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살바도르와 산도밍고: 같은 해에 세워진 두 요새의 갈라진 운명 (1626–1980)
Q. 1626년 스페인이 대만 북부에 세운 두 요새는 어떻게 됐는가? 산살바도르(기륭 헤핑다오)는 1642년 네덜란드에 항복, 1668년 네덜란드가 철수하며 폭파해 사라졌다. 산도밍고(단수이)는 네덜란드, 청, 영국(113년 임차), 호주, 미국의 손을 거쳐 1980년 중화민국에 반환됐다. 같은 해에 같은 도미니크회 손으로 시작된 두 요새의 운명은 그렇게 갈렸다.
대만의 식민지사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이 네덜란드를 먼저 떠올린다. 1624년 안핑(타이난)에 세워진 Fort Zeelandia, 그리고 1662년 정성공의 그 요새 함락. 그러나 같은 시기 대만 북쪽 끝에는 또 다른 유럽 세력이 있었다. 스페인이다.
1626년부터 1642년까지 16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스페인은 대만 북부의 두 항구, 기륭(케렁)과 단수이에 요새를 세웠다. 하나는 폭파됐고 하나는 박물관이 됐다. 이 글은 그 두 요새의 이야기다.
1626년 5월, 마닐라에서 출항한 함대
직접적인 동기는 네덜란드였다. 1624년 VOC가 대만 남부 안핑에 발판을 마련하자 마닐라의 스페인 식민 정부는 마카오–마닐라–아카풀코로 이어지는 갈레온 무역로가 위협받는다고 판단했다. 응수는 단순했다. 북쪽을 잡는다.
1626년 2월, 안토니오 카레뇨 데 발데스(Antonio Carreño de Valdés) 지휘 하에 함대가 루손 북부 카가얀에서 출항했다. 병력은 도합 약 450명이었다. 스페인인 100명, 필리핀 팜팡고(Pampango) 보병 200명, 카가야노(Cagayano) 보조병 150명. 동행한 도미니크회 수도사는 5명, 인솔자는 필리핀 도미니크회 관구장 바르톨로메 마르티네스(Bartolomé Martínez)였다.
함대는 네덜란드가 통제하는 대만 해협을 피해 필리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한 뒤 대만 동해안을 우회했다. 5월 5일경 동북단의 곶에 도착한 함대는 그날의 성인 이름을 따 이곳을 카보 산티아고(Cabo Santiago)라 명명했다. 이 이름은 오늘날 의란현 산댜오자오(三貂角, Sandiaojiao)로 그대로 남아 있다. 한자 三貂는 Santiago의 음차다.
5월 10일경, 함대는 북서쪽으로 돌아 케렁(지룽) 만에 입항했다. 만 입구의 작은 섬, 한족이 “사회도(社寮島)“라 부르던 곳을 점거하고 이슬라 데 산살바도르(Isla de San Salvador, 구원의 섬)라 명명했다. 만 자체는 바이아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Bahía de la Santísima Trinidad, 지성삼위일체 만), 섬 전체는 이슬라 에르모사(Isla Hermosa, 아름다운 섬). 포르투갈인의 Ilha Formosa를 스페인어로 받아 적은 이름이었다.
오늘날 헤핑다오(和平島)가 그 사회도/산살바도르 섬이다.
Fort San Salvador — 르네상스 후기 사각 요새
요새 설계는 플랑드르 출신으로 추정되는 군사기술자 니콜라스 볼렌(Nicolás Bolen)이 맡았다. 노동력은 한족(Sangley) 벽돌공이었다. 형식은 르네상스 후기 이탈리아식 사각 요새. 네 모서리에 보루(bastión)를 두는 구조였다.
1634년 시점에 완성된 본 요새의 네 보루는 다음과 같았다.
| 보루 이름 | 위치/기능 |
|---|---|
| San Antonio el Grande | 본 요새 주 보루. 1642년 함락 후 네덜란드가 그대로 사용 |
| San Sebastián | 1666년 정성공 측 공격으로 일부 손상 |
| Santiago | 동측/북측 보루, 해상 방어 |
| San Luis | 남측 보루, 만 안쪽 통제 |
본진에서 떨어진 케렁 일대 고지대에는 보조 보루들이 산재했다. 라 미라(La Mira, 전망대), 라 레티라다(La Retirada, 후퇴 보루), 엘 쿠보(El Cubo, 주사위 — 사각 단일 망루), 산 안톤(San Antón), 산 미얀(San Millán). 1642년 네덜란드가 본 요새를 함락하기 전 단계적으로 무너뜨린 외곽 거점들이었다.
