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간지 켄뇨(本願寺顕如, 1543–1592) — 노부나가와 싸우고도 교단을 남긴 종주
Q: 혼간지 켄뇨(本願寺顕如)는 누구인가?
A: 정토진종을 연 신란(親鸞, 1173–1262)의 후손이 대대로 이어 온 혼간지(本願寺)의 11대 종주(1543–1592). 법명은 켄뇨, 휘는 코사(光佐)다. 1554년 아버지 쇼뇨(証如)가 위독해지자 후계자 켄뇨는 교토에 갈 틈 없이 혼간지 안에서 출가 의식(득도)을 치렀고, 쇼뇨가 죽은 뒤 열두 살에 종주가 됐다. 1559년 조정에서 몬제키(門跡, 원래 황족·섭관가 출신이 주지를 맡던 최고 격의 사원) 칙허를 받아 혼간지의 격을 끌어올렸고 오사카(현 오사카성 일대)의 혼간지를 중심으로 전국 문도를 거느렸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와 전쟁을 시작했다. 세 차례 강화를 맺었다가 깨지기를 되풀이한 끝에, 1580년 천황의 명령(칙명)으로 맺은 강화를 받아들이고 오사카(혼간지)를 떠났다. 이때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장남 쿄뇨(教如)와 갈라섰다. 이후 기이 사기노모리를 거쳐 히데요시가 지정한 이즈미 가이즈카, 오사카 텐마로 거처를 옮겼고 1591년 교토 호리카와에 터를 받아 오늘날에도 교토에 가면 볼 수 있는 니시혼간지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이듬해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1580년 쿄뇨와 갈라선 일과 그가 남긴 후계 문제는 10년 뒤 혼간지가 동서로 갈라지는 불씨가 됐다.
한눈에 보는 혼간지 켄뇨
| 항목 | 내용 |
|---|---|
| 이름 | 켄뇨(顕如, けんにょ). 휘 코사(光佐) |
| 지위 | 혼간지 11대 종주. 1559년 몬제키 |
| 생몰 | 1543년 – 1592년 12월 27일(덴쇼 20년 11월 24일), 향년 50. 출생 날짜는 사료마다 다름 |
| 부모 | 부친 쇼뇨(証如, 10대 종주). 모친은 공가 니와타 시게치카(庭田重親)의 딸 |
| 계승 | 1554년 8월, 12세 |
| 정실 | 뇨슌(如春, 1544–1598) |
| 자녀 | 쿄뇨(教如, 1558–1614), 켄손(顕尊, 1564–1599), 준뇨(准如, 1577–1631) 등 |
| 본거 | 오사카(1580년까지) → 사기노모리(1580) → 가이즈카(1583) → 텐마(1585) → 교토 호리카와(1591) |
| 대립 | 오다 노부나가와 1570–1580년. 중간에 세 차례 강화 |
| 묘소 | 히가시야마 오타니. 신란의 묘소와 같은 곳에 납골 |
| 사후 | 1593년 준뇨 계승(니시혼간지), 1602년 쿄뇨가 별도 절터를 받음(히가시혼간지) |
켄뇨는 보통 “노부나가가 가장 오래 고전한 적”으로 소개된다. 무장도 다이묘도 아닌 승려가 전국시대의 최강자와 대립하며 11년을 버텼다는 점이 강한 인상을 남겨서일 것이다. 켄뇨는 사무라이가 아니라 문서와 법회와 혼인으로 전국의 문도를 묶은 교단의 경영자였다. 그가 싸운 방식도, 싸움에서 진 뒤에 살아남은 방식도 무장들과는 달랐다.
켄뇨의 생애를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널리 퍼진 이야기 몇 가지를 동시대 사료와 대조해 본다. 노부나가가 이시야마의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해서 전쟁이 시작됐다는 이야기, 10년 동안 쉬지 않고 싸웠다는 이야기, 켄뇨와 아들 쿄뇨의 대립이 노부나가를 속이기 위한 연극이었다는 이야기, 이에야스가 혼간지를 둘로 쪼갰다는 이야기가 그 대상이다. 다만 이 글이 더 무게를 두는 것은 그런 이야기의 진위보다 켄뇨가 패전 뒤에도 혼간지 교단을 유지하고 교토로 근거지를 옮겨 다시 세운 과정이다. 참고로 ‘이시야마 혼간지’라는 이름은 동시대 기록에 거의 보이지 않고 당시 사료에는 주로 ‘오사카(大坂)‘로 나온다. 에도 시대 이후의 호칭이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이 글에서도 절을 가리킬 때는 오사카 혼간지로 쓰고 전쟁 이름은 통용되는 ‘이시야마 합전’을 그대로 쓴다.1
1. 열두 살의 종주 — 출생과 계승 (1543–1558)
1-1. 아버지가 죽기 전날의 득도
켄뇨는 1543년 쇼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사료가 일치하지만 날짜는 갈린다. 현대 사전류에는 1월 6일로 나와 있고 1791년에 편찬된 혼간지 측 연대기 『오타니 혼간지 츠키(大谷本願寺通紀)』에는 4월 12일, 『사기노모리 큐지키(鷺森旧事記)』에는 4월 7일로 나와 있다. 1월 6일설의 동시대 근거는 이번 조사에서 찾지 못했다.2
어머니는 공가 니와타 시게치카(庭田重親)의 딸 시게코(重子)로, 1558년 37세로 죽었다. 켄뇨의 어머니로 종종 소개되는 게이주인(慶寿院)은 실제로는 할머니, 즉 쇼뇨의 생모다. 참고로 같은 시기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정실도 같은 한자의 ‘게이주인’이라 불렸기 때문에 동시대 기록에서 ‘게이주인’이 나오면 누구를 가리키는지 잘 봐야 한다.2
1554년 8월 12일 저녁, 쇼뇨가 위독해지자 켄뇨는 혼간지 안에서 득도(得度, 출가해 승려가 되는 의식)했다. 혼간지의 후계자는 원래 교토의 천태종 사원 쇼렌인(青蓮院)에 가서 득도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쇼뇨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상경할 시간이 없었다. 쇼뇨는 직접 ‘켄뇨’라는 법명을 써 주고 이튿날 39세로 죽었다.
舊例於青蓮院得度。而以先宗主病急不遑赴京。於本山作法。證宗主親書法名顯如授之。而翌日厭世。
옛 관례로는 쇼렌인에서 득도했으나, 선대 종주의 병이 위급해 상경할 겨를이 없어 본산에서 의식을 치렀다. 쇼뇨 종주가 직접 법명 ‘켄뇨’를 써서 주고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오타니 혼간지 츠키』 권2. 사건 237년 뒤의 편찬물이다.
열두 살 종주의 곁에는 할머니 게이주인이 있었다. 『오타니 혼간지 츠키』에는 쇼뇨 사후 게이주인이 일족 승려를 시켜 에치젠의 아사쿠라 측과 강화 교섭을 이어가게 한 일이 나온다.2 근대의 진종사 연구자 다니시타 이치무(谷下一夢)는 쇼렌인을 거치지 않은 이 득도를 혼간지가 천태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으로 해석했다.3
1-2. 신부는 누구의 딸이었나
켄뇨의 혼처는 아버지 쇼뇨의 생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1546년 6월 정식으로 약혼했고 1557년 4월 17일 신부가 오사카(혼간지)로 내려와 혼례를 올렸다.4 이 신부 뇨슌(如春)은 오랫동안 사다이진(左大臣) 산조 긴요리(三条公頼)의 셋째 딸로 알려져 왔다. 그 언니가 다케다 신겐의 정실 산조 부인이었으니 켄뇨와 신겐은 동서지간이 되고 이 혼인 관계가 훗날 혼간지와 다케다의 연대를 설명하는 근거로 자주 쓰였다.
그러나 2023년 하마구치 세이시(浜口誠至)는 뇨슌이 살아 있을 때 성립한 사료 다섯 건에 모두 그녀의 아버지가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로 나온다는 점을 들어 이 통설을 부정했다. 혼례를 기록한 혼간지 측 일기 『시신키(私心記)』에는 신부가 “하루모토의 따님(晴元御料人)“으로, 교토 승려의 일기 『곤조 오넨키(厳助往年記)』에는 “하루모토의 딸, 롯카쿠의 유자(晴元女…六角猶子)“로 나온다. 쇼뇨가 1544년 5월 하루모토에게 딸의 탄생을 축하하는 편지를 보내고 두 달 뒤 혼담이 들어왔다는 시간 순서도 맞는다. 1544년 7월 호소카와 하루모토 쪽에서 혼담을 꺼냈고, 쇼뇨는 일기에 “무릇 이런 일은 매우 곤혹스럽다(惣而如此事一段迷惑候)“고 썼다. 호소카와 가문의 격에 맞는 혼례를 갖추기 어렵고 사돈이 될 하루모토 편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도 꺼렸지만, 그렇다고 거절하면 유력 가문인 호소카와와의 관계가 틀어질 것이라 받아들였다. 산조 긴요리의 딸이라는 설은 막부 말기의 계보집 『게이즈 산요(系図纂要)』에서 비롯돼 메이지 시대에 정설로 굳었다는 것이 하마구치의 결론이다.4 이 연구를 따르면 ‘켄뇨와 신겐은 동서’라는 이야기는 근거가 약해진다.
1-3. 득도 3년 뒤의 혼례,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혼례 이듬해인 1558년 7월 어머니 시게코가 세상을 떠났고 9월 장남 쿄뇨가 태어났다. 열여섯 살 종주는 할머니와 시모츠마(下間) 가문 가신들의 보좌 아래 교단을 맡고 있었다. 혼례 때 신부를 마중한 사람도 시모츠마 요리스케(下間頼資)였다.4 이 시모츠마 가문이 뒷날 혼간지 조직의 뼈대가 된다.
