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마키·나가쿠테 합전도 병풍. 산과 들판에서 기마 무사들이 맞붙은 장면이 그려져 있다(작자 미상, 18세기, 도요타시 향토자료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코마키·나가쿠테 전투(1584) —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맞붙은 단 한 번의 전쟁

Q: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는 어떤 전쟁인가?

A: 덴쇼 12년(1584) 3월부터 11월까지 오와리(尾張, 현 아이치현 서부)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쟁이다. 한쪽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고 다른 쪽은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와 그 동맹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노부나가 사후 오다 가문의 중신들이 모인 기요스 회의를 통해 노부나가의 손자 산보시(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의 아들)가 후계로 정해진 상황에서 오다 가문의 주도권을 두고 히데요시와 노부카츠가 대립하던 중, 3월 6일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자기 가로(家老, 다이묘 가문의 최고위 가신) 세 명을 죽이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4월 9일 나가쿠테에서 히데요시가 보낸 별동대가 무너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 부자와 모리 나가요시(森長可)가 하루에 전사했다. 그 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와의 결전을 피하면서 노부카츠의 영지를 하나씩 빼앗았고, 11월 이를 버티다 못한 노부카츠가 이에야스와 별도로 히데요시와 화의를 맺으면서 전쟁은 끝났다. 이에야스는 차남 오기마루를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냈고 이후 히데요시에게 신종(臣従)했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적으로 맞선 것은 이 전쟁 한 번뿐이다.

한눈에 보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항목내용
명칭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일본에서는 코마키·나가쿠테 합전(合戦)이라고도 한다
기간덴쇼 12년(1584) 3월 6일 ~ 11월 11일(강화)
주 무대오와리 북부(코마키산·가쿠덴·이누야마), 나가쿠테, 오와리 서부·미노 서부, 북이세
연동 전선기이·이즈미(사이카·네고로), 엣추·노토(삿사 나리마사), 시코쿠(조소카베), 간토(호조 대 사타케)
하시바 측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츠네오키, 모리 나가요시, 호리 히데마사, 미요시 노부요시(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츠구), 하시바 히데나가, 가모 우지사토 등
오다·도쿠가와 측오다 노부카츠,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카이 타다츠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 이시카와 카즈마사 등
병력하시바 측 약 10만, 연합군 약 3만이라고 전한다. 히데요시가 직접 이끌고 온 본대는 약 3만
대표 전투하구로(3.17), 나가쿠테(4.9), 다케가하나성 수공(5–6월), 가니에성(6.16–7.3)
나가쿠테 전사이케다 츠네오키, 그 장남 이케다 모토스케, 모리 나가요시
결과노부카츠 단독 강화(이가와 남이세 할양, 인질 제출). 이에야스 차남 오기마루가 히데요시의 양자(인질)로 감
사적국가 사적 「코마키산(小牧山)」(1927 지정), 「나가쿠테 고전장(長久手古戦場)」(1939 지정)

이 블로그는 지금까지 사카이 타다츠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를 한 사람씩 다루면서 코마키·나가쿠테를 그때마다 조금씩 이야기했다. 하구로의 기습, 히데요시를 격노시켰다는 격문, 류센지 강가의 대치, 붉은 갑옷 부대의 첫 실전이 모두 이 전투와 관련된 일화들이다. 이번에는 인물을 다루는 글에서 파편적으로만 다뤘던 이 전투를 주인공으로 하여 시간순으로 파악해 보고자 한다.

이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나가쿠테 전투는 4월 9일 하루의 일이지만 전쟁은 그 뒤로 일곱 달을 더 갔다. 이 글은 나가쿠테 하루를 가장 자세히 다루되, 그 앞의 한 달과 뒤의 일곱 달, 그리고 끝나고 나서 이 전쟁이 어떻게 기억됐는지까지 추적해 보려 한다.

1. 전쟁의 발단 — 노부나가의 아들과 노부나가의 가신

1-1. 혼노지 이후 2년

1582년 6월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천하 통일을 눈앞에 뒀던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적남 노부타다가 갑작스럽게 함께 죽었다. 뒤이어 열린 기요스 회의에서 노부나가의 후계는 세 살배기 손자 산보시(三法師)로 정해졌고,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와 삼남 노부타카는 산보시의 후견인 자리를 두고 다퉜다. 이듬해 4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히데요시가 시바타 카츠이에를 무너뜨렸고, 곧이어 노부타카도 자결하면서(4월 29일 또는 5월 2일) 오다 가문 안에서 남은 실력자는 히데요시와 노부카츠 둘이 됐다.

흰 예복을 입고 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뒤로 소나무를 그린 병풍이 서 있다.
전 가노 미츠노부,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화(豊臣秀吉像)」(1601년경). 고다이지 소장, 퍼블릭 도메인.

외견상 노부카츠는 주가(主家)인 오다 가문 소속이고, 히데요시는 그 가문을 섬기는 가신이었다. 문제는 시즈가타케 이후 히데요시가 한 일이었는데, 역사학자 히라야마 유(平山優)는 두 사람의 대립이 시즈가타케 직후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오다의 가신이었던 시바타 가문의 영지를 몰수하고 옛 오다 가신들에게 새로 지행(知行, 주군이 가신에게 내려 주는 영지와 그 수입)을 나눠 주는 일은 원래 오다 가문의 당주가 갖고 있는 권한인데 히데요시가 이것을 독단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1

히라야마는 2024년에 낸 『코마키·나가쿠테 합전(小牧・長久手合戦)』에서 이 전쟁의 본질을 “히데요시 대 이에야스”가 아니라 “히데요시 대 노부카츠”로 본다. 오다 가문과 노부나가 시대의 가신 사이에서 누가 주도권을 쥘 것인가가 걸린 싸움이었고, 오다의 가신이 아니라 동맹이었던 이에야스는 단순히 노부카츠의 동맹자로 참전했다는 해석이다.1 이 글도 이 구도를 따라간다. 전쟁이 끝나는 방식도 이 구도로 보면 설명이 된다.

1-2. 3월 6일, 나가시마성의 세 가로

덴쇼 12년(1584) 3월 6일, 노부카츠는 나가시마성으로 가로 세 명을 불러 죽였다. 노부카츠의 본거지는 오와리 기요스성이었지만 이때는 이세의 나가시마성(長島城)에 머물고 있었다. 오카다 시게타카(岡田重孝), 츠가와 요시후유(津川義冬), 아사이 나가토키(浅井長時)다. 죄목은 히데요시와 내통했다는 혐의였고 이 사건이 히데요시에게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졌다.2

처형당한 세 사람이 실제로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섰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히데요시가 노부카츠의 가로 세 명에게 화해를 제안하는 접촉을 했고 그것이 이들이 히데요시 측이라는 소문으로 번졌다는 설명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동시대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2 어찌 됐든 노부카츠가 자신의 가로 세 명을 제거했고, 그 직후 이에야스가 군을 움직인 것은 사실이다.

이에야스와 노부카츠 사이의 접촉은 1583년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세 가로의 처형 사건 이전에 노부카츠와 이에야스 두 사람이 참전을 약속했는지는 사료로 확정되지 않는다. 날짜로 확인되는 것은 3월 13일이다. 이날 이에야스가 노부카츠의 거성이던 오와리 기요스성(清須城)에 들어갔고, 이튿날 노부카츠와 작전 회의를 열었다는 서술이 있다.3 같은 날 밤, 이케다 츠네오키가 먼저 움직였다.

2. 이누야마·하구로·코마키산 — 3월의 전쟁

2-1. 이케다 츠네오키의 선택

이케다 츠네오키는 노부나가의 유모였던 요토쿠인(養徳院)의 아들로, 노부나가와 함께 자란 사이였다. 기요스 회의에 참석한 네 명의 슈쿠로(宿老, 가문의 원로급 중신) 가운데 한 명이었고 당시 미노 오가키성(大垣城)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오다 가문과의 인연으로 보면 노부카츠 편에 설 것으로 여겨질 만한 인물이었고, 이누야마성(犬山城) 공식 해설에도 츠네오키는 “노부카츠 편으로 여겨지던” 인물로 나와 있다.4 히데요시가 츠네오키에게 승리하면 오와리 지방 전체를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 약속을 담은 문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갑옷을 입고 접이의자에 앉아 군배를 든 이케다 츠네오키의 초상화.
가노 나오노부, 「이케다 츠네오키 초상화(池田恒興画像)」(에도 시대). 퍼블릭 도메인.

그 츠네오키가 3월 13일 밤 이누야마성을 기습해 빼앗았다. 장남 모토스케(元助), 사위 모리 나가요시가 함께였다. 성주 나카가와 사다나리(中川定成)는 노부카츠군에 합류하러 이세에 가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4 이누야마는 기소가와(木曽川)를 끼고 오와리와 미노를 잇는 요지라, 개전 첫 주 만에 히데요시 측은 오와리 북부로 진입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 셈이었다.

