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도(에도 말기 모사본, 기후시역사박물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했다가 도중 동군으로 이반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 — 시즈가타케 칠본창③

Q: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누구인가?

A: 오미 아사이군(近江国浅井郡) 출신의 무장(1554~1626).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의 가신으로 출발해 오다 노부나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거쳐 하시바 히데요시 휘하로 들어갔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세운 무공으로 “시즈가타케 칠본창”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592년 임진왜란 중 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에 참패해 일본 수군의 남해 제해권 상실을 자초한 당사자이지만, 이 패전에도 히데요시의 신임을 잃지 않았고 정유재란에서는 오히려 전공을 더해 영지를 늘렸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서 동군으로 전향해, 함께 이반한 세 장수가 처벌받는 와중에도 혼자 무처벌·본령안도를 받았고 이후 이요 오즈(伊予大洲) 5만3,500석까지 가증받았다. 은거 후 교토에서 출가해 1626년 사망했다. 그가 실제로는 다스린 적 없는 하리마 다쓰노번(播磨龍野藩)을 후손이 물려받아 메이지 유신까지 199년간 유지했지만, 이는 그가 죽고 한참 뒤의 일이다.

한눈에 보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항목내용
이름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わきざか やすはる)
통칭진나이(甚内)
생몰1554년(덴분 23년) ~ 1626년 8월 6일(간에이 3년, 음력) — 향년 73
출신지오미 아사이군 와키자카고(近江国浅井郡脇坂郷, 현 시가현 나가하마시)
최초 주군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
출사 경로오다 노부나가 편입 → 아케치 미츠히데 요리키 →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자청해 가신이 됨
관직종5위하 나카츠카사노쇼유(中務少輔, 1585년 서임)
대표 전공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 시바타 카츠마사 토벌, “시즈가타케 칠본창”의 한 명
통칭되는 오명1592년 한산도해전(閑山島海戦) 참패
세키가하라 이후 처분이반 4인 중 유일하게 무처벌·본령안도, 이후 가증
최종 영지이요 오즈(伊予大洲) 5만3,500석(1609년~)
정실겐쇼인(玄昌院) — 니시노토인 도키토(西洞院時当)의 딸
후계차남 야스모토(安元)가 가독 상속 (장남 야스타다는 요절)
은거1615~17년 무렵, 교토 니시노토인에서 출가(호 린쇼인)
사인확인되지 않음
묘소교토 묘신지(妙心寺)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블로그가 이미 다룬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함께 “시즈가타케 칠본창”으로 묶이는 인물이다. 세 사람 모두 임진왜란에 종군했지만 종착점은 크게 갈린다.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 최대의 수혜자였지만 막부의 허락 없이 성벽을 무단으로 수리했다가 영지를 잃고 가문이 소멸했다. 야스하루는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을 등지고도 혼자 무사히 살아남았고, 가문은 손자 대에 영지를 다쓰노로 옮겨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졌다. 칠본창이라는 명성, 한산도해전에서의 참패, 세키가하라에서의 이반까지. 각각의 사건이 사료로 어디까지 확인되는지, 그 사이사이 한국에서만 떠도는 일화는 어디서 왔는지 하나씩 찾아 보았다.

1. 출사 — 아사이 가신에서 히데요시 휘하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덴분(天文) 23년(1554년) 오미 아사이군 와키자카(현 시가현 나가하마시)에서 태어났다. 첫 주군은 당시 이 지역의 영주였던 아사이 나가마사였다. 덴쇼(天正) 원년(1573년) 오다니성(小谷城)이 함락되며 아사이 가문이 멸망하자, 야스하루는 오다 진영에 흡수됐다. 이후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요리키(与力, 부장급 배속 무장)로 편입돼 단바(丹波) 구로이성(黒井城) 공략(1575년·1579년 두 차례)에서 전공을 세웠다.1

이 시기의 연대에는 자료마다 편차가 있다. 일부 웹사이트에는 야스하루의 아케치 요리키 시절 전공을 세운 것이 1569년으로 나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구로이성 전투는 1575년과 1579년에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 6–10년의 간극이 생긴다. 야스하루의 출생연도(1554년)를 감안하면 1569년은 15세인데, 첫 전투로는 이른 편이라 개연성이 낮다. 시기를 혼동한 오기로 보인다.2 한 개인 블로그는 야스하루가 아네가와 전투와 오다니성 전투 등에 참가했다고 적으면서 그 시기를 1573년으로 적고 있다. 아네가와 전투는 1570년이고 오다니성 함락은 1573년이라, 두 사건을 뒤섞은 서술로 보인다. 야스하루가 이 시점 실제로 아사이 측에 소속돼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도 발견되지 않았다.2

아케치 휘하를 거친 뒤 야스하루는 “스스로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청해” 그 가신이 됐다고 여러 자료가 전한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히데요시 휘하로 들어온 정확한 시점과 문서로 남은 근거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582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아케치가 몰락한 전후로 추정할 뿐이다.3 같은 해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도 이름이 등장하지만, 다카야마 우콘·나카가와 기요히데·이케다 츠네오키 세 부대 중 어디에 배속돼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어떤 자료에도 나오지 않는다.4 이 시점의 야스하루는 아직 잘 알려진 인물이라기보다는 여러 진영을 옮겨 다니며 자리를 잡아가던 무장이었다.