1628년, 단수이 — Fort San Domingo
케렁 점거 2년 뒤인 1628년, 두 번째 케렁 지휘관 후안 데 알카라소(Juan de Alcarazo)가 서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단수이(Tamchui) 강 어귀에 두 번째 요새를 세웠다. 단수이 강을 통해 내륙 타이베이 분지로 진입할 수 있었고 케렁과 단수이 사이의 원주민 마을(특히 세나르 Senar, 판타오 Pantao, 카바란 Cabaran)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도미니크회 창립자 성 도미니크에서 따 포르틴 산토 도밍고(Fortín Santo Domingo), 곧 “산도밍고 작은 요새”가 됐다. 그러나 처음 세워진 것은 점토와 나무, 대나무 기둥의 임시 구조였다. 이 사실은 8년 뒤의 사건에서 결정적 약점이 된다.
1631년, 단수이의 도미니크회 — 잃어버린 사전
단수이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도미니크회 수도사 하신토 에스키벨(Jacinto Esquivel)이다. 1631년 단수이에 부임한 그는 2년의 짧은 사역 기간 동안 세 권의 책을 썼다.
- Doctrina Christiana en la lengua de los indios Tanchui en la Isla Hermosa (1630) — 단수이 원주민 언어 교리서
- Vocabulario de la lengua de los indios Tanchui — 단수이 원주민 언어 어휘집
- Memoria de las cosas pertenecientes al estado de la Isla Hermosa (1632) — 이슬라 에르모사 사정 비망록
세 권 중 앞의 두 권은 현재 모두 소실됐다. 에스키벨 본인은 1633년 일본행 항해 중 동승 선원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의 작업도 함께 사라졌다. 만약 그 어휘집이 남아 있었다면, 오늘날 단수이 일대에서 사어(死語)가 된 바사이어/세나르어 한 갈래를 학술적으로 복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름이 남고 책은 사라지는 일은 식민지 사료에서 흔하다.
1636년, 단수이의 봉기 — 진흙으로 위장한 매복
1636년, 마닐라 보급선이 늦어지자 단수이 주둔군은 단수이 강 유역에서 직접 쌀을 매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식민 행정의 누적된 세금 부담에 반발한 원주민이 단수이 요새를 공격해 점토-목재 구조의 산도밍고를 파괴했다. 8년 만이었다.
봉기 진압 후 도미니크회는 세나르족 회유에 나섰다. 통역 겸 협상가로 동행한 인물은 수도사 루이스 무로(Luis Muro), 전임자 프란시스코 바에스(Francisco Váez)의 후임이었다. 쌀 매입대가 강가에 다다르자 세나르족은 몸에 진흙을 바르고 나뭇잎으로 위장한 채 매복하고 있었다. 무로와 스페인 병사 2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 회유하러 간 신부가 함정에 걸린, 식민지 선교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1637년 필리핀 총독 세바스티안 우르타도 데 코르쿠에라(Sebastián Hurtado de Corcuera)는 대만 식민지를 사실상 포기 단계로 전환했다. 산도밍고는 석조로 재건되긴 하지만 곧 자체 파괴 후 폐기됐다. 1637년 10월까지 대부분의 병력이 마닐라로 귀환했다. 케렁에 남은 병력은 단 125명. 1641년의 1차 네덜란드 공격은 어찌어찌 막아냈지만 1642년의 운명은 이때 이미 봉인됐다.
1642년 8월, 라틴어로 전해진 항복권유서
1642년 8월 17일, 네덜란드 함대장 헨드릭 하루세(Hendrik Harouse)가 대만 남부 타위안에서 4척의 대형선과 정크선·소형선 4척, 도합 8척을 이끌고 출항했다. 인원은 약 690명. 군인 369명, 선원 222명, 그 외 한족·자바인 인부였다.
