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무렵 촬영된 야나가와성 고사진. 키 큰 소나무와 우거진 숲 한가운데로 천수 꼭대기가 솟아 있고 앞쪽에 들판이 펼쳐져 있다. 작자 미상, 야나가와 고문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타치바나 긴치요(立花誾千代, 1569–1602) — 여성 성주로 불린 도세츠의 딸

Q: 타치바나 긴치요(立花誾千代)는 누구인가?

A: 오토모 가문의 중신 타치바나 도세츠(立花道雪)의 외동딸(1569–1602)이다. 1575년 일곱 살 때 아들이 없던 아버지에게서 치쿠젠(筑前) 타치바나야마 성(立花山城)의 조카쿠(城督, 다이묘 대신 그 일대를 다스리게 한 직책) 지위와 성에 딸린 영지에 관한 증빙 문서, 대대로 내려온 칼과 무구를 물려받았고, 그 양도장이 지금도 사본으로 남아 있다. 1581년 열세 살에 다카하시 조운(高橋紹運)의 아들 무네토라(統虎), 훗날의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를 데릴사위로 맞아 가문을 넘겼다. 1587년 남편이 치쿠고(筑後) 야나가와(柳川)를 받자 함께 옮겨 갔고, 이후에는 성 밖의 미야나가(宮永)에 따로 살며 “미야나가도노(宮永殿)“라 불렸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 뒤 남편이 영지를 잃자 히고(肥後) 하라카(腹赤, 현 구마모토현 나가스마치)로 옮겼고 2년 뒤에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20년 신호(神号, 신으로 모실 때 붙이는 이름)를 받았고, 지금은 아버지·남편과 함께 미하시라 신사(三柱神社)에 모셔져 있다.

한눈에 보는 타치바나 긴치요

항목내용
이름긴치요(誾千代). 사료에 따라 吟千代, 가나로 きんちよ
생몰1569년(에이로쿠 12년 8월 13일, 8월 11일설도 있음) – 1602년(게이초 7년 10월 17일), 향년 34
출생지치쿠고 이모토(問本, 현 후쿠오카현 구루메시 다누시마루마치 일대)
부모아버지 타치바나 도세츠(벳키 아키츠라, 1513–1585). 어머니 몬추조 아키토요(問註所鑑豊)의 딸(호주인, 寶樹院)
상속1575년 5월 28일, 아버지의 양도장으로 타치바나야마 성의 조카쿠 증빙 문서와 무구를 받음
남편타치바나 무네시게(1567–1642). 1581년 데릴사위로 들어옴. 자녀 없음
거처타치바나야마 성(–1587) → 야나가와(1587–) → 성 밖 미야나가(이주 연도 미상, 1600년에는 거주) → 히고 하라카(1600–1602)
다른 호칭미야나가도노(宮永殿), 하라카사마(腹赤様)
법명고쇼인덴 센요 료세이 다이시(光照院殿泉誉良清大姉). 대선정니(大禅定尼)로 적은 번 문서도 있음
묘소야나가와 료세이지(良清寺). 하라카에 공양탑, 구루메 젠도지(善導寺)에도 공양탑
신호즈이교쿠 레이진(瑞玉霊神, 1820). 1823년 아버지·남편과 합사, 1826년 미하시라 신사 천궁

긴치요를 소개할 때는 보통 “일본사에서 정식 문서로 확인되는 유일한 여성 성주”라고 한다. 일곱 살에 성주가 되었고 결혼 후엔 남편과 사이가 나빠 따로 살았으며, 세키가하라 전쟁 당시에는 직접 갑옷을 입고 총병을 지휘해 적의 공격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본에서는 게임과 소설 덕분에 아버지의 벼락 칼 라이키리(雷切)를 든 여장수로 더 유명하다.

이런 이야기들을 사료와 대조하면서 긴치요의 생애를 순서대로 따라가 본다. 1575년에 긴치요가 받은 문서가 무엇이었는지, 1600년의 무용담은 언제 처음 기록됐는지가 주로 확인할 대상이다.

1. 도세츠의 딸 — 아버지와 출생 (1569–1574)

1-1. 아버지 도세츠와 타치바나야마 성

도세츠는 오토모 가문의 일족 벳키(戸次) 가문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아키츠라(鑑連)이고 도세츠는 불교에 출가한 뒤의 법명이다.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와 그 아들 소린(宗麟) 두 대를 섬기며 오토모 가문의 군사를 이끈 중신이었다.1

도세츠가 치쿠젠 가스야군의 타치바나야마 성에 들어간 것은 1570년 또는 1571년이다. 앞의 성주 타치바나 아키토시(立花鑑載)가 1568년 오토모에 반기를 들었다가 토벌된 뒤였다. 도세츠가 받은 직책은 조카쿠였다.2

조카쿠는 오토모 가문이 분고에서 멀리 떨어진 치쿠젠·부젠 같은 새 영토에 둔 직책이다. 오토모 가신단을 연구한 기무라 다다오(木村忠夫)에 따르면 조카쿠는 그곳에 상주하며 영지 안도와 주변 무사들의 통솔을 맡았다. 성을 가진 사람을 두루 가리키는 성주와 달리, 조카쿠는 다이묘가 임명하고 다이묘의 공권력을 대신 행사하는 자리였다. 그러니 성과 영지는 조카쿠 개인의 재산이 아니었다.3 긴치요가 일곱 살에 물려받은 것이 바로 이 자리에 관한 문서였다.

타치바나 도세츠 상. 삭발한 노년의 무장이 흰 옷 위에 붉은 겉옷을 걸치고 붉은 해가 그려진 부채를 든 채 앉아 있다

작자 미상, 〈타치바나 도세츠 상〉(16세기), 야나가와 후쿠곤지(福厳寺) 소장 / Wikimedia Commons(퍼블릭 도메인).

1-2. 1569년, 이모토에서 태어난 딸

도세츠는 1568년(에이로쿠 11년) 11월 25일 치쿠고 구사노(草野)의 이모토(問本) 성으로 옮겼고, 사흘 뒤인 28일 그곳에서 몬추조 아키토요(問註所鑑豊)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에도 시대 타치바나 번의 계보 『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에 이름이 오니시(於西)로 나오는 이 여성은 야스타케 시게노리(安武鎮則)의 아내였다가 재가한 사람으로,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었다. 뒷날 법명으로 호주인(寶樹院)이라 불렸다.4

긴치요는 이듬해인 1569년(에이로쿠 12년) 8월 13일에 태어났다. 날짜는 같은 번의 가보 『타치바나카후(立花家譜)』와 『타치바나케이덴』이 일치하고, 8월 11일로 적은 가신 집안 문서도 있다. 양력으로 바꾸면 1569년 9월 23일이다.5

출생 무렵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것은 『부젠 오보에가키(豊前覚書)』다. 타치바나 가문의 가신 기도 부젠(城戸豊前)이 남긴 이 각서에는 필자의 아버지가 갓난 긴치요의 보육을 맡았다는 기록과 함께 이런 문장이 있다.

永祿拾貳年己巳ノ八月ニ御料人様ヲ御誕生被成候、筑後國中之大明・町人・百姓已下ニ至迄、御祝儀申上候事無比類之由承候、(中略)御名ヲ肥前國加瀬ノ増吟へ御頼被成、吟千代様と御付被成候、

에이로쿠 12년 8월에 따님이 태어나셨다. 치쿠고 안의 다이묘와 조닌, 백성에 이르기까지 축하를 올린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고 들었다. (중략) 이름은 히젠 가세의 조긴(増吟)에게 부탁하여 ‘긴치요(吟千代)‘라 붙이셨다. — 『부젠 오보에가키』6

이름을 지은 사람은 히젠(肥前) 가세(加瀬)의 승려 조긴(増吟)이었다. 표기는 『부젠 오보에가키』와 『타치바나케잣슈(立花家雑集)』가 긴치요(吟千代), 『타치바나카후』와 『타치바나케이덴』이 긴치요(誾千代)로 갈리고, 1575년 양도장의 수신인은 가나 긴치요(きんちよ)다.6

도세츠는 이때 쉰일곱이었다. 『고모노카후(薦野家譜)』 등에는 마사치요(政千代)라는 언니가 있었으나 열두 살에 요절했다고 나온다고 하니, 도세츠가 늘그막에 얻어 길러 낸 자식은 사실상 긴치요 하나였다.7

2. 일곱 살의 양도장 — 1575년의 상속 (1575–1581)

2-1. 덴쇼 3년 5월 28일

1575년(덴쇼 3년) 5월 28일, 도세츠는 일곱 살 딸 앞으로 문서 한 통을 썼다. 지금 전하는 것은 사본으로, 타치바나 가문 문서(立花家文書, 중요문화재)로 전해 오며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의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에 일부가 실려 있다. 그 지면을 옮기면 이렇다.