2. 시즈가타케 칠본창 — 9명에서 7명으로

야스하루가 이름을 얻은 계기는 덴쇼 11년(1583년) 4월의 시즈가타케 전투다.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가 맞붙은 이 싸움에서 서른 살의 야스하루는 야나가세(柳ヶ瀬)에서 카츠이에의 양자 시바타 카츠마사(柴田勝政, 사이토 토시미츠의 아들)를 토벌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 공으로 야마시로에서 3,000석을 받았다.5

이 전투로 이름을 얻은 무장들을 후대는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七本槍)“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이름은 당대에 붙여진 것이 아니고, 애초에 표창받은 인원도 일곱 명이 아니었다. 전투 직후 성립한 동시대 사료 오무라 유코(大村由己)의 『덴쇼기(天正記)』 중 「시바타 갓센키(柴田合戦記)」에는 칸조(感状)와 녹봉을 받은 무사가 아홉 명 열거돼 있다. 지금 알려진 일곱 명(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가토 요시아키·와키자카 야스하루·히라노 나가야스·가스야 타케노리·가타기리 카츠모토)에, 사쿠라이 이에카즈(桜井家一)와 이시카와 카즈미츠(石川一光) 두 사람이 더해진 숫자다.6

이 둘이 후대에 빠진 데는 두 가지 설명이 공존한다. 하나는 두 사람 다 요절해 다이묘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애초에 히데요시의 직속 가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굳어진 데는 어감이 좋았다는 설명도 곁들여진다.6 칠본창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오세 호안(小瀬甫庵)의 『호안 다이코키(甫庵太閤記)』로 보인다. 전투가 있은 지 약 40여 년이 지난 뒤(간에이 연간 성립 추정)에 나온 책으로, 1542년 아즈키자카 전투(小豆坂の合戦)에서 활약한 오다 노부히데 군의 7인을 부르던 “아즈키자카 칠본창”이라는 기존 표현을 본떠 이름을 붙였다.7

말을 탄 무장이 창으로 낙마한 적을 내려다보는 우키요에, 화면 오른쪽 위에 와키자카(脇坂幸内)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우타가와 도요쿠니 「칠본창고명지도(七本鎗高名之図)」 중 와키자카.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일곱 명 사이의 공식 서열을 매긴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순서 없이 나열식으로만 소개가 되는데, 야스하루가 이 중 최연장자(1554년생, 전투 당시 30세)였다는 이야기만 확인된다.6 시즈가타케 이후 야스하루의 영지는 빠르게 불어났다. 덴쇼 13년(1585년) 한 해 동안에만 셋츠(摂津) 1만석 → 야마토 다카토리(大和高取) 2만석 → 아와지 스모토(淡路洲本) 3만석으로 세 차례 가증·이봉됐다.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제해권을 지키려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이끄는 수군을 아와지에 배치해야 했고, 야스하루가 그 적임자로 발탁됐다.8 같은 해 종5위하 나카츠카사노쇼유(中務少輔)에 서임됐다. 이 관직에서 딴 별칭 주쇼(中書)를 따라 야스하루가 교토 후시미에 지은 별장 일대가 지금도 주쇼지마(中書島)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9

3. 한산도해전 — 참패의 사료비판

3-1. 단독 출격과 패전

분로쿠(文禄) 원년(1592년) 6월 23일, 히데요시는 야스하루에게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토 요시아키와 “세 사람이 상의해” 조선 수군을 서둘러 무찌르라고 명했다. 병력은 구키 1,500명, 야스하루 1,500명, 요시아키 750명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서에는 세 사람 가운데 누구를 위에 둔다는 말이 없다. 구키를 이 수군의 “총대장”으로 부르는 것은 후대의 설명이다. 이해 4월 말 부산에 들어온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가문의 군세까지 합쳐 9,000여 명이었다. 세 장수는 부산포에 집결했으나 야스하루는 구키·가토에게 알리지 않고 7월 초 거제도 방면으로 단독 출격했다. 일본 측 사료 「코라이센센키(高麗船戦記)」는 이를 “전공을 독점하려고 구키·가토 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취지로 설명하고 있다.10

이순신은 견내량(見乃梁)이 판옥선 운용에 부적합하고 일본군이 육지로 도주하기 쉬운 지형임을 판단해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으로 포위했다. 대선 36척·중선 24척·소선 13척, 총 73척으로 편성된 야스하루 함대는 전투에서 대선 35·중선 17·소선 7척 등 59척을 잃고 14척만 겨우 탈출했다.11 뒤늦게 도착한 구키·가토는 전력 열세를 깨닫고 안골포로 물러났다가 그곳에서마저 이순신·원균·이억기 연합함대에 재차 격파당했다.