2. 몬제키 혼간지 — 교단을 위계 조직으로 다시 짜다 (1559–1568)
2-1. 1559년의 몬제키 칙허
1559년 12월 15일, 오기마치 천황의 칙명으로 혼간지는 몬제키가 됐다. 혼간지는 황족·섭관가 출신이 주지를 맡는 사원이 아니었지만 칙허로 이 격을 얻은 것이다. 칙사는 마데노코지 히데후사(萬里小路秀房)였고, 켄뇨는 열일곱 살이었다. 같은 달 27일 혼간지는 사례로 칼 한 자루와 2만 히키(疋, 동전을 세는 단위)를 바쳤다. 궁녀들이 쓴 일기 『오유도노노 우에노 닛키(御湯殿上日記)』에 “혼간지에서 몬제키가 된 사례로 칼과 2만 히키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5
몬제키는 아버지 쇼뇨 대부터의 숙원이었다. 쇼뇨는 1536년 몬제키보다 한 단계 낮은 와키몬제키(脇門跡)를 청했다가 허락받지 못했다. 일부 사전에는 이번 칙허가 오기마치 천황 즉위식 비용을 헌납한 공에 대한 포상이라고 설명돼 있는데 혼간지가 즉위료를 얼마나 냈는지 적은 동시대 사료는 이번 조사에서 찾지 못했다. 칙허 뒤에 사례로 2만 히키를 바친 것만 확인된다.5
2-2. 보칸과 인게 — 가신과 일족 사원에 위계를 매기다
켄뇨는 칙허와 동시에 실무 가신인 시모츠마 가문의 세 사람(요리요시·요리스케·요리후사)을 보칸(坊官, 몬제키를 보좌하는 승려 관료)으로 임명했다. 이전까지 소샤(奏者, 전달 담당)로 불리던 가신들이 몬제키 체제의 관료로 재편됐다. 1560년 겨울에는 미카와의 혼슈지(本宗寺), 가와치의 켄쇼지(顕証寺), 이세의 간쇼지(願証寺)를 시작으로 혼간지 일족이 주지를 맡은 사원 여덟 곳을 인게(院家, 몬제키 아래의 상급 사원)로 정하고 보라색 가사를 입게 했다.3
이듬해 1561년 3월, 켄뇨는 종조 신란의 300주기 법요를 열흘 밤낮으로 치렀다. 『오타니 혼간지 츠키』에는 인게와 일족 사원 승려들이 새로 정한 위계에 따라 법의를 갖춰 입고 출사했다고 기록돼 있다.2 몬제키 칙허로 얻은 격을 문도들 앞에서 의례로 내보인 법요였다. 혼간지를 연구하는 안도 와타루(安藤弥)는 이 흐름을 「켄뇨의 전반생: 혼간지 ‘몬제키나리’에서 신란 300주기로(顕如の前半生―本願寺『門跡成』から親鸞三百回忌へ―)」라는 글로 정리했다.3
2-3. 오사카의 지나이마치와 혼간지의 재정
켄뇨가 물려받은 오사카 혼간지는 절이면서 하나의 도시였다. 절을 둘러싼 지나이마치(寺内町, 사원 경내에 형성된 도시)는 기본 6개 정(町)과 그 밖의 작은 정들로 이뤄져 있었고, 1544년 『시신키』에는 10정이 나온다. 인구는 2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기준 시점은 분명하지 않다. 혼간지는 이 안의 행정·경찰·재판권을 쥐었지만 각 정에는 주민 자치 조직도 있었다. 혼간지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싸우다 1535년 화해했고, 교섭을 거듭해 1538년 호소카와 쪽으로부터 연공 외의 각종 공적 부담(諸公事)을 면제하는 제찰(制札, 권력자가 보장 내용을 적어 세우는 팻말, 7월 9일)과 지나이마치에 덕정(徳政, 채무 파기령)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지시(8월 27일)를 받았다. 호소카와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에서 쇼군을 보좌하는 최고 직책인 관령(管領)을 맡아 온 가문이자 오사카가 있는 셋츠의 수호직을 쥐고 있었기에 이런 특권을 줄 수 있었다.
다만 면제된 것은 외부 권력에 대한 부담이어서, 혼간지는 주민에게 정마다 인원을 내게 해 절 공사에 쓸 노동을 부과했다. 1560년으로 전하는 돈다바야시 지나이마치의 문서에는 사원 구역의 일을 오사카(혼간지)와 같은 기준으로 한다는 취지의 조항이 있다. 돈다바야시처럼 다른 지나이마치도 오사카(혼간지)의 특권을 비교 기준으로 삼았다는 뜻이다.6
재정은 각지 문도가 바치는 헌금(志納)에 기댔다. 근대 불교사학자 쓰지 젠노스케(辻善之助)는 쇼뇨의 일기를 집계해 1536년 4월부터 12월까지 아홉 달 동안 문도 헌금이 1,400관 남짓과 금 51냥이었다고 계산했다. 쓰지는 켄뇨가 노부나가와 10여 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쇼뇨 대에 쌓은 부 덕분이라고 봤다.5 켄뇨 대의 헌금 총액은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2-4. 1568년까지는 중립이었다
1568년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고 상경하기 전까지, 켄뇨는 다이묘들의 군사 연합에 깊이 끼어들지 않았다. 1560년 호조 우지야스와 다케다 신겐이 각각 가가·엣추의 문도를 움직여 우에스기 겐신을 견제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켄뇨는 응하지 않았다. 쓰지 젠노스케는 이를 두고 “오로지 평화를 취지로 삼은 듯하다”고 평했다.5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과는 가가를 사이에 두고 여러 번 충돌했지만 1556년에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1567년에는 훗날 쇼군이 되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알선으로 화평을 맺었다.7 하마구치 세이시는 혼례 뒤에도 켄뇨가 하루모토의 숙적 미요시 나가요시와 관계가 좋았고 장인 하루모토를 지원한 흔적이 없다는 점에서, 계속해서 다이묘 간의 다툼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는 노선이었다고 본다.4
3. 1570년 9월 — 격문과 거병
3-1. “이시야마를 내놓으라”는 요구는 사료에 없다
이시야마 합전이 시작된 경위에 대한 통설은 이렇다. 노부나가가 1568년 혼간지에 야센(矢銭, 군자금) 5천 관을 요구했고, 1570년 정월에는 오사카(혼간지)의 땅을 비우라고 요구했으며, 켄뇨가 이를 거부하면서 전쟁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료로 확인되는 것은 이와 다르다.
혼간지가 1568년에 5천 관을 낸 사실은 『호소카와 료케키(細川両家記)』에 나온다. 셋츠의 고쿠진(国人, 토착 영주) 이쿠시마 소치쿠(生嶋宗竹)가 1573년경 완성한 이 책에는 1568년 10월 노부나가가 셋츠에 들어와 각지 사원에 레이센(礼銭, 인사 명목의 돈)을 부과했고 “오사카(혼간지)에서는 5천 관을 냈다”고 나와 있다. 사카이에 부과된 2만 관에는 ‘야센’이라는 단어가 쓰였지만, 혼간지의 5천 관은 레이센 부과의 문맥에서 나오고 실제로 납부됐다고도 적혀 있다. 일부 해설에서는 이 5천 관이 ‘교토 고쇼(천황 거처) 재건비’라고 하는데 이런 기록은 동시대 사료에서 찾지 못했다.8
앞서 사료로 확인한 5천 관 이야기와 달리, 노부나가가 혼간지에게 그 땅을 비우라고 요구했다는 것은 동시대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켄뇨가 스스로 쓴 격문에만 오사카 혼간지를 “허물어야 한다(破却)“는 통고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교토 공가의 일기와 『호소카와 료케키』, 노부나가의 가신 오타 규이치가 쓴 『신초코키(信長公記)』에도 1570년에 노부나가가 혼간지에게 퇴거를 요구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8
3-2. 노다·후쿠시마 전투와 오사카 코앞의 성채
1570년 7월 말, 미요시 3인방이 셋츠의 노다(野田)·후쿠시마(福島)에 성채를 쌓고 돌아왔다. 미요시 나가요시가 죽은 뒤 미요시 가문을 이끈 중신 미요시 나가야스·미요시 소이·이와나리 토모미치 세 사람으로, 1568년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받들고 상경하자 기나이에서 밀려나 아와로 물러나 있던 이들이다. 노부나가는 8월 26일 텐노지에 진을 쳤고 9월 3일에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도 직접 출진했다. 개전 당시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와 같은 진영에 있었다.9
그다음 움직임이 혼간지를 위협했다. 교토의 공가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는 9월 9일자 일기에 “오다 단조노추(弾正忠, 노부나가의 관직)가 텐마가모리로 진을 옮겼다고 한다. 또 오사카(혼간지) 근처에 아이지로(相城)를 준비한다고 한다”고 썼다. 아이지로는 적의 성을 마주 보고 짓는 공성용 성채다. 『신초코키』에도 노부나가가 9월 8일 오사카(혼간지)에서 서쪽으로 10정 떨어진 로노키시(楼の岸)와 강 건너 가와구치(川口)에 성채를 짓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9 혼간지 코앞에 노부나가의 성채가 들어선 것은 노부나가 쪽 기록과 교토의 일기 양쪽에서 확인된다.
『호소카와 료케키』에는 이때 혼간지 내부의 판단이 이렇게 나온다.
大坂內談には。野田福島この間の分なれば。不苦候ヘ共。万一不慮出來候ば。則大坂の手前になり候得ば如何なり。兩所堅固の時。只今色立候て可然由にて。同九月十二日夜半に。寺內の鐘撞かれ候へば。即人數集けり。信長方仰天也と云。
오사카(혼간지)의 내부 논의는 이러했다. 노다·후쿠시마가 지금 상태라면 괜찮지만, 만일 뜻밖의 일이 생기면 곧 오사카(혼간지) 코앞이 되니 어찌하겠는가. 두 곳이 굳건할 때 지금 깃발을 드는 것이 옳다 하여, 9월 12일 밤중에 경내의 종을 치니 곧바로 사람들이 모였다. 노부나가 쪽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호소카와 료케키』, 1570년 9월. 이 책의 후반부는 1573년경 성립.
상대편인 노부나가 쪽 기록에도 ‘선제 방어’라는 같은 동기가 보인다. 오타 규이치는 『신초코키』에 “노다·후쿠시마가 함락되면 오사카(혼간지)도 멸망할 것이라 여긴 것인가”라고 추측형으로 적었다.10
3-3. 격문 — “영원히 문도로 인정하지 않겠다”
켄뇨의 거병이 노부나가가 지은 성채를 보고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켄뇨는 그보다 앞서 각지의 문도들에게 서장을 보낸 상태였다. 미노 군조의 안요지(安養寺)에 전하는 원본은 9월 2일자로 “미노 군조의 모든 문도에게(濃州郡上惣門徒中)” 보낸 것이고 기후현 지정문화재인 「이시야마 합전 관계 문서 및 안요지 문서(石山合戦関係文書及び安養寺文書)」에 들어 있다.11
就信長上洛、此方令迷惑候、去々年以来、懸難題申付而、随分成扱、雖応彼方候、無其詮、可破却由、慥告来候、此上不及力候、然者開山之一流、此時無退転様、各不顧身命、可抽忠節事難有候、若無沙汰輩者、長不可為門徒候、併馳走頼入候、穴賢、
노부나가가 상경한 일로 이쪽은 곤경에 처해 있다. 재작년 이래 난제를 걸어 명령해 오므로 할 수 있는 만큼 애써 그쪽 요구에 응해 왔으나 보람도 없이, (오사카 혼간지를) 허물어야 한다고 분명히 통고해 왔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니 이때 개산(신란)의 일류가 끊어지지 않도록 각자 목숨을 돌보지 않고 충절을 다해 준다면 고맙겠다. 만약 소홀히 하는 무리는 영원히 문도로 인정하지 않겠다. 아울러 힘써 주기를 부탁한다. 삼가.
켄뇨 서장, 1570년 9월 2일, 미노 군조 문도 앞. 안요지 소장 원본.
켄뇨가 내건 동원 명분은 노부나가를 치자는 것이 아니라 교단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응하지 않는 자는 파문하겠다고 못 박아 종주로서의 권위도 이용했다.
