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1538–1616) — 잇키의 이탈자에서 에도 정권의 실무자로
Q: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는 누구인가?
A: 미카와(현 아이치현 동부) 출신의 도쿠가와 가신(1538–1616). 1563년 미카와 잇코잇키(一向一揆, 정토진종 신도들의 봉기) 당시 이에야스에 맞서 잇키 측에 섰다가 미카와를 떠났고, 훗날 다시 돌아와 측근이 되었다. 1590년 간토 입국 때 받은 영지는 1만 석이었고 최종 석고도 2만 석대에 그쳤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쇼군 자리를 히데타다에게 넘긴 뒤에는 에도에서 히데타다를 보좌하는 토시요리(年寄)로서 다이묘들의 뜻을 막부에 전하는 창구를 맡았다.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에는 그가 국정을 맡은 기간이 17년으로 기록돼 있다. 1616년 이에야스가 죽고 49일 뒤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남 마사즈미는 그로부터 6년 뒤 우츠노미야 15만 5천 석에서 개역(改易, 영지 몰수)·유배됐고, 차남 마사시게는 가가번에서 5만 석을 받아 혼다 가문의 한 갈래를 남겼다.
한눈에 보는 혼다 마사노부
| 항목 | 내용 |
|---|---|
| 이름 |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ほんだ まさのぶ) |
| 통칭·관직 | 야하치로(弥八郎), 종5위하 사도노카미(佐渡守) |
| 생몰 | 1538년(덴분 7년) – 1616년 7월 20일(겐나 2년 6월 7일), 향년 79 |
| 출생지 | 미카와(현 아이치현 동부). 구체적인 마을은 사료에 없음 |
| 부친 | 혼다 토시마사(本多俊正). 통칭과 관직명이 아들과 같다 |
| 잇키 | 1563년 미카와 잇코잇키 때 우에노 성에 농성, 이듬해 미카와를 떠나 가가(현 이시카와현 남부)에 거주 |
| 서임 | 1586년(덴쇼 14년) 5월 종5위하 사도노카미 |
| 영지 | 1590년 간토 입국 때 1만 석, 최종 2만 석대 (소재지는 사료마다 다름) |
| 직무 | 히데타다 곁의 토시요리(年寄). 시기는 사료로 확정되지 않음 |
| 자녀 | 장남 마사즈미(正純), 차남 마사시게(政重), 삼남 타다즈미(忠純) 등 |
| 법명 | 善徳納誨院(독음 미확인) |
| 묘소 | 불명. 안조시 혼쇼지(本證寺)에 공양탑, 유골 일부는 도쿄 아사쿠사 도쿠혼지(徳本寺)에 있다는 전승 |
혼다 마사노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신(謀臣)으로 불린다. 사천왕처럼 전장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 아니라 이에야스 곁에서 머리를 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다. 소설과 드라마는 그를 웃음 뒤에 칼을 감춘 책사로 그리기도 하고, 이에야스가 깊이 신뢰한 참모로 그리기도 한다. 평가가 이렇게 갈리는 것은 그를 다룬 문헌이 성격이 다른 두 갈래로 나뉘기 때문이다. 오쿠보 가문의 입장에서 쓴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에는 은혜를 잊은 악역으로, 아라이 하쿠세키의 『한칸후(藩翰譜)』와 막부가 편찬한 『도쇼구 고짓키 부록(東照宮御実紀附録)』에는 이에야스가 벗처럼 대한 모신으로 묘사돼 있다.
그런데 상반되는 이미지로 그를 묘사한 두 갈래의 기록은 모두 마사노부가 죽은 뒤에 나왔다. 혼다 마사노부의 영지는 도쿠가와 사천왕, 곧 이 사이트에서 소개한 사카이 타다츠구, 이이 나오마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혼다 타다카츠 네 사람에 비하면 3분의 1에서 12분의 1 수준이었지만 문서에 남은 그의 역할은 작지 않았다.
1. 출신과 잇코잇키 (1538–1564)
1-1. 미카와의 혼다 가문
마사노부는 덴분 7년(1538) 미카와에서 태어났다.1 이 생년의 근거는 『간세이 조슈쇼카후』다. 이 계보서는 1812년에 완성됐으니 마사노부가 죽고 거의 200년이 지난 뒤의 편찬물이다.
아버지 혼다 토시마사(本多俊正)는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와 이에야스를 차례로 섬기다 69세에 죽었다. 『간세이 조슈쇼카후』에 따르면 토시마사의 통칭도 야하치로, 관직명도 사도노카미로 아들과 같다.2 이 동명은 뒤에서 잇키 명단을 읽을 때 문제가 된다. 같은 혼다 성이라도 혼다 타다카츠 가문과는 다른 계통이다. 두 집안은 먼 조상이 같다고 전해지지만 갈라진 지 십수 대가 지났고, 마사노부 쪽은 니시조(西城)에 살던 사다마사계, 타다카츠 쪽은 사다미치계다.
1-2. 이에야스의 적이 된 1563년
에이로쿠 6년(1563) 가을 미카와의 정토진종(浄土真宗) 신도들, 곧 잇코슈(一向宗) 문도들이 봉기했다. 가신 가운데서도 잇키 편에 선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간세이 조슈쇼카후』에는 마사노부가 “승려들과 힘을 합쳐 우에노 성(上野の城)에 들어가 농성했다”고 기록돼 있고, 이듬해 여러 사찰의 문도가 사면되고 잇키가 가라앉았을 때 마사노부는 미카와를 떠나 가가에 살았다는 내용이 이어진다.3
『미카와 모노가타리』의 잇키 명단에도 마사노부로 보이는 이름이 나온다. 사카이 쇼겐(酒井将監)의 우에노 성에 농성한 무리로 아다치 우마노스케, 도리이 시로자에몬 등을 나열하는 가운데 혼다 야하치로(本田弥八郎)가 들어 있다. 다만 아버지 토시마사도 같은 통칭을 썼기 때문에 이 이름이 마사노부 본인인지 아버지인지는 문언만으로 가릴 수 없다. 『간세이 조슈쇼카후』와 『한칸후』에는 우에노 성 농성이 마사노부의 일로 명기돼 있고, 『한칸후』에는 동생 산야(三弥)와 함께 성에 들어갔다고 나온다.4 본인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지만 이 문헌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뒷받침한다고 볼 수는 없다. 세 문헌은 각각 사건 60년 가까이 뒤(1620년대), 138년 뒤(1702), 250년 가까이 뒤(1812)에 나온 서술이고, 동시대 문서로 그의 잇키 가담을 확인했다는 연구는 이번 조사에서 찾지 못했다.
사카이 쇼겐은 우에노 성주 사카이 타다나오(酒井忠尚)의 통칭으로,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든 가신이다.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은 마사노부가 잇코슈라서 이에야스에게 맞선 것이 아니라 타다나오와 손잡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5
잇키가 끝난 뒤의 상황은 『미카와 모노가타리』에 이렇게 나와 있다. 승려들은 뿔뿔이 도망쳤고, 적이 됐다가 용서받은 사람도 있었으며, 「혼다 사도(本田佐渡), 그리고 산야(三弥)」는 미카와를 떠나 동쪽으로, 서쪽으로, 북쪽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산야는 마사노부의 동생이다.6 이탈자를 한데 묶은 서술이라 마사노부가 어디로 갔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1-3. 스스로 떠났는가, 쫓겨났는가
사면된 사람이 많았는데 마사노부는 왜 돌아오지 못했을까. 무라오카 미키오(村岡幹生)는 2023년 『전국기 미카와 마츠다이라씨 연구(戦国期三河松平氏の研究)』에 실은 논문에서, 실제로는 마사노부 등 잇키에 참가한 대부분의 가신이 가신단 통제를 위해 추방됐다는 견해를 냈다고 한다.7 이 견해는 일본어 위키백과 「미카와 잇코잇키(三河一向一揆)」 항목이 소개한 것을 확인했을 뿐 원저는 열람하지 못했다. 사전류도 표현이 갈린다.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에는 “이듬해 미카와를 떠나 가가로 달아났다”고, 『세계대백과사전』에는 “가가에 살았다”고, 『일본인명대사전(日本人名大辞典)』에는 “잇키에 가담해 추방됐다”고 나와 있다.8 『한칸후』에는 에이로쿠 7년(1564) 2월 28일 여러 사찰의 문도가 죄를 용서받고 항복했을 때 마사노부는 미카와를 떠나 교토 쪽으로 갔다고 나와 있다.4 왜 떠났는지는 이 책에 없다. 스스로 떠난 것인지 추방인지 이번 조사로는 판정할 수 없다.