이 손실 규모(59척)는 조선 측 사료(우리역사넷 등)와 일본 측 2차 정리 자료가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완전히 독립적인 교차검증으로 보기는 어렵다. 일본 측 후대 정리가 조선 측 승전 보고 기록에 나온 수치를 그대로 받아들여 재인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11

3-2. 전사자는 몇 명이었나

전사자 수는 사료에 따라 크게 갈린다. 당대 승전 계본(선조실록 원기사)은 신중한 편이다. “왜적의 머리 210여 급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숫자를 다 기록할 수 없었다”고 나와 있다.12 그런데 후대로 가면 갈수록 전사자의 수치가 불어난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은 “수급 340개를 포함해 사살 3천 명 이상”으로 정리하고, 선조수정실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자료는 “9천 명”이라는 수치까지 제시한다.13

이 9천 명은 일본 측 동원 병력(1,500명) 기록과 맞지 않는다. 반면 일본 측 병력 장부(『덴쇼기』)를 역산한 추정은 생환자·이후 재동원 인원을 고려할 때 전사자를 최대 300명 선으로 잡는다.13 당대 승전 계본이 “익사자는 다 기록할 수 없었다”고 명시한 것은 조선 수군이 목을 벨 수 있는 시신만 전과로 신중하게 집계했다는 뜻이다. 동시에 후대 문헌에서 나타나는 수천 명대 수치가 검증된 집계가 아니라 재정리 과정에서 부풀려졌다고 볼 여지도 남긴다. 9천 명류 수치를 단정적으로 쓰는 것은 사료비판적으로 신중해야 한다.

3-3. “독단적 진격” 통설의 출전, 그리고 미역 일화

야스하루가 전공을 독점하려 단독 출격했다가 패했다는 서술의 근거는 「코라이센센키」 하나로 통용된다. 그런데 이 문서 자체가 “필사 연대 미상·필사자 미상”으로, 현존본은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성이 편찬한 사료집 『다이니혼카이시헨산시료(大日本海志編纂資料)』에 수록된 필사본이다. 사건 당대에 기록된 것인지, 훨씬 후대에 정리된 것인지조차 이번 조사로는 확정할 수 없었다.14 통설로 굳어진 서사이지만 근거는 성립 시기가 불명확한 단일 사료 하나뿐이다.

반면 한국에서 널리 유통되는 다음 이야기는 사료 근거가 전혀 없다. “야스하루가 무인도로 헤엄쳐 가 뗏목을 만들어 열흘간 표류하며 미역을 먹고 버텼고, 이후 가문은 대대로 7월 8일마다 미역만 먹는 풍습을 만들었다”는 서사, 그리고 그가 남겼다는 “나는 성급했고 적장은 침착했다…”는 독백이다. 일본 측 사료·와키자카 가문 관련 자료 어디에서도 이런 풍습이나 인용문은 나오지 않는다. 이 서사는 한국 포털 뉴스·지역신문 칼럼류에서만 반복 유통된다. 인용문의 경우 확인된 유통 경로 중 하나는 소설가 복거일이 2013년 저서에서 쓴 가상 대담(창작)임을 스스로 명시하고 있다.15 일본 측 자료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것은 “구사일생을 얻었다”는 정도이며, 야스하루가 이후 정유재란까지 계속 활동한 것으로 볼 때 한산도해전에서의 패배 후 생환한 것 자체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구체적인 과정은 뒷받침되지 않는다.

3-4. 패전 이후 — 신임은 흔들리지 않았다

한산도 패전으로 야스하루 개인이 처벌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이후에도 계속 아와지 스모토 3만석 영주 지위를 유지했고, 조선 전선에도 계속 투입됐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육상 병력(약 900명)을 동원했고, 게이초 2년(1597년) 칠천량해전에서는 토도 타카토라 등과 함께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대파해 한산도의 패배를 만회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명량해전에도 가토 요시아키·구루시마 미치후사 등과 함께 참전했다. 일본 측 함대 총규모는 『난중일기』 130여 척부터 『이충무공전서』 333척, 『난중잡록』 500~600척까지 사료마다 편차가 크다. 여하튼 울산성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3,000석이 가증돼 야스하루의 영지는 3만3,000석이 됐다.16 노량해전 참전 여부는 이번 조사로 확인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한산도 패전으로 야스하루가 히데요시의 신임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확인된 사료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오히려 패전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군 지휘관으로 중용됐고, 논공행상에서 가증까지 받았다.

거북선을 그린 18세기 조선 문헌의 목판화
『이충무공전서』(1795년) 수록 목판화의 귀선(거북선). 대영박물관 소장 사진, CC BY-SA.