문제는 이 서장의 “허물어야 한다고 분명히 통고해 왔다”는 문구다. 앞서 살펴봤듯 노부나가 쪽에서 이를 통고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혼간지 쪽 기록 말고는 그런 기록이 남은 사료가 없다. 일본 중세 종교사 연구자 간다 지사토(神田千里)는 『호소카와 료케키』에 “노부나가 쪽이 깜짝 놀랐다”는 기술이 있는 점 등을 들어, 이 통고가 문도를 동원하기 위해 혼간지 쪽이 거짓으로 지어내 내세운 명분일 가능성을 지적했다고 한다.12 다만 9월 9일 야마시나 토키츠구의 일기에 “오사카(혼간지) 근처에 아이지로 준비”라는 기록이 있으니 적어도 혼간지가 느낀 위협에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3-4. 9월 12일 밤과 정전 칙서
거병 날짜도 기록마다 조금 다르다. 『호소카와 료케키』에는 9월 12일 밤으로, 『신초코키』에는 “9월 13일 밤중에 오사카(혼간지)에서 두 성채에 철포를 쏘아 넣었다”고 나와 있다. 야마시나 토키츠구의 일기에는 13일 저녁 “오사카(혼간지)가 모반해 잇키(一揆, 집단 무장봉기)가 일어났다는 풍문”, 14일 “오사카(혼간지)의 잇키는 확정”이라고 나온다.9 교토까지 소식이 닿는 시간을 감안하면 12일 밤 거병했다는 기록과 날짜가 모순되지 않는다. 『신초코키』가 전하는 13일의 일은 성채에 대한 철포 공격이라 첫 봉기와 다른 국면일 수도 있다. 널리 퍼진 “켄뇨가 직접 갑옷을 입고 노부나가 본진을 쳤다”는 이야기는 『신초코키』와 『호소카와 료케키』 원문에 없다. “급히 치는 종(早鐘)“이라는 말도 원문에는 없고, 『호소카와 료케키』에는 경내의 종을 쳤다고만 나와 있다.
같은 날인 9월 12일, 공가 가라스마루 미츠야스가 중재를 위해 오사카(혼간지)에 들어갔다는 소문도 일기에 남아 있다. 막부와 조정은 거병 당일까지 혼간지를 설득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9월 20일 조정은 켄뇨 앞으로 정전을 명하는 칙서를 냈다. 칙서에는 쇼군이 천하를 안정시키려 출진했는데 혼간지가 “잇키를 일으켜 적대한다”고 적혀 있다.9 막부와 조정이 보기에 켄뇨의 거병은 노부나가가 아니라 쇼군을 적으로 돌린 일이었다.
개전 원인에 대한 학설은 아직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동시대 사료에 공통으로 나오는 것은 혼간지와 미요시 쪽이 미리 접촉하고 있었다는 풍문, 노다·후쿠시마가 함락되면 오사카(혼간지)가 위험해진다는 판단, 오사카(혼간지) 코앞에 지어진 노부나가의 성채다. 간다 지사토는 켄뇨가 미요시 쪽에 가담한 것을 전쟁 발발의 원인으로 보고, 구노 마사시(久野雅司)는 이 전투의 본질은 쇼군 요시아키 대 미요시 3인방의 대결이며 혼간지는 3인방의 원군일 뿐이라고 규정한다.12 다만 어느 쪽 학설을 따르든 노부나가의 종교 탄압에 혼간지가 맞선 신앙 전쟁으로 보기는 어렵다.
4. 11년은 한 번의 전쟁이 아니었다 — 강화와 재개 (1570–1579)
4-1. 세 번의 강화
이시야마 합전은 흔히 ‘10년 전쟁’이나 ‘11년 전쟁’으로 불린다. 오다와 혼간지 두 세력 간에 1570년 9월부터 1580년 윤3월에 걸쳐 벌어진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기간 내내 전투가 계속된 것은 아니다. 잇코잇키 연구자 신교 노리카즈(新行紀一)는 『세계대백과사전』의 「이시야마 혼간지 잇키」 항목에서 “혼간지가 있던 셋츠 이시야마에서 11년간 끊임없이 전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썼고, 긴류 시즈카(金龍静)도 『일본대백과전서』에서 “1570년대 전반에는 이시야마 근처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진 전투보다 각지에서 일어난 잇키 쪽이 더 활발했다”고 정리했다.13
| 시기 | 국면 | 중재·근거 |
|---|---|---|
| 1570년 9월 | 노다·후쿠시마 전투 중 혼간지 거병 | 『호소카와 료케키』·『신초코키』 |
| 1570년 말 | 첫 강화 | 조정과 쇼군 요시아키의 중재 |
| 1573년 | 두 번째 강화 | 아사쿠라·아사이 멸망 뒤. 1574년 4월 혼간지 재거병으로 깨짐 |
| 1575년 10월 | 세 번째 강화 | 미요시 쇼간·마츠이 유칸 중재 |
| 1576년 4월 | 재개, 오사카(혼간지) 포위 | 5월 텐노지 전투, 7월 키즈가와구치 해전 |
| 1578년 11월 | 조정의 강화 권유 | 혼간지가 모리 가문과의 의리를 이유로 거절 |
| 1580년 윤3월 | 칙명강화 | 고노에 사키히사 등 칙사. 4월 켄뇨 퇴거 |
강화의 회차 번호는 연구자마다 다르다. 1570년 말의 중재를 강화로 칠지에 따라 한 칸씩 어긋나기 때문이다. 일부 해설에 나오는 ‘1572년 화의’는 성립한 것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해에 요시아키가 다케다 신겐에게 노부나가와 혼간지 사이의 화친을 알선해 달라고 부탁한 일은 확인된다.14
4-2. 1575년의 사면 — 그림 세 폭과 슈인조
세 번째 강화는 나가시마와 에치젠의 잇키가 무너진 직후 맺어졌다. 『신초코키』 권8에는 1575년 10월 21일의 일이 짧게 나온다.
十月廿一日 大坂門跡之儀 三好笑岩 友閑 兩人御使申御赦免也 小玉檻 枯木 花之繪 三軸進上候て年寄共罷參
10월 21일, 오사카 몬제키(혼간지)의 일은 미요시 쇼간과 (마츠이) 유칸 두 사람이 사자가 되어 사면이 이루어졌다. (송나라 화가) 옥간(玉澗)의 「고목」과 꽃 그림 등 세 폭을 바치고 토시요리(年寄, 중신)들이 찾아와 인사했다.
『신초코키』 권8. 오타 규이치 편, 1600년 전후 성립.
‘사면’이라는 말대로 노부나가 쪽 기록에는 이 일이 대등한 강화가 아니라 혼간지의 사죄로 나온다. 이 강화를 뒷받침하는 노부나가의 슈인조(朱印状, 붉은 도장을 찍은 명령서)가 군마현립문서관에 남아 있다. 1576년 2월 15일자로 혼간지 앞으로 보낸 것으로, “귀사를 사면한 이상 참배하러 오는 문도와 혼간지에 딸린 절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대하겠다”는 내용이다.15
이 강화도 오래가지 않았다. 1573년 노부나가에게 교토에서 쫓겨난 쇼군 요시아키가 1576년 2월 빈고 도모로 옮겨 모리 테루모토에게 몸을 의탁했고 5월 모리 가문이 반노부나가로 돌아섰다. 같은 시기 혼간지는 오랫동안 가가에서 대립해 온 우에스기 겐신과도 화친을 맺었다.14 노부나가는 4월 오사카(혼간지)를 포위했고 5월 텐노지 전투에서 오다 쪽 지휘관 하라다 나오마사(原田直政)가 전사했다. 혼간지로 들어가는 바닷길을 놓고 모리 수군과 오다 수군이 맞붙은 키즈가와구치 해전은 별도 글에서 자세히 다뤘다.
4-3. 1578년, 칙명을 한 번 거절하다
1578년 10월 셋츠의 아라키 무라시게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자 노부나가는 11월 조정을 움직여 혼간지에 강화를 권했다. 이번에는 혼간지가 거절했다. 모리 테루모토와의 “근년의 호의”를 저버리고 혼자 강화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14 2년 후인 1580년에는 칙명강화를 받아들이는 켄뇨지만 이 시점에는 동맹에 대한 의리를 핑계로 칙명을 거절했다.
이 기간 켄뇨는 각지 문도에게 지원을 당부하는 서장을 거듭 보냈고 그 초안은 『켄뇨 쇼닌 분안(顕如上人文案)』으로 묶여 니시혼간지에 전해져 내려온다.16 이 시기 오사카(혼간지)는 모리의 수군이 실어 날라 주는 병량과 사이카슈(雑賀衆, 기이 사이카 지방의 철포로 이름난 문도 무사 집단)의 힘으로 버텼다.
5. 잇코잇키와 켄뇨 — 나가시마·에치젠·가가
5-1. 켄뇨는 잇키를 지휘했는가
잇코잇키(一向一揆, 정토진종 문도들의 봉기)는 ‘혼간지의 군대’로 그려지곤 한다. 오사카(혼간지)의 켄뇨가 명령하면 이세 나가시마, 에치젠, 가가의 문도들이 일제히 봉기해 노부나가를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지의 잇키에게는 저마다 현지 사정이 있었고 켄뇨의 통제력 역시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다.
5-2. 나가시마, 1574년
이세 나가시마의 잇키는 1570년 노다·후쿠시마 전투 무렵 봉기해 오와리의 오키에성을 함락시키고 성을 지키던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오키를 자결하게 만들었다. 당시 노부나가는 서쪽의 시가에서 아사쿠라·아사이 연합군에 발이 묶여 오와리 쪽으로 구원군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1570년 말 아사쿠라·아사이 연합군과 강화를 맺고 물러난 노부나가는 1571년과 1573년 두 차례에 걸쳐 나가시마를 공략했으나 실패했고, 1574년 7월에 다시 한 번 대군으로 섬을 포위했다. 『신초코키』에는 포위 이후의 경과가 이렇게 나온다.
七月十三日に 島中の男女貴賤不知其數長島又は屋長島 中江三ケ所へ逃入候旣三ケ月相拘候間過半餓死仕候 (중략) 中江城 屋長島の城 (중략) 男女二萬計幾重も尺を付取籠被置候四方より火を付燒ころしに被仰付
7월 13일, 섬 안의 남녀 귀천이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나가시마·야나가시마·나카에 세 곳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석 달을 버티는 동안 태반이 굶어 죽었다. (중략) 나카에성·야나가시마성의 남녀 2만가량을 여러 겹 목책으로 둘러 가두고 사방에서 불을 붙여 태워 죽이라 명했다.
『신초코키』 권7.
위 인용의 중략 부분에는 9월 29일 나가시마성이 항복한 후 배로 빠져나가던 사람들까지 철포로 쏘고 칼로 베어 죽였다고 적혀 있다. 그 뒤 나카에성과 야나가시마성에 남아 있던 남녀는 여러 겹 목책 안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었다. 희생자 수로 자주 인용되는 ‘2만’은 노부나가 쪽 기록인 『신초코키』에 나오는 숫자다. “가량(計)“이 붙은 어림수이긴 하지만, 학살을 저지른 쪽의 기록이 스스로 이만한 규모를 적었다는 점에서 실제로도 2만 명 가까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17
5-3. 에치젠, 1574–1575년 —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가미가타 사람들”
에치젠은 원래 아사쿠라 가문의 영지였다. 1573년 아사쿠라 가문을 멸망시킨 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의 옛 가신 카츠라다 나가토시(마에바 요시츠구)에게 에치젠을 맡겼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다른 옛 가신들과의 다툼 속에서 1574년 1월 잇키가 일어났고, 2월 상순에는 가가에서 초청돼 온 혼간지 승려 시치리 요리치카(七里頼周)가 잇키의 대장이 됐다. 잇키는 4월 아사쿠라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까지 쓰러뜨리고 에치젠을 손에 넣었다.