義統様 御判有、 宗麟様 依無男子、至誾千代女譲與員數事、(中略) 一打刀一振〔國俊丸貫、〕(中略)仍號重代、(中略) 天正三年五月廿八日  戸次伯耆守入道               道雪 きんちよ女

요시무네 님 판(判) 있음 / 소린 님 아들이 없으므로 긴치요에게 양여하는 물목의 일. (중략) 하나, 우치가타나 한 자루(쿠니토시(國俊), 마루누키). (중략) 대대로 전할 보물로 삼는다. (중략) 덴쇼 3년 5월 28일 벳키 호키노카미 뉴도 도세츠 긴치요 여(きんちよ女) — 벳키 도세츠 양도장 사본, 덴쇼 3년(1575) 5월 28일(『다이니혼시료』 10편 2책 수록)8

『다이니혼시료』의 편찬자는 이 일을 “문서·무구 등을 딸 긴치요에게 양도한 일(文書・武具等ヲ女誾千代ニ譲ルコト)“로 요약했다.8 종가가 공개한 번각문에 따르면 문서의 첫 조항은 이렇다.

一、立花東西松尾白岳御城督并御城領等請 上意御證判七通、同為御城属領地可相成證文御書八通、続目御判相添渡事

하나, 타치바나의 동성·서성·마츠오·시라타케의 조카쿠와 성에 딸린 영지 등에 관해 주군의 뜻을 받은 증판(證判) 7통, 그리고 성에 딸린 영지가 될 증문 서장 8통을, 이음매에 판을 찍어 넘긴다. — 같은 양도장 제1조(종가 사이트 번각문)9

그 뒤로 칼·나기나타·다치·허리칼 같은 무구와, 도세츠가 전공을 적어 올리고 승인받은 군충장(軍忠状)의 목록이 이어지고, 후반에는 성에 둔 물건의 목록이 붙는다. 종가 측 해설에 따르면 같은 해 6월 28일자로 소린과 요시무네가 이 상속을 안도했고, 그 문서는 『야나가와시사(柳川市史)』 사료편에 실려 있다.10

2-2. 임명장이 아니라 상속 문서

관광 안내와 대중 매체에서는 이 문서를 흔히 “소린이 내린 슈인장(朱印状)으로 긴치요가 성주에 임명됐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문서를 쓴 사람은 소린이 아니라 도세츠이고, 형식은 양도장(譲状)이다. 소린과 요시무네의 승인은 문서 머리에 “판(花押)이 있다”는 표시로 남아 있을 뿐이고, 문서 어디에도 ‘슈인(朱印)‘이라는 말은 없다.8

내용도 “긴치요를 조카쿠로 임명한다”는 선언이 아니다. 도세츠가 오토모 본가에서 받아 둔 조카쿠와 성에 딸린 영지에 관한 증빙 15통과 무구 일체를 딸에게 넘긴다는 문서다. 조카쿠는 앞에서 본 것처럼 다이묘가 임명하는 자리였으므로, 아버지가 딸에게 직접 물려줄 수 있는 것은 그 자리를 뒷받침하는 문서와 물건이었고 오토모 측이 이를 안도하는 방식이었다.

왜 이런 문서를 썼는지는 첫 줄에 있다. “아들이 없으므로(依無男子).” 종가 측 해설에 따르면 이해 소린과 요시무네는 도세츠에게 조카인 벳키 시게츠라(戸次鎮連)의 아들 하나를 양자로 들여 가독을 잇게 하라고 권했는데, 도세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딸에게 넘겼다고 한다. 소린이 조카의 아들에게 잇게 하라고 권했다는 이야기는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제시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10 확실한 건 도세츠가 일족 남자 대신 딸을 상속인으로 문서에 적었다는 것이다.

2-3. “일본사 유일의 여성 성주”인가

이 문서 때문에 긴치요에게는 “일급 사료로 확인되는 일본사 유일의 여성 성주”라는 수식이 붙는다. 이 표현을 쓰는 곳은 후쿠오카현 관광연맹의 소개 페이지와 대중 매체이고, 대부분 “~라고 한다”는 단서를 단다.11

그러나 일본 역사에서 여성이 가독이나 영지를 물려받았음을 보여 주는 문서는 다른 사례도 확인된다. 1572년 호조 가문의 재허 인판장은 일족과의 소송 끝에 오자키 다이젠(尾崎大膳)의 딸의 상속을 인정하고, 호조 가문에 잘 봉사할 남자를 남편으로 맞게 하라고 지시한다. 딸이 상속하고 다이묘가 뒤이어 사위를 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긴치요의 경우와 비슷하다. 이 문서를 소장한 일본 국립공문서관은 이 문서를 해설하며 다이묘 가문에 필요한 존재라면 여성의 상속도 인정됐다고 정리했다.12 그러니 긴치요를 “일본 역사상 유일한 여성 성주”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긴 해도 긴치요의 문서는 다이묘가 임명하는 직책인 조카쿠의 증빙을 아버지 생전에 딸이 물려받은 것이고, 그 물목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다는 점에서 드문 사례다.

2-4. 조카쿠에 오른 후 6년 (1575–1581)

공식적으로 지위를 물려받았다고는 해도 일곱 살 아이가 실제로 성을 다스렸을 리는 없다. 양도 이후에도 타치바나야마 성 일대의 군사와 행정은 도세츠가 맡았다. 1578년 11월 이웃 다이묘인 류조지 타카노부(龍造寺隆信)의 침공을 막은 것도, 1579년 2월 가신에게 가스야군 안의 영지를 하사한 것도, 1580년 병량을 조달하게 한 것도 도세츠였다고 『다이니혼시료』의 도세츠 관계 색인에 정리돼 있다. 긴치요 명의로 발급된 문서는 한 통도 확인되지 않는다.13

그래서 1575년의 양도는 실권 이양이라기보다 상속을 미리 확정해 둔 조치로 보는 것이 맞다. 종가 측 해설도 “명목상이라고는 하나”라는 단서를 붙인다. 문서 한 장으로 긴치요는 도세츠 다음에 이 성과 그 증빙을 이을 사람으로 정해졌다. 그 지위는 6년 뒤 남편에게 넘어간다.10

3. 데릴사위 무네토라 — 1581년의 혼인

3-1. 미미카와 이후의 치쿠젠

1578년 오토모 가문은 휴가(日向) 미미카와(耳川)에서 시마즈 군에 크게 졌다. 이 패전 이후 오토모의 위세는 급격히 꺾였고, 분고에서 멀리 떨어진 치쿠젠의 성들은 류조지와 아키즈키(秋月) 같은 주변 세력에 둘러싸인 처지가 됐다(전쟁 경위는 오토모 소린 편에서 다뤘다). 이 지역에서 오토모 편을 지킨 핵심이 타치바나야마 성의 도세츠와 이와야·호만 성의 다카하시 조운(高橋紹運)이었다.

조운은 오토모 가신 요시히로 아키마사(吉弘鑑理)의 아들이다. 1570년 소린의 명으로, 반역했다가 항복한 다카하시 아키타네를 대신해 다카하시 가문을 이었다.14 조운의 맏아들 무네토라(統虎)는 1567년에 태어났다.15 도세츠가 사위로 점찍은 것이 이 무네토라였다.

3-2. 열세 살과 열다섯 살

혼인 시기는 1581년(덴쇼 9년) 가을이다. 『부젠 오보에가키』에는 혼례가 이해 8월로, 『타치바나케잣슈』에는 10월 25일로 나와 있어 날짜는 엇갈린다. 종가 해설에 따르면 이때 긴치요는 13세, 무네토라는 15세였다.16 무네시게는 훗날 아버지 조운이 처음에는 도세츠에게 데릴사위로 보내는 것을 승낙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17

타치바나 무네시게 화상 모사본. 검은 관을 쓰고 검은 옷에 꽃무늬 노란 띠를 걸친 무네시게가 옆에 긴 칼을 세워 두고 앉아 있다

〈타치바나 무네시게 화상〉 모사본(원본 1643년, 와카야마 다이엔인 소장),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소장 / Wikimedia Commons(퍼블릭 도메인).

3-3. 타치바나라는 성씨

1582년(덴쇼 10년) 11월 18일, 타치바나야마 성의 서쪽 성채인 서성(西城)에서 가신 스무 명 남짓을 불러 잔치가 열렸다. 『타치바나케이덴』에는 이 잔치가 “타치바나라는 칭호와 세 가지 보물(三器)을 얻은 것” 때문이었다고 나와 있고, 종가 연표에는 이날 깃발과 성씨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의례를 치르고 성을 벳키에서 타치바나로 바꿨다고 정리돼 있다.18 종가가 도세츠 발급 문서 150여 통을 검토한 연구를 인용해 밝힌 바로는, 무네토라는 이해 이후 줄곧 타치바나를 칭했다.