4. 관위와 영지 — 확인된 것과 와전된 것

야스하루의 정식 관직으로 사료상 확인되는 것은 나카츠카사노쇼유(中務少輔, 종5위하, 1585년 서임) 하나뿐이다. 주나곤(中納言)이나 아와지노카미(淡路守)라는 관직명이 유통되기도 한다. 그러나 덴쇼~게이초 연간의 일개 무장이 공가의 고위 관직인 주나곤을 받았다는 근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고 개연성도 낮다. 아와지노카미 역시 야스하루가 아와지 스모토의 다이묘(영주)가 된 사실이 관직명처럼 와전됐을 가능성이 높다.17

영지 변천은 비교적 뚜렷하게 확인된다. 1585년 아와지 스모토 3만석 → 임진왜란 전공으로 3만3,000석 → 게이초 14년(1609년) 이요 오즈로 가증 이봉돼 5만3,500석, 오즈번 초대 번주가 됐다. 야스하루는 이후 24년간(스모토 기준) 세토 내해 수군을 통솔하며 성을 대규모로 개축하고 성하마을의 기초를 놓았다.18

5. 세키가하라 — 배신의 시점과 “4인 공모”라는 신화

5-1. 언제 창을 돌렸는가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마츠오야마(松尾山) 기슭에 포진해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오가와 스케타다(小川祐忠)·아카자 나오야스(赤座直保)·구츠키 모토츠나(朽木元綱) 네 장수는 서군에 속해 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서군을 배신하고 같은 서군 소속인 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 부대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이에 호응해 협공에 가담했다. 부대가 실제로 방향을 튼 시점은 고바야카와의 이반 뒤였다. 이 점은 모든 자료가 일치한다.19

“언제 동군에 붙기로 마음먹었는가”라는 의사결정의 시점은 별개다. 야스하루가 개전 훨씬 전부터 이에야스 측에 뜻을 전했다는 서술이 반복된다. 서군에 편성된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당시 오사카에 머물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20 영문 위키백과 등은 구체적 일화를 하나 전한다. 아들 야스모토가 이에야스를 수행하던 야마오카 카게토모(山岡景友)에게 서신을 보내 사정을 전했고 이에야스가 답신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다만 이 서신의 원문이나 서지 정보는 이번 조사로 확인하지 못했다. 토도 타카토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한 블로거조차 “개인적 신뢰관계가 엿보이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를 찾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로서는 근거가 확정되지 않은 통설로 다뤄야 한다.21

5-2. “4인이 공모했다”는 틀은 과도한 단순화다

토도 타카토라가 자신의 오미 시절 인맥을 활용해 네 장수 모두에게 사전 내응을 공작했다는 서술이 통설처럼 퍼져 있다. 개별 사료를 뜯어보면 이 틀은 균일하지 않다.

인물처분사전 공모에 대한 사료
와키자카 야스하루무처벌·본령안도, 이후 가증사전 의사 표명의 구체적 일화(서신)가 있으나 원문 미확인
구츠키 모토츠나감봉(2만석→약 9,550석)위키백과는 “사전 내통 의사 없음”을 감봉의 공식 사유로 명시 — 오히려 반대 근거
오가와 스케타다개역(改易)개전 직전까지 친척을 서군으로 회유하려 한 정황 확인 — 사전 내응설과 배치
아카자 나오야스개역, 포상 전무최근 연구(시라미네 준)는 참전 여부 자체를 의문시

구츠키는 오히려 “사전 공모가 없었다”는 것이 처벌 사유였고, 오가와는 개전 직전까지 서군을 위해 움직인 정황이 있다. 아카자는 참전 자체가 불확실하다.22 “4인이 사전에 함께 모의했다”는 서술은 토도 타카토라라는 공통의 중개자가 있었으니 개연성은 있지만 개별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다. 토도가 각자에게 따로 접촉하기는 했지만, 서군에 등을 돌린 것은 주로 고바야카와가 돌아서는 전황을 보고 각자 독립적으로 판단한 결과라고 보는 편이 더 개연성이 있다. 이 중 사전 의사 표명의 구체적 일화를 가진 것은 야스하루뿐이다.

전후 처분에서 야스하루만 무처벌·본령안도를 받았고, 1609년에는 오즈 5만3,500석으로 영지가 거의 두 배 늘었다. 두 사실 모두 다수 독립 사료에서 일관되게 확인된다. 똑같이 동군으로 돌아선 네 명 사이에서 처벌의 경중이 달랐던 것이 “사전에 내응할 의사를 이에야스 측에 표명했는지 여부”만으로 갈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가와의 경우 이시다 미츠나리와의 개인적 친분이나 영내 통치 문제 같은 정치적 앙금이 진짜 이유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야스하루가 이 네 명 중 유일한 승자였다는 점은 분명하다.23

5-3. 여담 — 고바야카와의 이반 시점에 대한 통설이 흔들리고 있다

야스하루의 배신 서사가 딛고 선 세키가하라 본전의 표준 서사 자체가 현재 일본 학계에서 재검토 대상이다. “이에야스가 토이텟포(問鉄砲)로 오전 내내 관망하던 고바야카와를 재촉해서야 그가 움직였다”는 통설에 대해, 후지모토 마사유키·시라미네 준 등은 게이초 5년 9월 17일자 「호리문서(堀文書)」 등 동시대 사료를 근거로 “고바야카와의 이반은 개전과 거의 동시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역사학자 고자 유이치도 “최근 연구에서 토이텟포는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가사야 가즈히코는 여전히 통설을 지지하고 있어, 2022년 기준으로도 결론이 나지 않은 논쟁이다.24