8월 19일 케렁만 외곽에 도착한 함대는 다음 이틀에 걸쳐 산살바도르 섬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22일에는 함포를 양륙해 고지대의 외곽 보루 라 미라를 점령했고, 23일에는 라 레티라다에 100발 이상을 퍼부은 뒤 돌입했다. 그러나 보루는 거의 비어 있었다. “사망자 3, 생존자 2.” 본 요새 산살바도르는 이제 함포 사정 안에 들어왔다.
8월 24일, 네덜란드의 메신저가 항복권유서를 들고 본 요새로 향했다. 언어는 라틴어였다. 양측의 공통 학술언어로 전해진 항복권유서. 17세기 식민 전쟁의 기묘한 단면이다. 도미니크회 수도사가 통역을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스페인측 1차 보고서에 자주 인용되는 한 구절이 있다.
“Por cada diez balas que disparábamos nosotros, ellos respondían con doscientas o más.” “우리가 열 발을 쏘면, 저쪽은 이백 발 이상으로 응사했다.”
이미 게임은 끝나 있었다. 8월 26일, 마지막 케렁 지휘관 곤살로 포르티요(Gonzalo Portillo)가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항복 조건은 다섯 조항이었다.
- 스페인 지휘관과 병사들은 요새를 비우고 도미니크회 수도원으로 이동, 무기를 양도한다.
- 옷가지 1–2벌만 휴대 가능하다.
- 성직자도 입은 옷만 가지고 떠난다.
-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수도원에 대기한다.
- 타위안으로 이송 후 총독 안토니오 판 디멘이 처분을 결정한다.
요새 내 인원은 약 400명이었다. 군인 268명, 여성 42명, 어린이 18명, 노예 32명, 종복 55명, 사제 2명. 우호 원주민 전사 30–40명도 함께였다. 이들은 산살바도르 → 타위안 → 바타비아(자카르타) → 마닐라로 이송됐다.
코르쿠에라 총독은 이슬라 에르모사 상실의 책임으로 1644년 마닐라에서 투옥, 5년간 옥살이를 했다. 한 식민지의 운명이 한 관료의 정치 경력과 함께 청산된 셈이다.
네덜란드의 26년, 그리고 1668년의 폭파
네덜란드는 산살바도르를 포트 노르트홀란트(Fort Noord-Holland)로 개명했다. 단수이의 산도밍고 자리에는 1644년 새 석조 요새 포트 안토니오(Fort Antonio)가 세워졌다. VOC 동인도 총독 안토니 판 디멘의 이름을 딴 한 변 15.25m, 높이 13m의 입방형 2층 건물이었다. 이 건물이 오늘날 단수이에 서 있는 홍모성(紅毛城)의 본체다. “홍모”(붉은 머리)는 단수이 한족이 네덜란드인을 부르던 별명이었다.
1661년 정성공이 안핑 Fort Zeelandia를 함락시키며 네덜란드는 대만 남부에서 철수했지만 케렁은 정성공 측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1664년 네덜란드는 케렁에 다시 들어왔다. 1664–1668년 제2기 점령이 이어진다. 그러나 정성공의 후계자 정경(鄭經)의 사주로 추정되는 원주민 저항이 누적됐다. 청-네덜란드 연합 작전이 실패하면서 케렁의 수익성은 더 이상 회복되지 않았다.
1668년, 네덜란드는 케렁을 최종 포기하며 산살바도르를 폭파했다. VOC 일지(Dagregister)에 “철수 전 화약고 폭발 및 시설 파괴”가 명기돼 있다. 1626년 스페인이 세우고 26년간 네덜란드가 사용한 케렁의 요새는 그렇게 사라졌다. 19~20세기 들어서는 정확한 위치조차 잊혀진다.
이 점이 단수이의 산도밍고와 결정적으로 갈리는 분기점이다. 케렁은 묻혔고 단수이는 살아남았다.
1724년 청, 1867년 영국 — 단수이의 113년 임차
1683년 청이 정씨 가문의 정권을 멸하고 대만을 영토에 편입한 뒤, 1724년 청 정부는 방치돼 있던 홍모성을 보수했다. 석조 외벽과 4개의 성문을 추가했는데, 그중 남문 하나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단수이의 청대 중국식 건축 유일 잔존 요소가 됐다.