2-2. 하구로 — 도쿠가와군의 첫 승리

츠네오키에 호응해 모리 나가요시가 미노 가네야마성(金山城)에서 남하했다. 나가요시는 노부나가의 측근 모리 란마루의 형으로, 성격이 거칠고 용맹해 “오니무사시(鬼武蔵)“로 불렸다. 3월 16일 나가요시는 이누야마 남쪽 하구로(羽黒)에 진을 쳤다.

도쿠가와 쪽은 이 움직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16일 밤 사카이 타다츠구·마츠다이라 이에타다(松平家忠)·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信昌) 등이 약 5,000명으로 알려진 병력을 이끌고 조용히 하구로로 진군해 17일 새벽 모리군을 쳤다. 나가요시는 처음에 오쿠다이라의 선봉을 밀어냈으나 마츠다이라 이에타다의 철포대에게 측면을 공격당했고 뒤이어 사카이 타다츠구가 후방으로 돌아 들어오자 무너졌다.5 모리군 약 3,000에 사상자 300여라는 수치가 널리 쓰이지만 그 출전은 확인되지 않는다. 사카이 타다츠구가 이 싸움에서 한 역할은 사카이 타다츠구 편에서 자세히 다뤘다.

2-3. 코마키산의 토루

하구로 전투 다음 날부터 이에야스는 코마키산(小牧山)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코마키산은 노부나가가 1563년 성을 쌓고 4년 동안 거성으로 쓰다 버린 해발 86m 남짓의 구릉이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공사를 맡아 산기슭을 두르는 해자와 이중 토루를 쌓고 출입구(고구치, 虎口)를 새로 고쳤다고 전한다. 이에야스는 3월 28일 기요스에서 코마키산으로 본진을 옮겼고(3월 15일이나 29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9일에는 오다 노부카츠도 합류했다.3

이 당시의 공사 흔적은 발굴로도 확인됐다. 코마키시 교육위원회가 발굴한 산 동쪽 기슭에서는 노부나가 시대의 무가 저택 구획 해자와 우물이 나왔는데, 이것들이 1584년 이에야스가 쌓은 토루 밑에 깔려 있었다. 노부나가가 쓰던 저택 터를 메우고 그 위에 토루를 올린 것이다. 남쪽 기슭의 복원 토루는 높이가 약 8m에 이른다.6 하나의 산에 노부나가의 성과 이에야스의 진지가 층을 이루고 있다.

코마키산 일대의 성곽 토루와 해자를 그린 옛 지도. 오른쪽 위에 「가스가이군 코마키촌 고성도 도쿠가와가 소장(春日井郡小牧村古城繪圖 徳川家所蔵)」이라고 적혀 있다.
「가스가이군 코마키촌 고성도(春日井郡小牧村古城繪圖)」(도쿠가와가 소장). 후대 도면이라 1584년 당시 모습과는 다르다. 퍼블릭 도메인.

히데요시는 3월 21일 약 3만을 이끌고 오사카를 떠나 27일 이누야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코마키산 북동쪽 가쿠덴(楽田)에 본진을 두고 니주보리(二重堀)·이와사키야마(岩崎山)·코마츠데라야마(小松寺山) 등에 요새를 줄지어 쌓았다.3 이에야스 쪽도 코마키산에서 동쪽으로 요새를 이어 맞섰다. 양쪽이 흙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대치가 이렇게 시작됐다.

2-4. 병력 규모 10만 대 3만이라는 수치의 출처

이 전쟁을 소개할 때 “히데요시 10만 대 연합군 3만”이라는 숫자가 거의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수치는 “그렇게 전한다” 수준의 전승치이고 어느 사료에서 나왔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코마키시 자료에는 히데요시 본대가 약 3만으로 나와 있다.3 10만이 무엇을 합친 숫자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본대 3만에 이세·기이 등 각지 병력을 모두 더한 총동원 규모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연합군 쪽도 1만 5천에서 3만까지 자료마다 폭이 크다.7

하시바 쪽이 병력에서 크게 앞섰다는 것, 그리고 수적으로 우세했던 하시바군의 병력이 코마키산 앞의 흙벽을 넘지 못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양쪽은 큰 싸움 없이 요새만 늘렸다. 이 지루한 교착상태를 깨고자 했던 시도가 4월의 미카와 공격이다.

3. 미카와 나카이리 — 누가 이 작전을 짰나

3-1. 통설 — 츠네오키가 조르고 히데요시가 마지못해 허락했다

4월 6일 밤부터 7일에 걸쳐, 가쿠덴의 하시바 진영에서 2만 안팎의 별동대가 남동쪽으로 빠져나갔다. 목표는 코마키산의 이에야스가 아니라 그 뒤, 이에야스의 본국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였다. 적의 주력이 한곳에 묶여 있을 때 그 뒤로 병력을 돌려 본거지를 치는 작전을 일본어로 나카이리(中入り)라고 한다. 이 작전은 “미카와 나카이리(三河中入り)“로 불린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다. 하구로에서 사위 나가요시가 망신을 당하자 이케다 츠네오키가 설욕을 겸해 미카와를 치자고 히데요시에게 거듭 건의했고 히데요시는 위험하다며 망설이다가 결국 허락했다. 이 작전은 이후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이에 대한 책임은 히데요시가 아니라 무리하게 조른 츠네오키에게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헌책 이야기는 에도 초기의 『호안 다이코키(甫庵太閤記)』에 실린 것으로 소개되며, 메이지 시대 참모본부의 전사 연구도 이 통설을 따랐다.8

3-2. 히데요시의 4월 8일 서장

이 통설에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은 역사학자 이와사와 요시히코(岩澤愿彦)다. 그는 히데요시가 4월 8일, 곧 별동대가 출발한 뒤이자 나가쿠테 전날에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에게 보낸 서장을 검토하고, 미카와 공격은 츠네오키가 억지로 밀어붙인 계획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구상하던 작전을 츠네오키가 그 뜻을 헤아려 진언한 것이라고 보았다. 다니구치 히사시(谷口央)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작전의 주도권이 처음부터 히데요시에게 있었고 구키(九鬼) 수군까지 동원하는 수륙 양면 작전으로 계획됐다고 해석했다.8

두 해석의 근거가 된 것은 전투 전날 히데요시 자신이 쓴 편지이고 통설의 근거는 수십 년 뒤의 편찬물이다. 사료의 성립 시기만 보면 히데요시가 이 작전을 주도했다는 쪽이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다만 이 서장의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고,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가 완전히 정리됐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은 “츠네오키가 제안했다”는 통설을 사실로 쓰지 않고 히데요시 주도설이 유력하게 제기돼 있다는 정도에서 이야기를 맺으려 한다. 대중 해설 가운데는 실패한 작전의 책임이 전사해 세상에 없는 츠네오키에게 뒤집어씌워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8

3-3. 네 부대의 편성

별동대는 네 부대였다. 이 편성은 자료들이 공통으로 전한다.9

진대장신분·관계4월 9일 결과
1진이케다 츠네오키, 장남 모토스케, 차남 테루마사노부나가의 유모 요토쿠인의 아들. 선봉이와사키성을 함락시킨 뒤 부츠가네에서 츠네오키·모토스케 전사(테루마사는 생존)
2진모리 나가요시츠네오키의 사위. 하구로에서 패한 장수부츠가네에서 전사
3진호리 히데마사(堀秀政)노부나가 측근 출신. “명인 큐타로”로 불림히노키가네에서 추격군을 물리친 뒤 후퇴, 병력 보존
4진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히데요시의 누나의 아들(훗날의 하시바 히데츠구). 명목상 총대장, 당시 17세하쿠산바야시에서 기습당해 패주

총병력은 약 1만 6천에서 2만 5천까지 자료마다 다르다. 히데요시의 4월 8일 서장에 2만 4천에서 2만 5천이 적혀 있다고 소개된 적이 있고 나가쿠테시 자료는 약 2만을 제시한다.9 흔히 인용되는 부대별 병력(이케다 6천, 모리 3천, 호리 3천, 노부요시 8천 등)은 어느 사료에서 나왔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구성 자체는 분명하다. 앞의 두 부대는 이케다 가문과 그 사위였고 맨 뒤에 히데요시의 조카가 총대장으로 뒤따랐다.