그 뒤 혼간지는 시모츠마 라이쇼(下間頼照)를 보내 에치젠의 슈고(守護, 지방 장관)로 앉혔다. 1577년 오쿠가키(奥書, 끝에 적은 성립 경위)가 붙은 『에츠슈 군키(越州軍記)』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해 6월 29일 혼간지 가신의 서장에 “에치젠 전체가 고루 평정되었다”는 구절이 있어 이 무렵 에치젠이 혼간지 지배 아래 들어간 것은 1차 사료로도 확인된다.18
에치젠은 이로써 ‘혼간지가 다스리는 땅’이 됐다. 『에츠슈 군키』에는 바로 그 지배에 대한 현지 문도들의 불만이 남아 있다.
坊主達は後生をこそ頼みたれ、或ひは下部のごとく荷を持たせ、或ひは下人のごとく鑓をかたねさせ召使はるゝ事、一向心得ざる次第なり 我等粉骨を尽して此国を打取りけるに、何とも知らざる上方の衆が下りて、国を恣に致す事、所存の外なり
승려들에게는 후생(내세)을 의지했을 뿐인데, 종처럼 짐을 지게 하고 하인처럼 창을 메게 하며 부리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 우리가 뼈를 깎아 이 땅을 빼앗았는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가미가타(上方, 교토·오사카 일대) 사람들이 내려와 제멋대로 하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에츠슈 군키』. 1577년 오쿠가키(奥書, 책 끝의 성립 기록).
켄뇨가 보낸 대리인들은 현지의 문도와 고쿠진 위에 군림했고, 이 때문에 불만이 쌓여 잇키 안에서 다시 잇키가 일어나는 웃지 못할 일도 발생했다. 일부 문도 집단이 라이쇼와 시모츠마 일족에게 봉기했다가 진압된 사례가 그것이다. 1575년 8월 노부나가가 다시 쳐들어왔을 때도 현지 문도 상당수는 출진 명령에 응하지 않았고 혼간지에 딸린 절 가운데도 노부나가에게 내응한 곳이 나왔다. 켄뇨는 그해 8월 22일 문도들에게 “각 입구를 특별히 경계하라고 매번 일러 보냈는데 모두의 방심이 말로 다할 수 없다. 그 지방의 불법(佛法)이 무너지니 한탄스럽다”는 편지를 보냈다.18
간다 지사토는 『에츠슈 군키』를 1차 사료와 대조한 2019년 논문에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신앙의 차원에서는 혼간지 법주에게 귀의하는 사람들이 혼간지의 교단 질서나 정치적 지배에는 반발한다.”18
노부나가의 보복은 참혹했다. 『신초코키』 권8에는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각 부대가 붙잡아 바친 사람이 “1만 2,250여로 기록되었다고 한다”고 나오고, 다른 지방으로 끌고 간 남녀까지 합치면 “3~4만에 이를 것인가”라는 말이 덧붙어 있다. 앞의 수치는 전해 들은 기록이고, 뒤의 수치는 생포와 처형을 합쳐 추산한 수다.19 간다는 이 학살의 원인이 상대가 혼간지 문도였기 때문이 아니고, 적에게 내응한 자기 영지 백성에 대한 처벌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같은 시기에 노부나가가 가가 잇키의 항복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자신에게 내응한 혼간지에 속한 절들은 그대로 살려 두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18
5-4. 가가 — 혼간지 문도가 다스린 땅의 끝
가가 지역은 1488년 잇키가 슈고였던 도가시 마사치카를 자결로 몰아넣은 뒤 거의 한 세기 동안 혼간지 문도가 다스린 땅이었다. 간다 지사토의 평전 『켄뇨(顕如)』 출판사 소개문에 켄뇨가 “가가의 다이묘”라고까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20 1580년 강화 조건에는 가가의 에누마·노미 두 군을 반환한다는 조항이 들어갔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해 11월 시바타 카츠이에는 가가 잇키 지도자 19명의 목을 아즈치로 보냈고 1582년 3월 하쿠산 기슭의 도리고에성이 함락되면서 가가의 잇키는 끝났다.21
켄뇨에게는 문도를 움직일 신앙의 권위가 있었지만 그 권위를 정치 지배로 바꾸려 한 에치젠에서는 현지의 반발에 부딪혔다. 나가시마와 에치젠에서 벌어진 일도 켄뇨의 지휘보다는 혼간지의 권위와 지역 사정이 얽힌 결과였다.
6. 1580년 — 칙명강화와 쿄뇨
6-1. “아리오카·미키와 같은 꼴이 될 것이 눈앞에 보인다”
1579년 말 혼간지는 조정에 몰래 강화 협상 의사를 전했고 노부나가도 조정에 중재를 청했다. 1580년 3월 1일 칙사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간주지 하레토요(勧修寺晴豊)·니와타 시게야스(庭田重保)가 오사카(혼간지)로 내려갔다. 3월 17일 노부나가는 ‘소샤멘(惣赦免, 전면 사면)‘을 담은 키쇼몬(起請文, 신불에 맹세하는 서약문)을 칙사에게 냈다. 오사카(혼간지)에서 물러나면 가가의 두 군을 돌려주고 혼간지에 딸린 절들의 왕래도 전과 같이 인정한다는 조건이었다. 윤3월 5일 켄뇨가 이를 받아들였다.22
켄뇨가 왜 받아들였는지는 그 자신이 남긴 서장에 나온다. 퇴거 직후인 4월 15일, 그는 오미 북부의 문도들에게 이렇게 썼다.
然時ハ有岡・三木同前ニ可成行事眼前候、忽開山尊像をハはしめ悉相果候ハヽ、可為仏流段絶事歎入計候、就其、如思案叡慮へ御請申候
그렇게 되면 아리오카·미키와 같은 꼴이 될 것이 눈앞에 보인다. 개산의 존상을 비롯해 모두 끝장나면 불법의 법류가 끊기니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생각한 대로 천황의 뜻에 승낙을 올렸다.
켄뇨 서장, 1580년 4월 15일, 오미 북군 문도 앞. 와카야마현립박물관 소장 사본.
같은 서장에서 켄뇨는 형편을 구체적으로 늘어놓는다. 오사카(혼간지)와 바깥 성채, 효고·아마가사키의 방어와 군량·탄약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모리 세력은 이와야·효고·아마가사키(혼간지를 가까이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위치)에서 물러났고, 더욱이 서쪽의 우키타가 노부나가 측으로 돌아서는 바람에(모리는 우키타를 견제해야 했다) 바다와 육지 양쪽의 작전이 모두 막혔다는 것이다.23 아리오카는 1579년 함락된 아라키 무라시게의 성, 미키는 1580년 정월 굶주림 끝에 항복한 벳쇼 가문의 성이다. 아리오카에서는 성주 일족과 가신의 처자가 처형됐고 미키에서는 성주 벳쇼 나가하루가 자결했다. 켄뇨는 성주 일족이 처형되거나 자결한 두 성과 같은 결말만은 피하려 했다. 혼간지는 신란의 혈통이 대대로 이어 온 교단이라, 켄뇨 일족이 끊기면 교단도 끊긴다. 그가 서장에서 “법류가 끊긴다”고 한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1570년에 문도들을 동원해 무기를 들었던 명분과 1580년에 무기를 내려놓은 명분이 같았던 셈이다.
6-2. 4월 9일의 퇴거
노부나가와의 약속 기한은 『신초코키』에는 7월 20일 이전, 노부나가의 키쇼몬에는 7월 우란분(盂蘭盆, 음력 7월 15일 무렵 조상의 넋을 공양하는 불교 행사) 전으로 나와 있다. 켄뇨는 그보다 훨씬 앞선 4월 9일 오사카(혼간지)를 떠났다. 『신초코키』에는 그 경위가 이렇게 나온다. 켄뇨가 오사카(혼간지)의 뒷일을 신몬슈(新門主, 후계자) 쿄뇨에게 맡기고 먼저 떠나겠다고 알리자, 최근 몇 해 동안 이곳에서 처자식과 함께 살아온 사이카슈와 아와지 섬 출신 사람들(노부나가에 맞서 혼간지를 지키려고 건너온 이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건 곤란하다며 쿄뇨를 받들어 농성을 이어 가려 했고 쿄뇨도 이에 동조했다. 그래서 켄뇨와 부인 뇨슌, 시모츠마 가신들은 칙사에게 사정을 해명한 뒤 배를 불러 먼저 떠났다는 것이다.22 켄뇨는 이튿날 사이카의 사기노모리에 닿았다. 켄뇨 자신의 서장에도 “지난 10일 기슈 사이카에 내려왔다”고 나온다.23
6-3. 쿄뇨는 처음부터 반대했나
쿄뇨가 처음부터 강화에 반대한 강경파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켄뇨의 4월 15일 서장을 보면 쿄뇨도 처음에는 강화를 받아들였다. 켄뇨는 “이 일을 신몬슈와 직접 의논했고, 그 뒤 궁중에 올린 문서에도 (신몬슈가) 서명을 더했다”고 썼다.23 쿄뇨는 이 궁중에 올릴 문서에 서명한 이후 시점에 마음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4월 3일 그는 오미 북부의 문도들에게 보낸 서장에 “혼간지와 노부나가의 화친이 이미 성립했다. 그렇다면 저쪽의 배신은 눈앞에 보인다. 그래서 내가 이 절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고 썼다.24
켄뇨의 반응은 격했다. 같은 4월 15일 서장에서 그는 쿄뇨가 “뜻밖의 일을 꾸미고 못된 자들의 꼬드김(いたつら者のいひなし)에 동조했다”고 비난했다. 쿄뇨 쪽이 퍼뜨린 ‘켄뇨 은거설’도 공개적으로 부정했다.
将又予令隠居云々、世務等更無其儀候、仏法相続之儀、猶以不及其沙汰候処、諸国門下へ申ふるゝ趣、言語道断虚言共ニ候
또 내가 은거했다고들 하나 교단 사무를 넘긴 일은 전혀 없고 불법 상속은 더욱이 논한 적도 없는데, 여러 지방 문하에 퍼뜨리는 내용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뿐이다.
켄뇨 서장, 1580년 4월 15일.