마사노부가 잇코슈, 곧 정토진종 신도였다고 소개하는 글은 흔하다. 『한칸후』에는 마사노부가 “대대로 잇코센주(一向專修)의 문도”였다고 나와 있다.4 잇코센주는 잇코슈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쿠세키는 이 서술의 근거를 밝히지 않았고, 『미카와 모노가타리』와 『간세이 조슈쇼카후』에는 같은 내용이 없다.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와 『세계대백과사전』 등 사전 5종에도 신도라는 문장이 없다. 일부 대중 해설의 “독실한 잇코슈 신자”는 출전이 없지만 이 서술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마사노부가 문도였다는 근거는 지금으로서는 그가 죽고 86년 뒤에 쓰인 이 서술 하나다. 잇키에 가담한 사실과 개인의 신앙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8
2. 방랑과 귀참, 사료가 갈리는 지점
2-1. 가가에서 돌아오기까지
마사노부가 가가에 머물렀다는 데까지는 『간세이 조슈쇼카후』에 나와 있다. 가가로 가기까지의 경로는 『한칸후』(1702)가 더 구체적이다. 이 책에는 잇키가 끝난 뒤 마사노부가 미카와를 떠나 먼저 교토 쪽으로 갔다고 나와 있다. 이어서 교토에서 마사노부를 본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도쿠가와 무사는 많이 보았으나 대부분 무용 일변도인데 마사노부만은 강하지도 부드럽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비상한 그릇”이라고 평했다는 일화가 나오는데, 그렇다면 혼다 마사노부는 이 시기 마츠나가 히사히데 밑에 있었던 것일까? 이를 의식했던 것인지 『한칸후』의 저자 하쿠세키는 곧바로 “마사노부가 마츠나가 밑에서 섬겼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는 주를 달았다.4
한국어판 위키백과와 일부 대중 해설에는 “마사노부가 마츠나가를 섬겼다”고 단정한 서술이 있고, 출전은 밝히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한칸후』에 실린 이 일화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단정의 근거가 되는 사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미카와 모노가타리』와 『간세이 조슈쇼카후』에는 이 이야기가 없고,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불명이라고 돼 있다. 『한칸후』에 나온 것은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마사노부를 보고 평했다는 일화뿐이다. 그리고 『한칸후』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가가에는 잇코 문도가 특히 많아서 미카와를 떠나온 마사노부를 맞이해 한쪽 방면군의 대장(一方の大將)으로 떠받들었다는 것이다.4 가가 잇키를 선동했다거나 노부나가와 싸웠다는 말은 이 항목에 나오지 않는다. 일부 해설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이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평했다.9 이런 이야기들이 하나둘 모여 미카와를 떠난 뒤 여러 곳을 떠돌며 단련된 책사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이번에 확인한 이야기들은 『한칸후』의 일화를 부풀린 것이거나 출전이 없는 이야기였다.
2-2. 돌아온 경위는 문헌마다 다르다
귀참(帰参, 주군을 떠났던 가신이 돌아와 다시 섬기는 일) 경위를 전하는 문헌은 세 가지다. 서로 겹치지 않는 부분이 많아 표로 정리해 본다.
| 항목 | 『미카와 모노가타리』(1620년대) | 『간세이 조슈쇼카후』(1812) | 『한칸후』(1702) |
|---|---|---|---|
| 귀참을 주선한 사람 | 오쿠보 타다요가 사죄를 올려 돌아오게 함 | 다카기 규스케 히로마사(高木九助廣正)를 통해 분부를 받아 다시 출사 | 중재자 언급 없음. 이에야스가 분부를 내려 마사노부를 불렀다고만 나옴 |
| 귀참 직후의 처우 | 먼저 타카죠(鷹匠, 매 사육 담당)로 삼고 뒤에 40석 지행(知行, 가신이 받는 영지·녹봉) | 매 사육 언급 없음. 측근이 되어 정무 논의에 참여 | 소환된 뒤 가가를 떠나 오쓰로 갔고, 혼노지의 변 때 이에야스의 귀환을 도왔다고 서술 |
| 귀참 시기 | 명시 없음 | 1570년 아네가와 전투 종군 기사가 있으나 귀참 시점을 직접 밝히지 않음 | 덴쇼 10년(1582) 봄, 다케다 멸망 뒤 이에야스의 분부로 소환 |
누가 중재했는지부터 기록이 갈리는데, 두 기록은 양립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오쿠보 타다요가 귀참을 주선하고, 다카기 히로마사가 이를 전달하는 식으로 두 사람이 모두 관여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서술을 아울러 설명한 사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귀참 연도도 1570년설과 1582년설이 병존하며, 두 설 모두 사후에 편찬된 문헌이 근거다. 마사노부의 귀참을 직접 다룬 학술 논문은 이번 조사에서 찾지 못했다.10
그런데 오쿠보 타다요가 마사노부를 돌보아 귀참시켰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 『미카와 모노가타리』가 어떤 목적으로 쓰였는지,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어떤 항목에 실려 있는지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세한 사정은 5-2절에서 본다.
2-3. 이가고에 활약설
혼노지의 변(1582) 직후 이에야스가 이가를 넘어 도망칠 때 당시 가신의 신분이 아니었던 마사노부가 우지의 간바야시 가문을 설득하고 다라오 미츠토시의 저택을 마련하는 등 이에야스를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서술은 『한칸후』에만 있다. 하쿠세키는 우지의 간바야시(上林) 가문 사람(峰順, 독음 미확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은 뒤 “이런 일들은 마사노부의 계략에 따른 것”이라고 맺었다.4 하지만 역사학자 와타나베 다이몬은 그만한 공이 있었다면 곧 지행이 주어졌을 텐데 이가고에 때 마사노부를 다룬 사료가 이것뿐이라며 큰 의문이 남는다고 평했다(필자 주: 큰 공이 있었다면 곧바로 영지를 받았을 텐데 그런 포상이 확인되지 않고, 이 일을 전하는 사료도 『한칸후』 하나뿐이라는 뜻이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확인된 당시의 수행원 34명 명단에 마사노부의 이름이 없다고 나와 있다.11
3. 이에야스의 측근에서 간토 1만 석까지 (1586–1602)
3-1. 1586년 사도노카미 서임
『간세이 조슈쇼카후』에는 덴쇼 14년(1586) 5월 마사노부가 종5위하 사도노카미에 서임됐다고 나와 있다.12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후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게 복속한 해에 히데요시의 추천으로 중신들이 서위·임관을 받았고, 그 대상에 마사노부도 들어 있었다. 와타나베 다이몬은 이를 근거로 마사노부가 중신으로 다시 자리 잡은 시점을 덴쇼 18년(1590)이 아니라 이 무렵으로 본다. 히데요시의 추천 명단에 이름이 오를 만큼 이에야스 진영 안에서 이미 중신으로 대우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3-2. 소재지가 정해지지 않는 1만 석
덴쇼 18년(1590) 오다와라 정벌 뒤 이에야스가 간토로 옮겨 갈 때 마사노부가 받은 영지는 1만 석이다. 『간세이 조슈쇼카후』와 『한칸후』가 일치하는 것은 또 이 석고 규모까지. 1만 석의 영지가 어디인지는 또 사료마다 다르다.