이에야스는 이 움직임을 곧 알아챘다. 8일 저녁 이에야스는 코마키산에 일부 병력을 남기고 남쪽 오바타성(小幡城, 현 나고야시 모리야마구)으로 나아갔다. 별동대 뒤를 쫓을 선발대로 미즈노 타다시게(水野忠重)·니와 우지츠구(丹羽氏次)·오스가 야스타카(大須賀康高)·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먼저 떠났다.10

4. 4월 9일 나가쿠테 — 하루 동안 벌어진 네 번의 싸움

나가쿠테 전투는 하나의 싸움이 아니라 반나절 사이에 서로 몇 킬로미터씩 떨어진 곳에서 잇달아 벌어진 네 번의 교전이다. 아래 시각은 나가쿠테시 등 지자체 해설과 후대 정리에 의존한 것이고 동시대 기록과 대조한 것은 아니다. “그 시간 무렵” 정도로 감안해서 보자.10

시각(전승)장소내용
새벽 4시경이와사키성이케다 부대가 공격 개시, 7시경 함락
새벽 4시 반경하쿠산바야시쉬고 있던 노부요시 부대가 도쿠가와 선발대에 기습당해 무너짐
오전히노키가네호리 히데마사가 추격해 온 도쿠가와 선발대를 격퇴한 뒤 물러남
오전 10시경 ~ 정오 무렵이로가네야마 남쪽, 부츠가네 일대이에야스 본대와 이케다·모리 부대의 결전. 츠네오키·모토스케·나가요시 전사

4-1. 이와사키성 — 열여섯 살 수비대장

별동대의 선봉 이케다 부대가 처음 부딪친 것은 미카와로 가는 길목의 이와사키성(岩崎城, 현 닛신시)이었다. 성주 니와 우지츠구는 이에야스를 따라 코마키에 나가 있었고 동생 니와 우지시게(丹羽氏重)가 성을 지켰다. 우지시게는 열여섯 살이었다. 새벽 4시경 시작된 공격에 성은 7시경 떨어졌고 우지시게는 전사했다.11

선봉인 이케다 부대가 성 하나를 점령한 건 좋지만 문제는 세 시간 동안 그 자리에 묶여 있어야 했다는 것이고, 그 사이 맨 뒤에 있던 4진이 기습을 당했다.

4-2. 하쿠산바야시 — 총대장의 패주

거의 같은 시각, 별동대의 맨 뒤를 따르던 노부요시 부대는 하쿠산바야시(白山林, 현 오와리아사히시·나가쿠테시 경계)에서 쉬며 아침을 먹고 있었다. 여기를 도쿠가와 선발대가 덮쳤다. 뒤에서 미즈노 타다시게·니와 우지츠구·오스가 야스타카가, 옆에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들이쳤고 노부요시 부대는 버티지 못하고 흩어졌다.10

노부요시가 말을 잃고 달아나던 장면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지나가던 가니 사이조(可児才蔵)에게 말을 빌려 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고, 가신 키노시타 토시마사(木下利匡)가 자기 말을 내주어 겨우 빠져나갔다. 말을 내준 토시마사는 형 키노시타 스케히사(木下祐久)와 함께 그 자리에서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12 이 일화가 어느 책에서 처음 나오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나가쿠테시 아라타(荒田)에는 토시마사를 기리는 무덤 「카게유즈카(勘解由塚)」가 남아 있다. 카게유는 토시마사의 통칭(카게유자에몬, 勘解由左衛門)에서 딴 이름이다.

4-3. 히노키가네 — 추격군을 물리친 호리 히데마사

패보를 들은 3진 호리 히데마사는 앞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가나레가와(香流川) 남쪽의 히노키가네(桧ヶ根) 고지에 진을 쳤다. 그리고 하쿠산바야시에서 이긴 기세로 쫓아온 오스가·사카키바라의 선발대를 가까이 끌어들인 뒤 한꺼번에 철포를 쏘아 물리쳤다. 이와사키성 함락을 빼면, 이날 하시바 쪽이 야전에서 거둔 승리는 이것 하나뿐이다.13

푸른 깃발 아래 갑주를 입고 앉은 호리 히데마사를 그린 니시키에.
우타가와 요시이쿠, 「태평기영용전 호리 큐타로 히데마사(太平記英勇伝 堀久太郎秀政)」(막말). 후대에 그린 상상 초상화, 도쿄도립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그런데 호리는 그 승리를 이어가지 않았다. 멀리 이에야스 본대의 금빛 부채 우마지루시(馬印)이 보이자 불리하다고 판단해 병력을 거두고 북쪽으로 물러났다. 앞에 있던 이케다·모리 부대는 그대로 이에야스 본대와 맞서게 됐다. 이 판단을 두고 적과 아군이 모두 칭찬했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이케다와 모리를 버린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13 적과 아군의 칭찬이라는 이야기의 당대 출전은 확인되지 않는다. 호리 부대가 살아서 돌아갔고 앞의 두 부대는 그러지 못했다는 결과는 확인된다.

4-4. 부츠가네 — 두 시간의 결전

이에야스 본대는 오바타성에서 나와 이로가네야마(色金山)에 올랐다. 이에야스가 산 위의 큰 돌에 걸터앉아 군의를 열었다는 전승이 있고 그 돌은 「쇼기이시(床几石)」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10 이에야스는 여기서 가나레가와를 건너 후지가네(富士ヶ根)에서 부츠가네(仏ヶ根)에 걸친 언덕에 진을 쳤다. 이와사키성을 떨어뜨리고 되돌아온 이케다 부대와 모리 부대가 그 앞을 막아 섰다.

결전은 오전 10시경 시작돼 두 시간 남짓 이어졌다고 전한다.10 이이 나오마사가 이끄는 붉은 갑옷 부대, 이른바 아카조나에(赤備え)가 처음 대규모 실전에 나선 싸움으로 흔히 이야기되는데, 이이 부대의 구체적인 배치와 교전 상대는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다(아카조나에의 성립과 이 싸움은 이이 나오마사 편 참조).

결과는 하시바 쪽 별동대의 궤멸이었다. 모리 나가요시는 도쿠가와 쪽 철포에 미간을 맞아 즉사했다. 쏜 사람으로는 스기야마 마고로쿠(杉山孫六)의 이름이 가장 많이 거론되지만 가시와바라 요베에(柏原与兵衛)라는 설도 있고 마고로쿠가 이이 부대 소속인지 미즈노 부대 소속인지도 자료마다 다르다.14 이케다 츠네오키는 도쿠가와 가신 나가이 나오카츠(永井直勝)의 창에 쓰러졌고 장남 모토스케도 같은 싸움터에서 안도 나오츠구(安藤直次)에게 죽었다고 전한다.14 츠네오키는 마흔아홉, 나가요시는 스물일곱이었다.

갈색 예복 차림으로 앉은 나가이 나오카츠 초상화.
「나가이 나오카츠 초상화(永井直勝像)」. 나가이지 소장, 퍼블릭 도메인.

4-5. 사상자 수와 이에야스의 보고

전사자는 하시바 쪽 약 2,500, 오다·도쿠가와 쪽 약 590이라는 수치가 가장 자주 보인다. 그러나 이 숫자가 어느 사료에서 나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15

동시대 문서 가운데 구체적인 숫자를 기록한 것은 의외로 이에야스 본인의 편지다. 이에야스는 전투 당일 가신 히라이와 치카요시(平岩親吉)·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에게 편지를 보냈다(도쿠가와 미술관 소장). 이 편지에 이케다 모토스케와 모리 나가요시 등 “1만여 명을 베었다”는 문구가 있다고 소개되지만, 그 문구는 확인되지 않는다.15 다른 여러 기록에 따르면 별동대 전체가 2만 안팎이었고, 이 중 상당수가 살아 돌아갔다고 하니 이 숫자는 그대로 믿기 어렵다. 전쟁 중의 승전 보고는 아군의 사기와 동맹 세력의 마음을 붙잡기 위한 목적도 있는 만큼, 이에야스가 이 승리를 크게 알릴 필요를 느꼈다는 것은 확인된다.

4-6. 히데요시가 달려왔을 때

가쿠덴의 히데요시는 한낮 무렵 패보를 들었다. 곧장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 류센지(龍泉寺, 현 나고야시 모리야마구)까지 나왔지만, 별동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이미 오바타성으로 물러나 있었다. 결국 둘 사이의 결전은 벌어지지 않았고 이에야스는 이튿날 코마키산으로 돌아갔으며 히데요시도 가쿠덴으로 물러났다.16

이 국면에 대해서는 도쿠가와 쪽 기록에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들이 많이 있다. 코마키산에 남아 있던 혼다 타다카츠가 500명 남짓으로 히데요시 대군의 부대 아래를 밀고 지나 오바타성의 이에야스와 합류했다는 이야기, 개전 무렵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히데요시를 비난하는 격문을 뿌렸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 블로그의 인물편에서 각각 출전을 따져 본 결과를 표로 모으면 이렇다.