도세츠 자신의 서명은 1575년에도 1584년에도 ‘벳키’다. 1584년 7월 오토모 쪽 무장들이 함께 서명한 문서에서는 사위 무네토라가 ‘타치바나(立花)’, 도세츠가 ‘벳키 탄고 뉴도(戸丹入)‘로 나란히 서명했다.19 타치바나 성은 긴치요 대가 아니라 무네토라 대부터 쓰였고, 긴치요가 타치바나를 칭한 당대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혼인으로 긴치요가 받은 지위도 남편에게 넘어갔다. 종가 해설에서는 이를 “6년 동안 맡았던 타치바나 성주의 역할은 남편이 된 무네시게에게 이어졌다”고 정리했고, 종가 연표에는 1581년 무렵 도세츠가 치쿠고 각지를 전전하는 동안 무네토라가 타치바나야마 성을 지켰다고 나와 있다.20 일곱 살에 받은 문서는 데릴사위를 맞을 때까지 상속을 붙들어 두었고 혼인으로 그 몫을 다했다.

무네토라는 그 뒤로도 이름을 여러 번 바꿨고, 무네시게(宗茂)로 굳은 것은 1610년 무렵이다.21 이 글에서는 혼란을 피하려고 1582년 이후로는 무네시게로 부른다.

4. 오사카와 야나가와 — 아버지의 죽음과 이주 (1584–1587)

4-1. 고라산 진중의 도세츠

1584년 도세츠는 다카하시 조운과 함께 치쿠고로 출진해 류조지 쪽이 지키던 야나가와 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성은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고, 도세츠는 고라산(高良山)으로 물러나 장기간 진을 쳤다.22 그리고 이듬해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1702년 편찬한 다이묘 계보 『한칸후(藩翰譜)』는 이렇게 짧게 전한다.

天正十三年九月十一日、父の入道年積て七十三歲、筑後國高良山の陣中にて病死せり、統虎家を繼きて、立花山の城に在り、

덴쇼 13년 9월 11일, 아버지 뉴도가 나이 들어 일흔셋에 치쿠고 고라산 진중에서 병사했다. 무네토라가 가문을 이어 타치바나야마 성에 있었다. — 『한칸후』 권8하 타치바나 항목23

『타치바나케이덴』에는 이해 5월 고라산 진중에서 앓았다가 잠시 상태가 호전됐고, 9월에 다시 도져 11일에 죽었다고 더 자세히 나와 있다. 종가 해설에 따르면 죽은 곳은 미이군 기타노(北野)의 진중이다.23 긴치요는 이때 열일곱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긴치요가 실질적인 당주가 됐다는 설명이 종종 나오지만, 『한칸후』를 비롯해 어느 사료를 보아도 가문을 이은 사람은 무네토라다. 타치바나 가문의 대표는 이미 4년 전부터 남편이었다.

4-2. 이와야 성 함락과 타치바나야마 성

도세츠가 죽은 이듬해인 1586년, 시마즈 군이 치쿠젠으로 북상했다. 7월 27일 이와야 성(岩屋城)이 함락되고, 성을 지키던 다카하시 조운이 자결했다. 무네시게는 생부와 장인을 1년 사이에 모두 잃었다. 시마즈 군은 이어 타치바나야마 성으로 공격해 왔지만 무네시게는 성을 지켜 냈다.24

타치바나야마 성터 산정. 풀밭 사이로 흙길이 이어지고 나무 사이에 안내판이 서 있다

Heartoftheworld, 〈타치바나야마 성터 산정〉(2016) / Wikimedia Commons(CC BY-SA 4.0). 긴치요가 일곱 살에 물려받은 성의 혼마루 자리다.

이 농성 때 긴치요가 직접 갑옷을 입고 여군을 편성해 성의 한쪽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 출전은 20세기 향토사다. 1600년 무용담과 같은 책에서 나온 이야기라 6장에서 함께 다룬다.

4-3. 오사카의 인질

이 무렵 긴치요가 실제로 맡은 역할을 보여 주는 증언이 『타치바나 이코』에 있다.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때 다이묘들은 충성의 표시로 가족을 오사카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太閤西國御下向の年、則ち薩摩御陣なり、諸大名の質に、子共・兄弟にても、七歲より下の者は、成り申さず候、殿樣よりは、宋雲樣大坂へ御座なされ候筈に御座候へども、其年御病氣に付、前の年九月より、翌年の三月まで、腹赤樣大坂へ御座なされ候、御供を八左衞門相勤め申し候、

타이코께서 서국으로 내려오신 해, 곧 사츠마 출진 때의 일이다. 여러 다이묘가 인질을 냈는데, 자식이든 형제든 일곱 살 아래는 안 되었다. 우리 주군 쪽에서는 소운 님이 오사카로 가실 예정이었으나 그해 병이 나셔서, 전해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하라카 님께서 오사카에 계셨다. 수행은 하치자에몬이 맡았다. — 『타치바나 이코』, 가신의 증언25

‘하라카 님(腹赤様)‘은 긴치요가 만년을 보낸 곳의 이름을 딴 호칭이다. 무네시게의 생모가 병으로 가지 못하게 되자 정실인 긴치요가 대신 오사카로 갔다. 기간의 기준 연도가 모호해서 1586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남편이 시마즈와 싸우는 동안 긴치요는 함께 싸운 것이 아니라 가문을 대표해 인질로 오사카에 갔다는 이야기가 가신의 증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4-4. 타치바나야마 성을 떠나다

1587년 규슈 정벌이 끝나자 히데요시는 무네시게에게 치쿠고의 야마토(山門)·미즈마(三潴)·시모츠마(下妻) 3개 군을 주고 야나가와 성을 본거지로 삼게 했다. 도세츠가 끝내 함락하지 못한 그 성이었다. 『부젠 오보에가키』에 따르면 6월 11일 가로 오노 이즈미노카미(小野和泉守)에게 야나가와 성을 넘겨받으라는 명이 내려졌고, 13일 성 인수가 끝났다. 15일 긴치요를 비롯한 안채 사람들이 타치바나야마 성을 나섰고, 17일 일행이 야나가와에 들어갔다.26

긴치요는 일곱 살에 증빙 문서를 물려받은 성을 열아홉 살에 떠났다. 새 영지의 석고는 『한칸후』에 “13만 석 남짓”으로 나오지만, 13만 석대는 1590년대 검지 이후의 숫자라는 지적이 있다.27

5. 미야나가도노 — 별거와 측실 (1587–1600)

5-1. 성 밖의 저택

야나가와로 옮긴 뒤 어느 시점에 긴치요는 성을 나와 성 아래 미야나가촌(宮永村, 현 야나가와시 미야나가마치)에 저택을 두고 살았다. 이곳 이름을 따서 가신들은 긴치요를 “미야나가도노(宮永殿)”, “미야나가 님(宮永様)“이라 불렀다. 이 호칭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기록은 17세기 가신들의 이야기를 모은 『타치바나 이코』다.28

긴치요가 정확히 언제 거처를 이곳으로 옮겼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시기 무네시게는 집을 비운 날이 많았다. 특히 1592년 3월부터 1595년 9월까지, 그리고 1597년 7월부터 1598년 12월까지는 조선에 출병해 있었다.29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1600년에 긴치요가 미야나가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5-2. 성 안의 즈이쇼인

같은 무렵 야나가와 성 안에는 야지마(矢島) 가문 출신의 측실이 있었다. 이름은 야치코(八千子)로 전하고 훗날에는 즈이쇼인(瑞松院)이라 불렸다. 1600년 무네시게가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돌아올 때 성을 지키고 있다가 기마 20기와 잡병 190여 명을 마중 보낸 사람이 즈이쇼인이었고, 이에 대해 가신들은 “여인이시지만 지극한 마음 씀씀이”라고 감탄했다.30 1600년 야나가와 성의 안살림과 성을 지키던 병력을 맡은 여성은 긴치요가 아니라 즈이쇼인이었다. 다만 즈이쇼인이 언제 측실로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1

5-3. 부부 사이를 말하는 기록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긴치요 두 사람 사이가 나빴다는 이야기는 근거 없는 후대의 상상만은 아니다. 『타치바나 이코』에는 가신 타치바나 이키(立花壹岐)가 긴치요를 두고 “주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셨으니”라고 한 말이 실려 있다(7장). 같은 책에는 세간에 떠도는 부부 문제 소문을 두고 “주군만 도리에 어긋났다고 하는 것도 지나친 일이니 이런 말은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다는 가신의 말도 있다. 문맥이 분명하지 않아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을 직접 겪은 타치바나 가신들 사이에 불화를 둘러싼 이야기가 남아 있었고 그 책임을 무네시게 쪽에 돌리는 얘기도 있었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32 하지만 동시대의 편지나 일기 가운데 두 사람의 불화를 언급하는 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무네시게가 남긴 편지에서 긴치요를 언급한 것도 확인되지 않는다.

