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에 하루카타(陶晴賢, 1521–1555) — 오우치를 뒤엎고 4년 뒤 이쓰쿠시마에서 진 실권자
Q: 스에 하루카타(陶晴賢)는 누구인가?
A: 서일본 최대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를 섬긴 스오(周防) 슈고다이 가문의 당주다. 1551년 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스기 시게노리(杉重矩) 등 슈고다이급 중신들과 함께 거병해 요시타카를 나가토(長門) 다이네이지(大寧寺)에서 자결로 몰아넣었고, 오토모 하루히데(大友晴英, 후의 오우치 요시나가, 大内義長)를 새 당주로 세워 오우치 가문을 4년 가까이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554년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등을 돌린 뒤 1555년 이쓰쿠시마(厳島) 전투에서 대패해 섬 안에서 자결했고, 그가 세운 오우치 정권은 2년 뒤 나가후사(長房)와 요시나가의 자결로 끝났다.
한눈에 보는 스에 하루카타
| 항목 | 내용 |
|---|---|
| 이름 | 스에 하루카타(陶晴賢), 1552년 초까지는 타카후사(隆房). 통칭 고로(五郎), 관직 오와리노카미(尾張守), 출가 후 법명 젠쿄(全薑) |
| 생몰 | 1521년(다이에이 원년) 11월 14일 – 1555년 10월 1일(양력 10월 16일경), 향년 35(세는 나이) |
| 가문 | 오우치 가문 지류 미기타 가문(右田氏)의 분가. 스오 슈고다이(守護代) 가문 |
| 아버지 | 양부 스에 오키후사(陶興房). 친부는 몬다 오키유키(問田興之)일 가능성이 지적된다 |
| 거성 | 도미타 와카야마성(富田若山城, 현 야마구치현(山口県) 슈난시(周南市)) |
| 주요 사건 | 이즈모(出雲) 원정(1542–43), 다이네이지의 변(1551), 요시미 마사요리(吉見正頼) 반란(1553–54), 모리 이반(1554), 이쓰쿠시마 전투(1555) |
| 최후 | 1555년 이쓰쿠시마에서 자결. 최후지는 오에우라(大江浦) 설이 유력하나 이설이 있다 |
| 자녀 | 장남 나가후사(長房), 차남 사다아키(貞明). 나가후사는 1557년 자결 |
스에 하루카타는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한국어판 위키백과에 항목은 있지만 일본어판 요약에 가깝고, 이쓰쿠시마 전투 항목에는 학계의 병력 논쟁이 반영돼 있지 않다.1 스에 하루카타라는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첫 이미지는 “주군을 죽인 신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이미지의 원인이 된 기록을 찾아보면 사건 당시의 기록보다는 승자인 모리 가문 쪽에서 100여 년 뒤에 정리한 전쟁 이야기책에서 나온 부분이 많다. 그 정리 과정을 짚어 가면서, 스에 하루카타가 정권을 잡은 4년 동안 실제로 한 일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의 한 구절을 제외하면 1차 사료 원문을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대부분 학술 논문과 연구서가 인용한 문서, 야마구치현문서관 전시 자료, 일본어판 위키백과의 각주를 따라가 확인했고, 각주마다 어디까지 확인했는지 적었다.
1. 스오 슈고다이 가문의 양자
1-1. 미기타 가문의 분가, 스에 가문
스에 가문(陶氏)은 오우치 가문(大内氏)의 한 갈래인 미기타 가문(右田氏)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 스오(周防) 요시키군(吉敷郡) 스에촌(陶村, 현 야마구치시)에서 이름을 따왔고, 1432년(에이쿄 4년, 永享) 무렵부터 스에 가문이 스오 슈고다이를 대대로 맡았다.2 슈고다이는 슈고(守護, 오우치 당주)를 대신해 영내 통치의 실무를 맡는 자리다. 오우치씨처럼 스오·나가토(長門)·부젠(豊前)·지쿠젠(筑前) 등 여러 지역을 거느린 가문에서는 슈고다이급 중신이 각 지역의 군사와 행정을 나눠 맡았고, 스에 가문은 근거지인 스오를 담당했다.
1-2. 스에 하루카타의 탄생
하루카타의 생일은 다이에이 원년(1521) 11월 14일 묘시(오전 6시경)다. 근거는 조정 신관 요시다 카네미기(吉田兼右)가 1542년 스오에 내려갔을 때 쓴 기록 『보슈게코키(防州下向記)』로, 와다 슈사쿠(和田秀作)가 2020년에 이 기록을 분석해 밝혔고 나카쓰카사 겐이치(中司健一)가 2023년 인물 소개에서 이를 반영했다.3
『보슈게코키(防州下向記)』가 연구되면서 스에 하루카타의 혈연에 대한 학계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종래에는 스에 오키후사의 차남으로 알려졌지만, 이 기록대로라면 이와미 슈고다이 몬다 타카모리(問田隆盛)의 동복동생이다. 그렇다면 친부는 몬다 오키유키, 친모는 스에 히로모리(陶弘護)의 딸일 가능성이 있고, 하루카타는 오키후사의 조카이자 양자가 된다. 다만 친부와 친모가 누구인지는 어디까지나 추정이고, 현재까지는 “그럴 가능성이 지적된다”는 수준이다.3
| 항목 | 종래 서술 | 최근 연구 |
|---|---|---|
| 아버지 | 스에 오키후사의 차남 | 오키후사의 양자(조카). 친부는 몬다 오키유키일 가능성 |
| 입양 경위 | 언급 없음 | 1529년 오키후사의 친아들 오키마사(興昌)가 25세로 죽어 조카를 들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
| 가독 상속 | 1539년 오키후사 사후 | 1536년 6월 이전에 이미 상속했다는 지적(나카쓰카사 2023) |
오키마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주군인 오우치 요시타카와 불화를 일으킨 일 때문에 아버지인 오키후사가 아들을 살해했다는 설도 있지만, 출전이 표기되지 않은 서술이라 신뢰하기 어렵다.3 어쨌든 스에 가문의 후계 자리는 이렇게 한 번 옆 가지로 넘어갔고, 그 자리를 이은 소년이 요시타카 아래에서 오우치 가문의 중신이 됐다.
1-3. 타카후사의 隆
하루카타의 원래 이름 타카후사(隆房)의 隆은 오우치 당주 요시타카(義隆)에게서 받은 글자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이름 한 글자를 받는 헨키(偏諱)는 당시 무가의 관례였고, 스에 당주들은 대대로 오우치 본가 당주의 글자를 받았다. 동생 스에 타카노부(隆信)도 같은 경우라고 한다.4 이름까지 한 글자 받았던 그가 자신의 손으로 요시타카를 몰아낸 뒤 이 이름을 버리고 하루카타(晴賢)로 바꾼 경위는 4장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2. 요시타카 정권의 군사 책임자
2-1. 코오리야마성과 이즈모 원정
하루카타의 이른 시기 이력에서 굵직한 일은 1540–41년 아키(安芸) 코오리야마성 구원과 1542–43년 이즈모 원정이다. 전자는 아마고 하루히사(尼子晴久)가 모리 모토나리의 요시다 코오리야마성을 포위하자 오우치가 원병을 보낸 전투다. 하루카타는 이 원병의 주력을 이끌었다. 일본어판 위키백과에는 요시타카에게서 “총대장의 권한”을 받았다는 서술이 있지만, 같은 일본어 위키의 다른 항목에는 “주력을 이끌었다” 정도로만 나와 있다. 출전이 『모리 모토나리쿄덴(毛利元就卿伝)』 같은 근대 편찬물과 에도 시대 기록이 섞여 있어, 여기서는 “주력을 지휘했다”는 정도로만 적으려 한다.5
이즈모 원정은 1542년 정월 오우치군 본대가 출진해 아마고 가문의 본성 갓산토다성(月山富田城)을 공격한 전투다. 성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1543년 4월 말에는 원래 아마고 쪽이었다가 오우치로 갈아타 참전한 고쿠진들이 다시 아마고 측으로 돌아섰다. 미토야 히사스케(三刀屋久扶), 미사와 타메키요(三沢為清), 혼조 츠네미츠(本城常光), 킷카와 오키츠네(吉川興経) 등이다. 이들의 이반으로 오우치군은 열세에 몰려 5월 철수했고, 요시타카의 양자 하루모치(晴持)는 후퇴 중 익사했다.5 하루카타가 이 전투에서 요시타카를 따라 종군한 것은 확인된다. 일본어판 위키백과에는 원정 강행 자체가 “이즈모를 치지 않으면 아키·이와미 고쿠진이 이반한다”는 스에 측 제안이었다는 서술도 있지만, 이 논지를 뒷받침하는 1차 사료는 찾지 못했다.5
2-2. 문치파 대 무단파라는 통설
이즈모 패전 뒤 요시타카가 정치와 군사에 흥미를 잃고 교토(京都)풍 문화에 빠졌고, 문관 사가라 타케토(相良武任) 같은 문치파를 중용하자 스에·나이토 같은 무단파가 소외되어 다이네이지의 변이 일어났다는 것이 요시타카 정권을 보는 통설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는 시각은 후대 기록에서 굳어지게 된 것이고, 현대의 학계에서는 부정된다. 일본어판 위키백과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에는 나카쓰카사 2023을 인용해, 패전 뒤에도 요시타카가 정치와 군사에 의욕을 잃지 않았다는 근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6
- 요시타카는 패전한 해인 1543년 규슈의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의 차남을 유시(猶子, 형제나 친척의 자식을 아들처럼 삼은 관계)로 삼아 오토모와 관계를 개선했다. 이 아이가 훗날 하루카타가 새 당주로 세우는 하루히데(晴英)다.