켄뇨는 문도들에게 오사카(혼간지)가 아니라 자신이 사이카로 모셔 간 신란의 목상(개산의 존상)을 참배하라고 명했다. 엣추·노토·사카이 등 여러 지방 앞으로 비슷한 문언의 서장이 남아 있다.23 쿄뇨도 지지 않았다. 퇴거 뒤인 9월 28일자 서장에서 그는 “내가 가독을 이을 몸인데도 한마디 알림 없이 성을 내주었다”고 아버지를 비판하고 “저쪽이 무어라 하든 동조하지 말고 모두 이쪽으로 참배하라”고 썼다.24
쿄뇨는 4개월을 더 버티다 8월 2일 오사카(혼간지)를 떠났다. 그 직후 혼간지 가람이 모두 불탔다. 『신초코키』에는 횃불에 서풍이 불어닥쳐 사흘 밤낮 탔다고 나와 있고, 나라(奈良) 고후쿠지의 승려 일기 『다몬인 닛키(多聞院日記)』에는 쿄뇨 쪽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전한다고 한다.22
6-4. 부자의 대립은 연극이었나
켄뇨와 쿄뇨의 대립이 노부나가를 속이기 위한 부자의 밀약이었다는 설이 있다. 아버지는 강화로 교단을 지키고 아들은 항전으로 오사카(혼간지)를 지키는 양면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이 설은 근대의 쓰지 젠노스케가 제창했지만, 쿄뇨 연구자 오쿠와 히토시(大桑斉)와 간다 지사토는 부정한다.25 켄뇨가 여러 지방에 보낸 공개 서장에서 쿄뇨의 주장을 “거짓말”이라 부른 점, 쿄뇨가 퇴거 뒤에도 자신이 가독이라며 독자적으로 문도를 모은 점, 2년 뒤 쿄뇨의 서약문에 후회의 문언이 들어간 점이 근거다. 부자가 갈라선 이유로는 사이카 문도가 군량이 끊길 것을 두려워해 쿄뇨를 부추겼다는 설, 무력으로 노부나가와 조정에 혼간지 존속의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는 설 등이 제시돼 있다.25
켄뇨는 쿄뇨를 의절했다. 오쿠와 히토시는 “이후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의절 상태가 이어졌다”고 썼다. 다만 의절을 선언한 문서의 원문과 정확한 날짜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다.25
6-5. 혼노지의 변과 화해
1582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었다. 18일 뒤인 6월 20일, 켄뇨의 측근 시모츠마 라이렌(下間頼廉)은 에치젠의 문도들에게 “신몬슈님과의 사이도 반드시 원만히 수습될 것이니 안심하라”고 써 보냈다. 조정에서 니와타·간주지·나카야마 세 공가가 사기노모리로 내려와 “노부나가가 죽었으니 부자가 화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칙지를 전했고 6월 27일 쿄뇨는 서약문을 냈다.26
今度ノ始末。徒者之申成ニ。令同心事後悔千萬々々。今ヨリ後ハ湯ニモ水ニモ 御所樣可爲 御疑次第。
이번 일의 전말은, 못된 자의 꼬드김에 동조한 것을 천만 후회한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든 고쇼님(켄뇨)의 뜻대로 하겠다.
쿄뇨 서약문, 1582년 6월 27일. 『사기노모리 큐지키』(1693년 편찬) 수록.
“못된 자의 꼬드김”이라는 말은 2년 전 켄뇨가 서장에 쓴 표현과 그대로 맞물린다. 의절은 풀렸다. 그러나 『사기노모리 큐지키』에는 켄뇨가 “칙명이니 의절은 풀지만 가독 상속은 안 된다”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니시혼간지 쪽의 기록이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쿄뇨의 측근인 시모츠마 라이류(下間頼龍)가 켄뇨의 생전 내내 용서받지 못했다는 점은 여러 기록에서 똑같이 확인된다.2627 부자 간에 공식적으로 화해를 한 뒤에도 쿄뇨 쪽과 켄뇨 쪽의 가신들 사이에 새겨진 감정의 골은 그대로 남았다.
7. 히데요시의 땅 위에서 — 사기노모리에서 교토까지 (1580–1592)
7-1. 사기노모리의 3년
오사카(혼간지)를 떠난 켄뇨는 기이 사이카의 사기노모리 고보(鷺森御坊, 현 와카야마시)를 새 거처로 삼았다. 지금의 혼간지 사기노모리 별원이다. 와카야마시의 발굴 조사에서는 최대 폭 16.9미터의 큰 도랑이 나왔는데 이 시기 사기노모리 혼간지를 지키던 해자로 추정된다.28 이 무렵부터 켄뇨의 유히츠(右筆, 서기) 우노 몬도(宇野主水)가 일기를 남겼다. 사기노모리와 가이즈카, 텐마 시절의 혼간지를 날마다 기록한 이 일기 덕분에 켄뇨의 만년은 그 앞 시기보다 훨씬 자세히 알 수 있다.
7-2. 가이즈카와 기슈 정벌
1582년 노부나가가 죽고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자 혼간지의 거처는 히데요시가 정했다. 1583년 7월 켄뇨는 이즈미 가이즈카(貝塚)의 진종 사원, 지금의 간센지(願泉寺)로 옮겼다. 『우노 몬도 닛키(宇野主水日記)』에는 그날의 모습이 이렇게 남아 있다. “몬슈(門主, 종주)를 비롯해 여인들이 모두 배로 이즈미 가이즈카에 상륙하셨다. 개산(신란)의 영상께서도 무사히 바다를 건너셨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고마운 일이라 하였다.”28
히데요시가 혼간지를 기이에서 떼어 놓은 데는 계산이 있었다고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사이카와 네고로는 히데요시가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혼간지가 가까이 있으면서 이들과 협력해 히데요시와 적대하면 곤란했다. 1585년 3월 히데요시가 기슈 정벌에 나서자 쿄뇨와 켄손(顕尊, 켄뇨의 둘째 아들로 고쇼지 주지)이 혼간지를 대표해 출진하는 히데요시를 맞이하고, 귀환길에는 병중이었던 켄뇨까지 나와 셋이서 임시 찻집을 차려 히데요시를 접대했다.28 히데요시가 공격한 곳은 한때 혼간지를 지켜 준 사이카 문도의 땅이었는데, 혼간지의 종주는 공격하는 히데요시를 접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켄뇨가 사이카 공격에 군사적으로 협력하거나 문도에게 협력을 지시했다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7-3. 텐마 — 오사카성의 강 건너편
1585년 5월 4일, 히데요시는 몸소 텐마에 나와 혼간지에 줄 땅을 측량했다.
秀吉御自身御出有テ、縄打ヲセラルル也、中嶋天満宮ノ会所ヲ限テ東ノ河縁マデ七町、北へ五町也・・・元ノ大坂寺内ヨリモ事外広シ
히데요시가 몸소 나와 줄을 쳐 측량하셨다. 나카지마 텐만구의 회소를 경계로 동쪽 강가까지 7정, 북으로 5정이다. ……옛 오사카 경내보다도 훨씬 넓다.
『우노 몬도 닛키』(「가이즈카 고자쇼 닛키(貝塚御座所日記)」) 1585년 5월 4일.
땅은 넓었다. 다만 새 절터는 히데요시가 막 쌓고 있던 오사카성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이었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 땅을 “히데요시 궁전 앞의 고립된 저지”라 부르고 혼간지가 담을 두르거나 해자를 파는 것을 금지당했다고 기록했다.28 옛 오사카(혼간지) 지나이마치는 해자와 토루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텐마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같은 해 8월 이전한 켄뇨 일행은 형편이 어려웠다. 『우노 몬도 닛키』에는 가신들 가운데 “자기 집을 가진 자가 없어 저마다 불편하기가 말로 다할 수 없다”고 나온다. 켄뇨 자신도 서장 초안에 “임시로 초당을 세웠는데 너무 허술해 남 보기에도 어떨까 싶다”고 썼다. 이듬해 그는 아버지 쇼뇨의 33주기에 맞춰 고에이도(御影堂, 신란의 영상을 모신 당)를 세웠다. 이때도 그는 “문하의 정성(懇志)이 없으면 기댈 데가 없다”며 문도의 헌금을 청했다.28
7-4. 1589년의 텐마 경내 처벌
1589년 켄뇨는 텐마 시절 가장 큰 굴욕을 겪었다. 그해 2월 히데요시에게 적대하는 낭인들이 텐마 경내에 숨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공가 야마시나 토키츠네(山科言経)는 2월 29일자 일기에 “무사 낭인들 일로 전하께서 몬제키에게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갖가지 소문이 예사롭지 않아 두려웠다”고 썼다.
켄뇨는 3월 1일 낭인 비토 도큐(尾藤道休)와 그 종자를 처형해 목을 바쳤고 이튿날 낭인들의 집은 물론 그 집이 있던 두 동네의 집까지 모조리 헐어 불태웠다. 3월 8일에는 렌뇨(蓮如, 혼간지 8대 종주)의 손자인 일족 승려 간토쿠지 켄고(願得寺顕悟)를 자해하게 했다. 같은 날 히데요시는 경내의 조닌 60여 명을 잡아 이튿날 교토 로쿠조가와라에서 책형에 처했다. 여든이 넘은 노인부터 일곱 살이 안 된 아이까지 있었다고 한다. 켄뇨와 쿄뇨·켄손 세 사람은 혈판(血判, 피로 찍은 서명)을 찍은 키쇼몬을 냈다.29
寺内可被成御成敗之処、以御憐憫被御免段忝存候
경내 전체를 처벌하셔야 할 것을 연민으로 면해 주신 점 황송하게 여깁니다.
켄뇨·쿄뇨·켄손의 키쇼몬 문언, 1589년 3월. 고쇼지 사화를 통한 재인용.
이후 히데요시는 텐마 경내에 마치부교(町奉行) 두 명을 두고 법도를 정하고 검지(検地, 토지 조사)를 실시했다. 마치부교로 임명된 것은 혼간지의 시모츠마 라이렌과 시모츠마 나카유키였지만, 법도를 정하고 검지를 하는 것은 히데요시의 권한이었다. 혼간지가 자치적으로 다스려 온 지나이마치는 이로써 히데요시의 지배 아래로 넘어갔다.29
7-5. 교토 호리카와
1591년 히데요시는 교토 로쿠조 호리카와(六条堀川)의 땅을 혼간지에 기증했다. 처음에는 “시모토바 이북에서 아무 데나 고르라”고 했고 혼간지가 고른 곳이 호리카와였다. 남북 280간, 동서 360간에 이르는 넓은 땅이었다. 히데요시는 이전 비용을 고려해 혼간지에 3년 동안 여러 곳에 보내는 선물과 인사를 일절 중지하라고 명했다.30 교토 이전은 주라쿠다이 조성, 오도이(御土居, 교토를 둘러싼 토루) 축조, 사원을 한곳에 모은 데라마치 조성 같은 히데요시의 교토 개조 사업의 일부였다.