별거를 하게 된 원인으로는 둘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는 것, 측실 문제, 성주였던 긴치요의 자부심, 타치바나야마 성을 떠나기 싫어했다는 것 등을 든다. 앞의 둘은 사실이지만 사료가 이를 별거 원인으로 지목하지는 않았고, 뒤의 둘은 근거가 확인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별거를 했다고 해서 이혼을 했다거나 긴치요가 지위를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1600년 가토 기요마사의 길잡이는 긴치요를 “사콘노쇼겐(무네시게)의 본처”라고 불렀다(6장).

6. 1600년 야나가와 — 실제 경과와 무용담의 형성

6-1. 무네시게는 세키가하라에 없었다

1600년(게이초 5년) 7월, 무네시게는 오사카 쪽의 독촉을 받아 서군으로 상경했지만 9월 15일 세키가하라 본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무네시게는 비와호 남쪽 끝의 오츠 성(大津城) 공격군에 있었고, 오츠 성이 항복한 날이 바로 본전 당일이었다.33 세키가하라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고 규슈로 돌아온 무네시게가 야나가와에 닿은 것은 10월 상순이다.34 그러니까 야나가와가 공격받을 때 성주는 성에 있었다.

6-2. 에가미·하치인 전투와 개성

동군으로 돌아선 사가의 나베시마 나오시게·카츠시게 부자는 10월 14일 3만여 명을 이끌고 사가를 나섰다. 『한칸후』의 나베시마 항목과 참모본부가 1893년 펴낸 『니혼센시 세키가하라에키(日本戦史 関原役, 이하 『니혼센시』)』에 따르면 나베시마 군은 먼저 구루메 성을 항복시킨 뒤 치쿠고강 상류의 스미요시(住吉)에서 걸어서 강을 건넜다. 나베시마 군은 처음부터 육로로 들어왔다. 10월 20일 야나가와 북쪽 에가미(江上)·하치인(八院)에서 오노 시게유키(小野鎮幸)가 이끈 타치바나 군이 나베시마 군과 맞붙어 크게 졌다. 이 전투 때 무네시게는 성에 남아 있었다.35

그 뒤 구로다 조스이(黒田如水)와 가토 기요마사가 양 진영 사이에 사자를 세워 싸움을 멈추게 했고 무네시게는 항복했다. 날짜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10월 하순에 항복이 합의되고 기요마사 쪽이 성을 맡았으며 무네시게 일행이 실제로 야나가와를 떠난 것은 12월 초였다고 보면 기록들이 대체로 맞는다.36

에도시대 성 그림 「치쿠고국 야나가와성 그림」. 푸른색으로 칠한 해자와 수로가 혼마루·니노마루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작자 미상, 「치쿠고국 야나가와성 그림(筑後国柳河城図)」(에도시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 Wikimedia Commons(퍼블릭 도메인). 해자와 수로가 성을 겹겹이 둘러싼 물의 성이었다.

6-3. 미야나가 길을 피한 이유

긴치요가 1600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타치바나 이코』다. 기요마사가 히고 미나미노세키(南関)에서 야나가와로 나올 때 길잡이를 맡은 오노 사쿠베에(小野作兵衛)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肥後より柳川へは、瀨高・江の浦と申す道筋二つ御座候、江の浦筋は、人數越え難き川御座候、其上宮永殿と申す、左近將監殿本妻居られ申し候處、江の浦よりの道筋に近く御座候、此宮永殿と申すは、左近將監殿養父道雪樣の娘にて御座候、左近殿家來共、此宮永殿を殊の外大切に仕り候故、此近所へ御人數向ひ候はゞ、左近殿御下知御座なく候ても、何樣手强く、鎗を仕るべく候、

히고에서 야나가와로 가는 길은 세타카(瀬高) 길과 에노우라(江の浦) 길 두 갈래가 있습니다. 에노우라 길에는 군세가 건너기 어려운 강이 있습니다. 게다가 미야나가도노라 하는, 사콘노쇼겐 님의 본처가 사시는 곳이 에노우라 길 가까이 있습니다. 이 미야나가도노는 사콘노쇼겐 님의 양부 도세츠 님의 따님입니다. 사콘 님의 가신들이 이 미야나가도노를 각별히 소중히 여기니, 이 근처로 군세가 향하면 사콘 님의 명령이 없더라도 반드시 완강하게 창을 들 것입니다. — 『타치바나 이코』, 길잡이 오노 사쿠베에의 말37

기요마사는 이 말을 듣고 세타카 길을 택했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기요마사는 “이번 출진은 절대 전투를 할 생각으로 가는 게 아니니 많은 병력은 데려가지 않는다”며 직속 병력(하타모토) 1,200–1,300명만 이끌고 나섰다. 에가미·하치인 전투가 끝난 뒤 교섭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 기록에서 긴치요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요마사가 길을 돌린 이유는 그저 건너기 어려운 강이 있고, 긴치요를 받드는 무네시게의 가신들이 주군의 명령 없이도 맞서 싸우리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앞에는 나베시마가 무네시게의 바닷길 탈출에 대비해 히젠에서 감시선을 많이 내놓았다는 내용이 있을 뿐, 나베시마 수군이 야나가와에 상륙하려 했다는 말은 없다.

6-4. 무용담은 언제 자랐나

이 문답이 “긴치요가 갑옷을 입고 총병을 거느려 나베시마 수군과 가토 군을 막았다”는 이야기로 부풀려지기까지는 300년 넘게 걸렸다. 문헌별로 정리하면 이렇다.

단계내용출전사건 후
① 원형길잡이가 강과 “미야나가도노를 받드는 가신들”을 이유로 세타카 길을 권함. 긴치요의 행동은 나오지 않음『타치바나 이코』17세기 후반 이후 성립(1916년 활자본)
② 각색길잡이의 말이 “공주의 지휘 아래 거세게 창을 들 자가 많을 것”으로 바뀜. “맹장조차 꺼려 피했다”로 마무리『큐야나가와한시(旧柳川藩志)』1935년 이전 집필, 1957년 간행
③ 갑옷과 여군1586년 시마즈 포위와 1600년 하치인 전투 때 “갑옷을 입고 나기나타를 들고 여군을 편성해 한쪽을 막았다”『큐야나가와한시』같음
④ 총병과 수군저택에서 갑주 차림으로 나가 야나가와 서쪽 나루에 총병을 배치해 나베시마 수군을 막고, 미야나가에서 가토 군을 위협해 길을 바꾸게 함『야나가와한소쇼(柳川藩叢書)』 제1집 보유 「무네시게 부인의 장거(宗茂夫人の壮擧)」로 추정(원문 미확인)1984년 간행
⑤ 나고야성조선 출병 중 히데요시가 긴치요를 히젠 나고야성으로 부르자 철포를 든 시녀들을 거느리고 무장하고 갔다『야나가와한소쇼』 제1집, 『큐야나가와한시』같음
⑥ 시녀 철포대”성 안 시녀 50명가량을 훈련해 싸움 첫머리에 일제 사격으로 적의 기세를 꺾었다”『오토모 문서(大友文書)』라고 인용되나 해당 문구 확인 불가. 근대 구어체근거 없음

『큐야나가와한시』와 『야나가와한소쇼』는 이름 때문에 에도 시대 번의 편찬물로 오해받기 쉽지만, 둘 다 야나가와의 향토사가 와타나베 무라오(渡辺村男, 1857–1935) 한 사람의 원고다. 『큐야나가와한시』는 그가 죽고 22년 뒤인 1957년 지역 교육회가 펴냈고, 『야나가와한소쇼』 제1집은 1984년에 나온 그의 저작집이다.38 원형인 『타치바나 이코』에서 싸움의 주체는 “무네시게의 가신들”이었는데, 이 단계에서 “공주의 휘하”로 옮겨 갔다. 교섭하러 온 기요마사 일행도 “야나가와로 쳐들어올 때”로 바뀌었다.39

수군 이야기는 사실관계와도 맞지 않는다. 앞에서 본 것처럼 나베시마 군은 구루메를 거쳐 상류에서 걸어서 강을 건넜다. 실제 전장인 에가미·하치인도 이야기 속의 서쪽 나루가 아니라 야나가와 북쪽이다. 1600년 공방과 관련된 동시대 편지(기요마사와 무네시게가 주고받은 편지, 나베시마와 이에야스의 편지)에도 긴치요는 나오지 않는다.40 후쿠오카현 관광연맹도 “긴치요가 직접 군을 지휘했다고도 한다”는 전승 어법을 쓰고,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확실한 사료로 뒷받침되지 않는 것이 많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6-5. 여장수가 되기까지

무용담이 책으로 나온 뒤에는 게임과 방송이 긴치요를 여장수로 그렸다. 2006년 코에이의 게임 『전국무쌍 2(戦国無双2)』가 긴치요를 아버지의 ‘뇌신’ 칭호와 칼 라이키리를 이어받은 여성 무장으로 그렸고, 2012년 NHK 『역사비화 히스토리아(歴史秘話ヒストリア)』가 「전국 여자 보스가 간다(戦国女BOSSがゆく)」라는 제목으로 긴치요를 다뤘다.41 2026년 현재 후쿠오카현과 야나가와시 등은 「타치바나 무네시게와 긴치요(立花宗茂と誾千代)」를 NHK 대하드라마로 만들어 달라는 유치 활동을 벌이고 있다.