| 출전 | 소재지 |
|---|---|
| 『덴쇼 분겐초(天正分限帳)』(『간세이』 편자 안설) | 고즈케 야와타(上野国八幡, 현 군마현 일대) 1만 석 |
| 『한칸후』 본문 | 고즈케 야와타. 『이에타다 일기(家忠日記)』에는 사가미 아마나와(相模国甘縄, 현 가마쿠라 일대)라는 주석 |
| 어느 책(『간세이』 편자가 소개) | 가즈사 야와타(현 지바현) 5천 석, 또는 시모사 사쿠라(현 지바현) |
| 「칸코의 기록(官庫の記録)」(『간세이』 편자가 소개) | 사가미 아마나와 |
『간세이 조슈쇼카후』의 편자도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다”고 적어 두었다.13 여기저기 많이 나오는 「다마나와(玉縄)」 영지설은 두 사료의 본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온 답변에도 다마나와가 그의 영지였다는 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고 적혀 있을 정도다. 최종 석고는 『한칸후』에 “겨우 2만여 석”으로, 『간세이 조슈쇼카후』에 “이에 앞서 가은(加恩, 주군이 은상으로 영지를 더해 줌)이 있어 2만 2천 석”으로 나와 있다. 다만 인쇄본의 이 숫자는 판독이 불확실하고 가은의 시기도 두 사료 모두에 나오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 전장에서 공을 세운 지휘관인 도쿠가와 사천왕과 비교하면 영지 규모의 차이가 크다. 같은 시기인 1590년 기준 이이 나오마사는 12만 석, 혼다 타다카츠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각각 10만 석을 받았고, 사카이 가문은 타다츠구의 아들 이에츠구가 3만 석을 받았다. 그런데 같은 문치형 측근으로 훗날 히데타다의 토시요리가 되는 인물들과 비교하면 그리 박한 대우도 아니다. 같은 1590년에 사카이 타다요는 5천 석을 받았고, 도이 토시카츠는 이듬해에야 사가미에서 1천 석을 받았다.14
3-3. 간토의 제반 사무를 맡다
이에야스와 가신들이 간토로 영지를 옮긴 뒤 마사노부는 명을 받아 나이토 키요나리와 함께 “간토의 제반 사무”를 맡아 처리했다.15 게이초 7년(1602) 5월 사타케 요시노부의 영지가 몰수됐을 때는 오쿠보 타다치카와 함께 사타케 가문의 본거지였던 미토로 가서 그 땅을 다스릴 법도를 정했다. 흔히 이 시기 마사노부의 직함을 「간토 소부교(関東総奉行)」라고들 하는데 『간세이 조슈쇼카후』와 『한칸후』에는 이 직함이 등장하지 않는다. 『간세이 조슈쇼카후』에 간토의 제반 사무를 맡았다는 서술이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는 사료의 표현을 따른다.
4. 소영지, 큰 창구: 히데타다 곁의 토시요리와 다이묘 도리츠기
4-1. 이에야스의 구두 전언을 대신하다 (1600)
혼다 마사노부가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문서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잘 드러난다. 사나다 보물관(真田宝物館)이 공개한 사료집에 게이초 5년(1600) 7월 24일 이에야스가 쓴 서장이 있다. 수신자는 사나다 노부유키. 그의 아버지 마사유키(昌幸)와 동생 유키무라가 세키가하라를 앞두고 이에야스의 적인 서군 측에 서기 위해 우에다로 돌아간 뒤에도 노부유키만은 도쿠가와 쪽에 남은 것에 대해 이에야스가 칭찬하는 내용이다. 서장의 마지막 문장에 마사노부의 이름이 언급된다.16
なほ本多佐渡守申すべく候の間、具にするに能はず候。 자세한 것은 혼다 사도노카미가 말씀드릴 것이므로 여기서 세세히 적지 않습니다.
이에야스는 서장에 세부 사항을 다 적지 않고 마사노부가 입으로 전하게 했다. 마사노부는 중요 인물에게 이에야스의 구두 전언(口上)을 전하는, 신뢰받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해 세키가하라 때 마사노부의 위치는 문헌이 엇갈린다. 『미카와 모노가타리』에는 히데타다가 나카센도로 올라가다 우에다 성을 공격할 때 스물두 살이던 그를 돕도록 혼다 사도가 붙었고, 사도가 혼자 지휘하다 사나다에게 속아 이삼 일 늦게 합류했으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도의 퇴각술(繰引)“이라며 비웃었다고 나와 있다.17 반면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마사노부가 우츠노미야에서 히데타다군을 떠나 에도로 돌아가 간토 영지의 관리와 정보 전달을 맡았다는 서술이 있다. 이 문장에는 각주가 없고 근거로 든 호시나 마사미츠(保科正光)의 서장도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다. 학계가 두 서술의 충돌을 어떻게 정리하는지도 이번 조사로는 알아내지 못했다. 일단은 두 가지 상반되는 이야기를 나열하는 정도로 넘어가려 한다.
4-2. 다이묘와 막부를 잇는 창구
사나다 보물관에는 마사노부가 사나다 노부유키에게 보낸 게이초 16년(1611) 6월 13일자 서장의 원문이 있다. 6월 4일 사나다 마사유키가 유배지 구도야마에서 죽자 노부유키가 아버지의 조문을 하고 싶다며 마사노부에게 상담한 데 대한 회신이다.18
御親父様、高野に於いて御遠行の儀、是非に及ばざる御事に候。然らば、貴公御弔ひ成されたきの由、示し預り候。尤の御事に候へ共、公儀御憚りの仁に候の間、御諚を得させられ候はでは如何の儀に候の条、…その上御赦免に於いては、御弔成され然るべく候はんかと存じ奉り候。 부친께서 고야에서 별세하신 일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공께서 조문을 하고 싶다고 알려 오셨습니다. 지당한 말씀이나 (마사유키는) 막부가 꺼리는 사람이므로 (쇼군의) 지시를 얻지 않고서는 어떨까 싶습니다. … 그 뒤 사면이 내리면 조문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화압(花押)이 있는 마사노부 개인의 회신이며 연서장(連署状, 여러 사람이 함께 서명한 서장)이 아니다. 이를 보면 다이묘인 사나다 노부유키가 막부와 관련된 일을 결정하기 전에 마사노부에게 먼저 묻고, 마사노부가 막부의 심중을 헤아려 조언을 한다. 이 서장만으로도 이 시기 마사노부가 다이묘와 막부 사이의 뜻을 전하는 연락책, 곧 도리츠기(取次)를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는 우에스기 가문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반대편에 선 대가로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아이즈 120만 석에서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줄었고, 가신의 지행도 3분의 1이 됐다. 2009년 혼다 도시히코(本多俊彦)의 논문에는 이 시기 마사노부의 역할이 이렇게 나와 있다.19
政重の父である本多正信は関ヶ原合戦後、幕府と上杉家とのパイプ役を務め、慶長14年(1609)にはその建言によって幕府からの10万石の軍役免除を獲得、翌年の将軍徳川秀忠の上杉家桜田邸御成でも全面的に支援する 마사시게의 부친 혼다 마사노부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막부와 우에스기 가문 사이의 통로 역할을 했고, 게이초 14년(1609)에는 그의 건의로 막부에서 10만 석의 군역 면제를 얻어냈으며, 이듬해 쇼군 히데타다가 우에스기 가문의 사쿠라다 저택을 방문했을 때도 전면적으로 지원했다.