8월 5일 켄뇨는 텐마에서 교토로 옮겼다. 혼간지는 텐마의 고에이도를 해체해 교토로 옮겨 세웠고 이듬해 7월에는 아미다도(阿弥陀堂)도 완성됐다.30
7-6. 호온코 도중의 죽음
1592년 11월 20일, 신란의 기일 법요인 호온코(報恩講)를 앞두고 켄뇨가 쓰러졌고, 11월 24일 낮이 지나 교토 호리카와의 혼간지에서 50세로 죽었다. 양력으로는 12월 27일이다. 호온코는 그대로 이어졌고 이튿날 쿄뇨가 법요문을 읽었다. 같은 날 부인 뇨슌이 머리를 깎았다.27
장례는 음력 12월 10일에 치러졌다. 관을 멘 사람 가운데 쿄뇨·켄손·준뇨 세 아들이 있었다. 시치조가와라에서 화장한 유골은 히가시야마 오타니에 있는 신란(켄뇨의 선조이자 혼간지의 시조)의 묘소와 같은 곳에 묻혔다. 이때 쿄뇨는 35세, 켄손은 29세, 준뇨는 16세였다.27
8. 남겨진 균열 — 유즈리조와 동서 분립 (1592–1602)
8-1. 쿄뇨의 계승과 인사 쇄신
켄뇨가 죽자 장남 쿄뇨가 그대로 뒤를 이었다. 12월 히데요시는 쿄뇨에게 슈인조를 보내 계승을 승인했다.
門跡不慮之儀、無是非次第、断言語候、就中其方惣領儀候間、有相続、法度以下堅申付、勤行無怠慢、当家相立覚悟持肝要候
몬제키(켄뇨)의 뜻밖의 일은 어쩔 도리 없는 일로 말을 잃었소. 무엇보다 그대가 적자(惣領)이니 상속하여 법도 등을 굳게 분부하고 근행을 게을리 말며 이 집안을 세울 각오를 갖는 것이 긴요하오.
히데요시 슈인조, 1592년 12월, 쿄뇨 앞.
쿄뇨는 계승하자마자 인사부터 단행해 조직을 자신에 맞게 재편했다. 켄뇨의 측근 시모츠마 나카유키를 물리고, 1580년 농성 때부터 자기 편이었던 시모츠마 라이류를 등용했으며, 켄뇨에게 근신 처분을 받았던 80여 명을 사면했다.27 1580년에 강화를 따른 쪽과 농성을 택한 쪽의 대립이 켄뇨가 죽자마자 다시 불거졌다. 밀려난 온건파는 켄뇨의 부인 뇨슌에게 기댔다.
8-2. 켄뇨의 1587년 유즈리조
1593년 윤9월, 뇨슌은 히데요시에게 쿄뇨를 물리고 막내아들 준뇨를 세워 달라고 호소했다. 근거로 내놓은 것이 켄뇨의 유즈리조(譲状, 상속을 지정하는 문서)였다. 날짜는 1587년 12월 6일, 아직 득도하기 전이던 준뇨의 아명 ‘아차(阿茶)’ 앞으로 혼간지 주지직을 넘긴다는 내용이다. 이 문서는 지금 니시혼간지에 있다.31 ‘1580년 유즈리조’라고 소개되기도 하지만 1580년은 쿄뇨를 의절한 해이고 유즈리조의 날짜는 1587년이다.
하지만 켄뇨 생전에 쿄뇨는 의절 기간을 제외하고 줄곧 ‘신몬슈’로 대우받은 반면, 준뇨는 후계자로 대우받거나 그런 호칭으로 불린 적은 없다. 간다 지사토는 이 유즈리조가 주변에 알려지지 않아 1593년까지 효력을 갖지 못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31
윤9월 16일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으로 쿄뇨를 불러 열한 개 조의 문책을 내렸다. 오사카(혼간지)에서 농성한 일, 선대가 근신시킨 자를 불러들인 일을 비롯하여 그 밖에 행실 문제 등을 따졌다. 그러고는 마음을 고쳐먹고 10년 동안 주지를 맡은 뒤 준뇨에게 넘기라고 했다. 쿄뇨는 이 안을 받아들였지만, 동석한 시모츠마 라이렌이 “유즈리조는 종단 내의 주요 인사들에게 공표돼야만 효력이 있다”며 켄뇨 명의 유즈리조의 유효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히데요시는 격노해 쿄뇨에게 즉시 은퇴할 것을 명했다.
10월 13일 간파쿠(関白, 최고 귀족 관직) 도요토미 히데츠구, 10월 16일 히데요시의 슈인조로 준뇨의 계승이 확정됐다.31 쿄뇨는 혼간지 북쪽에 은거처를 짓고 물러났지만 자신을 따르는 문도와 함께 독자적으로 법요를 계속했다.
8-3. 유즈리조는 진짜인가
이 유즈리조의 진위는 400년 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근대의 쓰지 젠노스케가 위작으로 단정한 뒤 학계에서는 위작설이 오랜 기간 우세했다. 2017년 긴류 시즈카가 켄뇨의 다른 문서와 화압(花押, 서명 대신 쓰는 도형 서체)·필적을 비교해 진본이라는 논문을 냈고, 같은 해 우에바 아키오(上場顕雄)가 그 진본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문을 냈다.31 에도 시대 이래 동서 혼간지는 각자 자신들이 혼간지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주장해 왔고, 이 유즈리조 문서의 진위 여부에 의해 동서 혼간지의 위상이 갈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위 여부는 학계에서도 여전히 논쟁 중인 주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판단하지 않겠다.
8-4. 1602년 — 이에야스는 혼간지를 쪼갰나
1598년 뇨슌과 히데요시가 잇따라 죽자 쿄뇨의 활동은 다시 커졌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쿄뇨는 시모츠케 오야마(현 도치기현 오야마시)에 있던 이에야스를 직접 찾아가 줄을 댔고, 전투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1602년 쿄뇨에게 교토 가라스마 로쿠조와 시치조 사이의 땅을 기증했다. 이듬해 고즈케에서 신란의 목상을 맞아들이고 1604년 고에이도가 완성되면서 지금 교토에 가면 볼 수 있는 것처럼 호리카와의 혼간지(니시혼간지)와 가라스마의 혼간지(히가시혼간지)가 나란히 서게 됐다.32
이렇게 동서 혼간지를 양립시킨 것을 두고 이에야스가 혼간지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일부러 쪼갠 책략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 근거로 자주 드는 것이 혼다 마사노부의 진언 장면이다. 혼간지는 히데요시 시절에 이미 준뇨파와 쿄뇨파 둘로 분열돼 있었고, 이에야스도 미카와에서 혼간지 문도가 일으킨 잇코잇키로 위기를 겪었으니 혼간지를 둘로 나눠 세우게 하라는 내용이다. 이 장면은 쿄뇨의 가신 우노 신조가 남긴 『우노 신조 오보에가키(宇野新蔵覚書)』에 나오고 『슈코 잣펜(集古雑編)』에도 비슷한 발언이 실려 있지만, 이에야스가 혼간지를 약화시키려 했다고 적은 사료는 없다.32 미카와 잇코잇키에서 잇키 측에 섰던 마사노부의 생애는 별도 글에서 다뤘다.
하지만 앞에서 본 대로 혼간지는 1580년 강화파와 항전파의 대립 이래 이미 갈라져 있었고, 쿄뇨의 은퇴 뒤로는 10년 가까이 주지가 둘인 상태였다. 이에야스의 기증은 분열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분열을 확정한 일이었다.32
8-5. 켄뇨가 남긴 것
1570년 켄뇨는 신란 이래의 교단을 지키자는 명분으로 문도를 일으켜 노부나가와 맞섰고, 1580년에는 같은 명분으로 무기를 내려놓았다. 패전한 뒤에는 사기노모리를 거쳐 히데요시가 정해 준 땅으로 세 번이나 거처를 옮겨 가며 경내의 자치 권한과 일족 승려의 목숨까지 내주었지만 끝내 교단을 해체당하지는 않고 혼간지를 지켜냈다.
오늘날 교토 호리카와의 니시혼간지는 켄뇨가 1591년에 받은 바로 그 땅에 있다. 가라스마의 히가시혼간지는 1580년 오사카(혼간지)에 남아 농성한 장남 쿄뇨가 세운 절이다.
출처
1차·준1차 사료 (편찬 시기 명시)
- 켄뇨 서장(1570년 9월 2일, 미노 군조 문도 앞) — 안요지(安養寺) 소장 원본, 기후현 지정문화재. 기후현박물관 보고서의 번각문을 이용
- 켄뇨 서장(1570년 9월 6일, 오미 중군 문도 앞) — 멘쇼지(明照寺) 전래, 「시가현사 채집문서 89(滋賀県史採集文書 89)」 근대 필사본 쪽 이미지 판독
- 켄뇨 서장·쿄뇨 서장(1580년 4월 15일·4월 3일) — 와카야마현립박물관 소장 사본, 학예원 석문
- 오다 노부나가 슈인조(朱印状)(1576년 2월 15일, 혼간지 앞) — 군마현립문서관 해설의 석문
- 『토키츠구쿄키(言継卿記)』 — 야마시나 토키츠구의 일기, 1570년 당일 기록. 국서간행회(国書刊行会) 활자본 쪽 이미지 판독
- 『호소카와 료케키(細川両家記)』 — 미요시 쪽 기록, 후반부 1573년경 성립. 『군쇼루이주(群書類従)』본
- 『신초코키(信長公記)』 권3·7·8·13 — 오타 규이치, 1600년 전후 성립. 위키문헌 전사본과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활자본 대조
- 『에츠슈 군키(越州軍記)』 — 1577년 오쿠가키. 간다 지사토 2019 논문을 통한 재인용
- 『오유도노노 우에노 닛키(御湯殿上日記)』·『텐분 닛키(天文日記)』·『시신키(私心記)』·『곤조 오넨키(厳助往年記)』 — 쓰지 젠노스케 1930·하마구치 세이시 2023을 통한 재인용
- 『우노 몬도 닛키(宇野主水日記)』·『켄뇨 쇼닌 분안(顕如上人文案)』·『토키츠네쿄키(言経卿記)』 — 고쇼지 사화를 통한 재인용
- 『오타니 혼간지 츠키(大谷本願寺通紀)』 — 겐치(玄智) 편, 1791년. 『사기노모리 큐지키(鷺森旧事記)』 — 1693년 편찬, 1723년 가필. 모두 니시혼간지 쪽의 후대 편찬물
- 『우노 신조 오보에가키(宇野新蔵覚書)』 — 쿄뇨의 가신 우노 신조의 기록, 에도 초기 성립(정확한 연도 미확인). 『슈코 잣펜(集古雑編)』 — 모두 일본어 위키백과를 통한 재인용
- 『콘코 히토리고토(今古独語)』(켄세이) — 다니시타 이치무 1941을 통한 재인용. 『사이넨지 문서(西念寺文書)』의 켄뇨 서장 — 간다 지사토 2019를 통한 재인용
- 『혼간지시(本願寺史)』 수록 노부나가 키쇼몬, 『완역 프로이스 일본사(完訳フロイス日本史)』 5권, 『다몬인 닛키(多聞院日記)』 — 일본어 위키백과를 통한 재인용
- 『게이즈 산요(系図纂要)』 — 막부 말기 계보집. 하마구치 세이시 2023의 논증을 통해서만 언급
현대 연구자·논문
- 하마구치 세이시(浜口誠至), 「혼간지 종주 켄뇨의 처 뇨슌의 친아버지(本願寺宗主顕如妻 如春の実父)」(2023), 원문 열람
- 간다 지사토(神田千里), 「『에츠슈 군키』로 보는 에치젠 잇코잇키(『越州軍記』にみる越前一向一揆)」(2019), 원문 열람. 『잇코잇키와 이시야마 합전(一向一揆と石山合戦)』(2007)·『켄뇨(顕如)』(2020)는 위키백과 각주와 출판사 소개를 통해서만 확인
- 쓰지 젠노스케(辻善之助), 『혼간지론(本願寺論)』(1930), 원문 열람
- 이토 다케시(伊藤毅), 「셋츠 이시야마 혼간지 지나이마치의 구성(摂津石山本願寺寺内町の構成)」 『건축사학(建築史学)』 3호, 원문 열람
- 다니시타 이치무(谷下一夢), 『신슈시노 쇼켄큐(真宗史の諸研究)』(1941), 원문 열람
- 이즈미 요시히로(泉義博), 「에치젠 아사쿠라씨와 가가 잇코잇키(越前朝倉氏と加賀一向一揆)」, 원문 열람
- 야마다 아키히코(山田昭彦), 「쇼쿠호기 니시미노 다카기씨의 동향(織豊期・西美濃高木氏の動向)」(2016·2017), 격문 번각 이용
- 가와바타 야스유키(川端泰幸), 「근세 혼간지 정적론의 구조(近世本願寺正嫡論の構造)」, 원문 열람
- 우에바 아키오(上場顕雄), 「혼간지 켄뇨 ‘유즈리조’와 필적·화압(本願寺顕如「譲状」と筆跡・花押)」(2017), 서지만 확인. 긴류 시즈카(金龍静), 「켄뇨 유즈리조 고(顕如譲状考)」(2017), 가와바타 논문을 통한 재인용
- 안도 와타루(安藤弥), 「켄뇨의 전반생(顕如の前半生)」, 긴류 시즈카·기고시 유케이(木越祐馨) 편 『켄뇨(顕如)』(2016) 수록, 목차만 확인
- 가지로 도시오(鍛代敏雄), 「셋츠 나카지마 혼간지 지나이마치 고(摂津中島本願寺寺内町考)」(1987), 고쇼지 사화를 통한 재인용
- 구노 마사시(久野雅司)(2017), 오쿠와 히토시(大桑斉)(2013), 아마노 다다유키(天野忠幸)(2016), 요시이 가쓰노부(吉井克信), 우에바 아키오(上場顕雄)(2005), 도호대학 불교문화연구소(同朋大学仏教文化研究所)(2013) — 일본어 위키백과 각주를 통한 재인용, 원저 미열람
공식·표준 참고자료
- 코토뱅크(https://kotobank.jp) 수록 사전 항목: 「켄뇨(顕如)」(일본대백과전서 기타니시 히로무 집필 등), 「쿄뇨(教如)」(오쿠와 히토시 집필), 「이시야마 혼간지 잇키(石山本願寺一揆)」(신교 노리카즈 집필), 「이시야마 전쟁(石山戦争)」(긴류 시즈카 집필), 「지나이마치(寺内町)」(와키타 오사무 집필),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게이주인(慶寿院)」
- 군마현립문서관 인터넷 강좌 해설, 와카야마현립박물관 관장품 해설, 기후현 문화재 정보, 시가현립도서관 디지털 아카이브
- 혼간지 사기노모리 별원 공식 사이트, 와카야마시 사기노모리 유적 자료
- 교토시매장문화재연구소 현지설명회 자료(1995)·리플릿 교토 No.90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오사카부립도서관 증가 화한도서 목록(大阪府立図書館増加和漢図書目録)』 제30책(1941)으로 『속 신슈 대계(続真宗大系)』 제16권의 『우노 신조 오보에가키』 수록과 분류를 확인
- 아마가사키시 지역사 사전 apedia 「수호·수호대(守護・守護代)」, 『돈다바야시시사(富田林市史)』 제2권 「돈다바야시 지나이마치(「富田林」寺内町)」 — 사이트 접속 문제로 직접 열람하지 못함
- 일본어 위키백과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호소카와 료케키(細川両家記)」「노다·후쿠시마 전투(野田・福島の戦い)」「나가시마 잇코잇키(長島一向一揆)」「가가 잇코잇키(加賀一向一揆)」「켄뇨(顕如)」「쿄뇨(教如)」「준뇨(准如)」 — 연구서 재인용 경로로만 이용
전문 사이트·교단 해설
- 혼잔 고쇼지(本山興正寺) 「고쇼지 사화(興正寺史話)」 107·139–161(구마노(熊野恒陽, 이름 독음 미확인) 집필, 2019). 『우노 몬도 닛키(宇野主水日記)』 등 원문을 다수 인용하지만, 고쇼지는 근세에 니시혼간지와 대립한 교단이라 유즈리조 위작설 등 해석 부분은 교단 견해로 다뤘다