일화가장 이른 출전사건 후판단
혼다 타다카츠가 500명 남짓으로 히데요시 부대 앞을 지나 이에야스와 합류, 적과 아군이 모두 칭찬『미카와 모노가타리(三河物語)』(1622)38년도쿠가와 가신이 쓴 기록. 요지는 받아들일 만함
타다카츠가 류센지 강에서 말 입을 씻기고, 히데요시가 눈물을 흘리며 쏘지 말라고 함『도쿠가와 짓키(徳川実紀)』(1843)259년후대에 덧붙은 장면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격문, 히데요시가 그 목에 10만 석을 걸었다는 이야기『한칸후(藩翰譜)』(1701–1702)약 118년실물·사본 없음. 후대 창작설이 유력
이이 나오마사 부대의 첫 대규모 실전여러 해설의 공통 서술—참전 자체는 받아들여짐. “아카오니” 별칭의 최초 기록은 미확인

상세한 검토는 혼다 타다카츠 편과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편에 있다.17 이 일화들을 제외하더라도 4월 9일은 전체 판도에서 큰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하시바 쪽 별동대 네 부대 가운데 둘은 대장을 잃었고, 하나는 총대장이 말을 잃고 도망쳤으며, 남은 하나만 제 발로 돌아갔을 정도로 큰 패배를 당한 것이다. 코마키산 앞에서 한 달 가까이 움직이지 않던 전쟁이 이날 하루 사이에 크게 한 번 흔들렸다.

사슴뿔 투구를 쓴 혼다 타다카츠와 가토 기요마사가 말 위에서 창을 겨누는 세 폭 니시키에
요슈 치카노부, 「코마키 전투: 가토 기요마사와 혼다 타다카츠」(메이지 시대). 두 사람의 대결은 화가가 구성한 장면이다. 국립국회도서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5. 나가쿠테에서 죽은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

5-1. 모리 나가요시의 유언장 — “딸은 의사 같은 사람에게”

모리 나가요시는 나가쿠테로 떠나기 전에 유언장을 남겼다. 날짜는 덴쇼 12년 3월 26일로, 하구로에서 진 지 9일 뒤이자 전사하기 14일 전이다. 이 문서는 지금 나고야시 박물관(名古屋市博物館)에 소장돼 있다.18

박물관의 소개에 따르면 나가요시는 이 유언장에서 동생에게 절대 뒤를 잇게 하지 말고 집안 여자들은 무가와 먼 곳에 몸을 의탁하게 하라고 당부했다.18 전해지는 조항들은 더 구체적이다. 가지고 있던 이름난 다도구는 히데요시에게 바치라고 했다. 센마루(千丸)는 지금처럼 히데요시 곁에서 봉공하게 하고 가네야마성을 잇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딸 오코(おこう)는 교토의 초닌(町人)에게 시집보내되, 의사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적었다.18

“오니무사시”로 불리던 무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부탁은 가족이 무사의 세계에서 벗어나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박물관은 이 유언장을 “비토 토모노부(尾藤知宣) 앞”으로 표기하지만, 미야모토 요시미(宮本義己)는 실제 수신자가 아내 이케다 씨이고 비토는 중개 역할이었다고 본다. 원본인지 사본인지는 박물관이 밝히지 않았다.18 결과적으로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센마루는 훗날의 모리 타다마사(森忠政)로, 형의 뒤를 이어 모리 가문을 이끌었다.

5-2. 이케다 가문 — 적의 사위가 된 아들

이케다 츠네오키와 장남 모토스케가 같은 날 죽으면서 이케다 가문은 차남 테루마사(輝政)가 이었다. 히데요시는 츠네오키의 어머니 요토쿠인에게 편지를 보내 두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앞으로 자신을 츠네오키로 여겨 달라고 하면서 테루마사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했다고 소개된다.19 이 편지의 정확한 날짜와 소장처는 확인되지 않는다. 테루마사는 미노 오가키 13만 석의 영지를 이었고, 이듬해에는 같은 규모를 유지하며 기후성(岐阜城)으로 영지를 옮겼다.20

숲속 바위 위에 세워진 이케다 츠네오키(쇼뉴)의 전사지 석비.
이케다 츠네오키 전사지 쇼뉴즈카. 사진: 立花左近, CC BY-SA 3.0.

10년 뒤인 분로쿠 3년(1594), 히데요시의 주선으로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차녀 도쿠히메(督姫)와 혼인했다. 아버지와 형을 죽인 군대의 총대장이 장인이 된 것이다. 이후 테루마사는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 측에 섰고, 그 공으로 하리마 히메지(姫路) 52만 석을 받아 지금 남아 있는 히메지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다.20

츠네오키를 벤 나가이 나오카츠의 뒷이야기도 이 인연과 얽혀 있다. 나오카츠는 이 공으로 출세의 길을 열었고 에도 시대에 들어 여러 차례 가증을 받아 1622년 시모사 고가(古河) 7만 2천 석의 다이묘가 됐다.21 그런데 테루마사가 도쿠가와 가의 사위가 되면서 아버지의 원수와 같은 가문을 섬기는 사이가 됐다. 테루마사가 나오카츠에게 아버지가 죽던 때의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는 일화, 나오카츠의 지행이 5,000석이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 목값이 고작 이것인가”라며 탄식했다는 일화가 전한다.21 두 이야기 모두 최초 출전은 확인되지 않아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다만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질 만큼, 나가쿠테의 승자와 패자가 10년 만에 한 집안으로 묶였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 눈에 기묘하게 보였던 것은 분명하다.

5-3. 미요시 노부요시 — 다섯 달 뒤의 질책 서장

하쿠산바야시에서 무너진 총대장 미요시 노부요시에 대해서는 히데요시가 크게 꾸짖은 편지가 남아 있다. 흔히 “패전 직후 격노한 편지”로 소개되지만, 이 편지의 날짜는 덴쇼 12년 9월 23일이다. 나가쿠테에서 다섯 달 반이 지난 뒤이고 노부카츠와의 화의 교섭이 오가던 무렵이다. 원본은 없고 에도 시대 야마가 소코가 엮은 『부케지키(武家事紀)』 등에 사본으로 전한다.22

관복 차림으로 앉은 도요토미 히데츠구(미요시 노부요시) 초상화 모사본.
「도요토미 히데츠구 초상화(豊臣秀次像)」 1909년 모사본(원본은 교토 지조인 소장). 도쿄대 사료편찬소 소장, 퍼블릭 도메인.

다섯 항목으로 구성된 이 편지에서 히데요시는 노부요시가 “히데요시의 조카”라는 신분을 내세워 남에게 무례하게 군다고 꾸짖었고, 지금처럼 분별없이 군다면 히데요시의 체면을 잃게 하는 일이니 손수 베어 버리겠다고 했다.22

그렇다고 히데요시가 조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노부요시는 이듬해 기슈·시코쿠 공격에도 종군했고 1585년 윤8월 무렵에는 부속 가로들의 지행까지 합쳐 43만 석 규모로 오미 하치만야마성(八幡山城)의 주인이 됐다.22 나가쿠테에서의 패배로 히데요시의 신임을 잃었다는 것은 이런 이후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다만 히데요시가 패전을 계기로 조카에게 엄격한 규율을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6. 코마키 밖의 전쟁 — 수공·가니에·포위망

6-1. 코마키산을 비켜 가다 — 가가노이성과 다케가하나성의 수공

나가쿠테 이후 히데요시는 코마키산의 이에야스와는 다시 싸우려 하지 않았다. 대신 노부카츠 쪽 성 가운데 오와리 서부와 미노 서부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5월 초 가가노이성(加賀野井城, 현 기후현 하시마시)을 에워싸 7일 무렵 떨어뜨렸고 바로 이튿날 근처의 다케가하나성(竹ヶ鼻城) 북서쪽 구릉에 진을 쳤다.23

다케가하나성은 노부카츠의 가신 후와 히로츠나(不破広綱)가 지키고 있었다. 성의 수비가 단단해 좀처럼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히데요시는 주변 강물을 끌어들여 성과 성 아랫마을을 통째로 물에 잠기게 하는 수공을 택했다. 전해지는 제방 규모는 길이 약 3km, 높이 약 10m이고 5~6일 만에 쌓았다고 하는데, 향토 전승과 지역 언론의 수치라 과장이 섞였을 수 있다.23 1582년 빗추 다카마츠성에 이은 히데요시의 두 번째 수공이다. 성은 결국 물에 잠긴 채 항복했고 정확한 개성일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수공이 어떤 느낌인지는 훗날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공략 당시를 그린 영화 「노보우: 최후의 결전」(のぼうの城)을 보면 감이 잡힐 것 같다.