마사노부가 막부와 우에스기 가문 사이에서 군역 면제를 얻어 내는 등 중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 위 논문에서 언급된 마사노부의 차남 마사시게가 1604년 우에스기 가신 나오에 카네츠구의 사위로 들어간 일을 두고, 카네츠구가 막부 중추의 마사노부에게 다가가려는 목적이었다는 해석도 있다.20
마지막으로 세키가하라에서 반대편에 섰던 시마즈 가문에 대한 사면에도 혼다 마사노부가 깊게 관여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시기 시마즈 가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이에야스 쪽의 담당자는 하타모토(도쿠가와 가문 직속 가신)에 속한 야마구치 나오토모(山口直友)였다. 마사노부의 서장이 시마즈 가문 문서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사면이 끝나고 몇 해 뒤인 게이초 11–12년(1606–07) 무렵부터이기 때문에, 그가 시마즈 가문의 사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근거는 이번 조사에서 찾지 못했다.21
4-3. 에도와 슨푸를 잇는 사람 (1603–1616)
이에야스가 1603년 쇼군이 되고 1605년 히데타다에게 자리를 넘긴 뒤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실권은 오고쇼(大御所, 물러난 전 쇼군)가 된 이에야스에게 있었다. 어린 시절 지내던 슨푸로 거처를 옮긴 이에야스와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의 히데타다가 나뉘어 있던 이 시기 사정은 『한칸후』에 가장 자세하게 나온다.22 이 책에는 히데타다가 조정에서 쇼군에 임명된 뒤 마사노부는 간토의 집사(執事, 정무를 총괄하는 측근)로서 쇼군가를 따르고, 아들 마사즈미는 오고쇼의 집사로서 슨푸에 있으며 부자가 나란히 천하의 권력을 잡았다고 나와 있다. 『간세이 조슈쇼카후』에는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에도에 오거나 사냥터에 있을 때 마사노부가 밤낮없이 곁에 있었고 “국정을 맡은 것 17년”이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건강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 혼다 마사노부 부자의 권력 분담을 문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후현 역사자료관이 소장하고 있는 연서장이다.23 이 연서장은 오사카 여름 진 5개월 뒤인 10월 9일(연호는 겐나 원년, 1615)에 히데타다 쪽 토시요리 넷, 그러니까 안도 시게노부·사카이 타다토시·사카이 타다요·혼다 마사노부가 함께 서명해 슨푸의 혼다 마사즈미와 안도 나오츠구에게 보낸 것이다. 오사카 여름 진이 끝난 뒤, 교토의 치안을 맡은 막부 관리(교토 쇼시다이) 이타쿠라 카츠시게가 도요토미 가문 가신들의 영지를 몰수해도 되는지 물어 왔다. 연서장은 그 서면을 슨푸에 보내니 오고쇼의 뜻을 받아 이타쿠라에게 서둘러 회신해 달라는 내용이다. 에도의 히데타다가 누군가를 통해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허락을 구한 기록이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인데 양쪽에 혼다 마사노부 부자가 한 명씩 들어가 있는 것이다.
다만 혼다 마사노부가 언제부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토시요리가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게이초 12년(1607)으로 나오지만 다른 자료에는 1603년, 1605년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쉽게도 『간세이 조슈쇼카후』와 『한칸후』에는 정확한 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로주(老中)」라는 명칭도 보다 후대인 간에이 연간 이후에 정착한 것이어서 마사노부 시대의 직함은 토시요리로 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에도와 슨푸를 오가는 중재자 역할을 하던 말년에는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도쇼구 고짓키 부록』 24권이 『부케 칸단(武家閑談)』을 인용한 이야기다. 이에야스가 사냥터에 새끼줄이 쳐져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이런 걸 허락했느냐고 묻자 수하들이 “아오야마 타다나리와 나이토 키요나리가 허락했습니다”라고 답했고 이에야스가 크게 노했다. 히데타다가 두 사람을 처형해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려고 하자, 마사노부가 슨푸로 가서 “저도 이제 늙어서 그들처럼 작은 과오로 처형당할지 모르니 에도의 직을 반납하고 이쪽에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아뢰었고, 이를 들은 이에야스의 노기도 가라앉았다고 한다.24 후대 일화집을 재인용한 것이라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렇게 양쪽을 오가며 중재하는 이미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소개한다.
4-4. 가증을 사양했다는 이야기
마사노부가 가증(加増, 영지를 늘려 줌)을 사양했다는 일화도 있다. 확인되는 가장 이른 기록은 『한칸후』다. 이에야스가 영지를 더 주려 하자 마사노부가 “젊을 때도 활과 칼로 이렇다 할 공명이 없었고 나이도 기울었다. 군국의 대비로는 무사를 기르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내려 주실 몫으로 용력 있는 무사들을 채워 주시고 저는 마음 편히 늙게 해 달라”며 굳게 사양했다는 내용이다.25
마사노부의 사양이 순수한 겸양인지, 아니면 이에야스의 마음을 읽고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무렵 이에야스가 “공적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새 영지를 주지 말라”고 했다는 『도쇼구 고짓키 부록』의 기록(『스루가 미야게(駿河土産)』 재인용)이 있어 가증 억제가 정권 차원의 재정 방침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1896년판 『한칸후』의 머리주에는 히데타다가 3만 석 가증을 제안하자 마사노부가 작은 단지를 꺼내 “다이묘들의 정치에 관여하다 보니 선물과 금백을 받는 것이 실로 많아 따로 녹이 없어도 집안일에 부족함이 없다”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지만 이 머리주에는 출전 표기가 없다. 아들에게 “3만 석까지만 받고 그 이상은 받지 말라”고 훈계했다는 이야기는 『한칸후』 본문에 없고, 일본어 위키백과가 인용한 현대 서적 한 권(사카모토 도시오(坂本俊夫), 2011)에만 나와서 원출전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로만 소개한다. 여하튼 혼다 마사노부의 영지가 그가 죽을 때까지 2만 석대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석고 기록으로 확인된다.
5. 벗과 간신, 엇갈린 이미지의 출처
5-1. “벗처럼”이라는 서술
“이에야스와 마사노부는 주종이라기보다 벗 같은 사이였다”는 이미지는 에도 시대 편찬물에 거듭 나온다. 『도쇼구 고짓키 부록』 19권 「혼다 마사노부의 모의(謀議)」 항목은 이렇게 시작한다.26
本多佐渡守正信は帷幄の謀臣たり、君また正信を見給ふ事、朋友のごとくにて、台徳院殿には長者をもて優待せさせ給ふ、正信常に君をよびたてまつりて大殿といひ、台徳院殿をば若殿と称したてまつる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는 장막 안의 모신이었다. 이에야스는 마사노부를 벗과 같이 대했고, 히데타다는 연장자로서 우대했다. 마사노부는 늘 이에야스를 오도노(大殿), 히데타다를 와카도노(若殿)라 불렀다.
이 항목의 말미에는 출전이 『한칸후』로 표시돼 있고, 『한칸후』 원문에도 같은 표현(「朋友の如くにて」)이 나온다.4 『간세이 조슈쇼카후』도 마사노부 항목 말미에서 두 사람의 사이를 “군신의 사이는 물과 물고기 같았다(君臣の間相遇こと水魚のごとし)“고 표현했다. 현대 사전류도 이를 이어받아, 이에야스와 마사노부가 주종이라기보다 마음을 아는 친구 같았음을 엿보게 하는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고 정리한다(다카기 쇼사쿠 집필,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다만 “벗”은 이에야스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편찬자의 표현이다. 이 서술들이 실린 책도 가장 이른 『한칸후』(1702)가 마사노부 사후 86년 뒤의 것이다. 뒤에서 살펴볼 부정적인 이미지가 그가 죽고 10년 남짓 뒤에 쓰인 『미카와 모노가타리』에서 나온 것과 대조적이다.
5-2. 오쿠보 가문이 남긴 악역
『미카와 모노가타리』에 나오는 혼다 마사노부는 이와 정반대의 이미지다. 이 책의 저자인 오쿠보 타다타카(통칭 히코자에몬)는 오쿠보 타다요의 동생이다. 타다타카는 이 글을 집안 내부에서만 대대로 보기 위한 목적으로 썼고, 그렇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에 “문 밖으로 내지 말라(門外不出)“고 못 박아 두었다. 이 책에서 마사노부가 나오는 곳은 세 군데다. 잇코잇키 사건 뒤에 미카와를 떠난 사람들의 명단, 우에다 성에서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속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하권 끝의 항목인 「의심스러운 일(不審)」이다.27
마사노부가 귀참한 이야기는 이 「의심스러운 일」 항목에 나온다. 1614년 타다요의 아들 타다치카가 개역되자 세간에서 “혼다 사도가 오쿠보 사가미(타다치카)를 밀어냈다”는 소문이 돌았고, 타다치카의 숙부인 타다타카가 이 항목을 쓴 것이다. 타다타카는 처음에 “사도가 사가미를 밀어냈다는 것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라며 소문을 부정하고, 그 근거로 마사노부가 오쿠보 집안에 입은 은혜를 열거한다. 그렇게 열거된 은혜에는 마사노부가 미카와를 떠나 있는 동안 그의 처자식에게 소금·된장·땔감까지 대 준 일, 이에야스에게 사죄를 올려 돌아오게 한 일, 먼저 타카죠로 삼고 뒤에 40석 지행을 받게 해 준 일, 매년 섣달그믐 밥과 정월 밥을 타다요의 집에서 먹게 한 일이 들어 있다.28 그러다 조금 뒤에는 “상인과 백성까지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의심스럽지만 알 수 없다”고 흔들린다. 그리고 이렇게 맺는다.