- 미네르바쇼보 『켄뇨(顕如)』 소개문(그림책 사이트 재수록)
확인하지 못한 것
- 켄뇨의 출생 날짜(1월 6일설)의 동시대 근거, 몬제키 칙허 전 혼간지가 낸 즉위료 액수
- 켄뇨가 쿄뇨를 의절한 문서의 원문과 날짜, 1580년 3월 17일 노부나가 키쇼몬의 원본
- 노부나가 쪽의 ‘허물어야 한다는 통고’ 문서. 간다 지사토(2007)·구노 마사시(2017) 원저의 정확한 문면
- 『우노 몬도 닛키(宇野主水日記)』 활자본은 열람 제한으로 원문을 직접 대조하지 못했다. 히데요시의 11개조를 실은 원 사료명도 특정하지 못했다
- 켄뇨 초상화 가운데 생전에 그린 수상이 있는지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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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뱅크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의 『햐카지텐 마이페디아(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 항목(https://kotobank.jp/word/石山本願寺-432270)은 당시 호칭을 오사카 고보·오사카 혼간지로 적는다. 에도 시대 이후의 호칭이라는 요시이 가쓰노부(吉井克信)의 견해는 일본어 위키백과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https://ja.wikipedia.org/wiki/石山合戦)을 통해 확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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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 혼간지 츠키(大谷本願寺通紀)』 권2 「역대 종주전(歴世宗主伝)」·『사기노모리 큐지키(鷺森旧事記)』, 『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仏教全書)』 132 수록(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https://dl.ndl.go.jp/pid/952836) 쪽 이미지 대조. 1월 6일설은 코토뱅크 「켄뇨(顕如)」(https://kotobank.jp/word/顕如-60986), 쇼군 부인 게이주인은 코토뱅크 「게이주인(慶寿院)」(https://kotobank.jp/word/慶寿院).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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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시타 이치무(谷下一夢), 『신슈시노 쇼켄큐(真宗史の諸研究)』(1941)의 「혼간지 몬제키의 인게의 기원에 대하여(本願寺門跡に於ける院家の起原に就いて)」「혼간지의 보칸 시모츠마씨에 대하여(本願寺の坊官下間氏について)」(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https://dl.ndl.go.jp/pid/1040684). 켄세이(顕誓)의 『콘코 히토리고토(今古独語)』는 이 책을 통한 재인용. 안도 와타루(安藤弥)의 논문은 긴류 시즈카·기고시 유케이 편 『켄뇨(顕如)』(宮帯出版社, 2016) 목차로 확인.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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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세이시(浜口誠至), 「혼간지 종주 켄뇨의 처 뇨슌의 친아버지(本願寺宗主顕如妻 如春の実父)」 『고마자와 시가쿠(駒澤史学)』 101호(2023) pp.138–160(https://komazawa-u.repo.nii.ac.jp/records/2005142). 『텐분 닛키(天文日記)』·『시신키(私心記)』·『곤조 오넨키(厳助往年記)』 인용과 혼례 경위는 이 논문을 통한 재인용.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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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젠노스케(辻善之助), 『혼간지론(本願寺論)』(1930) pp.21–28·103(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https://dl.ndl.go.jp/pid/1181237). 『오유도노노 우에노 닛키(御湯殿上日記)』 1559년 12월 27일의 내용과 『텐분 닛키(天文日記)』의 헌금 내용은 이 책을 통한 재인용. 즉위료 포상설은 코토뱅크 「켄뇨(顕如)」의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항목(기타니시 히로무 집필).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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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뱅크 「지나이마치(寺内町)」의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항목(와키타 오사무 집필, https://kotobank.jp/word/寺内町),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의 『야마카와 일본사 소사전(山川日本史小辞典)』 항목. 6정과 작은 정, 1544년의 10정, 주민 자치 조직, 1538년 7월 9일·8월 27일의 날짜, 정 단위 노동 부과는 이토 다케시(伊藤毅), 「셋츠 이시야마 혼간지 지나이마치의 구성(摂津石山本願寺寺内町の構成)」 『건축사학(建築史学)』 3호(https://www.jstage.jst.go.jp/article/jsahj/3/0/3_2/_pdf), 1535년의 화해와 제공사·덕정령 적용 제외의 뜻은 「고쇼지 사화(興正寺史話)」 107(https://www.koshoji.or.jp/shiwa_107.html), 인구 추정은 코토뱅크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https://kotobank.jp/word/石山本願寺-432270)에서 확인했다. 호소카와 게이초가의 관령·셋츠 수호직은 아마가사키시 지역사 사전 apedia 「수호·수호대(守護・守護代)」(https://www.archives.city.amagasaki.hyogo.jp/apedia/index.php?key=守護・守護代), 돈다바야시 문서는 『돈다바야시시사(富田林市史)』 제2권 「돈다바야시 지나이마치(「富田林」寺内町)」(https://adeac.jp/tondabayashi-city/texthtml/d000020/cp000002/ht000136)에 근거하지만 두 사이트는 직접 열람하지 못하고 검색 요약으로 확인했다. 돈다바야시 문서는 원본이 없고 후대 필사로 전하며 연대에 의문이 제기돼 있어 ‘1560년으로 전하는’이라고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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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 요시히로(泉義博), 「에치젠 아사쿠라씨와 가가 잇코잇키(越前朝倉氏と加賀一向一揆)」 『자쿠에츠 쿄도 켄큐(若越郷土研究)』(후쿠이현문서관 PDF, https://www.library-archives.pref.fukui.lg.jp/tosyo/file/614812.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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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료케키(細川両家記)』 1568년 10월과 1570년 내용, 『군쇼루이주(群書類従)』 제13집(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https://dl.ndl.go.jp/pid/1879780). 고쇼 재건 명목은 일본어 위키백과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에 각주 없이 나온다. 작자 이쿠시마 소치쿠는 일본어 위키백과 「호소카와 료케키(細川両家記)」(https://ja.wikipedia.org/wiki/細川両家記)를 통해 확인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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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키츠구쿄키(言継卿記)』 제4(国書刊行会) 1570년 9월 2·9·12·13·14·20일(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https://dl.ndl.go.jp/pid/945798) 쪽 이미지 판독. 9월 12일 일기의 ‘중재(扱)’ 한 글자는 판독이 확실하지 않다. 『신초코키(信長公記)』 권3 「노다·후쿠시마 고진노 코토(野田福島御陣之事)」(위키문헌 전사본).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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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료케키(細川両家記)』 1570년 9월 내용(각주 8과 같은 판). 『신초코키(信長公記)』 권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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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조본 번각은 야마다 아키히코(山田昭彦), 「쇼쿠호기 니시미노 다카기씨의 동향(織豊期・西美濃高木氏の動向)」 『기후현박물관 조사연구보고(岐阜県博物館調査研究報告)』 37호(https://www.gifu-kenpaku.jp/wp-content/uploads/2022/10/岐阜県博物館_調査研究報告_第37号(2016・2017)_山田昭彦_織豊期・西美濃高木氏の動向.pdf), 문화재 지정은 기후현 「이시야마 합전 관계 문서 및 안요지 문서(石山合戦関係文書及び安養寺文書)」(https://www.pref.gifu.lg.jp/page/6743.html). 멘쇼지본은 시가현립도서관 디지털 아카이브(https://da.shiga-pref-library.jp/item/detail/?id=1002744) 쪽 이미지. 번각문의 오자는 두 본을 대조해 바로잡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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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지사토(神田千里), 『잇코잇키와 이시야마 합전(一向一揆と石山合戦)』(吉川弘文館, 2007) pp.156–157. 구노 마사시(久野雅司), 「오다 노부나가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군사적 관계에 대하여(織田信長と足利義昭の軍事的関係について)」 『하쿠산 시가쿠(白山史学)』 53호(2017). 마지막 문장(신앙 전쟁으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은 필자의 판단이다. 두 주장 모두 일본어 위키백과 「노다·후쿠시마 전투(野田・福島の戦い (1570年))」 각주를 통해 확인했고 원저는 열람하지 못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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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뱅크 「이시야마 혼간지 잇키(石山本願寺一揆)」의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 항목(신교 노리카즈 집필, https://kotobank.jp/word/石山本願寺一揆-1145739), 「이시야마 전쟁(石山戦争)」의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항목(긴류 시즈카 집필, https://kotobank.jp/word/石山戦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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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위키백과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 1572년의 알선 의뢰, 1576년 재개의 배경, 1578년의 강화 거절은 이 항목이 인용한 간다 지사토(2007)·아마노 다다유키(2016) 등을 통한 재인용이다. 강화 회차의 차이는 군마현립문서관 해설(각주 15)과 대조했다.