- 이와미의 오가사와라 나가오(小笠原長雄)를 복속시키고 빈고(備後) 간나베(神辺) 합전 등에서 이겨 오우치의 영역을 최대로 넓혔다.
- 사가라 가문은 요시타카의 할아버지 대인 오우치 마사히로(政弘) 때부터 오우치를 섬겨 왔으므로 패전으로 실의에 빠져 문관인 타케토를 발탁했다는 설명은 맞지 않는다.
- 오우치 가문은 4대에 걸쳐 종3위(従三位) 이상이었으므로 요시타카의 궁정풍 생활은 갑작스러운 교토 흉내가 아니라 가문의 격에 걸맞은 생활이었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해석은 성격 대립이 아니라 제도 대립이다. 후지이 다카시(藤井崇)가 소개하는 구도는 이렇다. 오우치는 스오·나가토·부젠 같은 여러 지역을 거느렸고, 각 지역은 스에·나이토·스기 같은 슈고다이급 중신이 나눠 맡았다. 이들은 정책을 합의로 정하는 중신 회의 효조슈(評定衆)를 이루었고, 전쟁이 나면 군사를 이끌었다. 한편 야마구치에서는 당주 곁의 행정 기구에서 부교슈(奉行衆, 정무와 소송 실무를 맡은 관료 집단)와 군다이(郡代, 군 단위 지방 행정관)가 평소의 정무를 실제로 처리했다. 군사와 행정의 권한이 이렇게 갈려 있었다. 이즈모 패전 뒤 출병이 줄자 군사 지휘가 본업인 슈고다이급 중신들의 발언력이 약해졌고, 그 불만이 타케토와 요시타카를 향했다는 설명이다.6
2-4. 「서국무쌍의 사무라이다이쇼」
하루카타는 흔히 “서국무쌍의 사무라이다이쇼(侍大将, 무사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로 불린다. 이 호칭이 나오는 문헌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이 운영하는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CRD)에서 확인할 수 있다. CRD는 일본 각지의 도서관이 이용자의 문의에 답한 기록(회답)을 모아 공개하는 곳인데, 이 호칭의 출전을 묻는 문의에 야마구치현립도서관이 답한 기록이 올라 있다.
이 회답에 따르면 『인토쿠키(陰徳記)』(가가와 마사노리(香川正矩) 저, 1660년 성립) 권19에 “陶尾州ハ西国ニ并者無侍大将”(스에 오슈는 서국에서 견줄 자가 없는 사무라이다이쇼, 오슈尾州는 오와리노카미의 줄임말),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가가와 카게츠구(香川景継) 저, 1695년경 성립) 권18에 “陶隆房は西国に并ふ者なき侍大将”(스에 타카후사는 서국에서 나란히 설 자가 없는 사무라이다이쇼)라는 표현이 있다.7 반면 같은 시대와 지역을 다룬 기록인 『안자이군사쿠(安西軍策)』, 『추고쿠치란키(中国治乱記)』, 『오우치 요시타카키(大内義隆記)』, 『게이코산케시(芸侯三家誌)』, 『요시다 모노가타리(吉田物語)』에는 이 장면에서 그런 호칭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7
사건이 일어난 1551년에서 『인토쿠키(陰徳記)』까지 109년,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까지 144년이다. 하루카타가 살아 있을 때 이렇게 불렸다는 근거는 찾지 못했고, 사무라이다이쇼라는 호칭이 나오는 기록은 모두 모리의 분가인 킷카와(吉川) 가문의 가신 가가와 집안 사람들이 쓴 책이다. 그 외의 인물이 쓴 기록에서는 사무라이다이쇼라는 호칭을 확인하지 못했다.7
이 호칭은 칭찬이지만, 문장이 칭찬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토쿠타이헤이키』 권18에서 이 구절은 하루카타와 사가라 타케토의 불화를 다루는 「스에 타카후사와 사가라 타케토의 불화」(陶隆房相良武任不和之事) 장의 앞부분에 나온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의 1911년 활자본으로 앞뒤를 직접 읽어 보면 이렇다.
陶隆房ハ西国ニ并フ者ナキ侍大将、智モ勇モ人ニ超ヘタリ、有武無文カ故我慢熾盛ニシテ善悪ニ付テ我意ヲ用ヒ、他ノ意見ヲ納レヌ人ナレハ 스에 타카후사는 서국에서 나란히 설 자가 없는 사무라이다이쇼로, 지모도 용기도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무(武)는 있어도 문(文)이 없는 탓에 아집이 몹시 강하고, 옳고 그름을 따질 때도 제 뜻만 내세우며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어서
칭찬은 첫 구절뿐이고, 곧바로 “무는 있으나 문이 없다”는 단서가 붙어 아집이 강한 인물로 이어진다. 이 문장은 평정 자리마다 타케토와 시비를 다투는 장면으로 넘어가며, 『인토쿠타이헤이키』는 이렇게 하루카타를 소개하면서 뒤에 이어질 불화의 원인을 그의 성격에서 찾는다. 3장에서 다루는 문치파 대 무단파의 인격 대립 서사가 이 대목과 같은 방향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같은 『인토쿠타이헤이키』에는 하루카타의 다른 모습도 나온다. 일본어판 위키백과가 인용하는 대목에는 “근국무쌍의 용장이지만 천성이 먼 앞을 헤아리지 못하고 몹시 성미가 사나운 사람”이라는 평과 함께, 주군을 죽인 죄를 지옥에서 받는다는 단죄가 나온다(일본어 위키 재인용이라 원문 대조가 필요하다).8 이렇듯 한 책 안에 무용을 칭찬하는 문장과 인격을 비난하는 내용이 같이 들어 있는데,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스에 하루카타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이 책과 이후 세대의 정리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3. 다이네이지의 변 (1551)
3-1. 조짐: 1549년부터 1551년 초까지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어판 위키백과 「다이네이지의 변」에는 『사가라 타케토 모시조(相良武任申状)』 등을 근거로 한 다음 경과가 정리돼 있다.
1549년 2~5월 모리 모토나리가 아들들을 데리고 야마구치를 방문했고, 이때 하루카타가 모토나리의 둘째 아들로 킷카와 가문을 이은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와 의형제를 맺었다. 『사가라 타케토 모시조(相良武任申状)』에는 이 방문을 하루카타가 모리와 손잡으려고 초청한 것으로 본 해석이 나와 있다.
1550년에는 타케토를 암살하려던 시도가 밀고로 무산됐고, 9월 15일 신사 예제(例祭, 해마다 정해진 날 지내는 큰 제사)에 요시타카가 급히 불참하고 미기타 타카츠구(右田隆次)를 대신 보냈으며(하루카타가 요시타카와 타케토를 가두려 한다는 소문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본어 위키에 소개돼 있다), 11월 하순에는 하루카타가 병을 이유로 자신의 거성인 와카야마성에 칩거했다.9 각 사건의 정확한 일자와 인과관계는 위키백과 서술 수준이라 확정하기 어렵다. 다만 1550년 하반기에 하루카타와 주군인 오우치 요시타카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래 문서들로도 뒷받침된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일본사 연구자 토머스 콘란(Thomas Conlan)이 2015년 논문의 각주에 수록 자료집과 문서 번호까지 적어 둔 문서가 두 건 있다. 하나는 1550년 11월의 「아이젠묘오호 센자기간 코토가키(愛染明王法千座祈願事書)」로, 요시타카의 장수를 빌면서 “스에 하루카타의 악심이 가라앉기를” 기원하는 대목이 있다. 콘란은 이것을 요시타카가 하루카타의 불만을 사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근거로 든다.10 다른 하나는 1551년 정월 27일 요시타카가 모토나리에게 “집안 내부의 분란에 대비해 지체 없이 와 달라”는 취지로 몰래 보낸 기리가미(切紙, 정식 서장용 종이를 잘라 쓴 약식 서장)다. 다만 이 문서를 한참 전인 1536–37년 무렵의 서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연대에는 이견이 있다.11
1551년 정월 5일자 『사가라 타케토 모시조』 사본은 스에 하루카타와 나이토 오키모리의 결속을 보여주는 문서로 소개되는데, 정작 이 문서에서는 스기 시게노리가 처음 반란 가능성을 요시타카에게 경고한 것으로 보인다.12 슈고다이급 세 사람(스에, 나이토, 스기)이 처음부터 한편은 아니었던 셈이다.