佐渡は三年もすごさずして顔にたうがさを出かして、方顔くづれて奥歯の見えければ其儘死、子にて有上野守は御改易被成て出羽之国ゆりへながされて、…面斗は人々にて、霊魂はちくしやうに有物哉。 사도는 3년도 지나지 않아 얼굴에 토가사(唐瘡, 매독)가 나 얼굴 한쪽이 무너져 어금니가 보이는 채로 죽었고, 아들 마사즈미는 개역되어 데와 유리로 유배되었다. … 겉모습만 사람이고 영혼은 짐승 같구나.
마사노부는 타다치카 개역(1614) 2년 뒤에 죽었으니 “3년이 못 되어”는 대체로 맞는다. 아들 마사즈미의 개역(1622)까지 알고 쓴 글임이 본문에서 드러난다. 「토가사」는 매독을 가리키는 옛말인데, 마사노부가 실제로 매독을 앓았다는 기록은 없어 저주에 가까운 묘사로 읽는 것이 맞다. 이 문장들은 마사노부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오쿠보 가문이 몰락한 뒤 상대의 말로를 인과응보로 엮은 글이다.
위에서 말한 오쿠보 가문이 마사노부에게 베푼 은혜가 거짓이라는 증거는 없다. 문제는 이 은혜가 마사노부가 오쿠보 가문을 모함했다는 소문을 반박하는 글 안에서 열거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연결된 귀참 과정도 확인해 주는 사료로 그대로 쓰기가 애매하다.
5-3. 무공파의 멸시 발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마사노부를 “창자가 썩은 놈(腸の腐った奴)“이라 했고, 혼다 타다카츠는 “사도의 겁쟁이(佐渡の腰抜け)“라며 “같은 혼다라도 그놈과는 무관하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대중서와 웹에 널리 퍼져 있다. 이 발언의 출전을 다시 확인했다. 『미카와 모노가타리』 전문과 『도쇼구 고짓키 부록』 25권 전문에서 원문 검색을 했지만 「창자가 썩은」도, 「사도의 겁쟁이」도 나오지 않는다.29
당시 무장들이 실제로 혼다 마사노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멸시 발언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5-4. 『혼사로쿠』는 그가 쓴 책인가
마사노부에게는 치국론을 쓴 사상가라는 이미지도 있는데, 이 이미지는 『혼사로쿠(本佐録)』에서 나왔다. 『간세이 조슈쇼카후』의 마사노부 항목에는 “일찍이 치국을 논한 글 7조를 지어 바쳤다(かつて治国のことを論せし書七条をしるしてたてまつる)“는 구절과 함께 “세상에서는 이를 혼사로쿠라 부른다(世にこれを本佐録と称す)“는 주가 붙어 있다.30 『간세이 조슈쇼카후』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혼사로쿠』다.
그러나 현재 학계는 이 책을 다른 사람이 마사노부의 이름을 빌려 쓴 위서(偽書)로 판정한다. 근거는 이렇다. 마사노부의 비명(하야시 라잔 지음, 1649)과 『간에이 쇼카 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에 『혼사로쿠』 언급이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677년 하야시 가호가 옮겨 적은 것인데 서명이 『혼몬슈(本聞集)』이고 마사노부가 썼다는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다. 이 책을 마사노부가 쓴 것이라고 처음 명시한 관찬 기록이 『간세이 조슈쇼카후』인데, 『간세이 조슈쇼카후』가 나오기 이전 시대의 사람들도 『혼사로쿠』를 혼다 마사노부가 썼는지 의심한 기록이 있다. 예를 들면 다니 가키모리(谷垣守)의 1731년 사본에는 아들 마시오(真潮)의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은 아마 혼다 성을 쓰는 사람(마사노부)의 말이 아닐 것”이라는 주기가 있다.
6. 오쿠보 타다치카 실각과 세 사건
6-1. 실각의 경과
마사노부와 관련된 이야기 중 가장 악명 높은 일화는 오쿠보 타다치카의 실각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마사노부와 마사즈미 부자가 정적 타다치카를 몰아냈다는 이야기다. 먼저 사료로 확인되는 사건의 경과를 살펴보자. 아래는 『슨푸키(駿府記)』, 『도다이키(当代記)』 등을 인용한 일본어 위키백과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며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음을 밝혀 둔다.31
- 게이초 16년(1611) 10월 타다치카의 적자 타다츠네가 병사했다.
- 게이초 18년(1613) 1월 야마구치 시게마사가 막부 허가 없이 타다치카의 양녀를 아들에게 시집보냈다는 이유로 개역됐다. 타다치카는 이시카와 이에나리가 미리 알렸으므로 따로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변명했다.
- 같은 해 4월 오쿠보 나가야스가 죽고 7월에 아들 7명이 할복했다.
- 12월 이에야스가 사가미 나카하라까지 왔다가 13일 갑자기 에도로 돌아갔다. 『슨푸키』에는 이유가 이듬해 매사냥으로, 『도다이키』에는 도이 토시카츠가 히데타다의 사자로 온 것과 낭인 바바 하치자에몬이 타다치카의 모반을 고발한 것으로 나와 있다.
- 12월 19일 타다치카는 기리시탄 추방을 위해 교토에 올라갔고 게이초 19년(1614) 1월 19일 교토 쇼시다이 이타쿠라 카츠시게가 이에야스의 사자로 와서 개역을 통고했다.
- 오다와라 성은 본마루만 남기고 헐렸고 타다치카는 오미에 유배돼 5천 석을 받았다.
개역 이유로 『슨푸키』에는 무단 혼인이 나오고, 『도다이키』에는 여기에 바바의 고발이 더해져 있지만 바바를 불초한 자로 보아 허언으로 처리돼 있다. 일본의 백과사전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의 「오쿠보 타다치카」 항목(이리모토 마스오 집필)에는 표면상 이유는 무단 혼인이지만 실제로는 마사노부 및 그 배후에 있던 이에야스의 슨푸 정권과의 갈등,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과의 연관, 도요토미 가문과의 가까운 관계 같은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고 나와 있다.
6-2. 음모설이 나온 경로
마사노부 부자의 음모설이 처음 나온 곳부터 따라가 본다. 일본어 위키백과 「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忠隣)」 항목에는 이 견해가 에도 시대부터 있었고 『도쿠가와 짓키(徳川実紀)』도 이를 지지하지만 당시 사료 가운데 이를 언급한 것은 없다고 나와 있다. 같은 위키백과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大久保長安事件)」 항목의 정리에 따르면 『슨푸키』와 『도다이키』보다 나중에 편찬된 『게이초 넨로쿠(慶長年録)』에 “타다치카와 마사노부의 불화로 마사노부가 나가야스 사후 이에야스에게 참소했다”는 기술이 있고, 이것이 『도쿠가와 짓키』로 이어졌다. 동시대 일기인 두 책에는 이 내용이 없다. 『게이초 넨로쿠』의 성립 시기와 저자는 확인하지 못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서장에 “타다치카 개역으로 마사노부의 권세가 이전의 10배가 됐다”는 평이 있다는 것도 자주 인용된다. 이 서장은 연월일과 수신자를 확인하지 못했다. 설령 원문이 그대로라 해도 세간이 마사노부를 수혜자로 보았다는 증거일 뿐 그가 획책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미카와 모노가타리』의 서술은 앞 장에서 본 대로 소문을 부정하다가 흔들린다.