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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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8 1575년 10월 21일(위키문헌 전사본). 활자본의 ‘小玉檻’은 화가 옥간(玉澗)의 오식으로 보인다. 노부나가 슈인조(朱印状, 마에바시시 야기가 문서)는 군마현립문서관 인터넷 강좌 해설(https://www.pref.gunma.jp/uploaded/attachment/610081.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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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뱅크 「켄뇨(顕如)」의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항목(기타니시 히로무 집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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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7 1574년 나가시마(위키문헌 전사본,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활자본 대조). 오다 노부오키의 자결과 1571·1573년 공격은 일본어 위키백과 「나가시마 잇코잇키(長島一向一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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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지사토(神田千里), 「『에츠슈 군키』로 보는 에치젠 잇코잇키(『越州軍記』にみる越前一向一揆)」 『도요대학 문학부 기요 사학과편(東洋大学文学部紀要 史学科篇)』 44호(2019) pp.45–73(https://toyo.repo.nii.ac.jp/records/11182). 『에츠슈 군키』 인용문과 1575년 8월 22일 켄뇨 서장(『사이넨지 문서(西念寺文書)』)은 이 논문을 통한 재인용. 1574년 6월 29일 시모츠마 마사히데 서장(『코쿄지 문서(興敬寺文書)』)도 이 논문을 통한 재인용. 1574년 1월 잇키 봉기와 4월 아사쿠라 카게아키라 토벌 시기는 일본어 위키백과 「에치젠 잇코잇키(越前一向一揆)」.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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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8 1575년 에치젠(위키문헌 전사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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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쇼보 『켄뇨(顕如)』 소개문, 그림책 사이트 재수록본(https://www.ehonnavi.net/ehon00.asp?no=145664). 원서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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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13 1580년 11월 17일. 도리고에성 함락과 가가 잇키의 경과는 일본어 위키백과 「가가 잇코잇키(加賀一向一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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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코키(信長公記)』 권13 「오사카 다이산 오우케 세이시노 코토(大坂退散御請誓紙之事)」「혼몬제키 오사카 다이슈츠노 코토(本門跡大坂退出之事)」「오사카 다이산노 코토(大坂退散之事)」(위키문헌 전사본). 칙사 파견일과 3월 17일 키쇼몬 조건은 『혼간지시(本願寺史)』 수록본을 일본어 위키백과 「이시야마 합전(石山合戦)」이 전재한 것을, 『다몬인 닛키(多聞院日記)』의 방화 소문은 같은 항목이 인용한 간다 지사토(2007)를 통해 확인했다.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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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뇨 서장(1580년 4월 15일, 오미 북군 문도 앞), 와카야마현립박물관 관장품 565 해설과 석문(https://hakubutu.wakayama.jp/information/顕如書状写・教如書状写(館蔵品565)/). 비슷한 문언의 엣추·노토(4월 15일)·사카이(4월 23일) 앞 서장이 있다는 것도 같은 해설에 근거한다.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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쿄뇨 서장(1580년 4월 3일, 오미 북3군 앞)은 와카야마현립박물관 같은 해설의 석문. 9월 28일 서장(아키 붓고지 앞)은 『사기노모리 큐지키(鷺森旧事記)』 위키문헌 전사본(https://ja.wikisource.org/wiki/鷺森旧事記).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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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뱅크 「쿄뇨(教如)」의 『일본대백과전서(日本大百科全書)』 항목(오쿠와 히토시 집필, https://kotobank.jp/word/教如). 부자밀계설과 그 반론, 사이카 문도 협력설은 일본어 위키백과 「쿄뇨(教如)」가 인용한 오쿠와 히토시 『쿄뇨: 히가시혼간지로의 길(教如 東本願寺への道)』(2013) pp.31–35, 간다 지사토 『켄뇨(顕如)』(2020) pp.190–194·216을 통한 재인용.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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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노모리 큐지키(鷺森旧事記)』(위키문헌 전사본). 시모츠마 라이렌의 6월 20일 서장, 칙지의 문언, 쿄뇨의 6월 27일 서약문은 모두 이 책의 전사이며 원본은 확인하지 못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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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쇼지 사화(興正寺史話)」 150·151(https://www.koshoji.or.jp/shiwa_196.html, https://www.koshoji.or.jp/shiwa_197.html). 이 사화는 켄뇨의 사인을 뇌졸중으로 적지만 근거 사료를 밝히지 않아 본문에서는 쓰지 않았다.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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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잔 고쇼지 「고쇼지 사화(興正寺史話)」 139–142(https://www.koshoji.or.jp/shiwa_185.html, https://www.koshoji.or.jp/shiwa_186.html, https://www.koshoji.or.jp/shiwa_187.html, https://www.koshoji.or.jp/shiwa_188.html). 『우노 몬도 닛키(宇野主水日記)』와 『켄뇨 쇼닌 분안(顕如上人文案)』 인용은 이 사화를 통한 재인용. 사기노모리 유적의 해자는 와카야마시 자료(https://www.city.wakayama.wakayama.jp/_res/projects/default_project/_page_/001/025/184/20190820-1-2.pdf)와 혼간지 사기노모리 별원 공식 사이트(https://saginomori.or.jp/rekishi/). 프로이스의 기록은 『완역 프로이스 일본사(完訳フロイス日本史)』 5권 제4장을 일본어 위키백과 「켄뇨(顕如)」가 인용한 것을 통해 확인했다. ↩ ↩2 ↩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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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쇼지 사화(興正寺史話)」 146(https://www.koshoji.or.jp/shiwa_192.html). 이 사화는 가지로 도시오(鍛代敏雄)의 「셋츠 나카지마 혼간지 지나이마치 고(摂津中島本願寺寺内町考)」(1987)에 근거한다. 『토키츠네쿄키(言経卿記)』 내용과 키쇼몬 문언은 이 사화를 통한 재인용. 처형 인원은 60여 명과 63명 두 설이 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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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쇼지 사화(興正寺史話)」 148·149(https://www.koshoji.or.jp/shiwa_194.html, https://www.koshoji.or.jp/shiwa_195.html). 교토시매장문화재연구소 현지설명회 자료 「니시혼간지 경내의 매장문화재 발굴조사(西本願寺境内の埋蔵文化財発掘調査)」(1995, https://www.kyoto-arc.or.jp/News/gensetsu/honganji.pdf), 「리플릿 교토(リーフレット京都)」 No.90(https://www.kyoto-arc.or.jp/news/leaflet/090.pdf). 기증 날짜는 윤정월 5일설과 1월 5일설이 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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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쇼지 사화(興正寺史話)」 152·153(https://www.koshoji.or.jp/shiwa_198.html, https://www.koshoji.or.jp/shiwa_199.html). 가와바타 야스유키(川端泰幸), 「근세 혼간지 정적론의 구조(近世本願寺正嫡論の構造)」 『신슈 종합연구소 연구기요(真宗総合研究所研究紀要)』 39호(https://otani.repo.nii.ac.jp/record/11252/files/39_01.川端.pdf). 우에바 아키오(上場顕雄), 「혼간지 켄뇨 ‘유즈리조’와 필적·화압(本願寺顕如「譲状」と筆跡・花押―疑文書考―)」 『도호대학 불교문화연구소 기요(同朋大学佛教文化研究所紀要)』 37호(2017, https://doho.repo.nii.ac.jp/records/335). 긴류 시즈카(金龍静)의 「켄뇨 유즈리조 고(顕如譲状考)」(2017)는 가와바타 논문을 통해 확인했다. 11개조의 요지와 간다 지사토의 견해는 일본어 위키백과 「쿄뇨(教如)」「준뇨(准如)」를 통한 재인용. ↩ ↩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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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쇼지 사화(興正寺史話)」 161(https://www.koshoji.or.jp/shiwa_207.html). 1602년 기증은 교토시매장문화재연구소 자료(각주 30)의 「히가시혼간지 계도(東本願寺系図)」 근거 연표. 『우노 신조 오보에가키(宇野新蔵覚書)』와 『슈코 잣펜(集古雑編)』의 혼다 마사노부 진언 장면은 일본어 위키백과 「쿄뇨(教如)」의 요지를 통해서만 확인했다. 『우노 신조 오보에가키』는 『속 신슈 대계(続真宗大系)』 제16권(1939)에 수록돼 있고 『오사카부립도서관 증가 화한도서 목록(大阪府立図書館増加和漢図書目録)』 제30책(1941)은 에도 초기 성립으로 분류하나, 정확한 성립 연도와 본문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1600년 7월 쿄뇨의 오야마 방문도 일본어 위키백과 「쿄뇨(教如)」를 통해 확인했다. 이 항목은 우에바 아키오(2005), 오쿠와 히토시(大桑斉, 2013), 도호대학 불교문화연구소(同朋大学仏教文化研究所, 2013)를 근거로 들며, 원 문헌은 직접 열람하지 못했다. ↩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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