3-2. 8월 24일의 편지
하루카타의 거병 의사를 보여주는 가장 이른 문서는 8월 24일자로 모리 모토나리·타카모토(隆元)와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에게 보낸 서장(『킷카와케 몬조(吉川家文書)』 609호)이다. 콘란은 이 문서에서 하루카타가 스기 시게노리·나이토 오키모리와 함께 요시타카를 폐하고 그 유아를 세우기로 했다고 알렸다고 소개한다.13 이 편지의 연도에는 견해차가 있다.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편자와 기시다 히로시(岸田裕之)는 1550년으로 보지만, 콘란은 1551년이 더 유력하다고 보고 『히로시마현사 고대중세자료편(広島県史 古代中世資料編)』도 [1551년] 8월 24일로 분류한다.13
콘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하루카타는 이미 오토모 소린의 동생 오토모 하루히데를 새 당주로 세우기로 오토모와 합의해 둔 상태였는데, 모토나리에게는 “유아를 세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콘란은 “하루카타는 모토나리에게 거짓을 말했다”고까지 주장하는데, 이는 콘란 개인의 추론이고 다른 연구자가 같은 주장을 편 사례는 찾지 못했다.13 오토모와의 합의 시점도 갈린다. 콘란과 일본어 위키 「스에 하루카타(陶晴賢)」는 1550년으로 보고, 일본어 위키의 「다이네이지의 변」에는 1551년 5월 무렵 밀사를 보냈다고 나와 있다.14 이에 연도를 특정할 수 없으므로 합의 시점은 “1550–51년경”으로만 적고 넘어가려 한다.
한편 야마구치현문서관 전시(2021년도 자료소전시 「스에씨의 발급문서 (2)(陶氏の発給文書 (2))」)에는 하루카타가 아키 고쿠진 아마노 타카츠나(天野隆綱)에게 “주군 요시타카를 폐하고 요시타카의 유아를 후계로 세운다”는 계획을 알리며 협력을 요청한 서장이 실려 있다. 초기 계획이 오우치 요시타카를 은거하게 만들어 어린 아들을 추대하는 것이었고, 나중에 오우치 부자를 제거하고 오토모 가문의 하루히데를 세우는 쪽으로 계획을 바꾸었다는 서술과 들어맞는다.15
3-3. 거병과 요시타카의 최후
거병 일자는 자료마다 다르다.
| 항목 | 일본어판 위키백과 「다이네이지의 변」 |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 「스에 하루카타」 |
|---|---|---|---|
| 거병 | 8월 20일 | 8월 27일 | 8월 28일 |
| 야마구치 진입 | 8월 28일 와카야마성 출진 | (기재 없음) | 8월 28일 |
| 요시타카 자결 | 9월 1일 10시경 | 9월 1일 10시경 | 9월 1일 |
| 아들 요시타카(義尊) 살해 | 9월 2일 | 9월 2일 | 9월 2일 |
콘란은 날짜 없이 “8월 말”이라고만 적었다.16 여기서도 8월 말 거병, 9월 1일 요시타카 자결, 9월 2일 적자 요시타카(義尊, 아버지 義隆와 독음이 같다) 살해까지만 확정한다. 자결 시각 “10시경”은 『추고쿠치란키(中国治乱記)』에 근거한 서술이다.
요시타카가 스에군이 야마구치를 침공한다는 소문이 돈 뒤에도 오토모의 사자를 접대하며 노(能) 공연을 이어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본어 위키는 이 이야기의 출처로 『오우치 요시타카키(大内義隆記)』를 든다. 원문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16 요격하기 위해 출진한 요시타카는 오우치관을 나와 산기슭 호센지(法泉寺)에 진을 쳤지만 병력은 2~3천 명에 그쳤고, 그나마도 탈영병이 잇따라 야마구치를 버리고 나가토로 후퇴했다.
전직 간파쿠(関白, 최고 귀족 관직) 니조 타다후사(二条尹房)가 나이토 오키모리에게 요시타카의 은거를 조건으로 한 화평을 알선하려 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야마구치에는 오우치의 후원으로 교토에서 내려와 머무는 공가가 여럿 있었고, 니조 부자와 산조 킨요리(三条公頼) 등이 이 혼란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16 이들이 처음부터 표적이었는지, 휩쓸려 죽은 것인지는 이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요시타카는 나가토 후카와(深川)의 다이네이지에 들어가 9월 1일 자결했고, 레이젠 타카토요(冷泉隆豊)가 카이샤쿠(介錯, 자결하는 사람의 목을 쳐서 고통을 덜어 주는 일)를 맡았다. 타카토요는 뒤이어 스에군에 돌격해 전사했다.16 요시타카가 남긴 사세(辞世)로 알려진 “討つ者も 討たるる者も 諸ともに(치는 자도 치이는 자도 함께) 如露亦如電 応作如是観(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은 『오우치 요시타카키(大内義隆記)』에는 없고 에도 초기 문헌에 나오므로 후세의 창작일 가능성이 지적된다.16
3-4. 정변을 일으킨 원인
원인에 관해서는 연구자마다 설명이 다르다. 어느 하나가 정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 설 | 요지 | 근거·한계 |
|---|---|---|
| 문치파 대 무단파 대립설 | 이즈모 패전 뒤 문화에 빠진 요시타카가 문관을 중용해 무장을 소외 | 에도 시대 기록 이래의 통설. 현재 연구에서 부정(나카쓰카사 2023 인용) |
| 슈고다이 대 부교슈·군다이 대립설 | 군무의 슈고다이와 행정의 관료가 벌인 제도 대립 | 후지이 다카시 설. 일본어 위키 경유 소개 |
| 공가 반발설 | 궁정에 세력을 키운 공가와 재래 무사층의 대립 | 하기와라 다이스케(萩原大輔) 2021. 일본어 위키 경유 소개 |
| 천도 계획·정책 대립설 | 요시타카가 천황을 야마구치로 옮기려는 계획과 의례 비용, 공가 특권에 대한 불만 | 콘란 2015, 2020. 유력한 신설이나 확립된 통설은 아님. 하기와라가 반론 |
| 스에 가문의 구원(舊怨)설 | 1482년 스에 히로모리가 야마구치에서 살해된 사건 이래 본가와의 앙금 | 후지이 다카시가 지적한 것으로 일본어 위키가 소개 |
콘란은 “오우치 가신의 대부분이 스에 측에 섰다는 것은 이 쿠데타가 인간 관계 못지않게 정책 문제였음을 시사한다”며, 하루카타가 정권을 잡은 직후 이쓰쿠시마 신사에 통행세와 경호미 징수를 금지하는 문서를 낸 것을 들어 그에게 무역을 진작하려는 개혁 성향이 있었던 듯하다고 주장한다.17 이것도 콘란 개인의 추론에 불과하지만 정변이 하루카타 혼자의 결정이 아니었다는 데는 여러 자료가 일치한다. 후지이 2019에 따르면 나가토 슈고다이 나이토 오키모리와 부젠 슈고다이 스기 시게노리는 반란을 묵인하고 요시타카를 구하지 않았다.17 가신들이 연서로 결의한 문서 같은 1차 사료는 조사한 범위에서 찾지 못했다.
3-5. 남색 원한설
하루카타가 젊은 시절 요시타카의 총애를 받았다가 소외돼 원한을 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확인할 수 있는 데까지 따라가 보았다.
- 일본어판 위키백과 「스에 하루카타」에는 젊을 때 미남으로 알려져 요시타카의 총애를 받아 중용됐다는 한 문장이 있지만 각주가 붙어 있지 않다.18
- 『오우치 요시타카키』에 요시타카가 하루카타에게 보낸 와카가 실려 있다는 소개나, 말로 다섯 시간 걸려 만나러 갔더니 하루카타가 잠들어 있어 와카만 남기고 돌아왔다는 일화를 전하는 해설이 있다. 원문은 이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다.18
- 『인토쿠타이헤이키』에 남색 관련 구절이 있지만, 일본어 위키가 소개하는 대목의 대상은 하루카타가 아니라 고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이며, 일본어 위키에는 이 책이 “문학적 성격이 강해 신뢰하기 어렵다”고 덧붙여져 있다.18
- 오우치 요시타카의 남색을 직접 언급한 서양 선교사의 기록은 사건에서 30년 이상 지나 쓰인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 『일본사』다.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co Xavier)의 서한에도 남색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으나 이는 승려 일반을 향한 것이며 오우치 요시타카 개인을 특정한 문장은 확인되지 않는다.18
- 콘란의 2015년 논문은 이 주제를 다루지 않으며, 일본어 위키 「다이네이지의 변」의 원인 절도 이 설을 채택하지 않는다.18
후대 기록과 일부 해설에 그런 이야기가 있지만, 성립 경위와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며 현재 사학계의 주요 연구도 이를 정변의 원인으로 다루지 않는다. 흥미롭고 자극적인 이야기이기는 하나 학술적으로 뒷받침되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여러 자료가 일치하는 것은 슈고다이급 중신 세 사람과 오토모·모리라는 바깥 세력이 얽힌 정치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4. 요시나가 정권 4년의 실무
4-1. 타카후사에서 하루카타로
새 당주로 세워진 사람은 오토모 소린(宗麟, 당시 이름 요시시게)의 동생 하루히데(晴英)다. 하루히데의 어머니가 요시타카의 누나라는 설에 따르면 요시타카의 조카이기도 하다. 다만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일본어 위키에 정리된 것을 보면 오토모와는 사전에 이미 교섭이 시작돼 있었고, 협력의 대가로 오토모는 기타큐슈(北九州) 방면의 이권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 내용이 직접 나와 있는 사료는 확인하지 못했다.19 하루히데는 1552년 3월 3일 야마구치에 들어갔다. 오우치 가문의 시조로 전해지는 린쇼 태자(琳聖太子)의 고사에 따라 다타라하마(多々良浜)에 배로 상륙하는 의례를 거쳤다는 서술이 있다.19
이때 하루카타가 이름을 하루카타(晴賢)로 바꿨다. 새 당주 이름의 글자 晴을 받은 것이다. 일본어 위키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의 해설로는, 신하가 당주의 이름 앞 글자를 받는 것은 통상과 반대이므로 주종관계가 보통과 달랐다는 뜻이다. 하루히데는 이듬해 쇼군 아시카가 요시후지(足利義藤)에게서 헨키를 받아 요시나가(義長)가 되었고, 하루카타의 장남은 그 長을 받아 나가후사가 됐다.20 개명 시기는 1552년 초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일본어 위키 「스에 하루카타」 서두는 1551년 이후라는 인상을 주지만 근거가 분명하지 않고, 문서에 “晴賢”이 처음 나오는 시기는 찾지 못했다. 이 문제만 다룬 논문 「스에 하루카타의 개명 시기에 대하여」(우오야 쇼헤이(魚屋翔平), 『야마구치현 지방사 연구(山口県地方史研究)』 115호, 2016)도 있지만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20
권력 구조는 하루카타에 의한 독재에 가까웠다는 것이 통설이다. 호쇼(奉書)는 당주 하루히데의 명령을 하루카타가 받드는 형식이었다고 하지만, 합의체와 하루카타 독단의 비율을 보여주는 정량 근거는 확보하지 못했다.19 요시나가가 근세 모리 사관에서 “가짜 당주”로 취급됐다가 지금은 정식 당주로 재평가된다는 야마구치현 해설도 있다.19
4-2. 정변 이후의 숙청
정변 직후 하루카타는 가문 내의 반대파를 정리했다. 먼저 요시타카 측 인물로 후대 사람들에 의해 정변의 원인으로 자주 지목되는 사가라 타케토는 지쿠젠으로 도망쳤다가 하나오성(花尾城)에서 스에군에 공격당해 죽었다. 함께 정변에 가담했던 스기 시게노리도 1552년 1월 나가토 조코지(長興寺)에서 자결을 강요당하는데, 이유는 시게노리가 요시타카에게 하루카타를 참소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21 스기 시게노리의 아들 시게스케(重輔)는 훗날 이 일로 스에 가문에 원한을 품게 된다.