6-3. 세 사건과 마사노부의 이름
| 사건 | 통설 | 사료로 확인되는 것 | 마사노부 |
|---|---|---|---|
|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1612) | 마사즈미 부자의 지위가 흔들려 타다치카를 몰아낼 동기가 됐다 | 다이하치는 마사즈미의 가신. 아리마 하루노부에게 옛 영지 회복을 주선하겠다며 거짓 약속하고 은을 편취, 다이하치는 화형, 하루노부는 유배 뒤 참수 | 사건 서술에 등장하지 않음. 동기설은 2차 해석 |
|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1613) | 마사노부의 참소 | 나가야스는 4월 25일 병사, 7월 9일 아들 7명 할복. 초기 일기 두 종에 마사노부의 관여 기술 없음 | 참소 서술은 후대 『게이초 넨로쿠』에서 처음 나옴 |
| 호코지 종명 사건(1614) | 마사노부가 흑막 | 스루가에서 가타기리 카츠모토를 만난 이에야스 측 상사는 마사즈미와 콘치인 스덴 | 사건 서술에 등장하지 않음. 「흑막」의 1차 근거 없음 |
오카모토 다이하치를 마사노부의 요리키(与力)라고 하는 해설도 있으나 다이하치의 상관은 마사즈미다.32 오사카 전투 때 마사노부가 이에야스 곁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기록은 게이초 20년(1615) 4월 22일 니조성 군의에 마사즈미와 함께 참석했다는 것 정도다. 겨울 진 강화 교섭의 실무는 마사즈미와 아차노츠보네가 맡았다.
정리하면, 마사노부가 오쿠보 타다치카를 몰아냈다는 이야기는 동시대 사료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개역을 이에야스가 결정하고 그의 사자가 통고했다는 사실이며, 마사노부가 그 결정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관여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근거도 없지만, 그를 음모의 주모자로 그리는 이야기는 모두 후대 서술이거나 아들 마사즈미가 한 일이 그에게 덮어씌워진 것이다. 이 시기 두 사람에 대해 사료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에도 정권의 토시요리 동료였다는 사실 정도다.
7. 만년과 죽음, 그리고 두 아들
7-1. 이에야스가 죽고 49일 뒤
이에야스는 겐나 2년(1616) 4월 17일에 죽었다. 마사노부가 죽은 것은 그해 6월 7일이다. 양력으로는 6월 1일과 7월 20일이니 정확히 49일 뒤다. 『한칸후』에는 이것이 “겨우 50일(纔かに五十日)“로 나온다.33 흔히 쓰는 「두 달 뒤」는 부정확하고 약 7주가 맞다. 『간세이 조슈쇼카후』에는 “2년 6월 7일 죽었다. 나이 79. 법명은 善徳納誨院. 교토의 혼간지에 장사 지냈다”고 나와 있다.
사인과 임종 때의 유언을 전하는 사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노쇠로 인한 큰 왕생」이라는 웹 기사의 서술에는 근거 표시가 없고 이에야스를 따라간 듯하다는 표현도 사료의 뒷받침이 없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이에야스 사후 가독(家督, 가문의 당주 지위)을 마사즈미에게 넘기고 은거했다”는 서술도 『간세이 조슈쇼카후』와 『한칸후』에는 없다. 마사즈미는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608년에 이미 오야마의 독립 다이묘였으니, 아버지가 은거하며 가독을 넘겼다는 이야기도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34
묘소는 확정되지 않았다. 일본어 위키백과 인포박스에도 묘소는 불명으로 나온다. 『간세이 조슈쇼카후』의 “교토의 혼간지에 장사 지냈다”가 유일하게 사료에 나오는 서술인데 현재 마사노부의 묘라고 할 만한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아이치현 안조시(옛 미카와, 오카자키 서쪽) 노데라초(野寺町)의 혼쇼지에는 에도 중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공양탑이 있고, 이를 묘라고 소개하는 곳도 있다. 안조시 교육위원회 자료에는 유골이 아사쿠사 도쿠혼지에 있으나 존경의 뜻으로 답례해 이곳에 남겼다고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사찰 측 구전이다.35 혼쇼지는 1563년 미카와 잇코잇키의 거점이던 절이다. 『한칸후』에는 마사노부가 대대로 잇코센주의 문도였다고 나오지만, 이 절과 직접 이어진다는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다.
7-2. 마사즈미: 15만 5천 석에서 유배지까지
장남 마사즈미(正純, 1565–1637)는 아버지와 함께 슨푸의 이에야스 곁에서 막부의 핵심 측근으로 활약했고, 마사노부가 죽은 뒤에도 겐나 5년(1619) 우츠노미야 15만 5천 석까지 올랐다. 이대로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부의 중심에 계속 남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사노부가 죽고 6년 뒤인 겐나 8년(1622), 데와에 출장 갔다가 「고칸키(御勘気, 주군의 노여움을 산 처분)」로 개역돼 데와 유리로 유배됐다. 마사즈미는 그곳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간에이 14년(1637) 요코테에서 죽었다.36
이 몰락은 흔히 「우츠노미야 츠리텐조(釣天井) 사건」으로 설명된다. 마사즈미가 우츠노미야 성에 천장이 떨어지는 장치를 만들어 히데타다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칸후』에서 아라이 하쿠세키는 이 소문을 “흔적도 없는 일”이라고 부정했다.37 마사즈미 몰락의 실제 원인으로는 히데타다의 불신과 도이 토시카츠 등 히데타다 측근의 대두를 드는 견해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버지 시대의 신하를 아들 시대의 신하가 대체하는 그림이랄까.
7-3. 마사시게: 여러 주군을 거쳐 가가번 5만 석
차남 마사시게(政重, 1580–1647)의 인생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젊은 시절 사람을 죽이고 도쿠가와 가문을 떠난 뒤 우키타 히데이에, 후쿠시마 마사노리, 마에다 도시나가, 우에스기 가문의 나오에 카네츠구 밑을 차례로 옮겨 다녔고, 게이초 16년(1611) 가가번 마에다 가문에 5만 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가가번 가신 가운데 최고 녹봉이었다.38
의외로 혼다 마사노부의 가문은 이 차남의 혈통을 통해 이어졌다. 가가 혼다 가문은 가가번 최고 가신으로 메이지까지 이어졌고, 12대 당주는 남작이 되었다.