1858년 청-영 천진조약으로 단수이는 개항장이 됐다. 1861년 영국이 임시 영사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1867년, 청-영 간 “영구임차 협정”이 체결됐다. 영국은 홍모성을 무기한 임차해 영사 업무에 사용할 수 있게 됐다. 1868년 정식 입주하면서 외벽을 흰색에서 빨간색으로 도색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붉은 색은 이때 칠해진 것이다.
1891년에는 홍모성 옆에 빅토리아 양식의 영사관저가 건립됐다. 2층 벽돌 건물로 빅토리아 양식에 중국식 처마와 연등 모양 창을 절충한 디자인이었다.
이 시기 단수이 영사관에는 잠시나마 허버트 앨런 자일스(Herbert Allen Giles)가 근무했다(1885–1888년경 추정). 한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자일스는 이 시기에 전임자 토머스 웨이드(Thomas Wade)의 작업을 발전시켜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을 다듬었다. 오늘날 한자 음역(Beijing→Peking) 표준의 일부가 단수이 홍모성에서 정리됐다는 일화다.
1884년 청불전쟁 당시 프랑스 함대가 단수이를 포격했을 때도 홍모성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영국 국기가 게양된 영사관 시설을 프랑스가 의도적으로 회피한 측면이 있다.
1972년 영국 철수, 1980년 반환 — 113년의 끝
1971년 UN 총회 2758호 결의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의석을 차지했다. 1972년 영국이 베이징과의 외교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하면서 단수이 영사관도 폐쇄됐다. 1972년 3월 영국이 공식 철수하고 시설 관리는 호주에 위탁됐다.
1972–1978년은 호주가 위탁 관리. 그러나 호주도 1972년에 이미 베이징과 수교한 상태여서 관리는 명목상이었다. 1978년부터는 미국에 이관됐다. 미국 역시 1979년 1월 1일 베이징과 수교하며 대만과 단교한다. 위탁 관리는 사실상 형식만 남았다.
대만 사회에서 “외국인이 점거하고 있는 국토”라는 비판이 누적되자 1979–1980년 중화민국 정부가 영국과 임차 종료 협상에 들어갔다. 1980년 6월 30일, 영국이 공식 인도했다. 1867년 영구임차로부터 정확히 113년 만이었다.
영국, 호주, 미국. 세 나라의 손을 거쳐 113년 만에 대만으로 돌아온 요새. 그동안 산살바도르는 케렁만의 콘크리트 아래 묻혀 있었다.
2011년, 조선소 주차장 아래 — 헤핑다오 발굴
산살바도르의 위치는 20세기 들어 거의 잊혀졌다. 일본 식민지기에 헤핑다오 남쪽 해안은 정유공장으로 사용됐다. 광복 후에는 국영 조선소, 곧 현 CSBC Corporation, Taiwan(台灣國際造船)의 기륭 조선소 부지가 됐다. 1668년 네덜란드가 폭파한 자리는 콘크리트 아래 묻혔다.
2011년, 스페인-대만 합동 발굴팀이 활동을 시작했다. 책임자는 스페인 측 마리아 크루스 베로칼(María Cruz Berrocal, CSIC/콘스탄츠 대학)과 대만 측 장진화(臧振華, 중앙연구원)였다. 당초 목표는 조선소 제1 건선거 서쪽의 의장공장 아래 추정된 본 요새 부지였으나, 조선소 사용 허가 지연으로 발굴지는 CSBC 직원 주차장 부지로 변경됐다.
이 우회가 결과적으로 더 큰 발견을 만들어냈다. 17세기 유럽식 석조 건축 유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기초, 지진과 태풍에 대비한 부벽(buttress), 한때 일본 식민지기 정화조로 오인됐던 구조물. 이것이 콘벤토 데 토도스 로스 산토스(Convento de Todos los Santos, 만성 수도원), 곧 1626년 직후 도미니크회가 세운 본당의 유구로 비정됐다. 1642년 항복 협상이 진행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기도하는 자세”의 인골
수도원 인근에서는 부속 묘지가 발견됐다. 2016년 9–11월 발굴 캠페인에서 매장 인골 6기와 분리된 인골 다수가 출토됐다. 그중 한 구는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매장돼 있었다. 가톨릭식 매장 양식의 결정적 증거.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유럽식 매장이다.