이렇게 노부카츠의 성을 공격한 것은 동맹군인 이에야스의 군대를 코마키산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본다.23 하지만 이에야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의도와 달리 코마키산 밖으로 나오지 않고, 노부카츠의 성이 차례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6-2. 가니에성 — 이에야스가 직접 이긴 두 번째 싸움

이에야스가 다시 직접 군을 움직인 것은 6월이었다. 6월 16일, 히데요시 측의 다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가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수군과 함께 이세 바다를 건너 오와리 남서부에 있는 가니에(蟹江)에 상륙했다. 가니에성을 지키던 마에다 나가사다(前田長定)는 카즈마스의 설득에 넘어가 성을 내주었고, 근처의 시모시이치바성(下市場城)과 마에다성(前田城)도 하시바군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오노성(大野城)의 야마구치 시게마사(山口重政)는 끝까지 저항했다.24

주택가 한쪽에 세워진 가니에성터 석비.
가니에성터 비석. 사진: 立花左近, CC BY-SA 3.0.

이에야스와 노부카츠의 대응은 빨랐다. 먼저 두 지성을 되찾고 가니에 본성을 에워쌌다. 보름 넘는 공방과 교섭 끝에 7월 3일 가니에성이 열렸고 카즈마스는 이세로 달아났다. 노부나가 시절 간토 방면군의 수장을 맡았던 노장의 사실상 마지막 무대였다.24 성을 넘겨준 마에다 나가사다가 죽은 경위는 사료마다 다르다. 도쿠가와 가신 오쿠보 타다타카의 『미카와 모노가타리』에는 도쿠가와 쪽이 나가사다를 처자식과 함께 죽였다고 나오지만, 에도 시대에 편찬된 『이에타다닛키 조호(家忠日記増補)』 등에는 다키가와 쪽 사람이 달아나는 나가사다를 죽였다고 기록돼 있다.24

가니에는 나가쿠테에 이어 이에야스가 직접 지휘해 거둔 두 번째 승리였다. 이세 바다를 건너 오와리 남서부에 상륙한 히데요시 측 작전은 이에야스와 노부카츠의 대응으로 보름 남짓 만에 막혔다.

6-3. 이세 — 점차 빼앗기는 노부카츠의 영지

오와리에서 양쪽이 흙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동안, 노부카츠의 본령 이세에서는 개전 직후부터 하시바 쪽 공세가 계속됐다. 가모 우지사토 등이 북이세의 미네성(峯城)을 며칠 만에 떨어뜨렸고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가 이세 남부의 마츠가시마성(松ヶ島城)을 에워쌌다. 성을 지키던 노부카츠의 가신 다키가와 카츠토시(滝川雄利)는 이에야스가 보낸 핫토리 마사나리(服部正成)의 이가·고카 무리까지 받아들여 버텼지만, 4월 초 성안에 있던 병사들의 목숨은 모두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성을 내주었다.25

가을에 들어서 이세 방면으로의 압박은 다시 세졌다. 9월 초의 1차 화의 교섭이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10월 하순 다시 이세로 나가 노부카츠 쪽 성들을 점령하며 북상했고 노부카츠의 거성 나가시마성을 치기 위한 요새들을 쌓기 시작했다.25 이름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이지만 노부카츠에게 이 전쟁의 실상은 이세의 영지를 하나씩 잃어 가는 것이었다.

6-4. 지도 위의 포위망

노부카츠와 이에야스는 전쟁 내내 히데요시의 등 뒤에 있는 세력들과 손을 잡으려 했다. 지도로 보면 오사카를 사방에서 조이는 그림이었다. 실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26

코마키산과 오사카를 중심으로 기이·시코쿠·엣추·간토의 동맹 세력이 벌인 움직임과 결과를 화살표로 표시한 지도
노부카츠·이에야스 측 동맹 세력의 움직임과 결과. 위치와 화살표는 개략 표시. 배경: Natural Earth.
세력움직임결과
기이의 사이카·네고로 무리3월 22일부터 히데요시가 자리를 비운 오사카·사카이 방면과 이즈미 기시와다성(岸和田城) 공격실패. 기시와다 성주 나카무라 카즈우지가 막아냈다. 오사카성을 지키던 구로다 나가마사 등도 싸웠다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노부카츠·이에야스와 결탁바다를 건너 출병하지는 않았다. 6월 사누키의 소고성(十河城)을 떨어뜨려 사누키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엣추의 삿사 나리마사7월 무렵 노부카츠·이에야스 측으로 돌아섬. 9월 9일 노토 스에모리성(末森城) 포위실패. 마에다 도시이에가 밤새 달려와 11일 새벽 반격했고 삿사는 물러났다
간토의 호조 가문이에야스의 동맹5~7월 시모츠케 누마지리(沼尻)에서 사타케·우츠노미야 연합과 대치하느라 원군을 보내지 못했다

히데요시 쪽 외교는 반대로 실속이 있었다. 북간토의 사타케·우츠노미야가 호조를 붙잡아 두었고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가가의 마에다 도시이에가 삿사를 앞뒤에서 견제했다.26 노부카츠·이에야스 쪽이 손잡은 세력 가운데 히데요시의 영역에 실제로 타격을 준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이듬해 히데요시는 이들을 차례로 정리한다. 기슈, 시코쿠, 엣추 순서였다.

7. 강화 — 1584년 가을부터 12월까지

7-1. 누가 먼저 화의를 청했나

이 전쟁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결말은 이런 식이다. 싸움에서는 이에야스가 이기고 있었는데, 노부카츠가 이에야스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히데요시와 따로 화의를 맺어 버렸다. 이에 싸울 명분을 잃은 이에야스는 어쩔 수 없이 군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의 앞부분을 뒷받침하는 동시대 기록이 있다. 나라 고후쿠지(興福寺)의 승려 에이슌(英俊)이 쓴 『다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 이 무렵 “지금 형세로는 이에야스가 이길 듯하다(今分ハ家康勝ニ可成歟)“는 구절이 나온다.27 오와리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도 이에야스 우세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명분을 잃은 이에야스가 어쩔 수 없이 군을 거두었다는 부분은 다시 볼 여지가 있다. 2026년 5월 효고현 다츠노시(たつの市)의 옛 가문에서 히데요시의 슈인조(朱印状) 두 통이 발견돼 8월 4일 다츠노시립 역사문화자료관이 공개했다. 하나는 4월 21일자로 와키자카 야스하루 앞으로 발행된 것인데, 이케다 부자와 모리의 전사를 언급하면서도 진지 방비를 굳히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9월 6일자로, 이에야스 쪽에서 인질을 보내겠다며 화의를 청해 왔고 히데요시가 응하지 않자 인질을 추가로 보내겠다고 했다는 내용이다. 다츠노시는 두 통 모두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보낸 것으로 보지만, 9월 6일자의 수신자는 보도에 따라 표기가 엇갈린다. 도쿄대 사료편찬소의 무라이 유키(村井祐樹)는 “이에야스 측이 이겼다고 하는 전쟁이지만, 두 통을 합치면 전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했다.28 이 두 문서의 내용을 보면 히데요시 측이 이케다 부대의 패배로 전열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이에야스 측이 먼저 화의를 청한 정황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 문서는 히데요시가 자기 가신에게 전황을 알린 편지여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쓸 이유가 충분하다. 앞에서 본 이에야스의 편지와 같은 종류의 문서다.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고 공개 자료와 보도 내용만 확인했다. 2016년에 공개된 와키자카 야스하루 앞 서장 가운데에도 이에야스 쪽이 인질을 내는 화의안을 히데요시가 일단 거절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보도됐다.29 9월 초 교섭의 흐름은 이렇게 여러 문서로 뒷받침되므로, 이에야스도 가을부터는 화의를 타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야스가 노부카츠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

7-2. 11월 11일, 노부카츠의 화의

덴쇼 12년 11월 11일, 노부카츠와 히데요시는 이세 구와나(桑名) 근처 야다가와라(矢田河原)에서 만나 화의를 맺었다고 전한다(회견을 11월 12일이나 15일로 적은 자료도 있다). 조건은 이가 지방 전체와 이세 남부를 히데요시에게 넘기고 노부카츠와 이에야스 양쪽이 인질을 내는 것이었다.29 이 회견에서 히데요시가 모래 위에 엎드려 노부카츠에게 절하고 선물을 바쳤다는 장면이 후대 편찬물(『가이세이 미카와 후도키(改正三河後風土記)』 등)에 등장하는데, 당대 사료로는 확인하지 못했다.