출처
1차·준1차 사료 (편찬 시기 명시)
-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 — 오쿠보 타다타카, 1620년대 성립. 위키문헌 전사본(国民文庫刊行会 『잣시슈(雑史集)』 1912) 원문 대조
-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 1812년 완성, 막부 편찬 계보서. 第4輯(國民圖書 1923)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스캔 이미지 판독(OCR 병용, 판독이 불확실한 글자는 본문에서 표시)
- 『한칸후(藩翰譜)』 — 겐로쿠 15년(1702) 아라이 하쿠세키. 巻十一 「혼다」 항(1896 吉川半七판,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58–59번째 컷) 스캔 이미지를 직접 판독
- 『도쇼구 고짓키 부록(東照宮御実紀附録)』(『도쿠가와 짓키(徳川実紀)』) — 19세기 중반 막부 편찬. 위키문헌 전사본 원문 대조. 안에 재인용된 『부케 칸단(武家閑談)』·『스루가 미야게(駿河土産)』은 이 부록을 통해서만 확인
- 「혼다 마사노부 서장(本多正信書状)」(1611.6.13 사나다 노부유키 앞), 「도쿠가와 이에야스 서장(徳川家康書状)」(1600.7.24 사나다 노부유키 앞) — 사나다 보물관 사료집 번각문
- 「에도 막부 토시요리슈 연서장(江戸幕府年寄衆連署書状)」(겐나 원년 10월 9일) — 기후현역사자료관 번각문과 이미지
- 『다이니혼코몬조 시마즈가 문서 5(大日本古文書 家わけ第十六 島津家文書之五)』 — 도쿄대학사료편찬소 공식 해설(각 서장 원문 미열람)
- 『슨푸키(駿府記)』·『도다이키(当代記)』·『게이초 넨로쿠(慶長年録)』·『우에스기가 고넨푸(上杉家御年譜)』·『우메즈 마사카게 일기(梅津政景日記)』·호소카와 타다오키 서장·『가가번사료(加賀藩史料)』 — 위키백과와 논문을 통한 재인용, 원문 미열람
현대 연구자·논문·언론
- 혼다 도시히코(本多俊彦), 「혼다 마사시게 가신단의 기초적 고찰(本多政重家臣団の基礎的考察)」 『다카오카 법과대학 기요(高岡法科大学紀要)』 20호(2009), J-STAGE 원문 확인
- 혼다 다카시게(本多隆成), 「시마즈씨의 사면과 혼다 마사노부(島津氏の赦免と本多正信)」 『일본역사(日本歴史)』 930호(2025.11) pp.47–55, 「혼다 마사노부의 대두(本多正信の台頭)」 『시즈오카켄 치이키시 켄큐(静岡県地域史研究)』 15호(2025.9) pp.22–43. 서지만 확인
- 야마모토 신코(山本眞功), 『위서 『혼사로쿠』의 생성(偽書『本佐録』の生成)』(平凡社選書, 2015). 출판사 소개문만 확인
- 무라오카 미키오(村岡幹生) 2023, 야마모토 히로후미(山本博文) 2004·2007, 후쿠다(福田三男) 2012, 사카모토 도시오(坂本俊夫) 2011, 阿部哲人 2009 — 모두 위키백과의 인용을 통한 재인용, 원저 미열람
- 와타나베 다이몬(渡邊大門), 야후 뉴스 전문가 기고 3건. 森岡浩, 야후 뉴스 기고 1건
공식·표준 참고자료
- 오카자키 관광 공식 사이트(okazaki-kanko.jp) 사카이 가문 소개
-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브리태니커 국제대백과사전(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항목,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忠隣)」 항목(이리모토 마스오(煎本増夫) 집필). 모두 코토뱅크(https://kotobank.jp) 수록본
-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 「혼다 마사시게(本多政重)」 「혼다씨(本多氏)」 「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忠隣)」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大久保長安事件)」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岡本大八事件)」 「호코지 종명 사건(方広寺鐘銘事件)」 「오사카 전투(大坂の陣)」 「혼사로쿠(本佐録)」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 「미카와 잇코잇키(三河一向一揆)」 「우츠노미야성 츠리텐조 사건(宇都宮城釣天井事件)」 「로주(老中)」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등
- 영어판 위키백과 「Honda Masanobu」(사망일의 양력 환산)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 「다마나와는 예전에 혼다 마사노부의 영지였다는데 사실인가(玉縄はかつて本多正信の所領だったというが本当か)」
- 가가 혼다 박물관 공식 사이트 「가가 혼다가의 역사·명품(加賀本多家の歴史・名品)」
- 안조시 교육위원회 「미래 데라코야 4(未来寺子屋4)」 자료(2020)
- CiNii Research 서지 데이터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 도검월드(touken-world.jp) 「혼다 마사노부: 역사상의 실력자」 — 마사노부를 “독실한 일향종 신자”로 소개하나 출전이 없음을 확인하는 용도로만 참조
- 歴人マガジン(rekijin.com), ttj.paiza.jp — 「창자가 썩은 놈(腸の腐った奴)」 등 발언이 출전 없이 실려 있음을 확인하는 용도로만 참조
확인하지 못한 것
- 마사노부를 주제로 한 학술 평전 단행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 CiNii 제목 검색에서 확인되지 않았다(소설과 대중서만 있다).
- 혼다 다카시게의 논문 두 편과 안도(安藤弥)의 「혼다 마사노부와 정토진종(本多正信と浄土真宗)」(『도카이 부쿄(東海仏教)』 69호, 2024)은 서지만 확인했고 초록·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한칸후』의 마사노부 항 이외 부분, 『게이초 넨로쿠(慶長年録)』·『슨푸키(駿府記)』·『도다이키(当代記)』 원문, 마사노부 발급 서장의 총수와 전체 소장처는 열람하지 못했다.
- 세키가하라 때 마사노부의 행적을 학계가 어떻게 정리하는지, 마사노부의 이름으로 발급된 연서장·봉서가 오쿠보 타다치카 사건이나 오사카 전투 국면에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 마사노부의 이름이 처음 나오는 동시대 문서(초견 문서)와 귀참 시기를 직접 다룬 학술 논문은 찾지 못했다.
- 한국어판 위키백과 항목은 각주가 없고 일부 서술(매 사육, 마츠나가 종사, 묘소)이 일본어판과 어긋난다. 한국어 학술 논문 가운데 마사노부 단독 연구는 확인하지 못했다.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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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第4輯 巻第六百九十三 本多(藤原氏兼通流) 正信 항(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pid/1082713/1/362). ↩
-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俊正 항. 계통 구분은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씨(本多氏)」와 森岡浩의 야후 뉴스 기고(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0661975e2c88fc7dc6962475116fd6f4b143b060)를 따랐고 계보 자체가 확실하지 않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
-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正信 항.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 잇키 농성 명단은 위키문헌(https://ja.wikisource.org/wiki/三河物語) 원문 대조. ↩
-
『한칸후(藩翰譜)』 巻十一 「혼다(本多)」 항(1896 吉川半七판,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https://dl.ndl.go.jp/pid/780525/1/58 · https://dl.ndl.go.jp/pid/780525/1/59). 스캔 이미지를 직접 판독했고 인용문은 신자체를 현대 한자로 옮겼다. 우지 간바야시 가문 사람의 이름 峰順은 독음을 확정하지 못했다. ↩ ↩2 ↩3 ↩4 ↩5 ↩6 ↩7
-
사카이 쇼겐이 우에노 성주 사카이 타다나오라는 점은 오카자키 관광 공식 사이트(https://okazaki-kanko.jp/feature/ieyasu-retainer/top)의 사카이 가문 소개와 와타나베 다이몬의 야후 뉴스 엑스퍼트 기고(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16f449b6aaf5f9108f17d40f0c6bdff4e977cce7)로 확인했다. 와타나베의 평은 “~결탁한 듯하다”는 헤지가 붙은 해석이며 원사료의 직접 증거는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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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 잇키 진압 뒤 서술(위키문헌 원문). 동생의 이름은 正重으로 아들 政重과 독음이 같아 이 글에서는 통칭 산야(三弥)로 적었다.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에는 도시마사의 넷째 아들로 나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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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미카와 잇코잇키(三河一向一揆)」의 소개(村岡幹生 「에이로쿠 미카와 잇키의 전개 과정(永禄三河一揆の展開過程)」 『전국기 미카와 마츠다이라씨 연구(戦国期三河松平氏の研究)』 岩田書院, 2023, pp.410–411). 원저 미열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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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월드 「혼다 마사노부: 역사상의 실력자(本多正信-歴史上の実力者)」(https://www.touken-world.jp/tips/44332/). 사전 모음 사이트 코토뱅크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https://kotobank.jp/word/本多正信-135136)에서 열람한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일본인명대사전(日本人名大辞典)』·『브리태니커 국제대백과사전(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야마카와 일본사 소사전(山川日本史小辞典)』 항목을 대조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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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히사히데를 섬겼는지는 불명). 渡邊大門, 야후 뉴스 기고(https://news.yahoo.co.jp/expert/articles/16f449b6aaf5f9108f17d40f0c6bdff4e977cce7). 단정한 서술의 예: 한국어판 위키백과 「혼다 마사노부(1538년)」(출전 표기 없음), 웹 기사 Japaan(https://mag.japaaan.com/archives/194311, 출전 표기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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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正信 항,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 하권. 1582년설은 『한칸후(藩翰譜)』(渡邊大門의 소개)와 코토뱅크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의 브리태니커 국제대백과 요약(https://kotobank.jp/word/本多正信-135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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渡邊大門의 기사(앞의 각주 8과 같음),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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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正信 항.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渡邊大門의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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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NDL 1082713 p.707), 『한칸후(藩翰譜)』 巻十一(https://dl.ndl.go.jp/pid/780525/1/59).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레퍼런스 협동 데이터베이스(https://crd.ndl.go.jp/reference/entry/index.php?id=1000204885&page=ref_view). 『간세이후(寛政譜)』의 「2만 2천 석(二万二千石)」은 1923년 인쇄본의 판독이 불확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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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 「사카이 타다요(酒井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利勝)」. 수치는 위키의 각 항목에 인용된 것이고 원사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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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正信 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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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보물관 사료집 「게이초 5년(1600) 7월 24일 사나다 노부유키 앞 도쿠가와 이에야스 서장(慶長5年(1600)7月24日 真田信之宛徳川家康書状)」(https://museum.umic.jp/sanada/siryo/sandai/090302.