6.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사이 — 안도의 배경과 소소한 일화들

야스하루가 세키가하라에서 개역을 면한 이유를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은 “서군 가담이 본의가 아니었음을 야스모토가 이에야스에게 미리 전했고, 전장에서도 고바야카와의 배신에 실질적으로 호응했다는 사실을 이에야스가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25 본령안도는 오미 시절의 인맥이 있던 토도 타카토라가 중재해 얻어낸 것이라고 전한다. 야스하루는 이에 감사해 타카토라에게 명검 사다히데(貞秀)의 태도(太刀)를 보냈다고 한다.26

세키가하라보다 앞선 시기인 고마키·나가쿠테 전투(1584년) 때의 인질과 관련된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오다 노부카츠 측 무장 다키가와 카츠토시(滝川雄利)의 아들이 히데요시 측 인질로 잡혀 야스하루가 이를 관리하고 있었다. 카츠토시가 “죽어가는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자 야스하루는 이를 믿고 인질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는 인질을 빼내기 위한 계책이었고, 야스하루가 속은 탓에 카츠토시 부자는 무사히 이가 우에노성으로 돌아가버렸다. 이에 대해 히데요시에게 질책을 받은 야스하루는 설욕하려고 우에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는 일화다.27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이 일화는 역사 관련 웹사이트에서만 확인돼 1차 사료까지는 추적하지 못했다.

야스하루 본인의 청빈·겸양을 직접 서술하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단바 구로이성 전투에서 아카이 나오마사(赤井直正)로부터 담비 가죽 창집을 받았다는 일화는 전해지고, 이 유물은 다쓰노 신사(龍野神社)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야스하루가 다쓰노 신사에 합사된 것 자체가 후대의 일이라는 점은 다음 장에서 다룬다.28

7. 은거와 죽음, 그리고 사후의 위기와 부활

7-1. 은거와 사망

붉은 예복 차림으로 앉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초상화
와키자카 야스하루 초상화, 사후 1년인 1627년 제작 전승. 다쓰노 신사 소장, 퍼블릭 도메인.

야스하루는 겐나(元和) 원년(1615년) 무렵 은거해 가독을 차남 야스모토(安元, 1584~1654)에게 물려주고 교토 니시노토인(西洞院)으로 물러나 출가했다. 호는 린쇼인(臨松院)이라 했다. 흥미롭게도 야스하루의 정실 겐쇼인은 공가 니시노토인 가문 출신이다. 다만 은거지로 니시노토인을 선택한 것이 처가와의 인연 때문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게이초 4년(1599년)에는 부친을 기려 교토 묘신지(妙心寺)의 탑두 사찰 린카인(隣華院)을 창건했다. 이곳이 이후 4대에 걸쳐 와키자카 가문의 보리사가 됐다. 간에이(寛永) 3년(1626년) 8월 6일 교토에서 사망했다. 향년 73세. 사인은 어떤 자료에도 적혀 있지 않다.29

7-2. 사후 6년, 후계 위기의 실체

가독을 이은 야스모토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야스츠네(安経)를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데 간에이 9년(1632년, 야스하루가 죽고 겨우 6년 뒤) 비추 마츠야마번주 이케다 나가유키의 유언(영지 균분 상속)을 둘러싼 분쟁이 터졌다. 야스츠네의 형이자 미노 지역 다이묘였던 3남 야스노부(安信)가 이 배분에 항의하러 야스츠네와 함께 이케다가를 방문했다가 나가유키의 동생 이케다 나가요리와 말다툼 끝에 칼부림이 벌어졌다. 야스츠네는 살해당했고 야스노부는 중상을 입었다. 나가요리는 이틀 뒤 할복을 명받았고, 야스노부는 이 사건의 책임으로 개역돼 다이묘 지위를 잃었다.30

세자를 잃은 야스모토는 다시 양자를 구해야 했다. 두 번째로 들인 양자 야스토시(로주 홋타 마사모리의 동생)마저 요절했고, 세 번째로 홋타 마사모리의 아들 야스마사(安政)를 양자로 들여 3대 당주로 삼았다. 야스마사의 생모는 다이로 사카이 타다카츠의 딸이었고, 야스마사의 친형제 홋타 마사토시는 훗날 다이로에 올랐다. 이렇게 로주·다이로를 배출하는 홋타가에서 연속으로 양자를 들인 결과, 본래 도요토미계 도자마(外様) 다이묘였던 와키자카가는 네가이후다이(願譜代, 후다이 대우를 자청해 얻은 준-후다이)로 신분이 격상됐다.31