노부카츠가 화의에 응한 이유는 6장에서 본 대로다. 이세의 성들이 차례로 히데요시군에 함락되고 거성인 나가시마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노부카츠에게 화의는 영지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다. 노부카츠가 화의하자 이에야스는 이 전쟁에 나선 명분이었던 “노부나가의 아들을 돕는다”는 대의를 잃었다. 이에야스는 11월 중순(17일설도 있다) 오카자키로 돌아갔다.29

7-3. 오기마루

12월 12일, 이에야스의 차남 오기마루(於義丸)가 하마마츠를 떠나 오사카로 향했다. 열한 살이었다. 히데요시의 양자로 입적시킨다는 명목이었지만 도쿠가와 쪽에서도 이는 인질을 보내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히데요시는 자기 이름의 “히데(秀)“와 이에야스 이름의 “야스(康)“를 합쳐 그에게 히데야스(秀康)라는 이름을 주었다.30 훗날의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다.

검은 예복을 입은 유키 히데야스의 초상화.
「유키 히데야스 초상화(結城秀康像)」. 오기마루가 성인이 된 뒤의 모습이다. 퍼블릭 도메인.

8. 총평 — 사료로 확인되는 코마키·나가쿠테

8-1. 이 전쟁은 어떻게 기억됐나

에도 시대에 들어 이 전쟁은 도쿠가와 쪽 여러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에 의해 기억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에도 후기의 유학자 라이 산요(頼山陽)가 쓴 『니혼가이시(日本外史)』 권22 말미의 논찬에는 “이에야스가 천하를 얻은 것은 오사카에 있지 않고 세키가하라에 있으며, 세키가하라에 있지 않고 코마키에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도 나온다.31 지금도 나가쿠테 일대의 역사 산책 코스 이름에 이 문장이 쓰일 만큼,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의 성과가 도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얻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이 해석은 지역의 기억 속에 자리를 잡았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림도 큰 역할을 했다. 이누야마성 하쿠테이 문고(犬山城白帝文庫)가 소장한 나루세 가문 전래 「나가시노·나가쿠테 합전도 병풍(長篠・長久手合戦図屏風)」은 현존하는 나가쿠테 합전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 병풍에는 나가쿠테가 첫 출전이었던 나루세 마사나리(成瀬正成)가 적진으로 말을 몰고 들어가는 장면과 적의 목을 치켜드는 장면이 들어 있다. 마사나리는 훗날 오와리 번의 부가로이자 이누야마 성주 나루세 가문의 초대가 되는 인물이다. 도쿠가와의 승전도이면서 한 가문의 공적을 증명하는 그림이기도 했다. 도쿠가와 미술관(徳川美術館)이 소장한 오와리 도쿠가와 가 전래본은 에도 후기에 나루세 가문본의 모티프를 다시 배치해 그린 것으로 본다.32

도쿠가와 쪽 일화들도 이 흐름 속에서 불어났다. 4장에서 본 것처럼 혼다 타다카츠의 말 장면은 1843년의 막부 편찬물에서 갖춰졌고 사카키바라의 격문은 사건 후 100여 년 뒤에 처음 기록됐다. 반대로 현대 연구는 전쟁 전체를 보는 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 후지타 다쓰오(藤田達生)가 엮은 공동 연구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의 구조(小牧・長久手の戦いの構造)』(2006)는 이 전쟁을 오와리 한 곳이 아니라 기이·시코쿠·호쿠리쿠·간토까지 이어진 전국 규모의 대규모 전쟁으로 다뤘고 히라야마 유(2024)는 노부카츠 대 히데요시라는 축을 앞에 내세웠다.1

8-2. 사료로 확인되는 것

후대에 덧붙은 일화와 과장된 숫자를 빼고도 이 전쟁에 대해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많다.

  • 1584년 3월 6일 노부카츠의 가로 처형으로 시작해 11월 11일 노부카츠의 화의로 끝난, 8개월에 걸친 전쟁이었다.
  • 하시바 쪽이 병력에서 크게 앞섰지만 코마키산의 이에야스 진지를 넘지 못했다. 이에야스 진영의 토루와 해자는 발굴로 실체가 확인됐다.
  • 4월 9일 하루에 하시바 쪽 별동대가 무너졌고 이케다 츠네오키·모토스케 부자와 모리 나가요시가 전사했다. 실패한 이 작전을 누가 짰는지에 대해서는 통설과 달리 히데요시 주도설이 유력하게 제기돼 있다.
  • 나가쿠테 이후 히데요시는 결전을 피하고 노부카츠의 영지를 수공과 공성으로 하나씩 잘라 냈다. 이에야스는 가니에에서 한 번 더 이겼지만, 노부카츠·이에야스가 손잡은 원방의 세력들은 히데요시에게 실제 타격을 주지 못했다.
  • 노부카츠가 이에야스와 별도로 단독 화의에 응했고, 이에야스도 9월부터 인질을 내겠다며 화의를 타진했다는 히데요시 쪽 문서가 있다. 이에야스는 차남을 양자로 보냈고 이후 히데요시에게 신종했다.

전투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분명하다. 나가쿠테와 가니에에서는 이에야스가 이겼다. 하지만 이 전쟁이 노부나가의 아들과 노부나가의 가신 가운데 누가 위에 설지를 가리는 싸움이었다면, 11월 노부카츠가 이가와 이세 남부를 내주고 화의를 맺은 순간 그 답은 나왔다. 오다 가문은 이후 다시는 히데요시의 위에 서지 못했다.

8-3. 307년 뒤의 비석

나가쿠테 고전장에는 지금 세 개의 무덤이 있다. 이케다 츠네오키가 죽은 자리의 쇼뉴즈카(勝入塚), 장남 모토스케가 죽은 자리의 쇼쿠로즈카(庄九郎塚), 모리 나가요시가 죽은 자리의 무사시즈카(武蔵塚)다. 쇼뉴(勝入)는 츠네오키의 법명이고 쇼쿠로(庄九郎)는 모토스케의 통칭, 무사시는 나가요시의 관명 무사시노카미에서 왔다.

잔디 언덕 위에 서 있는 사적 나가쿠테 고전장 석비.
사적 나가쿠테 고전장 비석. 사진: 立花左近, CC BY-SA 3.0.

전투가 끝난 뒤 이에야스는 전장을 정리하지 않고 코마키산으로 돌아갔다. 들판에 남은 시신은 근처 안쇼지(安昌寺)의 승려가 거두어 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구비즈카(首塚)다.33 세 장수의 전사지에는 1706년 오와리 번의 무사가 처음으로 나무 표지를 세웠다. 그것이 썩어 자리가 잊힐 지경이 되자 1771년 오와리 번사 두 사람이 돌비석을 세웠다. 츠네오키의 비석에는 「이케다 쇼뉴 노부테루 전사장(池田勝入信輝戦死場)」이라고 새겨져 있다.33 에도 시대에 이 자리에 표지와 비석을 세운 것은 이케다 가문이 아니라 이 땅을 다스리던 오와리 번의 무사들이었다.

이케다 가문의 이름으로 비석이 선 것은 메이지 24년(1891) 7월이다. 세운 사람은 츠네오키의 “16세손”으로 새겨진 돗토리 이케다 가의 당주 이케다 테루히로(池田輝博)였는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케다 가문은 아니었다.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890년 돗토리 이케다 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가문을 이은 인물이다. 뒤에 이름을 나카히로(仲博)로 바꿨다.33

1584년 4월 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가 이케다 츠네오키를 죽였는데, 307년 뒤엔 이에야스의 후손인 쇼군의 아들이 이케다 가문의 당주가 되어 그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나가쿠테 고전장은 193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지금은 공원이 되어 세 무덤이 그 안에 나란히 남아 있다.33

출처

이번 조사에서 1차 사료(『이에타다닛키』, 히데요시·이에야스 서장, 『다몬인 일기』 등)는 원문을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본문에 인용한 사료 문구와 날짜는 모두 아래 공공기관 해설·연구자 기고·보도를 거친 2차 인용이다. 시각·병력·전사자 수는 “그렇게 전한다” 수준으로 읽어야 한다.