『타치바나카후』에는 텐분 6년(1537) 도세츠가 큰 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던 중 벼락이 떨어지자 칼을 뽑아 베었고, 그 칼을 이때부터 잔라이(斬雷)라 불렀다고 나와 있다.42 이 칼은 지금 타치바나가 사료관에 「라이키리마루(雷切丸)」라는 이름의 무명 와키자시로 전하고, 사료관 해설에 따르면 도세츠에게서 무네시게에게 전해졌다. 칼에는 무네시게의 관도명 ‘히다노카미(飛驒守)‘가 들어간 소지명이 새겨져 있다고 하고, 긴치요가 이 칼을 물려받았다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43 긴치요와 라이키리를 함께 떠올리게 된 데는 게임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7. 하라카의 마지막 2년 — 기록을 태운 사람 (1600–1602)

7-1. 아무도 챙기지 않은 거취

야나가와를 떠날 때 무네시게는 가신과 하인을 합쳐 50여 명을 데리고 히고 다카세(高瀬)로 갔다. 측실 즈이쇼인에게는 가신 두 사람을 붙여 수행하게 했다. 그런데 긴치요에 대한 지시는 달랐다.

宮永樣御供仕り、何方へ如何樣に立退き申すべき由、誰にても心付き候仁、之なく候、尤も家老中へ、能き樣に仕り候へと計り、仰付けられ候、

미야나가 님을 모시고 어디로 어떻게 물러날지 마음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가로들에게 “잘 처리하라”고만 명하셨을 뿐이다. — 『타치바나 이코』44

이때 나선 사람이 대대로 타치바나 가문을 섬긴 가신 도키 셋츠(十時摂津)였다. 셋츠는 자신의 장남 하치에몬(八右衛門)에게 긴치요를 모시라고 했다. 하치에몬은 이런 판국에 여인을 수행하는 일은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셋츠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今まで御家御相續、偏に宮永樣御家人共の罷有る故なり、(中略)三代相恩の宮永樣、御行末覺東なく、自然の時、御供仕らせ候はん爲めなり、

지금까지 가문이 이어진 것은 오로지 미야나가 님의 가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3대에 걸쳐 은혜를 입은 미야나가 님의 앞날이 걱정되어, 만일의 때 모시게 하려고 (상경 출진에서) 너를 남겨 둔 것이다. — 『타치바나 이코』, 도키 셋츠의 말44

‘미야나가 님의 가신들’이란 도세츠 이래 타치바나 가문을 지탱해 온 가신단을 가리킨다. 셋츠에게 긴치요는 데릴사위가 이끄는 가문의 별거 중인 부인이기보다, 그 가신단이 대대로 섬겨 온 도세츠 가문의 마지막 혈육이었다. 하치에몬은 더 이의를 달지 않고 긴치요를 모셔 히고 하라카로 갔다. 부부는 이렇게 따로 야나가와를 떠났다.

7-2. 하라카촌 이치조의 집터

하라카(腹赤)는 히고 다마나군의 바닷가 마을로, 지금의 구마모토현 다마나군 나가스마치에 있다. 기요마사의 영지였다. 하치에몬 집안의 내력을 정리한 「도키케 유라이가키」에 따르면 긴치요는 이 마을 백성 이치조(市蔵)의 집터에 지은 조촐한 거처에서 살았다.

玉名郡腹赤村百姓市蔵屋敷へ僅計之御居宅を出来、慶長七年寅年迄御介抱申上、

다마나군 하라카촌 백성 이치조의 집터에 아주 작은 거처를 마련하고 게이초 7년까지 보살펴 드렸다. — 「도키케 유라이가키」45

같은 이야기가 이나리 신사를 맡은 콘고인(金剛院)의 기록 『토샤 고덴키(当社御傳記)』에도 나온다. 기요마사는 오노 시게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콘 님 부인께 병량을 보냈더니 답례로 파발을 보내 편지를 주셨다”고 썼다고 한다. 영지를 잃은 옛 적장의 부인에게 기요마사가 식량을 보냈다는 거의 동시대의 증거다. 다만 이 편지 문장은 『야나가와시사』 사료편을 옮겨 적은 2차 자료로만 전한다.46

나가스마치 하라카에 있는 긴치요 공양탑. 둥근 돌 기단 위에 꼭대기가 둥글게 부푼 석탑이 서 있고 양옆에 석등이 있다

Muyo, 〈'보타모치 님'이라 불리는 긴치요 공양탑〉(2023), 구마모토현 나가스마치 / Wikimedia Commons(CC BY 4.0).

7-3. 불태운 기록

하라카에서 긴치요가 한 일로 가장 확실하게 전해지는 것은 가문의 기록을 태운 일이다. 가신 타치바나 이키는 이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肥後腹赤にて、宮永樣御燒失の內に、戶次御名字の記錄は、少し御座候て、立花の記錄多く御座候、(中略)宮永樣思召も、御尤も千萬なる事に候、殿樣とは御不知〔和カ〕に候へば、別に誰の爲めに、御死去の後、殘し置かるべくや、大殿樣さばかり御嚴重になされたる品々を、志もなき者の手に渡り、兎や角仕るべき事を思召され、御燒失なされたるは、女性の思召には、然るべき事なり、彼是に付いて、憎きは局なり、

히고 하라카에서 미야나가 님이 불태우신 것 가운데 벳키 가문의 기록은 조금이고 타치바나의 기록이 많았다. (중략) 미야나가 님의 생각도 지당하기 그지없다. 주군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셨으니, 돌아가신 뒤 따로 누구를 위해 남겨 두시겠는가. 큰 나리(도세츠)께서 그토록 엄중히 다루시던 물건들이 뜻 없는 자의 손에 넘어가 함부로 다뤄질 것을 염려해 태우신 것은 여인의 생각으로는 그럴 만한 일이다. 이것저것 따져 보면 미운 것은 시녀(局)다. — 『타치바나 이코』, 가신 타치바나 이키의 말47

이 증언에서 이키는 긴치요를 탓하지 않는다. 가문의 기록이 사라진 것을 아까워하면서도, 아버지가 그토록 엄중히 다루던 것을 아무 뜻 없는 사람에게 넘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은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운 것은 시녀”라며 탓을 긴치요 곁의 시녀에게 돌린다. 시녀가 무엇을 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긴치요가 무엇을 태웠는지 정확한 목록은 없다. 종가 쪽 해설은 1575년 양도 목록을 긴치요가 줄곧 지니고 있다가 1600년 야나가와를 떠날 때 태웠다고 전하니, 언제 무엇을 태웠는지는 전승마다 조금씩 다르다.9

일곱 살에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은 성의 증빙 문서와 대대로 내려온 칼과 무구, 그리고 그 목록이었다. 34년 길지 않았던 생애의 끝자락에서 긴치요는 그 아버지의 기록을 자기 손으로 처분했다. 가신의 이해가 맞다면 남편의 가문 대신 도세츠의 딸로서 내린 결정이었다.

7-4. 1602년 가을

1602년(게이초 7년) 6월 16일, 긴치요는 콘고인의 승려를 하라카로 불렀다. 『토샤 고덴키』에는 이번 병이 낫지 않으리라 여긴 긴치요가 거울과 수호 본존 등을 이나리 신사에 바쳤다고 나와 있다. 「도키케 유라이가키」에 따르면 7월부터 학질을 앓았고 그 뒤 이질로 번졌다. 하치에몬은 병중에 곁을 지키다 임종까지 보았다.