7-3. 다쓰노 이봉은 야스하루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하리마 다쓰노(播磨龍野)로 옮겨간 것은 야스하루 본인의 결정이 아니다. 3대 야스마사 대인 간분(寛文) 12년(1672년, 야스하루 사후 46년) 시나노 이이다(信濃飯田)에서 하리마 다쓰노로 5만3,000석에 이봉되면서 비로소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다쓰노는 초대 야스마사부터 10대 야스아야(安斐)까지 199년간 단절 없이 유지됐고, 8대 야스타다(安董)·9대 야스오리(安宅)는 로주까지 배출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화족에 편입됐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다쓰노현이 됐다가 이후 효고현에 편입됐다. 와키자카가는 1884년 자작 작위를 받았다.32

다쓰노시가 시지정 문화재로 지정해 다쓰노 역사문화자료관에 보관 중인 「와키자카 야스하루·야스모토 관계자료 일괄(脇坂安治・安元関係資料一括)」(123점, 대부분 덴쇼 연간, 히데요시의 슈인조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서한 포함)이 실물로 남아 있어 다쓰노시는 야스하루를 번조(藩祖)로 적극 현창한다. 다만 엄밀히 말해 야스하루가 임진왜란 당시 다스린 곳은 아와지 스모토였지 다쓰노가 아니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KBS 『역사스페셜』(2003)이 “임진왜란 당시 와키자카 가문이 다쓰노시를 다스렸다”고 서술한 것을 명시적으로 오류라고 정정하고 있다. 한국 방송 콘텐츠에서도 이 혼동은 이미 한 번 일어났다.33

도요토미계 배신자 대부분이 개역되거나 가문이 소멸한 것과 비교할 때 와키자카가가 메이지까지 존속한 것은 상대적으로 이례적이다. 그러나 그 존속의 실질적 동력은 야스하루 본인의 치세가 아니라, 아들 야스모토 대에 겪은 무자·양자 위기와 그 위기를 홋타가와의 정략적 결연으로 넘긴 선택에 있다. 다쓰노 소면(揖保乃糸) 산업이 번의 장려 산업이 된 것도 안에이–분카 연간(1771–1818년, 야스하루 사후 145–190여 년이자 가문이 다쓰노에 정착한 지도 100년 가까이 지난 뒤)이다. 야스하루 개인과는 완전히 무관하다.34

8. 인물평 — 학계의 공백과 한국에서의 위치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학계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CiNii 등에서 야스하루를 단독 주제로 삼은 학술 연구서·논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시즈가타케·한산도·세키가하라·토도 타카토라 등 굵직한 사건이나 인물을 주제로 하는 학술 문헌에 조연으로만 등장한다.35 그렇다고 해서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쓰노시는 히데요시의 슈인조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서한이 포함된 123점의 실물 사료를 시 지정 문화재로 보관하며, 천하통일기를 밝히는 데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한다.33

야스하루도 다른 칠본창 인물들처럼 임진왜란의 당사자다. 다만 한국에서 그가 갖는 위치는 일본 국내와 꽤 다르다. 일본 국내 대하드라마에서는 늘 조연에 머물렀지만, 한국에서는 KBS 『불멸의 이순신』에서 크게 다뤄졌고, 한산도해전을 다룬 영화 《한산: 용의 출현》(2022)에서는 변요한이 연기한 이순신의 맞상대로 나오는 등 여러 사극·영화·게임에 반복 등장한다.36 한 일본 역사 포털은 한국에서 알려진 일본 무장으로 히데요시·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야스하루를 꼽는다(학술 정설이 아니라 대중매체의 해석이다).37 이순신과 싸워 패배한 덕분에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졌으니 이 또한 역사의 흥미로운 점이라 하겠다.

출처

1차·준1차 사료 (성립 시기 명시, 모두 2차 자료를 통한 재인용)

  • 『天正記(덴쇼기)』 중 「柴田合戦記(시바타 갓센키)」 — 오무라 유코 편찬, 시즈가타케 전투 직후 성립 (9인 칸조 기록)
  • 『甫庵太閤記(호안 다이코키)』 — 오세 호안 편찬, 간에이 연간(1620년대) 추정 성립 (“칠본창” 명칭 초출)
  • 「高麗船戦記(코라이센센키)」 — 필사 연대·필사자 미상, 도쿄대학 고마바도서관 소장 사본(『大日本海志編纂資料』 수록)
  •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관련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원문
  • 이순신 승전 계본 국역 — 우리역사넷·사료로 본 한국사(국사편찬위원회)
  • 「堀文書」 — 게이초 5년(1600) 9월 17일자, 세키가하라 재검토 연구 인용