1차·준1차 사료 (성립 시기 명시, 모두 2차 자료를 통한 재인용)

  • 『家忠日記』(이에타다닛키) — 마츠다이라 이에타다의 당일 기록형 일기, 덴쇼 5년–분로쿠 3년(1577–1594). 에도 시대에 따로 편찬된 『家忠日記増補』·『家忠日記増補追加』(이에타다닛키 조호·조호츠이카)와는 별개의 문헌이므로 섞어 인용하지 않는다
  • 『多聞院日記』(다몬인 일기) — 고후쿠지 다몬인 승려들의 일기, 해당 부분은 에이슌 기록(동시대)
  • 히데요시 서장 — 1584년 4월 8일자 니와 나가히데 앞, 4월 21일·9월 6일자 와키자카 야스하루 앞으로 보도된 슈인조(2026년 공개), 9월 23일자 미요시 노부요시 앞(사본)
  • 이에야스 서장 — 1584년 4월 9일자 히라이와 치카요시·도리이 모토타다 앞(도쿠가와 미술관 소장, 徳川林政史研究所 『徳川家康文書 総目録』 No.2566)
  • 모리 나가요시 유언장 — 1584년 3월 26일자, 나고야시 박물관 소장
  • 『三河物語』(미카와 모노가타리) — 오쿠보 타다타카, 1622년 무렵
  • 『甫庵太閤記』(호안 다이코키) — 오제 호안, 간에이 연간(1620–1630년대) 간행
  • 『藩翰譜』(한칸후) — 아라이 하쿠세키, 1701–1702년
  • 『徳川実紀』(도쿠가와 짓키) — 막부 편찬, 1843년 완성
  • 『日本外史』(니혼가이시) — 라이 산요, 에도 후기
  • 『武家事紀』(부케지키) — 야마가 소코, 1673(노부요시 질책 서장 사본 수록)
  • 「長篠・長久手合戦図屏風」 — 이누야마성 하쿠테이 문고 나루세 가문본(17세기), 도쿠가와 미술관 오와리 도쿠가와 가본(에도 후기)
  • 쇼뉴즈카 등 석비 — 1771년 오와리 번사 건립비, 1891년 이케다 테루히로 건립비(실물)

현대 연구자·언론 기고

  • 平山優, 『小牧・長久手合戦 秀吉と家康、天下分け目の真相』, 角川新書, 2024 / 「『小牧・長久手合戦』はなぜ起こったのか」, 現代ビジネス
  • 藤田達生 編, 『小牧・長久手の戦いの構造 戦場論 上』, 岩田書院, 2006
  • 岩澤愿彦, 「羽柴秀吉と小牧・長久手の戦い」, 『아이치현사 연구(愛知県史研究)』4号, 2000 / 谷口央, 「小牧・長久手の戦いから見た大規模戦争の創出」, 藤田達生 編 『戦場論 上』, 2006 (나카이리 작전 해석은 일본어 위키백과 「小牧・長久手の戦い」 연구사 서술을 통한 재인용)
  • 岩沢愿彦, 「家忠日記の原本について」, 『東京大学史料編纂所報』 2호
  • 村井祐樹(東京大学史料編纂所), 2026년 8월 다츠노 슈인조 관련 보도에 인용된 발언(각주 28)
  • 渡邊大門,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기고(「池田恒興、森長可が戦死し、羽柴秀次が大失態!素直に負けを認めた羽柴秀吉」, 「秀吉が甥・秀次の惨敗に激怒した“本当の理由”」, 「17歳の秀次は本当に「無能」だったのか」, 「羽柴秀吉の怒涛の水攻めにより、ついに落城した竹ヶ鼻城」, 「織田信雄は本当に家康を裏切ったのか」, 「北条氏政は家康を見捨てたのか」)
  • 河合敦, 「小牧・長久手の戦いは“徳川家康の勝利”と言い切れない理由」, WEB歴史街道
  • 産経新聞·読売新聞(Yahoo!ニュース 전재본), サンテレビニュース, たつの市 공식 페이지 — 2026년 8월 다츠노 히데요시 슈인조 보도
  • 岐阜新聞デジタル, 「秀吉が家康に『誘い水』奇策に沈んだ城と町 竹ケ鼻城の水攻め」
  • 中日新聞, 나가쿠테시 향토자료실 기획전 기사

공식·표준 참고자료

  • 国立公文書館 디지털 전시 「徳川家康 — 将軍家蔵書からみるその生涯」(「小牧・長久手の戦い」), 国立公文書館デジタルアーカイブ 『家忠日記』
  • 小牧市 「小牧・長久手の合戦」関連年表, 「小牧付近の城砦(秀吉軍)」, 「小牧山城歴史探訪ガイド」, 「織田信長の小牧山城」 발굴 성과, 小牧市観光協会 「家康の守る城」
  • 長久手市 「長久手古戦場物語」, 「小牧・長久手の戦い」の概要 자료, 長久手市観光交流協会 「鬼武蔵、無念の死」
  • 国宝犬山城 공식 「犬山城について」, 犬山市 「楽田城跡」
  • 尾張旭市 「白山林の戦い」, 愛知県 あいち歴史観光 「色金山歴史公園」
  • 名古屋市博物館 「文書に見る小牧・長久手の戦い」 및 공식 계정 소개
  • 蟹江町 공식 「蟹江合戦とは?」, 岸和田市 「岸和田を巡る武将たちの攻防」, 金沢市立玉川図書館 近世史料館 「末森図」
  • 結城市 「結城家18代・結城秀康」
  • 犬山城白帝文庫 「長久手合戦図」·「家康・秀吉と成瀬正成」, 徳川美術館 2019 특별전 해설
  • 文化遺産オンライン 「小牧山」·「長久手古戦場 附 御旗山 首塚 色金山」
  • 코토방크 「永井直勝」·「結城秀康」·「松ヶ島城」 항목
  • 岐阜県観光公式 「竹ヶ鼻城跡」, 愛知県 리니모 모델 코스 「天下取り、関ヶ原にあらずして」
  • 일본어 위키백과 「小牧・長久手の戦い」·「岩崎城の戦い」·「蟹江城合戦」·「織田信雄」·「沼尻の合戦」·「四国攻め」 항목, 영어 위키백과 「Battle of Komaki and Nagakute」

전문 사이트·대중 매체 (신뢰도 C~D, 개별 각주에 표시)

  • 長久手市郷土史研究会 블로그, 和樂web, sengokushiseki.com, 福永英樹 블로그(D), 刀剣ワールド, サライ.jp, 城びと, 草の実堂, 武将ジャパン, 武将ハート, PRESIDENT Online, WEB歴史街道, sengoku-kassenroku, 玉章文化財研究所, Weblio, 鳥取西高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확인하지 못한 것

  • 『이에타다닛키』 덴쇼 12년 3~4월조와 11월조 원문, 이에야스 4월 9일자 서장과 히데요시 4월 8일자 서장 원문
  • 미카와 나카이리 “츠네오키 헌책설”의 최초 출전, 『나가쿠테 합전기』 같은 책들의 성립 연대
  • 나가쿠테 당일 시각, 부대별 병력, 전사자 수(2,500 / 590)의 근거 사료
  • 모리 나가요시 유언장이 원본인지 여부와 수신자 논쟁의 원문, 요토쿠인 앞 히데요시 서장의 날짜·소장처
  • 이에야스 4월 9일자 서장의 “1만여” 문구, 『다몬인 일기』 “이에야스가 이길 듯하다” 구절의 일자
  • 다츠노 슈인조 9월 6일자 문서의 수신자, 노부요시 질책 서장 원문과 후지타 쓰네하루 평전의 해석 쪽수
  • 다케가하나성 개성일, 모리 가문의 동향
  • 코마키·나가쿠테를 주제로 한 한국어 단행본·번역서는 확인한 범위에서 찾지 못했다

Footnotes

  1. 平山優, 「『小牧・長久手合戦』はなぜ起こったのか」, 現代ビジネス(https://gendai.media/articles/-/142672); KADOKAWA 『小牧・長久手合戦 秀吉と家康、天下分け目の真相』(角川新書, 2024) 서지. 후지타 편 공동 연구는 NDLサーチ 『小牧・長久手の戦いの構造 戦場論 上』(岩田書院, 2006) 서지 및 수록 논문 목록. ↩ ↩2 ↩3

  2. 国立公文書館 디지털 전시 「小牧・長久手の戦い」(https://www.archives.go.jp/exhibition/digital/ieyasu/contents2_01/). 회유 접촉과 소문에 관한 설명은 영어 위키백과 「Battle of Komaki and Nagakute」 항목. ↩ ↩2

  3. 小牧市 「小牧・長久手の合戦」関連年表, 「小牧付近の城砦(秀吉軍)」; 犬山市 「楽田城跡」. ↩ ↩2 ↩3 ↩4

  4. 国宝犬山城 공식 「犬山城について」(https://inuyama-castle.jp/about/). ↩ ↩2

  5. 長久手市 「長久手古戦場物語」; 小牧市 연표. 하구로 병력·사상자 수는 전문 사이트(sengokushiseki.com 등) 수치로, 1차 출전 미확인. ↩

  6. 小牧市 「織田信長の小牧山城」 발굴 성과(곡륜 지구 동부), 「小牧山城歴史探訪ガイド」; 小牧市観光協会 「家康の守る城」. ↩

  7. 国立公文書館, 前掲(“羽柴方およそ十万、徳川織田方およそ三万と伝わる” 취지의 해설); 영어 위키백과 「Battle of Komaki and Nagakute」(연합군 17,000~30,000 병기). ↩