4-3. 이쓰쿠시마와 상업 정책
권력을 잡은 뒤 하루카타가 남긴 정책 문서 가운데 실물이 확인되는 것이 있다. 콘란은 1552년 2월 28일 이쓰쿠시마 신사에 내린 사다메가키(定書) 사본과 4월 20일 약식 서장(기리가미)을 근거로 하루카타가 통행세(다베츠료, 駄別料)와 게고마이(警固米) 징수를 금지했다고 밝힌다(『히로시마현사 고대중세자료편』 3권 다이간지 문서 65·67호).22 일본어 위키에는 같은 2월 28일 에라 후사히데(江良房栄)를 부교(奉行)로 삼아 이쓰쿠시마의 상업 진흥에 관한 규정을 내렸다고 나와 있다.22 이쓰쿠시마는 뒤에 하루카타가 죽는 곳이기도 하다.
4-4. 다이도지 사이쿄조
같은 시기 하루카타 정권은 기독교와도 관계를 맺었다. 자비에르는 1551년 4월 야마구치에서 요시타카에게 포교를 허락받고 폐사(廃寺, 버려진 절) 다이도지(大道寺)를 거처로 받았다. 양력 9월 그가 야마구치를 떠난 직후 스에 하루카타가 정변을 일으켰다. 그런데 자비에르의 후임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와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ández)는 야마구치에 남아 있었다.23 1552년 8월 28일자(양력 9월 16일)로 오우치 요시나가 명의의 다이도지 사이쿄조가 발급됐다. 이 문서에는 불교 용어 「지케(寺家)」가 쓰여 있고, 원문은 1570년 코임브라(Coimbra)판 예수회 서한집에 실려 있다. 일본어 위키 「다이도지 사이쿄조(大道寺裁許状)」에 따르면 이 사이쿄조가 요시나가 개인의 의사인지 하루카타의 결정인지는 사료로 확인되지 않고, 학계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23 누가 발급을 해준 것이건 간에 자비에르 이후의 선교사들이 이 정권 아래에서 야마구치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확인된다. 하루카타가 교회를 직접 찾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출처를 찾을 수 없었다.
4-5. 남아 있는 발급문서
야마구치현문서관의 자료소전시에는 하루카타가 발급한 문서 몇 건이 소개돼 있다.24 아키 고쿠진 아마노 오키사다(天野興定)에게 안게 다케다 가문(武田氏) 공략 협력을 요청한 서장이 있고, 앞서 본 요시타카 폐위 계획을 아마노 타카츠나에게 알린 서장이 있다. 모리가 이반했을 때 오우치 편에 남은 야마시로쇼(山代荘) 13개 향의 지토 후나코시(船越) 가문에게 조세를 면제해 준 「스에 하루카타 칸조(感状)」도 있다. 정변으로 얻은 정권이었지만 문서만 보면 통상의 가신 관리와 다르지 않다. 충성하면 상을 주고 고쿠진에게 협력을 청하며 영지 조세를 조정한다.
4-6. 요시미 마사요리의 반란
정권을 흔든 것은 이와미의 요시미 마사요리(吉見正頼)였다. 요시미는 요시타카의 매제로 하루카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아 1553년 10월 봉기했고, 1554년 3월부터 스에·요시나가 쪽이 산본마츠성(三本松城)을 포위했으나 9월 2일 요시미가 아들을 인질로 보내면서 결국 화의를 맺게 된다.25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사이에 터졌다. 하루카타 정권이 1년 가까이 이와미에서 발이 묶여 있던 이 시기에 모리가 이반해 버린 것이다.
5. 모리 모토나리와의 결별 (1554–55)
5-1. 결별의 원인
모리 모토나리는 정변에서 스에 하루카타에게 동조했다고 봐야 한다. 콘란은 1551년 9월 19일자 오토모 측 기록(기시다 히로시 논문 소개)이 요시타카를 무너뜨리는 데 모토나리가 한 일을 칭찬한 것을 근거로 든다.26 일본어 위키에는 정변 직후 하루카타가 모토나리에게 아키·빈고 고쿠진 영주들을 통솔할 권한을 인정하고 사토 긴잔성(佐東銀山城)·사쿠라오성(桜尾城) 점령을 승인했다고 나와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서약문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26
이들의 밀월 관계가 깨진 계기는 요시미 정벌이다. 일본어 위키 「보게이 히키와케(防芸引分)」와 「오리시키바타 전투(折敷畑の戦い)」 두 항목에 공통으로 나오는 결정적 원인은 하루카타가 산본마츠성 출병을 모리를 거치지 않고 아키 고쿠진들에게 직접 명령한 것이다. 앞서 얘기한 하루카타가 모토나리에게 인정했던 아키·빈고 고쿠진 영주들을 통솔할 권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26 여기에 1553년 모리가 함락시킨 하타가에시성(旗返城)을 스에 측이 몰수해 에라 후사히데(江良房栄)를 성번(城番, 성을 지키는 책임자)으로 앉힌 일이 모리의 불만을 샀다는 서술도 있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확실치 않아 가설 수준의 이야기로 봐야 한다.27 스에 하루카타에 등을 돌리고 공격을 시작한 모리 모토나리는 1554년 5월 12일 사토 긴잔성·사쿠라오성 등을 하루 만에 점령하고 이쓰쿠시마까지 손에 넣었다.26
하루카타가 1554년 5월 19일 모리와 고바야카와의 배신을 규탄하는 서장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콘란의 논문 각주에 『하기한 바츠에츠로쿠(萩藩閥閲録)』 4권 구바 쇼에몬 문서 26호로 소개돼 있으나 본문은 인용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26
5-2. 에라 후사히데 사건
모리와 갈라선 뒤 스에 정권이 맞은 첫 내분은 측근 에라 후사히데의 죽음이다. 하루카타는 후사히데가 모리와 내통했다고 의심해 처형 처분을 내렸다. 이는 1555년 3월 16일, 스오 이와쿠니의 고하쿠인(琥珀院)에서 히로나카 타카카네(弘中隆兼)에 의해 집행됐다. 이 사건의 원인은 서술이 세 갈래로 나뉜다.
| 구분 | 서술 | 성격 |
|---|---|---|
| 후대 기록의 줄거리 | 모토나리가 후사히데의 필적을 흉내 낸 위서로 그를 함정에 빠뜨렸고 스오 전역을 약속하는 기청문을 스에 측에 흘렸다 | 『인토쿠타이헤이키』의 서술. 창작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 |
| 종래의 학설 | 모리 타카모토 서장에 “에라”가 나오므로 후사히데가 모리에 내통해 300관의 지행을 약속받았다 | 모리 서장 해석에 의존 |
| 최근 연구 | 서장의 “에라”는 후사히데가 아니라 동족 에라 진로쿠(江良神六)다. 내통·가증 요구는 사실이 아니다 | 와다 슈사쿠 2023. 일본어 위키 경유 소개, 논문 서지 미확인 |
하루카타가 내통을 의심해 오랜 측근을 죽였다는 데는 여러 자료가 일치하지만, 의심한 이유를 후대 기록이 그린 대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다.27 모리와 갈라선 뒤 하루카타 정권이 안에서부터 곪아 간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모토나리의 책략이 결정적이었다는 이야기는 이쓰쿠시마 대목에서 한 번 더 나온다.