현대 연구자·언론 기고

  • 渡邊大門, 「関ヶ原合戦の裏事情。脇坂安治・安元父子が改易されなかった”本当の理由”とは?」,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 白峰旬, 『新解釈 関ヶ原合戦の真実』(宮帯出版社, 2014) — 언론 소개 경유 인용
  • 呉座勇一, PRESIDENT Online 기고(“家康は「早く裏切れ」と催促したわけではない…”)
  • 日経BizGate, 「家康はいつ小早川を裏切らせたか 関ケ原大論争が勃発」(2022)
  • 藤本正行, 토이텟포 사료비판 관련 소개 기사
  • 근위 류순(近衛龍春), 『脇坂安治 七本鑓と水軍大将』(実業之日本社, 2024) — 역사소설(창작)이며 학술 근거로 사용하지 않음
  • 복거일, 「이순신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대화」(2013/2014) — 가상 대담(창작)임을 자체 명시, 1차 사료 아님

공식·표준 참고자료

  •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治」・「脇坂氏」・「脇坂安元」・「脇坂安経」・「大洲藩」・「龍野藩」・「小川祐忠」・「赤座直保」・「朽木元綱」 항목
  • 한국어 위키백과 「와키자카 야스하루」 항목(관련 작품·논점 및 표현 절 포함)
  • 한국어 위키백과 「한산: 용의 출현」, 서울경제 변요한 인터뷰 기사(2022)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산도 해전 1592」・「이순신과 한산도 대첩」
  • 한국학중앙연구원 sillokwiki 「한산전(閑山戰)」
  • たつの市 공식 「脇坂安治・安元関係資料一括」・「脇坂安治公没後400年記念企画展」
  • 妙心寺 塔頭 隣華院 공식 사이트 「隣華院の紹介」
  • 兵庫県手延素麺協同組合 「揖保乃糸の歴史」, 兵庫県 공식 「播州手延そうめん」
  • 東京文化財研究所 아카이브 데이터베이스, Wikimedia Commons 이미지 메타데이터
  • CiNii Research 검색 결과(cir.nii.ac.jp)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D, 개별 각주에 표시)

  • touken-world.jp, bushoojapan.com, rekishikaido.php.co.jp(WEB歴史街道), kojodan.jp, nagahama-sengoku.jp, rekimoku.xsrv.jp, nihonsizatugaku.net, sekigaharamap.com, sasakigengo.wixsite.com(토도 타카토라 연구 블로그), kusanomido.com, genealogy-research.hatenablog.com

확인하지 못한 것

  • 야스하루 단독을 다룬 학술 논문·연구서 (검색 범위 내 부재 확인)
  • 야스하루의 정확한 사인
  • 노량해전 참전 여부
  • 다쓰노시 소장 123점 자료군 내 조선 전선 관련 자필 문서 포함 여부
  • 김훈 『칼의 노래』 본문 내 야스하루 등장 장면 유무

Footnotes

  1.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治」 항목; 武家家伝_脇坂氏(harimaya.com); touken-world.jp 「脇坂安治」. ↩

  2. bushoojapan.com 「賤ヶ岳七本槍に数えられた戦国武将・脇坂安治の生涯」와 yururito-sengoku.com의 연대 서술을 상호 대조 — 시즈가타케 전투(1583)·구로이성 전투(1575·1579) 통설 연대와의 정합성 검토. ↩ ↩2

  3.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治」 항목; rekimoku.xsrv.jp 「脇坂安治」. ↩

  4. 일본어 위키백과 「山崎の戦い」 항목(포진 서술); bushoojapan.com, 前掲(야마자키 전투 이후 시즈가타케로 건너뛰는 서술 확인). ↩

  5. rekishikaido.php.co.jp 「じつは9人だった『賤ヶ岳七本槍』」; touken-world.jp, 前掲. ↩

  6. rekishikaido.php.co.jp, 前掲; nagahama-sengoku.jp 「賤ヶ岳七本槍」; kojodan.jp 「賤ヶ岳の七本槍からあふれた武将たち」. ↩ ↩2 ↩3

  7. kojodan.jp, 前掲; 일본어 위키백과 「大村由己」 항목. ↩

  8. rekimoku.xsrv.jp, 前掲; touken-world.jp, 前掲(영지 변천 연표). ↩

  9. weblio.jp 「脇坂安治」(“中書島” 지명 유래);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治」 항목(관직 서임 연도). ↩

  10. 6월 23일 히데요시 슈인조(와키자카 앞), 『니혼센시 초센에키(日本戦史 朝鮮役)』 문서 제46호 “九鬼・加藤嘉明兩三人相談、無越度樣令行、早速可討果候”(일본 국립국회도서관 936356). 병력은 『히데요시노 초센케이랴쿠(秀吉の朝鮮経略)』(1939)가 인용한 진립표. 9,000여 명은 같은 책의 “天正二十年四月二十七日に釜山に入…した水軍九千餘にしても、九鬼嘉隆の勢と來島通之・通總勢のほかは、藤堂高虎・脇坂安治・加藤嘉明などの諸勢は…”(일본 국립국회도서관 1687152, OCR 판독). 구키를 “水軍の総大将”으로 적은 일본어 위키백과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해당 문장에는 각주가 없다. 일본어 위키백과 「閑山島海戦」・「脇坂安治」 항목; UTokyo Digital Archive Portal 「高麗船戦記」 서지 정보. ↩