  8. 일본어 위키백과 「小牧・長久手の戦い」 항목의 연구사 서술(이와사와 요시히코·다니구치 히사시(谷口央, 『戦場論 上』 2006 수록 논문) 견해, 참모본부 『니혼센시 코마키에키(日本戦史 小牧役)』의 통설 채택. 헌책 이야기가 『甫庵太閤記』에 실렸다는 소개도 같은 해설); サライ.jp 「小牧・長久手の戦い」 관련 기사(https://serai.jp/hobby/1143605). 4월 8일자 서장은 『아이치현사 자료편12 쇼쿠호2(愛知県史 資料編12 織豊2)』 373호, 『나가쿠테초사 사료편6(長久手町史 史料編六)』 100호에 수록돼 있으나 원문은 열람하지 못함. 岩澤愿彦, 「羽柴秀吉と小牧・長久手の戦い」, 『아이치현사 연구(愛知県史研究)』4号(2000). ↩ ↩2 ↩3

  9. 長久手市 자료 「小牧・長久手の戦い」の概要(PDF); sengoku-kassenroku.com 「小牧・長久手の戦い」; 武将ジャパン 관련 기사(2026-09-13). ↩ ↩2

  10. 長久手市 「長久手古戦場物語」; 尾張旭市 「白山林の戦い」; 名古屋市博物館 「小牧長久手の戦い」 해설; 愛知県 あいち歴史観光 「色金山歴史公園」. 시각은 모두 지자체·해설 서술이며 1차 사료와 대조하지 않음. ↩ ↩2 ↩3 ↩4 ↩5

  11. 일본어 위키백과 「岩崎城の戦い」 항목. ↩

  12. 長久手市郷土史研究会 블로그 「勘解由塚」 항목(2023-09-16); 武将ハート 관련 기사. 일화가 처음 나오는 책 미확인. ↩

  13. 長久手市郷土史研究会 블로그 「堀久太郎秀政本陣跡」; WEB歴史街道 「名人・堀秀政」(https://rekishikaido.php.co.jp/detail/8986); 福永英樹 블로그 「堀秀政が池田・森を見捨てた理由」(D). ↩ ↩2

  14. 刀剣ワールド 「森長可の歴史」; 中日新聞, 長久手市郷土資料室 企画展 기사; 코토방크 「永井直勝」; 長久手市 「長久手古戦場物語」. ↩ ↩2

  15. 武将ハート 전사자 관련 기사(D); WEB歴史街道, 河合敦 「小牧・長久手の戦いは“徳川家康の勝利”と言い切れない理由」; サライ.jp(https://serai.jp/hobby/1130498). 이에야스 4월 9일자 서장의 “一万余” 문구는 이들 해설을 통한 재인용이며 원문 미확인. ↩ ↩2

  16. 城びと, 内貴健太 「秀吉VS.家康 小牧・長久手の戦いを知る」 제4회(https://shirobito.jp/article/1552); sengoku-kassenroku.com, 前掲. ↩

  17. 이 블로그의 혼다 타다카츠 편 3-2절,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편 3절, 이이 나오마사 편 3-3절과 각 글의 원 출처. ↩

  18. 名古屋市博物館 공식 계정 소개(2023년 상설전 테마10 「森長可遺言状 天正12年3月26日付」); 名古屋市博物館 「文書に見る小牧・長久手の戦い」; 長久手市観光交流協会 「鬼武蔵、無念の死」; 和樂web 관련 기사. 수신인 이견은 宮本義己 논문을 인용한 일본어 위키백과 「森長可」 서술(논문 원문 미확인). 원본·사본 여부는 박물관 페이지에 표시가 없다. ↩ ↩2 ↩3 ↩4

  19. 渡邊大門, 「池田恒興、森長可が戦死し、羽柴秀次が大失態!素直に負けを認めた羽柴秀吉」,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서장 문구는 이 기사를 통한 의역. ↩

  20. WEB歴史街道(https://rekishikaido.php.co.jp/detail/4706); Weblio 「池田輝政」; 刀剣ワールド 池田輝政 연표. ↩ ↩2

  21. 草の実堂 「池田恒興を討った永井直勝」 관련 기사 2편(133796, 133576); 玉章文化財研究所, 하야시 라잔 찬 「永井月丹居士石表辞」 해설. ↩ ↩2

  22. PRESIDENT Online(https://president.jp/articles/-/118923); 渡邊大門, 「秀吉が甥・秀次の惨敗に激怒した“本当の理由”」, 「17歳の秀次は本当に「無能」だったのか」,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草の実堂 관련 기사. 서장은 『武家事紀』(야마가 소코, 1673) 수록으로 전한다. 원문은 이들 기사를 통한 재인용이며, 『松雲公採集遺編類纂』 수록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 ↩2 ↩3

  23. 岐阜新聞デジタル, 「秀吉が家康に『誘い水』奇策に沈んだ城と町 竹ケ鼻城の水攻め(羽島市)」; 渡邊大門, 「羽柴秀吉の怒涛の水攻めにより、ついに落城した竹ヶ鼻城」,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岐阜県観光公式 「竹ヶ鼻城跡」. ↩ ↩2 ↩3

  24. 蟹江町 공식 「蟹江合戦とは?」; 城びと, 内貴健太 연재 제5회(https://shirobito.jp/article/1610); 일본어 위키백과 「蟹江城合戦」 항목(『三河物語』과 『家忠日記増補』 서술 비교). 사료 문구는 이 항목을 통한 재인용. ↩ ↩2 ↩3

  25. 城びと, 内貴健太 연재 제3회(https://shirobito.jp/article/1504); 名古屋市博物館 「小牧長久手の戦い」 해설; 코토방크 「松ヶ島城」. ↩ ↩2

  26. 岸和田市 「岸和田を巡る武将たちの攻防」; 金沢市立玉川図書館 近世史料館 「末森図」(PDF); 渡邊大門, 「北条氏政は家康を見捨てたのか」,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일본어 위키백과 「沼尻の合戦」·「四国攻め」 항목. ↩ ↩2

  27. 国立公文書館, 前掲(“今分ハ家康勝ニ可成歟” 인용 해설). 기사 일자는 확인하지 못함. ↩

  28. 産経新聞, 「小牧・長久手の戦いの趨勢、より明らかに 秀吉の朱印状2点見つかる 兵庫・たつの」; 読売新聞オンライン, 「小牧・長久手の戦い「家康が優位」の通説見直し?」(모두 Yahoo!ニュース 전재본); サンテレビニュース(2026-08-13, https://www.sun-tv.co.jp/suntvnews/news/2026/08/13/96182/); たつの市 공식 「羽柴秀吉から脇坂甚内に宛てた新発見の書状2通」(https://www.city.tatsuno.lg.jp/soshiki/1041/gyomu/4/1/11017.html); Japaaan, 「【豊臣兄弟!】定説が覆る可能性…和睦は家康から?「小牧・長久手の戦い」で秀吉が発した朱印状2通が発見」(https://mag.japaaan.com/archives/285743, 2쪽에서 9월 6일자 문서의 수신자는 확실하지 않다고 서술). Yahoo!ニュース 전재본은 열람 시 연결되지 않았다. 문서 원문은 직접 확인하지 못함. ↩

  29. 일본어 위키백과 「織田信雄」 항목; 渡邊大門, 「織田信雄は本当に家康を裏切ったのか」, Yahoo!ニュース エキスパート; 2016년 다츠노시 龍野歴史文化資料館 공개 와키자카 야스하루 앞 서장 보도(神戸新聞)와 야다가와라 회견 장면(『改正三河後風土記』·『小牧陣始末記』 등 후대 편찬물)은 일본어 위키백과 「小牧・長久手の戦い」 항목 경유. 이에야스 오카자키 귀진일은 『家忠日記』를 인용한 2차 자료 경유이며 11월 중순 사이의 날짜 차이는 확정하지 못함. ↩ ↩2 ↩3

  30. 結城市 공식 「結城家18代・結城秀康」; 코토방크 「結城秀康」. ↩

  31. 刀剣ワールド 「小牧・長久手の戦い」(라이 산요 인용); 愛知県 리니모 모델 코스 「天下取り、関ヶ原にあらずして」. 『日本外史』 권22(卷之廿二) 말미 논찬. 위키문헌(중문판) 전사본으로 확인했고 학술 판본 대조는 하지 못함. ↩

  32. 犬山城白帝文庫 「長久手合戦図」·「家康・秀吉と成瀬正成」; 徳川美術館 2019 특별전 「合戦図 — もののふたちの勇姿を描く」 해설. ↩

  33. 長久手市郷土史研究会 블로그 「勝入塚」·「首塚」 항목; Weblio 「池田仲博」; 鳥取西高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池田仲博」; 文化遺産オンライン 「長久手古戦場 附 御旗山 首塚 色金山」·「小牧山」.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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