6. 이쓰쿠시마 전투 (1555)
6-1. 전투의 흐름
1554년 모리가 이반한 뒤, 하루카타는 1555년 9월 하순 이와쿠니에서 출발해 이쓰쿠시마에 상륙하고 모리 쪽 거점인 미야오성(宮尾城)을 포위했다(일본어 위키에는 9월 21일 출발, 22일 새벽 상륙으로 나와 있고, 다른 요약은 일자가 다르다).28 모리군은 9월 30일 밤 폭풍우 속에 출진했다. 모토나리 본대는 섬 동쪽 츠츠미가우라(包ヶ浦)에 몰래 상륙했고,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부대는 다른 쪽에 상륙했다. 10월 1일 새벽 6시 무렵 두 부대가 도노오카(塔の岡)에 있는 스에의 본진을 앞뒤로 협공했다.28 『다나모리 후사아키 오보에가키(棚守房顕覚書)』에 스에군이 “한 발도 쏘지 않고 니시야마(西山)를 향해 물러났다”는 취지로 적혀 있다고 한다.28 원문을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고 인용한 자료만 찾을 수 있었다. 스에군은 총붕괴했고 하루카타는 섬 안에서 자결했다. 최후지는 7장에서 본다. 이 전투를 둘러싼 논쟁은 아래에서 하나씩 살펴본다.
6-2. 병력 규모 2만 대 4천
통설은 스에군 2만여, 모리군 4천여다. 그러나 이 수치가 처음 나온 출전은 찾지 못했다. 아키야마 노부타카는 스에군이 1만에도 이르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일본어 위키가 소개하는 다른 견해(가와노 오사무(河野収) 8천)도 있다. 모리군은 『다나모리 후사아키 오보에가키(棚守房顕覚書)』와 『모리케 몬조(毛利家文書)』 등에 갑옷 입은 무사 1,058명이 기록돼 있다. 종졸까지 세면 모리 보다이(譜代) 가신단만 약 3천, 고쿠진과 킷카와·고바야카와 세력을 합치면 4천을 크게 넘었다는 평가가 정리돼 있다.29 스에 쪽 수치가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2025년 12월 발행된 『레키시켄큐(歴史研究)』 737호의 「이쓰쿠시마 합전(厳島合戦)」 특집 소개문도 “스에 2만 대 모리 4천”이라는 종래의 설명에 대해 최근 연구에서는 전력에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견해가 진전되고 있다고 밝힌다.30 다만 일본어 위키를 거친 수치는 원문과 다시 맞춰 봐야 한다.
| 항목 | 통설 | 재검토 |
|---|---|---|
| 스에군 | 2만 이상(1~3만 사이 이설) | 1만 미만(아키야마 노부타카), 8천(가와노 오사무) |
| 모리군 | 4천(3천 5백, 4~5천 표기도 있다) | 보다이 가신 약 3천, 고쿠진 등을 합치면 4천 이상 |
6-3. 미야오성은 미끼였나
모토나리가 이쓰쿠시마에 미야오성(宮尾城)을 미끼로 축성하고, 스에 진영에 “지금 이쓰쿠시마를 공격당하면 곤란하다”는 정보를 흘려 대군을 좁은 섬으로 끌어들였다는 이야기는 『인토쿠타이헤이키』·『요시다 모노가타리(吉田物語)』·『추고쿠치란키』 같은 후대 편찬물에 나온다.31 『인토쿠타이헤이키』 권25에는 모토나리가 평지 합전에서는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이쓰쿠시마에 겉보기에 약해 보이는 작은 성을 쌓아 스에의 대군을 좁은 섬으로 끌어들이려 했다고 나와 있다.32 그런데 『다나모리 후사아키 오보에가키』에 1554년(덴분 23년)에 이미 미야오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1555년 봄에 미끼로 새로 쌓았다”는 이야기는 성립하기 어렵다. 일본어 위키의 「미야오성(宮尾城)」에는 1554년 4월 착공으로 나와 있지만 착공 주체와 일자는 원문으로 확인하지 못했다.31 일본어 위키의 소개에 따르면 아키야마 노부타카는 이 이야기를 모토나리의 지장 이미지를 강조하는 창작에 가깝다고 평가했다.31
아키야마는 또 『인토쿠타이헤이키』가 모리 가문에 유리하게 고쳐졌다고 지적했다.31 이 책의 정본 성립 시기는 자료마다 표기가 다르다(1695년경 성립, 1712년 또는 1717년 간행).33 사실로 확인되는 것은 언제 누가 지었든지 간에 미야오성이 1554년부터 모리 쪽 거점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하루카타는 1552년부터 모리에게 빼앗기는 1554년까지 이쓰쿠시마를 직접 통치했다. 그가 섬의 지형과 사정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고, 소문에 속아 함정에 빠졌다는 후대 기록의 설명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하루카타가 모리의 거점 중 하나인 미야오성을 공략하려고 섬에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사료와 어긋나지 않는다.
6-4. 누가 출병을 결정했나
히로나카 타카카네는 모리군에 비해 수군이 열세라는 이유로 출병에 반대했지만 참전해 전사했다고 전한다. 출진 직전 9월 28·29일 무렵 가족에게 보낸 서한에서 패전을 예견하는 듯한 어투로 “걱정하지 말라”를 되풀이했다는 2차 요약이 있으나 원문 대조는 하지 못했다.34
이쓰쿠시마로의 출병이 하루카타 개인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는지 가신단의 논의를 거쳤는지를 기록한 사료는 확인할 수 없었다. “모토나리의 계략에 걸려 섬으로 들어간 하루카타”라는 이야기는 에도 시대 기록과 대중 해설에 널리 퍼져 있다.31 하루카타 개인의 “오판”이라는 이야기는 『인토쿠타이헤이키』가 그를 “천성이 먼 앞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평한 것과 같은 방향이다.
6-5. 승리의 요인은 무엇이었나
무엇이 승패를 갈랐는지를 두고도 논쟁이 있다. 야마무로 교코(山室恭子)는 결정적 요인이 구루시마 무라카미(来島村上) 수군이라고 본다. 야마무로에 따르면 모토나리는 9월 26일 서한에서 무라카미의 지원이 없으면 끝이라고 한탄하고, 27일 서한에서는 무라카미가 오지 않아도 싸우겠다고 썼다. 야마무로는 이 두 서한이 모리가 문서와 고바야카와가 문서에 나뉘어 남은 것을, 모리 측이 승리를 모토나리의 책략으로 돌리려고 선택적으로 보존한 결과로 해석한다. 앞서 몇 번 언급한 역사학자 아키야마 노부타카는 구루시마의 지원이 승리 요인의 하나이기는 하나 모리군의 분전도 무시할 수 없다고 반론하고, 그 근거로 야마다 민부쇼(山田民部丞)가 적장 셋을 벤 사례를 든다.35 최신 연구는 『레키시켄큐(歴史研究)』 737호의 「이쓰쿠시마 합전」 특집에서 볼 수 있다. 이 특집은 병력 차이가 크지 않았다면 승패를 가른 요인이 무엇인지를 묻고, 양군의 전략, 오우치 가문 쪽 시점, 무라카미 해적중의 동향, 이쓰쿠시마 신사와의 관계를 다룬다.30
종래에는 이쓰쿠시마 전투 이야기에서 하루카타를 “함정에 빠진 반역자”로 그려 왔다. 하지만 6-2에서 본 병력 재검토와 위의 승패 요인 논쟁은 그 고정관념을 흔든다. 스에군의 규모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보다 작았다면 이 전투의 패배는 대군을 이끌고 와서 어이없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두 세력이 접전 끝에 승패가 갈린 것일 뿐이다. 또한 무라카미 수군의 역할이 컸다면 모리 모토나리 혼자의 지략으로 승리했다는 이야기도 힘을 잃는다. 어느 쪽이든 “2만 대 4천, 모토나리의 지략”이라는 종래의 서사는 학계의 현재 논의와 다르다.
7. 죽음과 오우치 가문의 끝
7-1. 어디서 죽었나
패주한 하루카타는 섬 안의 포구에서 자결했다. 일본어 위키 「이쓰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 항목에 따르면 오모토우라(大元浦)에서 오에우라(大江浦)로 이동한 뒤 자결했다. 카이샤쿠는 이카가 후사아키(伊香賀房明)가 맡았다. 『인토쿠타이헤이키』에는 다카야스가하라(高安ヶ原)에서 죽었다고 나오지만, 지리·시간상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36 지자체·관광 정보에는 아오노리우라(青海苔浦)로 도망쳤으나 배가 없어 다카야스가하라에서 자결했다는 서술도 있고, 이에 기반하여 다이쇼(大正) 시기에 다카야스가하라에 “스에 하루카타 하이시노히(陶晴賢敗死之碑)“가 세워지기도 했다.36 하지만 실제로 스에 하루카타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수급은 10월 5일 모리군이 발견해 사쿠라오성에서 실검했고 모토나리가 그 머리를 채찍으로 세 번 쳤다는 일화가 있다.36 이후 하츠카이치시 사카타(佐方)의 도운지(洞雲寺)에 묻혔다. 도운지에는 하루카타의 묘로 전해지는 보협인탑(총높이 129cm)이 있고 하츠카이치시 지정 사적이다. 그러나 이 묘가 처음 나오는 문헌은 에도시대 『게이한츠시(芸藩通志)』이고 1618년의 기록에는 묘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자결한 곳이 섬의 산속이고 모리 측이 직접 벤 것도 아니어서 수급 실검의 진위 자체를 의심하는 지적도 있다.37 이 탑이 스에 하루카타의 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승이라고 봐야겠다.