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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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 하권 우에다 성 공방 부분(위키문헌 원문).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우츠노미야 이탈 서술, 각주 없음).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마사노부가 공격 중지를 진언하지 않았다고 돼 있지만, 『미카와 모노가타리』 원문에는 사도가 혼자 지휘를 맡았다가 사나다에게 속았다는 서술만 있고 진언 이야기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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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보물관 사료집 「게이초 16년(1611) 6월 13일 사나다 노부유키 앞 혼다 마사노부 서장(慶長16年(1611)6月13日 真田信之宛本多正信書状)」(https://museum.umic.jp/sanada/siryo/sandai/100102.html). 번역은 직역 위주이며 「부자분(御父子様)」가 이에야스·히데타다를 가리킨다는 해석은 문맥에 따른 추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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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多俊彦 「혼다 마사시게 가신단의 기초적 고찰(本多政重家臣団の基礎的考察)」 『다카오카 법과대학 기요(高岡法科大学紀要)』 20호(2009) p.33(https://www.jstage.jst.go.jp/article/takahokiyo/20/0/20_KJ00005852879/_pdf/-char/ja). 논문이 근거로 든 『우에스기가 고넨푸(上杉家御年譜)』 제3권은 열람하지 못했다. ↩
-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시게(本多政重)」. 阿部哲人 「에도 막부와 나오에 카네츠구: 두 아들(江戸幕府と直江兼続―二人の息子と―)」을 근거로 든 서술이며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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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사료편찬소 『다이니혼코몬조 시마즈가 문서 5(大日本古文書 家わけ第十六 島津家文書之五)』 해설(https://www.hi.u-tokyo.ac.jp/publication/syoho/51/pub_komonjo-iewake-16-05/). 혼다 다카시게(本多隆成)의 「시마즈씨의 사면과 혼다 마사노부(島津氏の赦免と本多正信)」(『일본역사(日本歴史)』 930호, 2025년 11월, 47–55쪽)와 「혼다 마사노부의 대두(本多正信の台頭)」(『시즈오카켄 치이키시 켄큐(静岡県地域史研究)』 15호, 2025년 9월, 22–43쪽)는 서지만 확인했고 본문은 구하지 못했다. CiNii 서지(https://cir.nii.ac.jp/crid/1520024578350351616, https://cir.nii.ac.jp/crid/1520871070986882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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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칸후(藩翰譜)』 巻十一(https://dl.ndl.go.jp/pid/780525/1/59),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正信 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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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현역사자료관 「에도 막부 토시요리슈 연서장(江戸幕府年寄衆連署書状)」(https://www.pref.gifu.lg.jp/page/350585.html, 번각문 PDF https://www.pref.gifu.lg.jp/uploaded/attachment/386639.pdf). 연호 겐나 원년은 해설 페이지의 표기이고 번각문에는 「10월 9일(十月九日)」만 있다. 토시요리 취임 연도는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로주(老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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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쇼구 고짓키 부록(東照宮御実紀附録)』 巻廿四(https://ja.wikisource.org/wiki/東照宮御実紀附録/巻廿四), 출전 표기 『부케 칸단(武家閑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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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칸후(藩翰譜)』 巻十一 본문과 1896년판 머리주(https://dl.ndl.go.jp/pid/780525/1/59). 『도쇼구 고짓키 부록(東照宮御実紀附録)』 巻十二(출전 표기 『스루가 미야게(駿河土産)』). 「3만 석 훈계」는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이 인용한 坂本俊夫 『우츠노미야번·다카토쿠번(宇都宮藩・高徳藩)』(現代書館, 2011) p.14. ↩
-
『도쇼구 고짓키 부록(東照宮御実紀附録)』 巻十九(https://ja.wikisource.org/wiki/東照宮御実紀附録/巻十九),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正信 항, 코토뱅크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의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高木昭作 집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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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 하권(위키문헌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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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 하권 「의심스러운 일(不審)」 항(위키문헌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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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腰抜け)」는 『미카와 모노가타리』에 이에야스가 창을 잃은 무사들에게 한 말로 한 번 나올 뿐 마사노부와는 관계가 없다.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타다카츠」 항목의 해당 서술에도 각주가 없고, 2023년 대하드라마 대사로 소개된 사례가 있지만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와 『도쇼구 고짓키 부록(東照宮御実紀附録)』 전문 검색(위키문헌).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 발언이 출전 없이 실린 예는 歴人マガジン(https://rekijin.com/16988.html), 드라마 대사로 소개한 예는 https://ttj.paiza.jp/archives/2023/07/29/9833/. ↩
-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正信 항. 일본어 위키백과 「혼사로쿠(本佐録)」(참고문헌으로 『국사대사전(国史大辞典)』 『일본사대사전(日本史大事典)』 『일본역사대사전(日本歴史大事典)』을 든다). 야마모토 신코(山本眞功) 『위서 『혼사로쿠』의 생성(偽書『本佐録』の生成)』(헤이본샤, 2015) 소개(https://www.heibonsha.co.jp/book/b210458.html). 반대로 무로 규소는 1725년 서문에서 기노시타 준안과 아라이 하쿠세키가 마사노부의 작이 틀림없다고 했다고 전했고, 후지와라 세이카가 마사노부의 청으로 지었다는 이야기는 하야시 가호의 발문에 나오는 집안 전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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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忠隣)」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大久保長安事件)」 「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長安)」. 코토뱅크 「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忠隣)」(https://kotobank.jp/word/大久保忠隣-39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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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岡本大八事件)」 「호코지 종명 사건(方広寺鐘銘事件)」 「오사카 전투(大坂の陣)」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 니조성 군의 참석은 일본어 위키백과 「오사카 전투(大坂の陣)」 항목에 따른 것이며 원사료명은 확인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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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칸후(藩翰譜)』 巻十一 본문(https://dl.ndl.go.jp/pid/780525/1/59), 『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正信 항. 양력 날짜는 영어판 위키백과 「Honda Masanobu」의 기재(1616.7.20)와 이에야스 사망일(4월 17일=6월 1일)로 계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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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正純 항(https://dl.ndl.go.jp/pid/1082713/1/363).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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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묘소 불명, 혼쇼지 공양탑). 안조시 교육위원회 「미래 데라코야 4 다시 보는 혼쇼지의 매력 체험 투어(未来寺子屋4 あらためて本證寺の魅力体験ツアー)」(https://www.city.anjo.aichi.jp/shisei/shisetsu/kyoikushisetsu/documents/miraiterakoyakawaraban4.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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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正純 항(https://dl.ndl.go.jp/pid/1082713/1/363).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오야마 영지 연도, 묘비의 사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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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칸후(藩翰譜)』 巻十一(https://dl.ndl.go.jp/pid/780525/1/62, https://dl.ndl.go.jp/pid/780525/1/63). 일본어 위키백과 「우츠노미야성 츠리텐조 사건(宇都宮城釣天井事件)」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山本博文 『江戸城の宮廷政治』 講談社学術文庫 2004, 『お殿様達の出世』 新潮選書 2007, 福田三男 2012 인용). 몰락의 정치적 원인은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즈미」가 야마모토 히로후미(山本博文)의 정리를 인용한 것이며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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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세이 조슈쇼카후(寛政重脩諸家譜)』 政重 항. 本多俊彦 논문. 가가 혼다 박물관(http://honda-museum.jp/history-gallery/). 일본어 위키백과 「혼다 마사시게(本多政重)」 「혼다 당주 本多政均(독음 미확인)」 「혼다 당주 本多政以(독음 미확인)」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 마사시게의 녹봉은 혼다 도시히코 논문의 원사료 인용을 따랐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재출사 뒤 단계적 가증으로 5만 석에 이르렀다고 나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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