康政公ゆかり 館林まちあるきマップ」, 다테바야시시 제1자료관
- 上越市(조에쓰시) 「高田藩榊原家」 공식 페이지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경유, 『国史大図鑑』 第3巻(吉川弘文館, 1932) — 당관형 투구 도판(Wikimedia Commons 소장 사진)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D, 개별 각주에 표시)
- touken-world.jp, 名古屋刀剣ワールド, 도요타시 관광 공식, 요리토모재팬(yoritomo-japan.com), 戦国ヒストリー(sengoku-his.com), 和樂web, サライ.jp, BUSHOO!JAPAN, PRESIDENT Online, rekijin.com, history-land.com, kusanomido.com, pixiv 백과사전, WEB群馬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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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방크(kotobank.jp) 「榊原康政」 항목(『国史大辞典』 등 통합); 일본어 위키백과 「榊原康政」・「旗本先手役」・「備」 항목; touken-world.jp 「軍勢の組織化と種類」. 혼다 타다카츠의 요리키 54기는 일본어 위키백과 「本多忠勝」 항목(尾崎晃, 『千葉史学』 54号, 2009 인용) 기준.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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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ken-world.jp 「榊原康政の歴史」; 일본어 위키백과 「名将言行録」 항목(사료 신뢰성 관련 서술).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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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ken-world.jp 「榊原康政の歴史」; 일본어 위키백과 「長篠の戦い」・「本多忠勝」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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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徳川四天王」 항목(나카무라 타츠오·무라야마 카즈오·프레더릭 빅터 디킨스 서지 인용).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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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방크 「榊原康政」 항목; touken-world.jp, 前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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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토모재팬(yoritomo-japan.com) 「榊原康政の檄文・羽柴秀吉激怒」; 戦国ヒストリー(sengoku-his.com) 「榊原康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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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media Commons 「File:Tokan nari kabuto.jpg」 — 원 출전은 『国史大図鑑』 第3巻(吉川弘文館, 1932) 도판 설명(“豊臣秀吉から榊原康政へ贈られたと伝わる唐冠形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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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榊原康政」 항목; 名古屋刀剣ワールド 「榊原康政 愛知の武将」; BUSHOO!JAPAN 「榊原康政の生涯」.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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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바야시시(館林市) 공식 관광 자료 「榊原康政公ゆかり 館林まちあるきマップ」; WEB群馬 「榊原康政の墓 善導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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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榊原康政」・「徳川秀忠」 항목; 영문 위키백과 「Sakakibara Yasuma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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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岸良二, 「関ヶ原の戦い「よく聞く通説」はウソだらけだ」, 東洋経済オンライン; 일본어 위키백과 「上田合戦」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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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Online 「関ヶ原に遅れた秀忠を榊原康政が懲罰覚悟でかばった深い理由」 — 인용문 출전은 『藩翰譜』로 추정되나 원문 대조는 이루어지지 않았음.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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渡邊大門, 「徳川秀忠が関ヶ原合戦に間に合わず、父の家康から厳しく叱責されたのは事実か」,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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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榊原康政」 항목; 영문 위키백과 「Sakakibara Yasumasa」(단, 다테바야시를 세키가하라 이후 신규 배령으로 서술하는 부분은 연대 오류로 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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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kijin.com 「【腸の腐った奴と嫌われても】徳川家康に重用された参謀・本多正信」; history-land.com 「榊原康政と本多忠勝の関係」; PRESIDENT Online 「「腰抜け」と罵られても…」. ↩
-
rekijin.com, 前掲; history-land.com, 前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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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本多氏」 항목; kusanomido.com 「本多忠勝と本多正信の関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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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榊原康政」・「榊原康勝」・「大須賀忠政」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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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榊原康政」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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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榊原康勝」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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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榊原氏」 항목; 上越市 「高田藩榊原家」 공식 페이지. ↩
-
요리토모재팬 「榊原康政の檄文」; 国立国会図書館リサーチ・ナビ 「戦国史を動かした武将の書簡」(우필 대필 관행 관련 일반론). ↩
-
CiNii Research 검색 결과(https://cir.nii.ac.jp/); JapanKnowledge(ジャパンナレッジ) 「榊原康政」 표제어 등재 확인. ↩
-
PRESIDENT Online 「関ヶ原に遅れた秀忠を榊原康政が懲罰覚悟でかばった深い理由…徳川四天王で最もマイナーだが武勇にも知略にも優れてい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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