7-2. 아들들과 요시나가
하루카타가 죽은 뒤 오우치 가문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 시기 | 사건 |
|---|---|
| 1555년 10월 | 이쓰쿠시마 전투. 하루카타 자결 |
| 1555년 10월 12일 | 모리의 스오·나가토 침공(보초 케이랴쿠, 防長経略) 개시 |
| 1555–56년 | 스기 시게스케가 와카야마성을 공격했다는 서술. 시게스케는 이후 나이토 타카요에게 토벌됐다는 서술 |
| 1557년 3월 2일 | 하루카타의 장남 스에 나가후사 자결(류몬지 龍文寺) |
| 1557년 4월 2일 | 나이토 타카요 자결 |
| 1557년 4월 3일(양력 5월 1일) | 오우치 요시나가, 조후쿠인(長福院, 현 코잔지 功山寺)에서 자결, 향년 18(생년 이설이 있다) |
나가후사의 죽음은 자료마다 다르다. 일본어 위키 「스에 나가후사(陶長房)」에서는 스기 시게스케가 와카야마성을 공격해 나가후사와 사다아키가 죽었다고 하고, 「보초 케이랴쿠(防長経略)」에서는 나가후사가 와카야마성을 버리고 류몬지로 도망쳐 3월 2일 자결했다고 한다.38 나가후사가 1557년 모리와의 전투에서 죽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요시나가의 최후 장소를 “카츠야마성(勝山城)“으로 적은 요약도 있지만 오기로 보인다. 일본어 위키 「오우치 요시나가」·「보초 케이랴쿠」에는 조후쿠인(코잔지)으로 나와 있고, 카츠야마성은 나이토 타카요와 요시나가가 농성했던 곳이다.39 이렇게 스에 가문의 적통은 아들인 나가후사 대에서 끊겼고, 방계는 모리 가신으로 남았다고 한다.38
하루카타가 세운 정권은 그가 죽고 2년 만에 끝났다. 요시타카가 자결한 1551년부터 요시나가가 자결한 1557년까지 따지면 6년이다.
8. 인물평: 사료로 확인되는 스에 하루카타
8-1. 이미지는 어떻게 굳었나
하루카타의 이미지는 여러 시기를 거치며 만들어졌다.
| 시기 | 매체 | 하루카타의 모습 |
|---|---|---|
| 1660–1695년경 | 『인토쿠키』·『인토쿠타이헤이키』 | “서국에 견줄 자 없는 사무라이다이쇼”이자 “천성이 앞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 주군 시해의 죄를 단죄 |
| 1849년 | 『조쿠 에이유 햐쿠닌잇슈(続英雄百人一首)』 삽화 | 출가한 모습의 무사 초상화. 판화에는 사세로 알려진 와카가 함께 실림 |
| 1852년 | 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国芳)의 견립화 | 미츠히데(明智光秀)에 빗댄 모반인 이미지(일본어 위키 서술) |
| 1880년 |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다이니혼 메이쇼카가미(大日本名将鑑)』 | 이쓰쿠시마의 모토나리 |
| 1997년 | NHK 대하드라마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 진나이 다카노리(陣内孝則)가 연기(단일 DB 확인) |
에도 시기 서술은 사건과 100년 넘게 떨어져 있어, 앞서 본 『인토쿠키』·『인토쿠타이헤이키』와 같은 한계를 안고 있다. 일본어 위키에 따르면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쿠니요시는 견립화(見立絵, 한 인물을 다른 유명한 인물에 빗대어 그리는 그림)에서 하루카타를 미츠히데에 빗댔다. 이로 보아 에도 말기에는 하루카타가 모반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항목에는 오늘날 부적절한 주군을 가신이 몰아내는 것을 일종의 자정 작용으로 보는 견해도 소개돼 있지만 이는 여러 해석 중 하나일 뿐 현대 학계의 주류는 아니다.40
8-2. 사료로 확인되는 것
그를 둘러싼 이야기를 사료 수준에 따라 나누면 다음과 같다.
확실하게 사실인 것은 이런 항목들이다. 스에 오키후사의 양자로 스오 슈고다이 가문을 계승했다는 점. 1551년에 정변을 일으켜 주군이었던 오우치 요시타카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이웃한 오토모 가문의 하루히데(후의 오우치 요시나가)를 데려와 오우치 가문을 잇게 한 뒤 4년 동안 통치하다가 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패배해 사망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원래는 오우치 가문의 아이를 후계자로 삼으려던 계획이 언제 오토모 하루히데(후의 오우치 요시나가)로 바뀌었는지. 언제부터 오토모 가문과 이런 방향에 대해 합의했는지. 최후의 전투인 이쓰쿠시마에서 스에와 모리 각각의 병력 규모는 어떻게 됐는지. 그리고 그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 어디인지와 도운지 묘가 실제 그의 묘인지는 알 수 없다.
근거가 없거나 후대의 서사에 불과한 것도 있다. 서국무쌍의 사무라이다이쇼라는 호칭에 대한 이야기. 주군인 오우치 요시타카와의 남색 관계에 의한 원한에 의해 정변을 계획했다는 설. 모리 모토나리가 스에 하루카타를 꾀어내기 위해 미야오성을 미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8-3. 4년
하루카타는 정변을 일으킨 사람이면서, 그 뒤 4년 동안 정권을 잡고 통치를 맡은 사람이기도 하다.
하루카타의 거성이었던 와카야마성의 터가 있는 슈난시에서는 2021년 2월 21일 신난요 와카야마 라이온스클럽이 성터 등산로에 “스에 가문과 와카야마성은 우리의 자랑”이라는 취지의 현수막을 걸었다.41 다이네이지의 변으로부터 470년이 지난 뒤였다. 주군을 몰아낸 사람으로 기억돼 온 인물이지만 지금은 지역에서 자랑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같은 인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한 결과일까.
출처
1차·준1차 사료 (대부분 논문·자료집을 통한 재인용)
- 吉田兼右 『카네미기쿄키(兼右卿記)』 중 『보슈게코키(防州下向記)』 (和田秀作 2020, 中司健一 2023이 인용한 것)
- 陶隆房 書状 8월 24일 (『킷카와케 몬조(吉川家文書)』 1권 609호, 『히로시마현사 고대중세자료편(広島県史 古代中世資料編)』 5권. Conlan 2015 각주 75)
- 相良武任申状写 [天文20].1.5 (『모리케 몬조(毛利家文書)』 4권 1556호. Conlan 2015 각주 76)
- 愛染明王法千座祈願事書 天文19年 11月 (『야마구치현사 통사편 부록 CD-ROM(山口県史 通史編 付録 CD-ROM)』 387호. Conlan 2015 각주 70)
- 陶晴賢 書状 1554.5.19 (『하기한 바츠에츠로쿠(萩藩閥閲録)』 4권 久波庄右衛門文書 26호. Conlan 2015 각주 78)
- 陶晴賢 厳島定書写 1552.2.28, 4.20 (『히로시마현사 고대중세자료편(広島県史 古代中世資料編)』 3권 大願寺文書 65·67호. Conlan 2015 각주 74)
- 陶隆房 書状·陶晴賢 感状 (山口県文書館 複写資料 275·280, 자료소전시 「스에씨의 발급문서 (2)(陶氏の発給文書 (2))」 전시 PDF)
- 大道寺裁許状 天文21年 8月 28日 (1570년 코임브라판 예수회 서한집 수록본 경유)
근세 편찬물 (성립 시기 명시)
- 香川正矩 『인토쿠키(陰徳記)』 (1660년 성립)
- 香川景継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 (1695년경 성립, 1712년 또는 1717년 간행)
- 『추고쿠치란키(中国治乱記)』, 『오우치 요시타카키(大内義隆記)』 (성립 시기 미확정), 『요시다 모노가타리(吉田物語)』 (1702년), 『다나모리 후사아키 오보에가키(棚守房顕覚書)』 (일부 항목은 요약 경유)
현대 연구자·언론
- Thomas D. Conlan, “The Failed Attempt to Move the Emperor to Yamaguchi and the Fall of the Ōuchi,” Japanese Studies 35(2), 2015 (본문 직접 열람)
- 中司健一, 「스에 하루카타(타카후사)(陶晴賢(隆房))」, 光成準治 編 『전국 무장 열전 9 주고쿠편(戦国武将列伝9 中国編)』, 戎光祥出版, 2023 (위키 인용 경유)
- 和田秀作, 「요시다 카네미기의 『보슈게코키』에 보이는 오우치씨 관련 기사(吉田兼右『防州下向記』に見える大内氏関係記事)」, 『야마구치현 지방사 연구(山口県地方史研究)』 123, 2020 (위키 인용 경유)
- 藤井崇,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ミネルヴァ日本評伝選), ミネルヴァ書房, 2019 (위키 인용 경유)
- 萩原大輔, 「전국기 오우치씨 영내에 내려온 공가와 ‘스에 타카후사의 난’(戦国期大内氏分国下向公家と「陶隆房の乱」)」, 『일본문학연구 저널(日本文学研究ジャーナル)』 19, 2021 (서지는 CiNii 확인, 본문 미열람)
- 秋山伸隆, 「이쓰쿠시마 합전 재고(厳島合戦再考)」, 『미야지마학(宮島学)』, 2014 / 「이쓰쿠시마 합전의 최신 연구(厳島合戦の最新研究)」, 『레키시켄큐(歴史研究)』 737, 2025 (서지는 CiNii 확인, 본문 미열람. 견해는 위키 등 요약 경유)
- 魚屋翔平, 「스에 하루카타의 개명 시기에 대하여(陶晴賢の改名時期について)」, 『야마구치현 지방사 연구(山口県地方史研究)』 115, 2016 (서지만 확인)