DNA 분석은 다국적 협력으로 진행됐다.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연구소의 요하네스 크라우제(Johannes Krause)가 인골 및 병원체 DNA를, 프랑스 CNRS의 에스텔 헤르셰르(Estelle Herrscher)가 치아 동위원소를 분석했다. 잠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
- 매장된 인골은 유럽계, 아시아계, 그리고 정황상 아프리카계까지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 최소 1구는 유럽 기원이 DNA로 확정됐다. 아시아·태평양에서 분자생물학적으로 입증된 최초의 유럽인 인골이다.
- 동아시아 출신과 혼혈로 추정되는 개체도 다수 확인됐다. 산살바도르가 단순한 유럽 식민지가 아니라 스페인 + 필리핀 팜팡고/카가야노 + 멕시코 메스티소·물라토·흑인 + 한족 + 일본인 + 원주민이 섞인 초기 글로벌 항구였다는 사료 증언과 부합한다.
베로칼은 한 논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San Salvador de Isla Hermosa was an early globalized spot.”
기도하는 자세로 묻힌 그 한 구의 인골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도미니크회 수도사일 수도, 마닐라 갈레온의 선원일 수도, 멕시코 출신 보병일 수도 있다. 본 요새 본체의 발굴은 아직 미완이다. 조선소 의장공장 아래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25년 현재 발굴지는 일부 보드워크와 안내판이 설치돼 있지만 본격 사적공원화는 CSBC 조선소와의 부지 협상이 변수로 남아 있다.
두 요새, 두 운명
산살바도르(케렁)는 1668년 네덜란드가 폭파하고 떠났고, 그 자리는 일본 정유공장을 거쳐 오늘날 국영 조선소 주차장 아래에 묻혀 있다. 본 요새 발굴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산도밍고(단수이)는 살아남았다. 네덜란드 → 청 → 영국 → 호주 → 미국 → 중화민국. 다섯 깃발이 차례로 게양됐다 내려졌다. 1867년 영국 임차로부터 1980년 반환까지 113년. 현재 단수이고적박물관(淡水古蹟博物館)의 핵심 전시물이다.
같은 1626~1628년에 같은 도미니크회의 손으로 시작된 두 요새. 둘 다 1642년 같은 날 같은 함대에 함락됐다. 그러나 한쪽은 묻혔고 다른 쪽은 박물관이 됐다. 그 차이를 만든 것은 1668년의 화약 한 더미와 1867년의 임차 협정 한 장이었다.
포르투갈인이 16세기에 Ilha Formosa, 곧 아름다운 섬이라 부른 것을 스페인이 Isla Hermosa로 받아 적었다. 그러나 스페인 점거기 동안 이 이름이 가장 자주 적힌 문서는 항복 협정서, 군사 보고서, 사상자 명단이었다. 이름이 아름다울수록 사료는 잔혹하다.
참고 자료
1차 사료 모음
- José Eugenio Borao Mateo (ed.), Spaniards in Taiwan, Vol. I (1582–1641, 2001), Vol. II (1642–1682, 2002), SMC Publishing, Taipei.
대표 단행본
- José Eugenio Borao Mateo, The Spanish Experience in Taiwan 1626–1642: The Baroque Ending of a Renaissance Endeavour, Hong Kong University Press, 2009.
- Tonio Andrade, How Taiwan Became Chinese: Dutch, Spanish, and Han Colonization in the Seventeenth Century, Columbia/Gutenberg-e, 2008.
고고학 논문
- María Cruz Berrocal et al., “The Study of European Migration in Asia-Pacific During the Early Modern Period: San Salvador de Isla Hermosa (Keelung, Taiwan)”, International Journal of Historical Archaeology, Springer, 2019.
- Berrocal et al., “Wooden material culture and long-term historical processes in Heping Dao (Keelung, Taiwan)”, 2021.
- “A Comprised Archaeological History of Taiwan through the Long-Term Record of Heping Dao, Keelung”, Journal of Field Archaeology.
기관
- 단수이고적박물관(淡水古蹟博物館, Tamsui Historical Museum) — en.tshs.ntpc.gov.tw
- NAO Project (CSIC) — nao-project.csic.es/projects/heping-dao-b-taiw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