同年七月ゟ瘧疾御煩被遊、其跡御痢病に被為成、十月十七日御逝去被遊、御病中抽忠勤御介抱申上候、御死期迄御見届申上候、

같은 해 7월부터 학질을 앓으시고 그 뒤 이질이 되시어 10월 17일 돌아가셨다. 병중에 충근을 다해 간호하고 임종까지 지켜보았다. — 「도키케 유라이가키」45

1602년 10월 17일, 양력으로 11월 30일이었다. 『토샤 고덴키』에 향년은 34세로 나와 있다. 유해는 이치조의 집터에 묻혔다.48 하라카에는 긴치요가 절 앞 옛 우물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원출전은 밝혀져 있지 않다.49

8. 신이 된 긴치요 — 료세이지에서 미하시라 신사까지 (1602–)

8-1. 무네시게의 귀환

긴치요가 죽은 뒤 무네시게는 에도로 가서 무츠(陸奥) 다나쿠라(棚倉)에서 다시 다이묘가 됐다. 그 연도와 석고는 기록마다 다르다.50 1620년(겐나 6년) 야나가와를 다스리던 다나카 타다마사(田中忠政)가 후사 없이 죽어 영지가 몰수되자, 무네시게는 그해 11월 27일 옛 영지 야나가와 10만 9,600석 남짓을 다시 받았다.51 무네시게가 야나가와에 돌아왔을 때 긴치요가 죽은 지 18년이 지나 있었다.

8-2. 료세이지와 세 곳의 묘

긴치요의 법명은 1603년 1주기에 정해졌다. 『토샤 고덴키』에 따르면 이때부터 고쇼인덴 센요 료세이 다이시(光照院殿泉誉良清大姉)라 불렀고, “그 뒤 료세이지를 세웠다.”52 료세이지(良清寺)는 법명의 ‘료세이’를 딴 정토종 절이다. 절 쪽 전승에는 1621년 무네시게가 세웠다고 나와 있지만 1차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1660년 번의 녹봉 장부(分限帳)에 30석의 절 영지를 가진 절로 올라 있어, 늦어도 그때는 번이 받드는 절이었다.53

하라카에 묻힌 유골은 뒤에 야나가와로 옮겨졌다. 하라카 묘를 지키던 우다(宇田) 가문 후손이 번에 올린 문서로 이장 자체는 확인되지만 연도는 알 수 없다.54 원래 묘 자리에는 공양탑이 남아 꼭대기 돌 모양 때문에 ‘보타모치 님(ぼた餅様)‘이라 불린다. 2016년에는 구루메의 대본산 젠도지(善導寺) 경내에서도 ‘센요 료세이(泉誉良清)’ 등의 글자가 새겨진 공양탑이 확인됐다.55

타치바나 긴치요 화상.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성이 흰 겉옷에 붉은 하카마 차림으로 앉아 있다. 채색이 많이 벗겨져 있다

작자 미상, 〈타치바나 긴치요 화상〉(제작 연대 미상), 료세이지(良清寺) 소장 / Wikimedia Commons(퍼블릭 도메인).

료세이지에는 긴치요의 화상도 전한다. 생전에 그린 것인지 사후 추선을 위해 그린 것인지, 언제 그렸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8-3. 1701년의 꿈

야나가와에는 이런 이야기도 전한다. 1701년(겐로쿠 14년) 4대 번주 타치바나 아키토라(立花鑑虎)의 머리맡에 흰 옷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유학자 안도 세이안(安東省庵)이 “긴치요 님일 것이다. 2대 타다시게 공 이래 공경이 소홀했다”고 아뢰자, 그해 10월 17일 기일에 맞춰 료세이지에 새 묘소와 불전을 짓고 절 영지 20석을 더해 50석으로 했다는 것이다.56 원출전이 분명하지 않아 번에 전해 온 이야기로만 볼 수 있다. 다만 1660년에 30석이던 절 영지는 이 이야기의 50석과 맞아떨어진다.

8-4. 즈이교쿠 레이진

에도 후기 야나가와 번은 번을 세운 선조들을 기리는 일에 나섰다. 야나가와시 공식 연혁에 따르면 1783년(텐메이 3년) 먼저 도세츠에게 ‘바이가쿠 레이진(梅岳霊神)‘이라는 신호가 내려졌고 이듬해 성 안 산노마루에 바이가쿠 궁이 세워졌다. 1820년(분세이 3년) 무네시게에게 ‘쇼인 레이진(松陰霊神)’, 긴치요에게 ‘즈이교쿠 레이진(瑞玉霊神)‘의 신호가 내려졌다. 1823년 두 신을 바이가쿠 궁에 합사해 세 사람을 함께 모시게 됐다. 1825년 다카바타케(高畑)에 새 사전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8월 16일 9대 번주 타치바나 아키카타(立花鑑賢) 때 신을 새 사전으로 옮기는 천궁식(遷宮式)을 올렸다. 이것이 지금의 미하시라 신사다.57 『토샤 고덴키』에 따르면 1837년에는 교토 다이고지 산보인(醍醐寺三宝院)에서 긴치요에게 ‘쇼류 다이묘진(照柳大明神)‘이라는 신호도 받았다.

미하시라 신사 배전. 시메나와와 큰 등롱을 단 목조 배전 앞으로 돌을 깐 참배로가 이어진다

そらみみ, 〈미하시라 신사(三柱神社) 배전〉(2014) / Wikimedia Commons(CC BY-SA 4.0). 도세츠·무네시게·긴치요 세 사람을 모신다.

1702년 『한칸후』의 타치바나 항목에 긴치요의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막부 쪽 다이묘 계보에는 도세츠와 무네시게를 이은 사람의 이름이 빠져 있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120년 가까이 지나 번은 긴치요를 아버지·남편과 나란히 신으로 모셨다.

사료 속의 긴치요는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일곱 살에 아버지가 쓴 양도장의 수신인이 되었다. 열세 살에 그 지위를 데릴사위에게 넘겼고 남편이 싸우는 동안 오사카에 인질로 갔다. 긴치요가 성 밖에 따로 살아도 가신들은 그를 도세츠의 딸로 받들었다. 가문이 무너졌을 때 끝까지 곁을 지킨 것도 도세츠 대의 가신 집안이었다. 하라카의 작은 거처에서 긴치요는 아버지가 엄중히 다루던 기록을 남에게 넘기지 않고 태웠다. 번이 그를 신으로 모신 것은 그로부터 200여 년 뒤였다.


출처

사료집·편찬 사료 (원문 지면 확인)

  •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0편 2책 pp.80–81(1575년 도세츠 양도장, 「타치바나 문서(立花文書)」), 11편 7책 p.814(『고조 문서(五條文書)』 1584년 연서장), 11편 20책 pp.112–204(『타치바나카후(立花家譜)』·『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타치바나케잣슈(立花家雑集)』·『부젠 오보에가키(豊前覚書)』·『오토모코하이키(大友興廃記)』 수록), 12편 1책 pp.569–578(다나쿠라 1만 석), 12편 34책 pp.706–717(1620년 야나가와 재봉).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데이터베이스 지면 이미지
  •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한칸후(藩翰譜)』(1702) 권8하 타치바나 항목, 권8상 나베시마 항목. 저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80523·780524
  •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17세기 후반 이후 성립, 국사연구회 1916년 활자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953324
  • 참모본부 편, 『니혼센시 세키가하라에키(日本戦史 関原役)』(1893) 본편·문서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771074·771070

사료 (2차 자료를 거쳐 확인)

  • 「도키케 유라이가키(十時家由来書)」(도키 마사미치 가문 문서 128), 『토샤 고덴키(当社御傳記)』(옛 야나가와 번주 타치바나 가문 문서 번정 1091), 우다 가문 「구상서(口上覚)」(야나가와 타치바나 가문 문서 4634), 『오노 문서(小野文書)』 141 가토 기요마사 서장. 모두 일본어 위키백과 「타치바나 긴치요(立花誾千代)」 항목의 전재문으로 확인
  • 와타나베 무라오(渡辺村男), 『큐야나가와한시(旧柳川藩志)』(1957) pp.642–643, 『야나가와한소쇼(柳川藩叢書)』 제1집(1984) 보유 84. 일본어 위키백과 인용문으로 확인

현대 연구·해설

  • 기무라 다다오(木村忠夫), 「에이로쿠 말기 오토모 가문의 군사 조직(永禄末期大友氏の軍事組織)」, 『규슈문화사연구소 기요(九州文化史研究所紀要)』 13, 1968
  • 나카노 히토시(中野等),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요시카와코분칸, 2001 (일본어 위키백과 인용으로 확인)
  • 나카노 히토시·아나이 아야카(中野等・穴井綾香), 『근세 다이묘 타치바나 가문(近世大名立花家)』(야나가와의 역사 4), 야나가와시, 2012 (일본어 위키백과 인용으로 확인)

공식·기관 자료

  • 타치바나 가문 17대 당주 사이트(muneshige.com) 「긴치요(誾千代)」·「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연표(年表)」·「FAQ」·「도세츠 양도장 사본(戸次道雪譲状写)」
  • 일본 국립공문서관 디지털 전시 「호조 가문 재허 인판장(北条家裁許印判状)」
  • 야나가와시 공식 사이트 「미하시라 신사(三柱神社)」
  • 타치바나가 사료관 소장품 해설(museum.or.jp, Google Arts & Culture)
  • 후쿠오카현 관광연맹 「크로스로드 후쿠오카(クロスロードふくおか)」 타치바나 가문 특집, 후쿠오카현 보도자료(2026-09-07)
  • NHK 아카이브스 『역사비화 히스토리아(歴史秘話ヒストリア)』 2012년 6월 13일 방송 기록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 일본어 위키백과 「타치바나 긴치요(立花誾千代)」·「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료세이지(良清寺)」·「라이키리(雷切)」
  • 나가스마치 향토 사이트 「긴치요 공주(誾千代姫)」(웨이백 머신 2023년 사본)
  • Game Watch 『전국무쌍 2(戦国無双2)』 발매 기사(2006)