- 山室恭子의 이쓰쿠시마 전투 논지 (요약 기사 경유)
- 福尾猛市郎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人物叢書), 吉川弘文館 / 米原正義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Conlan 2015와 위키 인용 경유, 서지만 확인)
- 岸田裕之, 「스에 타카후사의 봉기와 모리 모토나리(陶隆房の蜂起と毛利元就)」로 추정되는 논문 (Conlan 2015 각주 경유, 원어 제목 미확인)
- 河合正治 (1984, 위키 「요시다 코오리야마성 전투(吉田郡山城の戦い)」 인용), 山本浩樹 『서일본의 전국 합전(西国の戦国合戦)』, 吉川弘文館, 2007 (위키 「이쓰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 인용), 須田 2011 (위키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 인용, 서지 미확인)
- 『츠조쿠 니혼 젠시(通俗日本全史)』 第13巻, 1913 (위키 「스에 하루카타(陶晴賢)」 인용 경유)
- 周南マリモ 新周南新聞 (2021년 와카야마성터 현수막 보도)
공식·표준 참고자료
- 国立国会図書館 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 登録番号 1000301701 (西国無双 출전), 1000003268 (다이도지 재허장)
- 山口県 「키라린쿠(きらりんく)」 야마구치학 해설, 山口市 「오우치 요시나가 사이쿄조 비(大内義長の裁許状碑)」 소개
- 일본어 위키백과 「스에 하루카타(陶晴賢)」·「스에씨(陶氏)」·「스에 오키후사(陶興房)」·「스에 나가후사(陶長房)」·「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사가라 타케토(相良武任)」·「에라 후사히데(江良房栄)」·「보게이 히키와케(防芸引分)」·「오리시키바타 전투(折敷畑の戦い)」·「산본마츠성 전투(三本松城の戦い)」·「이쓰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미야오성(宮尾城)」·「보초 케이랴쿠(防長経略)」·「다이도지 사이쿄조(大道寺裁許状)」·「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 항목
- 한국어 위키백과 「스에 하루카타」·「이쓰쿠시마 전투」 항목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D)
- sengoku-kassenroku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 해설, 개인 블로그 「오우치 요시타카의 사세(大内義隆の辞世)」, Yahoo!ニュース 와타나베 다이몬 기사, 태화캐스트 배역 정보, 城郭放浪記 「스에 하루카타 하이시노히(陶晴賢敗死之碑)」·「스에 하루카타의 수급 무덤(도운지)(陶晴賢の首塚(洞雲寺))」, 宮島観光協会 「이쓰쿠시마 합전(厳島合戦)」, 攻城団 메모, PHP 歴史街道 이쓰쿠시마 합전 기사(야마무로 교코·아키야마 노부타카 논지는 이 기사와 위키 요약 경유), JBpress 「자비에르가 비난한 … ‘남색’의 진상(ザビエルが非難した…「男色」の真相)」
확인하지 못한 것
- 『카네미기쿄키(兼右卿記)』·『인토쿠키(陰徳記)』·『오우치 요시타카키(大内義隆記)』·『다나모리 후사아키 오보에가키(棚守房顕覚書)』·『킷카와케 몬조(吉川家文書)』·『모리케 몬조(毛利家文書)』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위 내용 다수는 논문 각주와 위키백과 각주를 통한 재인용이다.
- 다이네이지의 변 원인에 대한 각 연구자의 논지는 위키 요약 경유로만 확인했다. 요시타카 부자를 죽이기로 한 계획 변경 시점과 가신 연서장은 확인하지 못했다.
- 스에 하루카타의 사원 기진장, 석고와 영지 규모는 확인하지 못했다. 근거 없는 수치는 쓰지 않았다.
- 한국어로 이 인물만 다룬 번역서와 국내 학술 논문은 검색으로 확인하지 못했다(없다는 뜻이 아니다).
- 스에 하루카타 본인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단독 연구서는 이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관련 논문은 대부분 『야마구치현 지방사 연구』에 실려 있다.
Footnotes
-
한국어 위키백과 「스에 하루카타」(생애·사후·가계·참고문헌 항목이 있고 참고문헌은 山本一成 저서 2종 등, 일본어판 요약형) 및 「이쓰쿠시마 전투」(출처 불분명 배너, 병력 2만 대 4천, 학계 논쟁 언급 없음). ↩
-
일본어 위키백과 「스에씨(陶氏)」(미기타 가문 분가, 1432년 스오 슈고다이 세습). 원 출처는 太田亮 『세이시 카케이 다이지텐(姓氏家系大辞典)』 등으로 표기돼 있으나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
-
和田秀作, 「요시다 카네미기의 『보슈게코키』에 보이는 오우치씨 관련 기사(吉田兼右『防州下向記』に見える大内氏関係記事)」, 『야마구치현 지방사 연구(山口県地方史研究)』 123, 2020; 中司健一, 「스에 하루카타(타카후사)(陶晴賢(隆房))」, 『전국 무장 열전 9 주고쿠편(戦国武将列伝9 中国編)』, 戎光祥出版, 2023, pp.50–51. 두 문헌 모두 일본어 위키백과 「스에 하루카타(陶晴賢)」의 인용을 통해 확인했고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오키마사 사망 경위는 위키 「스에 오키후사(陶興房)」·「스에 오키마사(陶興昌)」(출전 미표기). ↩ ↩2 ↩3
-
일본어 위키백과 「스에 하루카타(陶晴賢)」·「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가신단 항목. 헨키 관례에 대한 서술에 출전이 표기돼 있지 않다. ↩
-
일본어 위키백과 「요시다 코오리야마성 전투(吉田郡山城の戦い)」·「갓산토다성 전투(月山富田城の戦い)」·「사가라 타케토(相良武任)」. 이 항목들은 河合正治(1984), 『모리 모토나리쿄덴(毛利元就卿伝)』 등을 인용한다. 1543년 4월 말 고쿠진 이반과 그 명단은 「갓산토다성 전투(月山富田城の戦い)」의 서술이고, 위키는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에 이들이 성문으로 당당히 합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덧붙인다. 1차 사료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2 ↩3
-
일본어 위키백과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 「통설과 그 부정(通説とその否定)」 절(中司健一 2023, 藤井崇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무로마치기 다이묘 권력론(室町期大名権力論)』 인용). 개별 문장이 각 문헌 몇 쪽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 ↩2
-
国立国会図書館 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 登録番号 1000301701 (야마구치현립도서관 회답. 香川正矩 著·米原正義 校訂 『인토쿠키 상권(陰徳記 上巻)』, マツノ書店, 1996, p.328; 『인토쿠타이헤이키 쇼토쿠 2년판본 2(陰徳太平記 正徳二年板本 2)』, 東洋書院, 1981, p.73). 회답 내용은 필자가 직접 열람해 대조했다. 『인토쿠타이헤이키』 구절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의 1911년 활자본(권1–18 합본, 메이지 44년 간행)에서 권18 「스에 타카후사와 사가라 타케토의 불화(陶隆房相良武任不和之事)」(419쪽)의 “并フ者ナキ侍大將智モ勇モ人ニ超ヘタリ”를 스캔 이미지로 직접 확인했다. 첫 글자가 西로 읽히는지 四로 읽히는지는 스캔 해상도로 판별하기 어렵다. 『인토쿠키』 권19는 원문을 열람하지 못했다. 본문의 번역은 필자가 옮긴 것이다. ↩ ↩2 ↩3
-
일본어 위키백과 「스에 하루카타(陶晴賢)」 (『츠조쿠 니혼 젠시 제13권(通俗日本全史 第13巻)』, 1913 인용). 원문 대조는 하지 못했다. ↩
-
일본어 위키백과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 (『사가라 타케토 모시조(相良武任申状)』, 『모리 센키(毛利戦記)』 인용). 일자와 인과는 위키 서술 수준이다. ↩
-
Conlan 2015 각주 70 (『야마구치현사 통사편 부록 CD-ROM(山口県史 通史編 付録 CD-ROM)』 387호, 天文19年 11月 「아이젠묘오호 센자기간 코토가키(愛染明王法千座祈願事書)」). ↩
-
Conlan 2015 본문·각주 73 (요시타카의 1551년 정월 27일 모토나리 앞 기리가미. 福尾猛市郎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米原正義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인용). 위키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는 1536–37년경 서장이라는 신설을 병기한다. ↩
-