  11.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산도 해전 1592」; 일본어 위키백과 「閑山島海戦」 항목(손실 함선 수 비교). ↩ ↩2

  12. 국사편찬위원회 「이순신과 한산도 대첩 — 사료로 본 한국사」(선조실록 원문+국역);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6월 21일 기사(sillok.history.go.kr). ↩

  13. 우리역사넷, 前掲(3천 명 이상 종합 서술); 한국학중앙연구원 sillokwiki 「한산전」(“9천 명” 수치); 일본어 위키백과 「閑山島海戦」 항목(天正記 병력장부 역산). ↩ ↩2

  14. UTokyo Digital Archive Portal, 前掲; 일본어 위키백과 「閑山島海戦」 항목. ↩

  15. 다음 뉴스 「일본 명문가가 이순신 장군 때문에 미역만 먹게 된 이유」; 경남매일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미역」; archivesnews.com, 복거일 기고(2014, 가상 대담임을 자체 명시);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治」・「脇坂氏」 항목(해당 서사 부재 자체가 반증). ↩

  16.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治」 항목; 한국어 위키백과 「명량 해전」 항목(일본측 지휘관 명단, 함대 규모 사료별 편차). ↩

  17.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治」 항목(나카츠카사노쇼유 서임 기록); “주나곤·아와지노카미” 관직설은 이번 조사 범위 내 원 사료로 확인되지 않음. ↩

  18. rekimoku.xsrv.jp, 前掲; touken-world.jp, 前掲. ↩

  19. 일본어 위키백과 「小川祐忠」・「赤座直保」・「朽木元綱」 항목; rekishikaido.php.co.jp 「小早川秀秋、脇坂安治、小川祐忠~関ヶ原『裏切り者』たちの思惑(1)」. ↩

  20. rekishikaido.php.co.jp, 前掲. ↩

  21. 영문 위키백과 「Wakizaka Yasuharu」; sasakigengo.wixsite.com 「高虎と脇坂安治」(사료 부재를 자인). ↩

  22. 일본어 위키백과 「朽木元綱」・「小川祐忠」・「赤座直保」 항목; rekishikaido.php.co.jp 「吉川広家、朽木元綱、赤座直保~関ヶ原『裏切り者』たちの思惑(2)」. ↩

  23. touken-world.jp 「関ヶ原の戦いを動かした裏切り」; nihonsizatugaku.net 「関ヶ原の戦いで西軍を裏切った4将」. ↩

  24. gendai.media(현대비즈니스) 세키가하라 재검토 관련 기사; PRESIDENT Online, 呉座勇一 기고; 日経BizGate 「家康はいつ小早川を裏切らせたか 関ケ原大論争が勃発」(2022). ↩

  25. news.yahoo.co.jp, 渡邊大門 기고(전문가 칼럼), 前掲. ↩

  26.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治」 항목; sekigaharamap.com 「脇坂安治とは」. ↩

  27. yururito-sengoku.com, 前掲(1차 사료 미확인, 민간에 전해지는 일화로 인용). ↩

  28. bushoojapan.com, 前掲(담비 가죽 창집 일화, 1차 출전 불명확). ↩

  29.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治」・「脇坂安元」 항목; touken-world.jp, 前掲(은거·사망 연도). 妙心寺 塔頭 隣華院 「隣華院の紹介」(rinkain.com, 사찰 공식 사이트; 1599년 창건, 부친 야스아키의 33회기 법요, 사호는 부친 법명에서 유래). ↩

  30.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経」 항목(1632년 이케다가 분쟁 사건). ↩

  31. genealogy-research.hatenablog.com 「龍野藩主脇坂家の系図について」;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氏」 항목(홋타가 양자·네가이후다이 격상). ↩

  32. 일본어 위키백과 「龍野藩」・「脇坂氏」・「廃藩置県」 항목. ↩

  33. たつの市 공식 「脇坂安治・安元関係資料一括」; 한국어 위키백과 「와키자카 야스하루」 항목(KBS 『역사스페셜』 오류 정정 서술). ↩ ↩2

  34. 兵庫県手延素麺協同組合 「揖保乃糸の歴史」; 兵庫県 공식 「播州手延そうめん」. ↩

  35. CiNii Research 검색 결과(cir.nii.ac.jp, “脇坂安治”); 일본어 위키백과 「脇坂安治」 참고문헌 목록(愛媛県史・徳川家康文書の研究・藤堂高虎論・関ヶ原合戦は「作り話」だったのか 등). ↩

  36. 한국어 위키백과 「와키자카 야스하루」 항목(관련 작품 절)・「한산: 용의 출현」 항목; 서울경제 「[인터뷰] ‘한산: 용의 출현’ 변요한의 와키자카, 물음표에서 느낌표로」(sedaily.com). ↩

  37. kusanomido.com 「脇坂安治 - 日本より韓国で有名な豊臣の水軍大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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