각주에서 함께 참조한 문헌

  • 『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 「삼검전(三劍傳)」·「벳키 가문 역대 법호(戸次家歴代法號)」, 『고모노카후(薦野家譜)』(종가 사이트 경유), 『치쿠고 쇼시 군단(筑後将士軍談)』, 『오토모 문서(大友文書)』(일본어 위키백과 인용), 『간에이 쇼카 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겐칸 닛키(元寛日記)』(『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수록), 『료세이 다이시 덴키(良清大姉伝記)』·『즈이교쿠 레이샤키(瑞玉霊社記)』(향토 사이트 인용)
  • 구와타 가즈아키(桑田和明), 『카이로(海路)』 3(2006) 수록 논문, 『야나가와 역사 자료 집성(柳川歴史資料集成)』 제3집 『야나가와 번 분겐초(柳河藩分限帳)』(1998, 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 『세카이 다이햐카지텐(世界大百科事典)』·『니혼 다이햐카젠쇼(日本大百科全書)』(코토뱅크), 『아리아케 신보(有明新報)』 2016년 2월 18일(일본어 위키백과 각주)

확인하지 못한 것

  • 1575년 양도장 전문과 6월 28일 오토모 안도 문서 원문(『야나가와시사(柳川市史)』 사료편 Ⅴ p.358).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0편 해당 권은 공개 범위 밖이었다
  • 『최신 연구 에가미·하치인 전투(最新研究 江上八院の戦い)』(2021)의 개성 날짜 판단
  • 『야나가와한소쇼(柳川藩叢書)』 제1집 보유 84 「무네시게 부인의 장거(宗茂夫人の壮擧)」 원문(수군·총병 일화의 실제 출전)
  • 미야나가 이주 연도와 즈이쇼인 입실 연도
  • 료세이지 긴치요 화상의 제작 연대
  • 긴치요를 단독 주제로 다룬 동료심사 논문은 확인되지 않았고, 한국어 학술 자료도 없었다

Footnotes

  1. 『타치바나카후(立花家譜)』(『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20책 p.124 수록). 출가 시기는 『타치바나카후』 p.125가 에이로쿠 5년(1562), 종가 사이트 「도세츠(道雪)」가 덴쇼 2년(1574) 무렵으로 소개한다. 1575년 양도장 서명이 “뉴도 도세츠”이므로 늦어도 그때는 도세츠라 칭했다. ↩

  2. 입성 연도는 기무라 다다오(1968)가 겐키 원년(1570), 『타치바나카후(立花家譜)』 p.126과 『타치바나케잣슈(立花家雑集)』 p.141이 겐키 2년(1571) 5월로 본다. 타치바나 아키토시의 반란은 구와타 가즈아키(桑田和明), 「타치바나 조카쿠 타치바나 아키토시와 타치바나 치카츠구에 대한 고찰(立花城督立花鑑載と立花親続についての一考察)」, 『카이로(海路)』 3, 2006 참조(서지 확인). ↩

  3. 기무라 다다오(木村忠夫), 「에이로쿠 말기 오토모 가문의 군사 조직(永禄末期大友氏の軍事組織)」, 『규슈문화사연구소 기요(九州文化史研究所紀要)』 13, 1968. 규슈대학 기관 리포지터리 PDF. ↩

  4. 『부젠 오보에가키(豊前覚書)』(『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20책 pp.145–146), 『타치바나케잣슈(立花家雑集)』 p.141, 『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 p.138 및 「벳키 가문 역대 법호(戸次家歴代法號)」 p.149. ↩

  5. 『타치바나카후(立花家譜)』 p.126, 『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 p.138, 『타치바나케잣슈(立花家雑集)』 p.141 할주. 8월 11일설은 『야나가와시사(柳川市史)』 사료편 Ⅴ 「도키 마사미치 가문 문서(十時正道家文書)」 119 원서(일본어 위키백과 재인용). ↩

  6. 『부젠 오보에가키(豊前覚書)』(『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20책 p.146), 『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 p.138. 원문의 「大明」은 다이묘(大名)의 오자로 보고 옮겼다. 誾 자의 뜻풀이는 일본어 위키백과 본문에 있으나 출처가 붙어 있지 않다. ↩ ↩2

  7. 종가 사이트 「긴치요(誾千代)」. 『고모노카후(薦野家譜)』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8.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0편 2책 pp.80–81(「타치바나 문서(立花文書)」, 부분 수록. 전문은 덴쇼 3년 5월 28일 조에 싣는다고 예고), 같은 책 11편 20책 p.159(도세츠 관계 색인). ↩ ↩2 ↩3

  9. 종가 사이트 「도세츠 양도장 사본(戸次道雪譲状写)」. 번각자와 저본 표시는 없으나 앞부분은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지면과 문구가 일치한다. ↩ ↩2

  10. 종가 사이트 「긴치요(誾千代)」. 6월 28일 안도는 일본어 위키백과가 『야나가와시사(柳川市史)』 사료편 Ⅴ 61 「벳키 도세츠 양도장(戸次道雪譲状)」 p.358과 나카노·아나이(2012) pp.41–42를 근거로 들며, 이 글에서는 원문을 보지 못했다. 오토모 측의 양자 권고를 담은 문서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 ↩2 ↩3

  11. 후쿠오카현 관광연맹 「크로스로드 후쿠오카(クロスロードふくおか)」 타치바나 가문 특집. ↩

  12. 일본 국립공문서관 디지털 전시 「호조 가문 재허 인판장(北条家裁許印判状)」(겐키 3년 6월 21일, 「도시마·미야기 문서(豊島・宮城文書)」). ↩

  13.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20책 p.159(도세츠 관계 색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전문 검색(「誾千代」·「吟千代」). ↩

  14. 『한칸후(藩翰譜)』 권8하 타치바나 항목(f104.p006). 『한칸후』는 조운(鎭理)을 요시히로 아키마사의 “동생(舍弟)“으로 적었으나 통설은 아들이다. ↩

  15. 종가 사이트 「연표(年表)」, 나카노 히토시(中野等),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2001) pp.1–3(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1568년설은 『세카이 다이햐카지텐(世界大百科事典)』, 1569년설은 『니혼 다이햐카젠쇼(日本大百科全書)』 등(코토뱅크). 1569년설의 8월 13일 생일은 긴치요의 생일과 같아 혼동이 의심된다.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pp.18–19에는 양자로 들어올 때 “열여섯이라고 모두가 말했다”는 증언도 있다. ↩

  16. 종가 사이트 「긴치요(誾千代)」(『부젠 오보에가키(豊前覚書)』 인용), 『타치바나케잣슈(立花家雑集)』 p.141, 『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 p.138(『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20책). ↩

  17.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활자본 p.107(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953324, 61코마). 하야토의 가계는 같은 책 pp.107–108. 『치쿠고 쇼시 군단(筑後将士軍談)』 계통의 서술은 일본어 위키백과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참조. ↩

  18. 『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 pp.138–139(『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20책), 종가 사이트 「연표(年表)」·「FAQ」. ↩

  19.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0편 2책 p.81(1575년 서명 「戸次伯耆守入道 道雪」), 11편 7책 p.814(『고조 문서(五條文書)』 1584년 7월 연서장 겉봉의 「立花/高少太/戸丹入/高主入」). 『타치바나카후(立花家譜)』 p.127에는 1581년 소린의 명으로 도세츠가 타치바나를 칭했다고 나오고, 『한칸후(藩翰譜)』 권8하 타치바나 항목(f104.p001–p002)은 도세츠를 타치바나로 부르면서도 “계도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

  20. 종가 사이트 「긴치요(誾千代)」·「연표(年表)」. ↩

  21. 종가 사이트 「연표(年表)」. 『한칸후(藩翰譜)』는 1587년에 무네시게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지만 종가 연표와 맞지 않는다. ↩

  22.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9책 p.193 수록 문헌과 종가 사이트 「도세츠(道雪)」. ↩

  23. 『한칸후(藩翰譜)』 권8하 타치바나 항목(f104.p003), 『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 p.139(『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20책), 종가 사이트 「도세츠(道雪)」. ↩ ↩2