Conlan 2015 각주 76 (『모리케 몬조(毛利家文書)』 4권 1556호, [天文20].1.5 相良武任申状写; 『하기한 바츠에츠로쿠(萩藩閥閲録)』 3권 62호, 天文19年 9월 14일 陶隆房 書状·9월 19일 内藤興盛 起請文). ↩
-
Conlan 2015 본문 및 각주 75 (『킷카와케 몬조(吉川家文書)』 1권 609호 8월 24일 陶隆房 書状; 岸田裕之, 「스에 타카후사의 봉기와 모리 모토나리(陶隆房の蜂起と毛利元就)」로 추정되는 논문은 콘란 각주에 로마자로만 표기돼 있고 원어 제목을 확인하지 못했다). 필자가 콘란 PDF의 해당 문장을 직접 대조했다. ↩ ↩2 ↩3
-
Conlan 2015 본문(“during the previous year of 1550”), 일본어 위키백과 「스에 하루카타(陶晴賢)」(1550년)과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1551년 5월). ↩
-
山口県文書館 令和3年度資料小展示 「스에씨의 발급문서 (2)(陶氏の発給文書 (2))」 전시 PDF(복사자료 275). 이미지 PDF를 확인한 조사자의 보고에 의한 것이며, 정확한 일자와 유아가 누구인지는 해설에 나와 있지 않다. ↩
-
일본어 위키백과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스에 하루카타(陶晴賢)」 (『추고쿠치란키(中国治乱記)』, 『오우치 요시타카키(大内義隆記)』, 福尾 pp.166–168 인용). 콘란 2015는 니조 타다후사 등이 1551년 가을 야마구치에서 사망한 것을 『구교부닌(公卿補任)』 근거로 각주 16에서 밝힌다. 요시타카 사세의 성립 문제는 개인 블로그 「오우치 요시타카의 사세(大内義隆の辞世)」(신뢰도 낮음)의 지적에 의한다. 지묘인 모토노리(持明院基規)의 생사는 콘란과 하기와라 설이 달라 이 글은 서술하지 않았다. ↩ ↩2 ↩3 ↩4 ↩5
-
Conlan 2015 본문(개혁 성향 서술, 이쓰쿠시마 신사 문서는 각주 74), 후지이 다카시 2019 pp.294–295(위키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 재인용). 표의 하기와라 다이스케 설은 萩原大輔 2021(위키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 요약 경유, 본문 미열람). ↩ ↩2
-
일본어 위키백과 「스에 하루카타(陶晴賢)」(각주 없는 “寵童” 서술),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 타카카게 구절, 프로이스 서술), sengoku-kassenroku 해설, JBpress 「자비에르가 비난한 … ‘남색’의 진상(ザビエルが非難した…「男色」の真相)」(유료 2쪽 이후 미열람). 『오우치 요시타카키(大内義隆記)』 와카 일화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콘란 2015에서 해당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PDF 본문 검색으로 확인했다. ↩ ↩2 ↩3 ↩4 ↩5
-
일본어 위키백과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스에 하루카타(陶晴賢)」, 山口県 「키라린쿠(きらりんく)」 야마구치학 해설. 오토모의 반대 서사와 대가의 문서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다. ↩ ↩2 ↩3 ↩4
-
일본어 위키백과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福尾 1989, 須田 2011 인용), 「스에 하루카타(陶晴賢)」. 魚屋翔平 논문은 CiNii에서 서지만 확인했다. ↩ ↩2
-
일본어 위키백과 「다이네이지의 변(大寧寺の変)」·「스기 시게노리(杉重矩)」·「스기 시게스케(杉重輔)」. 서술 일부가 위키 요약 도구의 오류를 포함할 수 있어 교차 확인된 것만 썼다. ↩
-
Conlan 2015 각주 74(『히로시마현사 고대중세자료편(広島県史 古代中世資料編)』 3권 大願寺文書 65·67호), 일본어 위키백과 「에라 후사히데(江良房栄)」. ↩ ↩2
-
일본어 위키백과 「다이도지 사이쿄조(大道寺裁許状)」·「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영어판), 国立国会図書館 CRD 登録番号 1000003268, 山口県 「키라린쿠(きらりんく)」. 재허장 원문은 확보하지 못했다. ↩ ↩2
-
山口県文書館 令和3年度資料小展示 「스에씨의 발급문서 (2)(陶氏の発給文書 (2))」 전시 PDF(복사자료 275·280, 山口市 林家文書 1). 이미지 PDF를 확인한 조사자의 보고에 의한 것이다. ↩
-
일본어 위키백과 「산본마츠성 전투(三本松城の戦い)」. ↩
-
일본어 위키백과 「보게이 히키와케(防芸引分)」·「오리시키바타 전투(折敷畑の戦い)」·「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Conlan 2015 각주 77·78. 콘란이 인용한 오토모 측 기록은 기시다 히로시 논문에서 소개된 [天文20].9.19자 문서다. ↩ ↩2 ↩3 ↩4 ↩5
-
일본어 위키백과 「에라 후사히데(江良房栄)」·「보게이 히키와케(防芸引分)」(和田秀作 2023 소개, 논문 서지 미확인). ↩ ↩2
-
일본어 위키백과 「이쓰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오키나 모노가타리(老翁物語)』·『다나모리 후사아키 오보에가키(棚守房顕覚書)』 요약 경유). ↩ ↩2 ↩3
-
일본어 위키백과 「이쓰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秋山伸隆, 山本浩樹 『서일본의 전국 합전(西国の戦国合戦)』 인용), 한국어 위키백과와 관광협회 등은 2만 대 3,500~4천 통설이 실려 있다. ↩
-
『레키시켄큐(歴史研究)』 737호 「특집 이쓰쿠시마 합전(特集 厳島合戦)」, 戎光祥出版, 2025년 12월 26일 발행. 출판사 소개 페이지(https://www.ebisukosyo.co.jp/item/807/)에서 소개문과 수록 논문 제목(秋山伸隆 「이쓰쿠시마 합전의 최신 연구(厳島合戦の最新研究)」, 中司健一 「오우치씨에서 본 이쓰쿠시마 합전(大内氏から見た厳島合戦)」, 大上幹広 「해적중 무라카미씨와 이쓰쿠시마 합전(海賊衆村上氏と厳島合戦)」, 大知徳子 「이쓰쿠시마 합전과 이쓰쿠시마 신사(厳島合戦と嚴島神社)」, 水野椋太 「중세 이쓰쿠시마 문전 마을의 성립과 전개(中世厳島門前町の成立と展開)」)을 직접 확인했다. 논문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2
-
일본어 위키백과 「미야오성(宮尾城)」·「이쓰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 『다나모리 후사아키 오보에가키(棚守房顕覚書)』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2 ↩3 ↩4 ↩5
-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 권25 「모토나리가 이쓰쿠시마에 성을 쌓은 일(毛利元就被築城於嚴島事)」.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컬렉션 1911년(메이지 44년) 활자본(合本2)의 쪽 이미지와 OCR 텍스트로 확인했다. OCR에 깨진 글자가 많아 인용 구절만 판독했다. ↩
-
国書データベース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 서지 및 위키 「인토쿠타이헤이키(陰徳太平記)」(성립·간행 연도 표기가 자료마다 다르다). ↩
-
일본어 위키백과 「히로나카 타카카네(弘中隆兼)」·「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 서한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
PHP 歴史街道 이쓰쿠시마 합전 기사, 위키 「이쓰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 Yahoo!ニュース 와타나베 다이몬 기사(무라카미 선박 수는 자료마다 표기가 다르다). ↩
-
일본어 위키백과 「이쓰쿠시마 전투(厳島の戦い)」, 城郭放浪記 「스에 하루카타 하이시노히(다카야스가하라)(陶晴賢敗死之碑(高安原))」. ↩ ↩2 ↩3
-
城郭放浪記 「스에 하루카타의 수급 무덤(도운지)(陶晴賢の首塚(洞雲寺))」, 洞雲寺 보협인탑 소개 글(개인 블로그). 하츠카이치시 지정 사적이라는 서술과 『게이한츠시(芸藩通志)』 초출 지적은 지역·개인 사이트 요약이라 신뢰도가 낮다. ↩
-
일본어 위키백과 「스에 나가후사(陶長房)」·「보초 케이랴쿠(防長経略)」·「스기 시게스케(杉重輔)」. 나가후사 사망일과 공격자는 위키 항목 사이에서도 서술이 갈린다. ↩ ↩2
-
일본어 위키백과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나이토 타카요(内藤隆世)」·「보초 케이랴쿠(防長経略)」. ↩
-
일본어 위키백과 「스에 하루카타(陶晴賢)」 (『모리 센키(毛利戦記)』 인용의 자정 작용 견해, 쿠니요시의 견립화 서술). 대하드라마 배역은 태화캐스트 등 단일 DB로 확인했고 NHK 원본 확인은 하지 않았다. ↩
-
周南マリモ 新周南新聞(2021년 2월 보도, 기사 일부만 열람). 성터 등산로 현수막 문구는 신문이 전하는 취지를 옮긴 것이다. ↩
댓글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