  24. 『한칸후(藩翰譜)』 권8하 타치바나 항목(f104.p003, p006). ↩

  25.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활자본 p.96(953324, 56코마). ‘하치자에몬’의 성은 원문에 없다. ↩

  26. 종가 사이트 「긴치요(誾千代)」(『부젠 오보에가키(豊前覚書)』 인용), 「연표(年表)」(6월 25일 3개 군 수여),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

  27. 『한칸후(藩翰譜)』 f104.p003 할주 「十三万石餘と云」, 종가 사이트 「FAQ」(13만 2,200석), 일본어 위키백과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1587년 8만 석, 1590년대 검지 후 13만 2,083석. 나카노 2001 pp.63–65, 나카노·아나이 2012 근거). ↩

  28.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p.139, p.153, pp.159–160. 미야나가 저택은 종가 사이트 「긴치요(誾千代)」. 와타나베 무라오의 「미야나가 님 일대기 자료(宮永様御一代記資料)」도 같은 호칭을 쓴다(일본어 위키백과 참고문헌란). ↩

  29. 종가 사이트 「연표(年表)」. 1596년설은 일본어 위키백과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각주 없음). ↩

  30.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pp.136–137(953324, 76코마). 마중 보낸 가신의 성 첫 글자는 활자본에서 판독 불능(〓)이다. ↩

  31. 종가 사이트 「연표(年表)」(1624년 4월 4일 에도에서 사망, 계실로 기재). 계실은 긴치요 사후의 지위로 보인다. 1596년 호소카와 타다오키 주선 입실설은 일본어 위키백과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에 있으나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 ↩

  32.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pp.96–97(953324, 56코마). 같은 대목의 「御登城の事」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문맥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1600년 가신의 “자제분도 없으신데(御子樣とても御座なく)” 발언은 같은 책 p.151. ↩

  33. 『한칸후(藩翰譜)』 권8하 타치바나 항목(f104.p004, 저본 780524 30쪽 왼쪽 5–14행). ↩

  34. 참모본부 편, 『니혼센시 세키가하라에키(日本戦史 関原役)』(1893) 제7편 제17장 「야나가와(柳河)」(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71074, 195–198코마).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p.144(80코마). 『타치바나 이코』는 오츠 함락을 “세키가하라 닷새 전”이라 했으나 오츠 성 개성은 9월 15일이다. ↩

  35. 『한칸후(藩翰譜)』 권8상 나베시마 항목(f096.p006, 저본 780523), 『니혼센시 세키가하라에키(日本戦史 関原役)』 제17장. 『니혼센시』는 타치바나 쪽 사상자를 300여 명, 나베시마 쪽을 200여 명으로 본다. ↩

  36. 『한칸후(藩翰譜)』 f104.p004, 『니혼센시 세키가하라에키(日本戦史 関原役)』 제17장,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pp.152–159, 「도키케 유라이가키(十時家由来書)」(일본어 위키백과 재인용). 항복·개성 날짜는 『니혼센시』가 10월 25일, 『타치바나 이코』와 「도키케 유라이가키」가 12월 3일 퇴성으로 적는다. ↩

  37.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pp.152–153(953324, 84코마). ↩

  38.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서지 『큐야나가와한시(旧柳川藩志)』(야나가와 야마토 미이케 교육회 편, 1957), 『야나가와한소쇼(柳川藩叢書)』 제1집(세이초샤, 1984). ↩

  39. 『큐야나가와한시(旧柳川藩志)』 「긴치요 공주(誾千代姫)」 pp.642–643, 『야나가와한소쇼(柳川藩叢書)』 제1집 보유 84 pp.213–215(둘 다 일본어 위키백과 「타치바나 긴치요(立花誾千代)」 인용으로 확인, 원본 지면 미확인). 시녀 50명 철포대 문구는 같은 위키백과 항목이 『오토모 문서(大友文書)』를 출처로 들지만 각주가 없다. ↩

  40. 『니혼센시 세키가하라에키(日本戦史 関原役)』 문서편(일본 국립국회도서관 771070) 제124·131호 등. 후쿠오카현 관광연맹 「크로스로드 후쿠오카(クロスロードふくおか)」, 일본어 위키백과 「타치바나 긴치요(立花誾千代)」. ↩

  41. Game Watch 『전국무쌍 2(戦国無双2)』 발매 기사(2006-02-24), NHK 아카이브스 『역사비화 히스토리아(歴史秘話ヒストリア)』(2012-06-13), 후쿠오카현 보도자료(2026-09-07). ↩

  42. 『타치바나카후(立花家譜)』 p.125, 『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 「삼검전(三劍傳)」 p.176, 『오토모코하이키(大友興廃記)』 p.175(모두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1편 20책). 칼 이름은 사료에 잔라이(斬雷) 또는 라이키리(雷斬)로 나오며, 라이키리(雷切)는 통용 표기다. 현재 소장품 명칭은 타치바나가 사료관 해설 「와키자시 무명(라이키리마루)(脇指 無銘(雷切丸))」. ↩

  43. 타치바나가 사료관 소장품 해설(museum.or.jp, Google Arts & Culture 「무네시게의 매력 재발견(宗茂の魅力再発見)」), 일본어 위키백과 「라이키리(雷切)」. ↩

  44.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pp.159–160(953324, 87–88코마). ↩ ↩2

  45. 「도키케 유라이가키(十時家由来書)」(도키 마사미치 가문 문서 128, 『야나가와시사(柳川市史)』 사료편 Ⅴ p.722 수록, 일본어 위키백과 전재문). 문서 말미에 분세이 7년(1824) 기록이 있어 현재 형태는 그 이후에 정리됐다. ↩ ↩2

  46. 『토샤 고덴키(当社御傳記)』(옛 야나가와 번주 타치바나 가문 문서 번정 1091), 『오노 문서(小野文書)』 141 가토 기요마사 서장(둘 다 일본어 위키백과 전재문). ↩

  47. 『타치바나 이코(立花遺香)』 pp.138–139(953324, 77코마). 「不知〔和カ〕」의 방주는 1916년 활자본 편자의 것이다. ↩

  48. 『토샤 고덴키(当社御傳記)』(일본어 위키백과 전재문). 같은 기록이 텐포 8년(1837) 신호 수여도 다루므로 현재 형태는 그 이후로 보인다. ↩

  49. 나가스마치 향토 사이트 「긴치요 공주(誾千代姫)」(shofuku.nobushi.jp, 웨이백 머신 2023-11-24 사본). ↩

  50.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1책 pp.569–578(게이초 8년 이해 가을 조)의 편자는 “설이 제각각이라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아직 밝히지 못했다”고 했다. 『한칸후(藩翰譜)』 f104.p005도 네 가지 설을 늘어놓고 “어느 쪽이 참인가(何れか誠なるか)“라고 적었다. 『타치바나케이덴(立花系傳)』은 게이초 11년(1606) 1월 3일 다나쿠라 1만 석, 『니혼 다이햐카젠쇼(日本大百科全書)』는 1603년 1만 석. ↩

  51. 『다이니혼시료(大日本史料)』 12편 34책 pp.706–717(『타치바나케잣슈(立花家雑集)』·『간에이 쇼카 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의 11월 27일, 『타치바나카후(立花家譜)』·『겐칸 닛키(元寛日記)』의 8월 9일, 석고 10만 9,647석 남짓). 『한칸후(藩翰譜)』 f104.p006은 8월 9일, 10만 8천 석으로 적었다. ↩

  52. 『토샤 고덴키(当社御傳記)』(일본어 위키백과 전재문). 번 문서 「〔죽은 분들의 이름과 절 목록(御亡者様御名幷御寺等書上)〕」에는 ‘대선정니(大禅定尼)‘로 나온다(일본어 위키백과 각주). ↩

  53. 일본어 위키백과 「료세이지(良清寺)」(『야나가와 역사 자료 집성(柳川歴史資料集成)』 제3집 『야나가와 번 분겐초(柳河藩分限帳)』 1998 인용). ↩

  54. 우다 가문 「구상서(口上覚)」(야나가와 타치바나 가문 문서 4634, 일본어 위키백과 전재문). 1634년 이장설은 나가스마치 향토 사이트 「긴치요 공주(誾千代姫)」. ↩

  55. 『아리아케 신보(有明新報)』 2016년 2월 18일(일본어 위키백과 각주). ↩

  56. 나가스마치 향토 사이트 「긴치요 공주(誾千代姫)」. 이 사이트는 『료세이 다이시 덴키(良清大姉伝記)』·『즈이교쿠 레이샤키(瑞玉霊社記)』 등을 출전으로 드나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57. 야나가와시 공식 사이트 「미하시라 신사(三柱神社)」. 「도키케 유라이가키(十時家由来書)」는 증신을 분세이 7년(1824)으로 적어 공식 연혁과 다르다. 1837년 신호는 『토샤 고덴키(当社御傳記)』(일본어 위키백과 전재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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